소설리스트

13화 (13/75)

13.

전날 밤 나의 문자 메세지에 답장이 없었던 지윤은 다음날 회사에서 밝은 웃음과 함께 내게 자판기 커피를 뽑아 주는 걸로 화해를 청했다.

나 역시 지윤에게 밝게 웃으면서 가벼운 농담을 해서 그녀를 더 웃게 만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 날짜가 다가왔고 첫사랑 그녀와 몇 번의 만남을 더 가졌다.

이젠 제법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가벼운 안부인사와 농담을 건넬 수 있었고 수화기로 들려오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웃는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서로간의 지나온 이야기들을 나누었지만, 그녀는 역시나 나에게 아주 한정된 이야기만을 들려주었고 그런 이야기들은 이미 동철과 지윤을 통해 알았던 것이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내가 했고, 나는 그들 못지않게 불행했던 나의 지나간 과거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그녀가 나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랄까, 나를 좀 더 가깝고 친근하게 대해주길 기대하면서 최대한으로 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나의 바램대로 되어가는 듯 했다.

동철 외에 자신의 처지를 알고 이해해주는 상대가 한 명 더 생겼다는 기쁨, 동철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심정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것 같은 그런 존재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다만 아직도 어렵고 불편한, 딸 지윤의 남편이라는 사실과, 그녀의 나이에 맞지 않는 사위라는 존재에 대해 약간은 거리를 두는 것이 느껴졌다.

눈물을 글썽이며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모습, 식당에서 이것저것 맛 있어 보이는 음식을 내 앞으로 조용히 옮겨 놓아주던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도 난 자극을 받았다.

그런 그녀에 대한 몹쓸 상상은 그녀 앞에서나 그녀와 헤어진 후에 무던히도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그녀와의 재회 두 달후 지윤과 난 결혼식을 치루었다.

내 쪽의 부모님자리는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가 차지했고 지윤의 부모님 자리는 그녀 혼자 지켰다.

푸른색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녀를 보면서 난 순간이나마 지윤과의 결혼을 다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사위가 된다는 당연한 사실이 기쁘기보단 조금은 억울하단 생각을 했다.

우리 쪽 친지들이 너무도 젊고 아름다운 그녀를 보며 수근대는 것 같았고, 그런 그녀는 그런 사실을 안다는 듯, 그런 자리를 불편해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정신없는 결혼식이 끝났고 신혼여행 내내 한복을 곱게 입은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지윤과 틀에 밖힌 섹스를 나눌 때도 머릿속으로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렸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때 이른 사정을 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그날..

또 다른 시련이 내게 다가왔다...

지윤의 신경질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린 지윤의 친정,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그녀와 동철은 우리를 위해 온갖 음식을 정성들여 준비해두었고 그렇게 우리 넷의 어색한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집에 들어올 때부터 인상이 굳어져버린 지윤의 눈치를 보던 것도 잠시, 나는 그녀의 눈부신 모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리가 자리다 보니까 나도 좀 이렇게 입어야할 거 같아서,...나도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결혼식에서 입었던 한복을 차려 입은 그녀를 보고 아름다우시다며 너스레를 떨어대는 나의 말에 장모님이 얼버무리신다.

동철과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아내 지윤은 진작부터 얼른 가자는 눈치를 주며 인상을 써댔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며 소주잔을 들이켰다.

동철도 대학생활에서 술이 많이 늘었는지 나에게 뒤지지 않을 술 실력을 자랑하듯 연신 나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이제 그만 좀 하고 가자 나 피곤해 죽겠단 말야..??

참고 있던 지윤이 소리치며 일어서고 순간 분위기가 냉랭해진다.

장모는 음식을 준비하던 것을 멈추고 술상옆으로 다가와 어쩔 줄 몰라한다.

??누나...왜이래...정말..오늘 같은 날 매형이랑 술한잔 하고싶은데...좀 참아라..새색시가 왜이래?? 하하...??

동철의 한마디에 지윤이 아무 말 못하며 자리에 앉는다.

??나 피곤해서 그래..동철아...다음에 하면 안되???

??응..안되...오늘 매형이랑 우리집에서 자고가..안그러면 나 정말 화낸다..??

동철의 몇 마디에 지윤은 어쩔수없다는 듯 쇼파로 자리를 잡더니 TV를 켰고 동철이 다시 술잔을 건넨다.

그렇게 우리의 술자리가 끝모르게 이어지자, 어느새 지윤도 내곁에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졌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이어졌고, 지윤도 술이 과했는지 얼굴이 발개지며 혀가 꼬여갔다.

그렇게 그날의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지윤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나를 잡아당긴다..

??오빠 얼른 가자...나 이집에서 더 이상 못 있겠단 말야..??

갑작스런 지윤의 행동에 어쩔줄 몰라하며 동철과 장모의 눈치를 살폈다..

??지윤아...시간도 늦었구 김서방이나 너나 술에 취한 거 같으니까..자고가면 안되겠니? 엄마가 너희들 자고 갈 방에 이불도..깔아놨어...응? 그러니까..??

??아줌마!!! 아줌마가 먼데 내 엄마야? 끅...??

술에 취한 지윤이 소리쳤다..

??이런 더러운 집안에 더 이상..꺽....있기 싫단 말이야~~??

??누나!!! 왜이래?... 그만해....그만하란 말야....매형도 있는데..그만 좀 해...??

동철이 지윤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다.

??왜?? 내가 못할 말 했어????

지윤이 또 다시 소리 쳤고, 잠시 화를 참아낸 동철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알았어...그럼 가라...매형 죄송하지만 누나 잘 챙겨서 가세요..??

차가워진 목소리로 동철이 말했다..

얼쩔 줄 몰라 당황하며 서있던 난 그녀를 보았고 그녀 역시 어쩔줄 몰라 오누이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왜?....우리 보내고 또 저 아줌마랑 뒹굴려고??...끅....더러워....진짜....??

술에 취한 나는 방금 지윤이 내뱉은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뭘 잘 못 들은게 아닐까 하며 얼어붙어있는 그녀와 동철, 그리고 몸을 휘청거리며 악을 써대곤 씩씩거리고 있는 지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곧이어 그녀가 얼굴을 감싸며 뛰쳐 나가는게 보였다.

동철은 뛰어나가는 장모를 보며 잠시 머뭇거린 후 지윤의 어깨를 잡아 세차게 흔들어대며 소리쳤다.

??야!!! 뭐하는 짓이야...???

그렇게 오누이가 실갱이를 하는 모습을 뒤로 하고 나 역시 급하게 겉옷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술이 깨며 머리가 아파왔다.

방금 전에 들었던 지윤의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도 혼란스러웠고, 갑자기 뛰쳐나간 그녀가 걱정되었다.

그렇게 아파트를 빠져나온 나는 무작정 밤길을 헤매며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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