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75)

9.

그녀와의 약속 시간에 맞추기 위해선 조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약속시간 몇 시간 전에야 알 수 있었다.

그녀와 어떤 이야기를 해야할 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무엇보다 그녀와의 인연에 대해서 말을 해야할 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느라 그런 것을 떠올릴 경황이 없었던 것이다.

몸이 안 좋아 조퇴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지윤에게 어색한 변명을 남겨둔 채 급하게 회사를 빠져나왔다.

처남 동철에게 장모님과 만난다는 사실을 누나에겐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단 말을 듣고 지윤과 장모와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모처럼 만의 가족끼리의 여행.

지윤의 아버지는 주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밤에 합류하기로 했고,

장모와 두 오누이 셋의 어색한 여행을 시작했다.

그녀의 예감대로 차안에서 지윤과의 신경전이 시작되었고, 목적지에 도착해선 급기야 그녀는 오누이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동철과 지윤이 티격태격하는 틈에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고 남편은 그녀의 목소리가 젖어있음을 느끼곤 마음이 급해지고 말았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가족들에게로 향하는 그의 마음은 조급해질 대로 조급해져있었다.

차안에서 지윤의 전화에 시달리고 낮에 들은 혜경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그는 그 답지않게 거칠게 가속기를 밟았다.

그건 이미 예고된 사고였을지 모른다.

중앙 분리대에 부딪친 차는 갓길을 넘어 수 미터 바위 아래로 곤두박질 쳤고,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차안에는 이미 절명한 그녀의 남편, 오누이의 아버지가 처참한 모습으로 구겨져 있었다.

연락이 두절된 그의 소식을 자정이 넘은 시간에 경찰로부터 들었다.

온몸이 떨려와 운전을 할 수가 없었던 그녀는 급하게 택시를 타고 삼십분쯤을 달려가서 그의 시신을 확인했다.

그렇게 그와의 짧았던 인연 조차 끝이 나버렸다.

그녀가 사랑했던 두 번째의 남자 역시 그렇게 그녀 곁을 떠나버렸다.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죽을 때까지 친엄마로서의 의무를 다 해줄거라고 다짐했던 어리고여린 오누이였다.

그녀와 지윤은 남편과 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죄책감에 오랜 시간 시달렸고, 그만큼 더 지윤은 새엄마를 증오했고, 그녀 역시 지윤이 미워졌으나 그런 마음을 애써 지우려고 더욱 더 처절하게 지윤에게 정성을 다 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위로해주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하나.

그의 아들 동철이었다.

그녀와의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전에 동철에게 들었던, 평소에 잘 입에도 안댔던 처남 동철이 울면서 털어놓았던 그녀와 오누이에 대한 회상을 해본다.

그런 그녀가 너무 애처럽고 안타까워 조금 후 만나면 와락 껴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내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을 그녀도 알까?

동철이 매형에게 다 이야기 해줬다고 했을까?

그녀가 먼저 그런 아픔을 내게 이야기 해줄까?

아무래도 내가 먼저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그냥 평범한 장모 사위의 관계에서 이루어질 그런 일상적이고 가벼운 대화가 오고갈 것이다.

어느덧 차는 약속장소가 있는 건물의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주차를 마친 후 거울에 비친 얼굴을 확인한 후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한다.

십분 쯤의 여유가 있다.

화장실에 들어가 차가운 물로 얼굴을 닦아낸 후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한쪽 구석에 위치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먼저 와서 마음을 좀 가다듬으려 했는데 당황스럽다.

??선...아....음...죄송합니다...??

그녀에게로 급한 걸음을 옮기며 그만 선생님이라고 내뱉을 뻔했다.

??늦게 와서 죄...죄송합니다...먼..먼저 와계셨네요.??

오늘도 말을 더듬는다..그녀에게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이상하게 주눅이 든다.

하긴..십년 넘는 시간동안 그녀를 범해온 죄가 있지만...

??늦긴요 뭘..제가 시간이 좀 남아서 먼저 오게 됐네요.. 어서 앉으세요..??

??예...바쁘신데...??

??바쁘긴요...제가 먼저 만나자고 불러냈는걸요..호호..??

??아..예....??

무슨 말을 해야할지 그동안 계획하며 메모해두었던 다이어리의 하얀 책장이 눈앞에 어른거렸으나, 어떤 글을 써두었었는지 도통 생각이 나질 않는다.

??시간이 좀 어중간하네요..점심시간도 아니구 저녁을 먹기엔 좀 이르구...호호..??

말을 마칠 때마다 가볍게 웃음 지어주는 그녀가 정말 아름다워 보인다..

??그날도 경황없이 헤어졌는데, 오늘도 또 이러네요..제 마음대로 약속시간을 잡고 보니까 이런 시간에 약속을 하게됬나봐요..제가 이래요..제대로 식사 한번 대접해 드릴려고 했는데..이런 시간에 약속이나 잡고...호호..??

??아..아닙니다..전 언제든 괜찮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외모만큼이나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뭐 드시겠어요...일단 차라도 한 잔 하셔야죠..??

??아...예...아무거나..전...음...장모님은요?...??

??예..전 그냥 녹차 한잔 주문했어요...김 서...경수씨는...요???

경수씨....그녀가 내게 김서방이란 호칭대신 경수씨란 호칭을 썼다.

그녀 역시 아직은 좀 어색한가보다.

??그냥 김서방이라고 해주세요..말씀도 낮추시구요..사위될 사람이잖아요...하하??

처음으로 말을 더듬지 않고 이야기를 끝낸 내가 너무도 대견하단 생각을 하며 한껏 웃었다.

??그래요..아직 저도 좀 어색하구 좀 그러네요...차차 나아지겠지...??

그렇게 그녀와 나의 또 다른 재회가 이루어졌다.

십 여년을 기다린 후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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