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75)

5.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스위치를 켜자 깔끔하게 정리된 집안이 낯설다.

결혼식까진 두 달이 조금 못 남았지만 신혼 살림을 할 아파트는 벌써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다.

얼마 전까지 서너평 남짓의 조그만 원룸에서 5년 가까이 살아서 그런지 커다란 집이 왠지 더 불편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윤과 같이 살자고 했지만 지윤은 결혼 전까지는 이집에서 자고 싶지 않다고 한다.

혼전 순결 같은 걸 지키고자 하는 건 절대 아니다.

지윤과의 섹스는 그녀와 사귀기로 한 다음 한 달도 못되어서 치루었으니 그녀가 혼전순결이니 뭐니 그런걸 따지는 스타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나 이전에 다른 남자와의 경험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나와의 처음 섹스에서도 나를 압도하며 섹스를 주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굳이 결혼식을 치룬 후에나 이곳에 합류해서 살자고 나를 설득했고 나 역시 결혼 전까지는 좀 자유롭고 싶었다.

새 아파트에서 나는 묘한 냄새가 그리 싫지는 않았다.

들어온 후 곧 샤워를 하곤 집안에 모든 불을 끄고 쇼파에 누웠다.

오늘 밤은 어차피 잠을 이루긴 힘들겠지만 그래서 더 일찍 잠을 청해본다.

또 다시 그녀의 입술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상하게 그녀의 가슴이나 다리 또는 다른 부위는 기억도 나지 않고 상상해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오물거리는 입술 하나만으로도 그동안 날 자극하기가 충분했다.

오늘도 역시 그녀의 입술만을 바라봤고 지금도 그녀의 입술만이 눈에 선하다.

비록 친 딸은 아니지만 딸아이의 앞에서 죄인이라도 된 양 어물거리고 말을 더듬고 하던 그녀의 모습이 안스러웠고 그만큼 지윤이 미웠다.

몇 년전 회사에서 같은 팀으로 근무할 때 팀 전체가 동남아로 여행을 간 자리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던 중 그동안 서로에게 어느 정도의 호감을 느껴왔었던 그녀와 나는 새벽에 몰래 해변으로 나와서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술기운이 많이 오른 그녀나 나나 서로의 상처랄까. 쉽게 꺼낼 수 없었던 그런 이야기를 공유했다.

어려서 아버지 어머니를 잃고 친척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자란 나나 어려서 엄마를 잃고 새 엄마와 살던 중 목숨처럼 그녀를 사랑해주던 아버지마저 교통 사고로 돌아가신 그녀.

우리 둘은 그간의 아픈 기억을 서로에게 털어놓으면서 부둥켜 안고 울었다.

아침에 술이 깨서는 서로 계면쩍은 웃음을 주고 받고나서 귀국한 후 우린 급속히 가까워 졌고 연인이 되었다.

그녀는 새 엄마 이야기만 꺼낼라치면 정색을 하고 다른 이야기나 하자며 거리를 두었다.

하나뿐인 동생 동철을 끔찍이 아끼고 좀 과하다싶을 정도로 걱정하고 챙겼다.

동생 동철은 쾌활한 성격과 시원시원한 말로 매형인 나보다 더 대화를 압도했다.

학원이 끝날 시간에 몇 번 찾아가서 동철과의 술자리를 가지며, 물론 동철은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고 나와의 대화만을 즐겼다.

누나와는 다르게 새엄마를 끔찍이 아끼며 생각해주는 것이 누나보다 더 어른스럽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윤에게서 듣지 못했던 새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됐다..

새 엄마가 미인이란 말과 알고 보면 불쌍한 여인이란 소리들..

그러면서 지갑 속에 지니고 다니던 새엄마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 사진을 처음 봤을 때 난 내 눈을 의심했다.

사진 속에서 동철과 어깨 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동철과 지윤의 어머니라고 하기엔 너무도 젊어 보이는 여인..

활짝 웃음 짓고 있는 사진 속 여인의 입술...

그건 분명 십여년동안 내머릿 속에 자리 잡고 있던 그 입술이었다.

1년전에 찍은 사진이라며 사진을 보여주는 동철 앞에서 순간 말문이 막힌 나는 그 후로 무슨 이야기를 한지 기억도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사진속의 여인, 지윤,동철의 새엄마, 잊지 못할 나의 첫사랑 수학선생님...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수많은 밤을 잠 못 들게 하고 지금도 지윤과 섹스를 하면서 사정 직후에 떠오르는 여인.

그 여인이 장차 내 장모님이라니..

그날 밤 많은 술을 마셨음에도 집에 들어와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사진 속에서 웃고있는 그 여인과, 십여년전 내 옆자리 짝궁에게 오물거리던 그 입술을 생각하면서 그날 밤 역시 용두질을 했다.

그날 이후로 난 내 눈으로 직접 그녀를 보고 싶어졌다.

지윤의 아버지와 결혼을 하며 급하게 학교를 퇴직하고 살림을 하며 지윤과 동철을 위해 가정에 충실했던 그녀는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막대한 보험금과 신랑이 남긴 유산이 있음에도 집 근처의 학원에 취직을 해서 나름대로의 실력을 인정받는 수학강사로 활동중이었다.

동철에게 그녀가 근무하는 학원을 물어 보기위해 온갖 다른 말을 돌리고 돌렸다.

혹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하는 나 혼자만의 자격지심을 가지고 어렵게 물어본 말에 동철은 너무나 쉽게 그녀가 근무하는 곳을 가르쳐주었다. 근무시간이며 위치, 건물명..

그렇게 동철이 알려준 사실을 머릿속에 되내이며 새겨 넣었다.

그로부터 몇 일 후에 난 떨리는 가슴으로 그녀가 있는 학원가로 갔다.

동철이 알려준 강의실로 가서 창문 밖에서 그녀를 봤다.

십 여년 전 보단 조금은 살이 찐 듯한, 그래도 여전히 눈이 부시게 빛나는 여인이 되어있었다.

그때도 십 여년 전 처럼 그녀의 입술은 작고 도톰하며 너무도 자극적으로 오물거렸다.

무엇엔가 홀린 듯 그곳에 서있던 나는 강의가 끝나는 종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조금 후에 내 옆을 스치듯이 지나가는 그녀를 보았다.

고개를 돌려 그녀가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보면서 내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

그렇게 그녀를 보았다. 12년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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