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고속도로를 얼마나 내달렸을까…
활짝 열려진 moon roof를 통해 밀려드는 바람에 정신없이 흩어지는 머리결.
조용히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채…
아까의 하균씨 키스와 나혼자 벌린 생쑈에 조금 어색해진 난,
빠르게 스쳐가는 풍경들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하긴…
그래!! 이 바람둥이한테는 아까 그런 입박치기 따윈 키스도 아니겠지.
근데 난 왜그리 두근거린거야, 바보같이.
하아… 그나저나 머리 아퍼 죽겠네.
자꾸만 복잡해지는 머리속.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모는 하균씨의 모습에
왠지 나혼자 걱정하고.. 또 오바하는것 같아 그만 잊기로 했다.
전남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산으로 향하던 하균씨의 차.
어느순간부터 내 시야로…
좁은 2차선 도로가 들어오더니 도로 양편에 심어놓은 벚꽃나무가
짙은 녹색의 숲 터널을 만들기 시작했다.
벚꽃나무사이로 쏟아져들어오는 햇살.
상큼한 나무공기가 내코를 스쳐가며…
마치 보석이 쏟아져내리듯 숲 터널을 내리치는 빛이 차 주위를 감싸기 시작한다.
"봄에는 저 벚꽃나무들이 꽃을 피운채 꽃비를 뿌려.
정말 아름답지."
신기한듯 밖을 내려다보며 환히 미소짓는 내게…
하균씨가 작은 설명을 덧붙이며 차 속도를 줄이기 시작한다.
"와아~ 정말 보석같아…"
열려진 moon roof를 통해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숲터널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나.
하균씨의 차가 서서히 숲터널을 지나 멈춘곳은…
천봉산(天鳳山) 아래에 위치한 작은 절 앞 이었다.
"내려."
"여긴?"
"대원사라고 매년 이맘때 이곳 연못에 수십가지의 연꽃이 피여나."
"연꽃이요?"
"응. 연꽃 진짜로 본적있어?"
[도리- 도리-]
내가 고갤 내젖자 피식- 웃는 하균씨.
"정말 이뻐. 내려봐. 내가 보여줄테니깐."
하균씨의 말에 차에서 조심히 내리자, 우거진 숲속.
돌계단으로 이어진 제법 큰절.
사람의 인기척이라곤 전혀 없는 그곳으로…
카메라를 들쳐매고 앞서 나서는 하균씨를 따라 돌계단을 지나 절안으로 들어가는 나였다.
옅은 향내음과 작게 허공으로 흩어지는 목탁소리.
낯설지만 정겨운 절 풍경에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난,
절 뒷편으로 향하는 하균씨를 따라 ...
뒷마당으로 향하는 작은 나무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와아… "
문을 열자말자…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것 같은,
전혀 낯설은 풍경이 날 감싸자 나도모르게 낮은 탄성이 입술을 비집고 흘렀다.
10여개정도의 돌계단을 내려가면 제법 큰 연못위,
작게 놓여진 돌 다리.
연못위에 활짝 피여난 가지각색의 연꽃들.
그리고 주위의 운치(韻致)를 더하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소나무.
"이쁘지?"
"네. 와아… 어떻게 이런곳을 알았어요?"
"사진찍으러 자주 돌아다니니깐.
그중에서도 여긴 머리 복잡할때마다 찾아오는 내 아지트격이야."
"네."
"연꽃말고도 나도 듣도 보지도 못한 수십가지의 수생식물들이 있다고,
스님께서 그러시더라구. 천천히 둘러봐.
난 밖에서 사진 몇장 찍고 있을테니깐."
"네."
하균씨가 사진을 찍으러 연못밖으로 나가자, 주위를 훓어보던 난.
조심히 돌다리 위로 앉았다.
따뜻하게 스쳐가는 바람결.
잔잔히 흩어지는 나뭇가지 소리.
연못위로 활짝 피여난 연꽃들의 모습.
한동안을 그렇게 멍하니 주위 환경에 취해있다…
무심코 가방에서 핸폰을 꺼내어 들었다.
이하루!
너 내 걱정은 하고 있는거니?!
아님 나 같은건 까마아득하게 잊고 아직까지 크리스틴하고 같이 있는거냐!!
우씨… 나 지금 하균씨랑 같이 있다고 핸폰해서 소리쳐볼까?
키스도 당했다고 말해버릴까… 아니 키스 했다고!!
하루녀석이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제길.....
아니 솔직히 하루한테 아무 변명도 듣지못하고 나만 속상해하는게 열받았다.
"휴우… "
조심스레 핸폰을 켰다.
아무 메세지도 남겨져있지 않으면…
`이하루, 정말 끝이다!!` 라고 혼자 다짐하며…
[삐리리리~]
작은 파음소리와 함께 핸폰이 켜진다.
액정에 환한 불이 들어오고 자그마한 박스가 켜지며…
내 눈으로 들어오는 메세지 내용.
[20개의 음성메세지가 들어와있습니다]
미세하게 떨리는 내 손이 천천히 메세지의 내용을 확인하러
핸폰을 내 귀로 가져다 대자,
.
.
.
* 누나! 방금 크리스틴한테 얘기들었는데…
그게말야… 에이, 제길!! 얼굴을 봐야 얘길하지.
제길! 대체 어디있는거야!! 정현진!!!
* 우씨!! 정현진!! 보고싶다!!!
* 제길!!! 야, 정현진!! 너 일부러 핸폰 꺼놨지!!
외박한거 용서해줄테니깐....오늘 저녁 7시.........
.
.
.
[탁!!!]
20개의 하루의 메세지를 확인하며....
순식간에 밀려드는 안도감에 바보같이 눈물을 글썽이는 찰나,
누군가가 갑자기 내 핸폰을 급하게 내손에서 낚아채버렸다.
갑작스런 일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갤 돌리자,
내 핸폰을 움켜쥐곤 날 무섭게 응시하는 민하균.
"애송이한테 연락왔나?"
"핸드폰 줘요. 아니 나 서울 가야겠어요. 데려다줘요."
".........."
한동안 아무말도 없이 날 응시하던 하균씨.
불쑥- 내앞으로 내게서 뺏은 핸폰을 내밀자,
아무생각없이 핸폰을 잡으러 내손을 내민,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하균씨가 내팔을 낚아채선…
자신의 품안으로 날 확 끌어당겼버렸다.
"제길! 이래서 사랑따윈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질퍽 거리는게 너무 짜증나고 싫어서… "
날 와락 끌어안은채 읊조리는 하균씨의 목소리.
하균씨를 밀치려고 몸을 빼려는 순간…
하균씨가 날 더 꽉 끌어안아버린다.
그리고.........
"좋아해. 정현진. 너 좋아해. 좋아한다구!! 제길!!!!"
자신에게 화가난듯한 하균씨의 목소리가 귓가로 번져나갔다.
그의 목소리에 난 그만 온몸이 얼어붙은것처럼 움직일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알았다.
내 몸이 먼저 깨닫고 있었다는걸.
하균씨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내몸이 먼저 알아챘다는걸.
하균씨의 행동에 두근거렸던건…
설레임이 아니라 바로 내 몸이 나에게 가르쳐주려던 작은 경고음이었다는걸.
바보같은 난 그제서야 깨달아버렸다.
"...난....."
[삐-삐-삐-]
하균씨에게 힙겹게 입을 때려던 순간…
내 핸폰에서 문자 메세지가 왔음을 알리는 경음이 울리자,
난 하균씨를 밀친채 서둘러 핸폰을 열었다.
[누나! 오늘 저녁 7시, 마로니에 공원으로 와.
모든거 다 설명해줄께. 꼭 와야해. 꼭!! ]
"나...가야해요. 하루한테.
하루한테 데려다 줘요. 하루한테 가야해요."
울먹이는듯한 목소리…
애절한 눈빛으로 하균씨를 바라보자 하균씨의 눈빛이 흔들린다.
"하아… 제길!!! 제길!!! 제길!!!!
민하균!! 뭐냐!!! 제길!!!"
고개를 푹 숙인채 혼자 소릴질러버리는 하균씨.
"서동요 이야기라고 들어봤어?"
"??"
뜬금없이 시작하는 하균씨의 말소리에 의아한듯 그를 바라보지만,
하균씨는 계속 고갤 숙인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옛날 백제의 첩자가 신라에 잠입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신라공주에게 사랑에 빠져버렸어.
하지만 신분의 차이로 고민하던 백제의 첩자는…
그녈 갖기위해 서동요란 노래를 만들어 전국에 퍼트렸지.
신라공주가 서동이란 남자와 동침을 했다는 전혀 근거없는 노래.
근데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알어?"
하균씨가 고갤 서서히 들며 내 눈을 응시한다.
"신라의 왕가에서 그 헛소문을 믿곤 그 공주를 신라밖으로 내쳐버리고 말았고,
결국 그 첩자는 그 공주를 갖고 말았다."
"......."
"나도 그래."
"......."
"니가 날 밀쳐내면... 밀쳐낼수록....
그 백제의 첩자처럼 어떤짓을 해서라도 널 갖고 싶어질거야.
널 강제로 안아버리는 한이 있어도… "
하균씨의 말에 난 아랫입술을 질근 깨문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만 돌아가요, 서울로."
그리고 그를 스치는 순간…
난 바람결에 조용히 스치는 하균씨의 나직한 읊조림을 들을수있었다.
".....나도 무서워..... 정말 그렇게 될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