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난 이 농장에서 일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으로 지각을 해버렸다. 새벽까지 유진이와 뜨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평소처럼 해뜨는 시각에 일어나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아침식사에도 참석을 못 하고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허둥지둥 축사로 달려나갔다. 그런 나를 보며 아저씨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 받을 뿐, 늦은 사실 자체를 탓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소리를 종종 하며 내 허리를 두드렸다.
역시 젊은 사람들은 좋아.
좋구 말구요. 오히려 여태 일찍일찍 일어나던게 신기하지 그려.
난감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날 두고 다들 껄껄 웃어 제낀다. 그렇게 오전 일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아줌마와 유진이가 차린 밥상을 두고 평상에 둘러앉아 모두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밖에서 차소리가 났다. 뒤이어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택배입니다! 혹시 최한석 씨 계십니까?
모두들 날 쳐다보았다. 유진이 역시 날 쳐다 보았다. 다들 놀란 표정이다. 놀라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서울을 떠나올 때 휴대전화를 두고 오기도 하였거니와 다른 누구에게 일절 이 곳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은 까닭이다. 그런 나에게 택배라니, 이건 대체.... 일단 평상에서 내려와 신발을 꿰어 신고 밖으로 나갔다. 노란 색으로 칠해진 국제배송회사의 트럭이 농장 앞에 서 있었다. 마찬가지로 노란색 셔츠를 입은 택배기사가 날 보며 물었다.
최한석 씨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여기 싸인해주세요.
그가 내민 종이를 받아서 읽어보았다. 송장에 적힌 보낸 사람의 이름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보낸 곳의 주소는 다름 아닌 괌이었다. 내용물을 보니 여행용 트렁크라고 되어있었다. 내가 싸인을 마치고 종이를 돌려주자 기사는 트럭에서 무언가 꺼내왔다. DHL이라고 적힌 커다란 종이박스였다.
국제배송인가요?
네. 여기 아래 부분에도 싸인해주시구요.
기사가 시키는 대로 싸인을 더 하고 박스를 인계받았다. 크기에 비해 그리 무겁지 않았다. 그걸 가지고 자리로 돌아오자 다들 궁금해했다. 식사를 대충 마치고 유진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박스를 열자 그 안에서는 눈에 익은 여행용 대형가방이 나타났다. 그걸 본 유진이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이건 엄마 여행가방이잖아요. 이걸 어떻게....
글쎄다. 괌에서 어떤 사람에게 가방을 찾아달라고 부탁한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보낸 거지?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방을 살펴보았다. 가방 손잡이에는 소유자를 표시하는 태그가 붙어있었고 거기에는 이곳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걸 확인한 유진이가 앗 소리를 내었다.
엄마 글씨 맞아요... 근데 엄마가 여길 어떻게....
유진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난 그녀가 자신의 능력에 대해 딸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일단 열어보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옷만 들어있었다. 그걸 살펴보던 유진이가 말했다.
이...이건.... 엄마 옷이 아니에요.
그래. 그렇네....
가방은 유미의 가방이 맞았다. 그렇지만 들어있는 옷은 그녀의 옷이 아니었다. 들어있는 옷은 두 종류였다. 유진이가 입으면 맞을 법한 사이즈의 옷과 남자 옷. 아마도 내 옷이리라.
엄마는 대체... 가방을 착각하고 싼 걸까요?
유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지만 난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어 주저하고 있었다. 유진은 옷을 하나하나 꺼내어 바닥에 개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가방을 비워내자 바닥에는 편지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겉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둘이 같이 읽어보길.
유진과 난 서로 쳐다보았다. 난 어느 정도 짐작이 가지만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유진은 손을 뻗어 그 봉투를 집어들었다. 봉해있지는 않았다. 유진이가 봉투를 벌려 안에 들어있는 종이를 꺼냈다. 유진과 나는 얼굴을 가까이 하고 그걸 읽기 시작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축하해. 두 사람의 뜨거운 밤, 아주 보기 좋았어. 이렇게 말하면 좀 변태같으려나?]
유진이가 낮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정말이지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유미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려오는 것 같았다.
[후후. 그렇게까지 자세히 보진 않았어. 그냥 좀 우리 유진이가 많이 아파하지는 않을까, 그걸 좀 염려했을 뿐이야. 그렇지만 한석이가 잘 해주었으리라 믿어. 음... 유진이에게는 처음 말하게 되는 거겠지만, 사실 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있어. 자세한 이야기는 네 남편될 사람에게 물어봐. 물론 그 녀석도 잘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서 좀 버벅거릴지도 모르겠다만, 내가 글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더 잘 설명해줄거야.]
이게 무슨 소리죠?
그게 말야...
더 이상 감출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진에게 이전에 유미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녀가 말했던 장님과 구덩이의 비유, 희미한 냄새 같다고도 표현되는 그 시야, 그리고 추락 당시 우리가 그 자리를 누구보다 빨리 벗어나 구조대가 오는 방향으로 미리 가 있을 수 있었던 이유까지도. 내 이야기를 들은 유진은 전혀 믿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런 능력을 가진 엄마가 왜 사고로 죽었냐는 거다. 합당한 의문이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의문이었으니.
말도 안 돼요. 그런 능력이 있으면 사고를 피할 수 있었잖아요. 왜 여행을 반대하지 않은 거죠?
나도 그게 이해가 가질 않아서 당시에 물어보았어. 유미는 그렇게 말했어. 오지 않았으니까 미래라고.
설명이 안 돼요.
나도 몰라.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고 너한테 전할 따름이야. 그럼, 한번 생각해봐. 유미 속을 대체 누가 알겠어?
....것두 그렇네요.
유진이는 한숨을 내쉬며 편지로 시선을 옮겼다.
[유진이는 아마 납득 못 하겠지. 굳이 보지 않더라도 네 성격이라면 분명 한석이한테 닥달을 하고 있을 거야. 그렇지만 나조차도 제대로 설명이 안 되는 시야에 대해서 글로 어떻게 더 표현할 방법은 없어. 굳이 내 능력에 대해 증명하고픈 욕심은 없지만 너희가 이 편지를 받아보고 있는 곳에서 이 편지를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되리라 믿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조차도 여기에 있게 될 줄을 몰랐고 누구에게 따로 연락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 우리에게 그녀가 자신의 짐과 편지를 보냈다는 건 그녀가 이곳을 미리 보았다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미래로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건, 나도 처음 해보는 일이야. 그렇기에 이게 어떤 영향을 가져다 줄 지 모르겠어. 남의 미래를 보는 건 굉장히 말도 안 되는 폭력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되도록이면 눈길을 안 주려고 노력하고 있었거든. 그렇지만 내 사랑하는 딸과 그 딸을 지켜줄 남자에 대해서는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어. 그래서 부득이하게 이런 방법을 빌려 미처 못했던 이야기를 하려고 해.]
사랑하는 딸과 그 딸을 지켜줄 남자라... 어깨가 사뭇 무거워짐을 느꼈다.
[우선 유진이가 공부는 계속 했으면 좋겠어. 이건 미래를 보아서가 아니라 그냥 순수한 엄마로서의 욕심이야. 네 재능을 그냥 썩히기는 아까워. 지금 네가 고민하고 있는 길에 대해 발걸음을 늦추지 마. 한석이도 충분히 이해해주고 함께 해줄테니까. 그러니 둘이 앞으로 할 때는 피임을 좀 하고 했으면 싶다. 너무 일찍 아이를 가져도 공부에 방해가 될 거야. 한석이가 좀 자제를 해주면 좋겠지만... 그 녀석은 그게 안 될거야. 우리 딸이 암만 이뻐도 그렇지 너무 시도때도 없이 달려들거라고. 유진이, 넌 조만간 한석이가 아주 귀찮아질지도 몰라. 후후.]
글로 적어놓은 후후가 귀로 들리는 듯 하다. 게다가 이런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적어놓고 둘이서 읽으라고 하다니! 유미가 쓴 글임에 틀림없다는 보증수표와 다를 바 없었다.
[한석이에게는 한가지 부탁을 할게. 서울로 가거든 박 회장을 한번 만나. 그가 너에게 해줄 이야기가 있을 거야. 그리고 그 아가씨 일은 참 안되었어. 그렇지만 자기의 능력 밖의 일이니 너무 슬퍼하지도, 그렇다고 괴로워하지도 않았으면 해.]
아가씨라뇨? 설마.... 전에 이야기하던 그.....
떡정 뭐시기 하는 말이 나오기 전에 난 헛기침을 해서 유진의 말을 막았다. 그러고보니 여행 전 송화와 마지막으로 헤어진 이후 그녀에게서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고 있었다. 방금 유미가 편지에서 언급한 아가씨가 송화가 맞다면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걸 다 하기는 시간이 모자라. 그래서 이 말 하나만 하고 펜을 놓을게. 유진아, 너와 함께 한 시간이 여기까지지만 난 네 삶 전체를 들여다보았어.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 넌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한다고. 본 사람으로서 하는 이야기하는 것이니 의심하지 말고 받아들여. 항상 당당하고 멋진 여성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널 사랑하는 엄마가.
추신 : 한석이는 좀 세게 잡아야 될거야. 안 그러면 도망갈지도 몰라.]
마지막 개그 아닌 개그에 유진은 웃는 대신 울기 시작했다.
엄마.....
유진의 눈물이 편지지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난 그런 유진을 안아주었다. 우리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서로 추스리며 우리의 앞날을 보았다는 이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가 보낸 옷가지 틈에는 약간의 돈도 끼어 있었다. 유진이와 나는 가방에 들어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지난 몇 주간 작업복과 몸빼바지로 연명하던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에 도시적인 외향을 되찾기 시작했다. 반장에게 가서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는 반장에게 유진이가 대답했다.
집에서부터 인정을 받았어요. 저희 두 사람의 사이를요. 방금 온 택배에... 그 이야기가 적혀 있었어요.
묘하게 거짓말이 아닌 그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은 잘 되었다고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그 동안 일한 품삯을 주겠다는 것을 애써 만류했다. 우리가 이곳에서 얻은 건 단순한 농장경험 이상의 소중한 시간이었기에,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염소처럼 애 쑥쑥 낳고 잘 살라는 응원을 뒤로 하고 시내로 나왔다.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를 알아보았다. 배낭을 수화물로 보내놓고 버스에 올라탄다. 두 명씩 앉게 되어있는 좌석열의 끝쪽에 가서 앉았다. 승객이 별로 없는 버스는 한산했고 운전기사가 틀어놓은 흘러간 노래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엄마는, 왜 그런 걸 저한테 이야기 하지 않고 아저씨한테 말했을까요?
창가에 앉아 차창 밖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유진이가 말했다. 터미널 휴게실에서 사온 귤을 까고 있다가 대답했다. 나 역시 많이 고민했던 문제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내가 내렸던 결론에 대해서 말해주기로 했다.
글쎄... 아마도 네게 어떤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아.
영향이요?
응. 넌 말야. 굉장히 기억력이 좋아서 지난 일들을 세세하게 다 기억하고 있다고 했지? 난 처음에는 기억력이 좋다고 부러워했지만... 사실 그건 마냥 좋다고 할 문제가 아니야. 전에도 한번 이야기했지만... 네 그렇게 꼬인 성격의 이면에는 너무 좋아서 탈인 기억력이 자리하고 있어. 심지어 보통 사람이라면 전혀 기억조차 못할 아기 때의 일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했잖아. 사람이 잊어야 할 건 잊고, 또 기억하지 못해야 할 건 못해야 하는 거야. 그게 사람이고... 살아가는 방식인데 그런 너에게 미래의 일까지 이야기 해준다고 생각해봐. 그건 끔찍한 일이 될지도 몰라.
유진은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보고 말했다.
맞아요. 난.... 아직도 눈을 감으면 괌에서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래서... 그래서... 혼자 잠들기가 무서워요.
다 깐 귤을 녀석의 입에 넣어주고 팔을 뻗어 어깨를 끌어안는다.
걱정마, 내가 있잖아.
정말...이죠?
응. 어제도 약속했잖아. 몸가락 걸고.
그러자 유진은 갑자기 고개를 쭉 빼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몸을 확 낮추더니 내 귀를 잡아당기고 속삭였다.
그 떡정 유발 아가씨에게 가지 않을 거죠? 진짜로?
......그냥 연락만 해볼게. 갑자기 연락이 없으니 걱정되잖아.
다른 여자는 걱정하지 마요. 나만 걱정하면 되잖아요.
그렇긴 해도... 어떻게 알던 사람을 그냥 매정하게 내쳐.
이거 걸고 약속한다고 했잖아요.
윽....
녀석의 갑작스러운 공격, 아니...거친 애무가 내게 가해지는 통에 낮은 숨소리를 토해내고 말았다. 유진의 손은 내 바지 사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어루만지는 게 아니라 본격 정확한 포지셔닝을 통한 이머전시 에어리어로의 어택! 뭔 소리냐, 이건 또. 유진이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잊고 있었다. 이 녀석... 암표범이었지.
이거... 어제 나한테 넣고 말했잖아요. 나랑만 있겠다고.
그...그랬지.
다시 한번 약속해요.
뭐라고?
다음 순간, 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만다. 유진이가 지퍼를 내리더니 그 안으로 손을 넣어 팬티 앞섬을 통해 내 물건을 꺼낸 것이다. 난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방 몇 미터 이내로 우리 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여긴 버스 안인데...
유진아!
약속 안 해주면... 이거 콱 깨물 거예요. 정말로요.
콱 깨물기 전에 일단 그 붙잡은 손에 힘을 좀 뺐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는데...... 말 그대로 붙들린 나는 쩔쩔매며 알았다고 약속을 해주었다. 유미의 편지 말미에 적힌 글이 떠올랐다. 아무리 세게 잡으라고 한들 그게 이걸 잡으라는 소리는 아니었을 텐데....
정말이죠? 믿어도 되죠?
나 이 사람, 믿어주세요.
쳇. 그렇게 말한 사람이 제일 못 믿겠던데요.
어줍잖은 정치인 성대모사에 유진이는 더 툴툴거렸다. 말투를 바로 하고 똑바로 말한다.
알았어. 정말... 난 너한테 평생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좋아요. 지켜 보겠어요.
성은이 망극하다고 해야할까.... 유진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물건을 놓아주었다. 나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왜... 계속 꺼내고 있어요. 그걸? 얼른 넣어요.
니가 붙들고 흔드는 통에 빳빳해졌잖아. 안으로 안 들어가.
.....대충 반으로 접어서 넣으면 안 돼요?
이게 무슨 종이조각이니.
난감한 표정의 유진이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한번 싸면... 다시 수그라드는 거 맞죠?
으...응? 아마도....?
유진은 날 향해 눈을 살짝 흘겼다. 방금 전까지 표독스럽기 그지 없던 암표범의 눈매가 이내 요염한 고양이의 눈매로 바뀌었다. 고양이가 내 허벅지 사이로 내려앉는다. 그렇다고 혀까지 고양이의 까칠한 혀는 아니었다. 부드럽기 그지없고 촉촉한 뜨거움이 내 자지를 휘감는다.
흐읍...
한 손은 날 향해 엎드린 유진의 가슴을 어루만지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입을 틀어막는다. 의외의 장소에서 빨리게 되어 맞이한 기이한 흥분은 급속도로 날 고양시켰다. 입을 틀어막지 않으면 비명이라도 나올 것 같다.
추룹-추룹-추룹-추룹-추룹-
크으...유진아....
유진은 입술 뿐만 아니라 손가락으로 만든 링으로 육봉의 중단부와 상단부를 훑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살짝 입을 떼고 말한다.
빨리... 싸줘요... 내 입에...
아아...알았어...
그리고 다시 가해지는 입술과 입안의 흡입력이 날 미치게 만든다. 이 녀석.... 많이 알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제 엄마처럼 타고난 걸까. 그런 의문과 궁금증은 오래 가지 못한다. 유진의 입과 손은 내 자지를 치열하게 괴롭히며 흥분시키고 있었기에... 난 결국 참지 못한다.
나...나와...
그 말을 들은 유진이는 오히려 자지를 끝까지 집어삼키고 쑤욱 빨아내었다. 그 안으로 분출이 이루어진다. 한번, 두번.....세번까지도 녀석은 침착하게 입을 물고 받아내었다.
하아...
고개를 들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정돈하던 유진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꿀떡...했다.
맛...없어.
그걸...먹었어?
몰라요. 거기 귤 빨리 줘봐요.
녀석의 찡그린 얼굴이 참을 수 없을만큼 귀여웠다. 달라는 귤 대신 녀석의 얼굴을 붙들고 깊숙히 키스하고 만다. 어디서 부터 비롯된 것인지 명확히 알고 있는 미끈하고 텁텁한 밤꽃 냄새가 내 혀끝에서도 느껴지지만, 별로 상관없다. 내가 어젯밤 내내 녀석의 애액을 입으로 마시듯, 녀석도 내 쥬스를 가득 마신 셈이니 공평하지 않은가.
하아....몰라요....기분...이상해....
어젯밤의 움직임처럼, 키스하며 나도 모르게 녀석의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속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유진은 붉어진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그리고 붉은 입술을 열어 내게 요구한다.
말해줘요. 사랑한다고.
그래. 유진이, 널 사랑해.
또요. 제가 기억할 수 있도록.
최한석은 진유진을 사랑해.
계속 말해줘요.
녀석이라면, 내가 단 한번 말한 것도 아마 평생을 기억할 수 있을 녀석이다. 그렇지만 녀석은 계속 말해주길 요구했고, 난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
우리...앞으로 잘 산다고 했죠? 엄마가?
그랬지.
서로 깍지 낀 손을 들어보이며 유진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 원래 엄마 말은 잘 안 믿는데... 순 거짓말쟁이라서.... 근데, 그 말은 어쩐지 믿음이 가요.
내게 기대오는 녀석의 몸을 느끼며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앞으로 잘 살게 될 우리 두 사람을 태운 버스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서울을 향해. 또한 미래를 향해.
──────────────────────────
*
[진유진]의 [노말 엔딩]을 달성하였습니다.
*
어느 분 말마따나 줄초상이 이어지던 Rotue O, 여기서 끝납니다.
이번 루트에 대한 감상평을 기탄없이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박 회장을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되는지, 떡정(...) 아가씨는 왜 연락이 없는지, 그런 사소한 건 그냥 다른 루트나 Prehistory에서 다룰 예정.
*
[System] 이로써 모든 히로인의 노말 엔딩을 획득하였습니다.
[더블 데이트 포인트] (이하 더데 포인트)를 획득한 분에 한하여 다음과 같은 시스템 커맨드를 사용가능합니다.
- Rotue Prehistory Load
- Route Another Story Load
- Continue to True Ending
- Force to Divide Route
- Hidden Character Load
*
좋은 하루 되세요.
우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아파트에 도착하니 의외의 인물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우릴 보자마자 잡아먹을 듯이 소리질렀다.
어딜 그렇게 연락도 없이 돌아다니는 거죠?
아따.. 귀떨어지는 줄 알았네. 그녀의 얼굴에 얹어진 금속 재질의 안경테가 주는 차가운 느낌처럼, 말투도 차갑기 그지 없는 강철의 여인. 손하영이었다. 설마 우리를 기다린건가 싶었다. 대체 언제 올 줄 알고 기다린걸까. 그녀는 차에서 내려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전방 5미터에 멈춰선 그녀는 나와 유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우리 둘이 맞잡고 있는 손을 한참이나 쳐다본다. 그 눈빛이 마치 나와 유진이 사이를 꿰뚫어보는 것 같아 조금 찔렸다. 유진을 살짝 당겨 내 뒤로 오게 하고는 그녀에게 따져물었다.
제가 하영 씨에게 행선지를 보고 하면서 다녀야 되는 사람인줄은 몰랐는데요.
갑자기 큰 소리를 들어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녀에게 꿀린 건 없었다. 이렇게 강하게 이야기 한 탓일까. 하영은 다소 주춤하며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회장님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계속 기다렸어요. 이제나저제나 하고...
회장? 박 회장을 말하는 건가. 회장이라는 말에 내 손 안에 있는 유진이의 손이 살짝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이 아이에게 그의 이름은 어떤 느낌일까. 자신의 아버지는 아니지만, 엄마의 남편이었던 사람이다. 계속 만나고 싶어하면서도 만나지 못했고, 보고 싶으면서도 미워하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이제 이 아이는 피하지 못할 것이다. 유진이가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사람.... 보러 갈 건가요?
아마도 박 회장을 말하는 것이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진은 손을 놓았다. 순순히 먼저 집으로 돌아가 있겠다고 했다. 나한테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아무래도 박 회장을 보러 가는 일은 녀석에게 아직 무리인 모양이다. 유진을 집에 들여보내고 짐을 내려놓았다. 유진이에게 금방 다녀오겠노라고 말한 뒤, 집을 나섰다. 문을 닫기 전 한번 돌아보았다. 퀭한 거실에 녀석을 혼자 두고 가는게 못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유진은 그래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밖으로 나와 하영의 차에 올라탄 다음 휴대폰을 빌렸다. 태근이 형에게 연락하여 서울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ROSE를 맡기고 떠난 태근이 형에게는 보고해야지 싶었다. 형은 내 목소리를 듣고 꽤 반가워하며 ROSE와 그 식구들 모두 잘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유진의 안부를 물었다. 그럭저럭 잘 다녀왔다고 하자 그는 다행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안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너 찾는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들었습니다. 여기 하영 씨가 와 있네요.
하영이가 직접? 아버지가 널 굉장히 찾는 모양이구나.
그런가요?
하영에게 도움을 몇 번 받기는 했지만 그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러나 형이 살짝 놀라는 걸로 보아 그녀가 직접 날 찾으러 왔다는 건 좀 다른 의미인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하영은 날 보며 말했다.
더 전화할 곳은 없나요?
더요?
네. 서울에 당신이 도착했다고... 알려야 할 사람은 더 없냐고요.
전화 오래 썼다고 나무라는 걸까. 난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아뇨. 없어요.
하영은 휴대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품안에 갈무리했다.
출발하겠습니다.
하영이 모는 차는 시내로 향했다. 고층빌딩이 주욱 늘어선 시내 중심가. 그 중에서도 아주 높고 커다란 빌딩의 앞에 도착했다. 빌딩 입구에 서있던 남자들 서넛이 달려와 문을 열고 하영에게 키를 받아간다. 하영에게 깍듯이 대하는 걸 보고 있노라니 이 여자의 위치가 여간한 게 아니라는 게 짐작이 갔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녀의 안내를 받아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가득한 로비를 지나는데, 어지간한 사람은 전부 하영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있었다. 내게 보내는 인사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뒤를 따라가다보니 엉겁결에 인사를 받는 셈이 되어서 좀 쑥스러웠다. 로비 제일 안쪽에 있는 문을 지나니 커다란 엘레베이터가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와야 나타나는 엘레베이터라니... 전용 엘레베이터쯤 되는 건가 생각하며 커다란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하영이 내 시선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전용 엘레베이터입니다. 앞으로 회장님을 접견하실 때는 이쪽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래도 난 무슨 병에 걸린 모양이다. 마음 속 생각이 밖으로 드러나는 병 같은 거. 어째 내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할 말을 다 눈치채버리는 걸까. 진짜 이마에 모니터라도 있어서 속마음이 디스플레이 되는 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하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저희 JS그룹은 회장님이 직접 일구어낸 정석물류를 전신으로 하여, 각종 부동산과 동산을 취급하고, 기업 간의 인수합병이나 매각, 매입 등을 주된 업무로 삼고 있는 투자자문회사입니다. 법률지원을 위한 법무법인과 교육 사업을 위한 재단, 사회복지사업을 위한 종교법인 등도 별도 법인으로 세워 후원의 형태로 100% 출자하고 있습니다.
하영은 이밖에도 연간 매출액의 규모나 종업원의 수, 작년과 올해의 주된 프로젝트 등을 줄줄이 읊었다. 태근이 형이나 효진이가 하고 다니는 꼴을 보면 전혀 상상이 안 되는 대규모의 회사임에 틀림없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은 단 하나였다.
근데 그 이야기를 저한테 하시죠?
내가 이런 질문을 하자 그녀는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이 묻는 거에 대답은 안하고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걸까.
그 순간,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엘레베이터에 탔다. 하영은 문쪽에 섰고, 나는 그녀의 뒤, 엘레베이터 좀 더 안쪽에 섰다. 거울은 아니지만 그만큼 잘 닦인 금속재질의 면은 그녀의 앞모습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여전히 딱딱하고, 재미없는 표정의 여자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엘레베이터 안쪽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고급 엘레베이터란 이런걸까. 대개의 엘레베이터는 스테인레스 재질의 은빛이 대부분인데 여긴 금빛으로 되어있다. 설마 진짜 금은 아니겠지? 문이 닫히고, 올라가기 시작하자 그녀가 말했다.
이제야 인사를 합니다. 오랜만이군요. 최한석 씨.
보자마자 인사는 고사하고 떽떽거리며 따지기만 하시던 분이, 참 빠른 인사를 하신다.
그러게요. 유미 장례식 이후론 처음인가요?
그때 나에게 여기서 왜 상주 노릇을 하고 있냐고 따져묻던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아마도요. 어디를 그렇게 다닌건가요.
완전히는 아니지만... 얼추 백두대간 종주 비슷하게 하고 왔습니다.
그 아이와, 단 둘이서요?
그 아이라.. 유진을 말하는 거겠지? 이미 그녀가 보았으니 감출 것도 없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습니다.
둘이 무슨 사....
그녀가 더 묻기 전에, 엘레베이터가 멈춰섰다. 띵- 하는 소리에 그녀의 말이 묻혔다.
뭐라고 하셨죠?
아니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문이 열리고, 하영은 날 한 번 돌아본 다음 다시 앞으로 향했다. 엘레베이터에서 내리자 작은 로비가 있었다. 작은 데스크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너머에는 마흔은 족히 넘어보이는 여자가 한 명 앉아있었다.
언니, 이분이 최한석 씨입니다.
하영은 그녀에게 날 소개시켰다. 엉겁결에 고개를 숙였다. 중년의 여인은 몹시 인자한 표정으로 나와 하영을 번갈아 보았다.
어서 들어가봐요. 회장님이 많이 기다리셨어.
하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지나쳐 안쪽에 있는 문을 향해 갔다. 내가 봤던 하영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차갑게 구는데, 방금 전 여자에게만은 예외인 모양이었다. 방금 언니라고 부른 호칭은 꽤 살가운 말투였다. 안쪽 문에 다가가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중년의 여인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책상에 앉아 몇가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옆에 있는 안경을 주워다 쓰고 고개를 삐딱하게 하는 걸로 보아 노안이 좀 있는 모양이다. 앉아있는 위치나 분위기를 보아 비서임에는 틀림없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뭐랄까. 대개 비서 같은 건 젊은 여자나 좀 빠릿빠릿한 사람을 쓰지 않나?
하영입니다. 최한석 씨를 모셔왔습니다.
들어와.
전에도 들은 적 있는 박 회장의 목소리. 하영이 문을 열어 따라 들어간다. 안쪽은 무척 넓었다. 테니스장 두 개 정도는 되어보이는 넓이에 좌우와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훨씬 더 넓어보였다. 창을 통해 서울 시내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흡사 높은 산에 올라 서울을 굽어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저 멀리 커다랗고 육중한 책상이 있었고 그 너머에 박 회장이 앉아있었다. 하영은 부동자세로 서서 보고했다.
방금 서울에 도착하는대로 모셔왔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자네는 물러가게.
하영은 박 회장에게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내 등 뒤로 육중한 문이 닫히고, 이 넓은 공간에 박 회장과 나, 단 둘이 남았다.
안녕...하세요?
무어라 말을 꺼내면 좋을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가 일단 인사부터 해본다. 지난번 장례식장에서처럼 날 빤히 쳐다보던 박 회장은, 이내 빙그레 웃기 시작했다. 웃....어?
그래. 안녕하다네. 그렇게 뻣뻣이 서 있으면 피곤하겠구만. 일단 앉지 그래.
아? 네에...
책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커다랗고 푹신한 소파와 티테이블이 있었다. 박회장은 상석에 털썩 앉았고, 난 그의 우편에 살짝 앉았다. 엉덩이를 닿기가 무섭게 빨려들어가듯 푹 들어가는 소파인지라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내 자세를 본 박 회장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러지 말고, 편히 앉게. 이야기가 길어질테니. 어때, 차 한 잔 하겠나?
고개를 끄덕이자 박 회장은 옆에 있는 인터폰을 눌렀다.
춘희. 여기 커피 두 잔 주겠나?
밖에 앉아있던 여인의 이름이 춘희인 모양이었다. 무척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생각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춘희가 커피 두 잔을 타서 갖다주었다. 더 필요한 게 없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정석은 나중에 다시 부르겠다며 나가있도록 했다. 춘희가 방을 나가고 커피 잔을 손에 든 박 회장이 내게 물었다.
태근이에게 들었네. 유진이와 전국일주를 하러 떠났다고 하던데?
전국일주까지는 아니고, 산을 좀 탔습니다.
그래? 나도 산 타는 걸 좋아하는데. 어디 어딜 다녀왔나?
동해 쪽에서 시작해서 산맥을 타고 내려와 남쪽을 거쳐 지리산에 다녀온 이야기를 그에게 짧게 들려주었다. 산 속에 텐트를 치고, 노숙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여행의 말미에는 염소농장에서 일까지 했다는 이야기에 그는 껄껄 웃었다.
고생이 많았겠군. 자네나 유진이나.
일부러... 택한 거니까요. 재미있었습니다. 유진이도 즐거워했습니다.
그런가...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가 대체 왜 나를 불렀나 몹시 궁금했지만 먼저 묻기는 좀 그랬다. 그래서 그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커피잔을 내려놓은 박 회장은 내게 물었다.
그래서, 둘이 했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면 뿜을 뻔 했다. 다행히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있었기에 그런 참사는 면할 수 있었다. 황망한 마음으로 그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무...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의 질문일세. 아니, 질문이 더 있네. 유진이뿐만 아니라 미자와도 했겠지. 내 예상이 맞다면 말야. 안 그런가?
사실 난 말이다. 이 건물에 들어온 내내 그 규모와 위세, 그리고 박 회장이 주는 위압감에 살짝 쫄아있었다. 그러다 예상외로 무척 편하게 대해주는 박 회장의 태도에 긴장이 살짝 풀려 있었다. 등산 이야기나 하고 말이지. 그런데 이리도 갑작스럽게 공격해 들어오니 정신이 없다. 방망이를 거꾸로 쥐고 타석에 들어섰는데, 자세를 제대로 취하기도 전에 안쪽으로 꽉차게 강속구가 날아든 것 같다. 이렇게 정직하게 스트라이크 존으로 빠르게 치고 들어오니 방망이를 휘두를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내가 대답도 못하고 어버버버하고 있자니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네의 반응을 보니, 이미 했군. 내 말이 맞지?
....그...그....그게 그러니까....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 사람은 한때 유미와 결혼까지 했던 사람인데!! 게다가 유진이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 앞에서... 그런 사실을 인정하란 말인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는 대답을 미루고 있었지만, 그런 내 태도가 그에게는 이미 대답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역시, 미자가 안배한 사람은 자네인가...
그는 다시 커피잔을 들어올리며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자신과 한때 결혼했던 여자와 그녀의 딸을 언급하면서, 그들과 잤냐고 묻는 사람에게 대체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로서는 그저 마른 침만 삼키고 있을 따름이다. 커피잔을 비운 박 회장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던 그는 날 보더니 말했다.
아? 내가 너무 직접적으로 물어봐서 당황한건가?
그...그렇습니다.
당황하지 않으면, 그게 사람인가.
아아, 미안하네. 미자와 있던 사람이라면 이런 식의 이야기에 익숙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보군.
회장님이 미자...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진유미 씨를 말하는 게 맞습니까?
그래. 나중에는 유미라고 불러달라고 하더군. 하지만 날 처음 만났을 때의 이름은 미자였지. 그 이름으로 내 곁에 있었고, 나중에 떠나갔지.
그는 뭔가 추억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이룬 것.. 내가 가진 것... 전부 그녀가 내게 준거나 마찬가지였어. 그렇지만 난 그녀에게 그녀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지. 그래서 그녀가 그런 짓을 한 것일지도...
통 알 수 없는 소리였기에 그저 잠자코 있었다. 그는 뜸을 들이다가 날 쳐다보며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여기서 일해볼 생각 없나?
일이요? 어떤....
변호사로서 일하고 있는 하영을 떠올렸다. 난 그녀처럼 변호사도 아니고 심지어 대학도 다 마치지 않은 학생일 따름이다. 그런 나에게 일이라니. 대체 어떤 종류의 일을 맡기려는 걸까. ROSE에서도 알바 비슷하게 하면서 관리를 하긴 했지만, 그런 종류의 일이 여기서도 필요한 걸까. 그러나 박 회장이 꺼낸 이야기는 뜬금없다 못해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뭐긴 뭐야. 내 일을, 내 자리를 물려받는 걸 말하는 걸세.
..............네엣?!
───────────────────────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박 회장이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그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리고 말했다.
어...어르신, 아니, 회장님. 저는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만...
평범?
네.
내 대답을 들은 박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확신에 찬 동작이었다.
아니. 그렇진 않을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미자, 아니, 유미의 능력. 자네는 알고 있었겠지. 안 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유미의 남편이었던 그다. 역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습니다. 미래를 볼 수 있다고...
그렇군. 말했군, 그래. 그럼 자네는 그녀의 말을 믿나?
처음에는 그냥 덕담 같은 걸로 생각했습니다. 직접 말했을 때도 설마설마했구요. 그러다 최근에 여러가지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듣거나 보지 않은 일에 대해 말하거나 나중에 저희가 어디에 있을지 미리 안다거나.... 그러니 이제는 믿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렇다면 궁금하지 않던가? 그녀가 왜 비행기 사고를 알고 있으면서도 피하지 않은 건지?
당연히 궁금합니다....
그렇다. 유진이도 유미의 능력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점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박 회장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태껏 누구한테도 말한 적 없지만... 자네라면 말해도 괜찮겠지. 그녀의 능력에 관한, 그녀 자신의 아픈 기억이 하나 있네. 자신의 능력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의 어머니가 죽는 광경을 보았다고 하더군. 그걸 억지로 막았더니 도리어 아버지까지 참화에 말려들어서 두 분 다 돌아가셨다고 해. 그래서 그녀는 그 후로 자신이 본 미래에 대해 거스르려고 하지 않는다네. 아니, 그 반대라고 해야겠지. 자신이 본대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려고 하지.
그런 일이... 아....
문득 유미가 나를 바에 데려가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그녀가 보았다는 미래를 덕담같은 걸로 생각한다고 했더니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난 분명히 기억한다.
- 사람의 앞날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어디 사람 사는 거겠어요?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거지.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해보니 그 이야기야말로 그녀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말이었다. 삶이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뿐이라며 웃던 그녀. 그게... 그런 의미였나. 그런데 그게 몇 달전이지? 그리 먼 옛날도 아닌데 그때의 기억이 상당히 아련했다. 박 회장의 말은 이어졌다.
그래서 난 그녀를 불쌍히 여겼네. 그녀가 미래를 본다는 건, 어쩌면 자신이 선택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 자체를 박탈당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나 역시 처음에는 그녀의 능력이 부러웠고, 그걸 통해 이득을 얻을 수 있었지만 결코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 한밤중에 일어나 자신의 죽음을 보았다며, 혹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보았다며 펑펑 울던 그녀였어...
무서운 이야기였다. 난 여태 유미가 미래를 본다는게 어떤 느낌일지 막연하게만 생각했다. 보이는 것에도 미리 말해주지 않는게 싫기도 했다. 그러나 박 회장이 말하는 유미의 삶은 결코 그런 편리한 게 아니었다. 보아도 손댈 수 없는 미래.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신을 향해 닥쳐온다. 결코 피할 수 없고, 피했다가는 더 큰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걸... 그녀는 항상 보고 있었던 걸까.
괌에서의 사고가 있기 전, 그녀는 날 몇 번 찾아왔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는 그녀는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어. 그저 유진이를 걱정할 따름이었네. 그녀가 예전에 겪었던 일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녀의 여행을 막을 수도 없었네. 만약 그녀가 자신이 죽는 걸 보고 죽음을 피했다면, 그녀 주변 사람 중 누가 다치거나 죽게 될지는 모르게 되는거니까. 자신이 죽는 걸 보았지만 유진이는 무사하다는 걸 본 그녀는 그대로 행동했네. 그 이후의 일은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
유미.... 그... 바보 아줌마가....
이상하다. 나도 모르게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늘 유미가 철없고 생각 없는 사람이라고만 여기고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면서 사람을 가지고 노는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거였다. 그 길의 끝에 구덩이, 아니, 구덩이 정도가 아니라 천길 낭떠러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웃으면서 그 길을 걸었다. 바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딸이 그 사고에서 살아날 걸 알기에 그녀는 망설임이 없었다.
자네는, 그런 그녀가 자네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들어본 적이 있나?
침을 삼키고, 애써 커피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이미 식어버린 커피는 맛이 없었지만 그걸로라도 젖어드는 눈가를 가리려고 애썼다. 잔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직접은 아니고,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적 있습니다. 그녀가 본 제 미래는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미래라고...
휘둘려?
네. 좋은 사람을 만나게 좋게 될 거고, 나쁜 사람을 만나면 나쁘게 될 거라고 말이죠.
당연하기 짝이 없는 사실을 말하는 내 대답이 뭐 그리 우스운 걸까. 박 회장은 고개를 젖히고 껄껄 웃었다. 한참을 웃던 그는 다시 날 보며 말했다.
그럼 자네가 확실히 맞겠군. 그래서 유진이도 자네에게 맡겼고...
맡기다뇨?
미자는, 아... 자꾸 헷갈리는군. 그래. 유미는 내게 그랬어. 자신이 살아가며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그 중에서 가장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을 찾아 유진이를 맡기겠다고 했었지.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이 바로 자네인 것 같군.
미래가 불확실.... 확실한 게 아니고요? 그게 좋은 겁니까?
앞에 불- 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불확실. 이게 좋은 의미일까. 어감은 영 좋지 않다만 박 회장은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좋냐고? 그거야 나는 모르지. 난 유미와 같은 능력이 없으니. 그렇지만 투자자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말이 있는데 뭔지 아나. 바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그래. 우리말로 하면 고위험 고이득이랄까. 하지만 리스크란 단어를 단순히 위험이라고만 번역하는 건 우스운 일이야. 투자에 있어서 리스크란 일종의 기회나 모험이기도 하거든.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그거네. 거기에 가장 잘 들어맞는 사람이 바로 자네고. 그러니 난 자네에게 걸겠네.
투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나지만 그 용어는 얼핏 들어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용어를 안다고 해도 박 회장의 선택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회장님... 생판 모르는 사람인 저에게 이런 큰일을....
그러자 그가 날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뭐랄까. 정말 꿰뚫어보는 것 같은 눈이다. 나이는 먹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여느 젊은이 못지 않았다.
생판 모르는 사람? 그래. 자네는 나를 전혀 모르겠지만 난 아냐.
네? 무슨 말씀이시죠?
난 원래 유미 주변을 항상 보고 있었네. 그녀도 그걸 알고 있었겠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어. 그러다 유미가 자네를 유진이 과외선생으로 붙였을 때부터... 난 자네를 주목하고 있었네. 그리고 자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지. 아.. 특별히 나쁜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이나마 양해를 구함세.
그는 나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나이도 나보다 많고 명색이 회장이라는 사람이 먼저 이렇게 나오니 딱히 뭐라하기도 힘들었다. 다만 중얼거리듯이 항의할 따름이다.
그런 식의.. 사찰은... 불법입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거의 다 불법과 합법의 촘촘한 경계에 놓여있는 일이 대부분이네. 자네가 내 뒤를 잇는다면, 그런 것도 익숙해져야해.
그는 이제 완전히 내가 자신의 후계자인양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난 아직 하겠다고 승락도 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효진이가 자네와 어울리는 것도, 태근이가 자네와 교생 동기가 된 것도 이미 알고 있었네. 게다가 자네가 한 때 어울리던 여자는 부산에서 알아주는 큰손의 따님이자 지하 최대 조직의 숨은 실권자더군. 알고 있었나?
네엣? 부산....이요?
뜻밖의 이야기였다. 내가 아는 부산 아가씨는 딱 둘. 그 중에서 방금 박 회장이 말한 사람에 들어맞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다. 다른 누구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검은 옷의 사내들을 이끌고 나타나 나에게 명함을 건넸던 리사. 그녀의 정체가 그런 것이었다니...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전해듣고 나니 새삼 또 굉장하다. 놀라고 있는 사이 박 회장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우리 회사 최고 인재인 하영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검찰청의 주목받는 젊은 인재인 채 검사까지 자네와 엮이더군. 이쯤되니 난 자네가 내 인생에 있어서 어떤 열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네. 그래서 자네가 태근이를 데리고 ROSE로 가는 것도 막지 않았네. 그 시기에 태근이가 유미와 만나게 되는 거. 그게, 그렇게 흘러가는 흐름이라고 생각했어. 그 흐름의 중심에는 자네가 있고.
내 인간관계와 행동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박회장 앞에서, 어떤 허튼소리도 할 수 없었다. 내 생활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 기분은 상당히 나빴지만 그 정도로 그가 나에 대해 고려하고 있다는 점도 되니까 말이다. 그가 나에게 회사를 맡기겠다는 이야기가 한층 더 부담스럽다. 뭐라고 해야할지 잘 몰랐다.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박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 있어.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는 거. 그렇지만 그렇게 치면 모든 인간이 다 그렇네. 딱히 대단한 사람은 없는거야. 모든 인간이 어울려서 만들어내는 흐름.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인생이네. 그런데 자네란 사람은 변곡점일세. 이런 말, 알고 있나? 변곡점?
이 아저씨가 날 너무 무시하네... 알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계속 유미가 바에서 내게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내게는 무수한 길이 놓여져 있다고. 그게 내 매력이라고 했다.
저주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탓에..... 모든 선택이 정해져 있던 유미야. 갇혀 있고 답답한 흐름 속에서 살고 있던 그녀는, 그렇게 자유로운 흐름 속에 사는 자네를 부러워했겠지. 그리고 자네를 선택했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네.
다시 유미 이야기로 돌아온다. 박 회장과 나. 나와 박회장의 접점은 결국 유미다. 그녀로 시작했고, 그녀로 인하여 여기까지 왔다.
바로 결정하라고 하진 않겠어. 아직 난 정정하고 회사 일도 재미있으니. 자네도 선택할 시간이라든가, 따로 하고 싶은 일은 많을테니 언제든 자네의 선택을 들려주게나. 그렇지만 자네의 앞길에서 딱히 할 일이 없다면... 혹은 내 자리에 앉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내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주길 바라네. 이건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 많거든.
박 회장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잇살은 좀 있지만 잘 관리된 깨끗한 손이었다. 그 손을 맞잡아 가볍게 악수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물어보았다.
왜.. 태근이 형에게, 아니면 효진이에게 일을 물려주지 않으시는 거죠?
태근이? 효진이? 푸하하하.
그는 껄껄 웃곤 내게 반문했다.
어디 보자... 우선 딸부터. 일단 효진이에게 이 사업을 맡기면 일 년 안에 거덜낸다에 걸겠네. 자네는 몇 년에 걸텐가?
그...그야....
매사에 대충대충이고 쓸데없는 쪽으로 호쾌한 녀석을 성격을 떠올리니 박 회장이 말한 일 년도 길게 느껴졌다.
게다가 태근이? 그 녀석은 자신은 곧 죽어도 선생질 하겠다고 천명을 해놓은 상태야. 쓸데없이 고집이 쎈 건 꼭 제 엄마를 닮아서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네.
학교에서 학생들과 어울리며 쾌활하게 웃던 형의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굳이 자네인 이유는 이렇네. 결국 내가 이만한 것들을 가질 수 있고, 이만한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건 오직 유미 때문이었어. 이제 그녀가 보낸 사람이 왔으니 난 물려줄 생각을 하는 것일 뿐이네. 다른 생각은 없어. 설령 자네가 이 사업을 완전히 말아먹는다고 해도, 난 그게 순리라고 생각할걸세. 꼭 자네를 기용한다고 해서 엄청난 성과를 보여주리라 생각하지 않아. 그저 자네가 하고 싶은대로, 그렇게 있으면 되는거야.
그런가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고 있던 나는 유미의 딸을 떠올렸다. 이걸 물어봐도 되나 어쩌나 한참을 고민했다.
저... 회장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여쭈고 싶은데요...
뭔가? 말해보게.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 대고, 차마 유진이 이름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그래도 말해야 할 필요는 있었다.
전 유진이와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무슨 약속?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아이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함께 있어주겠다고요.
풀 냄새와 염소 냄새가 가득한 그 좁은 방에서 맺어지며, 달빛 아래 만난 유진과 나의 속살은 그 약속의 증거물이다. 그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으리라. 이미 그는 다 짐작하고 있을테니.
그래.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는 유미가 고른 사람이니... 유진이를 책임져 주게나. 나 역시 자네들의 관계를 허락함세.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전 유미에게 회장님 이야기를 듣고... 당연히 회장님이 유진이의 아버지일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른 침을 삼킨다. 그는 무슨 질문이 나올지 알아차렸다는듯이 빙그레 웃었다.
아니라, 이 말이지?
장례식장에서, 그리고 나는 본 적이 없지만 유진이가 기억한다는 십 몇년전의 상황에서, 그는 유진이가 자기 딸이 아니라고 말했다. 몹시 분명한 어조로. 그렇지만 그런 동시에 그는 유미의 남편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알고 싶나?
외람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에게는 말할 수 있겠군. 아니. 말해야겠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를 벗어나 창가로 다가간 그는 바깥의 전경을 내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깥에 시선을 던지던 그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태근이 딸일세.
.........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는 내 의심을 허락치 않았다.
유진이 말야. 태근이 딸이라고. 그러니 내 딸이 아냐.
이번에는 좀 비명이 컸다. 밖에 있던 하영과 춘희가 회장실로 뛰어들어올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