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은 따뜻한 습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온수가 틀어진 채로 계속 나오고 있었고 욕조에는 물이 넘쳐서 바깥으로 흐르고 있었다. 유진이는 뚜껑을 덮은 변기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쉽게도 옷은 모두 입고 있는 채였다....아니, 난 대체 뭐가 아쉬운 거지? 그 광경을 보며 멍하니 있자니 유미가 날 찌르며 말했다.
뭐해? 들어다가 안방에 좀 눕혀줘.
어? 어...
유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유진이의 몸은 가벼웠다. 들기 가뿐했다.
이쪽으로 와.
유미를 따라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퀸 사이즈는 족히 되어 보이는 침대가 자리한 방이다. 그녀는 이불을 치우고 유진을 눕게 했다.
많이 마시고 졸린 마당에.. 아마도 목욕을 하려고 했었나봐. 물 받아놓고 그대로 잠든 모양이야.
아아...
대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았는지는 애써 묻지 않았다. 누워있는 유진의 얼굴을 쓰다듬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면서 그제서야 실감했다. 그녀의 눈빛은 분명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었다. 그녀는 시선을 유지한 채 내게 말했다.
거실 좀 치워주겠어? 유진이랑 난 여기서 잘게.
어, 그래.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서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온다.
이따 할 말이 있으니까 다 치우고 이리로 와.
응.
아까 그러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도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단 거실을 치웠다. 비워진 병의 개수를 보아하니 유진이가 저대로 잠이 든 것도 무리가 아니지 싶었다. 그 누구도 술을 강권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자기 스스로 따라 마신 것만 해도 꽤 되었다. 그릇과 병을 모두 치우고 안방으로 간다. 이미 불은 꺼져 있어 안은 어두웠다.
저기....
쉬잇-
거실 불까지 끄고 나니 집 전체가 어둠에 녹아 들어간다. 잘 보이지 않아 발을 조심스럽게 내딛고 있는데 어느 순간에 내 옷에 와닿는 손길이 느껴졌다.
유미?
응.
아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아 그녀의 실루엣이 겨우 분간될 따름이다. 유진이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는 모양이었다. 내 몸을 더듬어 내려가던 유미의 손이 어느새 내 손을 찾아 쥐었다. 그녀는 날 가만히 침대로 데려갔다. 그리고 날 거기에 앉혔다.
자기도 여기서 자.
에에? 여기서?
응. 세 명이 자도 충분한 침대거든. 이거는.
물론 그럴 정도로 큰 침대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어둠 속에서 유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생각 하지마. 정말 자자는 거야.
이상한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까 전만 해도 제 물건을 물고 응응하고 응응해줬잖아요! 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잠자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한다. 그녀의 손이 날 침대로 눕게 한다. 몸에 힘을 빼고 그대로 누워버렸다. 내 우측에는 유진이가 이미 누워있었고 좌측에는 유미가 나란히 따라 눕는다.
안 그래도 나중에 우리 가게에서도 그런 서비스를 도입해볼까 생각중인데 말야. 동업자님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네?
무슨 서비스?
남자들의 로망 중에 하나가 2대 1이라지? 이런 거 말야. 손님 한 분에 아가씨 둘을 붙여드리는 거지. 요금은 따불로 받고.
내가 칵- 하는, 각혈하는 듯한 소리를 내자 유미가 키득 거렸다. 그녀의 손길이 내 배와 가슴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게 느껴졌다. 또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걸까 싶어 두근거렸다. 그러나 그 손길은 내 상체만 가만히 어루만졌을 뿐 평소처럼 아래로 향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 손은 점점 더 뻗어가더니 내 우측에 바싹 붙어 웅크리고 자고 있는 유진에게까지 닿는다. 그녀는 유진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흥얼거렸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솔직히 여태까지 그녀의 행동거지나 말투에서, 그녀가 애 딸린 여자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하고 살았는데 ...아아. 아까 눈빛도 그렇고 지금의 자장가도 그렇고.... 그녀는 분명 어머니였다. 낮은 목소리는 단조롭고 느릿한 가락을 가지고 있었지만 틀림없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기억조차 못할 아주 어린 시절, 내 어머니도 날 이렇게 재웠으리라.
앞뜰과 뒷동산에 새들도 아가양도 다들 자는데.....
유진을 토닥거리는 손길은 내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팔이 풀썩일 때마다 좋은 향이 났다. 그건 여자의 향이자 어머니의 향이며 사람의 향이었다.
달님은 영창으로....
몸에 도는 알코올 기운도 그렇고 이유없이 갑자기 온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침대에는 나와 유진만 누워있었다. 해는 이미 중천이었고 유미는 보이지 않았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내 몸 위에 올려져 있는 유진이의 팔 다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거실은 음식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먼 길 가려면 든든히 먹어야 겠지?
앞치마를 두른 유미가 씨익 웃으면서 나보고 식탁을 차리란다. 그녀가 끓여놓은 찌게와 미리 해놓은 밥으로 식사를 준비했다. 뒤이어 눈을 비비며 나온 유진이와 함께 다같이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전날의 술로 인해 숙취가 있을 것 같았지만 생각보단 심하진 않았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이거 써보라니깐?
어? 어....
어제와 오늘 아침까지의 일을 생각하면서 멍하게 서있던 난 유미가 내민 선글라스를 써보았다. 거울을 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면세점 직원도 몹시 칭찬하며 하나 장만하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유미가 내 머리를 붙들고 거울에 대어 좌우로 비춰본다.
잘 어울리는데? 내가 사줄게. 하나 해.
내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유미는 점원을 시켜 계산을 마쳤다. 다른 걸 구경하다가 이쪽으로 온 유진이가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선글라스?
아차....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백화점에 갔을 때 녀석도 나에게 선글라스를 권했었다. 사주겠다고도 했었지만 비싸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기억이 났다. 난 급히 변명했다.
아, 이건 말야... 그러니까...
내가 사주는 거야. 어때, 잘 어울리지?
눈치코치 없는 유미가 불쑥 끼어들며 유진이에게 묻는다. 유진은 흥- 하는 콧방귀를 끼고는 먼저 가게를 나가버렸다. 씩씩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가 제법 난 것 같았다. 그러자 유미가 날 돌아보며 묻는다.
안 어울리나?
....내가 안 어울린다고 쟤가 삐질 애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왜 삐졌을까....
유미의 태도를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얄밉기 그지 없다. 이 여자는 지금 분명히 다 알고 있으면서 이러는 거다.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일단 선글라스를 벗어 케이스에 담고 가방에 넣어두었다. 원래 우리가 있던 자리로 돌아와 유진을 달래고 있는데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금일 20시 7분,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괌으로 향하는 대한항공 801편 탑승객 여러분께서는 3번 게이트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탑승을 시작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금일 20시...
유진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자기 짐만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게이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그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전혀 긴장감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야.
왜?
나 화장실.
무슨 애도 아니고...
혼자 가!
라고 버럭 소리 질러보았지만 유미가 손에 들린 짐이 많다고 투정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은 동행하게 되었다. 게이트에서 조금 떨어진 화장실로 갔다. 유미가 여자화장실로 들어간 동안 나도 미리 볼일을 처리할까 싶었다. 들고 있던 짐은 세면대 옆 공간에 올려두고 볼일을 보았다. 쏴아아... 하는 물 소리가 옆에서 났다. 무심코 쳐다보니 무뚝뚝한 표정의 중년 남자가 있었다. 어깨에 달린 견장과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에서 어쩐지 군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얼굴은 살짝 피곤해 보였지만 눈매는 부리부리한 게 다소 고집이 있어 보였다. 볼일을 마치고 세면대로 와서 손을 씻고 있는데 그 역시 내 옆으로 오더니 손을 씻는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가 말했다.
승객이신가 보죠?
아, 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차림을 본다. 평범한 정장이 아닌 뭔가 유니폼의 느낌이 난다.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았다.
혹시 파일럿이세요?
그렇습니다. 조금 있다가 괌으로 가는...
아!
설마 하는 생각으로 시간을 물어보니 내가 타는 비행기의 기장이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짐을 챙기며 말했다.
그 비행기의 승객입니다. 비행기 여행이 처음이라 좀 긴장하고 있어요.
손수건을 꺼내어 손을 닦던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긴장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지난 십 년 간 비행기 사고로 죽은 사람을 다 합쳐도 단 일 년 동안 자동차 사고로 죽은 사람 수에는 미치지 못하는 걸요. 편안한 비행이 되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는 내게 가볍게 경례까지 붙이고 화장실을 나갔다. 나 역시 화장실을 나가서 좀 기다리자니 유미가 나왔다. 그녀와 함께 게이트로 향했다. 유미의 짐까지 내가 들고 있느라 손에 들린 게 좀 많았다.
티켓 확인 부탁드립니다.
환한 미소를 띄우며 우릴 맞이하는 승무원에게 표를 보여준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좁고 기다란 연결통로를 거쳐 비행기 내부로 들어선다. 생각보다 크고 넓었다. 내부에 2층도 따로 있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촌놈 티를 일부러 낼 필요는 없었다.
가방 올려드릴까요?
아, 예. 부탁드립니다.
자리 근처에 도착하니 또 다른 승무원이 짐을 선반에 싣는 것을 도와주었다. 우리 자리는 가운데 열의 맨 뒷자리였다. 네 개의 좌석가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우리의 자리는 2, 3, 4번 자리였다. 유진이는 2번 자리에 먼저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뾰로퉁한 모습을 보며 유미가 소리내어 웃었다.
자기가 쟤 옆에 앉아.
내가?
응. 옆에 앉아서 좀 달래봐.
쟤를 열받게 한 사람은 당신이거든? ...이라고 쏘아붙여 주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에게는 고가의 선물을 받아버린 터라 그냥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내가 유진의 옆에 앉고 유미가 내 옆, 그러니까 통로 쪽에 앉았다. 원래는 유미와 유진이 나란히 앉고 내가 통로 쪽에 앉기로 되어 있었는데 사정이 그리 되었다. 난 조심스럽게 유진이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유진아... 많이 화났어?
아뇨.
.....기왕이면 말투와 말의 내용을 동일시하는 건 어떨까 하는 아주 작은 소망이 있다만.
난 사겠다고 말도 안 했는데 네 어머니가 그냥 계산해 버린 거야. 진짜라니깐.
그래도 결과적으로 넙죽 받은 거잖아요.
내가 또 언제 넙죽 받았니? 얼떨결에 받은 거지....
그러자 유진이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쳇. 그러면 나도 앞으로 얼떨결에 사서 안겨버릴 거야. 무르기 없기에요?
그...그래라, 그럼.
간신히 유진이를 달래는 데 성공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빙긋 웃고 있는 유미를 향해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저희 비행기 KE801은 보잉 747기종으로, 한국시각으로 8월 5일 20시 7분,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목적지인 괌 현지시각으로 6일 오전 1시 43분, 아가냐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활주로 제반 사정으로 인하여 출발이 다소 지연되고 있습니다만 승객 여러분은 모두 제자리에 착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중간에 기내식이 한번 제공될 예정이며...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지만 사람들이 하도 부산해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잠시 후, 안전벨트 착용등이 켜졌고 승무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착석하게 하며 이것저것 점검을 하며 돌아다녔다. 이륙 직전, 기장의 목소리가 기내방송으로 흘러나왔다. 자신은 베테랑 조종사이며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모시겠다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옆에 있는 유진에게 속삭였다.
나, 아까 저 아저씨 화장실에서 봤어.
그래서요?
....뭐, 그렇다고.
다 풀린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흐음. 곧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조금씩 미끄러져 가는 것을 느꼈다.
오, 진짜 움직이네.
촌티를 안내려고 여태까지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옆에 있는 유진이가 콧방귀 뀌는 걸 애써 무시했다.
──────────────────────────
*
다음 편 바로 가요.
*
좋은 밤 되세요.
이후의 비행은 순조로웠다. 유진이는 승무원에게 헤드폰을 구해달라고 요청하더니 앞에 있는 라디오 방송용 잭에 꽂고 음악을 듣는 모양이었다. 녀석은 신발을 모두 벗고 다리를 시트 위로 올려 두 팔로 꼭 끌어안고 있었다. 화가 풀렸다고 생각한 건 나뿐인 모양이었다. 나 역시 가만히 앉아있다가 꾸벅꾸벅 잠이 들었다. 한참 자고 있는데 누군가 날 깨웠다. 중간에 기내식이 제공되려고 할 때에 크게 한번 덜컹거려서 식사 제공이 잠시 멈춰지긴 했지만 이내 재개되었다. 승무원들은 이런 난기류는 한번쯤 있는 거라고 사람들을 안심시키며 돌아다녔다. 화장실도 한 번 정도 다녀오고 계속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데 누군가 날 흔들어 깨웠다. 유진이였다.
아저씨. 거의 다 도착했대요. 일어나세요.
응?
입가에 침 닦아요.
유진이의 핀잔을 들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하늘의 감동을 느낄 사이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했다. 잠시 후, 우리는 공항에 도착했고 미리 예약해둔 숙소에서 보내 준 차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네? 방이 하나 밖에 안 잡혀 있다고요?
호텔 지배인이 한국 교민이어서 말은 잘 통했다. 그러나 중간에 무슨 전달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예약하실 때 가족 분이라고 하셔서요, 저희가 임의로 방 하나에 배정했습니다. 지금이 워낙 성수기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분명히 방 두개를 잡았는데 어째서...
내가 짜증을 부리려고 하자 유미가 나섰다.
일단 그쪽이 임의로 처리하신 거니까요, 금액에 대한 환불은 물론이고 추가 침대에 대한 요금은 받지 말아주세요. 기왕이면 보다 좋은 서비스를 기대했는데 이러면 실망이네요.
점잖게, 그러나 무게있게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지배인을 쩔쩔 매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나중에 아침식사를 룸서비스로 보내주겠다고 한다.
이런 곳에 와서 그렇게 날 세울 필요는 없잖아. 자기야.
그래도...
지금 유진이가 많이 피곤해 하고 있어. 얼른 들어가 쉬자.
유진을 돌아보니 선 채로 꾸벅거리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 피곤할 만도 했다. 녀석을 들어 안고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방은 넓었고 전망도 좋았다.
유진이는 일단 여기에 앉혀줘.
응.
그리고 자기도 여기에.
어라?
삽시간에 나와 유진, 그리고 유미가 한 침대에 엉켜 눕게 되었다. 유미가 날 바라본다. 그녀는 팔을 뻗어 내 목을 끌어안더니 깊숙이 입을 맞춘다. 그러자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내 앞에서 뭐하는 거예요?!
아뿔싸. 유진이가 완전히 잠든게 아니었다. 당황한 나와 달리 유미는 태연했다. 그녀는 내게서 입술을 떼더니 자기 딸을 돌아보았다.
너도 하면 되잖아.
그렇게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 유진이의 두 뺨을 붙들고 찐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뭐... 뭐지....
아저씨. 거의 다 도착했대요. 일어나세요.
으음?
입가에 침 닦아요.
황급히 입을 닦고 자세를 바로 했다. 어라? 꿈이었나? 아직 비행기 안이었다. 승무원들이 돌아다니며 노란 색으로 된 어쩐 종이와 볼펜을 나눠주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난 그걸 들여다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야.
아저씨, 영어 잘 해요?
뭐.. 그럭저럭은?
받아들어 보니 입국심사서였다. 승무원들이 여권에 기재된 것과 똑같은 스펠링으로 이름을 쓰라는 주의를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좌석에 달린 탁자를 끄집어 내어 기재하기 시작했다. 유미가 자기 것도 써달라면서 나에게 내밀었다.
근데 날씨 너무 안 좋다...
내 왼편에 앉은 유미가 창문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 자리에서 창문 너머까지 잘 보이진 않았지만 유리벽 바깥을 때리고 있는 물방울의 흔적은 그럭저럭 보이는 편이었다.
비오는 거야?
아까 라디오 듣고 있으니 무슨 태풍이 온다고도 하던데...
유진이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놀 때는 날씨 좋을 거야. 도착하면 제일 먼저...
때마침 기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저희 비행기는 이제 5분후, 목적지인 아가냐 공항에...
바로 그 순간.
거대한 충격이 우리를 덮쳤다. 처음에는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 1초 후에는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공간, 그러니까 비행기의 외벽이 사납고 거친 소리를 내며 실제로 우겨지고 있었다. 눈 앞에 있는 사람들이 튕겨 올라 천장에 부딪히고 또한 찢어진 외벽 틈으로 검은 바깥이 보일 때, 거기를 통해 튕겨 날아가버린 사람도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사람들의 비명. 비행기의 비명. 찢어지는 공기의 비명이 동시에 엉켜 들린다. 나는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유진을 끌어안았다. 녀석의 머리를 아래로 밀어넣고 우측에 있는 유미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순간, 머리 위에 있는 짐칸의 문이 강제로 열려지며 그 안에 담겨 있던 짐들이 쏟아져 내린다. 머리 위에 노란 등이 켜지고 비상용 호흡기가 튕겨져 나왔다.
꺄아아악!!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고, 사람들이 죽어갔다. 이 모든 장면이 불과 몇 초 되지 않는 순간에,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전부 일어나버렸다. 안전띠가 내 몸을 시트에 고정해 준다고는 하나 그건 고작해야 하나의 끈일 따름이다. 거기에 내 체중이 온전히 실리다보니 순간적으로 호흡이 곤란했다. 괴로웠다. 비명을 질렀고 내 비명은 더 많은 사람들의 비명과 그보다도 더 큰 비행기의 비명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조명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환한 빛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주황색 비상등이 대신하긴 하지만 광도 자체가 낮아 어둠을 몰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둠에 놀라기도 전에 무언가 뜨거운 빛이 저 너머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 되고 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유미! 유진! 빨리 안전띠! 빨리!!!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이상한 각도로 눌린 몸과 배로는 숨쉬기 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난 기어이 몸을 비틀어 빼내고 양 옆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두 사람을 추스렸다. 사방은 비명소리와 신음소리로 가득했고 비행기 동체 앞부분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앞 부분이라니! 우리가 있는 곳과 앞 부분은 말 그대로 절단이 되어 있었다. 저 멀리 허옇고 퍼런 배를 드러내며 굴러있는 동체가 보인다. 순식간에 실내는 매캐한 연기로 가득차서 시야가 제한되기 시작됐다. 무언 타는 냄새로 가득했다. 고기 굽는 냄새와 비슷하지만 노린내가 지독한 이 냄새는.... 본능적인 불쾌감을 안겨주었다. 사람의 살이 타고 있다. 지옥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엄마! 엄마!
판석아!!!
으아아악!! 사람 살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찢어지는 비명. 그것을 귀에 담는 건 대단히 고통스러웠다. 유진의 안전띠를 간신히 풀어냈다. 유미의 것도 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극심한 고통이 발목을 강타했다. 도무지 왼쪽 발목으로 설 수가 없었다.
으그으윽.....
몸 구석구석이 성한 곳이 없었다. 엄청난 펀치력의 복싱선수가 내 몸을 골고루 패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유진은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녀석의 이름을 부르며 뺨을 두드린다.
유진아! 유진아! 정신차려!!!
천장이 없다.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안락한 비행기 좌석에 앉아있었거늘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나락을 향해 추락한 기분이다. 유진의 몸을 붙들고 흔들어 보지만 녀석의 축 처진 몸은 가누기조차 쉽지 않았다. 고개를 들게 하고 얼굴을 살핀다. 숨은 쉬고 있다. 아무래도 놀라서 기절한 모양이었다. 다른 부분의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유미, 좀 도와....
그녀를 돌아본 난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옆구리를 관통하고 있는 쇠파이프를 본 까닭이다. 파리한 빛의 얼굴은 한 그녀가 날 올려다본다. 그녀가 웃는다. 웃어? 정말... 당신이란 여자는....
얼른.... 유진이를 데리고....
가만 있어. 말 하지마!
내 다리를 움직이는 것만 해도 엄청난 고통이 따르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고통이 나로 하여금 더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있었다. 유미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살펴본다. 어떤 철봉 같은 것이 그녀의 등 뒤에서부터 배 앞까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어떻게든 뽑아내면 그녀도 옮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난 혼자였고 돌봐야 할 사람은 둘이었다. 물론 사방에 다른 사람도 있었지만 태반은 죽은 사람 또는 죽어가는 사람뿐이었다. 그나마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 대는 사람이 나은 경우다. 내가 그녀의 배에서 튀어나온 철봉을 붙잡고 낑낑거리고 있자니 유미가 날 만류했다.
빨리... 나는 두고... 유진이를....
나는 고함을 질렀다.
유진이는 멀쩡해! 일단 당신부터.....
철봉을 당기는 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철봉이 무언가 대단히 기분 나쁜 끈적한 액체로 범벅이 되어 있어 자꾸 미끄러졌다. 그 액체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아냐. 현실이야.
그녀가 내 팔을 붙들었다. 말도 안 된다. 그녀의 표정은 지극히 평온했다.
여길 벗어나. 울지 말고.
단호한 말투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날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여지껏 단 한번도 보지 못한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숨을 들이킨다. 그리고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런 말투로 내게 빠르게 쏟아낸다.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이쪽 방향을 등져. 언덕을 내려가면 길이 나올꺼야.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걸어가. 가다보면 거대한 송유관이 나올거야. 그 앞에서 기다려. 구조대는 바로 거기에 도착할 테니까.
난 울부짖었다. 그녀의 말이, 그녀의 이런 단호한 태도가 날 미치게 한다.
왜! 왜! 진작에 말하지 않았어!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그랬다면...그랬다면....
그녀가 고개를 젓는다.
내가 말했잖아. 오지 않았으니까 미래....쿨럭.....라고. 나도 즐겁게 놀고 싶어서... 자기랑... 유진이랑....
그녀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장이 상한 모양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저 울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확실히 정해져 있어....내가 보았어. 넌 살아. 그러니 돌아보지 말고 걸어. 절대로 돌아보면 안 돼. 유진이를... 부탁해.
난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두고 갈 수 없다. 이렇게 외롭게... 이런 지옥같은 곳에 그녀를 두고 갈 수는 없는 거다.
찰싹-
내 뺨에 가해진 강렬한 충격. 유미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방금 전 때린 내 뺨을 만지며 말했다.
넌 내가 골랐어...... 네 의지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 넌 유진이를 책임져야 해..... 어서 가!
결국 난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늘 그랬듯이, 이 모녀가 시키는 일은 도무지 거절할 방법을 모르겠다. 자꾸 흐트러지는 유진을 추스려 등에 엎고 갈라진 벽 틈으로 빠져나갔다. 나가기 직전 유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손에 키스를 담아 이쪽으로 보낸다. 마치 ROSE 사무실에 앉아있을 때처럼, 태연하기 그지 없는 얼굴로.
쏴아아아아-
밖으로 나오자 더 강한 빗줄기와 바람이 우릴 맞이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옷을 벗겨 그걸로 등에 엎은 유진이를 동여 맸다. 그 사람은 이미 죽어있었다. 옷은 필요없을테니 조금 빌리겠어요.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을 애써 무시한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난 지금 하나를 구하기 위해 이미 하나를 버렸어요. 아이들의 비명. 여자들의 비명. 사람들의 비명. 비명. 비명. 눈을 감아도 귀는 막을 수 없다. 그 비명들이 끝도 없이 내 고막을 후벼판다.
발에서 느껴지는 고통도 무시한다. 기괴하게 뒤틀린 왼쪽 발목이 대체 어떤 식으로 걸음을 만들어내는지 모를 지경이다. 더군다나 남쪽이 어디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유미는 이쪽을 등지라고 했다. 무작정 방향 하나를 정해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40여 미터도 채 가지 않아 뒤쪽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아까 내가 보았던 불길이 우리가 벗어난 동체 조각까지 닿아있었고 거기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 돌아보지 말고 걸어.
유미의 목소리가 머리 속에서 재생된다. 그래서 빨리 벗어나라고 한 건가. 그런 건가.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걸었다. 방향은 자신이 없었지만 악전고투 끝에 차량이 오가는 흔적이 있는 길을 찾아내었다. 그걸 따라 걷는다. 바람을 맞서 걷다보니 몇 번이고 고꾸라졌다. 얼굴과 온 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저 멀리 언덕 위에서 불타오르는 거대한 불길이 조명 아닌 조명이 되어주고 있었다. 저 안에서 타고 있을 수 많은 사람들...그 외침들...그 비명들을 등지고 걷는다. 또 걷는다.
왜에에에엥-
얼마나 걸었을까. 눈 앞에는 거대한 파이프가 보였다. 사람 키만한 그것은 길을 가로질러서 놓여있었고 많은 구급차와 소방차가 맞은 편에서 경광등을 울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고 현장으로 향하던 차들이 이 관에 막혀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 중 누군가가 우리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 쪽을 향해 조명이 쏟아지고 사람들이 달려오기 시작한다. 탈진한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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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에 설치된 전화기는 위성을 통한 방식이라고 했다.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전화를 걸 수 있다는 사실이 제법 놀랍기는 하지만 음질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태근이 형에게 아까 군의관에게 들은 도착 시간을 일러주었다. 형은 미리 준비를 해두었다고 했다. 형이 물었다.
유진이는... 괜찮냐?
고개를 돌려 반대편 좌석열에 앉아있는 유진을 힐끔 보았다.
네. 괜찮아요.
형은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며 알았다고 했다. 통화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형이랑 통화했어. 차량을 미리 준비해 두었대.
......
취재진이 좀 있는 모양이야. 형이 공항 쪽에 미리 이야기해서 입국심사를 생략하고 비선을 통해 빠져나갈 길을 만들었대. 그렇게 알아둬.
......
배고프지는 않아?
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말을 잃어버린 녀석이지만 그래도 의사는 표현한다. 팔걸이에 얹어진 녀석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도착해서 바로 이동하고 그래야 되니까 뭐라도 좀 먹어둬. 내가 가서 빵이라도 가져올게.
고개를 젓지 않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콕트로 향했다. 대기하고 있던 크루에게 말하자 곧바로 커다란 빵 두 개를 내어준다. 접시와 칼을 받아 한 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뚜껑이 달린 컵 하나를 받아 우유도 한 잔 채운다. 불편한 다리를 절뚝거리며 자리로 돌아와 유진이에게 주자 겨우 한 조각 집어 먹는다.
좀 더 먹어.
이번에는 고개를 젓는다. 피곤한 표정인 것 같아 접시를 한 쪽에 밀어두고 어깨를 내어준다.
잘래?
유진은 대답 대신 머리를 기대온다. 팔을 뻗어 녀석의 어깨를 감싸안는다. 창 밖에 펼쳐진 운해의 광경을 바라보며 지난 며칠을 떠올린다. 악몽 같았던 그 밤을, 새삼 떠올리기는 싫지만 그 날로부터 시작된 혼란과 아픔의 시간을 좀처럼 지워버릴 수가 없다. 전신에 타박상 정도로 끝난 유진이는 거의 기적 같은 케이스고 나 역시 다리 하나에 부목을 대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생존은 정말이지 꿈 같은 일이었다. 심지어 아직까지 사망자 수는 제대로 집계되지 않고 있다. 원래 승객과 승무원을 합하여 전체 이백 오십 명 가량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생존자는 우리를 포함하여 마흔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 중 몇 명은 유독가스를 많이 마셔 아직도 생사를 헤매고 있다.
우리를 돌봐주기 위해 달려온 교민들과 영사관 직원들은 살아있는 우리를 보며 눈물을 쏟아냈다. 그들이 말로 전해주는 현장의 참혹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눈을 감으면 당시의 상황이 머리 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된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과 유미의 마지막 웃음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거기서 살아돌아왔다는 죄책감이 날 끊임없이 짓눌렀다. 이틀만에 깨어난 유진이가 말을 잃은 것도 그러한 이유일거라 추측했다.
녀석에게 유미의 일을 전한 건 나였다. 녀석보다 먼저 깨어나 병상을 지키고 있었기에 녀석이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가감없이, 솔직하게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유미는 도무지 그곳에서 빠져나올 상황이 되질 않았고 너는 기절해 있었다. 널 데리고 나오기 위해서 유미를 포기했다. 그녀도 그걸 원했다. 유미의 능력에 힘입어 현장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구조되었다....라고 말이다.
유미의 능력이라는 부분에서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게 다른 질문이나 요청을 하진 않았다. 녀석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푸른 하늘과 초록 평야가 펼쳐진 창 밖만 보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기는 커녕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를 치료한 의사는 우리에게 시간을 많이 할당하지 않았다. 유진은 치료를 요구할 정도로 많이 다치지 않았고 나는 왼쪽 발목이 삐끗한 것을 제외하면 머리카락과 팔뚝 정도가 조금 그을린 게 다였다. 몇 안되는 생존자의 대부분은 골절과 화상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동체에 불이 붙고 폭발하기 전에 이미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곳에 남은 유미가 우릴 빨리 내보낸 덕분이다.
아이고야. 이눔아! 니 에미를 놀래켜 죽일 셈이야!
깨어난 지 이틀만인가, 사흘만에 국제전화를 통해 엄마에게 안부를 전했다. 내가 무사하다는 소식에 울먹이며 욕을 해대는 엄마에게 알았다고, 조심해서 귀국할테니 걱정말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유미가 앉은 좌석은 원래 내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발견된 시신은 새까맣게 그을려 있어 당장 신분확인이 되질 않았다. 원래 좌석의 주인 이름인 최한석이 사망자 명단에 올라갔다. 내가 나중에 유미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녀의 시신을 인계받아 올 때까지 난 공식적인 사망자였다. 나중에 수정하여 3보인가 4보쯤에서는 최한석이 사망자 명단에서 빠지고 진미자가 그 자리에 들어갔다. 혼란하기 그지 없는 그 때의 상황은 사망자와 생존자 이름이 바뀌는 정도는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난 또 다른 곳으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에게 말한다.
저예요. 형.
어쩐 일이야. 한석.
쾌활하게 전화를 받는 태근이 형에게 대체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망설였다.
왜 그래? 지난 번에 말한 벗고 노는 데 언제 쏘냐고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야? 으하하하.
아, 아뇨. 그게 아니라....
형은 여전히 활기찼지만 난 거기에 찬물을 끼얹어야만 한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변고....가 있어요.
......뭐?
당황한 그에게 여기는 괌이라고 이야기했다. 국내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듣자하니 연일 방송과 신문지상에서는 추락사고에 대한 기사가 반복해서 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런 때이니 괌이라는 단어 하나에 그가 벼락같은 비명을 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너...너...누구랑 거기...간 거야? 넌...넌...괜찮은 거지?
형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떨린다. 나와 유미의 관계에 대해 추궁하던 그다. 그런 그에게 유미의 사고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로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와 유진이는.... 살았어요. 그렇지만 유미는.... 그녀는.....
으아아악!! 안 돼! 안 된다고!!!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끊기기 직전 들려온 형의 목소리는 흡사 어미를 잃은 짐승의 외침 같았다. 무시무시하면서도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형의 휴대전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이 되지 않고 이상한 메시지만 나온다. 별 수 없이 그의 집으로 다시 걸었다. 그러자 한 아가씨가 전화를 받는다.
네, 여보세요?
....저, 최한석이라고 합니다만...
방금 도련님과 통화하신 분인가요?
......도련님이라.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답했다. 아마도 형을 지칭하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목소리가 귀에 익다. 그녀가 말했다.
방금 휴대폰을 집어 던져 버리셔서 깨먹은 모양입니다. 날뛰고 계셔서 고용인들이 진정시키고 있습니다.
흉포하게 날 뛰는 형의 모습이 머리 속에서 그려진다. 한숨을 내쉬고 이곳 괌 메모리얼 병원의 전화번호와 우리 병실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전하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병실에 돌아가니 약 30분 정도 후에 간호사 한 명이 오더니 날 불렀다. 너스 스테이션으로 가서 수화기를 받아든다. 형이었다.
유진이나... 넌 무사하냐?
여전히 울먹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 역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기적적이라고... 하더군요. 유진이는 타박상 정도만 입었구요, 전 다리를 조금 접지른 정도에요. 다른 분들에 비하면 뭐....
미자 누나는....?
어제 오후에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지금은... 영안실에 있어요.
다시 한번 오열하는 형 때문에 대화가 잠시 끊겼다. 가까스로 자기 자신을 추스린 형은 자신이 동원 가능한 가장 빠른 수단을 준비할테니 그걸 통해 빨리 귀국하라고 했다. 천혜의 자연과 맑은 날씨가 몹시도 아름다운 괌이었지만, 한시 빨리 이곳을 떠나고픈 나는 그의 말에 공감하며 전화를 끊었다. 한국에서 또 다른 유가족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는 터였다. 좀 더 기다리면 유해를 옮길 수 있도록 수송기 편이 마련된다고 하였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유해는 물론, 탑승은 확인이 되지만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사례도 많아 유족들간에 이견이 많았다. 시신인도서를 이미 발급받은 나와 유진으로서는 이동편만 확보되면 바로 떠날 수 있었다. 병실로 돌아와 유진이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태근이 형과 통화를 했어. 형이 우리가 귀국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준대.
그러자 유진이가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보았다. 입은 열지 않았지만 녀석의 눈매에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태근이 형은..... 원래 너희 어머니와 알던 사이야.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고.
아직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형에게 전화를 걸기 전까지 꽤 많은 고민을 해보았다. 유미가 없음으로 해서 이제 천애고아가 된 유진이다. 물론 그녀가 남긴 재산이 상당하기에 유진이가 앞으로 살아가는데 경제적 어려움이 있진 않을 테다. 그러나 어른의 보살핌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될 녀석을 생각하니 딱하기 그지 없었다. 따라서 원래 녀석의 친부임에 분명한 태근이 형의 아버지, 즉 박회장이라는 사람의 존재에 대해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는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게 아니라는 걸, 그걸 말해주고 싶었다. 네게는 아버지도 있고 오빠와 언니도 있다.....그렇지만 유미가 유진에게 굳이 이야기 하지 않을 걸 내가 나서서 말해야 하나 생각하니, 또 주저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일단은 태근이 형에 대해서만 녀석에게 언급해 두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제 네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했어. 내가 확인했으니 굳이 네가 따로 하지 않아도 돼.
날 빤히 보던 유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병원 앞은 북적거리는 사람들로 인해 혼잡스럽기 그지 없었지만 거기서 조금만 더 시야를 넓히면 아주 잘 뻗은 기나긴 도로와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언제 태풍이 왔었냐는 듯 맑게 개인 하늘은 눈이 시릴만큼 파랬으며 구름 한 점 떠 있지 않았다. 저 멀리 보이는 남태평양의 푸른 바다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일렁임을 선보이고 있었다.
아름답다. 그래, 정말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 속에 사그라들어간 생명들을 생각해보면 더욱 미칠 듯이 아름답다. 내가 유진과 나란히 앉아 그 자연경관을 보고 있노라니 유진이가 내 손을 잡았다. 여전히 말은 없었지만 꼭 잡은 그 손의 온도가 천 마디 말보다도 더 많은 의미를 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가만히 잡아주었고 곧 이어 녀석이 침대에 누워 잠이 들 때까지도, 잠이 들어서도 그 손을 놓지 않고 자리를 지켜주었다.
다음 날 새벽,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간밤에 전세기 한 대를 수배하여 이쪽으로 보냈다고 했다. 형의 행동력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출국준비를 서둘렀다. 전세기가 도착하면 바로 떠날 수 있는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파견나와 있는 영사관 직원들이 편의를 많이 봐주었다. 수속이나 심사 같은 건 속성으로 제치고 시신을 실은 관의 수송과 공항까지의 교통편을 수배해 주었다. 개중에는 태근이 형에게 따로 연락을 받은 사람도 한 명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형의 이름을 대고 내게 오늘 나가는 게 맞는지 물었다. 불편한 점이나 필요한 것은 따로 없는지도 묻는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아직도 수색 중인가요? 시신들은....?
네. 동체를 톱으로 잘라가며 내부까지 모두 뒤지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니미츠힐 근처 계곡도 수색중이구요.
저기, 사람 수색하기도 바쁜 시기이긴 하지만요, 혹시 모르니까 이런 부탁 드려도 될까요?
뭐든지요. 말씀만 하세요.
한참 주저하던 나는 우리가 가져와 선반에 실었던 슈트케이스의 모양과 색깔에 대해서 설명했다. 내 말을 들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마 태그가 다 붙어있을테니까요, 유류품 중에서도 있나 확인해 보겠습니다. 나중에라도 발견되면 국내로 보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잠시 후, 차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유진과 함께 나갔다. 커다란 밴의 뒷자리에는 이미 유미가 실려있었다. 나와 유진은 중간 자리에 탔다. 자신의 엄마가 담긴 관을 내려다 보면서도 유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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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소소한 마무리 이벤트만 남았고, 이제 끝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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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