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65)

화장실은 따뜻한 습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온수가 틀어진 채로 계속 나오고 있었고 욕조에는 물이 넘쳐서 바깥으로 흐르고 있었다. 유진이는 뚜껑을 덮은 변기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쉽게도 옷은 모두 입고 있는 채였다....아니, 난 대체 뭐가 아쉬운 거지? 그 광경을 보며 멍하니 있자니 유미가 날 찌르며 말했다.

뭐해? 들어다가 안방에 좀 눕혀줘.

 어? 어...

유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유진이의 몸은 가벼웠다. 들기 가뿐했다.

이쪽으로 와.

유미를 따라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퀸 사이즈는 족히 되어 보이는 침대가 자리한 방이다. 그녀는 이불을 치우고 유진을 눕게 했다.

많이 마시고 졸린 마당에.. 아마도 목욕을 하려고 했었나봐. 물 받아놓고 그대로 잠든 모양이야.

 아아...

대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았는지는 애써 묻지 않았다. 누워있는 유진의 얼굴을 쓰다듬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면서 그제서야 실감했다. 그녀의 눈빛은 분명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었다. 그녀는 시선을 유지한 채 내게 말했다.

거실 좀 치워주겠어? 유진이랑 난 여기서 잘게.

 어, 그래.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서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온다. 

이따 할 말이 있으니까 다 치우고 이리로 와.

 응.

아까 그러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도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단 거실을 치웠다. 비워진 병의 개수를 보아하니 유진이가 저대로 잠이 든 것도 무리가 아니지 싶었다. 그 누구도 술을 강권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자기 스스로 따라 마신 것만 해도 꽤 되었다. 그릇과 병을 모두 치우고 안방으로 간다. 이미 불은 꺼져 있어 안은 어두웠다.

저기....

 쉬잇-

거실 불까지 끄고 나니 집 전체가 어둠에 녹아 들어간다. 잘 보이지 않아 발을 조심스럽게 내딛고 있는데 어느 순간에 내 옷에 와닿는 손길이 느껴졌다.

유미?

 응.

아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아 그녀의 실루엣이 겨우 분간될 따름이다. 유진이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는 모양이었다. 내 몸을 더듬어 내려가던 유미의 손이 어느새 내 손을 찾아 쥐었다. 그녀는 날 가만히 침대로 데려갔다. 그리고 날 거기에 앉혔다. 

자기도 여기서 자.

 에에? 여기서?

 응. 세 명이 자도 충분한 침대거든. 이거는.

물론 그럴 정도로 큰 침대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어둠 속에서 유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생각 하지마. 정말 자자는 거야.

이상한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까 전만 해도 제 물건을 물고 응응하고 응응해줬잖아요! 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잠자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한다. 그녀의 손이 날 침대로 눕게 한다. 몸에 힘을 빼고 그대로 누워버렸다. 내 우측에는 유진이가 이미 누워있었고 좌측에는 유미가 나란히 따라 눕는다.

안 그래도 나중에 우리 가게에서도 그런 서비스를 도입해볼까 생각중인데 말야. 동업자님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네?

 무슨 서비스?

 남자들의 로망 중에 하나가 2대 1이라지? 이런 거 말야. 손님 한 분에 아가씨 둘을 붙여드리는 거지. 요금은 따불로 받고.

내가 칵- 하는, 각혈하는 듯한 소리를 내자 유미가 키득 거렸다. 그녀의 손길이 내 배와 가슴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게 느껴졌다. 또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걸까 싶어 두근거렸다. 그러나 그 손길은 내 상체만 가만히 어루만졌을 뿐 평소처럼 아래로 향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 손은 점점 더 뻗어가더니 내 우측에 바싹 붙어 웅크리고 자고 있는 유진에게까지 닿는다. 그녀는 유진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흥얼거렸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솔직히 여태까지 그녀의 행동거지나 말투에서, 그녀가 애 딸린 여자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하고 살았는데 ...아아. 아까 눈빛도 그렇고 지금의 자장가도 그렇고.... 그녀는 분명 어머니였다. 낮은 목소리는 단조롭고 느릿한 가락을 가지고 있었지만 틀림없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기억조차 못할 아주 어린 시절, 내 어머니도 날 이렇게 재웠으리라.

앞뜰과 뒷동산에 새들도 아가양도 다들 자는데.....

유진을 토닥거리는 손길은 내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팔이 풀썩일 때마다 좋은 향이 났다. 그건 여자의 향이자 어머니의 향이며 사람의 향이었다.

달님은 영창으로.... 

몸에 도는 알코올 기운도 그렇고 이유없이 갑자기 온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침대에는 나와 유진만 누워있었다. 해는 이미 중천이었고 유미는 보이지 않았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내 몸 위에 올려져 있는 유진이의 팔 다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거실은 음식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먼 길 가려면 든든히 먹어야 겠지?

앞치마를 두른 유미가 씨익 웃으면서 나보고 식탁을 차리란다. 그녀가 끓여놓은 찌게와 미리 해놓은 밥으로 식사를 준비했다. 뒤이어 눈을 비비며 나온 유진이와 함께 다같이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전날의 술로 인해 숙취가 있을 것 같았지만 생각보단 심하진 않았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이거 써보라니깐?

 어? 어....

어제와 오늘 아침까지의 일을 생각하면서 멍하게 서있던 난 유미가 내민 선글라스를 써보았다. 거울을 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면세점 직원도 몹시 칭찬하며 하나 장만하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유미가 내 머리를 붙들고 거울에 대어 좌우로 비춰본다.

잘 어울리는데? 내가 사줄게. 하나 해.

내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유미는 점원을 시켜 계산을 마쳤다. 다른 걸 구경하다가 이쪽으로 온 유진이가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선글라스?

아차....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백화점에 갔을 때 녀석도 나에게 선글라스를 권했었다. 사주겠다고도 했었지만 비싸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기억이 났다. 난 급히 변명했다.

아, 이건 말야... 그러니까...

 내가 사주는 거야. 어때, 잘 어울리지?

눈치코치 없는 유미가 불쑥 끼어들며 유진이에게 묻는다. 유진은 흥- 하는 콧방귀를 끼고는 먼저 가게를 나가버렸다. 씩씩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가 제법 난 것 같았다. 그러자 유미가 날 돌아보며 묻는다.

안 어울리나?

 ....내가 안 어울린다고 쟤가 삐질 애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왜 삐졌을까....

유미의 태도를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얄밉기 그지 없다. 이 여자는 지금 분명히 다 알고 있으면서 이러는 거다.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일단 선글라스를 벗어 케이스에 담고 가방에 넣어두었다. 원래 우리가 있던 자리로 돌아와 유진을 달래고 있는데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금일 20시 7분,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괌으로 향하는 대한항공 801편 탑승객 여러분께서는 3번 게이트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탑승을 시작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금일 20시...

유진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자기 짐만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게이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그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전혀 긴장감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야.

 왜?

 나 화장실.

무슨 애도 아니고...

혼자 가!

라고 버럭 소리 질러보았지만 유미가 손에 들린 짐이 많다고 투정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은 동행하게 되었다. 게이트에서 조금 떨어진 화장실로 갔다. 유미가 여자화장실로 들어간 동안 나도 미리 볼일을 처리할까 싶었다. 들고 있던 짐은 세면대 옆 공간에 올려두고 볼일을 보았다. 쏴아아... 하는 물 소리가 옆에서 났다. 무심코 쳐다보니 무뚝뚝한 표정의 중년 남자가 있었다. 어깨에 달린 견장과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에서 어쩐지 군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얼굴은 살짝 피곤해 보였지만 눈매는 부리부리한 게 다소 고집이 있어 보였다. 볼일을 마치고 세면대로 와서 손을 씻고 있는데 그 역시 내 옆으로 오더니 손을 씻는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가 말했다.

승객이신가 보죠?

 아, 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차림을 본다. 평범한 정장이 아닌 뭔가 유니폼의 느낌이 난다.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았다.

혹시 파일럿이세요?

 그렇습니다. 조금 있다가 괌으로 가는...

 아!

설마 하는 생각으로 시간을 물어보니 내가 타는 비행기의 기장이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짐을 챙기며 말했다.

그 비행기의 승객입니다. 비행기 여행이 처음이라 좀 긴장하고 있어요.

손수건을 꺼내어 손을 닦던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긴장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지난 십 년 간 비행기 사고로 죽은 사람을 다 합쳐도 단 일 년 동안 자동차 사고로 죽은 사람 수에는 미치지 못하는 걸요. 편안한 비행이 되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는 내게 가볍게 경례까지 붙이고 화장실을 나갔다. 나 역시 화장실을 나가서 좀 기다리자니 유미가 나왔다. 그녀와 함께 게이트로 향했다. 유미의 짐까지 내가 들고 있느라 손에 들린 게 좀 많았다.

티켓 확인 부탁드립니다.

환한 미소를 띄우며 우릴 맞이하는 승무원에게 표를 보여준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좁고 기다란 연결통로를 거쳐 비행기 내부로 들어선다. 생각보다 크고 넓었다. 내부에 2층도 따로 있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촌놈 티를 일부러 낼 필요는 없었다.

가방 올려드릴까요?

 아, 예. 부탁드립니다.

자리 근처에 도착하니 또 다른 승무원이 짐을 선반에 싣는 것을 도와주었다. 우리 자리는 가운데 열의 맨 뒷자리였다. 네 개의 좌석가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우리의 자리는 2, 3, 4번 자리였다. 유진이는 2번 자리에 먼저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뾰로퉁한 모습을 보며 유미가 소리내어 웃었다. 

자기가 쟤 옆에 앉아.

 내가?

 응. 옆에 앉아서 좀 달래봐.

쟤를 열받게 한 사람은 당신이거든? ...이라고 쏘아붙여 주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에게는 고가의 선물을 받아버린 터라 그냥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내가 유진의 옆에 앉고 유미가 내 옆, 그러니까 통로 쪽에 앉았다. 원래는 유미와 유진이 나란히 앉고 내가 통로 쪽에 앉기로 되어 있었는데 사정이 그리 되었다. 난 조심스럽게 유진이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유진아... 많이 화났어?

 아뇨.

.....기왕이면 말투와 말의 내용을 동일시하는 건 어떨까 하는 아주 작은 소망이 있다만.

난 사겠다고 말도 안 했는데 네 어머니가 그냥 계산해 버린 거야. 진짜라니깐.

 그래도 결과적으로 넙죽 받은 거잖아요.

 내가 또 언제 넙죽 받았니? 얼떨결에 받은 거지....

그러자 유진이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쳇. 그러면 나도 앞으로 얼떨결에 사서 안겨버릴 거야. 무르기 없기에요?

 그...그래라, 그럼.

간신히 유진이를 달래는 데 성공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빙긋 웃고 있는 유미를 향해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저희 비행기 KE801은 보잉 747기종으로, 한국시각으로 8월 5일 20시 7분,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목적지인 괌 현지시각으로 6일 오전 1시 43분, 아가냐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활주로 제반 사정으로 인하여 출발이 다소 지연되고 있습니다만 승객 여러분은 모두 제자리에 착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중간에 기내식이 한번 제공될 예정이며...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지만 사람들이 하도 부산해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잠시 후, 안전벨트 착용등이 켜졌고 승무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착석하게 하며 이것저것 점검을 하며 돌아다녔다. 이륙 직전, 기장의 목소리가 기내방송으로 흘러나왔다. 자신은 베테랑 조종사이며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모시겠다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옆에 있는 유진에게 속삭였다.

나, 아까 저 아저씨 화장실에서 봤어.

 그래서요?

 ....뭐, 그렇다고.

다 풀린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흐음. 곧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조금씩 미끄러져 가는 것을 느꼈다. 

오, 진짜 움직이네.

촌티를 안내려고 여태까지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옆에 있는 유진이가 콧방귀 뀌는 걸 애써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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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 바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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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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