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65)

약 두 달 전, 그러니까 내가 교생을 끝내고 유진을 만나 자료를 받고, 이를 전달하기 위해 하영을 통해 송화를 만났고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날 찾는 한 통의 전화가 과사로 걸려왔다. 이 전화를 내가 직접 받은 건 아니었다. 학교로 복귀한 직후에는 코 앞에 닥친 중간고사 때문에 정신없이 지내느라 집에도 잘 들어가지 않았고, 과사에도 갈 일이 별로 없었다. 후배 한 명이 내가 지내던 연구실로 찾아와 과사에 전화가 왔으니 와서 받으라고 전해주었다. 후배를 따라 과사로 가면서 물어보았다.

누군데?

후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녀석의 표정이 조금 이상하다.

모르겠어요. 정부 기관이라던데요?

깜짝 놀랐다.

에에엑? 정부 기관?

 선배 무슨 사고라도 치셨어요?

후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되묻기에 나도 살짝 겁이 났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법 없이도 살, 그런... 그런... 사람은 못 되려나. 허어. 이것 참. 조금 찔리기도 하는데? 과사에 도착하니 과순이가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받아들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최한석입니다.

 .......저예요.

 네?

정부 기관에서 왔다는 전화를 받아드니 웬 여자가 다짜고짜 저예요.한다. 이게 뭐야. 설마 성이 정 씨고, 이름이 부기관인 녀석인건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다시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누구...시죠?

나는 정말정말 몰라서,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갑자기 저쪽에서 벼락같은 호통이 떨어진다.

뭐라구요? 어떻게 내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수 있죠? 당신이란 사람은 대체....

......귀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나보고 파렴치범이니 어쩌니 하는 상대의 말을 계속 듣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좀 안 좋았다. 조심스럽게 따져 묻는다.

저...저기요. 전화를 거셨으면 본인이 누군지를 밝히고 용건을 말씀하세요. 저는 원래 전화 목소리만으로는 누군지 잘 모른단 말이에요.

 ......모른다구요?

 네. 누구세요, 진짜.

답답하리 만큼 상대는 대답을 주저했다. 마음 같아서는 확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명색이 정부기관에서 걸려왔다는 말에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고 기다린다.

......화예요.

 네?

 채...송화라구요. 중앙지검의...

 아... 채 검사님!

안 그래도 정부기관에서 최한석을 찾는다는 사실에 과사에 있는 사람들끼리 수군거리며 날 보고 있었는데 방금 내가 내뱉은 호칭으로 인해 다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제 한석이 감방 가는 거야?' '저 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하고 다니신 거지?' 하는 수군거림은 애써 무시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등 뒤가 몹시 따갑다.

갑자기 연락하셔서요. 제가 못 알아뵙네요. 그리고 저 원래 전화로는 사람 잘 구별을 못 해요. 심지어 가끔은 엄마 목소리도 못 알아듣고 그런다니까요.

 그러시군요. 전 또....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지 힘이 없었다. 수사가 잘 안 되는 걸까. 내가 가져다 준 자료가 도움이 안 된 걸까 싶었다.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그 자료 출처라면 아직도 저도 잘...

 ....그건 아니고.. 일단 만났으면 하는데요.

 지금요?

 네. 긴급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사가 긴급한 일이라고 하니 바싹 긴장이 된다. 지금 바로 나가겠다고 하니 그녀는 한 장소를 불러주었다. 근데 그 장야설넷는 게 좀 묘했다. 난 좀 주저해서 되물었다.

저기 검사님... 그러니까 저보고 지금....

 수사에 꼭 필요한 일입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수사니 협조니 하는 말이 나오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다. 전화를 끊은 후 같은 수업을 듣는 후배에게 일러 레포트 좀 대신 제출해 달라고 부탁했다. 

선배.. 출두 하시는 거예요?

 출두라니?

내가 생각하는 출두라는 건 암행어사출두야... 인데 다른 출두가 있는 건가? 그러자 후배가 몹시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힘내세요.

 ....으응? 응.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손을 들어 보이는 후배를 뒤로 하고 공대 주차장으로 갔다. 집과 학교가 그리 먼 것도 아니어서 집 앞 길거리에 주차해 놓는 것보다는 학교에 놓는 게 더 안전했다. 그래서 선영의 차는 대부분 여기에 있었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송화가 말한 곳으로 향한다. 시 외곽으로 나가서 좀 더 나가자 넓은 호수가 하나 나타나고 라이브 가수들이 나오는 걸로 유명한 카페들이 주욱 나타난다. 그걸 좀 더 지나 작은 야산 하나를 돌아가니 아니 풍경이 장관이다.

이것들이 다 장사가 되는 거야?

이건 무슨 아파트 단지도 아니고... 크고 작고, 높고 낮은 모텔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걸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중에서 민들레라는, 아주아주 어울리는 이름이 있기에 거기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차를 세우고 기어를 파킹으로 바꾸기도 전에 누군가 총알처럼 튀어나와 판때기 하나를 들고 차번호판을 가려준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되나 뭐라 해야 되나.... 안에 들어가니 카운터에 있는 남자가 물어본다.

어서 오십시요, 사장님. 특실 드릴까요, 아니면 준특실로?

......아예 일반실은 없는 거냐? 그러나 나는 다른 걸 물어본다.

여기 405호실이면 4층이죠?

 아, 일행이 먼저 와 계신 모양이죠? 엘레베이터는 저쪽입니다.

좋은 시간 되시라는 남자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엘레베이터로 향했다. 그걸 타고 4층에 도착하여 표지판을 따라 복도 끝에 가니 5호실이 보인다. 문을 두드린다. 그러자 잠시 후, 문이 빼꼼히 열렸다. 살짝 열린 틈을 통해 안에 있는 사람이 내 얼굴을 확인했다.

오셨군요. 들어오세요.

문에 걸린 체인을 풀고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채송화였다. 여기 모텔 이름이 민들레였지. 그래서 정말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둘다 꽃 이름 아닌가. 그녀는 이전과 비슷한 세미 정장 차림이었고 얼굴에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실내에서 선글라스라니.... 예전에 저런 사람을 하나 알고 있었지. 지금은 볼 수 없지만...

그래서 무슨 일이죠? 수사에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게?

창문에 덧문이 달려 있는 데다가 조명도 그리 밝은 편이 아니었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방 안은 어두웠다. 게다가 침대는 뭔가 공주풍으로 하늘하늘 거리는 무언가로 잔뜩 치장되어 있어서 분위기 자체가 요상해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수사에 뭐가 필요한 게 있어서 이런 곳에서 나를 보자고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방 한 쪽에 놓인 티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내가 앉았다. 그녀는 자신이 쓰고 있는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사실 제가 수사하던 건 재림예수대비말세찬양교회... 그러니까 우리가 말세교라고 줄여 부르는 그곳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2년 전 초임 검사시절부터 마약조직부에 배정받아 정체불명의 약쟁이를 수사하고 있었죠. 그 놈은 그 때는 부산에서 활약하던 놈이었습니다.

부산이라.... 그 이름만으로 가슴 한켠이 서늘해진다. 그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내가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요 근래 그 놈이 서울로 왔다는 첩보는 입수했지만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그렇지만 틀림없이 그 놈의 약은 서울에도 풀리고 있었죠. 그걸 역으로 추적하다보니 그 교회, 말세교가 나오는 겁니다. 워낙 폐쇄적인 종단이라 도무지 수사할 엄두가 나질 않아... 제가 다른 신분으로 위장하고 그곳에 들어갔었습니다.

깜짝 놀랐다.

검사님이 직접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외부에 수사관과 병력을 미리 대기시켜 두고.. 제 연락이 끊기거나 혹은 비선을 통하여 출동 명령을 내리면 언제든지 덮칠 수 있도록 해놓았죠. 거기서 그 놈을 찾긴 했습니다만 수사관들이 교회를 덮치기 직전, 놈은 빠져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놈은 도망 가기 직전.... 저에게 자신이 만든 약물을 주입하고 가버렸죠.

송화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 때 경찰에서 얼핏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중독되었다던 교회의 여자들... 그 중에는 소란도 있었다. 그리고 소란이는 결국.... 아아아. 송화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갈라지고, 또 떨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약을 한 인간들이 또 약을 하는 거나.... 그 약에 취해 범죄를 저지르는 걸 항상 보아오면서.... 그것만큼 나약한 인간들이 없다고 생각하고... 또 멸시하고... 그러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약의 기운이 제 몸을 침식해 들어가더군요. 아주 조그마한 일에도 짜증을 내고, 무언가 부셔버리고 싶은 충동이 자꾸 들고.... 그리고.... 그리고.....

그녀는 다음 말을 하는 것을 퍽 힘들어 했다. 보고 있는 내가 다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고 끝내 가슴 속에 담겨있는 말을 털어놓는다.

날 가장 괴롭힌 건... 미칠 듯한 성욕, 그래요. 그건 분명 성욕이었어요. 저는 필사적으로.... 제 사회적 지위와 입장을 생각하면서 참고 또 참았습니다. 그러다 폭발한 게 바로 그 화장실에서 였어요. 뭔가 찾아서... 스스로... 위로할까도 싶을 정도였죠. 근데... 근데... 거기에.....

아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 날, 그녀가 왜 그런 이상한 눈빛으로 괴로워하다가 날 발견하고 덮치게 되었는가 말이다. 

분명... 죽은 그 아이도... 이런 고통에 계속 시달리고... 또 시달리고 있었을 겁니다. 듣기로.... 원 목사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그는 약을 한 아이들을 불러다가...

 그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산성액을 들이부어서라도 방금 들은 소리를 씻어내고 싶다. 속에서 열불이 났다.

그만해요! 당신이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모두 끝난 거죠? 그런 거죠? 그러면 빨리 그 나쁜 놈이나 잡아 달라구요. 도움이 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그런 것도 가져다 주었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여기서 지금 뭐하고 있나요. 이 바쁜 시국에 당신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구요!

격앙된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양 어깨를 붙들고 소리친다. 그녀는 잘못이 없다는 거, 나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오히려 누구보다 그 불행을 더 잘 알고 그것을 초래한 이들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그래,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소란이의 불행이 ... 그 이면에 이런 추잡한 일까지 얽혀 있다는 걸 듣고 나니 제 정신을 유지하기가 힘이 들었다. 너무 힘이 들었다. 그렇지만 힘든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미안해요...미안해요....

너무 거세게 흔들어서 일까. 그녀의 선글라스가 얼굴에서 벗겨져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녀의 두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눈빛이 몹시 혼탁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목소리가 몹시 떨린다.

그 아이에게 미안하고... 또 모든 피해자들에게 미안하지만....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그 약기운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어요.... 난, 나는... 지금도 힘들다구요.

아아, 그 순간. 아주 짧디 짧은 그 순간. 나는 뭔가 깨달아 버렸다. 이 여자가 나에게 원하고 있는 게 무엇인가. 대체 왜 날 이리로 불러들였고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가를 말이다. 말은 길었지만 내 판단은 짧고도 신속했다. 그녀는 지금 내가 자신을 비난해 주길 바라고 있다. 내 자의적 판단이라고 해도 좋다. 그녀는 지금 약의 기운이든 수사에 진척이 없어 괴롭든간에 몹시 약해지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가진 초인적인 인내심과 절제력으로 쓰러지려는 자신을 붙들고 일으켜 세우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평생 그렇게 서 있을 수만은 없다. 한 번은 자리에 앉아 쉬어야 한다. 쓰러져 잠이 들어야 한다.

이리 와.

난 그녀의 팔을 잡고 거칠게 일으켰다. 그녀는 내 팔에 이끌려 오면서도 저항하지 않았다. 그대로 침대로 끌고 간다. 밀어 눕히고 내 옷을 거칠게 벗어던진다.

미안하다고 했지? 대체 누구한테 미안한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나한테 빌어봐. 그러면 너 하는 걸 봐서 용서해주지.

내가 알몸이 되는 동안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날 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옷을 벗긴다. 저항은 없었다. 그녀 역시 순식간에 알몸이 된다. 다리 사이는 이미 젖어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이는 약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별다른 애무도 없이 내 물건은 그녀의 살덩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몸 자체는 달궈져 있었던 그녀가 급격하게 고양된 기분을 교성으로 표현하며 내게 매달렸다.

하아악... 하으.... 하악...... 하악...... 아아앙....

철썩거리는 살의 푸닥거리 소리와 애정이 없는 인간들이 외치는 짐승과도 같은 교성. 그것의 합집합이 이 방을 채우고 그것의 교집합이 은밀한 접합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사정에 임박한 자지를 뽑아 들고 그녀의 배에다 정액을 뿌렸다. 내 아래 깔려 허덕이던 그녀는 몹시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걸 보고 있었다.

하아...하아....

육체적인 피로도 피로거니와 정신적인 피로감이 몰려와 참을 수 없었다. 송화의 옆에 드러누워 대자 자세를 취하고 만다. 나란히 천장을 보고 있다가 귓가에 들려오는 그녀의 숨소리가 좀 차분해졌기에 물어보았다.

....이거...이거 하자고 저 부른 거 맞죠?

 .........

침묵은 긍정에 가까울까 부정에 가까울까. 그녀의 대답을 굳이 기다리지 않고 내 생각을 말해본다.

그러니까... 송화 씨 몸에는 그때 교회에서 당한 약의 영향이 아직 남아있고... 그로 인한 발정이 일어나게 되면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다.... 제가 이해한 게 이게 맞나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팔을 들어 내 머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하아. 이게 무슨 긴급한 일이고 수사에 협조되는 일이랍니까. 대한민국 검사가.... 이렇게 일반 시민에게 뻥을 쳐도 되는 거예요?

너무 푸념조로 말한 걸까. 상체를 일으킨 송화가 약간 불만 섞인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담당 검사가 수사에 집중이 안 되는데... 그걸 해소하는 게 수사에 협조되는 일이 아니면 뭔데요? 내가 진짜 이런 이야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지만 그때 당신이 화장실에만 안 들어왔으면...

 안 들어왔으면요. 어쩌시려고 그랬는데요?

 .......모르죠. 나도. 하아.

그녀는 다리를 모아 두 팔로 그러안고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 등을 보고 있자니 조금 애잔한 느낌이 들어서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는다. 나는 누워있던 터라 그녀의 자세가 스르륵 무너져 내게 안긴 꼴이 된다.

정말, 제가 이렇게 해주는 게.... 송화 씨에게 도움이 되는 건가요?

그녀는 상당히 주저하면서 천천히 말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최소한 아까보다는 마음이 편해지고 머리도 맑아지고 있어요.

누가 들으면 무슨 길거리에서 약 파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그녀의 변화 전후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반박할 도리가 없었다. 큰 맘 먹고 이렇게 말한다.

좋아요. 협조하겠어요. 최소한 그 원 목사 새끼를 잡을 때까지는...

 정말요?

화색이 된 그녀가 날 돌아본다. 평소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가기까지 아주 짧은 시간동안, 나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녀의 표정을 혼자 보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는 그렇게 슬프고 괴롭고 안타까운 심정이었지만... 방금 전 그녀의 표정은 너무도 웃겼기에 나는 크게 웃고 말았다.

푸하하하하하.

 왜... 왜 웃어요?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리고 꼭 안아주었다. 슬금슬금 기지개를 펴는 아래쪽을 가리키며 슬쩍 언급했더니 얼굴이 빨개지고 만다.

두 달 전, 그렇게 송화와 나는 묘한 이유를 가진 섹스파트너가 되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만나가며 그녀의 갈망을 채우는 남자가 되어주기 위해 나는 점점 강도를 올려갔다. 일종의 자격지심이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자괴감 때문이라고 해야하나. 그녀는 침대에서 철저히 지배당하길 원하는 편이었고 나 역시 그런 패턴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말 놓는 것만 해도 꽤 힘들었는데 두 달이 좀 넘게 지난 지금은 개처럼 짖으라고 명령하는 건 물론 이런 짓까지도 할 수 있었다. 송화의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

저..정말 여기로 할 거야?

 한번 해보고, 정 아니면 하지 말자.

욕실에서 나오면서 난 아주 좋은 아이템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욕실 한 쪽에 비치되어 있던 러브젤. 수용성이고 몹시 매끈거리는 그걸 발견한 순간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아직 옷을 채 입지 않은 송화에게 뒤를 대보라고 했다. 가끔 하던 대로 뒤로 하는 건 줄 알고 있던 그녀는 내 손가락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닿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나는 꽤 강압적으로 말하며 그녀로 하여금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느낌이... 이상해....

 난 괜찮은데?

 흐음....

러브젤을 잔뜩 바른 손가락으로 그녀의 항문주름을 천천히 문지른다. 검지를 살짝살짝 찔러보자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린다. 말 그대로 미지의 영역에 와 닿는 감촉이 본인도 꽤 생경하겠지. 나는 최대한 능글맞게 말했다.

오호라. 나름대로 꽤 움찔거리는데? 마치 보지같이...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뭐, 어때. 이따가 여기에 자지도 박을 건데.

 으앙....시...싫어.

그러나 워낙 구멍이 협소하고 빡빡한 관계로 손가락 중지까지가 한계였다. 다음에 좀 더 벌려봐서 자지까지 넣기로 합의했다. 대실 시간이 다 되었기에 모텔을 나왔다. 그녀를 중앙지검까지 데려다 주곤 다시 차를 돌려 학교로 향했다. 태근이 형과 약속한 시각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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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문은 아직 제가 안 해봐서.... (먼 산)

*

좋은 밤 되세요.

차를 공대 주차장에 세웠다. 어차피 술 마실 건데 차 가져가기도 뭐하고 여기서 ROSE가 그리 먼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차에서 내려 휴대전화를 켰다. ROSE일을 본격적으로 맡으면서 나에게 전화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송화 때문에 장만한 거였다. 그 발정이라는 게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전화가 오고, 나도 그리 바쁜 일이 없다면 그대로 만나러 간다. 그리고 오늘처럼 몸을 푼다. 그녀와 나의 관계는 그렇게 몹시 드라이했다. 나는 딱히 불만이 없지만... 그녀는 어떨까? 단, 그녀와 있는 동안은 주로 꺼놓는다.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띠리리리리-

전화를 켜고 얼마 되지 않아 벨이 울렸다. 태근이 형인가 싶어 받아보았는데 아니었다.

여태 뭐 했어요?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오는, 여보세요 따위는 가볍게 생략하고 다짜고짜 따져대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도서관에서 공부했지. 도서관에서 핸드폰을 켜놓을 수는 없잖아.

 잠깐잠깐 쉬는 동안 켤 수도 있잖아요.

 커피 마실 때는 켰는데? 니가 그때 전화 안 했나 보지.

 그런가...?

보지 않아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진의 얼굴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내가 휴대전화를 샀다는 걸 알자마자 번호를 알려 달라고 졸라대던 녀석이었다. 내가 넌 나를 너무 귀찮게 할 것 같아서 안 가르쳐 준다고 했더니 심통이 나서 하루동안 삐져 있었다. 그러나 나도 이젠 이 녀석을 다루는 방법을 조금씩 알아가던 참이라 삐져 있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놔 두었다. 결국 하루만에 백기를 든 이 녀석이 너무 자주 걸지는 않을테니 알려 달라고 말하게 되었다. 나는 짐짓 겁박 비슷하게 말하며, 업무용으로 산 거니까 너무 자주 걸면 안된다고 생색을 내며 알려주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알려준 번호인데.... 그래도 역시 자주 건다.

왜 전화 한 건데?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아니구요... 전에 말했던 여행사 카탈로그 받아왔어요. 같이 보고 결정하게 한 번 오세요. 이제 시험 끝났죠, 아저씨?

 아아, 그거 말야?

요 근래는 내가 시험기간이라 과외를 가지 않았다. 이제 시험이 끝났으니 다시 과외를 하러 가기도 해야 하고 곧 있을 유진이 녀석의 기말고사도 함께 준비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정해야 할 중요한 일도 있었다. 내가 시험에 바빠 조금 잊고 있었다.

그냥 네가 보고 결정하면 안 되려나? 난 봐도 모를 것 같은데?

 내 맘대로 정하면 나중에 뭐라 그럴 거잖아요.

 안 뭐라 할게.

 긴 말 하지 말고 일단 오세요.

 나 바쁜데....

그러자 녀석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간다.

시험도 끝났다면서 뭐가 바빠요! 혹시 또 여자 만나요?

 아마도.... 그럴까?

 이씨, 진짜.

요즘 이 녀석과의 대화패턴은 늘 이런 식이다. 유진을 살짝 골려 먹을 줄 알게 된 나와 자신이 골려지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이 녀석의 투덜거림. 녀석의 행동과 말투에 늘 일방적으로 휘둘리고 당하던 나의 비약적 발전이 가져온 쾌거다. 

이봐. 니 말대로 유미 씨와는 안 그러고 있거든? 그런 나한테 다른 여자까지 만나지 말라고? 가장 성욕이 왕성한 이십대 초반의 남자에게 그건 너무한데?

고등학생에게 대놓고 할 소리는 아닌 거 같다만... 어디 이 녀석이 보통인 녀석이어야 말이지. 내 예상대로 녀석은 한층 더 씩씩거리며 말한다.

진짜 그렇게 나온다 이거죠? 흥. 정말 두고 봐요.

 아이고, 무서워라. 무서워서 너 보러 못 가겠다. 다음에 두고 보도록 해.

 우이씨. 일단 카탈로그는 보러 오라니까요.

여기서 더 놀렸다가는 살짝 위험할지도 몰라 오늘은 이미 시간이 늦어 곤란하고 내일 오후에 보러 가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고 있자니 저쪽에서 태근이 형이 오고 있었다. 형은 손을 들어 내게 인사하며 말했다.

뭔 전화를 그렇게 히죽히죽 웃으면서 해? 애인이랑 통화라도 하고 있던 거야?

 애인은 뭘요. 유진이랑 통화하고 있었는데요?

 아, 그 때 그 애 말이지? 귀엽고 당돌한 애.

태근이 형에게는 유진이에 대한 인상이 그 날 빈소에서 있었던 일로 딱 정해진 모양이다. 나중에 내가 걔를 과외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더니 형은 안 봐도 고생이겠네.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었다. 내 옆에 나란히 선 우리는 후문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형은 유진이 이야기를 계속 걸고 넘어졌다.

어쩐지 수상한데? 저쪽에서부터 니 얼굴 보고 있었는데... 분위기만 보면 여친이랑 통화하는 줄 알았단 말이지. 정말 단순한 과외 선생님과 학생 사이 맞아?

이 인간이 이렇게 가끔씩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올 때가 있다. 살짝 긴장했다. 뭐, 그렇다고 내가 유진이랑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지만.... 아주 아슬아슬한 경계에 놓여 있기는 하지.

마...맞는데요.

 다른 거 가르쳐주고 막 그런 거 아니지?

 다른 거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이야기 많잖아. 과외 선생님과 여학생의 은밀하고 농염한 비.밀.스.러.운.행.위.

형은 자기 덩치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요염한 말투로 되도 않는 것을 애써 묘사한다. 그 모습을 보고 너털웃음을 터트리던 나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어?

같이 걸어가다가 내가 발걸음을 딱 멈추자 조금 앞서 가던 형이 돌아보았다.

왜 그래?

 아, 아뇨. 분명히 전에 이런 대화를 누군가와 했던 거 같은데?

 누구랑?

 글쎄요. 기억은 그닥 잘....

머리 속에 뭔가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그러자 형이 말했다.

혹시 그거 그런 거 아냐? 데자뷰인가 뭔가 하는 거 있잖아.

 그런가요?

 내가 예전에 TV를 보다가 들었는데 그게 사실은 정말 있었던 일이 아닌데 뇌의 한 부위가 착각해서 그런 거라더라. 인간의 기억력이라는 게 그리 완벽한 것만은 아니라는 거야.

 그럴 려나요?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곧 후문에 도착해서 택시를 잡았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형이 말했다.

이럴 거면 아까 헤어지고 뭐하러 또 만나. 그냥 우리랑 같이 셋이 놀다가 현아 데려다 주고 둘이서 가면 되지.

 허이구. 사이좋은 두 사람 사이에 낀 불청객이 되고 싶진 않아요. 그리고 저라고 뭐 스케쥴이 없는 줄 아세요?

 호오. 그러셔?

형은 날 보며 대견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시계를 들여다보니 다시 묻는다.

근데 지금이면 룸에 가기는 좀 이른 시간 아냐? 언니들도 아직 출근 안 했을 거 아냐.

 상주인원이 많지는 않겠지만 아마 지나 같은 애들은 나왔을 거예요.

 지나 같은? 어째 거기 언니들을 아주 잘 모양이네? 대체 얼마나 단골이면 그렇게 되는 거야?

 어... 그게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형에게는 이야기해도 되지 싶었다. 난 그곳이 유진이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곳이라는 사실과 여러 사정에 의해 내가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룸살롱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내가 수시로 그곳을 드나들게 되었다는 걸 털어 놓았다.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머리가 똑똑하면 그걸로라도 룸을 갈 수 있는 거구나. 몰랐네.

 .......어떻게 하면 결론이 그렇게 납니까?

정말 이 사람의 사고방식은 화통하다 못해 엉뚱할 때가 종종 있다. 물론 내가 룸에 다니고 있다고 해서 쓸데없는 오해같은 걸 하지 않는 점은 참으로 고맙지만... 이럴 사람인 줄 알고 털어놓은 거기도 하니까 나도 그냥 웃어 넘기고 만다. 형은 손을 비비며 말했다.

뭐, 중요한 건 니 덕에 내가 꽁술을 먹게 된다는 거고 그것도 어여쁜 언니들과 함께라고 하니 좋은 걸?

 다시 한번 말하지만 2차는 형이 알아서 하세요. 빡비까지는 못 내드려요.

 하하하. 이 자식. 니 입에서 빡비 소리 나오니까 진짜 안 어울린다. 게다가 벌써부터 언니들 관리하는 거야? 알았어, 알았어. 현아 때문이라도 내가 그러지 않을테니 걱정 마라.

얼마 전에 이 사람이 안마 어쩌고 했던 것도 생각나고 그 이상한 비밀주점도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갔지만 애써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신 더 궁금한 다른 것을 물어본다.

그러고 보니 현아랑은 어디까지 갔어요?

 뭐? 너도 그런 게 궁금하냐? 으하하하하. 뭐, 알아서 잘 하고 있다.

내 등을 팡팡 내려치는 형을 보며 괜한 것을 물어보았다고 생각했다. 무척 아팠다. 그러나 어지간한 건 나한테 다 이야기하는 형이 애써 얼버무리는 걸 봐서 나름대로 할 건 다 하고 있는 모양이지 싶었다. 이 사람이랑 현아랑....? 으으. 상상이 안가. 그러는 동안 금방 도착했다. 학교에서 가게까지 그리 먼 곳이 아니었기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에서 내린 형이 간판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호오. ROSE라, 그러면 장미...라는 뜻이네?

 그렇군요! 제가 몰랐네요.

누가 그걸 모르나. 이 사람아. 그런 식으로 핀잔을 주려고 쳐다보는데 형의 표정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묻자 그는 살짝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예전에 장미를 좋아하던 어떤 분이 생각나서 말야.

그렇네. 여기 이름이 ROSE라는 건 늘 알고 있었지만 그게 장미라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입구에서 아래로 난 계단을 따라 걸으면서 형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예전 우리 집에 있던 분이 있었어. 나랑 효진이를 무척 아껴주셨던 분인데... 동네 길가에 장미꽃이 피면 내가 제일 먼저 찾아서 그걸 꺾어다가 그 분한테 갖다 드리고 그랬지. 그러다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순간 내 등뒤에 따라오고 있는 사람이 박태근이 아니라 박태순인 줄 알았다. 그것도 스물 여덟살 박태순이 아니라 열일곱살 박태순. 이런 말까지 하긴 좀 무엇하지만 목덜미에 살짝 닭살도 돋았다.

오오. 형이 그렇게 소녀적 감성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었단 말이에요? 나 지금 닭살 돋았어요. 어떻게 좀 해봐요.

내가 빙글거리며 놀리자 형은 조금 쑥스러워 하며 말했다.

임마. 그럼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우락부락한 줄 알아? 한 때는 나도 여리여리하게 생긴 미소년이었어.

 .......

 그 표정은 뭔데!

 아뇨,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는 형도 잘 아시리라 믿어서요. 노 코멘트 하겠습니다.

 이 자식이~

형의 애정표현이자 내가 가장 싫어하는 헤드락이 행해진다. 전 같으면 꼼짝없이 걸리고 말았겠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목을 비틀어 빠져나갈 방법도 터득한 후다. 그렇게 둘이 장난을 쳐가며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첫번째로 만난 웨이터에게 룸 하나를 내어 달라고 부탁하고 형에게 웨이터를 따라가라고 했다. 내 얼굴을 이미 알고 있는 웨이터는 알았다고 고개를 숙이곤 형을 안내했다.

넌 어디 가는데?

 말했잖아요. 전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일단 사장님한테 출근 보고는 해야죠. 금방 방으로 따라갈게요. 먼저 가 계세요.

 그래라, 그럼.

형과 잠시 떨어져 사무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안에 들어가자 유미와 지나가 보였다.

어머, 어서 와. 자기야.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유미는 여전히 나보고 '자기'라고 불렀고 유미를 제외한 나머지 종업원들은 날 보고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자기는 그렇다치고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내가 조금 부담스러워 했더니 지나가 그러면 오빠라고 부를까요?하기에 그냥 선생님으로 해달라고 했다. 당신 나보다 나이 많은 거 알고 있거든? 일단 한 명 뿐이긴 하지만 유진이라고 하는 학생이 있으니 아주 틀린 표현만은 아니었다.

일찍 왔네? 오늘 시험 끝난 거지?

 응. 그동안 별 일 없었지?

지난 일주일 정도가 시험 기간이라 ROSE에 안 오고 있었다. 사무실 한 쪽에 놓인 컴퓨터를 켜고 지나에게 부탁했던 전표 입력이 제대로 되었나 쭉 훑어본다. 다시 한 번 점검해봐야 알겠지만 일단 지금으로서는 특별히 큰 오차는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시간을 들여 제대로 봐야지 싶었다. 그런데 등뒤에서 유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별 일이라... 있는데?

 뭐?

무심히 말하는 유미의 저 태도. 난 말이지, 저게 제일 무섭다. 저 여자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하는 거 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을 못 보았거든. 깜짝 놀란 내가 고개를 돌려 유미를 쳐다보자 그녀는 빙글거리며 말했다.

여기 우리 가게 말야. 이제 자기도 책임을 좀 져줘야 겠어.

 뭔 소리야, 그게 대체...

 자, 이거.

그녀가 내민 종이를 받아든다. 사업자등록증. 일반과세자. 상호는 ROSE.

이건 우리 가게 사업자등록증이잖아. 이걸 왜 나한테...

 바로 그 다음을 봐.

유미의 지적대로 바로 다음을 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뭐야! 공동명의라니! 게다가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날 보며 유미가 빙글거리며 말했다.

그래. 이제 자기가 여기 진짜 사장님이야. 대표공동명의자. 자, 지나야. 새로운 사장님을 환영하며 박수.

 박수요?

옆에 서 있던 지나가 엉겁결에 박수를 친다. 그 외로운 박수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아직 사태 파악이 잘 되질 않았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유미에게 등록증을 돌려준다.

아니, 이런 걸 어떻게 나한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게다가 명의 등록 서류 같은 건 대체 어떻게 꾸민거야?

 그거야 자기 여권 만든다면서 유진이한테 인감이랑 신분증 다 줬다면서? 잠깐 빌렸지.

 크아아아! 그건 범죄야! 남의 명의를 가져다가...

 왜? 그래서 싫어? 여기 사장하는 게?

따져묻는 날 보고 유미는 팔을 쫙 벌리며 말했다.

우리 가게 이만하면 목도 좋고 애들도 물 좋고 손님들도 빵빵하단 말야. 어지간한 사람들이 다 탐내는 가게인데, 자기는 어쩜 이런 걸 마다해? 나 같으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겠네.

 아, 아니. 내가 ROSE가 싫다는 게 아니잖아. 그게 그러니까...

 싫다는 게 아니면 받아들인 걸로 알게. 어차피 등록은 다 되었으니까 앞으로 전표 작성할 때 과세 항목 좀 신경 써줘. 우리 세금 많이 나오면 자기도 세금 많이 내는 거니까 말야.

이야기로는 유미를 이길 자신이 없다. 논리도 상식도 없는 그녀는 마이페이스, 마이웨이. 그 자체의 여자다.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에 털썩 앉는다. 지나를 내보낸 유미가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계속 지켜보니 잘 할 것 같아서 말야. 자기라면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나보다 더 잘할지도 몰라.

 유미보다 잘한다니... 유미는 이걸 안 할 생각이야?

 후후. 내가 이야기 했던 거 벌써 다 까먹었구나?

그녀가 이야기 했던 거? 대체 뭐지? 워낙 갑작스러운 일을 닥치고 나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그녀가 말하는 게 무언지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유미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유진이는 처음에 좀 싫어할지도 모르겠어. 자기 주변에 여자 있는 거 그렇게 질색하는 애인데 이런 물장사 사장이라... 펄펄 뛰겠지. 그래서 그 애한테는 아직 이야기 못 했거든. 나중에 자기가 잘 설득해봐. 정 안 되면 몸으로라도...

 됐거든. 그런 이야기는 그만 좀 해. 대체 자기 딸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는 엄마가 어디있어?

 어디 있긴, 바로 여기 있잖아. 어디에도 없고 바로 여기.

그녀의 말투는 평소와 달리 진지했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그저 날 놀리기 위해서 공동명의, 그것도 대표명의로 올리지는 않았겠지. 지금 그녀가 나를 그렇게 올려놓았다는 건 내가 지금 당장 이 가게의 지분 절반을 요구하며 팔아 넘겨도 전혀 법적으로 하자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내가 그렇게 할 생각은 없지만....

난 아직 졸업도 안 했고 군대도 안 갔다 왔단 말야.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런 거다. 그러나 유미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졸업이야 시간이 지나면 하게 될 거고... 군대도 어떻게든 해결이 될 거야. 난 보았어.

 하....아..

뭔가 다른 반박을 하려다가 그녀의 마지막 말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만다. 보았다니, 내 군대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리란 것을 '미리' 보았다는 말인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걸 따져 물어야 무의미하다는 걸 아는 나로서는 할 말이 없을 수 밖에.

나중에..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나 지금 조금 혼란스럽거든.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미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오늘은 나 친구랑 술 한 잔 하려고 왔거든. 방 하나만 쓸게.

 아,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같이 교생했던 친구?

 응.

 애들 많이 데리고 가서 재미있게 놀아. 나도 이따가 한번 들를게.

 .....굳이 안 오셔도 됩니다. 동업자님.

마지막에 붙인 내 칭호에 유미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래.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괜히 골머리 썩히지 말고.

쿨한, 너무도 쿨한, 진짜진짜 쿨하다 못해 정말 어이가 없을 지경인 그녀를 두고 사무실을 나섰다.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형이 몇 번 룸에 있는지 묻고 그곳으로 향한다. 문을 열고 보니 아주 가관이다.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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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분이 이번 루트 몇 화까지 가냐고 물어보시는데... 저도 잘 모릅니다.

 메인 이벤트는 아직 안 일어났다는 말씀만 일단 드릴게요.

어? 왔어? 사장님한테 보고는 다 끝난 거야?

룸에 들어서는 날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형을 보고 있자니 할 말이 없어진다. 원래 형이랑 둘이 마실 생각이었고 잘 해봐야 옆에 아가씨 한 명씩 붙이고 마실 생각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형이 자리한 방은 단체 손님 받을 때 쓰는 대형룸이었다. 게다가 형의 좌우로는 각각 열 몇 명 씩, 도합 스무 명이 넘어가는 아가씨들이 방 가득 우글거리고 있었다. 입에서 입으로 휴지 옮기기 게임을 하고 있던 중인 모양이다. 이 많은 인원이 서로 웃고 떠드느라 시장바닥이 따로 없다. 가장자리에 앉은 지나가 내게 손을 흔들며 얼른 이쪽으로 오란다. 나는 투덜거리며 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뭔 소란이에요, 이게 대체? 게다가 룸은 또 왜 이걸.... 13번방 정도면 되는데.

13번 방은 4인 손님이 왔을 때 쓰는 방이었다. 지나가 깔깔거리며 말했다.

아니, 우리는 그냥 선생님 친구 왔다고 하길래 구경이나 할까 했는데... 아까 마담언니 말 들으니까 이제 선생님이 우리 사장님도 된다면서요. 그래서 그거 축하도 할 겸 있는 애들 다 불렀죠.

아직 아가씨들이 본격적으로 출근할 시간이 안 되긴 했지만 여기의 규모가 제법 되다보니 지금 있는 아가씨들만 해도 수가 제법 되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내 쪽을 보며 박수를 치고 환영을 한다. 개중에는 은근히 나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분들도 제법 있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가운데 앉아 있는 형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야, 한석아. 너 그냥 여기서 알바나 하는 사람이라고 나한테 그러지 않았어? 사장이 되었다는 게 무슨 소리야?

 저도 오늘 처음 들어서 아직 얼떨떨해요. 받아들일지 어떨지 결정도 안 내렸고...

내가 주저하며 말하자 형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임마. 공동명의로 올려줬다면서. 그거면 끝난 거지 뭘 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대체 여기 사장님이 어떤 분이길래 널 그렇게 높이 평가하냐? 쥐뿔도 없는 놈인데.

쥐뿔이야 당연히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저런 소리를 들으니 발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는 당신은 쥐뿔 가지고 있는가!

그 정도는 아니잖아요.

나름 반박해보지만 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더 심한 소리를 시작한다.

아니, 뭐... 니가 인물이 훤칠하기를 하냐, 집에 돈이 많기를 하냐. 잘 하는 거라고는 앉아서 공부하고 이유없이 여자 꼬이는 거 딱 두 개 잖아. 키 큰 거, 요거까지 치면 세 개인가?

너무도 노골적인 표현이지만 그만큼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딱히 내가 무어라 답변을 못하고 있자니 형의 양 옆에 있는 아가씨들이 호들갑을 떤다.

어머, 우리 선생님한테 여자가 잘 꼬인다구요? 정말?

 어쩜, 어쩜~

그러자 형이 기가 살아서 또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아가씨들 들으라는 듯이 아주 큰 목소리로 말한다.

말도 말라니까. 내가 알기로는 우리 동생도 저 녀석 은근히 좋아하거든. 게다가 동생 친구 중에 가슴 딥따 애가 있는데, 아, 딱 요 언니 정도 되겠다.

...라고 하면서 형은 한 사람 건너에 있는 수지라고, 우리 가게에서 왕가슴 베스트 3에 들어가는 아가씨의 가슴을 덥썩 쥐었다. 그 아가씨는 물론 좌우의 아가씨들도 까르르 웃어 넘어간다. 아니, 저런 걸 당하면 화를 내야 정상이 아닌가. 그러나 형은 이런 분위기, 그러니까 여자들 끼고 술 마시는 분위기에 무척이나 능숙했고 분위기를 잘 이끌어 가고 있었다. 형은 그것을 몇 번 주물럭거리다가 놓았다.

음... 이 정도면 살짝 부족할 지도? 암튼 그런 애도 쟤한테 잠깐 코 꿰었었지, 우리가 학교에서 교생할 때는 쟤 담당인 선생이 여자였는데 그 선생도 은근히 쟤 좋아하고 막 그랬다니깐.

자기 동생에 대해 저렇게 언급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지혜가 그랬던 건 대체 어떻게 알았으며 지애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자기가 어떻게 저렇게 확신하는 거야! 반박문을 발표하려고 머리 속에서 표현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보다 먼저 형이 급소를 찔러온다.

게다가 너 지금 하영이 친구 중에 검사 하는 애랑도 종종 만나고 있지?

깜짝 놀랐다. 송화는 자신이 나를 만나는 것을 항상 감추고 싶어했다. 뭐, 정식으로 사귀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섹스파트너로 만나고 있는 건데 어찌 자랑하냐 싶은 그 심정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나도 뭐,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스타일이 아니기도 하고. 그런데 형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대체?

헉... 그걸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어. 임마.

전부터 느꼈지만 형은 겉보기와 달리 전혀 둔탱이가 아니다. 그냥 보기에는 곰 같지만... 아니, 그냥 곰이지만 속에는 틀림없이 사람이 들어앉아 있는 곰이었다. 그것도 아주 예민하고 영민한 사람 말이다. 형의 이야기에 흥미로운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던 아가씨들은 이내 자신들이 아는 나의 여자관계를 떠들기 시작했다. 난 깜짝 놀랐다. 이들이 말을 안하고 있어서 그렇지 그들은 내가 이전부터 선영이와 관계가 있었다는 걸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또한 상당수는 내가 유미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워낙 그 쪽으로 투철하게 발달하신 분들이다 보니 그런가.

저...여기서는 제 프라이버시 같은 건 존중되지 않는 겁니까?

손 하나를 들고 가련하게 물어보지만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왁자하게 웃으면서 넘어갈 뿐이다. 형은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맞다. 너 지금 유진이 과외도 하고 있다고 했지? 야, 저거 진짜 잘 지켜봐야 돼. 저런 무서운 놈의 마수에 귀여운 여고생이 훌렁 넘어가버리면 어쩌란 말이야. 이건 국가적 손실이라고.

국가의 손실이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지는 미처 몰랐습니다만... 애써 형의 약점을 생각해내어 반격해 본다.

형은 겉보기에 딸 뻘로 보이는 현아를 꼬셔서 다니잖아요!

 그래서, 부럽냐?

 아뇨!

 그렇겠지! 나는 겉보기에 여고생으로 보이는 여대생이지만 너는 진짜 여고생을 꼬시고 있는 중이니까!

반격의 창 끝은 무뎌지고 나는 낙마를 하고 만다. 그렇게 다시 또 바보가 된다. 늘 쓸데없는 소리 잘 하고 날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리길 잘하는 형이야 그렇다 치고 이 아가씨들은 대체... 테이블이나 옆 사람을 두드려 가며 웃는 건 물론 허리를 잡고 아주 그냥 신명나게 웃어 제끼고 있다. 어쩌면 자기들 사장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을 두고 너무 신나게 웃는 거 아닐까 몰라. 나중에 따로 불러다가 엄히.... 아, 잠깐. 은연중에 내가 사장이 되리란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으으. 아, 안된다. 좀 더 심사숙고 해봐야 돼. 내 얼굴에 드러난 고민을 읽은 걸까. 형은 내게 재차 물었다.

아, 그래서 말야. 정말 여기 사장 안 맡을 거야?

 아직 결정 안 했어요.

 야, 왜 이렇게 좋은 걸 마다해. 내가 사장 되면 말야, 여기 아가씨들이랑 일단 하루에 한 분씩 개별 면담을 하겠어.

그러면서 형은 자기 옆에 앉은 아가씨 한 명을 지목하더니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묻는다.

음, 이름이?

 민지요.

 좋아요. 민지 양. ROSE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신임사장 최한석입니다. 지금부터 면접을 시작하죠. 일단 자신에게 있어 가장 자신있는 부위가 어디죠?

형의 혼신의 연기에 다들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는다. 민지도 형이 뭘 하고 싶어하는지 눈치챈 모양이다. 그녀는 자신의 양 가슴을 두 손으로 받쳐 들며 말한다.

수지보단 좀 덜하지만 그래도 크고 이쁜 가슴?

아가씨들의 야유가 쏟아진다. 개중에는 내가 더 이뻐! 라든가 내가 더 커!, 아니면 너 실리콘 팩 넣었잖아! 같은..... 소리가 섞여 다수 섞여 있었다. 어쩐지 낯설지가 않은 저 자세와 이런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 때 카페 여종업원의 몸매에 이상하리만큼 눈을 번뜩이던 유진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녀석은 사춘기 이전의 사고 형성 과정부터 이런 아가씨들이랑 지냈을테니까 말이다. 형의 연기는 계속 되었다.

좋아. 그러면 어디 민지 양의 가슴을 검사해볼까. 자, 까~세요.

여태 근엄하게 이야기하다가 막판에 아주 느끼하게 변모하는 형의 목소리에 또 다시 다들 까르르. 저게 뭐가 그리 웃기다는 거야. 난 도대체 적응이 안 된다. 민지 역시 깔깔 웃으면서 형을 살짝 밀쳐낸다.

어유, 사장님 변태~!

그러자 형은 껄껄 웃으면서 앞에 있는 잔을 들었다. 아가씨 한 명이 얼른 맥주로 채워준다.

그러니까 나같이 이상한 놈이 사장 되는 것보다는 재미는 없지만 그래도 사람은 성실한 한석이 같은 애가 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렇지?

아가씨들이 한 목소리로, 네~하고 외친다. 네네, 아유, 감사합니다. 감사해서 눈물이 다 날라 그러네. 다른 건 몰라도 아까 형이 날 놀려 먹을 때 아주 크게 웃고 있던 아가씨 면면을 기억해둔다. 형은 아가씨들을 재촉하여 다들 잔을 채우게 했다. 그 많은 인원들이 잔을 채우느라 좀 부산해졌다. 지나는 글라스 하나를 가져다가 내 앞에도 맥주 한 잔을 놓아주었다. 형이 건배사를 소리 높여 외친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즐거운 만남과 신임 사장님의 취임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형의 건배제의에 모두 맥주를 꿀꺽꿀꺽. 역시 다들 잘 마신다. 누구 하나 빼는 사람 없이 잔 전부가 아주 말끔해졌다. 사람이 많다보니 테이블에 잔 내려놓는 소리만 해도 아주 난리도 아니다. 탁- 탁- 탁- 탁- 탁- 

그리고 짝짝짝.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돌아보니 방금 문에 들어선 사람이 가볍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유미였다. 그녀는 살짝 웃으면서 지나를 향해 말했다.

이제 슬슬 영업 시작할 준비 해야 되지 않나? 선영이 없다고 다들 군기 너무 없어지는데?

 어머, 마담언니.

지나가 일어나서 그녀에게 다가간다. 아무래도 선영이 없고나니 그녀가 그 다음인가 보다.

우리 가볍게 맥주만 하고 일어나려고 했어요. 그치? 얘들아, 가자.

지나의 선동 아닌 선동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우루루 빠져나갔다. 나가기 전에 우리 쪽을 향해 인사를 살포시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순식간에 룸에는 나와 태근이 형, 그리고 유미만 남았다. 

왜, 유미도 한 잔 하게?

내가 잔을 들어보이며 권하자 유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우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형, 여기가 이 가게 원래 사장님이신 유미 씨...

유미를 형에게 소개 하려고 돌아보는데, 뭔가 형의 표정이 이상했다.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잔뜩 일그러진 형의 표정이 몹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마치 굳어있는 입을 억지로 비집어 연 것처럼, 형은 아주 힘겹게 말을 꺼냈다.

미자 누나...

미자? 그 이름은? 뭔가 짐작가는 게 있어 고개를 홱 돌려보았다. 유미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차분하게 걸어오더니 이내 나와 태근이 형 사이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맥주 병을 들어 태근이 형의 손에 들린 잔에 가만히 채워준다.

정말 오랜만이네. 많이 변했구나, 너.

정말 사근사근하고 친근한 유미의 말투에서, 그녀와 태근이 형이 보통 사이가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형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표정으로 유미를 보며 말을 더듬거렸다.

미자 누나는..... 누나는.. .정말... 하나도 안 변했어요... 그대로....

 후후. 얘는. 안 변 했기는. 널 마지막으로 본 게 거의 십 오년전 인데 충분히 변했지.

형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저러다 비듬 떨어지겠다.

아뇨. 나.. 진짜 딱 한 눈에 누나인줄 알아봤어요. 어쩌면 그렇게도....

 왜, 아직도 이쁘다고?

 네.

 후후후. 고마워.

태근이 형과 유미가 아는 사이였다는 것도 놀랍지만 저 능글맞고 말 잘 하던 태근이 형이 무슨 선생님 앞에 선 국민학교 1학년 신입생 마냥 쩔쩔 매는 것도 정말 놀랍기 그지 없다. 유미야 평소에 다른 사람 대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었지만 군기가 바짝 든 형은 유미가 무슨 이야기만 해도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다 맞다고 하고 있었다. 

기분이 좀 묘했다. 유미와 나는 그 한 번의 관계 이후 줄곧 말을 놓고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형에게 나이 차이에 따른 존대를 하고 있었고... 그런데 그런 형이 유미에게 다시 꼬박꼬박 존대를 하고 있다. 흔히 빠른 년생 친구를 둔 동기나 재수생의 친구를 만났을 때 일어나는, 꼬인 족보가 여기서는 대체 몇 년의 간극을 두고 펼쳐지는 건지 모르겠다.

저기요.

손을 들고 두 사람의 대화에 조심스레 끼어들어 본다. 서로만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다.

누가 나한테 설명 좀 해주지 않겠어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너...너도 있었냐?

형은 그제서야 날 발견한 사람처럼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니, 이 사람아. 난 아까부터 여기 들어와 있었고 여태까지 당신이 계속해서 놀려 먹고 있었잖아! 대체 유미가 형에게 얼마나 존재이길래 그녀가 나타난 순간 이후부터는 거기에만 신경을 쏟고 있는 게야.

음... 뭐라고 해야 되나. 좀 복잡한데... 태근아. 내가 이야기 해도 되지?

 아, 네. 누나. 그렇게 하세요.

유미는 자기 앞에 잔을 하나 끌어다 놓고 맥주를 채웠다. 그리고 그걸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예전에 말야. 내가 잠깐 변덕이 생겨서 누구랑 결혼했었거든. 그 남자는 애가 둘이나 딸린 홀아비였어. 그 때 그 두 아이 중에 하나가 바로 쟤야. 태근이.

여상스러운 말투, 그리고 가볍게 손을 들어 태근이 형을 가리키는 유미를 보며 난 경악하고 만다.

겨...결혼? 유미가?

그러자 유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평생 결혼 한 번 안 해본 줄 알았어? 안 그러면 유진이가 대체 어디서 생겼겠어?

말이 되니 더 어처구니 없는 이 현상을, 난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

그녀의 말투나 행동에서, 쓰는 저도 깜빡깜빡 잊곤 하는데.. 유미는 애엄마였구요, 

레귤러 등장인물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자, 이제 다음 편은, 내일.

*

좋은 밤 되세요.

입을 딱 벌린 내가 다물지 못한 채 그러고 있으니 이번에는 태근이 형이 조심스럽게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너한테 이런 이야기까지 해도 되려나 모르겠는데... 사실 우리 아버지는 부인이 많았어. 효진이와 난 어머니가 달라. 두 분 다 사고로 일찍 돌아가시기도 했지만... 내가 우리 아버지 첫번째 부인에서 나온 자식이고 효진이는 두번째 부인에서 나온 자식이지. 그리고 여기 미자 누나가 우리 아버지의 세번째 부인이었어. 우리 집에 한 2년 정도 머물다가 금방 나가버리셨지만....

형은 몹시 애틋한 눈빛으로 유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자라는 이름, 내가 분명히 본 적 있다. 그녀가 내게 종종 맡기는 ROSE의 통장에서 말이다. 그리고 아까 본 사업자등록증에는 내 이름과 나란히 진미자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렇다. 그게 유미의 본명이었다. 난 그걸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굳이 내색하지 않았지만 형은 계속 그 이름으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면... 효진이가... 유진이 언니였단 말야? 유진이가... 태근이 형 동생이라고?

충격에 휩싸인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세 사람을 나란히 두고 본 적이 몇 번은 있지만 그들이 서로 닮았다고 생각이 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자기 학교 선배와 자기의 친구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아이의 오빠, 언니라는 걸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현실은 날 배반하고 말도 안 되는 소설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내 머리 속이 복잡해서 터져버릴 것만 같다. 그러나 이런 아노미에 빠져있는 내 상태는 아랑곳 하지 않고 태근이 형은 그저 다시 만난 유미가 반가워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왜 연락 한 번 하지 않으셨어요? 이렇게 가까이 살고 있으면서...

형의 어조에는 살짝 원망까지 섞여 있었다. 저 등치의 남자가 저런 말투를 내뱉으니 무섭기까지 하다. 나는 끄응...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미가 그녀 특유의 웃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아버지와의 약속이었으니까 말야. 유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너를 만나지 않는 게 그의 조건이었어. 그러니 너도 오늘 날 만날 걸 박 회장에게 이야기 하면 안 돼.

형이 눈을 크게 떴다.

네? 왜요?

 그런 게 있단다. 그치만 나도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말야, 다시 변덕이 생기더라고. 한 번 보고 싶어졌지. 그래서 보러 왔어.

그녀는 여전히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 중에서 난 무언가 감지하고 말았다. 아까 날 ROSE의 공동 사장으로 만들어주면서 했던 이야기나 지금 그녀가 한 이야기는 하나같이 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그 날 바에 나란히 앉아 이렇게 말았다. 곧 죽을 사람이다. 자신은..... 나도 모르게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만다. 그러나 형은 이런 걸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 때 그 아이가 유진이군요. 누나가 그런 상태로 이혼하고 나가버려서 효진이가 정말 많이 울면서 찾았었어요.

 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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