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65)

여태까지의 스토리 요약 

(데이트 첫 날, 다시 데이트 첫 날, Route B와 Route D, Route E, Route H, Route L를 거쳐서 현재까지)

- 전략 - 

한석은 새벽에 선영의 전화를 받는다. 갑작스럽게 어딘가 같이 가달라는 선영에게 한석은 좀 어렵다는 대답을 한다. 선영은 잘 지내라는 말로 전화를 끊고 한석은 그녀를 걱정한다.

새벽에 돌아온 마리를 만나 마리와 리사, 두 자매가 가지고 있는 비밀에 대해 듣는다. 두 사람은 어떤 알지 못하는 현상에 의해 서로의 감각과 감정을 일정 부분 공유하고 있다는 것.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지난 리사와의 관계가 마리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고 한석과 마리는 거의 할 뻔 한다. 그러나 예정보다 일찍 나타난 유진이 때문에 영화 보러 나가게 된다. 유진이와 다니면서 이상한 교회에 들어가는 소란과 철판 볶음밥집에서 일하는 택용을 본다. 같은 실습을 하는 현아와 친해지는 와중에 빅토리아(비키)라는 외국인 교사와도 얽히게 되는데 한국말에 능숙한 비키에게 여러번 골탕을 먹는다. 나중에 그녀가 가진 실연의 아픔을 알게되고 위로해준다. 난데없이 나타난 효진과 주말에 지혜를 만나러 갈 약속을 한다. 서울로 올라온 리사의 의외의 면을 보고 좀 어려워하자 리사는 마리를 부탁한다며 부산으로 도로 내려간다. 소란이네 어머니가 이상한 종교에 빠져있다는 상황을 듣는다. 마리와는 오해를 풀고 한 걸음 더 다가서지만 마리가 마음에 걸려하는 문제 때문에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진 못한다. 학교에서 유진이에게서 선영의 부재를 전해듣고 그녀가 걱정되어 일요일에 찾아가기로 마음 먹는다.

그날 저녁, 담당인 지애와 늦게까지 일을 하고 식사 겸 술을 한잔 하게 되는데 그곳에 유미가 등장한다. 한석에게 몹시 친근하게 구는 유미를 보고 화가 난 지애는 먼저 가버리고, 유미는 한석을 데리고 2차를 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해준다. 다음 날, 학교에서 퇴근하는 길에 유진이 결석한 소란을 만나러 가자고 제의하지만 효진의 약속을 대신하여 온 변호사 손하영을 따라간다. 맞선남과 있던 효진을 원치 않게 구출하고 집에서 둘이서 반알몸으로 엉켜 있다가 마리에게 그 장면을 들키고 만다. 마리는 그대로 뛰쳐나가 다시는 보지 못한다. 다음 날, 선영의 집에 들어간 한석은 유미에게 그 모습을 들키게 되고 자신이 선영의 과외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털어놓게 된다. 비밀엄수를 대가로 ROSE의 일을 돕기로 하고 착수금으로 노트북을 받는다. 학교에서 교생을 상대로 한 박태근을 노리는 투서가 왔다는 사실을 듣고 한석은 은애를 의심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투서를 출력하고 있던 현아를 발견한다. 그녀의 집으로 찾아간 한석은 사실 현아가 어릴 적 동네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아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사실은 그 투서가 은애가 시킨 것임을 알게된다. 한석은 태근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태근은 불같이 화를 내며 은애를 꼬여 내어 비밀주점에서 일하는 여자 접대부들을 통해 은애를 강제로 범한다. 뒷수습을 하영에게 맡기고 집으로 돌아온 한석은 자신의 행동이 마리와 리사를 실망시켰다는 사실을 듣고 괴로워한다. 그러다 문득 TV뉴스에 나온 소란의 모습을 보고 경찰서로 찾아가지만 문전박대를 당한다. 간신히 경찰병원에 소란이 있다는 사실을 얻어 듣고 그곳을 찾아가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기로 한다.

그러면 이제, 더블 데이트 Route O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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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경찰서를 벗어났다. 닭장차가 오더니 시위 중인 사람들을 하나씩 담요로 싸서 태워가는 광경이 보였다.

휴거...라고 했던가. 저들이 믿는다는 게? 게다가 중독이라니?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까 화면에 약 2초정도 비쳐졌던 소란의 모습을 떠올린다. 단 일주일 사이에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그래,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 경찰병원이든 뭐든 가보는 거다. 그러나 이내 또 걱정이 되는 것이.... 지금 경찰서도 천만다행인 요행으로 들어왔는데 병원도 그게 될까 싶었다. 윤태라는 경찰이 말한 걸 떠올려본다. 어지간한 빽. 그런게 나한테 있을 리가 있나.....

패배감과 무기력함에 젖어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공중전화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되든 안 되든... 도움을 요청해보아야 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박스 안으로 들어간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내가 가진 돈이라고는 50원짜리 동전 하나뿐이었다. 젠장. 아까 택시비도 겨우 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서 집까지도 걸어가야 할 판이다. 전화를 걸 수 있는 곳은 딱 한 군데 뿐이지만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곳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얼마 전부터 신세를 지고 있는 ROSE. 또 다른 하나는 무려 변호사를 대동하고 다니던 효진이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일단 ROSE에 전화를 걸기로 했다. 효진에게 신세를 거듭 지는 것 같아 미안했고 어차피 오늘 ROSE에 못 가겠다고 연락도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번호를 누른다. 신호가 간다.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누군가 바로 받았다. 다급한 마음에 바로 말했다.

여보세....

 지금~ 로즈에는 아무도 없답니다. 일이 좀 있어요. 그러니깐요. 오늘 내일은 휴무~ 제 말이 끝나면 삑 소리 날테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말씀하세요. 목소리가 마음에 들면 제가 연락드릴게요.

유미의 장난스러운 말투가 녹음된 자동응답기였다. 젠장. 며칠 전에 ROSE에서도 하나쯤 있어야 겠다며 유미가 주문했던 게 생각이 났다. 아무도 없다니. 어떻게 일요일 술집에 아무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어제 토요일에 유진이가 결석했던 게 생각났다. 지애에게 물어보니 무슨 친척이 상을 당했다는 연락이 왔었다고 했다. 그것 때문일까. 전날 새벽에 있었던 충격적인 일에 의해 정신과 몸이 많이 놀라 하루 종일 멍하게 있던 나는 ROSE에 전화할 생각도 없이 그대로 토요일 하루를 멍하게 보내버렸었다. 이런 머저리 최한석.....

삐익-

신호음이 났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 동전이 그렇게 헛되이 소모되었다. 공중전화박스를 나와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집까지 향했다. 종로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길은 지나치게 멀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과 안타까움에 온 몸에서 힘이 빠져서 그런지 걷기가 더 힘들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지쳐버린 몸을 침대에 던진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일찍 나갔다. 선생님들이 군데군데 모여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해도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혹시나 싶어 일단 가지고 온 교안을 지애의 책상 위에 올려두고 선생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어휴. 그러면 그게 어디 제대로 된 교회겠어요? 말세 온다고 재산 바치고 몸 바치고 막 그런 곳이라는데.

 우리 학교 애들 중에서도 거기에 갔던 애들이 있다고 하던데요.

 큰일입니다.

모여 있던 선생님 중에 한 분이 날 알아보고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 때 마침, 지애가 교무실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얼른 달려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송 선생님. 어제 말이죠...

내가 서두를 꺼내자 그녀의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애는 손을 들어 내 팔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최 선생. 우리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면 안 될까? 나 어제 새벽에 어디 좀 다녀오느라 살짝 피곤하거든?

 어딜 다녀오셨는데요?

 종로 경찰서. 참고인 조사로.

깜짝 놀랐다. 

어? 저도... 거기 저녁에 갔었는데....

 최 선생이? 거긴 뭐하러?

 그게 왜냐면요....

나는 예전에 소란이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와 어제 TV에서 본 녀석의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지애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면서 듣고 있었다. 말을 마치자 그녀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 첫 수업이지?

 아, 예.

 일단은 거기에 집중해. 퇴근하면... 나랑 어디 좀 가자.

고개를 끄덕이고 지애를 따라 교무회의에 참석했다. 머리 속이 복잡했다. 주임선생님이 뭐라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소란이에 대한 조사 때문에 지애가 불려갔었던 걸까. 그렇다면 신원이 확인되었다는 건데 어째서 풀려나지 않는 걸까. 그 경찰이 말했던 중독상태라는 건 대체 뭘 말하는 걸까.

...한석 씨.

 네넵?!

옆에 서 있는 지애가 팔꿈치로 툭툭 치는 통에 깜짝 놀랐다.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니 난감한 표정으로 회의석 맨 앞을 눈짓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니 엄한 표정의 교무주임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몇 번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더군요. 설마 서서 졸고 계신 건 아니었을테고.... 오늘부터 시작하는 수업이 많이 부담됩니까?

 아... 아뇨.

 흠흠. 그럼 다시 말씀드리죠. 이렇게 최한석 씨, 박태근씨, 양현아 씨. 세 분은 오늘부터 직접 수업을 시작합니다. 담당 분들과 평정 위원들께서는 신경 써주시길 바랍니다. 서서 조는 분이 없도록.

마지막 말은 명백히 날 가리키고 있었기에 날 뺀 나머지 사람들은 와- 하고 웃어버렸다. 교무주임의 말은 이어졌다.

박은애 씨는 오늘 아침에 전화가 와서 신변 상의 이유로 교직 이수를 포기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하더군요. 교감 선생님께도 말씀 드렸더니 없던 일로 하시겠다고 합니다. 다들 이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두루뭉실하게 이야기 하지만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보아 뭘 말하고 있는지 다들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태근이 형과 시선이 닿았다. 그는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버리고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현아는.... 아... 이럴 때 쟤를 보면 안 되는 건데 나도 모르게 쳐다보고 말았다. 눈이 마주치자 현아는 얼굴이 빨갛게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비난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왠지 그런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나머지 분들은 준비 잘 되었으리라 믿겠습니다. 결재 올라온 교안도 모두 내용이 좋았다고 평하셨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나머지 선생님들의 박수를 받으며 우리는 인사를 했다.오늘부터 우리 교생들이 실습을 시작하게 된다. 여태까지는 담당 교사가 수업을 하는 동안 배석하기만 했는데 이제 일주일동안 교생이 주도적으로 수업을 진행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 그동안 교안을 열심히 써서 올려 결재를 받아두었고 시간 나는 대로 빈교실에서 연습을 하곤 했다. 우리가 수업을 하는 동안 담당 교사는 물론 다른 교사도 한 명 더 수업에 들어와 평가를 하게 된다. 이 평가에서 우 이상을 받아야 최종 실습에 통과하게 된다.

회의가 끝나고 바로 수업이 있는 게 아니라서 남는 시간동안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교무실을 나섰다. 어느새 태근이 형이 따라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발로 판서해도 우는 준다고 하더라. 너무 쫄지 마라.

한숨을 내쉬었다.

칠판에 발로 글씨를 어떻게 써요. 체육 선생님은 그렇게 쓰면 오히려 더 묘기 점수를 받는 거 아녜요?

 그래? 그럼 내가 한 번 해볼까?

농담이니까 제발 쓸데없이 진지해지지마! 우리 둘이 별 시덥잖은 소리를 하며 화장실을 다녀왔다. 교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현아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나와 태근이 형은 오히려 평범하게 대하고 있는데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다.

죄송...해요. 그리고 그 일은....

 어? 뭐가?

현아가 태근이 형에게 사과를 하자 형은 시치미를 딱 뗀다. 이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굉장히 능글맞은 구석도 꽤 있다.

저기... 그게 그러니까요....

현아가 우물쭈물하며 말하려고 하는데 태근이 형이 말을 막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현아야.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러니 뭐가 미안한지는 도무지 모르겠지만 네가 미안하다고 하니까 사과를 받아줄게. 근데 원래 사과는 맨 입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 나한테 맛있는 거 사주면 다 용서해줄게.

형이 말하는 맛있는 거라니. 뭘까. 여태까지 형이 우리를 데려갔던 음식점들의 면면을 생각해 본다. 현아도 그걸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전 그렇게 비싼 건 살 돈이....

 푸하하하. 꼭 그런데 가자는 게 아냐. 네가 좋아하는 걸로 먹으러 가자. 여태까지 난 너한테 잘 보일려고 괜히 그런 데 더 간 거야. 사실 나 입 거칠어. 아무거나 잘 먹어.

씩씩하고 거칠 게 없는 형의 말투에서 호쾌함마저 느껴졌다. 현아가 조심스럽게 메뉴를 제시한다.

혹시, 아구찜 좋아하세요? 좀 매운데....

 아구찜? 좋지. 오늘 바로 갈래? 한석 군. 넌 어때?

어째 사람으로서 그런 터무니없는 음식을 먹으러 갈 생각인지 모르겠다. 손을 내저어 거부의사를 표했다. 설령 내가 그런 터무니 없는 걸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지애와 약속을 잡아두었기에 갈 수도 없었다. 두 분이서 가시라고 한사코 거절하고 물러났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둘은 잘 되었으면 좋겠다. 교무실로 돌아가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수업시간이 되어 지애를 따라 교실로 올라갔다. 잘 되었다고 해야 어쩌나.... 내 첫번째 수업은 1학년 3반, 바로 유진이와 소란이네 반이었다. 

안녕하세요. 기술, 가정을 맡은 최한석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해요.

허리를 숙여 인사해보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이전같지 않았다. 아이들의 시선은 소란의 빈 자리를 힐끔힐끔 살피고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도 이미 소문이 퍼진 걸지도 몰랐다. 나만 해도 뉴스에서 소란을 발견했을 정도이니.... 어떤 소문이 퍼져도 이상할게 없지 싶었다. 아침에 우연히 보게 된 신문에는 해당 교회에 대한 온갖 추측성 기사가 난무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위해 일부러 더 선정적으로 묘사된, 여신도들에게 행해진 난잡한 행위에 대한 기사도 실려있었다. 하긴 종로 바닥에서 그 난리를 쳐대던 교회였는데... 그에 대한 기사가 나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교탁에 서보니 바로 앞자리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소란이의 자리는 물론 유진이의 자리도 비어있었다. 지난 주 토요일에도 결석한 그 녀석의 출결란에는 친척 장례식 참석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때는 깊게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왠지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친척이라니... 유진에게 친척이 있었던가?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은 날 바라보고 있는 수십 명의 학생들에게 수업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교과서 80페이지를 펴주세요. 발명과 기술의 이해....항목을 여러분께 설명하겠습니다.

몇 주간 열심히 짜놓은 교안대로 수업을 진행해갔다. 말은 좀 떨렸지만 아이들의 시선을 받아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교실 뒤편에 서 있는 지애와 또 다른 평가 담당 선생의 눈빛이 날카롭다.

그럼... 간단한 도표를 그려 이 내용을 설명해보겠습니다.

분필을 손에 들고 칠판에 도표를 그렸다. 그런 식으로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래도 교안에 적힌대로, 실수하지 않고 수업을 계속해 나갔다. 잘 한건가 싶었다. 확신이 없었다. 간신히 첫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섰을 때 지애가 등을 두드리며 잘 했다고 하는 걸 보아 그리 나쁘게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런 식으로 하루가 끝나고 지애와 나는 같이 퇴근했다. 학교 뒤쪽 길로 태근이 형과 현아가 함께 걸어가는 게 보였다.

뭐해요? 얼른 타요.

 아, 네.

지애의 차에 올라탔다. 학교를 빠져나가면서 지애가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일단 지금 가는 곳이 어디인지 말해 줄게.

 네.

 아침에도 잠깐 이야기 했지만.... 경찰서에는 이미 다녀왔고, 조사 내용도 전해 들었어. 그래서 지금 가는 곳은 경찰병원이야.

 아..... 그렇군요.

어제 가려다 못 간 일이 생각났다. 이제서야 갈 수 있겠다 싶었다. 장소가 장소다 보니 우리 둘은 별다른 이야기도 없이 계속 갔다. 잠시 후, 병원에 도착해서 차를 대놓고 안에 들어갔다. 접수처는 평범한 병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떻게 오셨죠?

 저기.... 종로서에서 연락 받고 왔는데요, 신원 확인요청으로....

 이름이요?

 양소란이라고 합니다.

지애가 접수하고 있는 동안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분위기가 많이 어수선했다. 다급하게 오가는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그런데 등 뒤에서 들려온 지애의 비명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접수처의 직원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다시 말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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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블 데이트 Route O 시작합니다.

*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에 올리는 주제에 드리는 말씀으로 죄송하지만... 

이번 루트는 사나흘에 한 번 꼴로 연재될 듯 합니다. 내용에 대해 고민이 많네요.

빈소는 경찰병원 지하에 있는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장례업을 전문으로 하는 곳들과는 다르게 최소한의 공간과 추모만을 허락한, 간소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이었다. 다행히도 옷을 빌려주는 곳은 있어서 검은 정장을 빌려 입을 수 있었다. 학교에 연락을 마치고 돌아온 지애도 빌려온 검은 옷으로 차려 입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아직 사진도 채 들어있지 않은 영정의 빈 틀을 보며 침묵했다. 좌우에 있는 다른 빈소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곡 소리를 들으며 비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나라도 곡을 하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아까 한참 울었던 지애는 벌개진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 옆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물어보았다.

유진이....

 응?

 유진이한테도... 연락하셨나요?

 반장 말이구나. 당직 선생님한테 비상연락망도 돌려달라고 했으니 연락이 갔겠지.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 끝에 있는 공중전화로 가서 유진이네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ROSE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자동응답기가 아닌 사람이 받았다. 유미였다.

유미 씨, 저예요. 한석이.

 어머, 선생님. 안 그래도 저도 몇 번 연락했었는데... 통 연락이 안 되어서 말이죠. 가게 비어있었을 텐데 헛걸음 하지 않으셨나 몰라요.

어쩐지 유미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주말에 무슨 일 있었어요? 유진이도 학교 안 나오던데... 그리고 저도 일이 좀 있어서 전화를 드렸었거든요.

 아... 그게 말이죠....

유미는 다소 주저하다가 선영의 부친상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깜짝 놀란 내가 어떻게 된거냐고 묻자 그녀는 지난 몇 주 동안 선영이 어디에 가 있었는지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다가 지난 토요일 새벽에 선영의 아버지께서 임종하셨고 그 연락을 받은 ROSE 사람들과 유진이는 충남과 벽제 장지에 다녀왔다고 한다.

2일장이라서 일요일 저녁에 집에 오긴 했는데요... 먼 길 다녀오느라 유진이가 하도 피곤해 보여서 오늘은 학교에 가지 말라고 했어요. 그거 때문에 전화 하신 거예요?

 아뇨.. 딱히 그게 문제는 아닌데...

유미한테 이야기를 해도 되려나 한참 고민했다. 혹시 유진이가 거기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전화를 건 것 뿐이었다. 소란이 이야기까지 꺼내는 건 괜한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어서 그냥 끊으려고 했다. 그런데 유미가 묘한 소리를 했다.

선생님 잘못이 아니에요.

 네?

갑자기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 싶겠지만.... 지금 내 상황이, 지금 내 마음이 그녀의 말을 결코 가벼이 듣지 못 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무 자책하거나 슬퍼하실 필요 없어요. 사람의 운명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노력이나 행위로 인해서 바뀌는 경우는 아주 드물어요. 그저 거대한 물줄기에서 흘러나오는 하나의...

소란이 이야기는 그녀에게 꺼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말이다. 무례한 줄은 알지만 말을 끊고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그건, 보이는 사람으로서의 의견입니까? 그런 거예요?

유미는 선선히 대답했다.

네.

수화기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던 분노가 여기에 쏟아진다.

그러면.... 왜! 왜.... 말해주지 않았어요... 다 보고 있으면서.... 구덩이가 있는 줄 알면서....그러면서도 어떻게....

유미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정말 차분하고, 차가웠다.

제가 말했죠. 저는 그저 보고 있을 뿐이라구요.

 보고 있었다면... 보고 있었다면... 미리 말해 줄 수도 있었잖아요. 위험이 있으니 피하라고...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리고 또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죠. 어떻게 그렇게.... 당신은 정말이지...

 잔인한가요?

 그래요. 잔인해요! 당신은 보고 있으면서 웃고 있었겠죠. 그렇겠죠?

유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나를 더 화나게 했다. 

그렇게 언제나 웃고 있으면서.... 이런 참혹한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어떻게 이야기 해주지 않을 수 있죠? 어쩜 그렇게 잔인한 건데요. 게다가 이 아이는 유진이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는데....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어린 아이가... 대체...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마나 괴로웠으면.... 스스로..... 흑.....

운다고 해서 떠난 소란이가 돌아오진 않는다. 죽은 아이가 살아나지 않는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뜨거운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내 울음을 잠자코 견뎌내고 있던 유미가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먼저 말했잖아요. 선생님 잘못이 아니라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삶이 이렇게 흘러가 버린 것에 대해서 그 누구도 탓할 순 없어요. 물론 사람의 죄는 남아요. 그 죄는 당사자의 몫이죠. 그리고 슬픔은 나눌 수 있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미래라고 하는 거예요. 설령 제가 보았고, 제가 미리 이야기했다고 해도 변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오직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순간순간이 진실이에요. 제가 보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래도....그래도.....

 만약 그 아이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선생님이라면, 저 아이가 살아나는 대신 선생님이 평생 고통받는 길이 있었다면 선뜻 택했을까요? 그걸 말로 해준다고, 알아듣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을까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말했잖아요. 우리는 각자 보는 것이 다르다고... 보는 것이 다른 사람끼리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건 말도 안돼요. 미안하지만 먼저 끊겠어요. 다음에,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 하고 싶네요.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더 이상 아무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그저 끊어진 신호음만 내고 있는 수화기를 들고 한참을 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힐끔거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얼마 후, 반 아이들과 학교 선생님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눈물을 닦아내고 그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유진이는 보이지 않았다. 졸지에 반친구를 잃은 아이들이 내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선생님들도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었다. 

남자 선생님 몇 분이 나를 불러내어 장례식장 후문에 있는 벤치로 나갔다. 담배를 권하기에 사양할까 하다가 한 개비 받아 물었다. 대학 신입생 때 술 마시다가 기분 삼아 몇 개비 피워본 이후 처음이었다. 한 모금 빨아본다. 쓰디썼다. 그러나 뱉어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담배 연기로 가슴을 채우면, 비어버린 허전함이 채워질 수 있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다른 남자 선생님들은 참 열심히도 뻑뻑거리며 피워대었다.

후우. 그래서, 자살...이라고?

 ...네. 간호사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천장에 드러나 있는 배관에는 베갯잇과 수건을 묶어 만든 끈이 매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하아.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해 줄 물건을 직접 만들면서 그 아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누구를 원망하고 또 누구를 찾았을까. 

대체 그 교회가 뭐하는 곳이길래 그렇게 난리랍니까?

누군가의 질문에 사회 선생님인 박 선생이 대답했다.

내년 초에 휴거가 온다고, 휴거가 오면 말세라고 외치면서 직장이고 가정이고 다 버리고 들어간 사람들이 잔뜩 있는 교회라고 하더군요. 이상한 마약 같은 것도 할 정도로 막장이라고 하는데 어떤 검사가 잠입수사 끝에 일망타진 했다고는 합니다.... 다만, 정작 중요한 담임목사는 도망 갔더고 하더군요. 나머지 교인들은 종로서 앞에서 종교탄압 그만하라면서 계속 시위 중이고...

다들 어이없다고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이상한 곳에 있던 소란이가 대체 어떤 꼴을 당했을지, 그리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까지 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이 세상에 대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절망감에 빠진 것이었을까. 도무지 알 수 없다. 매캐한 담배 연기 사이로 그 때 종로에서 보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찬송가를 부르며 자신들의 믿음을 부르짖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소란이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담배 두 대째를 피우고 있는데 장례식장 직원이 와서 영정사진과 제사상은 어떻게 할 건지를 물어왔다. 소란이네 집과는 이전부터 계속 연락이 안 되고 있었다. 선생님 한 분이 생활기록부에 있는 소란이 사진을 가져오셨다고 했다. 그걸 건네받아 직원에게 주었다. 주기 직전, 잠깐 들여다 본다. 입학하면서 찍었을 게 분명한, 교복을 입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작은 사진을 들여다 보는 것은 못내 고통스러웠다. 직원에게 그 사진을 확대해서 영정사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제사상은 기본으로 해 달라고 했다. 종교는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기에 무심코 스님 있냐고 물어봤다. 근처 포교원에서 불러 줄 수 있다고 하기에 축문이나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직원이 알았다며 물러났다.

다들 여기 계셨네요.

 아, 송 선생님...

지애가 문을 열고 나오며 옆에 있는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지애를 위로했다. 담당하는 학생이 이렇게 되는 경우도 꽤 드문 경우라 지애의 충격이 몹시 커 보였다. 나와 병원에 도착해서 접수대에서 그 사실을 들었을 때, 그녀의 놀란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자리에 쓰러져 눈물을 흘리는 지애를 부축해야만 했다. 연락을 받고 내려온 담당 형사를 만났더니 다른 의미로의 신원확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형사와 그녀 단 둘이 영안실에 들어갔다 왔다. 나도 따라갈까 싶었는데 그녀가 만류했다. 

최 선생... 원래 담배 태웠어?

 아뇨. 오늘만...

 그래, 그럼 나도 한 대 줘 봐.

나에겐 담배가 없었다. 대신 사회 선생님이 담뱃갑을 내밀었다. 지애가 그걸 받아들고 한 개비를 뽑아 불을 붙인다. 일련의 폼이 전혀 서툴지 않았다. 학교에서 남자 선생끼리 모여 담배를 피는 일은 흔하지만 거기에 여자 선생이 거기에 끼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지금의 모습은 몹시 이색적인 광경이었지만 누구 하나 그녀에게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지애의 표정은 착잡했고 서글퍼 보였다.

내 탓이야.

다른 선생님들이 먼저 들어가고 그녀와 나 단둘이 남자, 그녀는 담배 연기를 길게 뽑아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렇게 무단 결석이 이어지고... 집에도 연락이 안 되고.... 걔 엄마한테서 이상한 전화가 왔을 때 알아차렸어야 하는 건데... 그러질 못 했어.

 송 선생님....

그녀의 자책에 가슴이 미어졌다. 나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녀석의 사연을 듣고 그것에 대해 함께 고민해 줄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질 못 했다.

위에서는 인성교육해라, 전인교육해라... 이딴 소리 수시로 해대는데 고작 한 명의 선생이 해봐야 얼마나 커버할 수 있겠어. 애들 받아서 다시 내보낼 때까지 사고 안 치고... 문제 안 일으키고.... 엄한 일에 엮이지 않고... 그렇게 하는 게 고작이라고.

 ......

 실망스럽지?

 뭐가요?

 최 선생이 교육에 어떤 뜻이 있어서 교생을 하겠다고 나섰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도 하나의 직업일 뿐이야. 하루하루 문제 생기지 않고 지나가면 그럭저럭 월급 나오고 먹고 살만한... 그런 뻔한 직업 중의 하나라고. 교육에 정말 열정이 있어서 오는 사람보다는 그런 점에 끌려서 오는 사람이 더 많을걸? 아니다. 오히려 열정을 가지고 온 사람도 식게 만드는... 그런 곳이야.

자조 섞인 웃음을 맥없이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처연해보였다. 십년은 더 늙어보였다. 나 역시 교육에 어떤 큰 뜻이 있다기보다는 해두면 나중에 도움이라도 되겠다는 생각에 교육학점을 이수했을 뿐이라 매우 뜨끔했다.

이런 일이 아주 드문 건 아니야. 재학중이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은 졸업하고 대학 잘 보냈다고 생각한 애가 술 먹다 죽고 놀러 가다 죽고... 그런 연락이 가끔 와. 그럴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어차피 죽어 없어질 아이들을 가르친답시고 폼이나 잡고 있는 나는 대체 뭐 하는 년일까.

 송 선생님....지나친 생각이에요.

 아아, 걱정마. 그렇다고 내가 이 월급 꼬박꼬박 나오는 일을 그만두겠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그저 앞으로 내 후배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안 좋은 면을 먼저 보여주게 되어 푸념을 했을 뿐이야.

필터까지 다 타버린 담배를 들고 있던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거기에 소란이가 있는 것처럼. 그러나 거기에는 흘러간 방향도, 흘러온 방향도 알 수 없는 담배 연기만이 어지러이 엉켜 춤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그 화려한 춤도 아주 잠시 뿐, 이내 공기 속으로 흩어져 사라져 가고 담배 냄새만이 흐릿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아련하고 서글픈 광경을 보고 느끼면서, 문득 유미가 바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제가 느끼는, 아니, 이 경우에는 맡는 거라고 해야 하겠죠? 미래라는 건 아까 말한 그런 어렴풋한 냄새가 적어도 수만 배 정도 희석된 정도의 냄새라고 보시면 되요. 게다가 냄새라는 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실려 다니잖아요? 어디서 불어오는지도 모를 바람에 쓸려 갑자기 사라졌다가 또 나타나기도 하고... 그런 거예요.

구덩이의 비유를 들며 이야기 하던 그녀가 보았다는 미래는 대체 어떤 모양일지 가히 짐작조차 가질 않는다. 희미한 냄새 같다고 하는 그런 것도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방금 전 눈앞에서 사라진 연기조차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데 과연 그녀가 본다는 모습은 또 어떤 형상을 하고 어떻게 냄새가 날지 모르겠다. 그제서야 조금 후회가 되었다. 그녀를 그런 식으로 다그치면 안되는 거였다. 그녀는 신이 아니니까 말이다. 나중에 보면 사과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들어가지. 최 선생. 일단 오늘 밤샘은 내가 할테니 최 선생은 내일 부탁 좀 할게. 그 다음에 발인하고 장지는 내가 아는 사람에게 물어볼 테니까. 하아. 진짜 이런 경우에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그래도 지애는 나보다 아는 게 많았다. 나 역시 장례 같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 투성이었으니까. 소란이의 가족은 여전히 연락이 되질 않았고 친척 같은 것을 알아보기도 당장은 곤란했다. 복도를 따라 빈소로 돌아가면서 여기서의 비용이나 앞으로 들어갈 장례절차 등,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논의했다. 그런데 저쪽이 뭔가 굉장히 시끄럽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빈소 입구에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 빈소... 아니, 소란이의 빈소였다.

무슨 일이야?

인파에 밀려난 학생 하나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안에서는 고성과 뭔가 깨지는 소리 같은 게 이어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녀석은 택용이었다. 녀석의 표정이 몹시 일그러져 있었다. 녀석은 날 보고 다급하게 말했다.

아, 선생님! 지금 안에서..

 안에서 뭐?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스님을 끌어내고....

 뭐라고?

사람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 안쪽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하나하나 헤치고 간신히 몸을 비집으며 들어간 내 눈에 첫번째로 비춰진 것은 우선 깨어진 목탁이었다. 아니, 한 때 목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반동가리 구 모양의 나무토막... 목탁이 원래 두드리는 건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게 깨질 정도로 두드리는 건 아니지 않나? 황당한 생각에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닥에 주저 앉은 스님 한 분을 둘러싸고 욕을 퍼붓고 있었다. 욕의 내용은 주로 마귀니 사탄이니 하는.... 무척이나 기독교스러운 욕설이었다. 게다가 욕설 뿐만 아니라 발길질도 스님에게 쏟아지고 있다. 

이봐요! 지금 당신들 뭐하는 거야! 그만두지 못해?

개중에서 가장 열심히 발길질을 하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여자의 어깨를 짚었더니 고개를 홱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어쩐지 낯이 익다. 어디서 본 얼굴이다. 몹시 못 생긴 그 여자는 쇠그릇이 깨지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지금 우리 성도를 보내는 성스러운 곳에서 삿된 패악을 저지르고 있는 악마를 처단하는 중입니다. 방해하지 마시죠.

기가 막혔다.

악마? 저 분은 사람입니다. 악마가 아니라.

그러자 여자는 태어나서 그런 헛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이적이 있어도 믿지 않나니!! 불교라는 미신은 한낱 인간의 육체를 벗어나지 못 한 사람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대대손손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는 사이비 무속입니다. 그런 분이 이런 성스러운 자리에서....

기가 찼다. 그래, 이제서야 니가 누군지 똑똑히 기억 났다. 종로에서 본 군중의 맨 앞에 있던 여자. 그 여자가 바로 이 여자였다. 나는 여자의 헛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면서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스님을 부축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시게 했다. 이미 한쪽이 시퍼렇게 부풀어 오른 것은 물론 입술이 터지고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스님의 얼굴을 보니 속이 뒤집혀 졌다. 내가 비록 불교를 믿는 사람도 아니고 이 분이 내가 평소에 존경하는 스님이라거나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인간적으로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몰매를 가해도 되는 건가? 그것도 여러 사람이 한 사람에게 이렇게 일방적으로? 나같으면 분통이 터져서 때린 사람들에게 욕이라도 퍼부어야 마음이 풀릴텐데... 스님은 꿋꿋한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합장을 했다.

허허... 나무관세음보살....

다시 이쪽을 향해 달려드려는 교인들을 등으로 밀쳐내고 스님을 바깥으로 모셨다.

스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만.... 나중에 다시 모시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시죠.

입구에 나타난 장례식장 직원에게 스님을 인계했다. 가사 귀퉁이가 박박 찢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부셔진 목탁을 주워 들었다. 등 뒤에서는 악마를 몰아냈다고 외치는 인간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할렐루야! 그들은 소란이를 위한 예배를 하겠다며 둥글게 둘러앉더니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담대하게 싸울지라 저기 악한 적병과~ 심판날과 멸망의 날 네가 섰는 눈 앞에 곧 다가오리라.

아아. 역시 찬송가는 말이다. 운율이 아주 정직한 것이.... 앞 부분만 들으면 뒷 부분도 저절로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라서 참 좋다. 소싯적에 동네에 있는 교회에 부활절 달걀 얻으러 갔을 때나, 얼마 전에 노예 생활하면서 교회 끌려 다닐 때도 곧잘 그런 식으로 따라 불렀지.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곧 승리하리라~

후렴을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다. 그러면서 손에 든 목탁의 무게를 가늠해보고 아까 그 여자의 어깨를 다시 두드렸다. 그 여자가 무표정하게 이쪽을 돌아보기에 싱긋 웃어주었다. 그리고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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