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65)

どうぞ.

급사가 아까 주문한 것을 갖다주며 말했다. 에에..이럴 때는 뭐라고 하는 거더라. 효진이한테 배웠었는데.... 역시 생각이 안 난다. 그냥 입에 익은대로 영어로 답하고 만다.

Thank you-

급사는 내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돌아갔다. 내가 앉은 기다란 비치체어 옆에는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놓인, 방금 급사가 가져다 놓은 세 잔의 열대과일 주스를 바라본다. 색이 무척 곱다.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이고 침이 저절로 넘어간다. 굳이 가격으로 따지자면 강남의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한 잔에 12,000원은 족히 받고도 남을 정도로 고급스럽다. 아니지, 여기서는 음.... 엔화로 해야 되니까..... 몇 엔이지.... 음.... 아이고.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어차피 돈 내고 먹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여기서는 물품 구매를 제외한 기본적인 식사와 간식, 모든 부대시설 이용이 무제한 공짜다. 엄밀히 말하면 공짜가 아니라 이미 돈을 잔뜩 내고 들어온 사람들이니 이용할 권리가 있다고 해야 하나.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본다. 탁 트인 선상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삼삼오오 모여 바다를 보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고 나처럼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쪽에 커다랗게 자리한 수영장은 한가롭게 수영하는 사람들이 노닐고 있었다. 

'정말 별세계구나....'

처음에 효진이가 배타고 여행가는 거라고 하기에 예전에 선배들 낚시갈 때 따라가 보았던 통통배 정도를 머리 속에서 그려 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가져다 준 카탈로그에 그려진 배의 크기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컸다. 합성이나 뭐 그런 건 줄 알았다. 나중에 실제로 보게 되었을 때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무진장 컸다. 진짜진짜 컸다. 겉보기에도 컸고 안에 들어가 둘러본 시설도 무지하게 컸다. 전체는 몇 개의 층으로 되어 있는 데다가 도서관, 영화관, 사우나실, 마사지실은 물론 콘서트 장까지 갖춰져 있었다. 내부구조의 방대함도 그렇고 우리가 묵는 방 크기도 그렇고 주위를 둘러 볼 때 보이는 바다 역시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컸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역시....

음료수 왔네? 안 부르고 뭐했어?

 어? 어... 생각 좀 하느라.

지혜 가슴이 아닐까 싶다..... 걸을 때마다 그녀의 몸짓에 따라 출렁거리는 가슴을 보며 참으로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주변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그곳에 쏠린다. 밤이 되면 저 가슴을 물고 빨고 주무르며 놀 수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참 자랑스러울 정도다. 손바닥만한 천이 가슴을 가리고 끈으로 그걸 유지하고 있는 탑과 측면 부분이 끈으로 된 팬티로 이루어진 검은 색 비키니는 너무도 고마운 차림이었다. 그것만으로 가리기에 그녀의 몸매는 가히 폭발적이다. 목에 걸린 끈이 아슬아슬하다. 잠깐, 저거, 저 풍만하기 이를 데 없는 가슴의 무게를 끈 만으로 견딜 수 있는 건가. 끈에 무슨 철제 심줄이라도 들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직물로 된 끈이 저 가슴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것일까. 몹시 궁금하니 나중에 내가 직접 끌러보고 재질을 확인해보아야 겠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 부끄러우니까.

가슴에 너무 시선을 집중한 걸까. 그렇지만 그렇게 출렁이며 다가오는 것에서 눈을 뗄 만큼 남자란 동물은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나는 전혀 부정하지 않고 선선히 인정했다.

안 보고 있기엔 너무 아깝잖아. 보기 좋은데, 뭘.

 아이, 차암.

지혜는 옆 자리에 놓인 타월을 들어 몸에 둘렀다. 나는 물론, 인근의 할아버지들도 몹시 아쉬운 기색을 보이는 걸로 보아 남자새끼들은 정말 다 하나같다. 인종도 국경도 나이도 필요없다. 그저 빵빵한 여자 몸라면 다들 환장을 하지. 암, 그렇고 말고. 시각적인 자극에 무너지는 거, 그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라는 걸까.

왜 또 가리고 있어? 기껏 입혀두었더니.

물론 여자 중에서도 예외는 있다. 물빛 비키니를 입고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내 여자, 효진이 역시 지혜의 몸이라면 환장을 하는 사람 중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재원이다. 그녀가 다가오며 지혜에게 핀잔을 던진다. 자기가 애써 입혔는데 왜 가리냐는 투다. 하하. 역시 그녀도 지혜 감상용으로 저런 비키니를 고른 게 틀림없다. 지혜는 내 우측에 앉아있었기에 효진은 내 왼쪽 의자로 와서 앉았다.

오늘 아침, 오늘은 뭐하며 놀까 고민하던 효진은 갑자기 풀장에서 수영을 하자고 선언했다. 지혜가 가부를 표시하기도 전에 매점에 득달같이 달려가 몇 개의 수영복을 골라왔다. 싫다고 도망가려는 지혜를 붙잡아 내 앞에서 번갈아 입혀보며 선보이는, 그리고 자기도 이것저것 갈아 입어보는 아주 참 고마운 행사를 갖더니 결국 이걸로 결정한 모양이다. 두 사람은 신이 나서 수영을 하러 갔고, 아, 아니지. 신이 난 건 효진이 뿐이고 지혜는 거의 도살장 소 끌려가듯 갔구나. 암튼. 그렇게 놀고 있는 동안 나는 풀장 사이드에 놓인 비치체어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목이 마르다는 지혜의 요청에 따라 잘 되지도 않는 영어로 주스를 주문해두었다. 물에 젖은 수영복에 감싸인 몸매를 몹시 고맙게 감상하며 그녀들에게 음료수를 건네 주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오늘 밤에는 수영복 입고 하자고 해볼까....'

이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또한 매우 현실적으로 임하며 효진을 보는데 딱 눈이 마주친다. 둥글게 말린 빨대로 망고주스를 열심히 빨던 효진은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딱 가리키며 말했다.

앗! 한석이 표정이 음흉해! 뭔가 이상한 거 생각하고 있구나! 그치?!

좀 뜨끔했지만 이럴 때는 아주 좋은 대처 방법이 있다.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응. 니가 하고 있는 딱 그 생각을 나도 지금 하고 있어.

라고 대답하자 효진은 씨익 웃으면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따 수영복 입고서.... 셋이 한 번 해볼까? 어때?

역시 효진이다. 역시 내 마누라다. 몹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뒤에서 또 다른 마누라인 지혜가 내 등을 두드린다. 아프긴 하지만 견딜만 하다. 그렇게 앙탈을 암만 부려도 네가 결코 우리가 하자는 대로 안 할 사람은 아니잖아... 막상 하기 시작하면 잘 하면서 왜 그래....

우리는 지금 동남아 쪽을 향해 항해하는 크루즈 선에 탑승하고 있다. 보통 크루즈가 아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엄청나게 크며 또 엄청나게 비싸다. 요코하마에서 출항한지 이제 막 일주일 정도 되었는데 앞으로 90여일은 더 타고 가야 일정이 끝난다고 한다. 앞으로의 코스는 인도, 아프리카, 포르투칼, 이집트, 이탈리아 등등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세계일주인 셈이다. 하루 승선 요금은 일인당 3만엔. 전체 일정으로 따져보았을때 일인당 300만엔, 우리 돈으로 3000만원에 다다르는 엄청난 호화여행이다. 우리 셋이 가는 걸 합치면 거의 1억.... 하아. 대체 그 정도의 돈이 어느 정도 금액인지 감이 안 잡힌다. 안 잡혀. 암튼 그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비싸지만 그래도 효진은 흔쾌히 지불했다. 

아니, 그녀가 지불했다기 보단 장인어른, 박 회장님이 지불했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 나와 결혼하고, 그와 동시에 지혜도 데리고 살겠다고 선언하는 자기 딸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그의 표정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할 말을 잃은 그는 딸 설득하기를 포기했는지 내게 상의했다. 그나마 자네가 가장 정상인 같군.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라고 말하는 그의 어조에서는 깊은 체념이 묻어났다. 그와 밤늦도록 나와 효진의 관계, 효진과 지혜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었다. 박 회장이 딴 양주는 독했고 그 술의 힘을 빌어 참 많은 것을 털어 놓았다. 그 중에는 우리 세 사람의 잠자리에 대한 것도 있었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효진이도 자네 씨를 받긴 받는다는 거군.

어떻게 결론이 그렇게 납니까만은.... 그는 한 가지 전제조건을 달아 우리의 관계를 허락했다.

어디 멀리 보내줄테니 그 사이에 일단 효진이를 임신시키게. 그러면 두 사람의 결혼을 진행해주지. 내 약속함세.

그냥 듣기에는 굉장히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보였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했고 절박했다. 그는 끝끝내 자신의 딸이 노말한 성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했고 그 증거를 보고 싶어 했다. 지혜가 효진의 곁에 머무는 것에 대해 굉장히 못 마땅한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막지는 않았다. 그런 황당하지만, 그 사람 입장에서는 절박한 그런 조건을 수락하고 나니, 나와 효진 사이는 그리 어렵지 않게 허락을 받았다. 박 회장의 서재에서 나오자 태근이 형은 내게 다가와 잘 되었냐고 물어보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나보고 처남!이라고 대번에 부르기 시작했다. 좀 어색했지만 나도 형님이라고 불러주었다. 내 형님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그러면 나는 아무 문제 없이 선생질에 매진할 수 있겠군. 으하하. 고맙다, 한석아. 아니, 이제는 처남이라고 불러야지.

 문제라뇨?

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그러자 태근이 형은 도리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서 날 가리키며 되물었다.

이제 우리 아버지 일은 네가 이어 받을 거잖아. 그럴려고 효진이랑 결혼하는 거 아니었어?

 무슨 일 하시는지도 모르는데 뭘 이어받고 자시고가 있어요. 그리고 제가 효진이랑 결혼하는 건....

아니지. 이건 여러 사람에게 떠벌릴 만한 이유가 아니지. 박 회장이야 오해를 하고 있었으니 설명해야 했고, 그런 이유를 달아 결혼을 허락하고 지혜도 묵인하고 그랬다지만 .... 제 아무리 지나치게 쿨한 성격의 형이라고 해도 자기 동생이 또 다른 여자와 지내기 위해 날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쉽게 받아들이긴 어려울 지도 모른다. 때가 되면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라 주저되었다. 그러나 형은 이런 나의 주저함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아, 물론 둘이 좋아서 하겠다는 거 말리지는 않겠어. 오히려 환영할 정도야. 그치만 나도 너한테 일찌감치 이야기한 거 있잖아. 내 장래희망.

 체육 선생님이요...?

이제는 아주 습관처럼 헤드락을 걸려 하기에 가볍게 형을 밀어내며 되물었다. 

그래, 임마. 알아들었으면 협조 좀 해줘봐. 우리 아버지가 좀 거친 일을 하긴 하지만.... 뭐, 누굴 죽이는 일은 아니니까 금방 배우게 될 거야. 나도 곁다리에서 좀 구경은 해보았지만... 에휴, 도무지 모르겠더라구. 나는 그런 일을 할 타입이 아냐. 절대로.

 대체 무슨 일 하시는 데요?

 어라? 너 정말 몰랐구나. 우리 아버지.... 돈놀이 하신다.

....어째 형의 말투만 들으면 박 회장이 손가방 하나 옆구리에 끼고 시장 돌면서 상인들에게 일수 돈 걷어와야 될 것 같다. 물론 그럴 리가 없잖아!! 모르긴 몰라도 그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지켜보았던 나로서는 태근이 형이 무심하게 말하는 돈놀이라는 것의 규모가 어떨지 가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거실에 오가며 집안 일을 하고 있는 메이드들을 보면서 형에게 다시 물었다.

그때 무슨 아카데미인가.. 그런 거 하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아, 그건 취미지. 여자 건드리기 좋아하는 우리 아버지의 고약한 취미.

아들에게도 이런 평가를 받을 정도로... 박 회장의 엽색은 유명한 모양이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금 박 회장의 부인, 그러니까 앞으로 내 장모님이 될 사람은 태근이 형보다 서너살 많은 정도 밖에 안 되는 젊은 분이었다. 무려 네 번째 부인이라고 한다. 첫 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자식이 태근이 형이고, 두 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자식이 효진이었다. 앞의 두 부인은 각각 병과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세 번째 부인은 자기 자식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고 한다. 지금의 부인은 효진이가 고등학교 때 얻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 당시에 자기 집이 시끄러운 게 싫어서 지혜네 집에 종종 갔었다는 효진의 말을 아주 예전에 들었던 게 생각났다. 그 밖에도 박 회장이 건드린 여자는 셀 수도 없는 모양이다.

자기 이름을 따서 책을 지어도 될 거다. 여자 후리기의 정석.

태근이 형의 비아냥을 들으며... 내가 대체 어떤 집안에 들어와 버린 건가 아주 살짝 후회가 되었지만 날 보고 환하게 웃는 효진을 보며 마음을 굳혔다. 그렇게 나와 효진, 그리고 지혜는 서로의 약속에 따라 함께 지내기로 했다.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알아볼 것을 알아본 다음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출발하는 크루즈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딱히 박 회장과의 약속 때문은 아니더라도 밤이면 밤마다 효진과 나는 뜨거운 밤을 보내고 있다. 커다란 침대가 놓인, 우리의 커다란 방에는 지혜도 함께 머물고 있지만 딱히 어려울 건 없었다. 때로는 지혜와 효진이 어울리기도 하고, 어쩔 때는 지혜와 내가 어울일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셋이 다같이 하는 건 아무래도 부끄러웠기에...... 안 하지는 않고 술을 마시면 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참 고마운 광경을 선사해 준 두 사람에게 술을 한 잔 사야겠다. 

Excuse me. Which of that girls is your partner?

주스를 다 마시고 다시 깔깔거리며 풀장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근처에 앉은 외국인 한 명이 내게 물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모르겠는데 짙은 갈색머리가 곱슬곱슬한 백인 남자였다.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한정된 공간에서 계속 지내다보니 주변 사람들과는 오가며 눈인사를 나눌 정도의 사이가 저절로 된다. 내가 영어가 워낙 짧다보니 대화는 좀 주저하는 편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일본에서 출항하는 배다 보니 일하는 사람이나 승객의 대부분의 일본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영미권 사람이나 중국 사람도 종종 섞여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한국 사람은 우리 셋 뿐이었다. 효진이는 일어를 유창할 정도로 했고 영어도 곧잘 해서 어려움이 없었지만 일어는 거의 모르고, 영어에 대해서는 정규교과 과정밖에 익히지 않은 나와 지혜는 참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이 사람은 내가 동양인이라 영어를 못 할 거를 미리 짐작했는지 쉬운 표현으로 천천히 말해주어 알아듣는데 어렵지 않았다.

음... Both of them.

맞게 말한 건가?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날 향해 Excellent!와 Fantastic!을 연발하는 걸로 보아 제대로 맞게 말한 것 같다. 물론 아주 엄밀히 말하자면... 내 파트너는 효진이고 효진의 파트너가 지혜인 셈이지만... 그렇게 복잡한 관계를 영어로 이야기할 정도로 내 실력이 출중하지 못 하다. 설명하기 어렵기도 해서 그냥 그렇게 말해두었다. 둘 다 내 여자라고 말이다. 두 여자한테 번갈아 박아댈 수 있으니 그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 이후로도 우리 세 사람이 다니다가 그 남자를 다시 만나면 그는 나에게 엄지손가락 두 개를 내밀어 보이곤 했다. 그렇게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보지 말아줘. 어깨가 나도 모르게 으쓱거리잖아. 

그리고 대체 그가 어떻게 소문을 내고 다녔는지는 모르겠는데.... 일정의 절반 정도가 지나고 프랑스에 도착할 때쯤에는 우리 셋의 관계가 승객들에게 파다하게 알려진 후였다. 크루즈 승객의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었다. 나이가 있는 만큼 보수적일거라 지레 짐작하며 우리를 이상하게 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리어 그 나이대에서는 남자가 두 여자 두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오히려 나를 능력자로 보며 칭찬을 마지 않았다. 그때마다 효진이가 내 옆구리를 찌르며 능력자는 나라고! 제대로 확 말해버릴까?하며 협박했지만 정말 그렇게 고하진 않았다. 대신 그녀는 오며가며 친해진 많은 사람들을 우리의 결혼식에 초청하기로 결정했다. 선장에게 부탁하여 하루 일정을 얻어내 다같이 상륙했다.

정말... 할 거야?

 응. 그때 몹시 분했으니까.

 하아. 정말이지 너란 여자는....

 정말 좋다고? 그치? 그렇게 말한 거지? 우리, 남편!

내게 확 안기며 입술을 맞추는 효진을 한 번 토닥여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으로 입어보는 연미복이 몹시 불편했다. 제비꼬리처럼 늘어진 뒷부분도 이상하고 목을 단단히 죄고 있는 나비넥타이도 좀 풀렀으면 좋겠다. 그러나 효진은 안된다며 더 단단히 매주었다. 나 역시 그녀의 나비넥타이를 고쳐매주며 말했다.

우리, 남편이라는 건.... 어째 느낌이 묘한 걸?

 왜 묘해? 다들 그렇게 말하잖아.

물론 그렇다. 한국어의 표현에서 자신의 것을 가리키는데 굳이 나의란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우리 학교, 우리집, 우리 가족... 공동체 생활이 개인보다 강조되었던 문화의 한 단면이지만 지금 효진이가 사용할 때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내 남편이 아니라 우리 남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니까. 두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남편이라는 의미로 말이다.

와아! 역시!!! 이걸로 하길 잘했어!

한쪽 벽에 쳐있던 커튼이 걷히고 준비를 마친 우리의 신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풍성하고 화사한 스커트 하단이 바닥 전체를 덮고 있는 옅은 분홍빛의 드레스였다. 등은 물론 앞부분을 대담하게 파내어 살색이 한껏 드러난다. 한데 모아 올려 붙인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몹시 도드라졌지만 그렇다고 천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체적인 분위기에 기품이 느껴진다. 면사포를 살짝 들어올리자 가볍게 눈을 감고 있는 지혜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 드레스는 우리가 식을 올리기로 한 성, 샤토 데스클리몽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드레스라고 했다. 지혜의 난감한 표정과는 달리 효진은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고 있었다. 지혜는 들고 있던 부케로 가슴을 가리며 말했다.

정말 이걸 꼭 해야 하는 거야?

 응. 아까도 이야기 했잖아. 난 니가 신부입장 할 때 옆에 서지 못한 게 너무 분했다니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처음 입어보는 것도 아니면서 부끄러워 하기는.

효진이 팔을 내밀었다. 지혜는 살짝 손을 들어 그 팔에 손가락을 얹는다. 나 역시 효진의 반대편, 지혜의 옆에 섰다. 깊고 깊은 그녀의 가슴 골을 유심히 살펴보곤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역시 해보신 분이라 그런지 자세가 나오네.

 너어, 놀리기야?

 하하. 어차피 효진이랑 나는 한국 가면 또 해야되니까 말야. 오늘 잘 가르쳐주세요. 선생님.

지혜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효진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 팔에 손을 얹었다. 우리의 준비가 끝나자 곧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턱시도를 입은 남녀를 사이에 두고 지혜의 두번째 신부 행진이 시작되었다. 일명 '루이 16세의 거실'이라고 불리는 살롱에는 크루즈의 승객들이 손님 자격으로 가득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호기심 반, 신기함 반으로 빛나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이 기이하기 짝이 없는 결혼식을 찍어대는 사람도 많았다. 지혜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지만 효진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손을 들어 인사까지 해가며 당당하게 걸어나갔다. 

금박으로 화려하게 수가 놓인 옷을 입은 성직자가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는 단상까지 나아갔다. 그는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기는 했지만 식순에 따라 결혼식을 진행했다. 프랑스말이라 당연히 하나도 못 알아들었고 우리 셋은 우리 셋끼리 떠들고 있었다. 승객들도 그렇고....

애는 어떻게 할까? 나 하나, 지혜 하나 낳으면 될까?

효진의 말에 지혜가 기겁한다.

나도 낳으라고?

그러자 효진이가 왜 아니냐는 투로 선선히 대답했다.

응. 난 지혜 자식도 한 번 보고 싶어. 귀여울 것 같아. 여자애면 크면서 얼마나 가슴이 훌륭하게 자라날지 구경도 해보고....

오, 신이시여. 저런 터무니 없는 소리를 신성한 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내려쬐고 있는 교회에서 지껄이고 있는, 제 마누라 될 사람을 용서하소서. 저도 저런 생각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나이다. 효진은 어차피 키워줄 사람은 다 있으니 기왕 낳을 거 많이 낳자고 떠들고 있었고 지혜는 그런 효진을 달래어 가까스로 하나씩 낳기로 합의를 보았다.

괜찮....겠어?

살짝 부끄러워하며 날 올려다보는 지혜의 표정을 보니 아예 생각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힘 닿는 데까지, 도와드릴게.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고 있는데, 앞에 있는 신부가 우리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뭔가 이야기 한다. 못 알아듣고 멍하니 있자니 입술을 내밀며 맞추는 시늉을 한다. 아하, 그거구나. 내가 깨닫는 동안 이미 효진은 지혜의 허리를 홱 꺾어 진하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하객석에서는 웃음과 환호가 터져나왔고 성직자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나고 효진은 지혜를 놓아주었다.

자! 이번에 자기가.

다시 한번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찾을 것도 없이... 효진은 지혜를 내게 임대했다. 지혜는 이미 어느 정도 체념한 듯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미 촉촉히 젖은 그 입술을 향해 내 입술을 가져간다. 맹세의 입맞춤이 오간다. 짧지만 뜨겁게.

그리고 이번엔 우리가 해야겠지?

내가 손을 뻗으며 말하자 효진이 웃으면서 안겨왔다. 비록 둘 다 남자옷을 입고 있는게 조금 그렇기는 하지만 웨딩드레스야 뭐 돌아가면 입게 될테니 상관없겠지. 입을 맞추기 직전,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함께 살아가자.

 응.

입술을 겹친다. 다시 한번 환호가 터져나오고 곳곳에서 폭죽이 터지며 우리의 시작을 축복했다. 너와 나만이 아닌, 우리 셋의 시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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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진] & [김지혜]의 [노말 엔딩]을 달성하였습니다.

기존 Route G의 [김지혜]의 [노말 엔딩]이 [언솔브드 루트]로 전환되며, 1회차 플레이가 끝나고 다시 플레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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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끝났습니다. 흐뭇하고 아름다운 Route P.

 알파벳 짜맞추기를 하자면 Partners 의 P 입니다. 복수형이라는 걸 강조합니다.

박효진과 김지혜의 더블 엔딩은 효진 등장 시기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에 관한 떡밥은 꾸준히 뿌렸죠. 아예 대놓고.... 한석이가 처음으로 3P를 한 것도 얘네를 통해서였고 효진은 항상 공공연히 지혜를 원하고 있음을 드러냈죠. Route G가 끝날 때 살짝 애매하게 끝난 이유를 여기서 다시 말합니다. Route F도 그랬고 지금 이 루트에도 걸리니까 그런 거였어요. 

위에 언솔브드 어쩌구는.... 그냥 한번 있어보일려고 넣은 겁니다-_-;; 1회차 플레이 끝났다고 다시 열리는 루트라니. 아오. 내가 미쳐. 미연시 하면서도 그런 게 젤 싫어서 바로 오마케 파일부터 찾으러 돌아다녔던 제가 그런 짓을 하겠어요? 안합니다. 안해요. (이러면서 댓글에서 해달라고 하면 또 슬금슬금 준비할지도...)

부디 많은 댓글로 이번 루트에 대한 감상을 들려주시길 바라며... 조만간 Route O 시작하겠습니다. 

Rotue L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이니 복습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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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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