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진과 나는 수원에서 서울로 돌아와 하영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규호와 만나고 돌아온 효진은 하영을 만나 상담하길 원했고 연락을 받은 하영은 알았다면서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하영을 앞에 두고 효진은 규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감정이 북받혀 오르는 효진이 몇 번 주저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끝내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끝냈다. 네오의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래도 충격적인 건 변함없었다. 필복만 죽여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이건..... 게다가 효진은 규호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말했고 그건 나를 더욱더 격분하게 했다.
그래서 그 자식 말대로 해주기로 했다고? 그런 소리를 듣고도?!
소리 지르지 마. 나도 지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그렇게만 해주면 지혜를 놓아주겠다잖아.
그런 새끼 말을 믿어? 그래서 그 말대로 하자고? 너 정말 진심이야?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봐. 누굴 죽이겠다느니 그런 허황된 소리 말고.
....맘 같아선 둘 다 다 죽여버리고 싶다. 필복이든 규호든....
벌떡 일어났던 나는 소파에 다시 털썩 주저 앉았다. 사실 효진에게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수원에서 서울까지 돌아오면서 효진은 끊임없이 자책을 하고 있었다. 자기 때문에... 자기 때문에 지혜가 좋은 사람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그런 놈을 만났다고 끊임없이 되뇌이며 슬퍼하는 효진에게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도무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가 뭐 하는 사람이라는 게 어찌 그녀의 잘못이겠는가.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인데...
- 사람이 말야.. 가진 게 많아지면 뭐가 제일 좆 같은지 아니?
그 날, 재즈에서 형이 내게 물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가 자신을 향해 넣은 투서를 손에 들고, 형은 그렇게 말했다.
- 내가 다가가는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 다가오는 사람은 일단 싫어진다. 이게 날 좋아해서 다가오는 건지 아니면 내가 가진 것을 좋아해서 다가오는 건지 몹시 헷갈리거든.
효진의 아버지가 얼마나 부자이고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를 두고 살아온 태근이 형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의심하는 게 기본인 삶을 살아왔다. 모르긴 몰라도 효진의 지나치게 쿨한 태도도 그와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사람은 쿨한 것만으로 살 수 없다. 한 쪽이 쿨하다면 그 이면은 뜨거울 수 밖에 없다. 지혜를 향한 효진의 애정은 내 짐작보다도 더 크고 깊었다. 그렇기에 지혜에게 가해진 이 괴로움이 효진을 쥐고 흔드는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내가... 내가 나빠.
효진아...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때문에 지혜가 그렇게....
얼굴을 감싸쥐고 괴로워하는 효진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찢어진다. 나라고 지혜가 힘든게 신경쓰이지 않는 게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지혜 때문에 힘들어하는 효진의 모습이 날 더욱더 힘들게 했다. 예전에 소란이의 기억 때문에 힘들어 하던 내 모습을 보던 효진의 마음이 어땠을지... 이제야 짐작이 된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 넌 충분히 괴로워했어.
그녀가 내게 들려주었던 위로를, 이젠 내가 그녀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효진의 곁에 앉아 어깨를 당겨 끌어안아 준다. 효진의 등을 토닥이다 이쪽을 빤히 보는 하영과 눈이 마주친다. 결코 눈을 피하지 않는 그녀와의 눈싸움은 참 힘들다. 내가 눈을 깔았다.
그것뿐만 아니야. 난 우리 아버지가 하는 일을 그렇게 싫어하고... 경멸했으면서... 이럴 때는 아버지의 힘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어... 이런 내가 규호 그 새끼랑 다를 바가 뭐야.
그게 어떻게 같아.
모르겠어.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책망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활달하고 즐거운 기색이 가득한 그녀였는데 이런 일이 닥치고 나니 패닉에 빠져 어쩔 줄 몰라한다. 내가 연신 말로 위로해줘도 소용이 없었다. 침울한 효진, 흥분한 나와 달리 차분한 사람은 하영 한 사람 뿐이었다. 하영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게 좋을지 다소 주저되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있는 그녀를 보니 내심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질문만 안 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그 옷 메이커가 어디죠?
네에?
이 무슨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정도가 아니라 핥아먹는 소리냐. 우리 둘은 지금 심각해 죽겠는데 한가롭게 옷 메이커는 왜 물어보는 거야? 답할 기분이 아닌 나는 좀 모질게 쏘아붙였다.
왜요? 남자친구에게 사다주기라도 하시게요? 지금 여기서 그런 질문이 왜 나옵니까?
그러나 하영은 여전히 차분했다.
남자친구는 없고요,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비싼 옷은 사줄 능력이 안되서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대체 한석 씨가 그런 고급 옷을 어디서 주워 입고 다니는 건지...
대체 남을 뭘로 보고 주워 입니 마니 하는 걸까. 나는 뭐 고급 옷 입으면 안 되는 사람인가. 짜증도 나고 대답하기도 귀찮고 해서 그냥 수긍했다.
마음씨 착한 분이 길거리에서 주셨습니다. 됐어요?
.....누군지 몰라도 대단한 자선가거나 그 메이커의 가격을 모르는 바보, 둘 중 하나겠네요.
참나. 어이가 없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영은 그 말을 끝으로 내게서 관심을 끊고 효진을 향했다.
좋아. 효진. 내 말 잘 들어. 내가 볼 때 규호의 말대로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언니! 진심이야?
하영이 뭔가 법률적으로 이용가능한 조언이라도 해주지 않을까 싶어 찾아온 우리였다. 그러나 하영은 예상치도 못한 결론을 내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해주기로 약정했다면서? 그래야 지혜를 놓아준다고 하지 않았어? 그게 네가 원하는 거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빠한테.....
네가 박 회장님이 하시는 일을 싫어하고 그 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어. 그렇지만 이 경우에는 박 회장님의 눈을 믿어봐.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 한 번 보게 한다고 흠될 일이 생길 분이 아니니까.
언니....
하영이 말하는 박회장님이라는 단어에는 굉장한 신뢰와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늘 차갑게 이야기하고 빠르고 건조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그녀였는데 거의 유일하게 감정이 들어간 단어가 아닐까 싶었다. 설마 그 미중년의 아저씨에게 반해있는 건 아니겠지?
네가 직접 하기 싫다면 내가 대신 해줄 수 있어. 그거야 말로 네가 시키는 잔심부름이나 뒷조사 같은 것보단 훨씬 고문다운 일이니까.
하아.. 모르겠어요. 알았어요. 언니한테 일임할게요. 부탁해요.
하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몸을 돌리려는 그녀를 불렀다.
잠깐만요. 이게 끝난 건 아니잖아요.
네?
금테 안경을 들어올리며 반문하는 하영에게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점을 이야기한다.
양규호는 그렇다치고... 임필복은 어떻게 할 겁니까? 그 자식은 처단하지 않을 건가요?
그러자 하영이 한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봐요, 한석 씨. 효진이도 그렇지만 당신도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난 변호사예요. 해결사가 아니라구요.
그거나 그거나....
뭐가 그거나입니까. 저는 법적으로 문제되는 일만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임필복이 한 짓에 어디가 법적인 하자가 있죠?
그 놈의 법적, 법적. 전생에 무슨 법 공부 못 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그럼 그 자식이 합법적인 짓을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남의 아내를... 그렇게.... 했는데?
임필복이 하고 있는 짓은 간통이죠. 간통은 친고죄예요. 그렇다고 임규호가 임 전무를 간통죄로 고야설넷도 하겠어요?
아....
그럴 리가 없지. 그 새끼가...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있으려니 그녀의 폭풍 같은 말이 쏟아진다.
당신들 친구 일이기 전에 남의 부부 일이에요. 다른 사람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굳이 따지고 파고 들어가면 약취 정도겠네요. 그렇지만 그 경우에는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어야 해요. 그때에 규호와 필복이 지들끼리 합의된 사항이라고 우기고 나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당신들이 보호하려 하는 김지혜라는 사람의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한다구요. 그렇게까지 하면서 임필복을 처리하고 싶으세요?
뭐가 이렇게 어렵나. 듣는 것만으로도 대가리가 터질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 정도다.
젠장....
참고로 그만한 고생을 하고 법정에 세운다고 해도 저쪽이 좋은 변호사 하나 선임하면 벌금형이나 기소유예 감이에요. 당신이 바라는 대로 깜빵 넣기가 어디 쉬운지 알아요?
하영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몸을 돌려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나는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 때문에 머리가 핑 돌 지경이다. 애꿎은 테이블만 작살낸다. 차라리 이게 필복의 면상이라면... 아니면 규호의 싸대기라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후려치고 싶다. 그래도 직성이 안 풀릴 성 싶다.
젠장! 젠장!! 법이라는 게 나쁜 새끼 잡아넣으라고 있는 거 아니에요?! 뭐가 그리 복잡하고... 또 뭐가 그리 어렵냐구요!
하영의 차가운 눈초리를 한 번 더 받았다. 그녀는 여전히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요. 법은 정적으로 조직된 사회적 동물의 사회에서 스스로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강제라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 규범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도덕률과는 제법 거리가 있어요.
하도 기가 막히니까 이젠 웃음이 나온다. 머리가 살짝 돈 사람들이 왜 머리에 꽃을 꽂고 헤벌레 웃고 다니는지 이해가 된다. 나도 지금 당장 내 머리에 꽃을 꽂아넣고 싶은 심정이다.
으아아아아아악!!
발악을 하며 괴성을 질렀다. 내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효진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날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구나. 다른 일에 몰두하느라 잊고 있었다. 내가 위로하고 안아주어야 하는 사람이 이렇게 슬퍼하고 있는데 엉뚱한 곳에 분노를 쏟고 있었다. 하영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효진과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 주차장에 세워둔 효진의 차로 돌아갔다. 유미의 차는 수원에 있는 수리점에 입고시켰기에 이 차를 타고 우리 둘이 이 곳에 왔었다.
조수석에 올라탄 효진은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안전벨트를 멜 생각도 안 하고 있기에 내가 대신 벨트를 당겨 채워주었다. 효진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자기 방에 갈래.
늘 활기찬 그녀였기에 이런 모습이 너무 가슴 아프다.
그래. 가자.
효진의 심정을 이해한다.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오자마자 그녀는 나를 찾았다. 나에게서 위로를 받고 싶어했다. 그녀를 벗기고 지혜의 침대에 눕히면서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여 주었다. 다 잘 될거라고...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이다.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할 소리였기에 얼마나 신뢰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절절한 몸짓으로 내 몸을 받아들였다.
하악...하아....하악... 자기야... 더... 더.....
효진은 자꾸자꾸 날 요구했다. 지혜가 그런 처지인데도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서로 묻지 않았다. 우리는 위로가 필요했고 서로가 필요했다. 효진의 땀에 흠뻑 젖은 얼굴에는 쾌감도 있었지만 슬픔도 혼재되어 있었다. 친구의 불행을 보고도 제대로 도와주지 못했다는 자괴감, 아무 것도 자기 손으로 해줄 게 없다는 무력감이 그녀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지혜에 대한 감정을 많이 접었다고는 하나 그녀는 내 첫 여자였고 내 애인의 애인이었으니 말이다.
하악....하아...하악...좋아...정말 좋아해...정말로...오....하악.....
엎드린 효진의 뒤에서 박아 넣으면서, 탄력있는 효진의 엉덩이와 잘록한 허리를 내려다 보며 생각했다. 이렇듯 서로의 사랑과 애정을 확인하고 서로의 아픔을 녹여낼 수 있는 게 섹스라는 행위인데.... 그것이 그렇게 비열하고 더러운 수단이 되어 한 사람에게 고통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도 가슴 아프다.
아아아아아...악...항.....자기야...나...하악....하앙.....
오늘따라 효진의 신음 소리가 더 컸다. 일부러 더 그러는 것 같다. 아니다. 저건 신음이 맞다. 쾌감의 신음이기도 한 동시에 절절한 슬픔이 배어 나오는 그런 신음이 맞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효진아....
안에다...해줘...그대로....빼지마....
으으윽!
효진의 안으로 내 정액을 쏟아부으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쳤다. 몸도 그렇고 마음도 지쳤다. 교통사고로 인해 삐걱거리는 몸보다도 마음이 삐걱거려서 견디기 힘들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효진의 몸 위에 엎드린 채로 한참을 있었다. 그리고 이내 옆으로 드러누워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효진은 나보다 먼저 일어나 있었다. 쾌활하게 웃으며 밥 먹으러 가자는 그녀를 보고 참 애 많이 쓴다고 생각했다. 늘 가던 기사식당으로 걸어가는 길에 효진이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정말... 잘 되겠지? 그지?
대답 대신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안고 내쪽으로 당겼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서로를 향한 위로 뿐이었다. 정말 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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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통령과 최아란의 몸짓에 어이가 이탈했다가,
울랄라세션의 무대를 보고 제정신을 차렸습니다.
슈퍼스타K3 일등은 이미 정해진 듯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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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P 이제 슬슬 종장입니다.
예상으로는 두세편 안에 끝날 듯 싶네요.
그로부터 보름 정도 흘렀다.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가장 강렬했던 일은 역시 유진과의 일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처음으로 과외를 하러 갔다가 유진이에게 문전박대를 당했다. 안에 있는 게 분명한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인터폰으로 불러보았더니 꺼지란다. 그대로 돌아섰다. 막상 가려고 하니 또 문을 열고 나와서 한다는 소리가 가란다고 진짜 가냐고 소리를 지른다. 어이가 없어서 안으로 들어갔더니 이 녀석이 내 팔을 세게 깨물었다. 역시 암표범 맞다. 선명한 이빨 자국을 보며 내가 어처구니 없어 하니까 유진은 대번에 콘돔을 썼냐고 물어보았다. 황당한 표정으로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맞은 편 팔도 깨물었다.
아얏! 임마!!! 넌 날 잡아먹을 셈이냐!
흥! 엄마한테 이미 잡아먹혔으면서 뭘 엄살이에요. 엄살은.
......그거랑 이거랑은 다른 거잖아.
암튼요!
그러면서 자기 엄마는 아직 수술을 안했으니 만약 동생이 생기면 알아서 하라고 엄포를 놓는다. 유미는 나를 엔조이 상대로 생각한다는 말을 해줄까 싶다가 화만 더 돋구게 될 것 같아 참았다. 사실 그 날 네오의 카페에서 그렇게 헤어지고 난 후 막상 ROSE에 가면 유미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전처럼, 그러니까 관계를 가지기 전처럼 지내고 있었다. 호칭은 부드럽게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몸을 섞진 않는다. 차를 긁어먹은 이야기를 했더니 한숨을 내쉬며 알았다고 할 뿐이었다. 수리비를 내려고 했더니 고개를 저으며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몸으로 라도 갚으라는 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유진은 과외를 계속 받았다. 녀석은 날 더 이상 잡아먹지 않는 대신 전보다 훨씬 더 본격적으로 수업을 칼같이 진행하는 과외를 시작했다. 학교 진도는 물론이고 어디선가 영어로 된 문제집까지 구해와서는 그걸 풀겠다고 도와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얼마 전까지는 분명히 녀석의 목표는 S대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외국에 있는 대학으로 바뀌었다. 내가 이유를 묻자 녀석은 날 힐끔 보더니,
꼴 뵈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아예 한국을 뜨려구요.
라고 답했다. 계집애가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다..... 나중에 효진이 내 양쪽 팔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빨 자국에 대해서 물어보았지만 나는 암표범이 그랬다는 대답 외에는 하지 않았다. 효진은 날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다른 곳에 신경쓰느라 나에게 신경을 덜 쓰고 있었다.
하영에게 규호의 일을 들었다. 그는 지혜가 그동안 가진 필복과의 관계를 빌미로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했다고 한다. 위자료는 물론 재산 분할도 엄두를 못내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그렇지만 지혜는 남편에게 도리어 사과를 하며 순순히 이혼을 받아들였다. 이혼 협의 과정은 하영이 맡아서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규호를 박 회장에게도 선보였다. 규호가 박 회장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박회장은 규호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지혜는 춘천에 있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 때부터 효진은 거기에 출퇴근 도장을 찍느라 우리 집에 발걸음이 뜸해졌다. 여자친구의 원래 애인이 납셨으니 나한테 뜸한 거야 이해를 하지만 어쩐지 섭섭하기도 했다. 춘천에 가볼까 싶기도 하다가 두 남자에게 거듭 상처를 입은 지혜가 남자라면 꼴도 보기 싫을 것 같아서 참기로 했다. 간만에 하영의 사무실에 찾아가 규호의 처리를 물었다.
그래서 규호 그 자식은요?
K자동차 회사의 영업이사로 승진했습니다.
.............네?
내 귀를 의심했다.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녀석이었다. 그런데 뭐가 어쩌고 저째? 내가 기가 막혀서 하영을 쳐다보니 그녀는 그 시선을 전혀 피하지 않고 똑똑하게 대답했다.
제가 추천했습니다. 그리고 박회장님이 힘을 좀 써주셨죠.
이봐요. 하영 씨. 당신은 대체...
기가 막혀서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 틈을 기다리지 않고 하영은 지 할말을 한다.
아직 일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괜히 끼어들어서 일 망치지 말아주세요.
망쳐? 누가 뭘 어떻게 망친다는 거야.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외친다.
아니. 그래요. 그 놈에게 뭔가 미끼를 주어서 지혜를 떼어놓게 하겠다는 거, 그것까지는 동의를 했습니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가 있죠. 규호 그 자식이 여태 무슨 짓을 해온지 몰라요? 모르지 않잖아요! 뻔히 알면서 그렇게 해준다고요? 정말로? 지금 나 놀리는 거죠?
제가 한석 씨 놀려서 뭐하겠습니까?
저도 그러지 않기를 바라요. 대신 제가 바라는 건 그 놈을 작살내는 거라구요!
아무리 소리쳐도 하영은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신의는 있는 놈입니다. 약속대로 이혼을 해주었잖아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난리를 치며 하영에게 대들려고 하자 그녀는 사무실 사람을 불러다 나를 쫓아냈다. 그녀의 사무실 앞에서 욕을 한바탕 해주고 돌아섰다. 그리고 저녁에 ROSE에 가서 일하는 동안은 유미에게서 필복의 처리 방법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녀는 필복의 딸이 여기서 일했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걸 통해서 그 놈에게 엿 먹일 방법을 생각해내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의 간절한 기대는 유미의 무심한 말투에 산산히 무너졌다.
K자동차 회사가 대물물산에 투자하도록 좀 도와주었어.
........유미가?
뭐, 내가 했다기 보단.... 네오의 도움을 좀 받기도 했고 이래저래 아는 사람 통해서 하게 해줬지. 조만간 대규모 투자단이 꾸려지고 거기 단장으로 임 전무가 취임할거야. 부사장 대우로.
나는 바보가 아니다. 아까 하영도 그렇고, 다들 왜 이러지?
그건 좌천이 아니라 영전이잖아! 뭐야, 유미.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음... 내가 자길 왜 놀리겠어. 이렇게 귀여운데.
내 턱을 잡고 키스를 하려기에 고개를 홱 돌려서 뿌리쳤다. 더 이상의 관계는 없지만 그녀는 날 보고 여전히 자기라고 부르길 좋아했다.
K자동차 회사면 우리나라 재계 순위 10위 안에 드는 회사잖아. 그런 회사가 대물물산 정도에 투자를 한다고... 그게 가능해?
사업이라는 건 참 신비해서 말야.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많이 있더라고. 일이 잘 되면 대물물산이 K자동차 그룹에 편입될 수도 있겠지. 아주 성대하게.
기가 막혔다. 이 여자는 일개 술집 여사장 아니었나? 발이 좀 넓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하다. K자동차 회사의 투자여부를 결정하게 하는데 자신이 도움을 줬다고? 순간 내 귀를 의심했지만 어째 그 말이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유미는 별로 자랑하는 투로 말하는 것도 아니었고 대단한 일을 말하는 것도 아닌 것처럼 늘 그렇듯이 생긋 웃으면서 가볍게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녀를 어느 정도 겪어보고 느낀 거지만....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돌려서 말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이 있을 뿐. 그나저나 임 전무... 아니, 임 부사장? 유미로서는 그 자식이 한 짓을 모르는 게 아닐텐데도 그런 도움을 주었단 말인가. 눈 앞이 캄캄해진다.
씨발.
입에서는 욕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그러자 유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가 그런 터프한 모습 보여줄 때마다 내가 설렌다는 거 알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이 손 치워.
어머,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새초롬하게 눈을 뜬 유미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에게 이렇게 대하면 안된다는 거 알지만 기분이 너무 더러웠다.
당분간... 여기 오지 않겠어.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유미는 나를 잡지 않았다. 사실 예전부터 나 없어도 잘 돌아갈 가게였다. 내가 없다고 해서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대로 ROSE를 나왔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택시를 하나 잡았다. 조수석에 앉아 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했다.
판교로 가주세요.
시외라서... 제법 나올텐데요, 손님.
나이가 제법 들어보이는 운전수가 날 돌아보며 말했다.
상관없어요. 빨리 가주세요.
택시가 출발했고 미터기의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서울을 벗어나 한참을 더 달리면서 기사가 물었다.
판교에는 어쩐 일로 가시나요? 거긴 아무것도 없는 동네인데.
판교로 들어가는 도로 옆에 카페 하나가 있어요.
들어가는 도로라구요? 글쎄요. 거기에 그런 게 있던가?
한 달 전쯤에 갔었어요. 대략 위치가....
이정표를 올려다보며 방향을 지시했다. 택시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를 몰았다. 가로등도 별로 없어 어두운 도로를 한참 달렸지만 내가 바라는 표식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
손님. 여기 맞나요? 여긴 아무 것도 없는 곳인데요?
아니요. 분명 여기에 카페가....
한 달 전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허허벌판이 펼쳐져 있고 그 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에 나와 택시가 서 있다.
저기, 혹시 요금 낼 돈은 가지고 계신거죠? 여기까지 꽤 나왔습니다만...
기사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일단 여기까지 나온 요금을 지불하자 군소리가 쏙 들어갔다.
이 시간이면 불을 켜고 있을텐데... 아!
한참을 둘러보던 나는 가까스로 카페를 발견했다. 해가 지고 어두운 이 시간에, 당연히 불을 환하게 켜고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러질 않아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 살피니 아주 저 멀리 도로 옆에 불쑥 튀어나온 것 같은 건물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기사를 재촉하여 한참을 더 달려 그곳으로 향한다.
아, 여기 이런 게 있었군요.
기사도 감탄했다. 그러나 카페 앞에 도착한 나는 당황했다. 불이 꺼져있는 그 곳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해가 졌다고는 하나 이제 막 저녁 먹을 시간이다. 벌써 문을 닫았단 말인가? 택시에서 내려 카페 문 앞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본다. 역시 안에는 없었다.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봐도 아무 것도 없다. 컴퓨터로 가득했던 테이블도, 그 이상한 여자도 보이지 않는다. 쇠사슬로 꽁꽁 묶인 문손잡이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비어있는지 꽤 된 것 같았다.
손님.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 그냥 가도 될까요?
아, 아뇨. 좀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미터기 꺾고 기다리셔도 됩니다.
기사는 또 눈에 띄게 툴툴거리며 차로 돌아갔다. 돈 밖에 모르는 인간 같으니라고... 지금 나는 황당해서 죽을 것 같은데 그저 돈돈돈인가. 그렇게 한참을 카페를 돌며 확인했지만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한숨을 쉬며 차로 돌아갔다. 운전석에 앉아 라디오를 듣고 있던 그가 핸들을 도로 잡는다.
서울로 돌아갈까요?
네. 그래주세요.
시트에 몸을 파묻으며 한숨을 쉬었다. 차가 출발하자 카페가 멀어져갔다. 한 번 더 돌아본다. 이상한 안경을 쓰고 외투를 뒤집어 쓴 네오라는 여자. 그 여자가 컴퓨터를 몇 번 두드리는 것만으로 회사 내부자료 같은 것이 아주 간단하게 드러났다. 컴퓨터는 나도 좀 배웠지만 통신은 잘 모른다. 그렇지만 그 정도의 해킹실력이 결코 범상한 것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게다가 몇 가지 사실만으로 규호와 필복의 의중을 꿰뚫어보는 직관력도 가지고 있었다. 본인 입으로 자랑하는 정보전문가라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다. 사실 오늘만 해도 나 역시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하영과 유미에게 연락처를 물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녀들이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하영에게는 욕을 하다 사무실에서 쫓겨났고 유미에게는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다시 돌아간다고? 꼴 사납기 그지 없다.
하아... 젠장....
머리를 벅벅 문지른다. 머리 속이 복잡해서 미칠 것 같다.
'효진이한테나 가볼까.....'
요새 춘천에 살다시피 하는 효진이니 아마 지금 전화를 해도 바로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마 불러내야 할텐데 지혜랑 있는 효진이이가 내 전화에 쉽게 나오려나.... 자신이 없다.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은 도로 집어넣는다. 실내경을 통해 내 안색을 살핀 모양인지 택시기사가 말을 걸었다.
손님, 뭐가 잘 안 되시는 모양이죠?
그래 보이나요?
기사는 라디오 볼륨을 조금 줄이고 내게 말을 붙인다.
예. 뭐, 아까 가신 곳도 문 닫은 모양이고... 표정도 꽤 안 좋아보이시네요.
하아. 기사님이 보시기에도 그런가요.
아까부터 한숨을 푹푹 쉬고 계시니 더 그렇네요. 땅 꺼지겠습니다.
아저씨. 여기 땅이 어디 있습니까. 자동차 바닥이 있는 거지. 툴툴거리려다가 그냥 좋게 대답한다.
자연보호를 위해 숨을 좀 참겠습니다.
하하하. 재미있는 분이네요.
기사는 껄껄 웃었다.
그냥 좀.... 사람을 찾으려고 했는데 이대로 허탕인가 보네요.
그런 아무 것도 없는데에 사는 사람도 있나요? 어지간히 이상한 사람인가 보네요.
그러게요. 진짜 이상한 사람이긴 했는데.... 물어볼 게 좀 있었거든요.
기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차를 몰았다. 어느덧 서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왔다갔다 적지 않은 거리를 달린 터라 지갑에 있는 돈을 한 번 슬쩍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미터기에 찍힌 금액과 비교해본다. 가까운 전철역에서 내려달라고 해야할 성 싶었다. 그때였다. 방금 라디오에서 나온 소리에 눈이 번쩍 띄였다.
자..잠깐만요. 기사님!
왜 그러십니까?
다급한 내 태도에 놀란 듯, 그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라디오요. 라디오 좀 키워주세요!
──────────────────────────
기사가 볼륨 휠을 돌려 소리를 키웠다.
........재계 랭킹 8위인 K그룹은 끝내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부도방지협약 대상 기업이 되었습니다. 이는 사실상의 부도처리이며 재계는 협력업체의 연쇄부도 및 자금 경색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이에 정부는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증폭되지 않도록....
허허. 이거 큰일이네요. 이 차도 K자동차 껀데 말이죠. 부품 조달 같은 건 잘 되겠죠?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던 나는 뒷좌석으로 털썩 앉았다. 하영이나... 유미나.... 말도 안 되는 짓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녀들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인가?
하영은 그랬다.
- 그래서 규호 그 자식은요?
- K자동차 회사의 영업이사로 승진했습니다.
그리고 유미는,
- K자동차 회사가 대물물산에 투자하도록 좀 도와주었어.....조만간 대규모 투자단이 꾸려지고 거기 단장으로 임 전무가 취임할거야. 부사장 대우로.
그랬다. 그랬었다. 하아. 이거 너무 엄청난 일이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머리 속에서 잔뜩 엉킨 생각은 끄트머리가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복잡한 실타래보다도 더 어지러웠다.
지 아내를 팔아먹으면서까지 필복에게 줄을 대길 원했던 규호라는 놈의 최종 목표는 효진을 통해 박 회장과 선이 닿는 것이었다. 그게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건지 모르겠는데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박 회장과 알게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규호는 일개 영업점 차장에서 영업이사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다는 거다.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말이다.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박 회장이라는 사람이... 그 정도로 대단한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떤 회사에 영향력을 미쳐서 일개 차장을 이사까지 승진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 회사를 흔들 수도 있다는 거 아닐까. 설마 K자동차 회사의 부도에 그의 손이 닿아있는 걸까.
의문은 또 있었다. 유미는, 유미는 대체 무슨 수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 임필복이 있는 대물물산이 K자동차 회사의 투자를 유치했다지만, K사가 망해버린 지금 그 사실이 대물물산에 얼마나 큰 타격이 될런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투자단의 단장이라는 임필복은 엿을 먹어도 제대로 퍼먹었다는 거다.
기사님. 저기... 강변 역 앞에서 세워주세요.
네.
전철역 앞에 날 내려놓고 택시가 떠났다. 휴대전화를 들고 왔다갔다 한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은 단축번호 1번을 길게 누른다. 신호가 간다. 그러나 전화를 바로 받지 않는다. 신호가 한참 간다.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달칵-
연결되었다.
어, 자기야! 뉴스 봤어?!
........
통화는 연결되었지만 상대가 말이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말을 쏟아낸다.
K자동차 회사 뉴스 말이야! 봤냐고! 설마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만든 거야? 아니지? 그렇지? 아무리 너희 아버지라고 해도 규호 그 자식 하나 엿먹이자고 그렇게까진 하지 않으셨을 꺼 아냐. 왜 말이 없어! 대답 좀 해봐! 나 방금 라디오에서 그거 들었는데 깜짝 놀라서.....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상대방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
분명 효진의 전화번호가 맞다. 그러나 효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모르는 목소리냐. 그것도 아니었다.
지혜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차분하기 그지 없는 지혜의 목소리가 내 가슴을 더 두근거리게 만든다. 너무 오랜만에 들은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쓸쓸한 기분이었다.
한석이지? 방금 한 이야기... 무슨 말인지 물어봐도 돼?
아니... 네가 어떻게 그 전화를....
효진이는 씻으러 갔어. 오늘은 우리집에서 자고 간다고 해서 말야. 그래서 내가 받은 거야. 그러니 이제 내가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은데?
지혜야 그건 그러니까....
지혜가 선량한 성격이라고는 하나 그렇다고 바보라는 뜻은 아니다.
너희가 우리집에 왔다가고, 얼마 되지 않아 규호 씨가 나한테 이혼해달라고 하더라. 임 전무 이야기를 꺼내기에 명백하게 내 잘못이니까 그대로 서류에 싸인을 해줬어.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 규호 씨가 승진도 하고 잘 된다고 하길래 난 마음 속으로 응원을 했어. 아무리 나랑 안 좋게 끝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 전남편이니까.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지혜야. 그건 말야.
너희들... 대체 나 몰래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규호 씨한테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고.... 그 사람.. 불쌍한 사람이야. 내가 그러고 다녔다는 거 알고 얼마나 상처받았을 텐데...
지혜야!
속에서 열불이 난다. 지혜는 명백하게 모르고 있다. 규호가 뒤로 임필복과 어떤 밀약을 맺고 있었는지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효진이가 나랑 이혼했다고 앙심을 품고 그렇게 한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내가 나중에 효진이한테 알아듣게 이야기할테니...
그런게 아니라고! 모르는 건 바로 너야! 이 바보야!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냅다 질러버렸다. 이런 소리를 하면 안되겠지만 지혜의 터무니없는 오해를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렇지만....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걸까. 자기를 둘러싼 그렇게 더럽고 추악한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지혜는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뭘 모른다는 거야?
그건.... 그러니까.....
가슴이 답답하다. 말해야 하나. 말할 수 있을까. 말할 필요가 있는가.
무슨 전화야?
수화기 너머 작지만 분명한 효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외쳤다.
효진이를 바꿔줘!
......알았어. 그리고 분명히 말하는데, 넌 나에게 아까 그 말에 대해서 설명을 해줘야돼.
알았어. 알았으니까...
효진이가 전화를 건네받는다. 그녀에게 K사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깜짝 놀란다.
너도 몰랐어?
난 전혀.... 그냥 하영이 언니가 잘하고 있을거라고 믿었어. 아예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도 했었고.
효진은 곁에 지혜가 있기 때문인지 규호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알아들었다.
너.. 지혜에게 이야기 했었어?
전혀.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야?
그건....
내가 갈게. 설명하게 해줘. 지혜에게....... 영원히 비밀로 할 순 없잖아.
한석아....
갈팡질팡하던 발걸음을 멈춘다. 방향을 정했다. 전철역을 등지고 버스터미널로 들어갔다. 1층 매표소 앞에 서서 시간표를 살폈다.
나 지금 동서울이야. 15분 후에 차 있다. 직행이니까 두 시간 안에 도착할거야. 미안하지만 터미널에 마중 좀 나와주라.
효진은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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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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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호는 생각했다. 인생은 뛰는 거라고. 영어로 Run이 아니라 Jump. 어떤 멍청한 놈들은 인생을 계단에 비유하고 하나씩 걸어올라가는 거라고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아주 작은 점프를 연이어 하는 것에 불과하다. 기왕 점프를 할거면 단번에 크게, 그리고 아주 높은 곳을 향해 뛰어오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아둥바둥 아래서 치고박고 있는 놈들은 이렇게 뛰어오르는 방법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애만 쓰고 있다.
[영업이사 양 규 호]
양각으로 새겨진 명패를 쓰다듬어 본다. 이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 타이틀이 앞에 하나 붙었다. 이혼남. 그러나 남자가 한 번 갖다 온 것 정도는 별 흉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마누라 하나 갈아치운 것 치고는 굉장히 큰 수확을 얹었다. 지혜를 알게 되고, 지혜의 가장 친한 친구가 효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머리 속 주판알은 무서운 속도로 움직였다. 덧셈, 곱셈, 뺄셈... 하지만 거기에 나눗셈은 없었다. 그는 이런 횡재를 남과 나눌 생각이 없었다. 덧셈과 곱셈은 자신에게 행해지고 자신을 부유하게 만들어줄 것이고 뺄셈은 자신의 몫이 아니다.
그래서 자네가 원하는 건 뭔가.
약 한 달 전, 지혜와의 이혼 절차가 끝나자 하영이 그를 불렀다. 그녀의 안내를 받고 자리한 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박 회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규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야망을 몽땅 쏟아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프리젠테이션이었다. 국내 자동차 시장의 활황은 물론 국내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자신의 지론, 즉, 해외로도 뻗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유창한 말솜씨에 실어 강력하게 어필했다. 물론 요새 들어 경제 전반적으로 자금 유통이 원활치 않고 심상치 않다는 경고가 연이어 흘러나오고 있기는 하나 규호는 위기는 기회임을 역설하여 자신의 주장을 더더욱 주장했다.
좋군. 자네를 중히 쓰지.
가만히 듣고 있던 박 회장이 한참만에 꺼낸 소리는 짧지만 무게가 있었다. 회장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규호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띄웠다. 배석하고 있던 하영이 지배인을 불러 와인을 청했다.
평소 드시던 걸로 준비할까요?
이 레스토랑의 역사는 거의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 유서깊은 곳이었다. 사환일 때부터 이곳에서 일해온 지배인은 박 회장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 박 회장이 가타부타 말이 없기에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등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주문을 바꾼다.
아니. 난 아저씨 마시던 거 말고 좀 달달한 걸로 부탁해요. 포트와인인가? 그거 있죠?
하영이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싶은 여자 한 명이 걸어와 박 회장의 옆 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아무도 청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하영은 당황하여 지배인을 쳐다보았지만 그도 그녀를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심지어 눈인사까지 보낸다.
여전히 싸구려를 마시는 구나. 내가 좋은 걸로 주려고 항상 애를 썼는데도... 넌 그랬지.
박 회장이 입을 열었다. 고급스러운 빛을 한 검은 옷의 여자는 씨익 웃으면서 박 회장의 팔을 툭툭 쳤다.
입맛대로 고르는 거지, 가격 보고 고르는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아저씨가 낼 거니까 싼 거 시키면 돈 굳고 좋죠. 안 그래요? 내 말 틀려?
틀리지 않다. 맞아.
하영은 까무라치게 놀랐다. 늘 근엄하고 말수가 적은 박 회장이었다. 그를 알게된지 십 년이 다 되어가지만 한 번도 박 회장에게 저렇게 살갑게, 혹은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심지어 가족 중에도 저렇게 구는 사람이 있을까 의심스럽다.
빈티지는 어떤 거 있나요? 혹시 94년산 있어요?
저희도 그건 구하지 못 했습니다. 대신 92년 빈티지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지배인은 불청객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여자는 주문을 확정지었다.
후후. 저기, 갑자기 끼어들어서 미안해요? 괜찮죠?
미안하다는 건지, 전혀 안 미안하다는 건지. 말투만 들어서는 전혀 모르겠다. 그녀는 하영과 규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은 하영은 맞은 편에 앉은 여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자기보다 너댓살, 많으면 열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여자였다. 나이를 쉽게 짐작할 수가 없다. 입가는 웃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눈매는 웃고 있지 않았다. 곧 주문한 와인이 서빙되었고 네 사람은 한 잔씩 나누어 마셨다.
갑자기 어쩐 일이냐. 연락도 없이.
잔을 내려놓은 박 회장이 한 마디 했다. 그러자 여자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어머, 내가 연락해야 되는 사람이야? 그런 거야?
박 회장이 고개를 젓는다. 그러자 여자는 더욱 기고만장해서 규호와 하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미안한데요. 나 이 아저씨랑 이야기 좀 해봐야 하니까 두 사람은 좀 비켜줄 수 있어요?
하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규호에게 눈짓을 보냈다. 자신의 열정적인 프리젠테이션이 방해를 받은 것 같은 규호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하영은 직감적으로 이 여자가 회장과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하영이 먼저 일어났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요.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하영은 서둘러 레스토랑을 나섰다. 규호가 툴툴거렸지만 하영은 그를 달래어 바로 레스토랑을 나왔다. 나가기 직전, 뒤를 돌아본다. 수수께끼의 여자가 박 회장에게 무어라 말을 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여자의 손을 잡았다. 하영은 고개를 돌렸다.
뭡니까, 저 여자는.
저도 모르는 분입니다만 그래도 회장님이 아시는 분인 듯 하군요.
규호는 기분이 나빴지만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였다. 하영과 헤어지고 빈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이제 없다. 그렇지만 더 큰 것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허전함보다 더 큰 만족감을 느꼈다.
바로 다음 주, 인사발령이 나자 다들 뜨악한 표정으로 규호를 돌아보았다. 점내 승진도 아니고 바로 본사로 발령과 동시에 일개 차장에서 이사로 승진. 다들 수군거렸지만 그의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하진 못 했다. 사내에서는 그에게 어마어마한 빽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규호는 애써 그 소문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은근히 그것을 즐겼다. 그러나 그의 생각보다 그의 파격적 승진이 큰 이슈가 되지 못 했다. 근래 들어 회사 내외에서 경영에 관한 안 좋은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흉흉한 소리가 많이 오고갔다. 그러나 규호는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명패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규호는 생각했다. 인생은 점프라고. 더 높은 곳을 향한 점프는 인간의 당연한 본능이다. 더욱더 높은 곳을 향하기 위해서 디딤대가 필요한 건 당연하다. 그게 자신의 전 아내가 되었든, 그 아내의 친구가 되었든, 자신이 밟고 올라설 수 있다면 당연히 밟고 올라가야 한다. 그게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이사님! 큰일났습니다!
정 부장이라고 했던가. 규호보다 스무살은 더 많은 그였지만 라인을 못 타서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이다. 규호는 정 부장을 가소롭게 보았다. 그가 떠는 호들갑이 하찮게 보였다.
뭡니까? 소란피우지 마시죠. 제 사무실에서.
이사급에게 주어지는 개인 사무실. 이게 아무한테나 주는 게 아니라서 규호는 제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정 부장은 호들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부도... 부도가 났답니다!
뭐라고?
규호는 깨달았다. 높이, 아주 높이 점프한 자신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의 발디딜 곳이 없는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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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임필복 무너지는 거 까지 쓰려면 좀 더 써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