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65)

무슨 큰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잠결이라 잘 모르겠지만... 누가 싸우는 소리 비슷하게.... 그리고 이내 쾅- 하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데 안방 문을 통해 목욕 가운을 걸친 유미가 들어오고 있었다. 

어머, 깼어? 더 자지 그래.

 아뇨. 아, 아니. 잘만큼 잔 거 같은데... 방금 무슨 소리야?

 흐음. 뭐랄까. 싸움에서 진 고양이가 짖는 소리?

 에? 그게 무슨....

고양이가 짖기도 하나? 우는 게 아니라? 유미의 표현은 좀 이상했다. 기지개를 펴본다. 어젯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있다가 푹신한 침대에서 잘 자고 났더니 한결 개운하다.

자기 옷은 빨았어. 먼지 같은 게 좀 많이 묻어있길래.

 아, 그래?

남의 담장을 기어올라가고 마당에 숨어들고 했으니 옷이 지저분해졌을 게 분명하다. 그럼 뭘 입어야 되나 고민하고 있는데 유미가 옷장에서 남자 옷을 꺼내는 게 보였다. 고급스러운 광택이 흐르는 검은 색 정장이었다. 저런 게 왜 있지? 유미는 그것을 침대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일단 샤워하고 와. 땀도 많이 흘렸으니까. 그리고 나랑 같이 나가. 조사 자료를 직접 만나서 받기로 했으니까.

 으응. 알았어.

안방에 딸려있는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대개 안방에 딸린 욕실은 크기가 작은 게 보통인데 여긴 오히려 거실 쪽에 붙어있는 욕실보다 더 넓었고 거기다 큰 욕조까지 딸려있다. 두 사람은 너끈히 들어가고도 남을... 그러고 보니 예전에 로드킬 당한 강아지를 안고 오는 바람에 옷이 엉망이 되어서 거실 쪽 욕실에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그래. 그때도 유진이가 남자 옷을 가져다주었다. 그게 이 안방에 있던 것이었나? 게다가 그 이후 돌려주지 않았는데 또 있다니. 설마 안방에 남자 옷이 몇 벌씩 있다는 걸까? 대체 무슨 이유로? 아무래도 궁금해졌다.

저기. 유미.

 응?

 이 옷이 웬 거냐고 물어봐도 돼?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아니나 다를까. 이제 갓 포장에서 꺼낸 새 속옷까지 준비가 되어있다. 샤워를 하고 입던 옷을 다시 입는 것만큼 찜찜한 건 없으니까 이런 준비가 퍽 고맙기는 한데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옷을 입으면서 화장대에 앉아 눈썹을 그리고 있는 유미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유미가 답한다.

후후후. 왜? 여자 둘만 사는 집에 남자 옷이 있는 게 신경 쓰여?

 아니, 뭐. 그냥....

화장대 거울을 통해 그녀의 웃는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녀는 살짝 장난기가 실린 말투로 답했다.

설마 나랑 한번 그랬다고 내 사생활에 태클 걸려는 건 아니겠지?

 어? 아니, 그런 의도라기 보다는....

 남자들은 그게 문제야. 한번 올라타면 그 여자가 자기 여자가 되는 줄 안다니까. 자기는 여자 친구 따로 있는 거 아니었어?

효진을 말하는 거라면 맞다. 그러고 보니 난 지금 여자친구를 두고 바람을 피고 있던 거네. 하아...

그거야 그렇지만...

 나도 남자 친구가 있어. 그렇게만 알아둬.

참 쉽지 않고 어려운 이야기를 저리도 쉽고 간략하게 이야기 해버리니 이쪽에서 뭐라 할 말이 없다. 다행히도 유미 남자 친구(?)의 덩치는 나랑 비슷한 모양이었다. 옷이 잘 맞았다. 하긴 지난 번에 유진이가 옷을 주었을 때도 잘 입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리사는 그 옷에 대해 좀 노티나 보이는 옛날식 정장이라고 평했지만 입기에 나쁘지 않았다. 원래 정장은 좀 무겁고 움직이기 불편하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이 옷은 중후한 느낌의 겉모습과는 달리 굉장히 가볍고 활동성이 좋았다. 자켓까지 걸치고 있는 동안 유미도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친 모양이다.

다 입었으면 나가자.

 응.

그대로 나가려는데 유미가 날 제지한다.

아, 잠깐만. 타이는 왜 안 매는 거야?

 꼭 넥타이까지 해야 돼?

 남자의 패션은 타이로 완성된다는 말, 몰라?

 불편해서....

 어휴. 애도 아니고. 이리 와봐.

유미의 앞에 서자 그녀가 넥타이를 직접 매주었다. 남의 목에 타이를 매주는 손길이 어쩐지 능숙하다. 원래 나이로 안 보이고 심지어 교복이 무리 없이 어울릴 정도로 동안이고 철없이 구는 것처럼 보여서 그렇지 그녀는 유진이라고 하는 딸까지 있다. 그렇다면 그녀도 언젠가 누군가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고 키웠다는 건데... 그게 누구일까. 결혼 생활이라도 했던 걸까. 그 사람에게도 이렇게 넥타이를 매주었을까. 난 유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그리고 어쩐지 그녀에게는 과거에 대해 묻는 게 쉽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묻는다고 해도 늘 그렇듯이 활짝 웃으면서 별 일 아니라는 식으로 넘겨버릴 것만 같다.

자, 다 됐어. 나가자.

그녀 역시 나와 색깔을 맞춘 듯한 검은 색 H라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평상시 가게에서 일할 때 입는 옷만 보다가 또 이렇게 차려 입은 것을 보니 어느 부잣집의 마나님 못지 않다. 아니, 외모만 두고 보면 아가씨라고 해도 어울릴 것 같다.

이걸 신도록 해.

현관에서 운동화를 다시 신어야 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녀는 구두까지 꺼내어 준다. 이런 정장에 속옷까지 준비하고 있으니 구두가 있어도 놀랄 게 없으려나..... 그러나 내가 놀랄 부분은 따로 있었다.

왜 그래? 얼른 신어.

 아니, 그게 저.....

현관에 놓인 작은 학생용 단화를 보면서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까 잠결에 들었던 고성. 그리고 쾅하는 소리. 그건 분명 거칠게 문을 닫는 소리였으리라. 뒤통수에 눈이 달려있다면 좋을텐데. 만약 내가 지금 여기서 고개를 돌린다면.... 어쩌면... 자기 방문을 아주 조금 열고 이쪽을 향해 저주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어떤 암표범과 눈을 마주치고 말리라. 유미는 늘 자기 딸을 고양이라고 표현하지만 아무리 봐도 나는 그 애가 고양이로 안 보여. 육식동물인 암표범으로 보인다고! 보이지 않아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등 뒤에서 이렇게 파르르 떨려오는 공기의 진동이 나를 무섭게 한다. 바짝 얼어붙어 꼼짝도 못 하고 있으려니 유미가 재촉한다.

갑자기 왜 땀을 흘리고 그래? 아까 너무 격렬하게 했나?

 아니, 유미 씨... 그게 그러니까....

 두 번째 할 때는 아예 졸면서 하더니... 흐음. 내가 너무 욕심 냈나?

 그...그러니까 유미 씨. 그런 이야기는 이제 제발 그만....

 어머. 이제 말 놓기로 했잖아. 볼 거 다 본 사이에..... 갑자기 왜 그런 딱딱한 호칭이야? 호호호호.

저 웃음. 일부러 웃는 게 분명하다. 지금 이쪽을 보면서 적의를 불태우고 있는 자기 딸 보란듯이! 간신히 현관을 나서고 문을 닫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뭔가 부셔지는 소리와 함께 난데없는 고함소리가 집안에서 터져 나온다. 암표범이라는 말 취소다. 저건 거의 사자후다.

고양이가 심하게 우는데? 내가 너무 몰아세웠나?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며 중얼거리는 유미를 보면서 기가 막혔다. 그때 그녀와 술집에서 단둘이 나누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유진이를 잘 부탁해요.

 - 예. 제 딸이자 선생님을 좋아하는 한 여자. 제 연적.

그녀는 그렇게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차에 올라타서 그것에 대해 묻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뭐랄까. 지금은 유진이한테 주기 아깝더라구. 으음. 그래서 내가 먹어버렸어.

엄마가 남매 먹으라고 사다 놓은, 냉장고에 있던 푸딩을 죄다 먼저 먹어버렸다고 이야기하는 아주 얄미운 누나 같은 듯한 말투에 도리어 이쪽이 할말을 잃는다. 내가 푸딩이냐!!! 하고 소리치는 건도 어쩐지 한심한 기분이 들어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유진이 과외를 갔을 때 어떤 얼굴로 보고, 어떤 화를 감당해야 할지는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아예 다음부터는 과외를 가지 말고 도망갈까도 싶었다.

유미의 차는 ROSE로 바로 향하지 않았다. 서울 근처 위성도시를 향하다가 중간쯤에서 방향을 튼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세워진 카페가 보였다. 주변에 상가나 주택가도 없는 말 그대로의 허허벌판이었다. 여기에 난데없는 카페라니. 좀 당황스러웠다. 손님이 오긴 하나? 그러나 유미는 목적지가 여기라고 말하더니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안에 들어갔다.

어솨요.

어라. 뭔가 말투가 이상한데? 말투도 그렇고 생김새도 이상하기 짝이 없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카페인데 안에는 괴상한 차림의 여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하나 씨. 잘 있었어?

그러자 여자는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노노노농. 아이디로 불러달라니까. 네오. 그렇게 말야. 안 그러면 자기도 확 본명으로 불러 버릴꺼야~!

어딘가 장난스럽게 말하는 투에서 치기가 잔뜩 묻어난다. 유미는 호호 웃고는 여자의 맞은 편에 가서 앉았다. 테이블마다 PC가 설치되어 있는 이상한 카페다. 게다가 그 PC들은 전부 켜 있었고 화면에서 뭔가가 실행되고 있었다. 사방을 두리번 거리던 나는 유미를 따라 하나라는 여자, 아니, 네오의 맞은 편에 앉았다. 

네오는 무척이나 조그마한 여자였다. 목소리를 보아 여자인건 알겠는데 마스크를 하고 있는데다가 선글라스 비슷한 것을 끼고 있어서 도저히 나이가 짐작이 가질 않는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대략 20대 정도? 선글라스도 아니고 선글라스 비슷한 거라고 한 이유는 거기에 무슨 케이블 같은 것이 잔뜩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나온 케이블은 그녀의 앞에 놓인 세 대의 컴퓨터로 제각각 연결되어 있었다. 주머니가 주렁주렁 매달린 외투를 푹 뒤집어 쓰고 있어 몸매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가 날 가리키며 유미에게 묻는다.

이쪽은 누구? 새 애인?

외모는 보이지 않지만 분위기상 유미랑 나이 차가 꽤 되어 보이는데도 서슴없이 말을 놓는다. 원래 친한 사이인가? 무심하게 대답하는 유미의 말투로 보아 네오의 반말에 별로 불만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냥 엔조이.

 흐음. 관상이....

나를 가리켜 엔조이라고 칭해버리는 유미의 지나친 시크함에 살짝 상처받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에 할 말을 잃는다. 네오가 날 바라보자 그 순간 그녀의 선글라스에서 뭔가 붉은 빛 같은게 나와 내 얼굴과 상반신을 스캔하듯 스치고 지나갔다. 깜짝 놀라 굳어있자니 네오가 웃으며 말했다.

에헤이. 그렇게 쫄꺼 없어. 몸에 해되는 건 아니니까. 어디 보자.... 전과도 없고, 깨끗하네? 면허는 있고... 음.... 학생?

어라. 나한테도 반말인가...?

네에.

 그런데도 유미가 마음에 들어했단 말야? 희한하네. 자네도 미래가 탄탄한가 보지? 유미가 따먹을 정도면?

 에에엑?

깜짝 놀라 유미 쪽을 돌아보지만 그녀는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나 저쪽에 있는 바에 가 있었다. 그녀는 이쪽을 보고 외쳤다.

커피 마실 건데 자기도 한 잔 할래?

 주세요.

 네오는?

 알잖아.

네오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대답하자 유미는 웃으며 뭔가를 준비한다. 여긴 카페인 동시에 셀프바인 모양이다. 주인으로 보이는, 그러니까 카페에 손님 하나 없이 이 사람 혼자 있으면 주인 맞겠지? 암튼, 이 사람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고 쉴 새 없이 세 대의 모니터를 들여다 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쟁반을 받쳐든 유미가 이쪽으로 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내 앞에 놓인다. 유미는 자기 자리에도 커피 잔을 하나 내려놓고 네오 옆에는 기다란 잔을 내려놓았다. 거기에는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물...인가? 네오는 잔에 손도 대지 않고 툴툴 거렸다.

전화로 알려준 걸로는 불충분한가 보지? 그러게 유미 너도 팩스를 하나 놓으라고 했잖아.

 기계는 귀찮아.

 헤유. 나 같으면 차 몰고 여기까지 오는 게 더 귀찮겠다.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좋지. 일원이는 나간거야?

 엉. 조사. 아까 말했잖아. 니가 말한 양규호와 임필복에 대한 조사 의뢰가 들어온 게 또 있다고. 그거 오프라인 자료 따러 갔어. 발로 뛰는 건 걔 몫이니까.

양규호와 임필복에 대한 의뢰가 또 들어왔단 말인가. 내심 짐작이 갔다. 유미에게 효진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야기한다. 그녀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마디 했다.

효진이란 애가 자기 애인이라 이거지? 나보다 이뻐?

 ........앞의 설명은 알아들은거야?

 에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뭘.

하아. 유미에게 뭔가를 설명하려 한다는 건 참 부질없는 일인 것 같다.... 내가 한숨을 내쉬고 있는 동안 유미는 네오에게 설명했다. 지금 임필복이 양규호 부인의 약점을 잡고 협박하고 있으니 그를 떼어내고 싶다고. 그 말을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네오는 뭔가 후다다닥 쳐넣더니 잠시 후, 짠!이라고 외치며 팔을 뻗어 모니터 하나를 이쪽으로 돌려 세운다. 

이걸 봐. 대물물산의 회계DB에 올라온 최근 거래내역이야. 이걸 보면 올해 5월부터 관용차 및 하청업체 사용 차량 구매 계약이 전부 양규호를 통해 이뤄지고 있어. 이 정도 물량이면 웬만한 영업사원이 일년에 팔아치울 양을 양규호는 한 달 실적으로 올리고 있는 거라구. 이만한 거래를 주고 받을 정도면 도저히 보통 사이가 아닌데? 제 아무리 전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결정할 정도면 보통 밀어붙인 게 아니야. 그러니 그게 단순히 임필복인가 뭔가 하는 놈을 떼어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게 정보전문가인 나의 결론. 영어로는 인포메이션 스페샬리스트. 에헴.

단숨에 쏟아내는 그녀의 말에 어리둥절하다.

해결되지 않다뇨. 그게 무슨 소리죠?

 음... 유미는 힘깨나 쓰는 아저씨들 불러다가 필복을 조질 생각인가 본데, 그건 근본 대책이 못 돼. 그렇게 되면 필복은 규호와 거래를 끊을 거고 그러면 규호는 기분이 몹시 안 좋겠지. 지금 그 규호의 마누라, 그러니까 김지혜라는 사람을 위해 이런 일을 하려는 거 아냐?

 그...그렇죠.

 규호가 그러면 과연 지혜를 곱게 볼까?

 그...그게 무슨 소리죠? 남편이 아내를 곱게 보지 않다니?

영문을 알 수 없다. 그러자 네오가 책상을 팡팡 내려치며 역정을 낸다.

하아. 이 친구 이거 못 쓰겠네. 너무 순진해! 설마 이래서 유미가 따먹고 있었나?

유미를 돌아본다. 그녀는 어느새 웃음을 지우고 아무 말 없이 커피만 홀짝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카페에 들어와서 날 네오 앞에 앉힌 이후, 그녀는 말이 없었다. 네오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이 누님이 알아듣기 쉽게 자~알 설명해줄께? 동생. 오해하지 말고, 똑똑히 들어. 응? 알았지?

 네.

 거래가 끊긴다. 규호는 막대한 타격을 입는다. 보아하니 조만간 판매왕 후보도 될 모양인데 그게 문턱에서 좌절된다. 규호가 원인을 찾는다. 필복을 따진다. 봐봐. 이정도 거래가 오갈라면 그게 어디 맨입으로 되었겠어? 뭔가 규호가 필복에게 줬을 거라고. 그러니 필복도 이 정도의 물량으로 보답을 했겠지. 두 남자 사이에 뭐가 오갔을까. 돈일까? 다른 무언가 일까? 모르긴 몰라도 규호가 돈이 많아 보이지는 않고. 그렇다면 대체 그게 뭘까. 그게 뭔데 대체 필복이 규호에게 이만큼 해줄까? 뭘까, 뭘까, 뭘까. 궁금하잖아! 너무 궁금하다고! 그래서 나도 한번 디벼봤지. 찾아봤지. 그래야 정보전문가 타이틀 달고 먹고 살지 않겠어? 결론은 너무 쉽게 나와. 원래 사내새끼들의 문제는 별거 없어. 둘 중 하나야.

말을 딱 멈춘 네오는 날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작은 손이다. 엄지와 검지를 벌려 ㄴ자를 그려보인다. 그녀가 꼽은 두 개의 손가락을 바라본다. 그걸 보면서 내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요동친다. 설마.. 설마.... 설마......

돈.

네오가 엄지를 접었다. 그리고.

아니면 여자.

남은 손가락이 마저 접힌다. 안돼. 이럴 수는 없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이건 미친 소리야. 더 이상 듣고 있을 가치가 없어. 뭐가 정보전문가고 뭐가 어쩌고 저째. 저 미친 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 유미는 날 이리로 데려 온건가? 그런 건가? 따져 묻기 위해 유미를 돌아보자 그녀는 말없이 차키를 내밀었다. 거칠게 그것을 낚아채고 카페를 뛰쳐나왔다. 이런 미친 소리나 지껄이는 곳에서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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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은 모른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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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문이 부셔져라 박차고 나간 한석의 뒷모습을 보며 유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오는 쓰고 있던 마스크를 내리고 헤드업 마운티드 디스플레이 장치를 들어올린다. 이제 갓 스물도 안 된 앳된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녀는 유미를 향해 툴툴 거렸다. 

너무 잔인한거 아냐? 차라리 직접 넌지시 말해주지 그랬어? 내가 전화로 들려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넌 짐작했을텐데.

 넌지시 이야기하면 못 알아듣는 성격이라... 어쩔 수 없었어.

 그래서 나한테 악역을 시켰다? 이거 아주 악질인데? 나중에 일원이 오면 다 일러줄거야.

 일러. 근데 일원이도 나한테는 막 대하지 못 하는 거 알지?

여상스러운 유미의 대꾸에 네오는 혀를 찼다.

쳇. 역시 지 남자한테는 물러터졌군. 딸한테는 모질면서.

 내가 언제.

 보아하니 유진이도 쟬 좋아하는 거 아냐? 근데 니가 가로챘겠지.

 티 나나?

 많이 나.

유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죽기 전에는 안 돼.

네오가 옆에 있는 물잔을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성깔하고는...... 나도 결코 좋은 성격이 못되지만 넌 나보다 더해.

 칭찬이지?

 알아서 새겨 들으셔여. 쳇.

 나 택시나 불러줘. 여기 판교에서 서울까지 택시로 가면 많이 나오려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따 일원이 오면 태워 달라고 하던가.

 그래?

유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백에서 뭔가를 꺼내어 네오에게 건넸다.

그리고 내가 직접 온 이유는 따로 있어. 몇 가지 사소한 부탁을 할게.

네오는 건네 받은 걸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사. 소. 한?

유미는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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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은 모른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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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문 앞에 선 효진은 심호흡을 했다. 영업점 문을 연다.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며 어떻게 오셨냐는 여직원의 질문에 답한다.

양 차장님을 뵈러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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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와 일원이는 제가 설정만 잡고 있는 일상판타지액션로망블록버스터섹시에로망상단편집에 수록 예정인 가칭 이웃집 연금술사의 등장인물입니다. 이쪽은 다른 시간대, 다른 평행우주지만 잠시 찬조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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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라고 말하려는데 저기 지금 해가 뜨고 있네요. 아아.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버럭 소리를 질러보지만 그렇다고 상대가 안 받는 전화가 연결될 리 없다. 한 손은 핸들에 얹고 다른 한 손으로 단축번호를 누른다. 속도를 좀 줄여야 하지만 마음이 급해 그러질 못 한다. 넓은 도로에 비해 오가는 차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형 트럭이 많이 오가고 있어 조금 아찔하다.

받아, 받으라고!!!

효진에게 몇 번을 걸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진동으로 해놓고 백 속에 넣어둔 걸까. 그게 아니면 잠깐 두고 어디 간 걸까. 시계를 본다. 저녁 7시 반. 그녀의 집으로도 해보지만 거긴 없었다. 대신 전화를 받은 태근이 형은 효진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했다. 혹시나 싶어 형에게 하영의 전화번호를 물어본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형에게 대충 둘러대고는 전화를 끊었다. 하영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가 가고, 이내 연결된다.

여보세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의 그녀. 그러나 난 마음이 급했다.

여보세요? 하영 씨! 접니다! 한석!

 소리 지르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러시죠? 밀린 수임료를 내시려....

 죄송하지만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니에요! 효진이! 효진이 어디 있나요!?

 저한테 맡겨 두셨어요?

아, 진짜... 이 여자가 정말 끝까지...

오늘 낮에 하영 씨 만나러 간 거 알고 있습니다. 지금 효진이 어디있죠? 같이 있나요?

 ....아까 나갔습니다만.

 같이 있다가?

 예.

 혹시 하영 씨가 그랬어요? 네오라는 사람한테 양규호랑 임필복에 대해서 자료 요청한 게?

그러자 하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안 그래도 그것에 대해 당신에게 물어보려고....

 그런 건 나중에 이야기 해줄게요! 지금은... 으아아악!!!

갑자기 눈 앞이 번쩍인다. 나도 모르게 차선을 이탈하고 있던 모양이다. 맞은 편 차에서 번뜩이는 상향 라이트에 황급히 핸들을 꺾는다. 중앙선을 넘어 달리던 차가 오른쪽으로 급선회한다. 순식간에 우측 가드레일이 시야에 들어온다. 핸들을 바로 함과 동시에 브레이크를 밟는다. 바퀴에 급격한 제동이 걸리고 몸이 한쪽으로 쏠린다.

끼이이이익--

달리던 기세로 인해 후방부가 우측으로 틀어진 차는 그대로 우측 가드레일에 차량 우측 면을 긁으면서 더 나아갔다. 가르르릉- 하고 쇠 긁는 소리가 한참 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차가 멈추고 나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놀랐다. 조수석 쪽 문이랑 그 쪽 바디는 가드레일에 아주 그냥 대고 갈아버린 꼴이 되었다. 남의 차 가지고 참 잘 하는 짓이다.... 그 와중에 바닥에 떨어트린 핸드폰을 집어든다. 뭔가 쨍알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귀에 갖다대자 하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여자가 이렇게 당황한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이다.

이봐요! 이봐요!

 .......소리 지르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살아있어요.

아까 그녀가 한 대답을 고대로 돌려주는 소심한 복수를 해준다. 애써 태연한 척 대답해 보지만 지금 내 가슴은 굉장히 벌렁벌렁하고 있다.

운전 중이었어요?

 네.

 그러게 누가 운전중에 전화를 하고.... 참나. 십년 감수했잖아요. 나 때문에 죽었다고 할까봐.

날 힐난하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죽는다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네? 그게 무슨....

 이꼴저꼴... 더러운 꼴 안 보도록....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구요.....

큰 사고가 날 뻔 했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하고 아까 들은 이야기에 따른 충격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 하기도 했다. 거듭 괜찮냐고 묻는 하영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래. 차라리 지금 죽었다면 지혜의 그 고통을 더는 안 봐도 되는거 아닌가 싶었다. 더럽고 추잡한 거래가 그녀를 감싸고 있는 이 현실을 더는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영이 전해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효진이는 양규호랑 담판을 지으러 간다고 했어요. 같이 가겠다고 했더니 필요없다고 혼자 가겠다고 하더군요.

 아, 안돼!

 안된다뇨? 왜 그러죠?

 그 자식은 이미.... 크윽....

소리를 버럭 지르려다가 갑자기 뒷골이 띵- 했다. 아주 들이받은 건 아니었지만 차가 급하게 정지하고 반쯤 돌면서 몸이 운전석 문 쪽으로 쳐박히긴 했다. 그때 목을 좀 다친 모양이었다.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 몸을 바로 했다. 다시 시동을 건다. 주행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휴대폰을 들고 하영에게 말했다.

어디로 간다고 했죠?

 양규호가 일하는 영업점에...

 수원 팔달구죠? 맞죠?

 네.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차를 다시 몰고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여긴 수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정표를 보고 고속도로 진입로를 찾는다. 남의 차를 이렇게 험하게 굴리고 긁어먹었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곧 고속도로가 나타나고 그 길을 통하니 수원까지 30분도 채 안 되어 도착했다. 막상 도착을 하긴 했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다. 다시 하영에게 전화를 걸어 영업점의 위치를 물었다. 그녀가 주소를 알려주어 길을 물어 찾아간다. 때마침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많이 내리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비가 와서 시야가 많이 제한되어 더 고생했다.

근처까지 왔다고 생각했을 때, 더 이상 영업점을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영업점을 찾으려고 두리번 거리다 발견했다. 길가에 낯익은 차가 세워져 있었다. 비상등을 켜고 뒤에 차를 세운 다음 조수석 쪽으로 다가간다. 유리창을 두드린다. 핸들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효진이 이쪽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문이 열렸다. 조수석에 올라타자 효진이가 이쪽을 향해 몸을 던져온다. 자리의 협소함 때문에 상체만 나한테 기대더니 얼굴을 가슴에 묻고 엉엉 울기 시작한다. 

한석아.. 한석아... 어떻게...해... 지혜 불쌍해서... 어떻게 하냐구...

무어라 해줄 말이 없었다. 착잡했다. 효진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었다. 여태까지 참아온 효진의 울음은 쉬이 그칠 줄 몰랐다. 밖에서 끊임없이 내리는 비처럼, 효진의 마음도, 내 마음도 그렇게 젖어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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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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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씀이죠?

 주제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규호 씨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임 전무와 거래를 끊으라구요. 다 알고 왔습니다.

방금 전까지 간도 쓸개도 다 내줄 것처럼 웃고 있던 규호의 표정이 점차 굳어진다. 영업점에 찾아온 효진을 보고 그느 자기 아내인 지혜의 친구임을 대번에 알아보더니 환대해주었다.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자 그는 자동차 카탈로그를 잔뜩 챙겨들더니 효진을 데리고 영업점 맞은 편에 있는 단골 다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효진을 상대로 영업을 할 생각이었지만 효진의 생각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효진은 자신의 용건을 먼저 꺼냈다. 그러자 대화가 뚝 끊겼다.

그들이 들어온 다방은 칸막이가 쳐있지만 그렇다고 옆자리의 소리가 안 들릴 정도의 방음은 되지 않았다. 옆자리에의 대화가 간간히 들려올 정도였다. 효진은 목소리를 좀 낮추기로 했다. 상대의 굳은 표정을 보고 마음이 약해졌지만 지혜를 생각하며 더 힘주어 말한다.

임필복... 그러니까 임 전무는 당신의 아내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어요... 지혜는 당신과 그의 관계 때문에 반항하지 못 하고 있고....

몹쓸 짓. 그런 터무니 없는 짓이 이런 한 단어로 정리된다는 건, 참 웃긴 일이다. 이 단어 하나로 그동안 지혜가 받아온 괴롭힘과 유린당한 시간이 표현될 수 있다는 건, 정말 웃긴 일이다. 언어는 그래서 무섭다.

당신이 임 전무와 거래를 끊어야 지혜도 다시는 그 사람을.....

찰칵-

차마 규호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말하던 효진은, 난데없는 금속음에 고개를 들고 정면을 쳐다본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담배를 꼬나문 규호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고급 지포라이터였다. 열고 닫는데 꽤 큰 소리가 난다. 아니, 그가 일부러 그렇게 소리를 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입술 한쪽을 찡그려 담배를 문 상태에서 차분하게 뇌까렸다.

겨우, 그런 이야기나 하자고 날 불렀습니까? 바쁜 사람을?

 이봐요. 지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구요. 지금 당신 아내가 처한 상황이 어떤지나 알기나 해요? 그런데 겨우, 라고요?

효진은 규호의 태도를 보고 심각성을 전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세히 말하는 건 그녀도 내키지 않았지만 직접적인 표현을 써서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들려오는 규호의 목소리에 효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알죠. 아주 잘.

효진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뭐라구요?

 저도 다 알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규호는 담배를 쑤욱 빨아들였다. 뺨이 홀쭉해지도록 빨아대자 담배 길이의 절반 가량이 단번에 타들어간다. 테이블에 놓인 재떨이를 끌어다가 제 앞에 두고 한번 턴다. 입을 뻐금이자 한웅큼의 담배연기가 쏟아져 나온다. 효진은 자신의 얼굴 앞으로 날아온 매캐한 냄새에,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게다가... 다 알고 있다? 

지혜가 시키던가요? 이런 이야기를 해달라고?

 무슨 소리예요. 지혜는... 지혜는... 당신한테 알려질까봐... 가장 친한 친구인 나한테도 여태 비밀로 하고 꾹 참고 있었다구요. 모르긴 몰라도 결혼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 짓을 당해왔을텐데....

울지 말아야지, 참아야지 생각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쉽게 되지 않는다.

얼마나 힘들었을텐데.... 그걸 내색조차 않고... 나한테 연락도 않고....

울먹이는 효진과는 달리 규호의 목소리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그랬죠. 그래서 제가 정말 불만이 많았죠.

 뭐라구요?

 난 말이죠. 후우. 지혜라는 애가, 썩 그렇게 마음에 들진 않았어요. 그냥 재촉에 못이겨 나간 선자리고, 고만고만한 아가씨는 하도 많이 봐서 지겨울 정도였죠. 재산이 있어, 집안이 있어, 뭐가 있어. 가진거라고는 그 훌륭한 가슴 밖에 더 있습니까? 아, 그리고 또 있네요. 착하디 착해 빠져서 남에게 심한 소리 못 하는 성격.

 ....당신...지금....

 그렇지만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습니다. 지혜와 당신이 정말 절친한 사이라는 걸. 그리고 당신이 박회장 딸이라는 거. 그것 하나만으로도 정말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뭐, 사람 관계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선봐서 결혼하는 거야, 조건도 보고 상대 배경도 보고 하는 거니까. 난 지혜의 배경을 당신으로 봤어요. 당신을 통해서라면 박회장에게 선이 닿는 건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죠. 근데 이것이 막상 결혼을 하고도 당신한테는 절대 연락을 할 생각을 안하더군요. 언제나 꿍해있고. 그래서 왜 그런가 살펴봤더니, 웬걸? 박회장만큼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 먹어주는 곳에 선이 닿아있더군요.

 그...그게.... 임필복이라고?

 그래요. 난 임 전무랑 알고 지낸지는 꽤 되었지만 그렇게까지 친한 관계는 아니었어요. 언젠가부터 그가 저한테 친근하게 굴기 시작하더군요. 아마도 제가 청첩장을 돌린 직후부터 그랬던 같아요. 나중에 알아보니 지혜가 결혼 전에 그 놈이랑 꽤 붙어먹던 사이라고 하더군요. 결혼 전에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지혜가 그 놈을 차버렸고, 앙심을 품은 임 전무는 지혜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죠. 그러던 와중에 저랑 결혼한다고 하니 옳타쿠나 하고 바로 저한테 엉겨붙더이다.

효진은 머리 속이 새하얗게 타버리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이 작자는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지.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추정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래서... 당신 아내를 놈에게 팔아넘겼어?

제발, 아니라고 말해. 그런 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라고 말야! 효진의 마음이 부르짖는 건 규호에게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살짝 웃기까지 하고 있었다.

팔아넘기다니... 표현이 좀 그렇군요. 서로 적절한 거리에 적절한 수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 정도로 이해해주면 좋겠네요. 그도 원하는 것을 얻어서 좋고, 저도 원하는 것을 얻고... 어차피 지혜도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 따이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큰 부담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이 미친 자식!!

 어허. 알만한 분이... 너무 소리지르지 마시지요. 당신이야말로 친구가 남편말고 다른 남자랑 붙어먹고 있다는 사실을 광고할 셈입니까?

 그럼 너는! 너는 네 아내가.... 그러고 있다고 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아?

 뭐, 어떱니까. 제 아내인데, 제가 마음대로 하는 거야 당연한거고 그 일은 당신 소관이 아니지 않나.

태연하게 말하는 규호를 보며 효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미친 놈이랑 말을 섞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럽고 모욕적이었다. 이런 자를 남편이라고 믿고 있는 지혜를 생각하니 눈 앞이 캄캄했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규호 앞에서 우는 건 자기 자신을 너무도 비참하게 만들 것 같아서 꾹 참았다. 꽉 쥔 그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 이 새끼.... 진짜... 죽어 볼테야? 지혜는.... 지혜는 내 친구라고.

 흠.. 뭔가 좀 더 좋은 조건이 나올 줄 알았는데... 식상한 반응이군요.

 뭐라구?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면... 뭔가 다른 조건을 제시해 보란 말이지요. 출가외인인 친구 일까지 발벗고 나서서 이러고 있다니.. 역시 당신이랑 지혜 사이는 뭔가 좀 특별한 게 더 있는 모양이군요. 그나저나 박회장 딸이라면 좀 더 영리하게 굴 줄 알았는데, 실망스럽군요. 어차피 당신이 임 전무 일을 알아버렸다면 거기도 재미는 다 봤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신은 정말이지....

효진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 자는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그것도 이렇게 태연하게 해대고 있는 건가. 규호는 효진의 태도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가 원래부터 원한 건 딱 하납니다. 박회장과 날 연결시켜 주시오. 그러면 내 당신이 원하는대로 지혜를 놓아주지.

 놓아....준다고?

 그렇소. 단물은 이미 다 빠졌지만 당신이라면 교환조건이 되기 충분하겠지. 다리만 제대로 놓아주면.... 내 확실히 임 전무도 정리하고 지혜도 놓아주지요.

닳고 닳은 영업맨의 혀는 악마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친구의 불행에 슬퍼하던 그녀는 순간적으로 혹했다. 뱀의 혀처럼 꾸물거리는 규호의 속셈은 서서히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지칠대로 지친 효진은 거의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규호는 담배를 비벼껐다. 재떨이에 수직으로 꽂아놓은 담배를 가리키며 그는 짧게 말했다.

일단 날 좀 박회장 근처에 꽂아주십시요. 적당한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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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이 교통사고 씬.... 조금 아쉽네요.

 아예 죽일 걸 그랬나... 쩝. 괜히 살려두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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