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65)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도심을 벗어나 한참을 달린다. 외곽지역으로 접어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마을의 한적한 주택가에 도착했다. 골목길까지 아주 세세하게 나오진 않았지만 복잡한 동네가 아니어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약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저기가 맞을 것 같은데?

차에서 내린 우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대문 앞에 붙은 우편함을 확인한다. 그리고 한 단독주택 앞에서 찾던 이름을 발견한다. 양규호라고 적혀있었다.

여기다.

난 벌써 까맣게 잊고 있는데 효진은 지혜 남편의 이름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하긴... 굳이 따지자면 자기 여자를 앗아간 놈이니 이름을 기억하는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집 앞에는 고급 중형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걸 보고 효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니, 뭔가 이상해서...

 이상하다니. 뭐가?

말은 자기가 꺼내놓고도 효진은 뭔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내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보며 되려 묻는다.

그러게, 뭐가 이상하지?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

 아까는 대답 잘 해놓고....

 이렇게 뜬금 없는 질문은 아니었잖아. 그나저나 이렇게 그냥 와도 되나. 저기 동네 입구에 슈퍼 있던데 거기서 주스라도 사와야 되는 거 아닐까?

무작정 쳐들어가기는 여전히 애매했다. 두 손도 비어있고.... 어쩔까 싶어서 주저하고 있는데 효진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주먹으로 자기 손바닥을 탁 친다.

아! 그래. 이제 생각났다. 음.... 내 기억이 맞다면 지혜 남편이 아마 K 자동차회사 영업사원인가 그랬거든. 나한테 명함도 준 기억이 나. 근데 이 차는 K회사 자동차가 아니잖아.

그게 어디가 어떠냐고 물어보려다가 나 역시 의아함을 느꼈다. 영업사원이 남의 회사 차를 타고 다닐 리는 없고.... 그 순간, 뭔가 불분명한 기억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대로 형체도 갖추어지지 않은 기억인데도 뇌리에 떠오른 순간 몹시 불쾌한 기분이 온 몸을 내리훑는게 마치 전기가 찌릿하고 통하는 것 같다.

우리 말고 다른 손님이라도 온 건가?

하고 중얼거리는 효진의 말에서 무언가 느낀다. 아...아니, 이건 미친 생각이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그러나 내 머리 속에 또아리 틀고 있는 기억의 뱀은 서서히 몸을 풀고 어디론가 그 대가리를 밀어 넣기 시작한다. 약 1년 전, 그러니까 지혜를 두 번째로 만난 날 보았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지혜의 결혼식 말미에 찾아온 한 자동차. 거기서 내리던 놈의 모습...... 어떤 얼굴과 어떤 차의 조합이 머리 속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톱니바퀴의 맞은 편에 물린 어떤 가설 하나가 서서히 돌기 시작한다. 삐끄덕- 삐끄덕- 삐끄덕- 불길한 소리의 전조를 연주한다.

한석 군.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

 응. 멀미라도 했어? 직접 운전하면서 멀미하는 건 좀 웃기잖아.

그러나 난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실없이 웃던 효진도 내 얼굴을 보고 뭔가 눈치챘는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연다. 내 안에 담긴 이 미친 생각을 한시라도 빨리 쏟아내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터져버릴 것 같다.

효진아.

 응?

 난 말야... 평상시에 생각없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듣거든? 그리고 기억력도 별로 안 좋고... 그래서 어떤 일이 있거나 무슨 일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서 굉장히 천천히 생각하고 오랫동안 곱씹어 보는 버릇이 있어.

 그런데?

 내가 처음에 지혜 어떻게 만났는지 이야기 했었지?

 응. 소개팅하려다가 잘못 되어서 만났다면서?

 그리고 지혜가 그 때 누굴 만나고 있는지도 들었지? 본인한테....

 ......그래. 무슨 직장 상사랑 불륜 중이었다고.....그런 이야기를 왜 지금.....

효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 머리 속에서 돌고 있는 이 미친 가설은, 그녀에게도 전염된 모양이다. 아마도 내 표정도 저렇게 일그러져 있겠지.

나 말야. 사실은 그 상사를 본 적이 있어. 그 자리에서 술에 취한 그 놈을 때려 눕히고 지혜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떴었지. 그 다음에 지혜는 그 놈과 관계를 완전히 끊었다고 했었어. 그런데 지혜 결혼식 날..... 이 차를 본 것 같아. 그리고 이 차에서 내리는 그 사람도.....

 뭐라고?!

효진의 비명. 황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는다. 

대체 모든 관계가 끝난 이 놈이 지혜를 왜 찾아올까. 찾아왔다면 대체 무슨 이유일까. 게다가 지금은 여기에 왜 있을까..... 아, 아니.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서 지금 주저하는 거야. 괜히 엄한 생각인지 아닌지.... 그런데 그때 분명 춘천에서....

효진은 내 말을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말릴 틈도 없이 급히 대문으로 달려가 초인종을 눌렀다. 띵똥- 띵똥- 띵똥- 급하게 여러 번 눌러도 대답이 없자 곧바로 대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지혜야! 지혜야! 나야, 효진이! 문 열어!

그러나 회신은 바로 오지 않았다. 효진은 열리지 않는 대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대문 너머, 그리고 저 집 안에서는 지금 누가 있을 것인가. 대체 누가 지혜와 있는 것일까.

달칵-

한참만에 인터폰에서 소리가 났다.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죠? 혹시...

지혜 목소리다. 효진은 인터폰을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어 외쳤다.

나야. 효진이. 그리고....

효진은 날 힐끔 돌아보았다. 어쩐지 눈초리가 사납다.

나 혼자 왔어. 늦은 시간이지만... 그냥 놀러 왔어.

 어? 어.....어....

지혜의 머뭇거림은 목소리에서도 묻어났다. 효진이 재촉한다.

뭐해. 문 안 열어? 이 언니가 왔잖아.

 그게... 지금 손님이 계셔서.....

 손님, 누구?

 남편 만나러 오신 분인데.... 지금 좀 그렇다. 효진아, 내일 내가 연락할게. 오늘은.... 돌아가줘.

효진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게 보였다. 그녀는 인터폰에 대고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젖어든다.

너... 너 정말... 나 안 볼 거야? 좀 뜬금없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왔잖아.. 놀러 왔다잖아...

 미안해. 효진아. 나한테...나한테도 입장이라는 게 있어. 제발.... 부탁할게.

 지혜야.....

대문을 붙잡고 흐느끼는 효진을 달래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걷고 있던 효진은 차에 이르자 내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놔.

 효진아...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내게 소리쳤다.

너! 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지혜가... 지혜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왜 여태까지 나한테 말 안 한거야!

 굳이 말해야 할 지 몰랐어. 내가 잘못 보았나 싶기도 했고...

 그래도!

그녀는 차의 본넷을 쾅하고 내리쳤다.

지혜에게... 지혜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 분명해. 지금, 봐봐. 걔가 날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이 멀리까지 보러 왔는데, 얼굴조차 안 보려고 한다고! 그게 지금 보통 일인줄 알아?!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내가 알았다면...

 알았다면! 알았다면 어떻게 할 건데!

 나도 내가 본 걸 확인하려고 다시 올라가 확인하려고 했었어. 근데 네가 빨리 서울로 가자고 해서...

답답한 마음에 이렇게 말했는데 그게 효진의 성질을 더 건드린 모양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대번에 높아졌다.

그래서, 그게 지금 나 때문이라는 거야? 네가 본 것을 확인 안 한 탓을! 지금 나한테 하려고?!

 지금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아니면! 아니면 뭔데!

서로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내가 느끼고 있는 불안감 같은 것을 그녀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막연한 불안감은 싫다. 차라리 눈으로 확인하고 말테다. 몸을 돌려 지혜 집 쪽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효진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디가?

 보고 올게.

 뭘?

 .....어쨌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따라오지 마.

지혜네 집은 단층짜리 양옥이었는데 좁은 마당이 딸려있었다. 주위를 확인하고 뒷담을 넘어간다. 학교 다닐 때 월담 몇 번 한 적은 있지만 이 나이 먹고는 거의 처음이다. 간신히 매달려서 겨우 넘는다. 자세를 낮추고 집으로 다가간다. 커튼이 쳐진 창 가까이 붙는다. 몸이 많이 드러나지 않게 주의하면서 창 안의 동정을 살폈다. 거실인 모양이었다. 누군가 소파에 앉아있는게 보였다. 위치가 좋지 않아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일단 내부의 소리를 들어보기로 했다. 몸을 옮겨 환기구 쪽에 귀를 바짝 대고 있자니 희미하게나마 안의 소리가 들려온다. 거실에 있는 사람이 부엌 쪽을 향해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온 건가? 응? 허허허.

너털웃음.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기억 속 어딘가에서 스멀스멀, 이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다.

이리 좀 와서 앉지? 간만에 보는 건데 와서 서비스도 좀 해주고.

서비스라니... 저건 대체 무슨 소리지? 설마....

아직 규호 올려면 시간 좀 있는데 한 판 뒹굴고 있을까? 응? 어때?

느글거리는 저 목소리에 토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나저나 규호라니.... 아까 보았던 지혜네 집 문패에 있던 이름이다. 지혜 남편의 이름을 저렇게 막 부르는 사람이라니... 어쩐지 불안하다. 몸을 옮겨 거실 창문을 벗어나 부엌 쪽 창으로 다가간다. 작은 창이라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각도가 좋지 않다. 간신히 자세를 바꿔보니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옆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그 풍만한 몸매. 바로 지혜였다. 들리지 않겠지만, 그녀에게 내 말을 전하고 싶다.

너와 내가 처음 만난 건 순전히 나의 착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도 사정이 있었기에 너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받아들여 하룻밤을 함께 보냈었다. 그리고 헤어졌다. 다시는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너와 나는 바로 다음 날 다시 만났다. 약속도 하지 않았고,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 들어간 술집 화장실에서 그렇게 마주치고 다시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헤어졌다. 다시는 볼 일이 없다는 생각에 너는 자신의 치부까지 이야기해 버렸다.

그리고 너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바로 내 옆 집에 이사 오면서 말이다. 거기서 결코 잊지 못한 관계를 가졌지만 너는 다시 내 곁을 떠났다.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위해. 난 그 결혼을 축복해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난다.

나의 첫 여자. 내가 처음으로 고백했다가 차인 여자. 내가 처음으로 결혼식에 직접 가서 내 이름으로 축의금을 낸 여자.

그녀가 거기에 있지만 난 나를 드러낼 수 없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가.

왜 이렇게 대답이 없어? 서방님이 부르는데 말야.

거실에 있던 이가 부엌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지혜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싱크대에 서서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그 자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설마설마하며 한가닥 희망을 기대고 있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내가 잘못 보았기를 바랐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기를 바랐다. 내가 하는 그 미친 추정이 사실이 아니길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그날 술집에서 보았던 그 자식은 지금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지혜의 뒤로 바싹 붙는다.

또 구멍을 열심히 쑤셔주어야 말을 잘 들을라나? 응? 응?

녀석의 뱀같은 혀가 지혜의 목을 핥는다. 녀석의 음탕한 하반신이 지혜의 뒤에 부벼진다. 녀석의 두꺼비 같은 손이 지혜의 가슴을 주무른다. 그 터무니없는 장면을 보면서 급격하게 열 받아버린 나는 지금 내 입장을 잊고 창문을 부셔버릴 뻔했다. 

놔.

 어허, 이거 요새 또 안 눌러줬더니 앙탈인감? 응?

지혜의 차가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놈의 능구렁이 짓은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지혜의 긴 치마를 슬금슬금 걷어올리기까지 한다. 그녀의 육덕진 허벅지가 드러나고 팬티까지 그 놈의 손이 닿자 지혜는 신경질적으로 놈의 팔을 쳐내며 몸을 홱 돌렸다.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좀 있으면 남편이 올 거야!

 그래서, 뭐? 니 년 남편 오기 전에 빨리 한번 대주겠다고?

 저리 꺼져. 소리 지르기 전에.

 질러봐, 씨발년아.

그 놈은 자신의 속내를 전혀 감추지 않고 오히려 지혜를 안을 듯이 팔을 벌리며 다가간다.

질러 보라고. 여기 날 따먹으려는 놈이 있어요. 남편이 있는데도 존나 따먹으려는 놈이 있어요, 하고 말이야. 음? 니가 정말 소리를 지를 거면 아까 찾아온 친구에게 들어오라고 말을 했겠지. 안 그래? 응? 친구년한테 돌아가라고 이야기한 건, 나한테 이미 대줄 준비를 하고 있었단 생각 아닌가?

바들바들 떨리는 지혜의 고통이 나한테까지 전염된다. 울컥해진다. 지난 시간... 내가 못 보는 곳에서, 내가 없는 시간에서 지혜는 그 놈에게 대체 무슨 짓을 당해왔을까. 보고 있는 이 장면만으로도 피를 토할 것 같은데 상상이 닿는 그 어렴풋한 무언가에도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더는 못 참겠다고 생각하여 입구를 찾으려고 하는데 차 한 대가 집 앞에 서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몸을 숨겼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그 놈도 황급히 지혜에게서 떨어져 거실로 돌아갔다. 누군가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쿠, 형님. 벌써 오셨습니까?

 허허, 난 시간 맞추어 온다고 왔는데 말야.

 하하하, 제가 좀 늦었죠? 자기야. 음식 준비 다 됐어?

지혜의 남편, 규호는 그 놈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부엌으로 들어와 지혜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지혜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남편을 맞이한다.

으응... 거의 다 되었어.

 중요한 분이니까 맛있게 좀 부탁할게.

 ..........알았어.

고개를 떨구는 지혜의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규호는 거실로 돌아가 그 놈과 환담을 나누었다. 곧 이어 지혜가 차린 상이 차려지고 테이블에 둘러앉은 세 사람이 식사를 시작한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하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려니 몸이 다 저릴 지경이다. 

그들의 대화에서 대략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지혜의 남편, 규호는 그 놈을 임 전무라고 불렀다. 놈의 회사에서 최근 노후화된 차량 교체가 대대적으로 있을 예정인데 거기에 규호를 참여시킬 모양이었다. 거들먹거리며 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 놈 앞에서 규호는 사막에서 물장수라도 만난 모양으로 크게 기뻐하며 꺼뻑 죽는 시늉까지 한다. 그 놈도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겸양을 떨었지만 술이 한참 들어가고 나니 거들먹거리는 모양새가 심히 눈꼴시어진다. 심지어 지혜에게 술 좀 따라보라고 권하면서 옆자리에 앉혀 허벅지를 탕탕 내리치기 까지 한다. 남편이 있는데도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주먹을 콱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더 가관은 그 다음이었다. 어느 순간 규호는 술이 꽤 올랐는지 식탁에 엎드려 잠이 들어버렸고 그 놈은 노골적으로 지혜를 더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혜가 모르는 척 몸을 빼거나 손을 쳐내는 식으로 그 놈을 거부했지만 규호가 코를 골기 시작하자 숫제 옷이라도 벗길 요량으로 덤벼들기 시작한다.

왜 이래!

지혜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그 놈을 밀어내었지만 그 녀석은 막무가내였다.

가만 있어!

 놔, 놓으라구!

두 사람은 식탁에서 물러나 소파에서 악다구니판을 펼친다. 그러나 지혜가 녀석의 힘에 눌리어 치마는 반쯤 벗겨지고 윗도리는 목 부분이 늘어나 덜렁거린다.

미쳤어? 이러다 남편이 깨면 어쩌려고?

 씨발. 깨보라지. 내가 꿀릴 게 있을 것 같아?

 뭐?

 말마따나 내 한 마디면 니 남편 연봉의 자릿수가 달라지는데.... 게다가 좀 있으면 승진심사라며? 응?

 더러운 새끼.

그러나 지혜의 손에서 밀어내는 힘이 빠지고 있다. 그 놈은 지혜를 거의 올라타다시피 한다.

씨발년아. 진작 이렇게 고분고분 나오면 니나 나나 편하잖아. 왜 이렇게 앙탈이야?

지혜의 셔츠가 걷어올려진다. 탐스러운, 아니, 탐스럽다는 말로도 모자란 그녀의 거대한 유방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놈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흐흐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내가 이래서 니 년을 못 놓겠다니까. 이거 봐라. 존나 먹음직스럽잖아.

녀석의 손 아래 지혜의 유방이 짓뭉개진다. 지혜는 고개를 돌리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어때? 남편이 잘 해주냐? 응? 응? 말해봐. 이 걸레 같은 년아.

녀석의 손이 지혜의 치마 속으로 들어간다. 지혜는 다리를 꼬아가며 저항해보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남편이 박아주는게 모자라면 나한테 말하라니까. 니 년 보지 맛을 아는 내가 좀 도와줄 수도 있어. 크흐흐.

지혜의 수난을 보면서, 나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긴 지혜의 집이다. 만약 내가 난입하여 그 놈을 때려 눕힌다 한들 그 여파는 반드시 지혜에게 미칠 것이다.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다. 남편이라도 깨면 그 감당을 어찌할 것인가. 그렇다고 저 욕지기 나는 광경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주변을 살피던 나는 결국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일단 뒷담을 넘어 밖으로 나간다. 지혜 집 대문 앞으로 간 다음 주변에 굴러다니던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 그 놈의 차로 다가갔다. 고급 중형차니 분명 그 장치가 있을 것이다. 주변을 확인하고 손에 든 돌멩이를 높이 치켜든다. 그리고 운전석 쪽 유리창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삐익- 삐익- 삐익-

한 밤의 정적을 깨는 요란한 알람 소리. 역시 이런 차에는 도난 방지 장치가 있었다. 제대로 먹혔다. 깨져 나간 창을 두고 그대로 몸을 빼내어 골목 어귀로 숨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헐레벌떡 밖으로 나온 그 놈은 자기 차를 보고 고함을 질렀다.

어떤 새끼가!!!!

사방을 둘러보지만 그렇다고 내가 보이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녀석이 안달복달하는 장면을 지켜본다. 녀석은 있는대로 화를 내며 열받아 하다가 결국은 차를 끌고 가버렸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혜의 집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주차해놓은 효진의 차로 돌아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 대체 무슨 일인거야? 응?

 들어가자. 들어가서 이야기 해.

차에 올라탄다.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어디서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을 주저하고 있자니 따스한 손길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내 손을 효진이 가만히 쥐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는... 아까는 내가 미안했어. 널 비난한 건 본심이 아냐.

 효진아...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래. 이제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널 비난하지 않을테니 말해줘. 부탁이야. 이 손... 놓지 않을게.

아아. 효진의 눈망울을 보며 난 더 이상 숨길 게 없었다. 작년, 지혜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조금씩 이야기를 시작했다. 엉겁결에 지혜를 만나고 그리고 우연히 다시 만나고.... 거기서 만난 그 놈의 모습과 그 녀석과 내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결혼식에서 녀석을 얼핏 보았던 일. 방금 전 들은 대화를 통해 유추한 사실들을 이야기한다. 지혜를 압박하는 지금의 상황. 이 모든 것들을 쏟아놓는다. 효진은 눈물을 쏟았고 당장이라도 차에서 뛰쳐나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잡고 있는 손 때문에 그녀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혜가 겪었을 고통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차 안에서 꼬박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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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이 많아서요, 다음 편도 바로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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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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