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좀 마셔요.
고...맙...습니다.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손을 내밀어 캔커피를 받아든다. 몹시 고맙게도 차가운 커피가 아니라 따뜻한 거였다. 채송화....라고 했던가? 꽃 이름을 가진 그 여자 검사는 나름 센스를 가진 인물이었다. 이 상황에 만약 차가운 음료를 마셨다면 난 아마도 얼음여왕의 시샘을 받은 사람처럼 얼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렸기 때문이다. 병원 복도 끝에 있는 손바닥만한 휴게실에 앉아 난 얼어붙어 있었다.
미안합니다. 그 아이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눈을 떼지 말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는 황급히 팔을 내저었다.
아, 아뇨... 검사님이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그게.... 그걸....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커피 맛이 굉장히 쓰다. 원래 캔커피는 달달하게 나오는 게 정석인데 어찌된 일인지 씀바귀보다 썼다. 나중에야 그게 커피 때문에 느껴진 맛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자신의 주먹을 음부에 찔러넣고 히죽거리고 있던 소란의 표정은 내 오감을 앗아가버렸다. 지금 내가 숨쉬는 것인지 멍하니 있는 것인지 조차 구별이 가질 않는다. 피까지 줄줄 흘리고 있었지만 그 아이는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 하는지 그걸 쑤시기 까지 하고 있었고 달려든 사람들이 행동을 제지하자 그제서야 울부짖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자지를 달라며 발버둥치고 울부짖었다. 나중에 들은 송화의 설명에 따르면 처음에 이송된 소란의 상태를 보고 난 이후 남자는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있다고 했다. 남자만 가까이 오면 소란은 다리를 벌리며 자신을 쑤셔달라고 사정했다고........
차마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있지 못 하고 병실을 뛰쳐나와 복도 한쪽에서 토악질을 시작했다. 무엇이 날 그렇게 역겹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교회라는 곳? 아니면 그 교회에 자신은 물론 아이를 내다 판 엄마라는 사람? 그것도 아니면... 그런 이야기를 미리 들었음에도 그저 방치하고 있던 나 자신...?
집중치료실로 옮겨서 치료하고 있다고 합니다. 차후에 상태가 진정이 되면 회복실로 옮기게 될 거예요. 일단은 돌아가서 연락을 기다....
저 때문이에요.
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낀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참담함을 누구에게라도 토해내고 싶다. 이제 겨우 오늘 알게된 사람에게... 내 속을 털어놓고 싶었다.
소란이는.... 저한테 말했었어요. 엄마가 이상한 종교에 빠져있다고.... 걱정된다고..... 거기에 한 번 붙들렸다가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는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전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그저 잘 될 거라는 근거없는 격려만 해주었을 뿐이죠. 그런데.... 그런데..... 이렇게 되고 마는군요.... 전 정말 쓰레기예요.
한석 씨...
바로 옆에 있는 송화가 난감해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쏟아낸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더 비참해졌다. 남자가 눈물이라니. 창피하게 생판 모르는 사람 앞에서. 그러나 그 비참함보다, 창피함보다도 더 뼈아픈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아프다. 나라는 인간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느껴진 적이 또 있을까.
쓰레기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합격품은 아닌 것 같군요.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와 함께 다가온 독설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대번 알 수 있었다. 전에도 몇 번 들었으니까.... 옆에 있는 송화가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진다.
하영아, 너.....
송화. 넌 가만 있어봐. 이봐요. 최한석 씨. 그래서요. 말해보세요. 당신이 쓰레기라고 말하고 주저 앉아 있으면 뭐가 해결이 됩니까?
고개를 들어 내 앞에 서 있는 하영을 올려다 본다. 그녀의 안경테가 천장의 빛을 받아 번뜩인다. 눈빛 만큼이나 매섭다....
소란이라고 했던가요? 저 아이는 지금 사이비 종교의 피해자인 동시에 향정신성약품의 투여자로서 피의자 신분이에요. 그런 그 아이를 위해 당신이 지금 뭘 할 수 있는데요?
......아무것도요.
그걸 알면 당장 주접은 그만 떨고 일어나서 돌아가세요. 여긴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은 날카롭고 재수없었지만 그만큼 정곡을 찌르고 있었기에 반박을 허용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려니 옆에 있는 사람이 대신 말려주었다.
하영! 너 말이 너무 심하잖아. 이 분도 나름 걱정이 되고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오고 그런 건데.
걱정이 되면 혼자 할 것이지 왜 엄한 사람까지 불러 들여서 귀찮게 하냐 그 말이지.
너 지금 이런 일에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손을 들어 두 사람의 말다툼을 제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은 이미 말라있었다. 하영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하영 씨는 변호사라고 했죠? 그리고 지금 소란이가 피의자 신분이기도 하다고요.
그렇죠.
그러면 의뢰를 하나 할게요. 소란이를 변호해주세요. 수임료는 제가 어떻게든 마련하겠습니다.
하영은 살짝 웃었다. 어찌보면 그건 비웃음 같으면서도 자조 섞인 웃음이었다.
저는 좀 비쌉니다만?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했다. 송화와 그녀가 이야기할 게 있다고 하기에 휴게실에서 나와 복도로 접어들었다.
효진아....
응. 이제 좀 괜찮아?
어... 그래.
휴게실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효진이가 벽을 기대어 서 있었다.
저기, 하영 씨에게 의뢰를 하나 했어. 여기에 있는....
그러자 효진이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다 들었어.
그러니?
그녀와 나는 복도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병실로의 접근은 허락되지 않았고 나 역시 다시는 소란을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병원을 벗어나 차에 도착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효진이 받더니 곧 나에게 전해준다. 담임인 지애였다. 경찰서에 이미 갔다온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소란의 상태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아무도 면회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와 앞으로 치료 후에 있을 절차에 대해 일러주었다. 그녀는 눈물 섞인 목소리로 나에게 수고했다고 말했다. 몹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이런 소리를 듣고 있다니....
전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저는 그저....
하영의 독설을 들으며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또 울컥해졌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꾸역꾸역 밀어넣는다. 귓가에 들려오는 지애의 목소리도 이미 젖어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니에요. 최 선생이 애쓴 거 맞아요..... 일단 내일 학교에서 다시 이야기 합시다. 늦었으니 어서 들어가요.
네에.
전화를 효진에게 건네주고 조수석에 앉았다. 의자를 젖혀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운전석에 앉은 효진도 말이 없었다. 한참 후, 하영이 돌아온 이후 효진은 차를 출발시켰다. 열두시가 넘어 디지털 시계에는 AM이라고 찍혀 있었다. 자취방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자 효진도 따라내렸다.
오늘, 여러가지로 고마웠어. 나중에... 갚도록 할게.
그런 소리 하지마. 갚다니....
아냐. 내가 신세 끼친 건 맞잖아. 조심해서 들어가.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내 옷깃을 잡는 손길이 느껴진다. 돌아보니 효진이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이 녀석이 이런 표정이라니... 정말 답지 않다.
왜 그래?
아니, 저기....
너답지 않게 왜 그렇게 주저해? 똥 마려?
그제서야 효진의 원래 표정이 조금 회복되었다. 내 머리를 와락 끌어안더니 예의 그 헤드락을 확 건다.
그래! 마렵다, 이 놈아! 어이구!
한참 내 머리통을 아프게 하더니 효진은 차에 올라탔다. 창문을 내리고 나에게 말한다.
무슨 일 있거나 하면 바로 연락해, 알았지?
알았어.
차가 출발하기에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를 걱정해주는 효진의 마음이 퍽 고마웠다. 별로 해준 것도 없이 신세만 잔뜩 졌는데도 저렇게 걱정해주다니.... 어쩐지 효진이와는 남자, 여자를 떠나 정말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학교에 출근하자마자 지애와 마주 앉았다. 소란의 상태를 포함하여 채 검사에게 들은 이야기와 소란에게 들었던 이야기까지 종합하여 전해주었다. 소란의 엄마는 꽤 오래 전부터 그 이상한 종교에 빠져있었다고 했다. 종교에 빠진 그녀는 집안의 재물을 들고 나가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가족도 그 교회에 나가길 원했다. 소란의 아버지는 그걸 거부했고 거의 이혼 상태와 같은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소란 역시 그 교회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런 상태가 되었다.... 그 교회는 이름부터 시작해서 결코 범상한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령을 접한다는 이유로 여신도들에게 어떤 약을 투여했고 그 약을 먹은 여자들은 남자를 받아들이기 쉬운, 아니, 남자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체질로 변해갔다.....
그...그만 해요. 최 선생.
.....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애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찍었다. 그녀는 소란에게 바로 가고 싶어했지만 학생 하나를 위해 빠질 수 있을 정도로 학사과정이 그리 편한 건 아니었다. 교무주임의 지시를 받은 학생과 선생들이 경찰에 가보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오늘부터 직접 교편을 잡게 된다.
안녕하세요. 기술, 가정을 맡은 최한석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해요.
허리를 숙여 인사해보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이전같지 않았다. 아이들의 시선은 소란의 빈 자리를 힐끔힐끔 살피고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도 이미 소문이 퍼진 걸지도 몰랐다. 나만 해도 뉴스에서 소란을 발견했을 정도이니.... 어떤 소문이 퍼져도 이상할게 없지 싶었다. 아침에 우연히 보게 된 신문에는 해당 교회에 대한 온갖 추측성 기사가 난무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위해 일부러 더 선정적으로 묘사된, 여신도들에게 행해진 난잡한 행위에 대한 기사도 실려있었다. 채 검사가 주장한 언론 차단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종로 바닥에서 그 난리를 쳐대던 교회였는데... 그에 대한 기사가 나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교탁에 서보니 바로 앞자리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소란이의 자리는 물론 어찌된 일인지 유진이의 자리도 비어있었다. 출석부에는 친척 장례식 참석이라고 적혀있었다. 친척이라니... 유진에게 친척이 있었던가?
그럼, 교과서 80페이지를 펴주세요. 발명과 기술의 이해....항목을 여러분께 설명하겠습니다.
몇 주간 열심히 짜놓은 교안대로 수업을 진행해갔다. 말은 좀 떨렸지만 아이들의 시선을 받아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교실 뒤편에 서 있는 지애와 또 다른 평가 담당 선생의 눈빛이 날카롭다.
그럼... 간단한 도표를 그려 이 내용을 설명해보겠습니다.
몸을 돌려 분필을 집어 들고 칠판을 마주한다. 검푸른 칠판에 이제부터 도표를 그려야 한다. 몇 번이고 연습했던 도표다.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눈을 뜨고도 그릴 수가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
칠판에 분필을 가져다 대긴 했지만 선을 그을 수가 없다. 손이 부르르 떨렸다. 질끈 눈을 감는다. 차라리 눈을 감으면 생각이 날까 싶었는데 오히려 다른 게 생각나 버렸다.
-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선생님한테는 이런 이야기가 술술 나오네요. 왜 그럴까요?
- 글쎄... 나야 모르지.
- 저도 모르겠어요.
저기 등 뒤에 수많은 아이들과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학교를 다니며, 웃고 떠들던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는가.
- 제가 선생님이 애인 만나러 다니신다는 거 비밀로 해드리는 것처럼요, 선생님도 유진이한테 제 이야기는 꼭 비밀로 해주세요. 약속하실 수 있죠?
그래, 약속할게. 약속한다고 나는 말했어. 너에 대한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너가 그런 짓을 당할 동안...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었지. 그렇게 나는 약속을 지켰고 너는 그래서 이 자리에 없다.
으흐흐흐....흑....
분필이 우뚝 부러진다. 부러진 분필면이 칠판을 긁으면서 괴상한 소리를 냈다. 등 뒤에서 웅성거리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몸을 돌렸다. 교탁에 선다. 내가 서는 마지막 교탁이 될테다.
여러분.
어젯밤,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그래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해답을 찾지 못 했는데 남에게 문제를 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교탁을 짚은 채로 맘에 담아둔 이야기를 쏟아낸다.
..........나는.........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을 가르칠 자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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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너무 타박은 말아주세요.
*
좋은 하루 되세요.
띠띠띠띠-
손에 찬 손목시계에서 알람이 울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얼른 껐다. 그러나 그건 쓸데없는 걱정에 불과했다. 대피소에 늘어져 자고 있던 사람들은 이미 일어나 자기 침낭이나 모포를 개며 등반을 서두르고 있었다. 장터목 대피소의 아침은 생각보다 꽤 일렀다. 아직 네 시도 안 되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어나 있었다. 모포 반납을 하는 줄에 서서 모포를 반납하고 대피소를 나섰다. 먹먹한 어둠이 사위를 감싼다. 어두워서 제대로 걸어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손전등과 헤드업 라이트를 달고 걸어가기에 그 뒤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따로 조명이 필요없었다.
어제 밤 듣기로 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는 한 시간 거리라고 했는데, 웬 걸. 이게 어딜 봐서 한 시간 거리냐, 한 시간 거리는. 걸음마를 뗀 지가 언젠데 다시 네 발 걷기로 퇴화하여 기다시피하여 올라가야 했다. 온 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천왕봉에 도착했을 때는 다섯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길이 험하기도 하고 바람도 많이 불었지만 무엇보다 쑥쑥 걸어 올라가는 아줌마들에게도 추월 당하는 걸로 보아 내가 산을 아직 잘 타지 못하는 모양이다. 백두대간을 따라 오며 나름 산을 탔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주 오만한 생각이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보니 누군가 외쳤다. 떴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밝아지고 있기는 한데 어디서 해가 뜨는 건지 한번에 찾지 못 했다.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지난 주에 동해에서 보았던 일출과는 달랐다. 동해에서의 일출은 붉게 타오르는 바다에서 별안간 불쑥 튀어나온다는 느낌이었는데 여기서는 떴는지 어땠는지도 모를 정도로 뿌연 안개 속에서 간신히 비집고 나오는 해의 끄트머리를 본 듯 만 듯한 기분이다. 옆에 있던 어떤 이가 실망을 하며 궁시렁거리자 동행으로 보이는 이가 말하길 천왕봉에서 깨끗한 일출을 보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넘겨 들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나는 평생 와도 못 보겠군.'
단 한 명의 아이도 제대로 지키지 못 했고 내가 해야 할 일도 내팽개치고 도망 가버린, 나라는 녀석에게 천왕봉의 일출은 결코 제대로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보름 전, 첫 수업을 그런 식으로 포기하고 교실을 나서자 지애가 달려와 나를 제지했다. 복도에서 우리 두 사람은 한참을 서서 마주보고 있었다. 한참만에 지애가 물었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가면 괜찮아. 다들 실습을 한 번에 제대로 해내는 경우는 드무니까.
난 고개를 저었다. 결심은 이미 서있다.
후회, 않겠어?
그녀의 질문에 나는 이미 너무 많은 후회를 했기에 더 이상 할 후회가 없다고 대답했다. 소란이 때문이냐고 재차 묻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싸늘한 표정이 되어 나를 놓아주었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는 내 등 뒤를 향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교사 한 명이 모든 아이를 책임질 수는 없어. 고작 한 아이가 잘못 되었다고 나머지 모든 아이를 저버린다면, 넌 자격이 없는 거야.
그녀의 말도 맞다. 틀린 말은 절대 아니다. 그렇지만 고작 한 아이라니. 그건 너무 심하잖아. 너무 슬프잖아. 고작 한 아이도 구원하지 못 하면서 다른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하아. 그런 방식은 용납할 수 없어. 내 스스로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데 더 이상 뭘 어쩌란 말인가.
교무실로 돌아와 가방을 챙겼다. 교무주임을 만나 실습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황망해하며 이유를 묻는 그에게 송 선생이 말해줄 거라고 답하고 학교를 나섰다. 어디로 가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운동장에서 태근이 형을 마주치고 말았다. 애들이랑 어울려 축구를 하고 있던 형은 수업시간에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형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소란에 대해 말하기도 곤란하다고 생각하여 주저하고 있었더니 형이 먼저 소란이의 이름을 꺼냈다. 그 아이 때문이냐고 묻는다.
어떻게 알아요?
지금 학교 전체에 소문이 쫙 퍼졌어.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반쯤 미쳤다면서? 너네 반 맞지?
미친 게 아니라요... 하아. 걔는 피해자라구요.
그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니가 왜 그만 둬?
그 아이가 거기에 끌려가기 전에 저한테만 그 교회의 수상한 점에 대해서 이야기 했었다구요. 그런데도 전 아무런....
평소 같으면 어이구, 이 찌질아~ 하면서 한 대 쥐어박을 줄 알았는데 형은 아무 말 없이 날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팔짱까지 낀 형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래서 그만 둔다?
.....네.
너한테 내가 이야기 한 거 있지? 선생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고.
형 이야기잖아요.
그래. 난 그거 하겠다고 진짜 존나 애쓰고 있거든? 경력에 흠집 내려는 년 훅 보내버리기까지 하면서?
은애 이야기인가. 그녀에게 생각이 미치자 더 우울해졌다. 형의 말은 이어졌다.
근데 넌 이제 일주일만 버티면 되는 걸 내버리고 내빼겠다고? 정말로, 정말로 후회 안할 자신 있어?
후회 안 해요.
하아. 넌 좀 더 강단 있는 놈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봤나 보다. 알았어. 빨리 꺼져버려.
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손을 내저었다. 등을 돌린 형에게 더 할 말은 없었다. 발걸음을 대학교 쪽으로 향했다. 과사에 들러 휴학계를 냈다. ROSE에 가서 노트북을 돌려주었다. 유미도, 선영도 보이지 않았다. 면식이 있는 웨이터 한 명에게 노트북과 쪽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분간 일을 돕지 못 할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글을 남겼다. 그대로 집에 돌아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갈아입을 옷과 예전에 사두었던 침낭 꾸러미 하나가 전부였다.
어디 가게?
음... 뭐. 조금 머리를 식힐까 하고. 넌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짐을 거의 다 쌀 때쯤 효진이가 들어왔다. 그녀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빠가 전화했어. 그나저나 하영이 언니한테 수임료 주기로 했다면서? 그거 안 주고 어딜 튀려고?
음... 조금만 나중에 주겠다고 하면 안되나? 후불제 같은 건?
어림없어. 언니가 얼마나 수전노인데. 선불 받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아.
그 여자, 생긴 것처럼 노는 구나. 한숨을 내쉰다.
하아. 그러면 니가 대신 좀 내줘. 나중에 갚을게.
난 이자가 쎈데?
사채 이자라도 갚을테니까 염려 마라. 절대로 안 떼어 먹어.
그러자 효진이 두 팔을 번쩍 내밀었다.
사채 쓰면 선이자라고 있는데 혹시 한석 군은 들어봤나 모르겠네?
그게 뭔데?
돈 빌리기 전에 이자를 먼저 내는 거야.
미친.... 그런 게 어디있어?
어디있긴? 빌려주는 사람 마음이지.
둘러메던 배낭을 내려놓았다. 쓴웃음을 짓는다.
돈이 없어서 너한테 빌린다고 했잖아. 그런 내가 돈이 어디있냐? 통장에 조금 있기는 한데...
고전적인 방법이 있지. 돈 없으면 몸으로 때워.
그녀의 손짓에 따라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침대에 걸터앉은 효진의 앞으로 다가가자 그녀는 내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내렸다. 팬티 마저 내리고 축 늘어져 있는 내 자지를 어루만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어여쁜 애를 데리고 얼마나 멀리 가려고?
몰라. 그냥 당분간은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학교에 휴학계도 이미 냈어.
그럼 1년이나?
그렇게까지는 아니고... 추워지기 전에는 돌아올게.
그러자 효진은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정말이지 그녀답지 않은 표정이었다.
꼭 돌아와. 알았지?
대답 대신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대로 침대로 기어올라가 둘이 한바탕 엉켰고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효진의 착실한 서비스를 받은 자지는 기운없는 나와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빳빳하게 단단해진다. 다리를 벌리고 내 자지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효진은 내 목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나랑 같이 지혜 만나러 가기로 했잖아.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빨리 와. 같이 가자.
효진이 통 놓아주지 않기에 밤이 되어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배웅하러 나온 효진은 칭얼거리듯이 말했다.
기왕 시간 이렇게 된 거 한숨 자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면 안 되는 거야? 무슨 애가 이렇게 막무가내니?
너랑 있으면 나까지 마음이 해이해져 버려.
효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자 그녀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해이한 게 뭐가 어때서? 차라리 내가 낫다. 한석 군은 너무 극단적이라서 탈이야. 평소에는 누구보다 헤벌레하고 느슨하면서 이럴 때는 왜 이렇게 고집이 세?
그러나 소란의 비극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는 그녀는 소란의 이름을 일절 꺼내지도 않았고 내가 길을 떠나는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그저 조심히 다녀오고 한 번 씩은 연락하라고 했을 뿐이다. 난 효진의 주소를 수첩에 적어두었다. 자취방의 열쇠는 그녀에게 맡겼다. 여전히 불이 꺼져 있고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앞집을 한 번 쳐다보고 이내 몸을 돌렸다.
그 날 밤, 청량리에서 떠나는 열차에 몸을 싣고 정동진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동해의 일출을 보고 나서 설악산을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백두대간을 타고 종주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산행에 익숙하지 않아 한참 애먹었다. 어렸을 때만 해도 마을 뒷산에 종종 올라가 놀곤 했는데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서울에 올라와 살기 시작한 이래 등산이라고는 공대 뒤쪽 언덕 올라간 게 다였으니 말 다했다.
남들 하루 걸리는 길을 이틀 걸리기도 하고 이정표를 놓쳐 산 속을 한참 헤매기도 했다. 간신히 길과 방향을 잡아 남쪽으로 내려와 산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이곳저곳을 유랑했다. 잠은 주로 침낭을 들고 절이나 학교 같은 곳에 기어들어가 잠을 청했다. 절에서 절밥을 얻어 먹거나 가지고 있는 돈을 가늠해가며 식사를 적당히 사먹었다.
지리산 기슭에 도착했을 때 쯤에는 가지고 온 돈이 다 떨어졌다. 어쩔까 하다가 꽤 큰 염소농장 하나가 보여서 무작정 들어가 사정을 말했다. 제일 젊은 사람이 오십대 아저씨인 그곳은 젊은 일꾼을 굉장히 환영하고 아주아주 아낌없이 부려먹어 주었다. 며칠 동안 염소똥을 치우고 꼴을 베어왔다. 오랜만에 해보는 시골일에 몸이 저절로 축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약정한 기일동안 일을 다 하고 나니 적지 않은 돈을 받았다. 먹여주고 재워주기도 했는데 이 정도라니 무척 감사했다. 서울로 돌아갈 여비를 하고도 충분히 남았다. 감사를 표하고 농장을 나와 계획대로 천왕봉을 올랐다.
대피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일출 시간에 맞추어 오른 천왕봉은 그렇게까지 큰 감동을 주지 못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은 차이가 제법 있는 듯 싶었다. 하산을 서둘렀지만 지리산 터미널까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난 후였다. 터미널에 가보았지만 이미 창구가 닫혀 있었다. 침낭을 가지고 대합실에서라도 잘까 싶었지만 요 며칠 농장에서 뜨끈한 온돌에서 잘 잤던 터라 그렇게 자고 싶었다. 지갑도 두둑하겠다 싶어 잘 곳을 찾았다.
어서오슈.
터미널 앞에 있는 허름한 여인숙에 가니 검버섯이 성성한 노파가 키를 내주었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은근한 말투를 던진다.
혼자유?
그런데요?
색시라도 하나 넣어줄까?
아예 대놓고 물어보니 오히려 이쪽이 당황스럽다.
아뇨. 괜찮습니다.
에헤이. 빼지 말고. 5만원이면 참한 애로 불러줄 수 있는디.
아뇨. 정말로 괜찮아요. 잠만 자고 바로 올라갈 거예요. 여기서 서울 가는 첫차가 몇시죠?
그걸 내가 어찌 아누.
노파는 툴툴거리며 손바닥만한 화면의 TV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터미널 맞은 편에 있는 여인숙 주인이 버스 시간을 어찌 모르겠냐 싶었지만 아무래도 아가씨 안 부른다고 하니 골이 난 모양이다. 모르긴 몰라도 아가씨 하나를 불러서 5만원을 내면 그 중 얼마는 노파 앞으로 떨어지는 모양이지. 지갑에 그만한 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별로 생각이 없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러나 방으로 향했다. 낡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가 이내 나왔다. 방에는 전화가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랐나. 신발을 꿰어 신고 터미널 앞 다방거리 쪽으로 가니 공중전화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주머니에 든 잔돈의 개수를 가늠해보고 수화기를 들었다. 다행히도 백원짜리가 제법 있었다.
달카닥-
신호가 가고, 상대방이 수화기를 드는 동시에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농장에서 일할 때나 혼자 여행할 때 말할 필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와 본격적인 대화를 하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아, 여보...세요?
아저씨!
이쪽은 겨우 한마디 꺼냈을 뿐인데 수화기 너머에서는 말의 폭풍우가 밀려온다.
대체 어디에요? 아니, 일단, 밥은 먹고 있어요? 잠은 어디서 자고요? 돈은 충분해요? 설마 이상한 생각 갖고 혼자 절벽 같은데 가고 그런 건 아니죠? 아니지. 정말 혼자 여행 간 거 맞아요? 혹시 그 쌍둥이 여자들이랑 같이 있다거나...
아아, 유진아. 나도 말 좀 하자.
그제서야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겨우 내가 말할 시간을 얻었다.
그래, 잘 지냈어?
그야, 뭐. 당연히요.
조금 볼 멘 소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착실히 대답을 하는 걸로 보아 그동안 연락도 없던 것에 대한 화는 그리 크지 않은 모양이다.
다들 잘 계시고?
엄마는 여전하고... 선영이 언니는 뭐... 좀....
선영이가 왜?
....언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지지난주... 그러니까 소란이가 뉴스에 나온 날이요.
아아....그랬어?
많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는데 소란의 이름을 들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게다가 선영의 부친상이라니..... 난 이야기도 듣지 못 했고 옆을 지켜주지도 못 했다. 그 새벽, 그녀의 전화는 아마 이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걸까. 자신의 부친이 위독함을 전해 듣고 가던 길이었던 걸까. 머리 속이 복잡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있으니 유진이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랑 엄마랑 그리고 가게 언니들이랑... 전부 다녀왔구요, 그래서 저도 학교에 좀 빠졌고.... 그래서 소란이 얘기랑 아저씨 얘기를 나중에 들었어요. 아저씨 집에 전화했더니 받지도 않고....
그래. 소란이는 좀 어때?
.....회복실로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저도 아직 면회는 안 돼요.
그렇구나.....
유진이 목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좀 좋아질까 싶었는데 소란이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우울해졌다. 애써 이야기를 돌려본다. 유미가 어찌 지내는지 물어보았다.
선영이 언니는 장례식 끝나고 또 어디론가 가버렸구요. 엄마는 요즘도 장부 붙들고 집에 와서 끙끙거리고 있어요. 아저씨나 선영이 언니가 자기 두고 도망 갔다고 자기도 꼭 도망 가겠다고 벼르고 있어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죄송하다고 전해줘. 내일 서울에 올라갈거야. 올라가면 보자.
피이. 아저씨 보고 싶다는 사람이 서울에 있어요?
하하. 그런가? 알았어. 넌 안 보고 싶다 이거지? 그러면 로즈에만 인사드리러 가야겠다.
아, 진짜. 뭐예요?
툴툴거리는 유진에게 만날 약속을 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숨을 골랐다. 소란이의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 날 괴롭히고 있지만 이겨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떠나온 여행길이 아닌가. 심호흡을 한 다음,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오오! 한석 군!
경쾌한 목소리가 날 반긴다. 하하. 이 녀석은 정말이지... 한결 같네.
──────────────────────────
*
소란이에게는 많이 미안한 루트네요. 근데 다른 루트 가면 소란이가 어떨 거 같으세요? 으음?
*
좋은 밤 되세요.
지금 어디야? 전에 엽서 보낸 게 지리산이었는데 아직 거기야?
응. 오늘 내려와서 지금 터미널이야. 내일 버스 타고 다른 곳으로 갈까 싶어. 아니면 서울로 올라가던가.
하아. 정말 백두대간 종주를 하셨군요. 나 심심하니까 서울로 와라. 그만 돌아다니고.
아니, 뭐... 종주까지는 아니고 중간중간 내려와서 버스도 타고 다른 곳도 가고 그랬어. 걷기만 해서 종주 했으면 이 정도 시간 가지고는 어림도 없거든.
규모가 좀 큰 절에 묵을 때나 산 아래로 내려오는 일이 있으면 효진에게 엽서를 하나씩 써서 보내곤 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나의 출발을 배웅했던 그녀였기에 여행의 보고는 필수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고 싶다고?
그래. 너 없는 동안 지혜 침대에서 내가 얼마나 쓸쓸하게 잠들었는지 알아?
하하. 자기 집 두고 왜 남의 집에 가서 자는데?
몰라. 그러니가 빨리 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동전이 떨어졌다. 휴대전화로 전화를 건 거라서 동전이 좀 빨리 떨어졌다.
어? 공중전화야?
응. 여기 터미널 앞에 있는....
그럼 어디 근처에 카페 같은 거 없어? 내가 전화를 걸도록 할게.
뭔 이야기를 그리 많이 하시려고?
왜, 내가 한석 군 목소리 듣고 싶어 하면 안 돼?
돼.
우리 둘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별거 아닌 이야기지만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 내 목소리를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고마웠다. 전화박스에서 고개를 빼내어 주변을 둘러본다.
카페는 어림없고.. 다방은 있다. 별빛다방.
이름 한번 참.... 그래도 한 번 가봐. 거기서 전화 좀 쓰겠다고 해. 내가 걸테니까.
이런 시골 다방이면 커피만 파는 데가 아닐텐데, 괜찮겠어?
뭐, 우리가 그런 거 신경 쓰는 사이였어? 얼른 가봐.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아주 천둥같다.
알겠다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길을 건너 푸른 색 플라스틱 간판에 불을 밝힌 다방으로 들어간다. 문에 매달린 종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님의 입장을 알린다.
어서오세요~
이제 갓 스무살 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의 어린 아가씨, 아니, 아가씨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어린 녀석이 튀어나왔다. 스무살이 뭐냐. 유진이나 소란이 정도의 나이 밖에 안 되어 보였다. 그러나 나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입고 있는 차림이나 입에 바른 빨간 립스틱의 흔적은 여지없이 나 다방레지요.라고 광고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못내 씁쓸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여기 혹시 전화 좀 쓸 수 있나요?
어머, 여긴 다방이지 전화국이 아닌데요.
능숙하게 받아넘기는 걸로 보아 물장사 한두해 한 솜씨는 아니었다. 한숨을 내쉬곤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전화를 걸게 아니라 받을 거라고 사정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카운터에 있는 마담과 쑥덕거리며 뭔가 이야기하더니 무선 전화기를 들고 왔다.
이건 2번선이라 전화 올 일이 별로 없거든요. 빌려드리긴 하는데....
하는데?
저도 커피 한 잔 사주시면 빌려드릴게요.
내 그럴 줄 알았다. 동전 몇 백원이면 끝났을 통화가 다방 커피 두 잔 값으로 폭증하고 말았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그러라고 대답했고 전화기를 건네 받을 수 있었다. 효진에게 전화를 걸어 여기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다시 걸려왔다.
별빛다방 들어간 거야?
그래, 임마. 너 덕분에 커피 두 잔 값이 나가게 생겼잖아. 물어내.
크크큭. 너 나한테 빚진 거 벌써 잊었어? 억울하면 거기서 커피 값 까줄게.
크악. 이런 샤일록 같은 녀석을 보았나.
샤일록이면... 그 베니스의 상인? 살 떼어 달라던?
그래, 임마. 악덕고리대금업자.
푸하하하. 그럼... 음... 나는 살 대신 뭘 받아갈까. 단백질로 된 뭐, 그런 거?
아, 진짜.
우리 두 사람은 정말 시덥잖은 소리를 주고받으며 히히덕거렸다. 이 녀석과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다.
아, 그런데 왜 한 잔이 아니고 두 잔이야? 누구 있어?
응. 전화 빌리는 조건으로 여기 일하는 아가씨도 한 잔 사주기로 했어.
마침 예의 그 레지가 쟁반에 커피 두 잔을 받쳐들고 내 자리로 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옆자리에 바짝 다가 앉더니 내 앞과 자기 앞에 커피 잔을 세팅한다.
지금 내 옆에 앉았다. 아주 귀여운 아가씨야.
얼... 한석 군은 정말이지 어딜 가나 여자가 꼬인다니까.... 너 이번에 산행하면서도 여자 많이 꼬셨지?
임마, 산에서 본 여자라고는 아줌마들 밖에 없었어.
어, 뭐야. 이젠 연상도 가리지 않는 거야? 폭이 넓은데?
아니라니깐.
레지가 내민 커피 잔을 한 모금 마셔본다. 시골 노인네들이 딱 좋아할 정도로 달달하게 타진 커피는 어쩐지 그리운 맛이 났다. 아마도 내가 커피를 처음 마시게 된 국민학교 때 이렇게 타서 마시지 않았을까 싶다. 효진은 여자 이야기를 더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 올라오면 오빠가 한 번 보재.
태근이 형이?
응. 그때 너한테 잠깐 욱해서 싫은 소리 했었다고... 지금은 널 이해할 수 있겠다고 하더라. 사과도 할 겸 한 잔 사주겠대.
뭐... 형이 나한테 그렇게 심한 소리 한 것도 아닌데 그럴 것 까지야... 그리고 형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런 이야기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럼 다행이고...
응.
이야기가 잠시 끊어졌다. 두 사람 다 묘하게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비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피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여태 궁금하던 걸 물어본다. 늘 엽서를 띄우다가 굳이 전화를 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저기, 송화 씨나 하영 씨한테서 무슨 이야기 없어?
무슨?
그 교회 말이야.
아아. 그거 말이지.....
중간중간 신문이나 주간지를 살펴보고 있었지만 어찌된 요량인지 어떤 기사에서도 말세어쩌구 하는 그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만한 난리를 치고 엄청난 피해자를 낸 사건이면 분명 후속보도가 있어야 할텐데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내 질문을 받은 효진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송화 언니 말로는.... 윗선에서 뭔가 오더가 떨어졌대. 교회 관계자들은 거의 다 풀려났고 약을 한 신도들만 따로 모아서 약품관리법 위반인가 뭔가로 처벌하기로....
뭐라고?!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옆에서 성냥개비로 탑을 쌓고 있던 레지가 흠칫 놀랄 정도였다. 나는 손을 내밀어 괜찮다는 표시를 한 후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게... 씨발.. 지금 말이 돼? 그러면 그 어린 애가 제 발로 교회에 들어가서 자기 손으로 약을 구해다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스스로에게 투약을 했다고? 지금 그런 소리야?
흥분하지마. 지금까지 나온 걸로는 교회에서 그렇게 시켰다는 증거가 없대. 정황이야 충분히 짐작이 가지만... 약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제정신이 아니고 다른 증언을 해줄 사람도 없고....신도들은 죄다 한 목소리로 자발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젠장.....젠장.....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니 이젠 화도 나지 않을 지경이다. 어디다 어떻게 화를 내야할지 모르다 보니 욕하기도 쉽지 않다. 효진의 차분한 목소리는 이어지고 있었다.
잠입수사까지 했던 송화 언니지만 그걸로는 역부족인가봐. 오히려 검사의 위신에 맞지 않게 멋대로 움직였다면서 징계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일단 하영이 언니가 소란이 변호 준비는 착실히 하고 있어. 자의로 그 교회에 간 게 아니라는 증거를 수집하고 있고 또....
울컥한 마음에 목이 메어온다. 간신히 그 기분을 억누르며 분명하게 말했다.
증인이 있어. 바로 나야. 내가 그 아이에게 분명히 그렇게 들었어. 엄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에 갔다고.
그러자 효진의 한숨이 이어졌다.
하아. 바로 그 엄마가 가장 크게 주장하고 있어. 소란이는 제발로 와서 성령에 몸을 의탁했다고....
젠장!!!
나도 모르게 탁자를 내려치고 말았다. 짧은 비명 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레지가 쌓아놓은 성냥개비 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후다. 고개를 숙여 미안하다고 하고는 다시 효진의 이야기를 들었다.
듣기로는 꽤 높은 분들도 그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도 있고 나름 선도 닿아있고 한 모양이야. 수상하기 그지 없는 그 교회가 종로 한복판에 있었다는 것만 봐도 뭔가 이상하잖아. 하영이 언니는 자기가 책임지고 소란이는 빼줄테니까 너보고도 나서지 말라고 당부했어. 이건 이미 우리 손을 떠난 문제야.
어떻게 그러니.... 그리고.... 그 교회 새끼들을 그냥 다 놔주었단 말야? 어떻게... 어떻게....
그러면, 네가 어떻게 할 건데? 무슨 사람들이라도 이끌고 그 교회에 쳐들어가서 불이라도 싸지를 셈이야?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내일 서울에 가면 당장....
한석아.
효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가 젖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넌 많이 애썼어. 그리고 충분히 괴로워했고. 그러니 이젠 짐을 좀 내려놓아도 돼.
효진아....
여태 너한테 말은 안 했지만... 네가 괴로워하고 있는 걸 보면 어쩐지 나도 괴로워. 니가 그만 좀 아파했으면 좋겠어. 내가 더 아프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래, 차라리 내 이기심이라고 해도 좋아. 난 나를 위해서 말하겠어. 니가 아프지 말라고.
효진아... 나는....
그녀의 애잔한 마음이 전화선을 타고 전해진다. 사실 효진에게는 모진 소리를 할 수 없다. 그녀에게는 빚진 게 너무 많기에....
하아. 진짜, 내가 지금 무슨 소리까지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이거 하나만 알아둬.
뭔데.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좀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무리 널 마음에 들어해도 나는 일편단심 지혜 뿐이라는 걸.
...........
...........
할 말을 잃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이름에, 그리고 효진의 말투에 나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푸...풋... 아하하하....아하하하하....
좀 서글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나왔다. 어딘가 한쪽은 허전하고 슬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웃을 수 있었다. 그래. 이렇게 날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나만 혼자 이렇게 처져 있을 순 없다.
뭐야. 남은 지금 심각하고 중요한 이야기 하는데 웃어? 넌 내가 지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직 잘 모르는구나.
아아,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지혜가 유부녀라든가, 여자라든가, 그런 사소한 거는 우리 효진 씨에게 아무 문제가 아니겠지.
당연하지.
이제서야 효진의 원래 목소리가 나온다. 그래. 그렇구나.
그래, 그래. 그럼 약속대로 지혜나 보러 가자. 내일 아침 차로 서울 갈테니까 모레나 글피 정도에 지혜 보러 가도록 하자.
흠. 알았어. 내가 지혜한테 미리 이야기 해놓을게. 버스는 어디, 동서울로 오는거야?
아마도?
난 수화기를 잠시 떼고 옆에 있는 레지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동서울 가는 건 맞는데요. 여기서 바로 가는 건 없구요, 남원 갔다가 거기서 갈아타셔야 돼요. 거기서도 한 여섯시간 걸릴걸요?
첫 차 시간까지 알려주는 친절함에 감사를 표한 후 효진에게 들은 대로 일러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도착시간에 맞추어 자신이 마중을 나오겠노라고 말했다.
뭐하러 그래. 번거롭게... 내가 도착하면 전화할게.
안돼. 나한테 안 오고 다른 사람 만나러 가면 내가 속상할 거야. 내가 제대로 픽업 해와야 겠어.
바람 필까봐 감시하는 거야?
그야, 뭐.. 한석 군이 바람을 피워도 상관은 없지만... 나한테 갚아야 할 단백질을 다른 데 흘리고 다니면 곤란하잖아?
자못 쑥스러워하기까지 하는 효진의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피식 웃으며 답한다.
알았어. 내일 보자.
늦지 않게 출발해. 알았지?
응. 잘자.
한석 군도.
전화를 끊고 레지에게 건네주자 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받아들였다.
애인도 있는 분이 이런데는 뭐하러 와요?
보시다시피 애인이랑 통화하러 왔잖아요.
어느샌가 효진이 내 애인이 되어 있었지만 딱히 부정하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피이-. 옆에서 들어보니 바람 펴도 상관 없다, 막 그러시던데?
그게 다 들렸어요?
제가 귀가 좀 밝거든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고, 인월동 소문은 김미영이가 다 듣는다고도 하죠.
하하. 이름이 미영 씨예요?
아름다울 미에 꽃부리 영. 그냥 꽃도 이쁜데 그 앞에 아름답다고까지 했으니 얼마나 예쁘겠어요?
넉살 좋게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빙긋 웃고 만다. 본인 앞이라 대놓고 말은 못 하겠다만.... 솔직히 아주 그렇게까지 이쁘진 않았다.
그래요. 이쁘시네요.
쳇. 말씀에 성의가 없어요. 성의가.
하하. 들켰네.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단번에 들이켠다. 볼 일도 끝났으니 다방을 나갈까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미영이 따라 일어섰다.
벌써 가시게요?
네. 가서 좀 쉬려구요. 내일 또 하루 종일 버스 타고 가려면 피곤할 것 같아서요.
아이, 참. 손님도 없는데 좀 더 놀다가셔도 돼요. 뭘 그리 급하세요?
옷깃을 잡아당기며 앉기를 권하는 미영. 주변을 둘러보니 다방에 손님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카운터의 마담은 신문을 펴놓고 손톱을 깎고 있었고 보지도 않으면서 틀어놓은 텔레비전 연예프로그램에서는 할리우드 노랑나비 열풍이라며 한 누드모델의 성공 이야기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손님이 별로 없네요?
평일 이 시간에 누가 오겠어요? 주말에 등산객들도 있고 그래서 장사가 되죠. 그 때는 저말고도 애들이 더 나와야 할 정도로 손님이 제법 돼요.
그런가요?
자리에 앉았지만 딱히 할 이야기도, 마실 것도 없었다. 커피 잔 옆에 놓인 싸구려 쿠키의 봉지를 뜯고 있노라니 미영이 조곤조곤하게 속삭인다.
아니면, 저랑 연애도 가능한데요.
연애요?
딱 네 장이면 돼요.
처음에는 뭔 소리인가 싶다가 미영의 은근한 목소리와 말투에서 감을 잡았다. 아까 여인숙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 동네 장사는 참 저렴하기도 하거니와 영업을 아주 대놓고 하는 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그렇다면 여인숙 노파의 몫은 한 장이라는 거군. 간단한 뺄셈이다.
아뇨. 전 생각 없어요.
흥. 내일 애인 만나러 가니까 아끼는 거예요?
뭐.. 그런 걸로 해두죠.
등산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주고 받다가 다방을 나섰다. 한 번 더 은근한 눈빛을 보내는 미영에게 커피 값을 만원짜리로 내고 잔돈은 됐다고 했다. 여인숙으로 돌아와 낡은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소란을 만났다. 선영과 침대에 누워 있는데 벨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소란이가 세탁물을 들고 서 있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내가 알몸이 아니어서 당황하지 않고 세탁물을 건네 받았다. 남은 배달이 많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했더니 씨익 웃으면서 답한다.
- 전 괜찮아요. 선생님. 문제 없어요.
소란은 그대로 몸을 돌려 복도를 따라 뛰어갔다. 발랄하게 뛰어가는 그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방으로 돌아오니 선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방 자체가 사라졌다. 텅 빈 공간에 홀로 앉아 무릎을 끌어 안는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러자 누군가 등 뒤에서 날 포근히 안아준다. 누군지 묻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다음 날, 해가 뜨는 것을 보며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날 안아주는 그녀를 향한 길을 버스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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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도착한 서울은 여전히 회색 빛의 도시였다. 그곳에 속해 있고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었던 이전이라면 느끼지 못했을 테지만, 푸른 실록 속에서 오래 지내왔던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그것을 실감했다. 사람들의 표정은 우리 속에 갇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염소만도 못 했고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은 천왕봉에서 보았던 희미한 일출보다도 답답해보였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이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걸까, 새삼 궁금해졌다.
그러나 회색의 도시 속에서 빛나는 무엇인가가 하나 있어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건 바로 활짝 웃고 있는 효진이었다. 그녀는 터미널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도착하자마자 자기 차에 나를 태우더니 의사도 묻지 않고 곧장 호텔로 직행했다. 방에 들어서며 물어보았다.
뭐가 그리 급해? 천천히 해도 되지 않겠어? 난 더이상 도망가지 않는다고.
그러자 효진이 다소 쑥스러운 듯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몰라. 하지만 지금은 이러고 싶어.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내 옷을 거칠게 벗기고 침대에 눕게 했다. 자신도 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지혜보다 늘 작아서 불만이라던, 물론 지혜보다 가슴이 크면 그게 사람이겠습니까만... 아무튼 그 가슴이 눈부시다. 내 아래쪽에서 자지를 쪽쪽 빨고 있는 그녀에게 팔을 뻗어 가슴을 어루만진다. 별로 만지지도 않았는데 급하게도 직립한 유두가 딱딱해진다. 손가락 사이에 끼고 비벼본다. 효진이 자지를 빨다말고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는 자신이 눕고 나보고 위에 올라오라고 했다. 다리를 M자로 벌리고 한 손으로는 내 자지를 쥐어 입구에 가져다 댄다.
빨...빨리 넣어줘...
재촉하는 효진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그녀가 볼멘 소리로 말했다.
왜... 왜 웃어?
아니. 너랑 뭐... 한 두번 한 건 아닌데... 오늘 같은 반응은 좀 이례적이라서 말야.
전에 없이 날 갈구하는 그녀가 낯설기는 했다. 그러자 효진이 내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니가 날 너무 굶겨서 그래.
전에는 나 안 보고도 며칠씩 잘 지내고 그랬잖아?
그 땐 그때고...
고개를 끄덕이곤 준비물을 찾았다. 대개 침대 맡에 있는 바구니에 들어있곤 하는데 그게 보이지 않는다.
안 넣고 뭐해?
아니. 콘돔이 안 보여서... 혹시 따로 가진 거 있어? 여긴 안 보이네.
그러자 효진이 피식 웃었다.
모텔은 그런 서비스가 잘 되어있는데 호텔은 그런게 좀 부족하더라.
뭐야. 나 말고도 딴 놈이랑 호텔 좀 와본 말투인데?
아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라, 정색을 하고 부정하는 게 더 수상한데?
아이, 참.
그녀는 내 물건을 쥐고 그대로 입구로 끌어당겼다. 좀 의외였다.
안 끼고 하게?
쌀 때 잘 빼 봐.
난 그게 잘 안되던데....
그럼 할 수 없고.
몹시 대범한 발언을 하며 효진은 내 몸을 끌어당겼다.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밀고 들어간다. 아니, 날 재촉하는 효진만큼이나 그녀의 질도 날 반기고 있었다. 빨아들였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하앙. 하아....하앙....하악....하앙......
역시 오랜만이라 그런지, 뒷골까지 쩌릿할 정도의 강렬한 쾌감이 아래서부터 위를 관통한다. 적극적인 효진의 몸짓도 그렇고 숨기지 않는 신음 소리마저 열정적이고 섹시하다. 나 역시 허리의 완급을 조절하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박아넣는다.
퍽- 퍽- 퍽- 퍽- 퍽-
살과 살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소리에 효진의 신음까지 얹어진다.
학...학...하앙.....하앙.... 자기야.....하앙....하악.....정말... 하악...
자기?
응... 그래......자기......하앙.... 하악... 좋아..... 하악......
사실 조금 놀랐다. 늘 '한석 군'이라는 체면 차린 호칭을 써오던 효진이었고 나를 향한 적극적인 애정표현보다는 친구처럼 지내던 그녀에게서 듣는 자기랑 호칭은 묘한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좋아한다니..... 이채로운 감인 동시에 더욱 더 흥분되는 소리였다.
하악! 하악! 하악!!!!!!! 나......나 좀 어떻게 해줘!! 하악!!
효진은 점점 더 절정에 치닫으며 내 등을 끌어안다 못해 할퀴기까지 했다. 나 역시 그에 맞는 움직임과 반응을 보여주었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여체이기에 더욱 유별한 맛이 있었다. 우리 둘은 격렬한 시간을 보냈다. 효진은 뜨겁게 날 탐했고 나 역시 그에 화답해주었다.
효...효진아... 나....크윽....
빼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효진의 다리가 날 끌어안고 놔주지 않았다.
그냥.. 끝까지.... 하악....하앙.....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왔다. 그대로 허리를 밀어넣고 분출의 순간을 만끽한다. 뻣뻣해진 몸을 효진에게 기대어 쉰다. 그녀도 나를 가득 끌어안고 후희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 둘의 해후는 그렇게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잠깐 쉰 후, 따뜻한 물에서 몸을 풀고 싶어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들어가 쉬었다. 뒤따라 들어온 효진과 함께 욕조에서 쉬길 원했지만 휴식으로 인해 회복된 자지를 보고 눈을 빛내는 그녀 때문에 제대로 쉬지 못 하고 욕실에서도 또 한바탕 일을 치뤘다. 하아. 효진이가 은근히, 아니, 아예 대놓고 밝히는 스타일이라는 걸 조금씩 깨닫고 있다.
호텔을 나설 때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장거리 버스 여행의 여독과 곧바로 이어진 격렬한 행위에 지친 나는 한시 바삐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러나 효진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 집에 가자.
너네 집에 가자고? 이 시간에 어떻게.....?
운전석에 앉은 효진은 이미 자기 집쪽으로 방향을 잡은 듯 보였다. 휙휙 지나가는 주변의 풍광이 내가 아는 곳이 아니었다. 이건 거의 납치 아닌가? 효진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어차피 오늘은 부모님 두 분 다 아무도 안 계셔. 오빠만 있어. 어제 이야기 했잖아. 오빠가 너를 보고 싶어 한다고.
정말 그것뿐이야?
그럼.
빙그레 웃는 효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동서울을 벗어나 남쪽으로 조금 가자 강 하나를 끼고 그림처럼 펼쳐진 입지의 마을이 나타났다. 하나하나가 죄다 엽서에나 나올 법 싶은 모양의 고급주택이 주욱 늘어선 동네였다. 집 앞이나 마당에 세워진 차의 면면을 보고 있노라니 효진이 오늘 끌고 나온 은빛 지프는 정말 저렴한 편에 속했다. 그 중 한 이층집 앞에 멈추기에 차에서 내렸다. 내가 입고 있는, 때와 땀으로 쩔은 등산복 차림을 내려다 보며 이거 무작정 들어가도 괜찮나 주저될 정도로 좋은 집이었다. 효진이 나를 스스럼 없이 끌고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포석이 깔린 부분의 길이만 족히 20미터는 넘어보이는 마당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다.
어서오세요. 아가씨.
집으로 들어가자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까 싶은 나이의 여자들이 우르르 나오더니 효진을 맞이했다. 그 중 맨 앞에 선 아가씨가 앞으로 한 발 나서 고개를 숙인다. 단정한 얼굴 생김새에 몹시 붙임성 있는 말투였다.
일찍 오셨네요.
선미 씨. 오빠 들어와 있죠?
운동실에 계십니다.
통이 넓은 검은 색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 레이스가 달린 앞치마를 두른 그녀들의 모습은, 뭐랄까. 옛날 셜록 홈즈 나오는 소설의 삽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하우스 메이드의 복장이었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 위에는 캡까지 얹어져 있었다. 모두 같은 차림으로 일렬로 서 있는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다. 으리으리한 집에 이런 사용인들. 그리고 아가씨라는 호칭까지. 그제서야 효진이가 꽤 잘 사는 집의 영애라는 것을 실감한다. 그 전에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하는 짓을 보며 도무지 실감이 안 났기 때문에 이렇게 직접 겪는 건 몹시 이채로운 경험이었다. 열 명은 족히 되어보이는 그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어 퍽 부담스러웠지만 효진은 전혀 개의치 않고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이쪽이야.
효진을 따라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계단을 다 올라 복도를 조금 걸어가니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은 어지간한 헬스장을 방불케 하는 운동기구로 꽉 차 있었다. 한쪽 벽은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