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생 실습 3주차가 시작되었다. 다음 주부터는 내가 직접 수업을 진행하는 주간이라 교안 작성에 대해 몇 번이고 지애의 검토를 거쳐야 했다. 레포트 용지에 써두었던 내용을 옮겨 양식에 맞추어 문서로 만들었다. 노트북이 있으니 확실히 편리했다. 문서를 넣어두고 틈틈이 확인하며 내용을 검토했다.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는 ROSE의 장부 내용을 확인했다.
퇴근 후에는 도서관 출력실에 들려 문서를 뽑아 ROSE로 갔다. 필요한 만큼의 장부를 정리하고 남은 시간은 유미의 사무실 한편에서 내 공부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가는 사람도 있고 치근덕거리는 유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굳이 공부를 하는 까닭은 마리와의 일도 있고 해서 어쩐지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서 였다. 다시 학교로 가기도 애매하고..... 추근대는 유미만 없다면 정말 완벽한 환경이었을텐데... 그건 좀 아쉬웠다.
하루는 유미가 나한테 ROSE 통장은 물론 도장과 비밀번호까지 맡기는 걸 보고 기겁하긴 했지만 그녀의 설득 플러스 반협박을 이길 자신이 없어 시키는 대로 했다. 또 어떤 날은 ROSE 사무실로 걸려온 선영의 전화를 받기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전화를 받는 걸 보고 선영은 깜짝 놀랐지만 내가 자기 오피스텔에 갔다가 유미랑 마주치는 바람에 일을 맡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살짝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그녀는 내가 ROSE일을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도리어 내게 가게에 필요한 몇가지를 더 지시하며 협력을 구했다. 선영이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내가 묻자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고 나중에 이야기 해주겠노라며 전화를 끊었다.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저녁에 ROSE에 가야되다 보니 태근이 형이나 현아, 은애와는 어울리지 못 했다. 오히려 나 대신 비키가 그쪽 인원에 들러붙어 전보다 더 떠들썩하게 잘 노는 모양이었다. 점심시간에 태근이 형이 나에게 와서 현아 이야기를 하는 걸로 보아 내 조언대로 펀치 브라이스 인형을 선물하고 나서부터 제법 대화도 하고 그러는 모양이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밤낮의 이중생활로 인해 정신없이 바쁘긴 하지만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오늘도 안 왔어요.
으응... 그러네.
하아.. 진짜... 어디 간 거지...
내 옆에 앉은 유진이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애꿎은 바닥만 발로 툭툭 차고 있었다.
연락도 없었다며.
네. 집에 가봐도 아무도 없고....
다른 가족들은?
없어요.
흐음.... 이사라도 간걸까.
옆 집 분에게 여쭤보니 그런 것 같다고도 하시더라구요.
지난 주 토요일에 결석한 이래로 소란이는 계속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유진이가 집에 찾아가 보았지만 집에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녀석이 학교에 무단결석 한지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지애에게 물어보자 그녀는 묘한 소리를 했다. 어머니한테서 연락이 오더니 전학시키겠다고 하더란다. 그러면 학교에 와서 정식으로 절차를 밟으라고 이야기했더니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며 나중에 우편으로 하겠다고 하더란다. 지애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녀도 조만간 있을 학교 행사 준비로 인해 바쁜 터라 일단 넘어갔다. 그 이야기를 유진이에게 전해주었다.
송 선생님은 전학간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하던데.
그것도 이상해요. 이 시기에 갑자기 전학이라뇨. 말도 안 돼요. 전학가면 간다고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아랫입술을 깨무는 유진의 표정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실망감... 걱정.... 그런 게 복잡하게 가득 섞인 얼굴이었다. 유진이는 요즘 들어 점심시간이면 등나무 쉼터에서 혼자 생각을 하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옆에 있어도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어쩌다 소란에 대한 걱정만 이야기했을 뿐 다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같이 나란히 앉는 짝궁일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의미로 단짝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녀석이 온다간다 소리도 없이 사라져서 굉장히 상심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옮기느라 경황이 없겠지. 조만간 연락이 오지 않을까?
그럴까요?
예비종이 울리자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게 꾸벅 인사를 해보이곤 교실로 돌아갔다. 나도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로 가면서 소란이가 말했던 그 이상한 종교단체를 떠올렸다. 설마... 하는 아주 나쁜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엄마의 등쌀을 피해 가족 전부가 잠적해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연락이 없는 것도 아마 그 이유에서 일 것이다. 사태가 정리되면 돌아오겠지 싶었다.
최 선생, 왔어요?
네.
지애 자리로 가자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것 좀 봐요.
뭔가요?
보면 알아요.
그리 길지 않은 글이 적힌 A4 용지였다. 글자 하나하나가 아주 큼직하다. 아래아한글96에서 명조체 20포인트 정도 되려나. 워드로 출력된 글귀는 다음과 같았다.
[ K대학부속고등학교에서 현재 교생 실습중인 모 군은 분수에 맞지 않는 차를 몰고 다니며 선생의 품위를 저해하는 업소에 출입하고 있는 데다가 학생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당장 그를 파면하고 교직에 임용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요. ]
뭔 개새끼 풀 뜯어 먹는 소리지.
.......봐도 모르겠는데요?
지애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투서라더군요. 오늘 아침에 교장실로 들어온.
투서요?
네. 발신 불명의 봉투에 담겨 교장실 문에 끼어 있었답니다. 내용은 보다시피 우리 학교 교생을 음해하는 내용이죠.
교생? 그렇게 불리는 사람은 정말 몇 명 없는데?
.......교생이라고 해보아야 네 명이고 게다가 모 군이라면 남자잖아요. 그럼 이 글에서 말하는 사람은 저랑 태근이 형 밖에 없는데요.
최 선생, 차 있어요?
아뇨. 자전거도 없는데요. 원래 되게 비싼 싸이클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지애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럼, 박 선생이군. 박 선생 차가 좋은 건가 보지?
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편이지만 일단 비싼 차면 좋은 차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해보았다.
한 번도 못 보셨어요? 대형 외제차인데...
외제차? 어머, 박 선생 집이 좀 사나보지?
그런가 봅니다.
지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도 학교 등하교시 중형차 하나를 몰고 다니고 있다.
외제차라면 주차장에서 대번 눈에 띄었을 텐데... 학교에는 한번도 안 가지고 왔나 보죠?
예. 항상 저희 대학교 주차장에 세워두고 걸어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자 지애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럼 최 선생은 어떻게 알고?
가끔 저희 밥 먹으러 갈 때......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투서를 넣은 사람이 단번에 좁혀졌다. 태근이 형은 그의 동생인 효진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진 것, 그러니까 자기 차 같은 걸 자랑하거나 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그냥 운전해서 가는게 이동하기 편하니까 있는 차를 끌고 온 것 뿐이다. 그러니 그가 분수에 맞지 않는 차를 끌고 다니는 걸 아는 사람은 딱 정해져 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형을 음해하는 내용이라니. 누가 썼을지 너무도 뻔했다.
원래는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그가 차를 끌고 나타난 순간부터 태도가 돌변한 인간을 하나 알고 있다. 설마 그에게 그토록 들이대는 게 안 풀리니까 이딴 식으로 나오는 건가. 생각에 빠진 내가 답을 안하고 있으려니 지애가 재촉했다.
뭐가, 아~야. 아는. 더 이야기 해봐. 지금 이 문제 가지고 선생님들 사이에서 제법 말이 많아. 내가 전에도 이야기 했지. 학교 입장에서는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라 말 나오고 이러면 바로 실습 종료라고.
속으로 헉! 이라고 외쳤다. 태근이 형이 천상 사람이 느슨해서 그렇지 교사는 꼭 되고 싶어 했다. 예전에 이야기 하다가 농담하는 투로 집이 잘 살면 그냥 사업이나 하시지 뭔 교사냐고 물어보았는데 그는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자긴 꼭 교사가 될거라고 했었다. 성적이 딸려서 교대에는 못 들어갔지만 여기 와서도 교직 따느라고 꽤 고생했다고 투덜거렸다. 나처럼 앞으로 뭐할지 몰라 일단 자격이나 따놓고 보자고 생각하는 이와는 마음가짐이 많이 달랐다. 그런 그가 실습에서 이런 음해로 짤린다라... 그렇게 되면 너무 불공평하다.
그러셨죠.
이게 해명이 안 되면 모 군에 해당하는 사람은 불이익을 받을 수 밖에 없어요.
태근이 형이요?
그러나 지애는 고개를 저었다. 뭐야, 그러면.
그렇기도 하지만.... 전원 일수도 있지. 요즘이야 군이란 표현을 남자에 한정해서 쓰지만 연세 드신 분들은 그냥 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구요.
그런가요?
제군들, 이라는 표현도 몰라요?
그...그렇군요.
그녀의 말투로 보아 학교에서는 이게 귀찮은 문제로 확대될 경우 아예 교생 전체를 짤라버릴 수도 있다는 것 같았다. 젠장. 그렇게 되면 나 역시 곤란하다. 교직 따겠다는 생각에 학점에 불이익을 받아가면서 여기에 투신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런 식으로 짤렸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게 된다. 지애는 자기 일 아니라고 무심하게 말했다.
보아하니 최 선생은 대충 짐작을 하는 모양인데 빨리 처리해요. 그냥 두면 다음 주 월요일 교무회의 때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몰라.
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나보고 처리를 하라니. 내가 무슨 수가 있어서 처리를 한단 말인가. 의심 가는 사람을 잡아다 추궁이라도 해야 하나. 그러나 오후 내내 용의자는 물론 태근이 형도 만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갔다. 다행이라면 퇴근은 다같이 하게 되었다는 거...
뭘 그렇게 빤히 보냐?
아니, 뭐...
은애가 마음에 들어? 연결시켜 줄까?
아뇨. 전혀요.
수업이 모두 끝나고 다같이 퇴근하는 길이었다. 대학교로 넘어가는 길에 은애를 계속 쳐다보고 있는 나를 눈치 챈 태근이 형이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가능하면 니가 은애 좀 어떻게 해줘라. 나, 쟤 때문에 귀찮아 죽겠어. 현아랑 뭐 좀 해볼라 하면 계속 엉겨 붙어가지고 떨어지질 않아.
그렇다고 제가 뭘 어떻게 하겠어요.
델꾸가서 따로 데이트라도 하던가. 요새는 비키까지 현아랑 노느라 내가 현아랑 단 둘이 있지를 못 해.
비키와는 저도 얽히고 싶지 않으니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공대 주차장에 도착하자 태근이 형의 차에 은애, 현아, 비키 모두 올라탔다. 나는 도서관에 가겠다며 빠졌다. 조수석에는 은애가 앉아있었다. 여러가지 의미를 담아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아유, 조것이 나랑은 눈도 안 마주치네. 운전석에 앉은 태근이 형이 나에게 소리쳤다.
요새 너무 빼는 거 아냐? 동기들이랑 좀 어울리고 그래.
지금 따로 알바하는 게 있어서요. 급한 것만 정리되는 대로 그렇게 할게요. 다들 재미있게 놀아요.
뒷 자리에서 창 너머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현아와 비키에게 눈인사를 보내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도서관으로 가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책을 찾아보고 자료를 정리하느라 시간이 한참 걸렸다. 문득 시계를 보고 ROSE에 가기 전에 출력해야 될 것이 생각났다. 도서관 출력실은 늦게까지 하겠다는 생각에 1층으로 내려갔다. 칸막이로 나뉘어진 컴퓨터 실의 한편에 자리한 출력실은 커다란 프린터와 전용 단말기가 있다. 거기에 자신의 복사카드를 넣고 디스켓에 넣은 다음에 출력하게끔 되어있다. 굉장히 번거로운 방식이라 다들 불만을 이야기하는데도 통 바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미 앞에 누군가 쓰고 있기에 기다리고 있는데 앞에서 삐삑- 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어쩌지? 엄마.....야....
낮은 탄식소리. 뭔 일인가 싶어 고개를 쭈욱 내밀고 바라보니 어째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다가갔다.
현아 아냐? 아까 형이랑 놀러 간 거 아니었어?
하...한석아!
등 뒤에서 내가 나타나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다가가자 갑자기 모니터를 자신의 몸으로 가린다. 그 작은 몸으로 가린다고 모니터가 잘 가려지겠느냐만은... 아마도 워드 작업 중이었던 모양이다.
왜 그렇게 놀래? 뭐, 이상한 거라고 출력하고 있었던 거야?
아...아니, 그건 아니지만.....
순간 드는 생각이 이 녀석도 혹시 나처럼 야설 쓰는 레포트라도 받은 건가 싶었다. 빙글거리며 놀리고 있는데 그녀는 손을 뻗어 컴퓨터 전원을 확 내려버렸다. 에에. 그렇게 파킹도 안 시키고 확 꺼버리면 컴퓨터에 손상이 갈텐데....?
아까 삐삑거리는 소리는 말야....
내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려는데 그녀는 자신의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나를 밀치고 확 나가버렸다. 거참, 이상한 녀석일세. 나를 보고 왜 그렇게 당황하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려보지만 알 도리가 없다. 게다가 나도 출력을 해야 하는데 컴퓨터를 그렇게 꺼버리면 어떻게 하나. 뒷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쯧쯧쯧...
컴퓨터에 전원을 넣고 다시 부팅을 하는 동안 프린터를 살폈다. 아까 난 삐삑- 소리는 종이가 걸렸다는 뜻이다. 복잡한 고장은 아니고 그저 커버를 벗기고, 원래는 한 장씩 들어가야 할 용지보급장치에 걸린 두 장의 종이만 뽑아내면 되는 간단한 처치가 필요하다. 도서관 출력실을 이용하려면 이 정도 센스는 있어야지, 안된다고 그냥 그렇게 확 끄고 가버리다니. 쯧쯧쯧.
게다가 이 녀석, 자기 디스켓이랑 복사카드도 뽑아가지 않았다. 좋아. 네 녀석의 복사카드는 내가 아주 유용하게 써 주지. 문도 잠기지 않고 아무도 없는 집을 발견한 좀도둑의 미소를 띄우며 현아의 복사카드를 써서 내 출력물을 모두 출력했다. 그래보았자 데이타베이스에서 레코드 별로 세 장 정도 뽑았을 뿐이다. 그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내 디스켓과 현아 물건들을 회수했다. 그리고 출력물을 확인한다. 일단 내 것부터 제대로 나왔나 본다. 그런 다음 자연스럽게 현아의 출력물을 보았는데....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거기에는 아까 낮에 지애가 내게 보여주었던 글과 같은 내용이 씌여 있었다.
[ K대학부속고등학교에서 현재 교생 실습중인 모 군은 분수에 맞지 않는 차를 몰고 다니며 선생의 품위를 저해하는 업소에 출입하고 있는 데다가 학생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당장 그를 파면하고 교직에 임용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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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떤 루트에서는 투서가 어떻게 처리 되었나 되새겨 보시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
도서관을 나왔다. ROSE로 가야 되는데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슴이 떨렸다. 배신감? 실망? 분노?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를 감정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작고 귀여운 햄스터가 손을 물었다. 그것도 아주 세게.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질 않는다. 도서관 앞 광장을 왔다갔다 하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ROSE에 전화를 걸었다. 사정이 있어 오늘 나가지 못 하겠다고 했더니 유미가 흔쾌히 알았다고 답했다. 대신 다음에 두 배로 봉사를 해야 한다고 어쩌고 하는데 그냥 전화를 끊고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왔다. 후문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 자취방이 후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듯 현아네 집도 마찬가지였다. 방향이 반대라서 그렇지... 거의 뛰다시피 걸었기에 이십 분도 채 걸리지 않고 녀석의 집, 대문 앞에 도착했다. 시계를 본다. 밤 아홉시.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기에 참 껄끄러운 시각임에 분명하지만 이 일은 빨리 처리할 수록 좋은 일이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벨을 누른다. 찌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띵똥- 하는 벨 소리가 동시에 울린다. 인터폰에서 잠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일단 현아는 아니었다. 엄청 활기찬 목소리였다.
누구시죠?
저, 밤늦게 죄송합니다만... 현아 친구 한석이라고 합니다. 현아 있습니까?
나보다 먼저 갔으니 분명 집에 있을 것이다. 나오면 단단히 따져 물어 볼테다. 그러나 나오라는 현아는 안 나오고 난데없이 환호와 함께 비명 소리 비슷한 게 들려왔다. 인터폰 터지는 줄 알았다. 아이구, 깜짝이야.
한석이!!!!? 꺄아~ 언니! 최한석이래! 엄머낫!!
진짜? 진짜? 얘! 내가 나가볼게!
나도 나가, 언니!
어안이 벙벙하다. 뭐지.... 이 폭발적인 반응은.... 대체? 내가 성을 이야기했던가? 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길래 날 보겠다고 앞다투어 나오겠다는 거지?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마당 너머 현관 쪽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나더니 웬 아가씨 둘이 슬리퍼를 꿰어 신고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뭐...뭐지, 날 잡으러 오는 건가? 그럼 도망가야 하나? 그러나 내가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들이 대문에 도착했고 그대로 문이 활짝 열렸다.
아... 안녕하세요?
일단 인사를 꾸벅 하고 그들을 살폈다. 나보다 서너살,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많아 보이는 여자 둘이 눈을 크게 뜨고 날 보고 있었다. 한 쪽은 푸른 색 츄리닝 차림. 다른 한 쪽은 붉은 색 츄리닝 차림이었다.
우와, 진짜 최한석이네! 반가워! 어머니는 잘 계셔?
그러게. 너 진짜 키만 컸지 어렸을 때랑 똑같구나?
........네에?
난데없이 엄마 안부를 묻는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둘은 내 손을 하나씩 잡더니 안으로 성큼 끌어당기기 까지 했다.
들어와. 어차피 좀 있으면 현아도 올테니까 들어와서 기다리면 되겠다. 그지?
그러게. 현아가 어찌나 니 이야기를 많이 하던지... 호호호. 그 녀석 쑥맥인줄 알았는데 집까지 알려준 거였어? 제법인데?
나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이 그저 서로 웃고 떠드는 통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채로 그대로 끌려들어간다. 거실로 들어가 소파에 날 앉혀두고 양쪽에 앉은 그녀들의 수다는 쉴새 없이 이어졌다.
이게 얼마만이야, 한 십 년 되었나?
내가 중학교 때고 언니가 고등학교 때니까 그 정도 되겠지. 히야. 그때는 정말 쪼끄마했는데 많이 컸네.
아줌마는 여전히 술 좋아하시고?
어련하시겠어? 아줌마 닮았으면 너도 술 좀 하겠다?
아, 그래. 그러면 주스 말고 술 줄까? 우리 집에는 군인 공제회에서 사다 놓은 맥주가 늘 있거든.
좋다, 싫다 혹은 당신들은 대체 누구세요 라는 의사를 표현하기도 전에 내 앞에는 맥주 캔이 놓여졌다. 빨간 츄리닝을 입은 여자가 그걸 따더니 손에 들려준다. 그리고 파란 츄리닝의 여자가 있는 부엌을 향해 소리친다.
언니! 거기 냉동실에 지난 번에 강원도 놀러 갔을 때 사온 반건조 오징어도 있어! 구워줘!
어휴, 기집애! 지가 안 하고!
왁자기껄한 분위기에 휩쓸려 여기까지 끌려오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까와는 다르게 내 상대가 한 명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기.... 현아의 언니 되시는 분이죠?
조심스럽게 묻는데 그녀의 반응은 털털하기 그지 없었다. 그녀는 풋하고 웃더니 내게 반문했다.
뭐? 현아의 언니.....? 푸핫. 너 나 기억 못 해?
네? 기억요?
언니!! 한석이가 나 기억 못 하나 본데?
뭐? 진짜?
한 손에 구이용 철망을 든 여자가 뛰쳐나왔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척 얹고 다소 비난이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뭐야. 한석이, 실망인데? 너 나도 기억 못 해?
..........죄송합니다만 저기....잘 모르겠는데요.
두 여자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했다. 그 실망의 원인이 나인 것 같아 몹시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 우물쭈물했다.
저는 오늘 여기 현아 만나러 온건데... 뭐 좀 물어보려구요.
현아가 말 안 했어? 우리가 너 보고 싶어한단 이야기?
네? 처음.... 지금 듣는데요?
현아, 이 기집애... 들어오기만 해봐라.
청과 홍의 두 여인이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푸른 옷을 입은 여자가 먼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석이 너 기억 안나? 예전에 내당리 살았을 때 부대 뒤 양조장에....
뭔가 익숙한 지명이 흘러나오고 구체적인 장소가 언급되자 내 머리 속 어딘가에서 스위치가 켜졌다. 끊겼던 회로가 완성된다. 전류가 파직하고 흐르고 그동안 꺼져 있던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아주 밝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서히 밝아지는 전구. 그 빛에 비춰진 기억이 양감을 더해간다. 그렇구나. 이 사람들이구나.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앗!
그래, 이제 기억 나는 구나?
세상에나. 세상에나. 난 두 사람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면.... 이 분이 현주 누나... 이 분이 현미 누나? 맞죠?
이제야 기억하는 구나. 근데 왜 현아는 보고도 못 알아봤어?
현아... 현아.... 현아!!! 으악! 그게 그 현아였구나!
그제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전에 한식당에서 나와 걸어가면서 현아는 내게 말했다. 반장까지 했으면서? 내가 언제 그걸 말해준 적이 있었나 긴가민가 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알았다.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녀석은 알고 있었다. 이미 봤었으니까. 새삼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내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노라니 두 여인이 깔깔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에 솔직하게 기억이 안 났던 이유를 이야기했다.
그거야 당연히 현아가 그때는 저보다 크고 지금이랑 성격도 완전히....
내가 기억하는 현아는 결코 햄스터 따위가 아니다. 굳이 동물에 비유하자면.... 대형 세퍼트...? 다소 맥빠진 내 대답을 들은 현미 누나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잡는다.
푸하하하. 하긴 걔가 사람이 달라지긴 했지. 완전히. 아니, 어떻게 보면 정말 그대로인데 말야.
4학년 때인가 5학년 때인가. 암튼... 나는 내당초등학교에서 반장을 했었다. 그 때는 친구들에 비해 키도 작고 조금 마른 편이라 부침이 심했다. 어찌나 약골이었던지 심지어는 여자들에게도 힘으로 밀릴 정도였다. 특히, 여자들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힘이 센 아이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대장, 양현아였다. 원래부터 끼리끼리 모이는 습성이 있는 여자아이들의 그룹 중에서 단연 가장 강력한 그룹이 바로 현아가 이끄는 소위 부대 여자애들 그룹이었다. 어쩌다 여자애들과 남자애들 사이에 분쟁이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그들이 나타나 양쪽 다 힘으로 평정을 하고 그랬다. 어지간한 남자애들은 다 쥐어패고 다니는 걔네들 때문에 얼마나 분란이 끊이지 않았던가.
하아. 내가 어떻게 그걸 잊고 살았지? 그런데 그게 무리도 아닌 것이 내 기억 속의 현아라는 아이는 언제나 내가 올려다 보던, 그러니까 나보다 키가 큰 이미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으니 기억이 안 나는 게 무리도 아니다.
그때 현아는 정말 키도 크고 사내대장부 같은 성격에.... 그랬었는데요?
그래. 걔는 그 때가 다 큰 거야. 원래 여자애들 중에서 빨리 크는 애들이 있어. 그런 애들은 딱 고기까지만 크고 말어. 그리고 너처럼 쪼끄만하다가 늦게 크는 애들도 있는 거고.
현주 누나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자기 언니가 구워온 오징어를 현미 누나가 쟁반에 놓고 찢고 있었다. 다들 앞에 맥주 한 캔 씩을 두고 있었다.
현아 지금 키를 봐봐. 그걸 국민학생 키라고 하면 엄청 큰 키 잖아. 그러니 애들을 다 휘어잡고 다닌 거지. 성격도 아빠 닮아서 괄괄하고.
그래. 언젠가 지프차를 타고 온 현아와 함께 있던 땅달막하면서도 눈빛이 부리부리했던 그녀의 아버지가 어렴풋하게 생각난다. 군복이 무척 삐까뻔적했었다.
하아.... 아저씨는 진급하셨어요? 그때 소령인가 하셨는데...
지금은 예편해서 지방에서 사업하셔. 엄마는 아빠 뒷바라지 한다고 내려가 있고.
그러셨구나....
지금은 그런 곳이 별로 없지만 그때만 해도 동네에는 양조장이 두어개씩 있었다. 밀주를 만들어 파는 곳이다. 우리 집에다 양조장을 직접 차리는 게 싸게 먹힐 거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우리 집의 삼촌들과 엄마에 의해 소비되는 술의 양은 엄청났기 때문에 술심부름을 담당하는 나는 동네 양조장에서 꽤나 환영받는 고객이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니 분명히 불법인데.... 내당리에 있는 부대에서도 양조장 하나를 운영하고 있었다. 부대 뒤쪽에 간부 관사가 줄지어 있고 그 끝에 있는 건물이 양조장이었다. 관사가 있는 곳에는 당시로 쳤을 때 꽤 시설이 좋은 놀이터가 있었기에 아이들이 많이 들어가서 놀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걸 통제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현아였다. 큰 키도 키거니와 현아의 와일드한 성격을 뒷받침 해주는 권력은 거기서 십분 발휘되었다. 현아 말을 안 듣는 녀석은 놀이터는 커녕 부대 근처에 얼씬도 못 했다.
전 삼촌 심부름 때문에 양조장 가야 되는데 현아가 관사 입구에서 으스대면서 막을 때 얼마나 얄미웠는지 아세요?
해묵은 원한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새삼 이가 갈린다. 누나들이 깔깔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넌 꼬박꼬박 왔잖아. 그래서 우리가 널 기억하는데.
그거야 현아한테 숙제도 대신 해주고 준비물도 사다주고 그랬으니까 그랬죠.
푸하하하. 현아 고것이 아무래도 낌새가 그때부터 있었단 말야. 그게 나름대로 너한테 관심을 표시한 거라고. 넌 몰랐니?
좋아하는 여자애 고무줄 끊고 도망가는 꼬마도 아니고, 아이고 유치해라.
관심을 그딴 식으로 표시해요? 무슨 애도 아니고....
국민학생이 애 맞잖아!
어.....그러네요.
누나들은 까르르 웃어넘겼다. 나도 쓰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맥주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가까스로 떠오르는 예전의 기억을 조금씩 더듬어 본다.
긴 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묶고 망아지 꼬리처럼 휘두르며 꼭 망아지처럼 날뛰던 현아. 지금은 그때 얼굴 생김새가 가물가물해서 지금이랑 어떤 차이가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다만 기억 나는 건 대부분의 시골 아이들이 그러하듯 녀석도 상당히 까무잡잡한 편이었기에 지금의 뽀얀 얼굴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대부분의 군인가정이 그러하듯 현아도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 가버리고 말았다. 내당리에서 머문 기간은 아마 3년이 채 안 되었던 것 같다. 그 후로 볼일이 없었던 그녀를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이렇게 다시 만났을 줄이야. 아니, 이미 만났을 줄이야. 하아. 세상 참 좁다.
누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아무래도 현아가 요즘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누나들은 이번에 교생 실습에서 현아가 나를 만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했다. 현아가 남자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는 일은 상당히 드물었고 누나들도 어렸을 때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내심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내가 직접 이렇게 찾아왔으니 환대를 받을 수 밖에...
그런데 현아 성격은 왜 그렇게 바뀐 거예요? 모습도 모습이지만 너무 다른 사람 같아져서 전혀 몰랐다니까요? 그때는 남자애 한둘쯤은 그냥 우습게 휘어잡았는데....
그녀를 내가 못 알아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거다. 만약 날 갈구어 대는 현아였다면 내 기억 속 스위치가 켜져서 그녀를 기억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 성격은 그 당시와 360도 차이... 아니, 360도면 제자리구나. 암튼 180도 달랐다. 내 질문에 현주 누나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현주 누나가 말을 하지 않자 현미 누나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으음... 아무래도 여자와 남자는 성장하면서 힘이랄까, 체격 같은 것에서 차이가 좀 생기니까 말야. 현아도 그걸 겪은 거지.
네?
뭔가 사연이 있는 걸까. 그때 현관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언니, 나 왔....
현아였다. 녀석은 집으로 들어서다가 나를 딱 마주하고는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녀석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팔을 붙들었다.
오오! 한석이 파워풀!!
현미 누나의 말은 귓등으로 흘리며 현아에게 말했다.
나랑 얘기 좀 하자. 도망은 치지 말고.
팔을 빼내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현아는 쉽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누나들의 양해를 구해 일단 현아의 방으로 따라들어갔다. 20대 아가씨가 아니라 소녀의 방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작은 방이었다. 현아가 침대에 걸터앉고 내가 책상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마주 앉아 있으려니 차마 말을 먼저 꺼내기가 민망했다. 여자의 기운이 물씬물씬 풍기는 방에 들어와 있는 것도 좀 어색했고.... 차라리 선영이처럼 육체적 관계에 있는 사람의 방이라면 편하기라도 한데 이건 뭐... 좌불안석이 따로 없다. 말의 서두를 쉽게 꺼내지 못해 괜스레 방만 둘러보다가 문득 무언가 발견했다. 책상 옆에 있는 장식대에 뭔가 익숙한 모양의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저거.... 가지고 있네?
예전에 서점 팬시코너에서 팔고 있던 펀치 브라이스 인형이었다. 한둘도 아니라 계단식으로 생긴 단에 3열 횡대로 주르륵 놓여있다. 삼오 십오. 열 다섯 명이다.
이거 정말 좋아하는 구나?
하나만 해도 가격이 좀 되었던 기억이 나는데 저걸 저렇게나 많이.... 현아를 돌아보았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안 좋아해?
아니, 안 좋아한다기 보단.... 그냥 생긴 게 이뻐서 조금 들여다 보고 있었던 건데 누가 누구한테 대체 어떻게 말했는지 대번에 저만큼 선물로 들어오더라. 받아서 들고 오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에에. 태근이 형?
그래.
뾰로퉁한 현아의 대답에 조금 멋쩍어져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내가 사주하고 태근이 형이 실행한 결과물이로군. 저건. 조금 그렇긴 하지만 덕분에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그래도 가상하지 않아? 너한테 잘하려고 애쓰는데?
......그건 알고 있어. 그치만....
그치만, 뭐.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현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우물쭈물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현아를 다그치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아팠지만, 이건 중대한 문제였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현아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뭐라고?
이렇게 황당한 노릇이 있나. 적반하장.... 아니, 종로에서 뺨맞고 동대문에서 화풀이 아닌가, 이건. 억울했다. 내가 뭘 했다고!
내가 왜?
그야 니가 나도 못 알아보고....
그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바로 문이 벌컥 열렸다. 둘째인 현미 누나였다. 아니, 문을 그렇게 벌컥 열고 들어올 거면 노크를 대체 왜 하는 걸까.
으음. 뭐야. 당연히 둘이 붙어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거 실망인데?
누나. 표정이 중년 아저씨 같아요.
내가 궁시렁 거리자 현미 누나는 낄낄거리며 들고 온 무선전화기를 현아에게 내밀었다. 현아가 자기 언니를 올려다보자 누나가 답했다.
네 친구, 은애라던데? 받아봐.
순간, 현아가 내 눈치를 살폈다. 이거 뭔가 있군. 난 눈에 힘을 주고 꼿꼿한 자세를 취했다. 입모양으로 말한다.
[여기서 받아. 나가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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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과거 떡밥은 별로 정교하게 설계가 되지 못해서 그런지 좀 갑툭튀한 감이 없잖아 있네요....
현미 누나가 나가고 현아가 수화기를 조심스럽게 귀에 갖다 댄다. 눈으로는 내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특유의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여보세요? 응...... 으응......응. 아니, 저기. 내가 시간이 안 되어서 못 뽑았어. 응. 미안.... 어, 어. 알았어. 그래.
통화를 마친 현아가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 짧은 통화에서 나는 무언가 짐작하고 있었다. 머리 속이 핑핑 돌아간다. 엉켜있던 실타래가 아주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
은애가..... 시킨 거야?
한참을 주저하던 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뒷목을 잡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대체.
설명 좀 해봐. 내가 납득할 수 있게.
꽤 주저하긴 했지만 현아는 이내 털어놓았다.
교생 가기 전에 학관에서 모였던 거 기억나?
고개를 끄덕였다. 교생 실습이 정해지고 가게 될 사람끼리 행정관에 가기 전에 학관에서 먼저 만나서 모였다.
난 그 때 니 이름 듣고 알아봤는데 너는 전혀 안 그러더라. 첨에는 나 놀리느라 그런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정말 모르는 거였어.
그 때부터 날 알아보았단 말이야. 하아. 어쩐지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아까 누나들한테도 이야기했지만 진짜 니가 너무 달라져서....
내가 달라진 게 아니라 니가 큰 거야. 나는 그때랑 지금이랑 키가 1센티 밖에 차이 안나는 걸?
현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암튼 못 알아본 건 미안하다. 그런데,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은애랑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내가 니 이야기를 했거든. 옛날에는 작았는데 지금은 크더라. 그 때 보고 십 년 만에 봐서 반가운데... 아무튼 그랬더니 은애가 나랑 너랑 연결시켜 주겠다면서... 그럴려면 자기를 도와달래.
나랑 너랑... 연결?
그러자 현아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더니 손을 흔들었다.
아니, 내가 딱히 너한테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어렸을 때 귀여웠다, 그런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은애가 지레짐작으로 그러는 거 뿐이야. 그리고 그 태근이 오빠가 사람이 나쁜 게 아닌 건 알겠는데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고... 은애 말대로 하면 살짝 골탕을 먹일 수 있을까 싶어서.
살짝? 골탕? 이 애가 정말이지...
휴우. 그렇다고 은애 고것이 시키는 대로 했단 말야? 너 진짜 바보구나?
뭐라구?
바보라는 소리에 현아가 발끈했다. 난 목소리 톤을 조금 낮추고 말했다.
내가 내 사수... 송 선생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은 줄 알아? 이거 문제가 커지면 교생 하고 있는 우리 네 명 전부 다 짤릴 수도 있다더라.
정말?
거기까지는 전혀 생각을 못 했는지 현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안 그러면 내가 왜 니네 집까지 찾아오면서 따지러 왔겠냐. 나도 기왕 하는 교생인데 이런 식으로 문제 생겨서 짤리기는 싫거든.
은애는 그런 말까지는 안하던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현아가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나는 바짝 다가가 말했다.
당연히 걔도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 아무 것도 모르니까 이렇게 무식하게 행동할 수 있는 거야. 걔는 무슨 장기적인 계획이 있어서 태근이 형 짜르라는 투서를 꾸민 줄 알아? 그냥 형이 너한테 붙어있을 계기를 안 주려는 거지.
....그...그런 거야?
그래. 아니, 아니다. 어떻게 보면 요것이 더 넓게 보고 있는거야. 그런 투서를 넣을 거면 지가 직접 넣을 것이지 왜 너를 시켰겠니? 생각을 해봐.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지만 쏙 빠져 나갈려고 직접 안 하는 거라고. 난 방금 니가 걔랑 통화하는 거 딱 듣기만 해도 이 모든 사정이 대번에 파악되는데 왜 넌 그걸 몰라.
너무 심하게 몰아 세운 걸까. 현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손으로 이불을 움켜쥐고 있는 게 좀 안쓰러워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현아의 잘못이 아예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아가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본다. 전화기를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건... 왜?
은애한테 전화해.
뭐?
네가 그걸 또 출력하고 있었다는 건 투서를 또 넣으려고 했다는 거잖아. 그거 못 하겠다고 은애한테 이야기 해. 투서를 넣고 싶으면 직접 하라고.
현아는 전화기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가 안하면 끝나는 거 아냐?
니가 아직 사태를 파악 못 했구나?
목소리에 힘을 담아 강하게 쏘아붙였다. 현아는 어쩔 수 없이 전화기를 건네받더니 번호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현아가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는 것을 보고 그녀의 바로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수화기 바깥쪽에 귀를 가까이 댄다. 아무래도 현아와 얼굴이 바싹 붙는 모양새가 되긴 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신호가 가고, 달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은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게 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예 안 들리는 건 아니었다.
[여보세요]
은애야, 나야. 현아.
[어쩐 일이야?]
현아가 내 얼굴을 쳐다본다. 바짝 얼굴을 대고 있어 조금 기분이 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기를 잡은 현아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 아무래도 이 일에서 빠질래. 태근이 오빠가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니고... 전에도 말했지만 내키지가 않아.
그러자 은애의 앙칼진 목소리가 벼락같이 꽂힌다.
[야! 너 진짜 이러기야? 내 말대로 하면 니랑 한석이랑 쪼인 해준다고 했잖아. 그리고 이제와서 그딴 식으로 한다고 빠질 수 있을 것 같아?]
한석이랑 나는 그런 거 아니라니깐... 그러면....나보고 어쩌라고.
[아, 몰라. 문서 다시 뽑아서 제대로 넣어. 이번에는 교무실 입구에 붙여놓든가 그렇게 해. 안 그러면 전에 투서도 니가 한거라고 소문낼 테니까.]
그거야 니가 시킨 거잖아.
[..............시켜? 하핫. 누가?]
시치미를 뚝 떼는 그 목소리에서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현아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은애, 너....
[증거 있어? 니가 니 손으로 뽑아서 갖다 넣은 거잖아. 내가 무슨 상관인데?]
너 정말 이러기야? 그 때 분명 니가 나한테 말한대로 한 거잖아.
[그러니까 이번까지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러면 깔끔해질 테니까. 그럼 난, 믿고 기다리고 있을게. 끊는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현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용만 당한 자기 자신을 깨닫게 된 듯 싶었다. 잠시 후, 현아는 거칠게 눈가를 비볐다. 비록 눈물이 나오진 않았지만 이미 눈가가 벌겋게 되어 있었다.
한석아... 미안하지만 좀 나가줄래?
현아야....
나, 너무 바보 같아.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바보인가봐.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도 몰랐고 정말 아무 생각 없었나봐. 태근이 오빠한테도 미안하고 너한테도 미안해. 이건... 이건 내가 알아서 밝히도록 할게. 은애가 저렇게 나오더라도 내가 직접 윗분들에게 말씀 드리면 해결 될거야.
은애가 잘못한 건데 왜 니가 책임을 져?
나도 잘못이 없는 건 아니잖아.
현아야....
일단, 일단 나가줘. 나 혼자 있고 싶어.
단호한 목소리로 나가달라 부탁하는 현아였다.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문 밖에서 귀를 쫑긋거리고 있다가 후다닥 소파로 돌아가는 누나들을 모른 체 했다.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왔다. 가슴이 답답하고 미어졌다. 현아의 잘못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어떤 사태를 직접 마주하는 걸 두려워 하고 그 여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지 못한 무지가 죄였다. 그걸 계산해낼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살짝 비켜나와 현아에게 줄을 걸고 조종하고 있었다. 놀아났다는... 표현이 맞을 테다. 그런 현아를 그냥 두고 보기는 내가 너무 무기력하고 한심하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수화기를 들고 심호흡을 했다. 걸어 돌아오는 동안 내내 생각한 결론을 실행에 옮겼다.
여보세요?
어? 한석 군 아냐?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효진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려왔다.
지금 집이야?
그런데?
혹시 태근이 형 있으면 좀 바꿔줘.
오빠? 오빠는 왜?
암튼, 중요한 일이라고 전해줘.
너 오빠 핸드폰 전화번호 몰라?
전에 들었는데 적어두질 않아서...
응. 잠깐만. 아마 2층에서 운동하고 있을 거야. 기다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한참동안 나더니 이내 씩씩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어이, 놀자고 할 때는 빼고 도망가더니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술이 고파?
고프다고 하면... 사줄래요?
사람좋은 형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핫. 니가 웬일이냐. 안 될 것도 없지. 어딘데?
지금은 집이긴 한데... 혹시 학교 앞에 있는 재즈 알아요?
알다마다. 거기 서빙하는 아가씨가 열라 이쁜 걸로 유명하잖아. 왜, 그 아가씨보다도 죽이는 여자 소개해 주려고?
.......죽이는 거는 맞을지도.
뭐? 진짜루?
암튼 한 시간 안에 거기서 봐요. 올 수 있죠?
오브 코오스!
체육 선생의 어색한 발음은 정말이지 정직한 콩글리쉬 발음이었다. 되도 않는 영어를 이렇게 남발하는 게 대체 누구의 영향일까.
.......형, 비키랑 너무 어울리지 마요. 나쁜 물 들겠어요.
아이 갓 잇!
......이미 늦었나....
약 50분 후, 태근이 형과 나는 재즈에서 만났다. 서빙하는 아가씨가 예뻐서 그런건지 아니면 금요일이라 원래 그런지 호프집은 사람들로 붐볐다. 밤 늦게 호출했는데도 불구하고 근사하게 세미 정장 스타일로 빼입고 나온 형과 달리 나는 집에서 입는 츄리닝 차림이었다. 형은 내 차림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얌마, 죽이는 아가씨 온다면서 그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
.....전 아가씨 온다고 한 적 없는데요?
뭐? 이 자식! 날 속였구나!
맞은 편에 앉아서 다행이다. 나란히 앉았으면 아마도 헤드락을 걸며 생난리를 피웠을 지도 모른다. 형을 진정시키며 미리 가져온 종이를 내밀었다.
뭐냐, 이게?
읽어봐요.
호프집의 조명이 그리 밝은 편은 아니지만 큼직하게 적힌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로 그걸 읽는 형을 바라본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현아가 어린 시절 친구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은애가 얄미워서 그런 것도 아니다. 어찌보면 은애가 형을 좋아해서, 아니, 그걸 좋아한다고 표현해도 되려나 어쩌나 모르겠는데.... 암튼 두 사람의 문제이니 두 사람이 해결하는 게 맞지 싶었다. 별로 긴 내용도 아닌데 형은 그걸 한참이나 들여다 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걸 내려놓은 형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왜 니가 갖고 있냐? 설마 투서 넣은 게 너냐?
그럴 리가요.... 근데 이거 이미 알고 있었어요?
안 그래도 내 담당 꼰대가 오늘 이야기 하더라. 나보고 차 가지고 다닌 적 있냐고....
알바생이 맥주가 가득 담긴 500CC 잔을 갖다주었다. 소문대로 무척 예쁘게 생겼다.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게 아주 잘 배치되어 있었고 웨이브 파마를 한 머리결은 풍성했다. 표정이 냉랭한 것만 빼면 정말 탤런트급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알바생에게 눈길도 주지 않을 만큼 태근이 형의 표정은 심각하고 분위기가 진지했다.
후우.... 난 좀 조용히 선생질 하면서 살고 싶은 것 뿐인데 왜 이렇게 태클이 많냐....
태클이요?
난 투서 이야기 듣고 처음에 우리 집에서 넣은 건 줄 알았다. 나 선생 못 되게 하려고.
에에?
이건 또 무슨 소리다냐.
내가 얘기 안 했나? 우리 집에서는 내가 선생하겠다는 거 반대야.
왜요? 선생님이 어때서...?
우리 아버지의 기준은 모든지 돈이지. 첫째도 돈. 둘째도 돈. 셋째도 돈..... 아마 가족이니 뭐니 하는 건 삼만 오천번째 정도 일거다. 내가 선생하겠다고 하니까 바로 나온 소리가 뭔지 아냐? 그게 돈이 되냐는 거지. 안되면 때려치우래.
.....그래서 부자인 건가요?
아니, 순서가 틀렸어. 부자가 되고 나서 그렇게 된 거지. 원래는 그런 분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아주 엿 같단 말이다.
평소 실실 웃고 다니는 얼굴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태근이 형의 모습이 좀 낯설었다. 그러고 보니 효진이도 자기 집에 대해서는 한사코 이야기를 안 했던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형과 효진의 가정사는 조금 복잡한 것 같다. 애써 묻고 싶지는 않아 잠자코 있었다. 형이 말한다.
암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말해봐. 네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고 갖고 있지?
듣기는 저도 송 선생한테 들었구요. 나중에 학교 도서관에서 이걸.... 출력하고 있는 현아를 발견했죠.
뭐?
생긴 것 만으로도 박력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 고함까지 지르니 무섭기 짝이 없다. 외마디 비명에 주변 사람들이 불평을 하려고 돌아보았다가 형의 흉흉한 기세를 보고 다들 말이 쑥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형의 목소리가 떨렸다.
현아가...? 현아가 이걸.....?
들어봐요. 형. 사실은 현아가 이걸 넣으려고 한 게 아니에요.
뭔 소리야, 그건 또.
은애가 시킨 거예요. 현아가 형을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알고....현아는 별 생각 없이 형을 살짝 골탕 먹이겠다는 생각에 이걸 넣었구요.
뭐....라고? 하...하핫. 하하하....
형은 이마를 짚은 채로 한참을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결코 웃겨서 웃는 게 아니다. 처연했고 음산했다. 한동안 그렇게 웃다가 고개도 들지 않고 내게 말을 건넸다.
한석아.
네, 형.
사람이 말야.. 가진 게 많아지면 뭐가 제일 좆 같은지 아니?
글쎄요. 많은 적이 없어서.....
좆같아도 좋으니 돈 좀 많아봤으면 싶은 적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나쁜 짓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다가가는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 다가오는 사람은 일단 싫어진다. 이게 날 좋아해서 다가오는 건지 아니면 내가 가진 것을 좋아해서 다가오는 건지 몹시 헷갈리거든.
그런가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이면을 생각해보니 끔찍하기 짝이 없다.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의심해야 하다니. 그렇게 잔인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은애, 그 년은 그래. 어처구니 없지만 그냥 귀엽게 두고 보고 있었다. 아예 대놓고 내가 가진 게 좋다고 다가오는 걸 숨기지 않고 있으니 그냥 그러려니 했지. 하도 흔해 빠진 년이라 별로 신경을 안 썼어. 근데 이딴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하하하. 내가 좋아하는 애를 이용해서 나를 엿 먹여? 푸하하하하.
형....
형은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내면에는 썩은 고름이 줄줄 흐르는 것 같다. 그걸 감추기 위해 애써 더 웃는 것 같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그는 어느 순간 웃음을 뚝 그쳤다.
아아, 사람이 그냥 웃고만 있으면 말야. 호구처럼 보인다는 게 사실인가봐. 난 예전부터 인상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가지고 되도록이면 항상 웃고 있으려고 노력했거든. 내 동생도 마찬가지고...
효진이가요?
그래. 그런데 이젠 그게 어려울 것 같다. 이 씹어먹을 년이 날 우습게 보도록 두고 볼 수는 없지.
형은 남은 잔을 훌쩍 마셔버렸다. 씹어먹을 년이 누군지는 따로 묻지 않는다. 500CC 잔을 거칠게 내려놓고 형은 나를 보며 말했다.
2차 가자. 내가 아주 재미있는 걸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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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및 캐릭터 무단 도용. 이거 혼나려나.... 조마조마....
형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호프집을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형은 택시를 타고 가면서 핸드폰을 꺼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무언가를 준비하라고 지시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우리 두 사람을 태운 택시는 종로 모처의 카페촌에 도착했다.
여긴... 왜요?
형은 별말 없이 나를 한 카페로 데려갔다. 근데 우리의 목적지는 카페가 아니었다. 화려한 카페 바로 옆에는 간판도 없는 어떤 조그만 문이 달린 검은 색 건물이 있었다. 입구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덩치 한 명이 서 있었고 우리가 다가가자 그는 형을 알아보고 눈인사를 나누었다. 형은 내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서 내 이름 대고 룸 잡고 있어. 난 뭣 좀 준비해 갈테니까.
혼자... 들어가라구요?
미리 이야기는 해두었으니까 매직룸으로 달라고 해.
더 이상 설명도 않고 어깨를 가볍게 밀기에 어쩔 수 없이 먼저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귀신의 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두운 조명이 드리워진 작은 홀이 있었다. 안쪽으로는 좁고 긴 복도가 나 있었고 그 옆에는 접수처 같은 곳이 있었다.
어머, 어떻게 오셨나요...?
카운터에 기대 앉아 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눈가에 주름이 살짝 잡힐 듯 말 듯한 중년의 여인이었다. 검은 색의 롱원피스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워낙 착 들러붙는 옷이라 나이를 잊게 하는 육감적인 몸매를 선보이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내부 인테리어도 그렇고 여인의 옷차림도 그렇고... 내가 츄리닝 차림으로 막 들어올 그런 곳은 결코 아닌 것 같았다.
저기, 태근이 형이... 그러니까 박태근 씨가 방을 하나 잡고 있으라고...
아아, 작은 박 사장님? 전화는 받았어요. 이쪽으로.
여인은 매력적인 미소를 띄우며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아, 매직룸으로 달라고 하던데요?
맞다. 그랬지요? 내 정신 좀 보게. 매직룸이라... 남는 게 있으려나....
그녀는 카운터로 돌아가더니 무언가 확인하고 돌아왔다.
이쪽이에요.
라고 말하곤 나를 다른 쪽 복도로 안내했다. 노래방처럼 개별적인 방이 각각 따로 있는 것 같았지만 육중해 보이는 검은 문만 달려 있을 뿐, 창문 같은 건 전혀 달려있지 않았다. 대체 뭐하는 곳인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복도를 꺾어 들어가다가 한 방에 도착하더니 여인이 먼저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ROSE에서 보았음직한 접대용 룸이었다. 한쪽 벽 전체가 거울로 되어 있고 바닥과 소파가 훨씬 더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게 차이점이랄까.
두 분이신 거죠?
네? 아마도요.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방 사용법은 알고 계시죠?
네? 사용법이요?
방을 사용한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싶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손을 잡고 거울이 있는 쪽 벽 한 부분을 누르게 했다. 그러자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거울 벽 한 부분이 똑 떨어져서 미닫이 문처럼 옆으로 스르륵 열리는 게 아닌가. 입이 떡 벌어졌다.
필요한 게 있으면 여기 인터폰을 사용하시면 되구요, 그럼 일단 기본적인 것부터 준비할게요.
아, 예....
말도 안 되는 현상이 눈 앞에서 펼쳐진 것에 깜짝 놀라있는 터라 여인이 무어라 하는지도 잘 들리지 않았다. 여인이 방을 나가고 난 후에도 자동문을 몇 번이고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해서 해 보았다. 정말 대단한 건 대체 어떤 모터를 쓰는지 모르겠지만 거의 소음도 없고 약간의 유격조차 없이 딱 맞아 떨어져서 닫았을 때 전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을 여는 스위치조차 벽면에 매립되어 있어서 위치를 아는 사람이나 누르지 모르는 사람은 전혀 알 도리가 없게끔 되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설계한 공돌이가 정말 고생깨나 했을 성 싶다. 대체 어떤 모터나 포지셔너를 쓰는 건가 싶어 궁금해 구동부를 보고 싶었지만 마감처리도 완벽해서 일체 드러나지 않는다.
'잠깐, 그런데 저 문을 열어서 대체 뭐하는 거지?'
호기심이 일었다. 자동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안에도 바깥 못지 않게 고급스러운 내부장식이 되어 있었고 작은 테이블과 소파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좁은 편이라 답답할 것 같았다. 그러나 우연히 안쪽 벽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리?'
다시 밖으로 뛰쳐나와 확인해본다. 이쪽 벽에서는 거울로 되어 있는 부분이 저쪽에서는 유리로 되어 있다. 그제서야 이 방의 이름인 매직룸의 의미를 이해했다. 바로 Magic Mirror를 사용하여 둘로 나뉜 방. 그것이 이 방의 정체였다. 안쪽 방에서는 이 방을 마음껏 볼 수 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대체 이런 방은 뭐에 쓰는 걸까 싶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눈이 열리고 두 명의 여자, 아니, 여자애들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활기차게 인사를 하기에 나도 마주 보고 얼떨결에 인사를 하긴 했지만.... 어쩐지 떨떠름했다. 겉옷이랍시고 시폰 재질의 망사로 된 란제리를 입었는데 그건 겉옷의 기능을 전혀 다하지 못하는 그런 옷이었다. 그들의 몸매는 물론 안쪽에 입은 화려한 레이스 달린 브래지어와 팬티를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치렁치렁하게 달린 용도불명의 끈과 머리띠는 예쁘다기 보단 조금 천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떨떠름한 이유는 이런 고마운 복장을 입은 이들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못 생기거나 몸매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얼굴도 귀엽게 생겼고 몸매도 그만하면 훌륭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나이가 너무 어려 보였다. 진한 화장으로 애써 가린다고 가렸지만 잘해야 이제 고등학생쯤 되었을까 싶었다.
저기, 누구시죠?
쟁반이나 음식을 가져오지 않은 걸로 보아 서빙 하는 애들은 결코 아닌 것 같고 이곳의 분위기를 볼 때 접대하는 애들임에 분명했지만... 어려도 너무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