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65)

제 이름은 최한석입니다. 나이는 스물 여섯 살이구요. 연구소에 살고 있어요. 

연구소 이름은 ... 음... 뇌과학...어쩌구 그랬는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외우기에는 너무 길거든요. 윤 박사님한테 맨날 듣는데도 까먹는 걸 보니 저는 아무래도 바보인가 봐요. 리나는 아니라고 하지만 맨날 쓰고 외우는 글씨도 가끔씩 까먹는 걸 보면 바보 맞는가 봐요. 다만 제가 저를 바보라고 생각하는 건 리나한테 비밀이에요. 제가 지난 번에 동화책을 읽다가 모르는 글자가 나와서 저한테 바보, 바보 그랬더니 리나가 저를 꼭 안아주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그래서 리나한테 울보라고 놀렸더니 자기는 원래 이렇게 잘 우는 사람이 아니었대요. 아무래도 거짓말 같은데 그냥 믿어주기로 했어요. 리나는 거짓말도 굉장히 많이 하거든요. 항상 밥 먹고 나면,

자. 약 먹자.

하면서 이상한 알약을 줘요. 제가 이건 너무 써서 못 먹겠다고 하면 리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해요.

이번 약은 박사님이 별로 안 쓰게 만들었대. 한번 먹어봐.

리나 표정이 하도 딱해서 속는 셈치고 먹어줘요. 여전히 써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먹고 나면 리나가 잘 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줘요. 제가 왜 약을 먹어야 하는 건지 물어보았더니 리나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한석이가 원래는 굉장히 똑똑하고... 말도 잘 하고, 그럼 어른이었어. 근데 아주 나쁜 사람이 한석이한테 이상한 약을 먹이는 바람에 지금처럼 아이가 된 거거든. 한석이가 박사님이 만들어주는 약 계속 먹고 치료 잘 받으면, 다시 좋아질 수 있대.

 내가 원래 똑똑하고 나이도 많았다고?

 응.

하긴 뭔가 좀 이상하긴 해요. 저는 스물 여섯살이라고 하는데도 병원에서 보았던 열 살짜리 애보다도 모르는 게 더 많았어요. 

그 나쁜 사람은 어디 갔어요? 절 왜 이렇게 만들었대요?

 그건 몰라... 그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없거든.

 죽었어요?

 뭐... 그렇게 되었어. 본의 아니게...

본의라는 말이 뭐냐고 물어보았더니 자기가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구요. 가끔 리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때가 많아요. 

점심 먹고 나서는 레고랑 블록을 가지고 놀 수 있지만 아침 먹고 나서는 주로 비디오를 봐요. 이상한 그림과 모양이 왔다갔다 하는 재미없는 비디오인데 꼭 봐야 한다고 해서 보는 거예요. 다 보고 나면 박사님이 도화지랑 크레파스를 주면서 아까 본 걸 그려보라고 하는데 그건 굉장히 재미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도화지를 들고 막 뛰어다니면 윤 박사님이 저를 쫓아오면서 도화지를 달라고 소리쳐요. 차라리 그게 더 재미있어서 몇 번이고 그렇게 했답니다. 박사님은 공부도 많이 하고 똑똑한 분이라는데 저보다 훨씬 작아서 놀리기 좋아요. 가끔은 제가 들고 빙글빙글 돌리기도 해요. 제가 딱 들면 박사님은 땅에서 이만큼 떨어질 만큼 키가 작아요.

다만 주의해야 하는 게 박사님을 너무 놀리고 있으면 리나가 와서 저를 막 혼내요. 바쁜 분이라고... 그 분이 하는 연구가 저를 낫게 하는 거라나요? 근데 저는 딱히 아픈 곳도 없는데 낫게 한다니까 뭔가 좀 이상해요.

아, 아니다. 아픈 거라면 가끔 있어요. 밤에 자다가 악몽을 꿀 때가 있어요. 꿈 속에서 저는 이상한 감옥 안에 갇혀 있고 그 안에서 매달려서 어떤 할아버지한테 막 혼나고 있어요. 그러면 자다 깬 제가 엉엉 울게 되고 그럴 때마다 옆에서 같이 자고 있는 리나가 저를 안아주고 달래줘요. 리나의 가슴은 푹신해서 얼굴을 기대고 문지르기 참 좋아요. 기분도 좋구요. 리나의 잠옷을 젖히고 안에 있는 젖꼭지를 야금야금 베어먹으면서 얼굴을 들이밀고 있으면 리나가 이상한 숨을 내쉬면서도 저를 꼭 안아주거든요. 그러면 저는 또 칭얼거려요. 하고 싶은 게 있거든요. 리나는 제가 그럴 때마다 작은 한숨을 짓고 저한테 물어봐요.

그거... 하게?

 응.

리나가 알았다고 하면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바지를 벗어요. 리나 가슴을 만지고 있다보면 꼬추가 팽팽해져서 정말 아프거든요. 근데 리나가 안 아프게 해주는 방법을 알아요. 

음....

일단은 먹어줘요. 제가 침대에 서서 꼬추를 내밀고 있으면 리나가 제 엉덩이랑 허벅지를 붙잡고 입으로 꼬추를 삼켜요. 되게 깊이까지 먹어줄 때도 있고 끄트머리만 혀로 살살살 굴려줄 때도 있어요. 처음에는 잘 못했는데 요즘에는 진짜 잘 먹어줘요. 먹어주는 것 만으로도 하얀 오줌이 나올 것 같다니깐요. 그렇지만 저는 꼭 참아요. 이거보다 더 재미있는 게 있거든요.

이리 와.

리나가 팬티를 벗고 다리를 벌려요. 제가 리나 위에 올라가서 꼬추를 갖다대면 손으로 잡아서 어디인지 알려줘요. 리나의 다리 사이는 정말 신기해요. 저처럼 꼬추는 없고 이상하게 생긴 살점이 뽈록거리고 있는데 그 안에 꼬추를 넣을 수가 있게 되어 있어요. 이걸 할 때마다 리나는 제게 말해요.

이거는... 꼭 나랑만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이랑은 하면 안돼. 알았지?

다른 사람한테 우리가 이걸 하는 것도 비밀이라고 해요. 저는 고개를 끄덕여요. 다른 사람이랑 왜 하지 말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하기로 해요. 만약 리나 말을 안 듣고 다른 사람이랑 했다가는 리나가 슬퍼할지도 몰라요. 리나의 파란 눈은 이쁘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눈물이 고이면 무척 슬퍼요. 화를 낼 때도 무섭구요.

그렇지만 제가 이렇게 꼬추를 리나 안에 넣고 막 움직이고 있으면 이상한 표정이 돼요. 웃으면서도 우는 것 같고 싫어하면서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미안한 사람이 있다고 그래요. 맨날 나랑만 있는데 대체 누구한테 미안할 걸까요. 도무지 모르겠어요. 허리를 열심히 움직이다 보면 리나가 이상한 소리도 내요. 처음에는 아프게 하는 건 줄 알고 놀라서 움직이지 않았더니 리나가 괜찮다면 계속 해달래요. 그래서 다시 움직이곤 그랬어요.

끄응....리나야... 나....

 괜찮아... 싸도 돼...

저는 꼬추에서 오줌만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리나가 만져주거나 먹어줄 때, 그리고 리나 다리 사이에 넣고 흔들때는 다른 이상한 것도 나와요. 직접 본 적이 있는데 오줌이라 하기에는 색깔도 이상하고 냄새도 이상했어요. 리나는 그걸 보고 정액이라고 그랬는데 듣고보니 좀 웃긴 이름이라 한참 웃었어요.

리나를 만난 건 연구소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어요. 그 전까지는 병원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윤 박사님이 연구소가 준비되었다면서 저를 데리고 왔거든요. 요즘도 가끔 놀러오는 송화 아줌마랑 마리, 유진이가 저를 여기로 데리고 왔죠. 병원에서 같이 있던 소란이라고 하는 애는 저보다 더 많이 아파서 다른 병원으로 간다고 했어요. 소란이는 남자만 보면 울어버리는 아이라서 치료가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저랑은 잘 놀았는데... 그 후로는 본 적이 없어요. 다 나으면 연구소에도 놀러온다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어요. 

리나가 처음 온 날, 저는 윤 박사님이랑 블록 쌓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어온 리나 때문에 엄청 놀랐어요. 시커먼 옷에다가 얼굴에도 까만 안경을 쓰고 있었거든요. 제가 그걸 보고 무서워서 막 울어버리니까 리나는 안경을 벗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눈알이 다 까만데 리나는 파란 색이라서 신기했어요. 그렇지만 리나 옷이 검은 색이라서 무서웠어요. 이상하게 저는 검은 색을 보면 기분이 우울해지고 그러거든요. 윤 박사님이 리나한테 뭐라고 했나봐요. 리나는 다른 방으로 가더니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왔어요. 병원에 있을 때 간호사 누나들이 입고 있던 옷이랑 같은 옷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리나한테 물어봤죠.

누나는 간호사예요?

 누....나?

리나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어요. 윤 박사님이 리나한테 그랬어요.

측정 결과... 지금 실질적인 정신연령은 세 살에서 일곱 살 사이거든요. 가끔씩 어른스러운 말투나 행동을 하긴 하지만 특별히 본인이 인지하거나 반복하진 못 해요. 이름을 기억시키는 것만 해도 꽤 걸렸어요.

 이름을... 기억 못 해?

 단순한 기억상실이 아니더라구요. MRI를 찍어보았더니... 해마와 측두엽 내부에 손상이 발견되었어요. 롱텀메모리, 그러니까 장기기억력 자체가 손상을 입었고 의식 수준 자체의 활동이 크게 저하되고 있어요. 약물치료를 시행하면 어느 정도 뇌세포 회복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쉽지 않죠.

 회복되긴, 하는 거지?

박사님은 대답을 안 했어요. 두 사람이 하도 어려운 이야기만 주고 받고 있어서 심심하던 저는리나한테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표정이 이상해졌어요. 

예린.... 아... 아니, 이제 그 이름은 쓸 필요가 없지. 리나라고 불러. 그게 내 이름이야. 리나.

그 날부터 리나는 쭉 저랑 같이 놀아주고 밥도 먹여주고 그랬어요. 잠을 잘 때, 처음에는 저랑 따로 잤는데 밤에 제가 악몽 때문에 울고 있는 걸 보고 나서부터는 저랑 같이 있어줬어요. 리나 가슴이 되게 예뻐서 내가 만지려고 막 했더니 처음에는 엄청 놀라서 도망가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안 그랬어요. 꼬추도 그때부터 만져줬구요. 다리 사이에 넣게 해주는 건 한참 나중이었어요. 아침에 저랑 리나랑 나란히 누워있는 걸 본 윤 박사님은 얼굴이 빨개져서 도망가고 그랬어요.

저기.... 지금도 가끔 성충동이 일거나 그래? 수시로?

병원에 가는 날, 검사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윤 박사님이 저한테 물어봤어요. 제가 성충동이 뭐냐고 되물었더니 얼굴이 혼자 빨개져서는 아무 말도 못 하시더라구요.

병원 가는 것 말고 가끔은 리나랑 외출을 해요. 리나는 운전을 잘 해요. 커다란 검은 차를 몰고 가는데 어떤 커다란 학교나 빌라 같은 데를 한 번씩 가요. 거기서 차를 세워놓고 저한테 물어봐요. 뭐 기억나는 거 없냐고. 그치만 저는 처음 보는 곳이라서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으면 리나가 또 슬픈 표정을 지어요. 예전에 어떤 할머니가 오셔서 저를 붙잡고 막 울고 그러셨는데 그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어요. 외출을 하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신기한 것도 많이 보러가고 그래서 좋기는 한데 자주 가지는 못 해요. 왜냐하면 제가 무서워 하는 게 사방에 널려있거든요.

리나야! 저기... 저기!!!

 보지마. 이리와.

길을 가다가 제가 무서워 하는 게 나오면 전 리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어요. 길에는 그 무서운 게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빨간 색 작대기가 두 개 겹쳐져 있는 모양인데 전 그걸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요. 그게 너무 많아서 제대로 돌아다니질 못해요.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은 연구소에서만 보내게 된답니다.

오늘, 손님이 와.

 손님?

아침을 먹고 있는데 리나가 손님이 온다고 했어요. 손님이 뭐냐고 물었더니 절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온다는 거래요. 송화나, 유진, 마리냐고 했더니 아니래요. 다른 사람이라고 하더라구요. 식사를 마치고 나서 제가 흘린 음식을 닦아주고 옷을 갈아입게 해주었어요. 거실에 앉아서 레고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자니 마리랑 똑같이 생긴 아줌마가 들어왔어요. 어떻게 마리가 아닌 줄 알았냐면... 어... 어떻게 알았지?

....오빠...

그 아줌마는 절 그렇게 불렀어요. 제가 리나 뒤에 숨으니까 슬픈 표정을 지었어요. 절 보는 사람들은 다들 저런 표정을 한 번씩 짓더라구요. 저는 저런 표정이 싫어요. 그런데 그 아줌마가 데려온 애들은 표정이 밝았어요. 그 애들은 절 웃으면서 쳐다봐서 기분이 좋았어요. 그 중에 한 명이 절 가리키며 말하더라구요.

엄마, 이 아저씨는 누구야?

신기했어요. 요만한 꼬마들인데 굉장히 똘망똘망하게 생겼더라구요. 게다가 두 명이 얼굴이 똑같이 생겼어요. 이게 쌍둥이라는 건가봐요. 그러고 보니 아줌마도 마리랑 똑같이 생긴 얼굴이니 쌍둥이인가?

으음... 엄마가 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분이야.

저 아줌마도 리나처럼 거짓말을 하는 건가봐요. 전 저 아줌마를 처음 보는데... 저 아줌마는 절 잘 안다고 하는 군요. 

같이 놀아도 돼?

두 아이 중에 하나가 제가 들고 있는 레고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제 엄마가 허락을 하지도 않았는데 쪼르르 달려와 제가 앉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어요. 그러면서 제가 좋아하는 블럭을 가져다가 척척 쌓더라구요. 

그...그렇게 쌓는 거 아냐. 여기 이거 보고 이거대로 따라 하면서 쌓는 거란 말야.

설명서를 보여주었는데도 막무가내에요. 리나한테 좀 말려달라고 부탁하려는데 리나는 새로 온 아줌마랑 마주 서서 이야기 중이었어요.

이제 조직은 거의 다 정리되었어요. 각 사업별 법인 설립도 순조롭고... 조만간 저도 안심하고 은퇴할 수 있겠지요.

 은퇴한다고? 백당에 끝까지 있겠다고 하지 않았어?

 아예 떠나는 건 아니에요. 그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서 그냥 대주주로만 참여하는 거죠. 지난 3년 동안 너무 지쳐서... 한 십 년은 늙어버린 기분이거든요. 백당 일도 일이지만 민지나 민서가 좀 힘들게 해야 말이죠. 이제 좀 애보기에서 쉬고 싶어서요.

 한석을 보는 것도... 비슷할텐데?

 그런가요. 그래도 쟤들보다는 좀 수월하겠죠.

 .......지금 보니 그럴 법도 하다.

아줌마랑 리나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두 쌍둥이가 제 레고 소방서를 다 망쳐버렸어요. 제가 화를 냈더니 두 명이 번갈아 가면서 혀를 내밀고 자기네들 맘대로 블럭을 쌓더군요. 리나한테 가서 쟤네들을 좀 혼내달라고 했더니 리나가 한숨을 내쉬었어요.

한석아. 니가... 혼내도 되는 애들이야.

 혼내도 된다니?

 그런 게 있어.

리나가 제 등을 떠미는 바람에 다시 테이블로 돌아갔어요. 쌍둥이들은 이미 레고에 흥미를 잃었는지 제 스케치북을 가지고 놀고 있더라구요. 크레파스가 필요할 것 같아서 가져다 줬어요. 그래서 같이 그림을 그리고 놀았죠.

어쩌시겠어요? 저 앞으로 서울에 올라올 생각인데 그때 같이 지내지 않겠어요?

 네가 한석이를 나한테 계속 맡긴다면야.

 하아. 그때 부탁을 한 건 저였으니.... 뭐라 못 하겠네요.

 후회해?

 아뇨. 지금 생각해봐도.... 잘 했다고 생각해요. 마리에게 맡길까 싶기도 했지만... 그 아이에게는 제 슬픔이 너무 전달이 잘 되기 때문에 오빠를 제대로 위로하지 못 했을 거예요. 닥터 윤이 말한 방법도 무리였구요.

 그래서 날 선택했다?

 후후. 왜요? 싫었어요?

 그럴 리가.

아줌마와 리나는 한참이나 서서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모르는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와 나중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어요. 그것보다도 앞에 있는 쌍둥이들이 제 스케치북을 찢지 못하게 하느라 그게 더 힘들었거든요. 그렇게 저랑 한참을 놀던 아이들이 돌아갈 시간이 되었어요. 저는 무척 아쉬웠지만 다음에 또 놀러온다고 하기에 손을 흔들어 주었죠. 아줌마는 저를 한 번 안아주고 돌아섰습니다. 아줌마는 가기 전에 자기 이름을 기억해 달라고 했어요. 뭐냐고 물어봤더니 리사라고 했어요. 리나를 쳐다봤죠. 이름이 비슷했으니까요.

리....사?

 그래요. 오빠. 다음에 또 볼테니 그때도 꼭 기억해주길 바라요.

민지랑 민서도 한 번씩 안아주었어요. 무릎을 굽혀 애들을 한 번씩 안아주는데... 기분이 뭔가 이상했어요. 분명 오늘 처음 보는 애들인데도 이상하게 낯이 익었어요. 

또 보자. 안녕~

 안녕, 바보 아저씨~!

민지는 입이 좀 험했는데 그래도 민서보다는 덜 까불어서 다행이에요. 리사 아줌마는 리나에게 말했어요. 

간호사복도... 잘 어울리는 군요. 언니.

 놀리는 거야?

 그럴 리가요. 어쩌면 언니는 처음부터 이런 일을 하는게 가장 어울릴 사람이었을지도 몰라요. 원래부터 말수가 적은 것도 아니었잖아요. 난 항상... 언니에게 고마워하면서도 늘 미안해 했거든요. 이런 길로 걷게 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가. 언니에게 어울리는 일인 것인가. 그렇지만 그때 아버지와 오빠 이야기를 그렇게 차례로 듣고 나서도 저는 그 일이 조직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먼저 생각했어요. 순수하게 슬퍼한 언니와는 달랐다구요.

 그건 네가 마리 때문에... 감정을 너무 컨트롤하려고 해서만 그럴 지도 몰라.

 그럴까요? 후후후. 얼른 가봐야 겠어요. 채 변호사하고 저녁 약속을 잡아두었거든요.

 요새도 만나?

 호호. 지금 있는 새암보다 더 줄 수 있다고 했더니 저희 법인에 고문으로 오는 것도 고려해보고 있다던대요. 비록 끈 떨어진 검사출신이긴 하지만 오히려 이쪽 생리를 더 아니까 잘 어울릴 지도 몰라요.

 잘 해 봐. 또 보자.

그렇게 세 손님은 떠났고 얼마 뒤에 잘 시간이 되자 나는 리나와 침대로 돌아갔어요. 제가 리나의 품으로 파고 들자 리나는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어요.

오늘... 본 손님들, 어땠어? 괜찮았어?

 응. 애들도 재미있었고 리사 아줌마도 좋은 사람 같아.

 그래? ...그러면 나중에 한석이 다 나으면 연구소 나가서 그 사람들이랑 같이 살래?

 리나도?

 응. 아마도 그럴 거야.

같이 산다니. 같이 산다는 건 뭘까요. 이렇게 리나와 있듯이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놀아주는 걸까요. 리나에게 물어보았더니 제 생각이 맞대요. 그래서 저는 대답했죠.

좋아.

리나가 두 팔로 제 머리를 꽉 끌어안았어요. 숨이 좀 막혔지만 괜찮아요. 리나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게 되는 거니까요. 보이지는 않지만, 리나의 숨결이 제 머리카락에 와 닿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래. 우리... 끝까지 힘내보자.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같이 힘내겠다고 했어요. 제가 어느 곳에 가더라도 늘 함께 있어주고.. 설령 어딘가에 잡혀 가더라도 꼭 구해줄 리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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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예린]의 [노말 엔딩]을 달성하였습니다.

여태까지의 스토리 요약 

(데이트 첫 날, 다시 데이트 첫 날, Route B와 Route D, Route E, Route H를 거쳐서 현재까지)

대학생 최한석은 우연한 기회에 이명희와의 소개팅에 나갔다가 명희는 못 만나고 김지혜를 만나서 관계를 맺는다. 지혜는 한석의 맞은 편 집으로 이사를 오고 한석은 지혜의 친구 효진과도 관계를 맺는다. 한석은 지혜에게 고백하지만 지혜는 곧 결혼하게 된다며 그를 퇴짜놓는다. 그리고 바로 얼마 후에 지혜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다. 명희와도 좋은 관계가 되려나 싶었는데 몇 번 엇갈리고 나서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한편 한석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외를 하는데 과외를 받는 여학생의 이름은 진유진. 엄마의 이름은 진유미. 그리고 유진을 끔찍히 아끼는 언니 한선영이 있다. 유미와 선영은 ROSE라는 룸살롱에서 일한다. 지혜에게 차이고 그 분풀이를 ROSE에서 하다가 선영에게 덜미가 잡혀 손해금액 변제 대신 선영을 과외하기로 한다.

또한 한석은 올해 신입생 중에서 특이한 녀석을 알게 되는데 그녀의 이름은 김마리. 그녀와 쌍둥이 언니인 김리사와 리사의 수행원인 성예린은 한석의 맞은 편 집으로 이사를 온다. 여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리사의 말에 한석은 지혜에게 연락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러나 한석은 지혜를 연락처를 알지 못해 연락을 하지 못한다.

개강을 하고 나서 마리와 항상 붙어다니던 한석은 유진이가 부속고등학교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예전에 선영의 집에 있던 모습을 들킨 여자아이가 유진이 친구 양소란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또한, 우연한 기회에 리사와 놀이공원에서 데이트를 갖는다. 한석의 생일을 앞두고 어머니가 상경을 하게 되어 리사에게 도움을 많이 받는다. 옛 팝송을 듣고 눈물을 보인 어머니에게서 예전에 집나간 이모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한석의 생일파티에서 술을 마시게 된 유진을 집에까지 데려다줬는데 다음날 연락을 해보니 유진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았다. 그래서 한석은 당장 수업도 제쳐놓고 유진에게 간다. 거기서 유진의 반나신을 보게 되고 그녀를 간호한다. 후에 선영이 찾아와 한석에게 제의를 한다. 자신의 몸을 제공하는 대신 유진을 건드리지 않기로 합의한다. 그리하여 선영과 관계를 갖는다. 나중에 선영의 검은 옷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육체적으로 그녀와 좀 더 친밀해진다.

한편, 한석은 자신에게 잘해주는 앞집 리사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데 그녀 역시 한석에게 호감을 표한다. 교생실습을 앞두고 그녀와 데이트를 하던 한석은 리사가 원하는 대로 하루 동안 애인이 되어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다음 날, 리사는 자신의 일 때문에 부산으로 내려가고 그동안 감춰두었던 지혜의 청첩장을 전해준다. 한석은 마리와 함께 효진을 만나 결혼식이 있는 춘천으로 향한다. 지혜와의 어색하고 짧은 만남이 지나고 한석은 결혼식장에서 의외의 사람을 발견한다. 그러나 빨리 올라가야 한다는 효진의 요구에 한석은 서울로 향한다.

서울로 돌아온 한석은 우연히 마리의 자위 장면을 목격하지만 얼굴을 마주하고는 뻘쭘함에 도망가고 만다. 곧 한석의 교생실습이 시작된다. 교생생활 동안 한석을 담당할 사수 이름은 송지애. 그외에 쾌활한 박태근, 이기적인 박은애, 조용한 양현아와 실습 동기가 된다. 첫 회식에서 동기들이 술에 취해 뻗어있는 걸 건사하던 한석은 선영의 도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곧 가게된 ROSE에서 선영의 서비스도 받는다. 우연한 기회에 태근이가 효진의 오빠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말에 만나기로 한 유진에게 주려던 인형을 고르던 한석은 현아에게 도움을 받는다. 마리와 다시 마주치지만 어쩐 일인지 마리는 화를 내며 나가버리고 그녀를 기다리던 한석은 새벽에 선영의 전화를 받는다. 갑작스럽게 어딘가 같이 가달라는 선영에게 한석은 좀 어렵다는 대답을 한다. 선영은 잘 지내라는 말로 전화를 끊고 한석은 그녀를 걱정한다.

새벽에 돌아온 마리를 만나 마리와 리사, 두 자매가 가지고 있는 비밀에 대해 듣는다. 두 사람은 어떤 알지 못하는 현상에 의해 서로의 감각과 감정을 일정 부분 공유하고 있다는 것.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지난 리사와의 관계가 마리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고 한석과 마리는 거의 할 뻔 한다. 그러나 예정보다 일찍 나타난 유진이 때문에 영화 보러 나가게 된다. 유진이와 다니면서 이상한 교회에 들어가는 소란과 철판 볶음밥집에서 일하는 택용을 본다. 같은 실습을 하는 현아와 친해지는 와중에 빅토리아(비키)라는 외국인 교사와도 얽히게 되는데 한국말에 능숙한 비키에게 여러번 골탕을 먹는다. 나중에 그녀가 가진 실연의 아픔을 알게되고 위로해준다. 난데없이 나타난 효진과 주말에 지혜를 만나러 갈 약속을 한다. 서울로 올라온 리사의 의외의 면을 보고 좀 어려워하자 리사는 마리를 부탁한다며 부산으로 도로 내려간다. 소란이네 어머니가 이상한 종교에 빠져있다는 상황을 듣는다. 마리와는 오해를 풀고 한 걸음 더 다가서지만 마리가 마음에 걸려하는 문제 때문에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진 못한다. 학교에서 유진이에게서 선영의 부재를 전해듣고 그녀가 걱정되어 일요일에 찾아가기로 마음 먹는다.

그러면 이제, 더블 데이트 Route L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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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순전히 내 감인데, 그 날 새벽, 전화를 끊기 전 그녀의 목소리가 전해온 쓸쓸함이 잊혀지지 않은 까닭이다. 괜한 오지랖일지 모르겠지만 한 번 찾아가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토요일은 비록 강권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이미 효진이와 약속을 해 둔 터라 시간이 안 될 것 같고 오늘 저녁 아니면 일요일 밖에 시간이 없었다. 머리 속에서 일정표를 그려보던 나는 일단 효진이와 지혜를 만나고 온 후 일요일에 선영을 보러 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교무실로 돌아가자 지애가 서류철 꾸러미를 끌어안고 끙끙거리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냐고 하자 오늘까지 처리해야 할 행정업무가 제법 밀려있단다. 별 수 없이 나도 그녀 옆에 앉아 자료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학교 선생들은 애들 가르치는 것 뿐만 아니라 별의별 서류를 만드느라 꽤 많은 정력을 소비하게끔 되어있었다. 시간이 되어 종례를 하러 갔다가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을 매달려야 했다. 겨우 끝마치고 학교 건물을 빠져나갈 때는 이미 상당히 어두워진 후였다.

수고했어요. 어때요.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래요?

 사주시는 건가요?

 후후. 그렇게 부려먹고도 더치페이 하자 그러면 누나 면목이 안 살지.

 하하, 잘 먹겠습니다.

지애의 차에 올라타고 이동했다. 어딘가 싶어 창밖을 내다보니 ROSE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 유흥가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려오니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물든 거리가 눈앞에 펼쳐진다.

특별히 가리는 음식 같은 거 있어?

반말을 하는 걸 봐서 이젠 학교에서처럼 딱딱하게 굴지 않을 모양이다.

아뇨. 전혀요. 다 잘 먹는데요, 음. 아, 매운 건 못 먹습니다만.

 흐음. 여기 이 동네가 좀 복잡하긴 한데 좋은 가게가 많이 있거든. 따라와봐.

 예.

혹시 아는 얼굴을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조금 불안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지애를 따라갔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노천에 테이블을 꺼내어 영업을 하는 카페테리아였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다가온 점원에게 클럽 샌드위치 2인분과 맥주 두 병을 주문했다. 의외의 조합에 놀란 내가 물어보았다.

샌드위치랑 맥주요?

 별로 안 어울릴 것 같지만 먹어보면 또 의외로 좋거든. 한 번 시도해봐.

 네.

사주는 분이 그렇다는데 어디 감히 토를 달겠는가. 지애와 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기다렸다. 병맥주가 먼저 나오더니 잠시 후, 커다란 그릇에 담긴 샌드위치가 나왔다.

안쪽에 고정하느라 이쑤시개 꽂혀 있거든. 먹을 때 조심해서 먹어.

 네, 누나.

학교에서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 지애의 자상함에 기쁜 마음으로 대답하고 한 조각 집어 들어 보았다. 샌드위치 하나는 식빵을 네 등분한 빵 사이에 이것저것 끼어있어 제법 두툼했다. 전체적인 크기는 좀 작았는데 다양한 야채와 고기, 토마토 같은 걸로 꽉 차있었다. 한 개를 입에 가져가 조심스럽게 먹고 있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일단 한 입 베어먹은 다음 지애에게 묻는다.

송 선생님은... 아니, 누나는 왜 안 먹고 계세요?

 응? 으응.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니긴 뭐가 아녀. 방금 전까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봐 놓고는.... 그러나 일단은 배를 채우는 게 급선무였기에 삽시간에 다섯 조각을 먹어치웠다. 다 먹고 나서 바닥을 보니 전체 조각 수가 열 개가 안 되는데 너무 무식하게 많이 먹은 게 아닐까 싶었다. 보아하니 지애는 이제 두 조각도 채 다 안 먹은 터였다. 그녀는 주로는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티슈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

제가 너무 무식하게 많이 먹었네요. 배가 고프다 보니....

 괜찮아. 배 많이 고픈 줄 알았다면 좀 더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데로 갈 걸 그랬나? 저 앞에 매운 아구찜 잘하는 데 있는데.

손을 내저었다. 매운 아구찜이라니. 그런 흉악한 음식을 사람에게 먹이려 하다니.

아뇨. 전 이런 게 더 좋습니다. 매운 건 못 먹어서요.

 그래? 아, 아까 매운 거 못 먹는다 그랬지? 음... 그런 건 좀 다르네....

중얼거리는 지애의 말에서 묘한 기색을 느꼈다. 예전에 그녀는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 걸 보고 똑같다며 웃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라고 말하고 있고.... 대체 누구와 날 비교하고 있는 걸까.

저, 누나. 혹시 말이에요.

 응?

 뭐, 좀 물어봐도 되나요?

 쓰리 사이즈와 몸무게 빼고는 다.

정말이지 학교에서의 지애와 바깥에서의 지애는 전혀 다른 사람 같다. 학교에서는 엄하고 딱딱하기 그지 없는 철저한 학생주임 스타일의 교사였지만 밖에서는 그저 잘 웃고 이야기 잘 하는 젊은 아가씨일 따름이었다. 물론 나이야 나보다 많기는 하지만.... 웃는 그녀를 보며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그럼 일단 키를.....

 풋. 정말 물어보네? 여자한테 키 물어보는 것도 실례야. 작은 거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사람도 꽤 된다고.

 아, 사이즈랑 몸무게는 안 된다고 하셔서....

지애는 키득거리며 맥주를 한 모금 넘기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석 보다야 작을 테지. 한 이십 센티 정도 차이 나려나? 한석은 키가 어떻게 되는데?

 180 조금 넘습니다. 마지막으로 쟀을 때 181인가 182인가 했어요.

 휴우. 그러면 이십 센티도 더 차이 나겠다. 대충 그 정도야.

 예에.

난 고개를 주억거리며 샌드위치 한 조각을 더 집어 먹었다. 이거 은근히 맛있다.

혹시 전에 사귀던 분도 키가 컸나 보죠?

 음?

지애의 얼굴이 딱 굳어졌다. 학교에서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딱딱해진 목소리로 반문한다.

그걸... 어떻게 알아?

맞구나. 헐. 찍었는데....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뇨, 전에 이야기할 때 다른 누군가랑 저랑 비슷하다고 하시고 오늘은 또 다르다고도 하셔서... 혹시 저랑 비슷한 분이랑 사귀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어서요. 그냥 한 번 어림짐작 해 본 거예요.

 그랬나, 내가?

 네.

지애는 시선을 길 쪽으로 돌렸다. 지나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이 거리에서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내가 남은 샌드위치를 거의 다 먹고 맥주를 비웠을 때 쯤,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한석은...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어?

 있죠.

그러나 그게 한 사람이 아니란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날 좋아해주는 여자들. 난 그들이 다 좋은 걸..... 물론 정도의 차이라든가 대하기 어려운 태도의 문제 같은 게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게 좋은 감정으로 대해주고 있는 이들이 전혀 싫지만은 않다. 

그러면 좋아해선 안 되는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은 있어?

 좋아해선 안 되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도 있나? 좋으면 좋은 거지, 좋아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니. 지애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다시 한 번 찍어본다. 예전에 나로 하여금 처음 여자를 알게 한 그녀가 처해있던 상황이 떠올랐다.

혹시 유부남이라던가....

그러자 지애가 빙긋 웃었다.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다. 여기, 맥주 주세요.

지애가 맥주를 추가하는 동안 남은 맥주를 마셨다. 새 맥주가 왔다. 손으로 따는 거라 내가 휴지로 뚜껑을 잡은 다음 열어서 지애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맥주를 받아들며 말했다.

그래, 한석이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닮았어. 근데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해선 안 되는 사람이야. 이 정도까지만 이야기해 줄게. 더는 묻지 말고.

 네에.

살짝 웃음을 곁들여 말하고 있지만 그녀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기색을 띄고 있었다. 더는 묻기 미안했다. 화제를 돌려 요새 유행하는 노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녀는 양파의 애송이의 사랑을 좋아한다고 했고 이번에 앨범을 낸 이승환도 좋아한다고 했다. 난 딱히 좋아하는 가수는 없지만 그저 들리는 대로 흥얼거리는 편이라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가게에서 오늘도 난이라는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이거 제목이 오늘도 난 맞죠? 이승환이 부른...

그러자 지애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휴우. 한석이는 가수 정말 모르는 구나. 제목은 맞았는데 가수는 틀렸어.

 그런가요....

역시 모르는 분야에 대해 아는 척을 하면 이 꼴이 난다. 나도 모르게 시무룩해지려 하는데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승철이죠. 세 글자 중에 두 글자는 맞추셨네요, 선생님.

고개를 돌려보았다. 거기에는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서 있는 유미가 있었다. 유미는 턱으로 나와 지애를 가리키며 입모양으로 물어본다. 애. 인?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유미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으음. 갑자기 등줄기에 식은 땀이 나는 건 왜일까. 바람 피다 걸린 남편도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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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루트를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생각이 많아지더니 결국은 여태 안 하던 시도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궁금하신 분은 제가 이걸 연재하는 다른 쪽을 한 번 보시면... 그걸 보시면.... 아, 이 놈이 그동안도 정상이 아니더니 결국 끝에 와서 돌았구나.... 하실 겁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번 루트의 연재 간격은 지난번처럼 짧지는 않을 전망입니다. 2~3일 간격으로 올라올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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