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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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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가라사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셨지.
송화의 취미 중에 하나가 고전읽기였다. 공사가 다망하여 예전만큼 자주 읽지는 못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여러 취미 중에 가장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부분이었다. 바텐더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뒤로 걸어봐야 닿는 건 벽 뿐이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젠장, 니가 내 벗이냐? 도망친 실험대상 주제에 여길 어떻게...
그러자 송화의 실루엣이 흔들거렸다. 고개를 젓는 모양이었다.
많은 도움과 협력 끝에 도착했지. 그리고 이렇게 다시 만나니, 즐겁기 짝이 없군 그래.
차분하게 말하는 송화의 등 뒤로는 몇 명의 사내가 더 서 있었다. 송화가 손으로 바텐더를 가리키자 두 명의 남자가 달려들어 바텐더를 결박했다. 팔을 등 뒤로 돌리고 수갑을 채운다. 손목에 와닿는 차가운 금속성의 느낌이 놀란 바텐더가 송화를 보며 악을 썼다.
뭐야! 넌 짭새였던 거냐!
으음? 그거보다는 조금 높이 나는 새라고 해야 하나.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켜 욕을 할 때는 개새라고는 하니 새는 새겠지.
송화는 바텐더를 붙잡고 있는 경찰들에게 몇 가지 더 지시했다.
그 놈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놈이야. 손에는 구속구를 채우고 입에는 재갈을 물려. 옷은 팬티까지 전부 벗겨서 뭐하나 숨긴 게 없나 샅샅이 훑어봐. 아주 작은 침으로도 사람을 기절시키는 약물을 다루는 놈이니까 끝까지 경계를 풀지 않는다.
바텐더가 이건 인권침해라고 소리치려고 했지만 이미 재갈을 물리고 나니 끕끕거리는 소리 말고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 했다. 송화는 경찰들이 바텐더의 옷가지를 벗기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심심하게 구속하는 게 아니라 당장 워커발로 짓밟아 버리고 총이라도 구해 대갈통을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간신히 참아냈다.
조금 더 기쁠 줄 알았다. 그렇게 오래 추격해오고 온갖 고생을 한 끝에 잡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잡고나니 기쁜 마음보다는 허탈한 기분이 더 컸다. 그동안 고생이 머리 속에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잡아야 되는 대상은 저 놈 하나뿐이 아니었다. 뒤에 있는 열 명의 경찰들에게 작전대로 주변을 더 수색하라고 지시하고는 입구를 뚫을 방법을 모색한다. 상황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녀의 머리 속은 놀랄 만큼 평온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터라 두려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약 다섯 시간 전, 검찰청으로 돌아간 송화를 기다리고 있는 건 무리한 작전을 수행했다는 엄청난 비난과 질책이었다.
채 검사! 지금 제 정신이야? 종로 바닥에서 그 난리를 쳐놓고, 뭐? 증거가 없어? 게다가 뭐? 지금 다시 병력을 출동시켜 달라고? 검사 그만하고 싶어?
네.
묵묵히 상관의 질책을 견뎌내던 그녀는 짧게 한 마디 했다. 그녀의 대답이 너무 즉각적으로 튀어나온 지라 상관은 그녀의 대답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닙니다. 부장님.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이거... 결코 충동적으로 드리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녀는 준비해 간 봉투를 내려놓았다. 겉면에 적힌 辭表를 내려다보며 상관은 할 말을 잃었다. 붓펜으로 적힌 그 글씨는 아주 달필이었다. 송화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잠입수사를 하며 이미 불법약품에 의해 중독되었으며 이 사실이 드러날 경우 검찰의 위신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과 이것이 자신이 검사로서 행하는 마지막 법집행이며 그후의 책임은 모두 자신이 달게 받겠다고 말이다.
제가 마지막으로 요청하는 건 빠른 추격입니다. 속전속결하지 않으면 앞의 실수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불이 났을 때 도둑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그들도 지금 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제 믿을만한 친구....에게서 놈들의 마지막 은신처를 알아냈습니다. 지금 바로 잡아내지 않으면 또 놓치고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겁니다.
친구....라는 단어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어이없어 했다. 구멍동서가 아니라 막대동서 아니겠냐며 빙글거리는 표정과 진지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던 얼굴이 번갈아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스스로에 대해 생각한다. 사표가 수리되든 되지 않든 더 이상 검사로서 실격이다. 조폭의 도움을 받는 것도 모자라 그녀를 친구로 생각하다니.
그래서, 뭐가 필요한가.
이미 확고한 결심을 느낀 것인지 그녀의 상관은 체념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송화는 리사가 해 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경찰특공대의 투입을 청원했다. 상관은 한 번 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떨구며 마음대로 하라며 그녀를 사무실에서 내쫓다시피 했다.
그녀는 바쁘게 움직였다. 대전지방검찰청의 협조 하에 해당 지역의 차출 가능한 병력을 모두 뽑아내도록 했다. 대전에서 그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그리고 윗선의 도움으로 얻어내어 긴급출동한 경찰특공대 일개 소대와 같은 버스를 타고 계룡산으로 향했다. 유성IC 부근에서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예린을 만났다.
이미 그녀의 무용을 한 번 본 송화로서는 은근히 그녀가 함께 해주길 바랐지만 리사 역시 큰 싸움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전해듣고는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예린에게서 중요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놈들의 뒤를 밟으며 위치를 파악한 것은 물론 대전으로 돌아온 예린은 별도의 조사를 통해 적들에 대한 세세한 파악을 마치고 난 터였다.
경비를 맡고 있는 놈들은 예전에 매봉파라고 해서 대전 일대에서 놀던 놈들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별 볼일 없는 놈들이었지만 어떻게 된 요량인지 일본 쪽과 선이 닿아 세를 급격히 불렸다고 합니다.
....바텐더와 만났겠지. 일본이라면...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야쿠자쪽으로 물건을 보내기도 하고 또 받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골치 아픈 것도 조금 섞여 있는 모양입니다.
골치 아픈 물건이라니.
예를 들면, 러시아제 토카레프나 벨기에제 브라우닝 같은 장난감 말이죠. 불법 개조한 저격총도 보았다는 사람이 있는데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예린의 무심한 말투가 담고 있는 내용은 너무 충격적인 것이라 송화는 잠깐 말을 잃었다.
그걸...어떻게 알았지? 대체 이쪽에서는 아직 파악도 못한 이야기를...
송화가 충혈된 눈으로 예린을 쏘아보며 물어보았지만 예린의 선글라스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예린은 그저 담담한 말투로,
그거야 이쪽 업계라면 몇 군데 물어볼 곳이 있습니다만 검사님께 세세히 알려드린다면 별로 재미는 없을 것 같군요.
라고 대답했을 뿐이다. 송화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자기는 오늘 이후로 검사도 아니게 된다. 게다가 예린은 지금 그녀를 돕고 있다. 그러니 이 여자를 추궁해보아야 득될 게 없다고 판단하고는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대신 경찰 특공대에게 방탄조끼를 착용하라고 지시했을 뿐이다. 예린은 대축척으로 그려진 등산용 지도를 한 장 펼쳤다. 거기에는 검은 색 네임펜으로 몇 개의 선이 그어져 있었는데 각각의 선은 기도원의 담장과 문, 접근 가능한 경로를 표시하고 있었다. 예린은 그것들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정문 쪽은 길이 직선으로 나있는데다가 서치라이트를 포함해서 경비가 항상 있습니다. 곧장 쳐들어 가면 바로 들킬테고 강행돌파를 하신다고 해도 그 사이에 중요 인물들은 도망을 가겠죠. 잠깐 둘러본 것이기에 제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또 다른 출구나 숨겨진 통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무리하게 들어가려 하신다면 아까 말씀드린 장난감들에 의한 총격전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일부 인원이 비교적 완만한 이쪽, 서쪽 계곡을 타고 담장을 우회하여 정문을 무력화 시킨 다음 나머지 인원을 투입하시길 권고합니다.
감정이 배제된 차분한 말투, 그것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송화는 지도에서 시선을 떼어 예린을 쳐다보았다.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생각해 내는 거지? 당신은 그냥 단순한 주먹 아니었어?
맞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런 걸 이리도 잘 알고 있지....?
너무도 놀란 송화와는 달리 태연자약한 예린의 말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꾸미지 않은 어조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녀석들의 뒤를 밟아 이쪽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움직였습니다. 이곳의 지형지물과 담장의 배치 등을 파악한 다음 지도에 그려서 아가씨에게 모사 전송으로 보냈습니다. 그 이후 대전에서 추가 정보를 수집했구요. 그 후에 아가씨가 전화로 설명해준 내용을 검사님께 전해드린 것 뿐입니다.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송화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고 침묵했다. 예린이 말하는 아가씨라 함은 분명 리사를 말하는 것일테고 여기 있는 예린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는 가히 특급 정보라 할 만한 것들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특공대가 움직이기 앞서 정찰조와 작전부가 해야 할 일을 불과 하루 만에 두 여자가 해치워버린 것이다. 독도법을 배워 알고 있는 그녀가 지도를 통해 본 현장의 지형은 험산, 그 자체였다. 비교적 완만하다고 예린이 말한 서쪽 계곡만 해도 거의 깎아지를 듯한 모양새였다. 리사가 특공대를 끌고 가라고 조언을 한 까닭을 이제야 알겠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조폭이나 하고 있기 아까운 여자군.
저 말입니까?
아니, 둘 다 말야.
예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지도를 접어 송화에게 건넸다. 그리고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채 검사님도 검사나 하고 있을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검사나? 지금 그게 무슨 망발인지 알고나 있어?
글쎄요. 제가 뵈었던 검사님들은 죄다 술집에서 여자 끼고 저희에게 접대를 받던 분들이었거든요. 현장에 이렇게 직접 나와서 뛰는 분은 처음입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 대한 쓴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송화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 했다. 예린은 비꼬는 기색 하나 없이 그저 담담하게 자신이 본 사실만 이야기할 뿐이기에. 두 사람은 그렇게 오가는 말 없이 한참을 서 있었다. 돌아서기 전, 예린은 주저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허리까지 굽혀 인사하는 예린의 태도에서, 송화는 묘하게 가슴이 아팠다. 이런 모습을 불과 몇 시간 전에도 보았기에 한 번 넘겨짚어 본다.
당신도... 한석과 관계가 있는 거야?
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한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아가씨가 슬퍼할 테니까요. 그래서입니다.
송화는 상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묻는다.
정말... 그것 뿐이야?
자신이 보았던, 그리고 겪었던 한석이라는 남자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고작 그와 사나흘 함께 있었을 뿐인데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의 곁에 있었을 리사를 떠올린다. 그리고 리사의 곁에 항상 있었을 예린을 떠올린다. 재차 묻는 송화의 말에 예린은 즉답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말이 없는 그녀는 오히려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천 마디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사실 묻는 게 더 바보 같았다. 아무리 지시를 받았다고는 하나 적진에 홀로 뛰어들어 구출하려고 하고 이 먼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목숨을 건 정찰을 해낸다.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송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았어. 최선을 다해보지. 리사를 위해서든, 당신을 위해서든.
송화는 자신을 위해서라는 말은 생략했지만 어쩐지 예린은 그걸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린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려고 할 때 송화는 손을 내밀었다. 그 의미를 깨달은 예린도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아직까지는 현직 검사, 그리고 현직 조직폭력배의 악수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손을 놓은 예린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부산으로 향한다는 그녀와 큰 싸움을 앞두고 있다는 리사. 너무도 타입이 다른 두 사람이지만 그 둘이 합쳐서 만들어내는 어마어마한 시너지 효과를 눈으로 보게 된 송화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고 만다.
무운을 빈다.
듣는 이가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도 버스로 돌아가 경찰특공대와 함께 이후의 작전을 상의했다. 달도 뜨지 않는 밤에 산을 넘어 적의 옆구리를 친다는 계획에 다들 뜨악해했지만 상대가 총기를 휴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다들 얼굴이 굳었다. 대테러 장비라면 모를까 애초에 그들이 갖춰온 장비는 체포-진압용 장비였기에 총기가 없었다. 소대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검사님의 말씀이 모두 사실이라면 역시 정면은 포기하는 게 맞습니다. 저희 189소대 열 두명이 우선 침입하여 입구를 제압한 다음 전경버스를 정면에 투입시키기로 하죠. 검사님은 버스에서 대기하다가 돌입이 마무리되면 들어와주십시요.
그러자 송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당신들과 함께 들어가겠습니다.
네? 검사님이요?
다들 송화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곳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검사님이... 안됩니다.
소대장이 손을 내젓자 송화가 도리어 강하게 말했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제가 따라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 작전입을 입안한 사람이 전데 여러분만을 위험에 몰아넣을 수는 없어요. 산도 제법 타는 편이니 방해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들 만류했지만 송화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나머지 경찰병력은 산 밑에 배치하고 무전을 받아 곧장 돌입하기로 했다. 송화와 경찰특공대는 산을 크게 우회하여 반대편 기슭에서부터 올라가기 시작했다. 두 시간 넘는 야간산행을 하며 악전고투를 한 끝에 그들은 간신히 기도원 내부에 낙오자 없이 침투할 수 있었다. 송화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기도원 내부에서 군데군데 하우스나 건물을 지키는 보초를 제압하며 정문을 향해 나아갔다.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단 한 번도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던 곳이고 대부분의 경비는 외부로부터의 침입보다는 내부 인원의 탈출을 막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기에 이런 기습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뜻하지 않게 바텐더를 잡아낸 것이다. 쓰러뜨린 보초들을 하우스 한 곳에 몰아넣고 굴비 엮듯이 묶어놓은 후 소대장이 송화에게 보고했다.
이 주변은 이제 깨끗합니다. 안쪽의 공장과 예배당에 인원이 좀 있다고는 하는데 위협적이진 않습니다.
좋아요. 이제 남은 건 정문이군요. 부디 조심스럽게 접근하세요. 아까 말씀드린 건 다 기억하고 있죠?
알겠습니다.
정문으로의 접근은 여태까지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들은 조명이 거의 없는 산쪽에서 안쪽으로 파고들어와 어둠을 틈타 움직였는데 정문 쪽은 전혀 그러질 않고 굉장히 환한 곳이었다. 몸을 드러내지 않고는 쉽사리 접근이 안 되었다. 망루 같은 것을 세워놓고 사방을 감시하던 적이 내부의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하고는 서치라이트를 안쪽을 향해 비추기 시작했다. 건물 그림자로 향해 숨어들던 누군가의 움직임이 적들의 눈에 포착되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으악!!
망루에 어느새 침투한 특공대원들에 의해 기도원의 기도들이 하나둘씩 제압되기 시작했다. 서치라이트가 꺼지고 이런저런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송화가 볼 때 대부분 제압되었다고 생각할 무렵, 밤하늘을 찢는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퍼졌다.
타앙-
산 속의 새들이 날아오르고 소리는 산에 부딪혀 메아리로 돌아왔다. 황급히 고개를 내밀고 정문 쪽을 바라보려는데 옆에 있는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를 내리눌렀다.
나가지 마십시죠. 아직 모릅니다!
소대장이었다. 이후로도 총성은 몇 발 더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그때 정문 쪽에 간 인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진압 완료!
송화는 무전기를 들고 대기병력에게 이곳으로 오라 이르고는 황급히 정문을 향해 달려갔다. 망루에서 내려오는 대원에게 물어보았다.
누가 맞은 건 아니죠? 그렇죠?
그러자 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놈이 저항하다가 무심코 쏴버린 모양입니다. 아무도 맞은 사람은 없습니다.
송화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소대장을 불러 다시 명령했다.
총기를 수거하고 나머지 인원을 모아 원 목사를 찾습니다. 아마도 저기 가장 좋은 건물에 있을 걸로 추정되는 군요.
알겠습니다.
소대장의 위시한 인원들이 송화를 향해 경례를 착 올려붙이고 다같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그녀도 그들을 뒤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해가 뜨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났다. 지금까지 둘러본 결과 이 기도원은 모든 불법 행위의 증거, 그 자체였다. 원 목사의 죄상은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그녀가 찾는 사람도 구해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의 헛된 희망이었다. 건물에 도착하고 현장을 마주한 그녀는 오열하고 말았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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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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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아악-
양동이에 담긴 물이 단번에 뿌려진다. 그것을 흠뻑 뒤집어 쓴 병구는 몸을 꿈틀거려 보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단단히 결박시키고 있는 밧줄이 풀리지는 않았다. 그저 의자가 몇 번 들썩이고 말았을 뿐이다.
목이 많이 마르시면 더 드릴 수도 있어요.
건조한 말투가 들리는 방향으로 병구의 시선이 향한다. 맞아서 부풀어 오른 눈덩이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뜨는 건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간신히 시력을 집중시킨다. 푸른 조명 아래에서 더 새하얗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리사를 향해 그는 살짝 웃었다. 아니, 비웃었다.
네 아비는... 목이 마르진 않을 게야. 영원히 말이지.
그러나 리사의 표정은 아까부터 심하게 굳은 채로 전혀 변하지 않았다. 마치 무기질로 된 물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의 얼굴은 딱딱해져 있었다. 오로지 입과 주변의 근육만 움직이는 게 기이할 정도다.
수장시켰다는 말인가요?
뭐, 바닷물도 물이니까 말야. 마시기 좀 짜서 그렇지.
병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야구방망이 하나가 그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병구의 몸이 약 반 미터 가량 떴다가 의자와 함께 뒤로 나뒹굴었다. 리사가 방망이를 들고 씩씩거리고 있는 예린을 돌아보며 질책했다.
언니! 좀 가만히 있어봐요. 그렇게 감정적으로 움직이지 말구요.
태호가 얼른 달려가 병구의 의자를 도로 세워놓았다. 병구를 살펴보더니 다시 물을 뿌린다. 바로 깨어나질 않는다. 이번에 깨어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예린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리사를 향해 말했다.
리사... 넌 어떻게 이 상황에서도 그럴 수 있어. 아버님이... 아버님이..... 그렇게 되셨는데....
리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병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답이 없는 그녀를 향해 예린이 악을 썼다.
우리를 키워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그 분의....시신도 지금 찾을 수 없는데 넌 어떻게 그러니. 네가 아무리 의연한 아이라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같은 경우에도 어떻게....
언니.
게다가 송화의 연락을 받고도... 넌 어떻게... 그냥 있을 수 있지? 정말... 네가 좋아하던 사람 아니었어? 그런 거 아니었냐고? 도대체...
언니!
리사가 강한 어조로 예린의 말을 끊는다. 고개를 돌려 예린을 바라본다.
지금 같은 경우이기에, 저는 더 그래야만 해요.
.....
언니가 제 몫까지 더 슬퍼해주세요.
예린은 고개를 떨구었다. 부산에 다시 내려온지 일주일. 너무도 힘든 나날이었다. 연이은 항쟁으로 육체적으로도 그렇지만 아버지의 비보는 물론 서울에서 들려온 소식까지 그녀를 너무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언니는, 날 대신할 수 있어요. 슬퍼하세요.
리사의 말이 끝나자 예린은 별안간 들고 있는 야구방망이로 벽을 후려쳤다. 벽이 흔들거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몇 번이고 두드린다. 돌가루가 휘날리다 결국 야구 방망이가 부러지고 만다. 부러진 방망이를 들여다 보고 있던 예린은 예린은 짐승과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손에 들린 부분을 병구에게 집어던졌다. 머리에 적중한 방망이 손잡이 부분이 바닥에 떨어질 때 쯤 예린은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정신을 마악 차리려던 병구는 도로 기절했다.
태호는 뻘쭘하게 서있다가 리사의 눈짓을 받고 병구를 흔들어 깨웠다. 예린이 리사와 거의 항상 붙어다니고 아주 친밀한 사이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막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지는 몰랐다. 만신창이가 된 병구를 정신 차리게 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했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슬퍼하는 예린의 노기가 무섭기도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똑바로 눈을 뜨고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리사의 메마른 표정이 더 무서운 까닭이었다.
간신히 다시 정신을 차린 병구를 향해 리사가 조용한 어조로, 그러나 아주 분명하게 다그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버티며 대답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병구였지만 밤을 세워 취조하는 리사에게는 이겨내지 못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토해내고 말았다. 그런 정보 중에는 그가 가지고 있던 약의 입수와 유통 경로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걸 다... 알아서 어쩔 셈이냐... 넌, 약은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글쎄요. 공익사업이라도 시작해 볼까요?
병구는 침을 퉤 뱉었다. 리사에게 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충분한 경멸의 표시였다.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구나, 아가야.
그게 뭐죠, 아저씨?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기에 병구는 리사나 마리에게 가끔씩 아가라고 불렀고 리사는 그에게 아저씨라고 불렀다. 마리는 아제라고 불렀다. 지금의 처지가 이렇게 되었기에 그 친밀한 호칭은 을씨년스러운 것으로 바귀고 만다. 병구는 한쪽 뺨이 부어 발음이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이미 더럽혀졌어.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더럽고 치사한 세계에 몸을 담고 있는 거야. 그런데, 뭐... 약은 안 하겠다? 미성년자는 손 안 대겠다? 이래저래 불법적인 건 안 하겠다? 형님이 그런 소리를 하실 때에는 말이지... 아... 이 분이 이 일 하는 게 오래 되다보니 마음이 많이 약해져서 그런가 보다 싶었지. 그런데 널 보고 있으면... 하하... 오냐오냐 귀엽다고 해줄 때, 그 때 알려줄 걸 그랬구나 싶다. 그 어린 것이 똑똑한 머리와 이상한 감이라는 거 믿고 조직 일에 하나하나 참견하기 시작할 때, 그 때 알려주지 않아서 네가 이런 착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야.
.....제가 무슨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건데요.
네가 깨끗하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착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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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너니까... 우리 조직이 연간 사고 파는 애들이 몇 명인지는 알고 있겠지? 나와바리에서 어떤 애들이 기어들어올 때는 어떤 절차를 거쳐서 살릴 놈은 살리고 밟을 놈은 밟는지도 잘 알고 있겠지? 어떤 새끼들에게 돈을 거두어 들이고 또 어떤 새끼들에게 돈을 뿌리면서 우리의 자리를 유지하는지! 네가 모르지는 않겠지! 말해봐라, 내 질문에 답해보라고!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병구의 외침은 절절하기 그지 없었다. 비록 싸움에서 패하고 이런 꼴이 되긴 했지만 그 역시 백당의 한 사람이었다. 백당이라는 이름이 있기도 전에 김회장과 함께 있었던 창립 멤버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평생 모든 것을 바친 조직이, 그가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계집아이에게 넘어가는 꼴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몫을 자신이 직접 챙기기로 결심했다. 리사가 남자문제로 갈팡질팡 하는 것을 보며 결국 여자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는 시기를 조율했다. 리사가 대규모 인원을 서울로 빼가는 것을 보고 그는 자신의 추종세력을 모아 김회장을 쳤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 어느 정도 연금을 하며 자신에게 협조를 하라고 다그치면서 리사가 돌아오거든 협상의 재료로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리사는 너무 빠르게 부산으로 돌아와 버렸다. 어떠한 협상의 의지도 내보이지 않은 채 병구의 외곽부터 차근차근 짓밟으며 조여들어 왔다. 리사를 맞을 준비도, 대처도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를 맞닿아뜨린 병구는 최후의 통첩으로 김회장의 목숨을 걸었다. 그러나 리사의 반응은 싸늘했다. 리사는 병구가 그런 베짱이 못 된다고 조롱했지만 병구는 정말로 그렇게 하고 말았다. 김회장을 담은 여행용 대형 가방은 서낙동강 푸른 물 속에 사라졌다.
녹산공단에서 최종적으로 맞붙게 된 둘은 서로를 향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병구는 제 아비를 죽게 만들고 조직을 위태롭게 만든 사람으로 리사를 가리켰고 리사는 구 시대의 잔재라며 병구의 축출을 주장했다. 그렇게 맞붙은 양 진영은 잠시 후 휴전 아닌 휴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귀신의 형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악에 바친 예린이 날뛰었고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동생들이 앞다투어 몸으로 찍어눌러야만 했던 것이다.
병구 쪽에 붙었던 조직원들은 뭔가 잘못 되어 간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슬금슬금 리사에게 되돌아 가고 있었다. 병구의 패색은 짙어져 갔다. 결국 그는 모든 수하를 잃고 리사에게 사로잡혔다. 예린과 태호가 그런 병구를 취조하는 리사를 보조했다. 그러나 예린은 분에 못 이겨 나가버렸고 태호 만이 남아 리사와 함께 끝까지 병구를 취조했다.
그 질문은....
병구의 악에 바친 소리가 끝나고도 리사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겨우 말문을 연 그녀는 몹시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굳이 아저씨가 제게 묻지 않으셔도, 저도 늘 제 자신에게 해오고 있던 질문이랍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얼 하며 살아가야 할지... 그런 고민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어요. 이제 더 이상 저를 볼 일이 없는 아저씨께서.....굳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를...더 이상 볼 일이 없다라....하하하하.
병구의 마지막 웃음은 처연했다. 리사가 태호에게 눈짓을 했다. 항상 리사와 함께 해오는 예린과는 달리 그는 리사의 눈짓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 했다. 결국 리사는 말로 해야만 했다.
아저씨를, 끝내 주세요.
리사는 기억하고 있다. 어린 시절 몸이 골골하던 리사에게 책과 과자를 사다주곤 하던, 날씨가 따뜻하여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리사를 데리고 뒷산에 함께 가주던 막내 아저씨. 그 아저씨와의 시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아저씨의 끝을 그녀가 지시하고 있다.
태호가 휘두른 방망이가 병구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리사는 끝까지 거기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병구의 마지막 눈빛을 묵묵히 견뎌낸 그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결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창고에서 나온 리사는 백당의 모든 인원을 불러들였다. 예린은 없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모두의 눈빛을 받으며 리사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참 여러가지 일이 있었고,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실종되신 제 아버지나 방금 지병으로 눈을 감으신 송 부장님도 항상 걱정을 하고 계셨죠. 우리 백당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방법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에 대한 고민은 다들 매한가지였고 그를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고 생각합니다. 의견이 맞지 않는다면 서로 무릎을 맞대고 논의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 했어요. 그게 결과적으로 조직에 분란을 일으키고 싸우지 않아도 될 사람들끼리 서로를 싸우게 만들었습니다. 과정이 어찌되었든 이 모든 것은 제 잘못입니다.
모두들 송 부장의 반란과 김 회장의 죽음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리사가 사고와 지병이라고 언급을 한 이상 그에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리사가 자신의 잘못이라며 자책을 했지만 그렇다고 리사를 비난하는 이도 없었다. 지금 그녀는 아버지를 잃은 한 사람의 딸자식이기 때문이었다.
조직이 삐꺽거리고 사람들이 많이 상했습니다. 재건을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협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지난 과거에 누구를 지지했고 또 누구의 편에 섰는가는 전혀 따지지 않겠습니다. 앞으로의 백당이 커나가는데 있어 도움이 되는 분이라면 귀이 여기고 능력을 높이 사겠습니다. 제 비록 나이도 어리고 능력도 일천하지만 여태까지 해오던 일과 등에 엎은 위명이 있으니 부족하나마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지휘하겠습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고 앞으로의 백당의 노선이 탐탁치 않은 분은 떠나셔도 상관없습니다. 막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거 하나만은 약속하죠. 제가 먼저 이 조직을 떠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여러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구요.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떨리지도 않고 차분하게 백당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뒤이어 조직원들의 처우와 사업의 방향성도 담담하게 설명한다. 항상 조직의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챙기던 브레인이었던 그녀였기에 백당의 조직원들은 그녀의 이야기에서 진정성을 발견했다. 누구 하나 그녀를 어리다고 업신여기는 사람도 없고 여자라고 무시하지도 않았다. 리사의 말이 끝나자 누군가의 선창으로 인하여 리사의 이름을 드높여 부르기 시작한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두 분파라 나뉘어 싸우며 두 쪽으로 갈라질 위기에 처했던 백당이었지만 이제 리사의 기치 아래 모두 하나가 되어 한 목소리로 한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리사가 손을 들어 모두를 멈추게 했다. 그녀는 좀 주저하며 이야기했다.
다만... 미리 말씀드릴 게 있어요. 이 한 가지는 먼저 말해놓고 나야 제가 조직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사실 저.. 임신중입니다.
모두들 술렁거리며 리사의 배를 쳐다보았다. 리사의 손은 자신의 배를 가만히 덮고 있었다. 전혀 티는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조심스러운 태도에서 생명의 품은 사람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상대가... 뉩니까?
아무도 묻지 못해 주저하고 있는데 눈치 없는 누군가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양 옆에 있는 사람들이 이 문디 새끼가! 하며 쥐어박는 시늉을 하지만 궁금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리사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안상... 말씀 드릴 수 없는 걸 양해해 주세요. 그리고 미리 말했다시피 전 여러분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아이는 애비에게 보낼 수도 없어요. 그 분이 지금 많이 아프시거든요. 그래서 이 아이는 저희와 함께 있을 겁니다.
다들 복잡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리사에게 아이라니. 물론 그녀도 여자이니 언제고 엄마가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뜬금없기는 했다. 게다가 상대도 밝히지 않았고......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 아이를 백당 내에서 키울 심산이었다.
부디... 이 아이가 보고 자랄 우리들의 모습이 모범적이고 바른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길 바랄 뿐입니다. 그걸 부탁드리기 위해 이 이야기를 꺼낸 거예요.
모두 숙연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개중에서 가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깊이 공감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리사 역시 뒤돌아서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예린이 리사의 어깨에 숄을 덮어준다.
춥습니다. 아가씨.
그러나 리사는 어깨를 비틀어 숄을 거부했다. 몸을 돌려 예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흐음. 아까는 막 흥분해서 리사 어쩌고 하더니... 이젠 안 그러시네요?
.......죄송했습니다.
죄송하다는 말로 끝낼 일이 아니에요. 엄히 다스리겠어요. 그래야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백당의 기강이 바로 세워질테니까요.
예린의 얼굴은 변화가 없었지만 근처에 서있던 태호가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리사의 입에서 예린을 질책하는 소리가 나오는 건 참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리사는 원래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태호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신 사과한다.
누님이 결코 나쁜 마음을 품고 그런게 아닙니다. 아가씨. 누님은 그저 흥분해서...
흥분하면, 사람도 한 대 치겠던데요. 아까 하는 짓 보니까.
그게 그러니까!!
안절부절하는 태호와는 달리 예린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있었다. 리사는 손을 들어 태호의 입을 다물게 하고는 예린에게 말했다.
성예린 씨.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새로운 백당에는 당신이 필요 없어요. 그러니 해고입니다.
태호는 입을 딱 벌렸다. 안 그래도 커다란 그의 입이 사과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크게 벌려졌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리사가 예린을 자른다고? 그녀의 수족이라 평가받던 이를? 그러나 그런 사실에 쐐기를 박듯이 리사는 예린에게 딱 한 마디를 보탰다.
떠나세요.
예린은 주저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정말로 떠났다. 등을 보인 누님과 해고 명령을 내린 보스 중에 누구를 말려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태호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 리사 역시 등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리사와 예린,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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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가 Route N 마지막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