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65)

흐음.. 만약 이게 꾸미고 있는 거라면 이 녀석이 상당히 연기력이 좋은 편이라는 건데요.

남자는 내 눈꺼풀을 까뒤집어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마귀의 계략일지도 몰라요.

 하하. 마귀라...

자신을 김 권사라고 이야기한 여자는 바텐더라고 하는 남자를 불러왔다. 얼굴이 쭈글쭈글한 이 남자는 얼굴이나 피부를 보면 영락없는 노인인데도 말투나 목소리를 들어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이제 겨우 삼십대 중초반 정도? 그런데도 얼굴이 왜 저렇지? 어렸을 때 한약을 잘못 먹었나? 암튼 두 사람은 나를 앞에 두고 한참을 관찰했다. 이름이나 나이 등을 물어본다. 소중한 개인정보를 내어줄 수 없다는 생각에 버텨볼까 했는데 대답을 잘 하면 풀어주겠다고 하기에 선선히 알려주었다. 두 사람은 대답을 들으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부담스럽다.

이제 다 말했으니 풀어주시는 건가요? 제가 여기 잡혀온지 얼마나 지났죠?

 잡혀왔다라.... 자네는 어제 뭐했나?

 네? 어제요? 그야.... 학교 갔다가 밥먹고 집에 와 잤는데요.

.......아닌가? 아니, 내가 어제 뭐했더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술먹고 길에서 뻗거나 그런 건 아닌데 이런 곳에 어떻게 실려온 것일까. 처음에는 예전에 신입생 환영회 때 딱 한 번 그랬듯이 술 먹고 뻗어서 있다가 누군가에 의해 실려온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럼 좋아. 자네는 지금이 몇월달로 알고 있지?

 에?

뜬금없이 날짜를 물어보다니. 그런 건 나한테 묻지 말고 달력을 보란 말야, 달력을. 그러나 방을 둘러보아도 황량한 이 창고에는 그런 게 없었고 나는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12월달... 아닌가요? 다다음주 수요일이 크리스마스고.....?

바텐더의 눈빛이 번뜩였다. 대답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주저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차림새가 전혀 겨울에 입을 만한 복장들이 아니었다. 김 권사라는 여자의 검은 옷도 그렇고 바텐더가 입고 있는 가운도 그렇고... 전혀 두꺼운 옷이 아니었다. 내가 입고 있는 이 환자복 비슷한 것도 마찬가지...

자..잠깐만요. 지금 12월 달 아닌가요?

 하하. 몇년도?

 에, 그거야 96년도.....

얼빠진 표정으로 대답하자 바텐더는 허리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한 내가 두 사람을 올려다보자 김 권사도 쓴 웃음을 짓는게 보였다. 그녀는 손을 모으고 말했다.

마귀가 빠져나가면서 이 분의 기억도 가져간 걸까요.

 크하하하하. 모르죠, 저야, 그쪽으로는, 푸하하하하. 이거 걸작일세.

바텐더는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한참 웃어대다가 내 어?틘?두드리며 물었다.

자, 저기 옆에 말야. 저기 있는 여자애 보이나?

 네?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누워서 볼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거의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배와 가슴 근처의 하얀 살이 고스란히 드러나있고 거기에는 온갖 센서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얼굴에는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옆에 놓인 오실로스코프 같은 기기에서 어떤 트렌드 마크가 표시되는 걸로 보아 아마도 저게 심장박동을 나타내는 건가 싶었다. 몹시 불쌍한 아이였다. .... 어라? 내가 왜 이 아이를 불쌍하다고 하고 있지?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아이였고 누구인지도 모르겠는데도 어쩐지 낯이 익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좀 더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바텐더의 목소리 때문에 그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어떤 미친 놈이 저 아이의 목을 졸라서 말야, 뇌로 가는 산소가 결핍이 되었어. 일시적인 코마 상태에 빠졌지. 재빠르게 소생 절차를 밟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여긴 설비도 부족하고 사람을 고치는 약품 따위는 없는 곳이라 어렵더라고. 그래서 일단은 저런 식으로 살려두긴 했는데 말야.... 어때, 자네가 의사라면 뇌사 판정을 내릴 텐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 아이가 살아날 가능성이 있긴 해. 약 영쩜 영영영영, 일! 퍼센트. 아마도 여기 있는 사람들이 휴거 맞이 해서 하늘로 다 올라가고 그 다음 세상이 오면 살아날까 말까한데 말야. 어때. 저러고도 사람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응? 자네 생각은 어때?

내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그의 표정이 어쩐지 역겹다. 애당초 남자가 내 얼굴 가까이에 얼굴 들이대는 것부터가 불쾌하고 무엇보다 이 사람 말대로라면 저 아이의 생명이 걸린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왜 표정이 그따위인가 싶었다. 그는 이죽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생각을 말해보라니까. 자네 의견을 받아들여서 계속 살릴지 말지를 결정하겠어. 참고로 저 상태로 계속 살릴려면 이런 설비가 계속 필요한데.. 여기니까 그나마 저 정도 갖추고 있지 밖에서 저정도로 해주려면 못해도 한달에 이삼백만원은 우습게 들걸?

 .....그런 이야기를 저한테 하시는 이유가 뭐죠?

그러자 바텐더는 허리를 펴며 말했다. 두 손을 펴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그냥 자네라면 아주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않을까 싶어서 말야. 그냥 한번 물어본거라고.

바텐더는 김 권사와 이야기를 좀 더 나누더니 방을 나갔다. 김 권사도 내게 마귀를 이겨내길 바란다 어쩐다하고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나도 나갈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문 밖에 서 있는 커다란 남자 둘이서 나를 제지했다. 한 명만 있어도 나를 제압하고도 남을 것처럼 생긴 사람이 둘씩이나 버티고 있기에 그냥 잠자코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주인님에게 연락을 미처 못 드리는게 안타깝기는 했지만 이 알 수 없는 상황에 빠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나가고 나니 창고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는 있었다. 슬리퍼를 꿰어신고 제일 먼저 창가로 다가간다. 손바닥만한 쪽창으로 내다본 바깥은 콘크리트 가득한 도시의 풍경이었다. 삭막한 그 모습이 어쩐지 낯설어 이곳이 어디쯤인지 가늠조차 되질 않는다. 고개를 흔들고 옆 병상에 있는 소녀에게 다가간다. 발치에 놓인 이불을 끌어다가 몸을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기온이 막 낮아서 춥거나 하진 않았지만 벌거벗은 몸을 두고 보고 있기가 딱해서 그랬다. 

삐-익-, 삐-익, 삐-익.

낮고 규칙적인 기계 신호음이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바텐더의 말에 따르면 이 아이는 말 그대로 몸만 살아있을 뿐이다. 사람의 사고를 관장하는 뇌는 이미 손상되었다고 한다. 대체 이 어린 아이를 이렇게 심하게 다치게 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꽤 잔인한 사람인 모양이다. 여자 아이의 목에는 시퍼런 손자국이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있어 몹시 섬?했다. 명백한 살의.... 그것이 저절로 느껴지는 흔적이었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서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몸을 찬찬히 관찰한다. 얇은 이불 바깥으로 드러난 가느다란 팔과 다리에 멍자국이 꽤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무릎은 심하게 까지고 멍들어 있었고 팔뚝에도 그런 흔적이 꽤 보였다. 불행한 상상이지만 이 아이가 성적으로 심한 짓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겨우 십대 초중반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인데 말이다......

의자 하나를 끌어다가 침대 옆에 두고 걸터앉는다. 사실 지금 내 몸도 구석구석이 쑤시고 머리도 아프다. 뒤통수는 누가 쥐어뜯어먹은 것처럼 욱씬거렸고 허리와 배에서도 은은한 통증이 반복되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가 드러눕고 싶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 아이의 곁을 떠나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자꾸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웬 중년 여자가 쟁반을 받쳐들고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창고에 들어서던 그녀는 내 모습을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다가와 쟁반을 침대에 올려두었다. 쟁반에는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죽이 한 그릇 놓여있었다.

제 꺼인가요?

 그렇습니다. 드시죠.

며칠 굶은 것처럼 뱃속이 엄청나게 허기졌기에 마다하지 않고 그릇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적당히 식은 다음에는 그냥 들이부어 마셔버렸다. 허겁지겁 먹고 나니 그제서야 정신이 좀 안정된다. 식사를 가져온 중년 여자는 여자 아이의 침대 곁에 서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처연했다. 아는 아이인가?

혹시 이름을 아세요? 그 아이의?

그러자 여자가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몹시 독특한 빛을 담고 있어 조금 섬?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양....소란이라고 합니다. 제 여식이죠.

조금 놀랐다. 딸이라니.

정말 따님인가요? 그 아이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바로 물어보았다. 죽 그릇은 이미 바닥까지 핥아먹었기에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 질문을 들은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정말이군요. 마귀가 떠나가면서 기억을 잃었다는 게....

 네?

아까 김 권사인가 김 강사인가도 나한테 마귀마귀 거리더니 이 아줌마도 똑같다. 내가 어리둥절해 있으려니 그녀는 내게 다가와 자세를 낮추고 시선을 맞춘다.

기도하겠습니다.

 네? 에에....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손을 모으고 눈을 감기에 나도 엉겁결에 따라했다. 눈을 감고 있자니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자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또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신 독생자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용서하신 것처럼 저희도 이 자를 용서하려 합니다. 부디 이 자의 죄는 죄가 아니옵고 진실한 믿음을 접하지 못한 더 큰 죄를 바로 보지 못함이 더 큰 죄라 하겠나이다. 아멘.

 .........아멘.

엉겁결에 시작한 기도는 역시 엉겁결에 마친 아멘으로 끝이 났다. 뭔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아줌마의 목소리가 울먹거리기에 까닭 모르게 나 역시 숙연해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그녀는 그릇을 챙기고 있었다.

저기.... 방금 그 기도가 무슨 뜻 입니까?

교회라고 해보아야 내당리 살 적에 군종들이 매년 행하는 부활절 행사에만 참여해봤던 터라 기도라든가 그런건 정말 몰랐다. 끝날 때 아멘으로 끝난다는 것 정도가 유일한 지식이랄까.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턱짓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제가 굳이 답하지 않겠습니다. 저기에 모든 해답이 있으니 그걸 읽고 깨달으십시요. 사람의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입니다.

아니, 이보셔요. A라도 물으면 A에 대한 답을 주세요. A라고 물었는데 Z라고 답하니 이만한 동문서답이 또 어디 있으랴. 그러나 그녀는 내가 더 묻기도 전에 쟁반을 챙겨 창고를 나가버렸고 나는 별 도리 없이 아까의 자세로 돌아갔다. 아이의 모습을 계속 보고 있다가 문득 아줌마가 가리킨 곳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검은 색의 표지가 번들거리는 한 두꺼운 책이 놓여있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들어본다. 표지에 금박으로 적힌 글씨를 읽어본다.

개역개정 우리말 성경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해서 펼쳐본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았는데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맨 위를 보니 사도신경이라고 적혀있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게 만든 사람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아까 그 아줌마는 빌라도처럼 나도 용서하겠다고 했다. 예수를 죽게 했다면 기독교 입장에서는 아주 그냥 쳐죽일 놈일텐데... 그런 사람을 용서한다고? 예수는 보통 대인배가 아닌가보다. 얇디 얇은 종이를 팔랑거리며 넘겨본다.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적힌 글씨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래도 그 아줌마는 여기에 해답이 있다고 했다.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었다. 페이지를 넘기며 내용을 빠르게 훑어본다. 손바닥만한 창을 통해 들어오던 빛이 붉그스레 해질 때까지 꼼짝도 않고 그러고 있었다. 

이런 거짓말쟁이. 여기 해답은 개뿔.... 도무지 모를 이야기만 잔뜩 적힌 그 책에서 빌라도가 누구이고 뭐하는 놈인지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이런 거는 좀 PDF파일 같은 걸로 제공되어서 맨 위에 검색 기능 같은 거 달아놓으면 좀 좋아? 투덜거리며 책을 덮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문 소리가 났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들어온 사람은 바텐더였다. 그는 조그만 손가방 같은 걸 가지고 들어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뭐하고 있나?

 뭐...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이걸 읽고 있었는데요. 여기 해답이 있다고....

손에 든 성경을 내보이자 그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백날 그딴거 읽고 자빠져 있는다고 해답이 나올 것 같아? 그 책이 나온지 이천년이 다 되어가고 그 동안 읽은 인간 수십, 수백억이 넘어가는데도 이 세상이 답이 안 나오는 걸 보면 모르겠어?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책이 문제라는 걸 일찌감치 인정해야 되는데 말야. 안 그래?

 ......신성모독쯤 되겠는데요, 그 발언은?

 뭐, 어때. 내가 믿는 종교도 아닌데.

 하긴... 힌두교 믿는다고 그러셨지요. 시바신을 모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다가 문득 뭔가 이상했다. 이 사람이 뭘 믿는지 내가 어떻게 알지? 언제 들었지? 흠칫 놀라 그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내 대답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가방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내더니 주사기 두 개를 조립했다.

뭐..하시게요?

 피 좀 빌리세.

 에엑?

그는 고무줄을 꺼내 내 팔을 묶고 주사기를 꽂아 피를 좀 뽑아갔다. 그리고 누워있는 소란이라는 아이의 팔에서도 마찬가지로 채혈했다. 나보고 아이의 주사부분을 누르고 있도록 했다. 작은 앰플에 피를 나누어 담는 모습을 보며 물어본다.

대체 그걸 어디에 쓰시게요?

 뭐, 다양하게 쓰이겠지. 자네가 궁금해할 건 아냐. 이제 자네를 보기도 어려울테니 미리 받아감세.

 보기 어렵다뇨?

그러고 보니 그의 복장은 아까와 좀 달랐다. 낮에 올 때는 가운차림에 슬리퍼 차림이었는데 지금은 두툼한 트레킹화에 등산바지와 조끼 같은 걸 입고 있다. 

어디... 가세요?

 응. 여기 더 이상 있으면 안 되겠더라고. 어제 밤에 무슨 난리가 있었는지 자네는 모르지, 아마?

 에? 어제요?

대체 어제라는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걸 나한테 묻는다고 대답이 가능하겠나, 이 사람아.

자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나 저 아이에게 해보고 싶은 실험이 좀 더 있었는데 말야... 일단은 물러나야 겠군. 잘 있게.

 에? 해보고 싶은 실험....이라뇨?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뿐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를 쳐다보려는데, 갑자기 귀청을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진다.

침입자다!!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바텐더의 낯빛이 흙빛이 된다.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함께 비명소리, 무언가 부셔지는 소리 등이 한데 섞여 엄청난 소음이 된다.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해 답답했다. 더욱이 문제인 건 저 소음이 이쪽을 향해 점점 가까워져 온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구별이 잘 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 소리는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젠장!

들어온 문을 열고 나가려던 바텐더는 뭔가 본 듯 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덩치 둘에게 빠르게 무어라 명령한다. 그리고 다시 문을 닫더니 내가 누워있던 침대를 끌어다가 문 앞에 바리케이트로 막기 시작한다.

뭘 멍하니 보고 있어, 임마! 빨리 와서 이걸 도와!

 네? 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바텐더가 시키는대로 책장과 온갖 잡동사니를 가져다가 문 앞에 쌓아둔다. 문 밖에서 들리는 악다구니 소리가 제발 이쪽으로 향하지 않기를 빌지만 그건 말 그대로 바람일 뿐이다. 몹시 두렵게도... 이쪽을 향한 소리는 착실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걸 쓰게 되리라고는 생각치 못 했는데... 어쩔 수 없군.

바텐더를 돌아보니 그는 뭔가 이상하게 생긴 것을 조립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주 작은 총처럼 생겼는데 총구 대신 주사바늘이 달린 이상한 물건이었다. 그는 그걸 몇 개 만들더니 조끼에 달린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으아아악!

머리카락이 쭈볏선다. 정체 모를 습격은 이미 문 밖까지 이르렀다. 원래 이 방의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이들의 비명소리일까, 그게 아니면 습격자의 비명일까. 그러나 그 바로 다음 순간 엄청난 힘이 문을 강타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 원래 이 방을 지키던 이들이 어떻게 되었나 짐작할 수 있었다.

바텐더! 이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있다! 당장 나와!

......여자? 방금 들린 목소리는 분명 여자 목소리였다. 조금 낮은 목소리이긴 하지만 분명 여자 목소리였다. 게다가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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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칵-

무지막지한 소리를 내며 문짝 윗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처음에는 장정 너댓명이 달라붙어 문을 부순건가 싶었는데 문 너머 나타난 사람은 아까 낮은 목소리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여자 하나 뿐이었다. 뭔 여자가 저렇게 힘이 좋나 싶어 몹시 경악스럽다. 급조한 바리케이트는 삽시간에 무용지물이 되어 뒤로 주르륵 밀려난다. 바텐더를 불러 힘을 합해 침대를 도로 밀어붙여볼까 생각도 했지만 새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나까지 참담한 기분이 들어 곧바로 포기했다.

크가가가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마침내 침대가 밀려났다. 문이 열렸다! 아니, 열렸다기 보단 거의 뜯겨져 나갔다고 보는게 맞으려나.... 

드디어 또 만났군, 바텐더.

방금 전 그렇게 힘을 써댔으면서도 여자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녀를 보니 바텐더가 부들부들 떨며 두려워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문에 나타난 여인은 검붉은 형상을 하고 우뚝 서 있었다. 원래는 검은 옷이 분명했을텐데 옷에 물든 피로 인해 검붉게 보이는 거였다. 거기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는데다가 방금 전 어마어마한 괴력을 선보여놓고도 표정에 그닥 변화가 없는 것까지 보아 저건 사람이 아니라 터미네이터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물론 몸매는 호리호리한 게 전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를 닮지 않았지만 말이다. 여자의 손에는 야구배트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거기에 묻은 현란한 무늬는 아무리 봐도 빨간색 매직으로 칠한 건 절대로 아닌 것 같다.

여전히 바깥에서는 비명소리와 부산한 소리가 잔뜩 들려오고 있었지만 여기 이곳만 싸늘하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감돈다. 시선을 여자에게 고정한 채로 뒤로 슬금슬금 걷는다. 다른 건 몰라도 소란이라는 소녀만큼은 내가 지켜내고 말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만약 저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여인이 내게 달려든다면 난 1초라도 버틸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아니, 자신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버티는 게 불가능하다. 그러나 단 1초면 1초라도, 난 소란이를 지키고 싶었다. 이런 아비규환의 상황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이 불쌍한 아이를 지켜내고 싶었다.

바텐더, 멈춰. 허튼 짓 말고 이쪽으로 와라. 네가 협조한다면 죽이지는 말라고 아가씨에게 건의드려 보지.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방에 들어서며 날 한번 힐끔 본 여자는 그 이후로 곧장 바텐더에게 뚜벅뚜벅 다가가고 있었다. 방구석에 몰린 바텐더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여자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여어. 누구였더라. 예지라고 했던가? 뭐더라?

 예린이다.

 아아, 그래. 예린. 부산에서 아주 유명한 분이었는데 내가 깜빡했구만 그래.

부산? 부산에서 여기까지 바텐더를 잡으러 온 걸까. 바텐더라는 놈이 대체 얼마나 나쁜 놈이기에 저러는지 모르겠는데 부산에서 여기까지 잡으러 왔다고 한다면 정말 대단한 정성이지 싶었다. 게다가 예린이라니..... 무시무시한 인상치고는 꽤나 여성스러운 이름이다 싶었다. 하긴 모시고 있는 사람도 정말 여성스럽지. 그녀의 드레스 차림을 처음 봤을 때는 참 신기했는데 나중에는 그게 몹시 익숙...... 어라? 내가 왜 이러지? 저 검은 옷의 여자를 보고 있으면 있을 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머리 속, 그리고 가슴 속 어딘가에서 무언가 일렁이며 내 안쪽을 두드리고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자꾸 가슴이 답답하고 미어 터질 것 같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투항하고 날 따라와라. 그럼 여죄는 묻지 않는다.

바텐더 한 걸음 앞에 선 여자는 마치 칼로 겨누는 자세처럼 야구배트로 바텐더의 턱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애써 웃고는 있지만 이마에 삐질삐질 흐르는 땀이나 부들부들 떨리는 무릎으로 볼 때 그가 어느 정도의 공포심을 느끼고 있는지 가히 짐작이 갔다. 지금은 그녀가 날 협박하는 것이 아님에도 나까지 오줌을 지릴 정도의 무시무시함이 저절로 느껴진다. 바텐더는 딱딱한 목소리로 애써 답한다.

하핫. 굳이 날 잡아가려는 이유는.... 해독제라도 만들어 내라고 할 셈인가?

그러자 선글라스의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뭐, 그런 셈이지. 송 부장하고 대체 무슨 수작을 했기에 살아남았는지도 한번 캐보고.

 싫다면?

 아가씨는 굳이 네 놈을 살려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어. 데려오라고만 했지. 그렇다면 시체라도, 딱히 상관은 없겠지.

보이진 않지만 아마도 이번엔 내 표정이 저 바텐더처럼 하얗게 질렸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저건 대놓고 죽여버리겠다는 소리잖아?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하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아아, 어차피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눈은 안 보이는 구나. 암튼, 말투 하나 안 변하고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싶었다. 평상시에는 그다지 말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그녀가 한 번 입을 열면, 정말 무시무시하구나 싶었다가... 내가 저 여자 평소에 말 없는 걸 또 어찌 아나 싶어서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아까 눈을 뜬 이래 계속 느껴온 이 까닭 모를 불편함과 이질감은 내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무어라 표현은 못 하겠는데 분명 내 기억에 뭔가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기시감이 수시로 들고 시간과 공간이 뒤섞인다. 내가 머리를 감싸쥐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동안 바텐더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휴우. 알았다. 내 안전만 보장해준다면야 못 할 것도 없지.

그러자 바텐더의 턱을 치켜올리고 있던 야구배트가 뒤로 물러난다. 

좋아. 얌전히 있도록.

예린이라 불린 여자는 이제 이쪽을 돌아본다. 몸이 빳빳하게 긴장되었다. 이...이제, 내 차례인가? 그런건가? 바짝 긴장해서 얼어있는 나의 태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말투는 평이하기 그지 없었다. 그녀는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최한석 씨?

 에에?

........ 내 이름을 불렀다? 날 안다?게 다가 그녀의 말투는 그냥 말을 건 게 아니라 꽤나 걱정스럽다는 투였다. 나에게 한 걸음씩 다가오는 그녀의 손에 들린 야구배트를 본다. 피묻은 야구배트..... 아까 문을 부술 때 보여준 괴력을 담아 저 방망이를 휘두른다면 사람의 육신이 온전할 수 있을까....

자...잠깐만요!

내가 손을 내밀자 여자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저....저기, 절 아세요?

그러자 여자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물론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기에 표정의 절반은 감춰져 있었지만 얼굴 전체로 느껴지는 느낌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키가 훤칠한 그녀는 나와 눈높이가 얼추 비슷할 정도였다.

한석 씨. 무슨 말씀이신지.... 전 리사 아가씨가 보낸....

 리사? 그게 누구죠?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외국인은 없는데.....?

리사라니. 그건 대체 어느 나라 이름인 거야? 미국은 아닌 것 같고... 유럽이나 뭐 그런 쪽인가? 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몸을 홱 돌려 다시 바텐더에게 향한다.

네 놈 짓이냐?

 뭐...가?

 저 분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어.

내용이야 뭐 아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아까까지는 꽤 점잖은 말투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말투에서 명백한 적의가 느껴진다. 검은 옷 안쪽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살기가 느껴질 정도다. 바텐더는 부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 놈이 저렇게 된 건 내 책임이 아냐. 나도 모르겠다고. 까불다가 얻어 터지다보니 저렇게 된 거 같은데 자세한 건 나도 몰라.

 네 놈 약 때문이 아니라?

 하하. 내 약이 무슨 전지전능한 신의 약이라도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 약은 그저 기분이나 조금 좋게 만들어 주는 칵테일에 불과하다고.

 닥쳐!

여자의 발이 높이 들어올려지더니 바텐더의 허벅지를 밟는다. 

끄어어어억!!!

방금 들린 뿌드득- 하는 소리가 설마 사람 뼈 나가는 소리인건가? 저렇게 밟는 것만으로도 뼈를 나가게 할 정도라는 건가. 점점 이 여자가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더욱더 소란이 쪽에 바짝 붙어서 그녀의 공격을 대비했다. 바텐더를 잡으러 부산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그녀. 온 몸에 피칠갑을 하고 손에는 야구 배트를 들고 있는 그녀가 바텐더의 다리가 아니라 내 다리를 부러뜨린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아마 순식간에 해치우고도 남으리라.

다리 하나 정도는 서비스다. 저 분을 원래대로 돌리는 방법을 빨리 생각해내지 않으면 나머지 다리도 온전하기는 어려울 거다.

바텐더는 자신의 허벅지를 짓밟고 있는 여자의 다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다리는 땅에 뿌리 박힌 나무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알았다. 그러니 제발 이 다리 좀.....

 방법을 먼저 이야기해. 시간이 없으니 짧게 듣겠다.

 끄으으으....으으....

바텐더는 몸을 바싹 웅크리고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 하나가 뭔가 이상하다. 조끼 안쪽으로 들어간 손이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다. 아까 그가 챙겼던 무언가가 떠올라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예린! 조심해!

 네?

여자가 날 쳐다보는 사이, 바텐더의 한 손이 벼락같이 움직여 여자의 정강이에 무언가를 꽂아넣는다.

크윽! 너 이 자식!!

여자는 다리를 휘둘러 바텐더의 머리통을 차버리고 뒤로 물러났다. 여자의 정강이에는 아까 바텐더가 조립하던 그 주사기 총이 꽂혀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황급히 빼버리고 야구배트를 들어올렸다. 바닥에 나뒹구는 주사기 총에 매달린 앰플은 이미 텅 비어있었고 바늘 끝에는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 자식이!!!

그러나 바텐더는 이미 몸을 굴려 그녀에게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그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외쳤다.

하하. 최한석! 네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그럼, 난 이만 아디오스.

그는 부서진 책상 위를 기다시피 하여 문을 빠져나갔다. 밖에서는 엄청난 소란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바텐더가 빠져나가고 난 이 방은 다시 적막에 빠졌다. 배트를 들어올린 채 우뚝 선 여자는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저...저기, 괜찮으세요?

여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바텐더는 대체 뭘 주사한 걸까. 설마 독약 같은 건 아니겠지? 순간 겁이 덜컥 나서 그녀에게 달려가 부축한다. 온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 안색이 좋지 않아 자리에 눕혔다. 다리부터 시작해서 파드득거리며 경련을 일으키는 그녀를 어떻게 처치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이봐요. 예린 씨! 정신 차려요!

뺨을 두드려본다. 선글라스가 하도 짙은 색이라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조차 모르겠다. 선글라스를 벗기기 위해 손을 뻗는다. 내 손이 안경에 닿자 그녀의 손이 벼락같이 움직여 내 팔목을 붙잡았다.

.....지...마...

 네?

 벗기지 마.... 으윽......

내 손목을 쥔 그녀의 손은 무슨 조임쇠처럼 팔목을 조여왔다. 팔을 빼내려고 하는데도 쉽게 빠지지가 않는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힘이 세냐!

이럴 힘이 있으면 정신 좀 차려봐요. 어디가 안 좋아요? 말을 해봐요!

그나마 자유로운 한 팔로 어?틘?짚고 흔들어보지만 그녀는 낮은 신음만 흘릴 뿐 제대로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간신히 잡힌 손을 풀어내고 환자복 상의를 벗어 그녀의 허벅지를 단단히 묶기 시작했다. 바텐더가 주사한 약이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독사에 물린 사람에 대한 조치를 흉내내어 한번 해본다.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전혀 장담할 수 없지만.

나...나를.....

 네?

예린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무언가 말하기 시작했다. 귀를 바싹 대고 그녀가 말하는 소리를 들으려고 애썼다.

나....나를... 범.....

 범?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 마치 목이 졸린 사람처럼 한참 헐떡이다가 갑자기 상체를 일으켜 애써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얼른 몸을 받쳐주어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아까까지 하얗게 질려있던 얼굴이 다시 붉어지기 시작한다.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했고 그녀는 손을 품 안에 넣고 무언가 주섬주섬 찾았다.

....이럴... 수는....그럴 수는.... 크윽.... 아가씨에게....

무어라 계속 중얼거리고는 있는데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통 모르겠다. 오래 걸리지 않아 그녀는 품 안에서 무언가 꺼내들었다. 난 무슨 해독제라도 찾나 싶어 멀뚱히 보고 있다가 그녀가 꺼내놓은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그걸 뭐에 쓰시게요?

형광등의 빛을 받아 번뜩이고 있는 날 부분이 예리하기 그지 없었다. 그녀가 꺼낸 것은 한 뼘 정도 길이에 손가락 두 개 정도의 폭을 가진 단도였다. 끝이 좁고 날카로운 게 사람 어디 한 군데 찔렀다가는 그대로 푹 들어가기 아주 좋게 생긴.... 그런 느낌의 칼이었다.

이봐요. 예린 씨! 설마... 그걸로 저를....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니 시선이 어딜 보는지 통 모르겠다. 두려움에 질린 내가 뒷걸음치며 다시 소란의 침대로 다가가는 동안 예린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발걸음이 제대로 내딛어지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들린 흉흉한 물건 때문에 도무지 다가가 부축을 한다거나 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녀가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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