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김리사라는 애에 대해서 그저 귀엽구나, 이쁘구나, 깜찍하구나, 이렇게만 생각하고 계셨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네요.
자기 입으로 귀엽고 이쁘고 깜찍하다고 칭한 리사가 눈을 떴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뒤에 붙은 말이 마음에 좀 걸렸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거짓말.
정말이야.
과연 정말일까... 싶지만... 리사는 다른 것을 묻기 시작했다.
마리한테 이야기 들으셨다면서요?
응..?..... 으응..
'어떤' 이야기인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리사의 추궁은 이어졌다.
그리고 아까 저랑 예린 언니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보셨구요.
어? 어.... 그건 결코 일부러 그러려던 게....
알아요. 하지만, 속상한 건 어쩔 수 없네요. 제가 너무 방심했어요.
리사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서 몸을 돌려 바로 앉더니 팔을 쭉 내 뻗었다.
방심....? 그리고 속상하다니?
뭐랄까요. 제 원래 계획은 오빠가 제게 푹 빠져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다음에, 그 다음에야 제가 어떤 사람인지 고백하려고 했었거든요. 근데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묘하게 그 길이 어긋난 것 같아요. 마리도 그렇고... 예린 언니도 그렇고... 도움이 안 되네요. 도움이.
자기 입으로 계획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최한석을 자기 것으로 하려던 자신의 음모를 고백하는 이런 당돌한 아가씨를 보았나.
계획이라니.... 그렇게까지 해야할 필요가 있는 거야?
그러게요. 제가 생각이 너무 많았을까요?
다리를 까닥거리고 있는 리사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지혜의 청첩장을 숨기고 그 사이에 날 유혹했던 그녀다. 그와 동시에 평범하지 않은 인상의 아저씨들을 부리며 검은 정장의 여자를 수행원으로 데리고 다니는 그녀다. 동생과 알 수 없는 어떤 '링크'를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그녀. 그런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제가 하는 일은... 굳이 설명하자면 참 많은 사람들을 대하고 또 그 사람들 사이를 조율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러다 보니 사람을 대할 때 자연스럽게 대하지 못하는 버릇이 저도 모르게 생겨난 것 같아요. 오빠를 처음 봤을 때 생겨났던 감정이... 제게는 너무 낯선 것이어서 그걸 다루는 방법을 잘 몰랐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또 하고 그랬죠. 그게 결과적으로는 오빠로 하여금 저에 대해서 거리감을 느끼게 한 요소가 아닐까 싶어요.
리사야, 난 그저....
알아요. 오빠는 일반인이죠. 그냥 평범하고 좋은 분인데...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한, 제가 나쁜 아이였어요.
자칭 나쁜 아이 리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쁜 아이는 자신이 저지른, 혹은 앞으로 저지르려고 했던 일을 고백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돌리더니 아직 침대에 앉아있는 내 앞에 서서 날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과 마주한다.
저에겐 마리와는 다른 조금 특별한 '감'이 있어요. 딱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제 안에서는 그것만큼 확실하고 틀림없는 게 없답니다. 어느 정도로 확고하냐면.... 으음.....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이 말했다.
제 감에게 물어보아서 안전하다고 생각된다면 눈을 가린 채 건물 옥상에서라도 뛰어내릴 수 있을 정도에요.
대체 그런 감은 어디서 오는 건데?
느낌이랄까요? 가슴이랄까요. 한 가지 분명한 건 머리에서 하는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녀는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오빠를 처음 봤을 때의 감은 이 사람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감은 오빠가 절 어려워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네요. 이럴 때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리사야, 난 지금도.... 널 좋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알아요. 제가 오빠에게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오빠를 나무라고 싶진 않아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순간,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리사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다시 눈을 뜨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저 잘 웃고 음식 잘 만들고 청소 잘하는 여자애의 눈이 아니었다. 그건 뭐랄까. 굉장히 강인하고 흡입력 있는 눈이었다.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눈이 아니었다. 그 눈에 그대로 빠져 들어가 버릴 것만 같다. 어딘가 근원 깊숙이 닿아있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언젠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보았던 눈 같다.
그렇지만 전 오빠를 포기하지 않아요. 마리와의 약속 때문에.... 오빠를 독점하면 안되지만, 그런데도 오빠를 갖고 싶었어요. 이런 제가 이상한가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마음은 참 예쁘고 고마웠다. 그렇지만 마냥 그저 편하게 대하기만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나를 배려해서 먼저 그런 이야기를 솔직하게 해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제가 조금 어깨에 힘을 뺄 수 있게 되면, 다시 오빠를 찾아올게요.
리사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자세가 자세다 보니 내 얼굴은 그녀의 가슴 사이에 파묻히게 되었다. 뭉클한 두 언덕이 얼굴을 감싸는 건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이 그렇게까지 에로틱한 시츄에이션이 아니었다. 머리 위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쓸쓸했다.
.....그때까지는 마리로 만족해주세요. 그 아이는 저와 달리 아무 꾸밈없이 착한 아이니까요.
무슨 의미일까. 마리로 만족하라니. 리사가 말하는 건 대체..... 그러나 이런 나의 궁금증은 전혀 풀어주지 않고 리사는 곧 돌아갔다. 그녀가 남긴 향기가 방 구석구석 남아있는 것 같다. 그녀가 돌아간 후에도 내 얼굴에는 젖가슴의 부드러움이 꽤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다시 찾아오겠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다. 새벽에 바깥에서 차소리가 들렸지만, 내다보지 않았다.
출근하기 전 아침을 먹으러 오라고 부르는 소리에 앞집으로 갔더니 마리가 혼자 있었다. 우리 둘은 서로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라 그저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말없이 식사했다. 리사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날 향한 마리의 태도는 냉담하기 그지 없었고 난 그런 마리에게 말 한 마디 더 못하고 돌아왔다. 날 바라보는 싸늘한 눈빛의 마리를 보고 어쩐지 내일부터는 녀석과 같이 밥을 먹는 게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음 날부터는 앞집에 가지 않고 바로 출근 했다.
교생 생활은 2주차에 접어들어도 여전히 정신없었다. 1주차처럼 어리버리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매사에 임했지만 지애에게 하루에 한 번 이상의 잔소리는 꼭 듣게 되었다. 지애한테 혼나고 등나무 쉼터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노라면 부르지도 않은 비키가 나타나 속을 긁었다. 이 녀석은 나에게 들러붙는 것도 모자라 점심시간이면 나와 태근이 형, 현아와 은애가 먹으러 가는 점심대열에도 은근슬쩍 합류했다. 태근이 형과도 시시껄렁한 농담을 잘 주고 받았고 현아는 물론 심지어 은애하고도 잘 지내는 대단한 녀석이었다. 이렇게 지나치게 활달한 녀석이 지난 주에는 어째 한마디도 안 하고 있었는가는 정말 미스테리다. 그 점에 대해서 물어보면 비키는 입을 꾹 다물고 금방 딴 소리를 해댔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다.
목요일 오후, 지애가 지시한 실습실 대청소를 하고 나서 나온 쓰레기 봉투를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지애는 확실히 사람을 부리는 게 거칠었다. 소각장에 간신히 도착하여 던져넣고 돌아서려는데 내 귀에 뭔가 들렸다. 신경써서 듣지 않으면 거의 안 들릴 작고 여린 소리였다. 혹시나 싶어 소각장 뒤쪽을 보니 누군가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모두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학교지만 난 저 뒷모습을 알고 있었다. 월요일 날 무단결석을 하고, 화요일에 나와서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던 녀석. 그렇게 한참이나 자기 짝꿍을 걱정시킨 녀석 말이다. 난 가만히 다가가 어깨를 짚었다. 울고 있던 소란이 화들짝 놀라며 날 돌아보았다.
서...선생님...
어, 미안. 내가 방해했으려나?
아.. 아뇨. 아무 것도.
녀석은 눈가를 슥슥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난 아무 말 없이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녀석에게 들려주었다. 지난 번에 종로에 있는 노점에서 유진이가 사준 손수건이었다. 녀석은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다시 또 울기 시작했다. 소란이 안정된 건 내가 녀석을 옆에 놓인 폐걸상 하나에 앉히고 나서도 한참동안 더 울고 나서다.
이제 다 울었어? 후련해?
예에. 좀이요.
소란이는 손수건을 내게 돌려주려다가 많이 더렵혀진 걸 알고는 도로 거두어 들였다.
이거, 깨끗이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헤에. 세탁비는 따로 안 받는 거지? 니네 집은 세탁소잖아.
그제서야 소란은 풋하고 웃었다.
신속, 정확, 깨끗을 자랑하는 양씨 세탁소에서 손수건은 서비스로 세탁 후 다림질까지 해서 드려요. 걱정 마세요.
그럼 다행이고. 난 또 배달까지 해주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돈 달라고 할까봐 걱정했지.
그제서야 소란은 내가 무얼 말하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입을 가리고 한참을 쿡쿡거리며 웃었다. 작은 손가락을 날 살짝 가리킨다.
아, 진짜 그 때는 정말 놀랬다구요.
그게 놀란 거였어? 난 니가 나한테 응원까지 하는 걸 보고 이거 무서운 애구나 싶었는데...
에에.. 뭐, 배달 다니다 보면 별 일을 다 보니까요.
별 일....이라. 그럼 내가 그 꼬라지로 있었던 건 별 일 아니라는 뜻인가. 생각보다 더 무서운 녀석이구나, 이 녀석.
으음... 그랬구나.
그 분은 유진이 몰래 숨겨둔 애인?
에엑..... 애인이라...... 그....그럴까?
선영을 애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와 그런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지난 번 난데없는 전화 이후 지금까지 만나본 적도 없고 연락도 없다. 대체 어딜 간 걸까. 이런 그녀와 나의 관계를 남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아주 짧게 고민하고 있는데 소란이가 내 고민을 덜어주는 발언을 했다.
유진이한테는 비밀로 해드릴게요.
정말?
너무나도 흔쾌히 말하는 소란의 말에 반색을 했다가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유진이한테 비밀로 한다는 걸 무슨 선심 쓰듯이 말해?
그러자 소란이가 그 커다란 눈으로 날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말해도 돼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대답이 궁해졌다. 쩔쩔 매는 내 모습을 보며 소란이는 다시 쿡쿡거리며 웃었다. 난 조금 난감해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어디에... 암튼 그렇다는데?
아이, 참. 너무 유치한 말씀 마세요.
그런가? 나 때는 고등학교 때까지도 그런 말 맨날 썼는데.
소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 유진이가 선생님 보고 정말 엉뚱하다던데 정말이네요. 덕분에 제가 왜 울었었는지도 다 잊어버렸어요.
그래? 그럼 이제 울지 않을 테니까 내가 따로 이유를 묻지 않아도 되겠지?
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시 침통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가로로 저었다. 그리고 날 다시 쳐다보았다.
혹시 말이에요.
응.
선생님은 종교 있으세요?
종교?
예, 교회라던가 절이라던가.... 아니면 뭐 어디라도.
종교라. 나는 안 다니지만 우리 엄마는 휴일이면 산에 올라가 뒷산 백당 폭포 근처에 있는 절에 꼭 가곤 했다. 거기가 딱히 영험하다고 소문난 곳도 아니고 대단한 불상이 있는 곳이 아닌 곳인데도 엄마는 꼭 그 절만 다녔다. 어릴 때는 한 번씩 쥐어주는 약과에 혹해 몇 번 따라갔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산 오르내리는 게 귀찮아서 가지 않고 있다. 몇 달 전에는 명희라는 아가씨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교회에 끌려 다니며 찬송가를 부른 적도 있고 바로 앞집에는 마리와 리사라고 하는 아주아주 종교적인 색채 가득한 이름의 아가씨들도 살고 있긴 하다. 그러나 나 자체는 철저한 무신론자이다. 아주 어처구니 없을 때 소리 드높여 신을 찾기는 하지만 그저 말뿐이다.
난 신을 안 믿어. 엔지니어로서 증명되지 않고 실험이나 증거로 밝힐 수 없는 건 믿지 않는 주의야.
그러시구나....
왜 그래? 혹시...... 종로의 그 교회랑 상관 있는 거야?
그러자 소란이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그걸 어떻게 아세요?
말까지 더듬는다. 그 교회를 간 게 무슨 큰 일이라도 되는 건가?
응? 그거야 유진이랑 나랑 너가 그 교회 가는 걸 봤으니까 그렇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소란이는 잠시 후 뭔가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유진이가 종로에는 뭔 일로 갔나 싶었는데 선생님이랑 데이트하러 갔었군요? 그 기집애. 저한텐 선생님 이야기는 쏙 빼놓고 그냥 혼자 영화 보러 종로에 갔다가 절 봤다고 하더라구요. 거짓말까지 하다니... 이거 점점 수상한데?
어? 어... 그랬구나.
야단났다. 유진이는 아마도 나와 종로에 있었다는 걸 소란이에게 감추고 있었던 모양이다. 본의 아니게 지난 주 데이트(?)를 자백해버린 꼴이 되었다. 그러나 소란은 그것에 대해서 더 추궁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유진이 뿐만 아니라 선생님도 보셨군요... 하아. 거긴 말이죠. 저희 엄마가 계신 곳이에요.
어머니가?
의외의 이야기가 소란에게서 나오기 시작했다. 녀석은 약간 먼 곳을 응시하며 천천히, 드문드문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혹시 휴거라고 들어보셨어요?
휴가라면 몰라도... 휴거라니? 그게 뭐야?
그 쪽 사람들이 주장하는 건데요, 조만간 20세기가 끝나는 때가 되고 사람들이 타락에 빠져 허우적 거리면 예수가 재림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참된 사람만을 데리고 산 채로 하늘나라로 올라간데요.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소란의 설명을 듣고나니 그제서야 몇 년 전에 나라 전체를 들썩이게 했던 휴거 소동이 떠올랐다. 그 때 막상 날짜가 되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자 목사라는 놈은 자신들이 기도를 열심히 해서 휴거를 막았다며 하늘의 은총이라고 떠들었었지, 아마.
그런 미친 소리를 믿는 사람이 아직도 있단 말야?
네. 그 때를 위해서 지금 착하게 살고 바르게 기도하고.. 막 그래야 된데요.
무슨 선녀와 나뭇꾼에서 선녀가 애들 데리고 하늘 나라 가는 것도 아니고 그게 말이 돼?
그 사람들은 그렇게 철썩 같이 믿고 있단 말이에요. 우리 엄마도 그렇고...
아...
사이비라는 단어가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소란이의 어머니가 몸 담고 있다는 곳인데 대놓고 그렇게 말하기도 좀 무엇했다. 애써 좋은 쪽으로 말해본다.
착하게 살고 바르게 기도하는 거라면... 뭐, 좋은 거 아냐? 나도 그렇게 살아야 되는데 말야.
소란이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는 일도 다 때려치고 기도원 들어가는게 바르게 기도하는 거고, 가진 재산을 전부 바치는 게 착하게 사는 거라는 데요?
헙... 그건 좀....
사이비의 냄새가 풀풀... 아니, 아주 지독하게 났다. 소란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또 내뱉었다.
이미 통장이나 패물 같은... 들고 나가기 편한 건 이미 엄마가 싹싹 긁어가지고 나갔어요. 가게랑 집이 만약 아빠 명의가 아니라 엄마 명의로 되어있었다면 이미 한참 전에 다 팔아넘겼을지도 몰라요. 지금 우리 집은 엄마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분위기예요.
소란의 말투는 마치 세상을 아주 달관한 사람처럼 들렸다. 노숙하고 겪을 거 다 겪어본 이의 체념같이 들리기도 했다.
전 엄마한테 다른 건 몰라도 통장이라도 돌려달라고 찾아간 거였는데 도리어 저까지 잡아두고 입교하라고 난리를 치는 통에 학교까지 빠지고 그랬어요. 나오는 것도 아주 겨우....
그랬구나....
소란의 갑작스러운 결석에 유진은 물론 지애도 꽤 걱정했던 기억이 났다. 난 그저 몸이 어디 안 좋은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건 정말 안이하게 생각한 거였다. 이런 문제가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좀 있으면 가게 달세도 줘야되고 세제랑 용매도 다 들어오는데... 우리 아빠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고.... 너무 답답하고 힘들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요.
안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보아온 바로 늘 밝고 환한 표정의 아이였다. 벌거숭이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와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그 와중에도 대금을 받아 챙기려는 악착같은 면이 있기도 한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울고 있을 정도면 얼마나 상심했을까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본인의 어머니가 그런 답도 없는 곳에 몰두해 있다면.... 나라도 미쳐버릴 테다.
그랬구나... 미안하다. 네가 그렇게 힘들어 하고 있는 줄 전혀 몰랐어.
아뇨. 선생님이 미안하실 필요 없어요. 유진이도 전혀 모르는 일인 걸요. 전 남에게 폐끼치는 거 싫단 말이에요.
폐라니... 친구잖아.
어차피 유진이가 우리집 돈 대신 내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정 알면 괜히 마음만 아플 거고... 저도 유진이를 좋아하니까 걜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소란의 말투는 지극히 어른스러웠다. 유진이도 어른스럽기는 하지만 그 녀석은 좀 육체적인 사고방식으로 어른스러운 녀석이고 이쪽 소란이는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했다. 어째 열일곱 살 여고생이 아니라 삼사십은 먹고 집안의 살림의 전반을 책임지는 아주머니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기분이다.
그...그러니?
근데 좀 궁금해졌다. 자신의 친한 친구인 유진이에게도 못 하는 이야기를 왜 나에게 하는 걸까? 내 생각을 읽은 건지 소란은 날 보며 말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선생님한테는 이런 이야기가 술술 나오네요. 왜 그럴까요?
글쎄... 나야 모르지.
저도 모르겠어요.
서로 마주보고 있던 우리는 조금 멋쩍어 웃어버렸다. 소란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제가 선생님이 애인 만나러 다니신다는 거 비밀로 해드리는 것처럼요, 선생님도 유진이한테 제 이야기는 꼭 비밀로 해주세요. 약속하실 수 있죠?
그래, 알았어.
소란이의 작은 손가락이 내 손가락과 잠시 엉켰다가 떼어졌다. 문득 녀석의 손목에 매직 같은 걸로 뭔가 씌여있는 게 보였다. 그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소란은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내게 학생으로서의 인사를 하고 나더니 먼저 가버렸다. 나 역시 교무실로 돌아갔다. 쓰레기 버리러 난지도까지 다녀온 거냐는 지애의 질책을 들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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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 태근이 형과 은애가 담당 사수들에게 붙들려 있느라 현아와 단둘이 퇴근을 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학 쪽으로 가고 있는데 등 뒤에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에 가는 선남선녀분. 불청객이 끼어도 되겠습니까?
어머, 비키. 어서 와.
현아가 비키를 반겼다. 나를 쭉쭉빵빵 밝히는 색정남으로 만들어 버린 이후 비키는 우리 그룹에 아주 성공적으로 끼어 들었다. 현아는 비키의 활달한 성격이 굉장히 부럽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현아도 충분히 수다스럽고 밝은 성격이었지만 그건 나랑 단둘이 있거나 여자들 끼리 있을 때만 발현되는 성격이었다. 자기 앞에 남자가 둘 이상이 되면 현아는 무척이나 조용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여자가 둘이었고 현아의 목소리는 밝았다.
비키도 이쪽으로 가?
Of course. This is a shotcut on my way home. often have to use passing road.
아오, 저 녀석 또 시작이군. 난 발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현아는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비키는 발음 진짜 좋다. 부러워. 원어민이니까 당연하겠지? 나도 그 정도로 영어를 잘 했으면 좋을텐데.... 아무래도 네이티브 스피커 만큼은 어렵겠다.
헤에. 현아는 수학과잖아. 근데 영어도 해야 돼?
응. 요새는 취업할 때 영어도 필요하다고 해서.
휘유. 한국 대학생들은 힘들겠네.
현아와 비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다. 비키가 못 마땅한 나는 그 두 사람과 조금 떨어져서 걷고 있었다. 비키가 뒤를 돌아보더니 내게 한 마디 했다.
어이, 한석은 왜 그렇게 따로 오고 있어?'
내가 뭘.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너무 정답이라 따로 대답하기 싫었다. 대답을 않고 있자니 비키가 내 옆으로 와서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현아랑 단둘이 이상한 짓 하려고 했는데 내가 끼어 들어서 짜증났구나?
아니요.
그게 아니면.... 사실은 나한테 너무 반해버려서 할 말을 잃었구나? 그치? 응?
그건 아니거든!
전력으로 거부할 필요가 있는 언사였다. 이쪽은 버럭 화를 내는데도 실실 쪼개는 녀석을 보고 있노라니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둘은 사이가 좋구나.
응?
현아는 부럽다는 듯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난 비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답했다.
이게 좋아 보여?
응. 내가 보기에는.
너 시력 굉장히 안 좋구나...
내가 진심으로 현아의 시력을 걱정하고 있는데 어쩐지 비키의 표정이 이상했다. 황급히 찌르던 손가락을 치우며 물었다.
어, 미안. 내가 너무 세게 찔렀나?
아, 아냐. 이런 게 사이가 좋은 거겠지?
응? 아마도.
응.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는지 비키는 표정이 굳어 지더니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가버렸다. 현아와 난 서로 마주 보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저 녀석은 여전히 미스테리한 놈이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난리법석을 피우질 않나 갑자기 자기 혼자 기분이 다운이 되어 먼저 휑하니 가버리지 않나. 저 녀석은 데리고 꼭 정신병원에 가봐야 한다. 거기에 쳐 넣겠다는 게 아니라 조울증 진단이라도 받아보게 하려고 말이다. 분명 판정이 나올 게 뻔하다.
남겨진 현아와 나는 원래 계획대로 도서관에 들렸다. 필요한 책과 자료를 찾느라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 집으로 가는 길도 함께 하게 되었다. 예의 그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자는 현아의 제의에 나는 상당히 주저해야만 했다. 그 아줌마에게 비키로부터 돈을 받아다 주기로 약속했는데 그건 아직도 요원한 꿈이니까. 당장 내 3만원도 못 돌려받았구만. 그래서 내가 매운 걸 못 먹는다는 점을 들어 우리 동네에 있는 단골 기사식당으로 갔다. 조금 허름한 편이긴 하지만 맛은 좋다고 설명하며 가게로 들어가려는데 정말 의외의 인물을 딱 마주치고 말았다. 이 녀석을 보는 순간 내 머리 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오늘 무슨 마가 낀 날이려나.... 비키에 이어서 이 녀석이라니.'
오! 한석 군! 이게 얼마만이야?
다름 아닌 박효진이었다. 난 한숨을 살짝 내쉬고 인사를 받아주었다.
효진아. 니가 여긴 어쩐 일이야?
지혜 결혼식 때 보고 지금 만나는 거니 거의 이주만에 보는 셈이다. 녀석은 몸에 딱 달라붙는 가죽 슈트 차림에 옆구리에는 헬멧을 끼고있었다. 문득 전에 태근이 형이 말했던 오토바이 이야기가 생각났다.
안 그래도 너 만나려고 니네 집에 갔는데 없더라구. 그래서 쪽지 붙여놓고 그냥 가려다가 배가 고파서 밥이나 먹고 가려고 여기 왔지. 그 때 너랑 여기서 밥 먹었는데 맛있었잖아.
아아, 그랬지. 이사 간 지혜를 떠나보내고 밤새도록 이 녀석과 엉킨 그 다음 날. 여기에 와서 허기를 채웠다. 원래 맛있게 잘 하는 집이기도 하거니와 체력을 많이 소모하고 나서 먹는 밥이 어찌나 꿀맛이던지. 문득 옆에 있는 현아가 의식되었다. 효진이 이 녀석, 무신경하게 현아 앞에서 또 이상한 소리 하는거 아닐까.
어떻게 이렇게 딱 만나냐? 넌 대체 삐삐도 안 가지고 다녀서 찾아다니기가 힘들어...
효진은 뭐가 그리 기쁜지 신이 나서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착한 짓을 많이 해서 하늘이 상을 주나 보다. 하하.
......그럼 난 지은 죄가 대체 얼마나 많은 걸까. 널 여기서 다 보고....
응?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내가 중얼거리는 광경을 현아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난 그저 밥이나 빨리 먹고 집에 들어가 쉴 생각이었는데 이 녀석을 만난 이상 또 무슨 사건에 휘말려 들지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물론 효진은 그런 내 모습은 전혀 안중에도 없이 지 할말만 한다.
이번 토요일에 시간 되지?
윽. 녀석의 말투는 숫제 맡겨놓은 시간 찾으러 온 사람의 말투다.
오랜만에 만나서는 다짜고짜 데이트 신청이야? 안 돼. 나 바빠.
내가 너랑 데이트? 푸하하. 얼, 우리 한석 군. 많이 건방져졌는데?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넘기는 녀석을 보고 있노라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숫제 여장한 태근이 형과 대화하는 느낌이랄까.
건방은 무슨.... 무슨 일인데 그래?
응. 별일은 아니고 오랜만에 지혜나 만나러 갈까 하고 말야.
지혜....?
요 근래 잊고 있던 이름이 나왔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웃고 있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걔 신혼집이 수원 어디라는데 혼자 집들이 가기는 심심해서 그러지. 너라면 같이 가도 지혜가 좋아할 거야.
남편도 있을 텐데 괜찮겠어?
번듯하게 생긴 얼굴로 축하를 받고 있던 그의 모습. 감히 내가 마주할 수 있을까.
뭐, 어때. 친구들이 놀러간다는데... 행여나 남편이 너랑 지혜 사이를 의심하면 니가 내 남친이라고 말하면 되지.
황급히 손을 뻗어 극렬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쿨럭. 그건 좀 사양하고 싶은데....
뭐야, 이 자식아. 영광으로 알아야지.
간만에 효진의 헤드락을 맛본다. 태근이 형도 그렇고... 이 남매는 집에서 가정교육으로 헤드락 거는 법이라도 배우는 건가, 안 그래도 딱 붙는 가죽슈트 차림인지라 그녀의 몸매는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었고 거기에 내 머리가 꾹꾹 눌러 담기고 있었다. 현아가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서둘러 녀석을 밀어내고 자세를 바로했다. 내가 전력으로 밀어내는 게 좀 이상했는지 효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튼 별 일 없으면 같이 가자.
별일이야 없기는 한데.... 오전 중에 수업이 있어서 말야.
아, 맞다. 너 우리 오빠랑 같이 교생한다면서? 이야기 들었어.
대체 어떤 이야기를 무슨 식으로 들었는지 궁금하지만 차마 물어보진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따졌다.
오냐. 나도 들었지. 니가 태근이 형한테 나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 말이야.
내가? 뭐라 그랬는데?
자기가 한 소리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저 천연 둔탱이를 보았나! 어쩔 수 없이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그 호칭을 내 입으로 꺼내야만 했다.
얼빵이라고 했다면서! 게다가 지혜 일까지도 미주알 고주알....
이쪽은 발끈해서 소리치고 있는데 효진은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 내가 그랬던가. 오, 확실히 어울린다. 얼빵이 최한석.
뭐, 임마?! 아오, 진짜 이게.
지가 했던 말도 안중에 없는 효진은 내가 휘두르는 팔을 과장된 동작으로 피하며 옆에 세워 둔 오토바이로 다가갔다. 오토바이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미끈하게 생긴 게 무척 빠른 속도로 달리는 종류 같았다. 그녀는 거기에 올라타더니 헬멧을 쓰고 시동을 걸었다. 낮으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엔진소리가 조용하게 울려 퍼진다. 바이저를 밀어 올린 효진이 엔진소리에 지지 않게 소리지르듯이 말했다.
그럼 토요일날 니네 고등학교 앞에서 기다릴게. 끝나면 같이 가자.
잠깐. 설마 그 오토바이를 둘이 타고 가는 건....
설마, 오빠 차 빌려서 가자. 오빠가 차 안 빌려주면 니가 좀 대신 어디서 차 좀 빌려와라.
내가 왜!
아, 그리고 마리도 데리고 올 수 있으면 와. 걔도 애가 재미있어서 같이 가면 재밌겠다.
그러니까 내가 왜 차를 빌리냐고!
그 옆에 계신 분은 혹시 새로 생긴 이거?
새끼 손가락을 들어보이는 효진.
얌마! 너 진짜...
하하. 한석이 좋은 녀석이에요. 잘 해보세요.
내가 대폭발, 빅뱅을 일으키기 전에 효진은 현아에게 덕담 아닌 덕담을 던지고는 그대로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녀석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 보였지만 그저 웃어 넘길 따름이었다. 내가 그녀를 향해 지른 소리는 거창한 엔진소리에 고스란히 묻히고 말았다.
어휴, 진짜. 저게....
막무가내 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버린 것을 투덜거리고 있노라니 옆에 있던 현아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워낙 순식간에 정신없이 효진에게 휘둘리다보니 현아를 소개할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누구야, 저 사람은?
아. 있어. 아는 녀석이야.
녀석?
응. 보다시피 하는 짓거리가 여자라고 부르기는 민망한 타입이라서 말야. 내 안에서는 불알친구로 대하고 있지.
불.....읏흠. 굉장히 친한가 보네?
그제서야 내가 조금 민망한 단어를 사용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녀석에게는 내 불알을 맡긴 적이 있으니 아예 틀린 표현도 아니다만 그걸 현아에게 내색할 수는 없다.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아, 어쩌다 보니. 참, 저 녀석이 태근이 형 동생이야.
아, 그래? 어쩐지 아까 태근이 오빠 이야기도 나오던데.
응. 가만 보면 말야. 생긴 건 전혀 딴판인데 하는 짓은 똑같지 않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과도하게 자신감을 갖는 거 말야.
현아가 입을 가리고 살짝 웃었다.
후후. 좀 그럴지도?
좀이 아니라 진짜 그래. 아까 헤드락 거는 거 봤어? 둘이 어렸을 때는 분명 프로레슬링하면서 놀았을 거야. 아이구, 내 목이야.
뒷목잡고 넘어가는 시늉을 하자 현아가 내 모습을 보며 깔깔 웃었다. 우리 둘은 식당으로 들어가 저녁을 함께 하고는 다시 현아 집으로 향했다. 어쩌다 보니 요새 현아를 집에 데려다 주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런 건 태근이 형한테 맡겨야 되는데....쩝.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주로 이야기했고 현아는 듣고 있었다. 집에 거의 다 도착할 때 쯤 뭔가 이야기를 꺼내려고 한참 망설이던 현아가 이내 결심한 듯이 내게 물었다.
저기 말야, 한석아.
응?
아까 그 효진 씬가... 하는 분이랑 토요일날 가는 거.
응.
지혜라는 분 만나러 가는 거 맞지?
어. 그런데?
네가 예전에 좋아했다던?
말문이 턱 막힌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무신경하기 짝이 없는 남매 중 오빠께서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지혜 결혼식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현아는 그걸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그랬지.
아직도 좋아해?
그럴 리가. 지금은 시집 갔잖아. 효진이가 워낙 친했던 사이라 보러 간다고 하니까 그냥 같이 가는 거지.
그러니?
현아는 따로 더 묻지 않고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집에 다 도착한 그녀를 들여보내고 발걸음을 돌렸다. 나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많이 쓰는 현아를 보며 조금 불안한 감이 들었다. 이러다 태근이 형을 도와주려던 내 호의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또 이내 고개를 젓는다. 내가 대체 뭐라고.... 요즘 들어 소위 '자뻑'이 심해진 것 같다. 아는 여자들이 좀 많아졌다고 건방져 졌다. 한숨을 내쉰다.
그러다 늘 가던 길에서 조금 벗어나 근처의 공원을 가로지르는 코스로 가기로 했다. 이쪽이 좀 더 빠르다. 슬슬 어두워지고 있어서 공원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을 머리 속으로 정리하며 걷고 있는데 앞 쪽에서 뭔가 큰 소리가 나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다투고 있는 게 보였다. 길 한복판에서 그러고 있기에 둘러 가기도 뭐했다. 발걸음을 좀 늦추었지만 다가가지 않을 수 없다. 가까이 가자 남자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너랑 이제 끝났다고 했잖아.
남자는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앞에서 훌쩍이고 있는 여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희승아! 제발....
이상한 광경이었다. 항상 너무 쾌활하다 못해 그게 지나쳐서 옆에 있는 사람까지 곤란하게 만드는 게 특기인 아가씨가 저리 서글프게 울고 있는 광경이라니.
너, 다시는 찾아오지 마. 몇 번을 말해야 겠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끝나.... 응? 다시 한번만 생각해봐.
남자는 여자를 밀어내고 있었고 여자는 남자의 팔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생각이고 자시고... 내가 다 말했잖아.
그냥 싫어졌다는 게 말이 돼? 그걸 듣고 그냥 물러나라고?
그럼 어쩔래? 너 진짜 나랑 결혼이라도 할 생각이야?
결혼........?
여자가 머뭇거리고 있자니 남자가 몰아세운다.
것봐. 너도 확답을 못 하잖아. 나 이제 복학해서 3학년이니까 학교 아직 2년이나 남았어. 그런 다음에 취직하고 자리잡고 그럴려면 훨씬 더 걸린다고. 너 그때까지 나 기다려줄 수 있어?
그거야.... 못 기다릴 거 없잖아. 니 군대 간 것도 기다렸는데.
그건 고맙게 생각하지만.... 부담 돼. 너 보는게 더 이상, 그러게 누가 기다리라고 했냐고.
희승아! 나....난... 널 위해서 그런 것 까지 했었는데....
누가 하라고 강요라도 했어?
남자의 착 가라앉은 말투와 대조적으로 여자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어쩌지 못 하고 있었다. 여자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계속 애타게 불렀지만 남자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만. 너 이제 이 동네 그만 왔으면 좋겠다. 내 이야기는 끝났어. 돌아가.
희승아아.....제발.....흑흑흑....
우뚝 선 채로 펑펑 울고 있었지만 남자는 그런 그녀를 두고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났다. 성큼성큼 걸어 나를 스쳐 지나갔다. 태근이 형만큼이나 덩치가 커다랗고 머리가 짧은 게 얼핏 보면 조폭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인상이었다. 대화를 미루어 보아 저게 그 말로만 듣던 군화 거꾸로 신은 상황이라는 건가 싶었다.
난 갈팡질팡 했다. 저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그녀를 그대로 두고 반대 반향으로 돌아 가기는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저런 상황에서 누군가 아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것도 꽤나 고역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지 못하고 발걸음을 채 떼지 못하고 있는데 그녀가 내 생각보다 더 빨리 움직였다. 몸을 돌려 이쪽을 향해 걸어오던 그녀는 날 알아보고 우뚝 멈춰섰다. 평소에 실없는 웃음으로 가득하던 그 얼굴이 눈물 범벅이 되어 있는 건... 참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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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있는 여자가 누군지 모르는 분은 없겠죠?
아, 안녕, 비키?
뻘쭘하기 그지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딱 마주쳤는데 인사를 안 하기도 어려웠다. 우뚝 선 채로 날 빤히 보던 비키는 눈가를 빠르게 훔쳐냈다. 날 보고 한숨을 푹푹 쉬며 중얼거렸다.
........하아. 정말 타이밍 최악이네. Holy shit!
뭔지는 모르겠지만.... Holy 가 들어갔으니 뭐 좋은 거겠지?
그래. 니들 표현대로 졸라 좋은 거야. 졸라게.
그녀가 크게 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하아. 어째 넌 이렇게 눈치가 없냐? 전에 분식집에서도 대충 그냥 넘어갔으면 됐을 테고.. 지금도 그냥 날 모른 척 하고 지나갔으면 이렇게 서로 뻘쭘하지도 않을 거 아냐.
그..그런가?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젠장. 나도 알았으면 진작 그냥 다 무시하고 가는 건데.... 그런데 이미 너무 늦었을려나. 비키는 내게 다가오더니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내 흉한 모습을 본 죄로 술을 사라.
뭐? 내가 왜.
넌 여자가 울고 있으면 따뜻하게 안아서 위로해 줄지도 몰라? 이런 매너 없는 녀석 같으니...
다른 건 모르겠고 니 입에서 매너라는 소리가 나오니까 왜 이렇게 반대를 하고 싶을까.
됐고, 얼른 가자. 저쪽에 가면 닭 맛있게 튀기는 데 있어.
......벌써 결정 난 거냐.
원래의 표정이 어느 정도 회복되긴 했지만 아직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그녀를 두고 그대로 가버리기도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옆 동네의 한 치킨 집으로 들어간다. 닭 한 마리를 양념 반 후라이드 반으로 시켜놓고 500CC 두 잔을 시켰다. 앞치마를 두른 아줌마가 우선 맥주부터 가져다 주었다. 비키와 한국말로 반갑게 인사를 하는 걸로 보아 이 집은 단골이긴 하지만 그 뭐다냐, 소위 외국인 디씨는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다. 맥주잔을 가볍게 부딪히고 시원하게 한 모금 넘긴 후 케?과 마요네즈가 뿌려진 양배추를 포크로 뒤적거렸다. 비키는 내게 물었다.
다 봤냐?
얼추.
비키의 깊은 한숨....
하아.... 보다시피 차였다. 그러니 이 누나 위로 좀 해줘봐.
누나는 무슨 놈의....
누나가 싫어? 그럼 언니?
됐거든.
형은 사양할게.
안한다고!
실없는 소리를 다시 지껄이기 시작하는 걸로 봐서 다소 괜찮아진 모양이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 한편에 자리한 수심은 여전했다.
후우. 이제 정말 끝인가...
.......
대놓고 끝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더 매달리면 나만 비참해지겠지?
내가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니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에 전역했어. 그런데 전역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헤어지자 그러더라. 충격 먹고 일주일동안 제대로 정신 못 차리고 있었어. 그러다 다시 생각해보라고 계속 이야기하는데도.... 이미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더라. 사실 뭐... 나랑 제대로 사귄 것도 아니긴 했고. 나만 일방적으로 쫓아다녔던 거지만 뭐.
금발 아가씨가 들려주는 이야기치고는 너무 흔해 빠진 이야기였다. 그 산적 같이 생긴 놈이 어디가 좋다고 비키가 쫓아다닌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법이니 그건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전형적인 것과는 달리 내가 아는 비키의 성격과는 좀 매치가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그녀 성격이라면 누굴 좋아서 쫓아다니거나 하는 게 어울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쳤다. 하기야, 내가 그녀를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이제 얼굴 알게된지 2주 정도 되었을 뿐이다. 대화를 나누게 된지는 일주일이 조금 되었고... 워낙 스스럼 없이 구는 그녀이기에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그녀와 내가 가깝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비록 상당히 귀찮고 짜증나는 타입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녀는 턱을 괸 채로 창 밖을 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역시 남자들은 작고 귀여운 타입을 좋아하려나?
글쎄.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을까.
넌 어때?
나?
응. 너. 최한석.
나야 뭐.......
갑작스러운 취향 질문에 바로 대답을 못 했다. 나와 밤을 보냈던 여자들을 떠올려 본다. 풍만하고 글래머한 지혜. 고양이 같고 날카로웠던 명희. 몇 번 몸을 섞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는 효진. 검은 옷으로 자신의 본심을 가리고 있던 선영. 밝게 웃는 얼굴과는 다르게 어쩐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리사까지... 모두가 각자의 개성과 외형이 뚜렷한 편이라 어느 누가 내 취향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웠다.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있노라니 비키가 먼저 선수를 친다.
아, 맞다. 너는 가슴 크고 빵빵한 타입 좋아한다 그랬지? 영계는 별로라고 그랬고?
.....좀 작게 말해주면 안 될까? 이렇게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공장소에서는?
뭐, 어때. 남자가 가슴 좋아하는 게 무슨 흉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안 그래도 니는 가만 있기만 해도 튄다고.
난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 이야기를 하느라 바빠 여기에 신경 쓰는 사람은 드물었다. 간혹 가다 금발의 비키를 향해 신기하다는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있었지만 잠깐 뿐이었다. 그녀의 이야기까지 귀기울여 듣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는 동안 비키가 내게 잔을 들어올려 보이곤 남은 맥주를 싹 비워냈다.
넌 무슨 선생님이 되어서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고 다녀?
은근한 말투로 타박을 해보지만 전혀 먹히질 않는다.
선생은 개뿔. 내 전공은 미디어영상이라고. 근데 외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덜컥 제의 받고 계약직으로 회화 선생 하고 있는 거야. 계약 연장 안 되면 바로 짤리는 거고.
그...그러냐.
나에 비한다면 차라리 니들처럼 교생 와 있는 애들이 더 비전 있어. 최소한 니들은 나중에 임용고시라도 볼 거 아냐? 우린 그런 거 일절 없어. 귀화라도 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다른 건 모르겠는데 니가 귀화시험 치면 바로 붙겠구나. 최소한 언어의 장벽은 없을 듯 싶어.
비키는 피식 웃고는 점원을 불러 맥주를 더 시켰다.
암튼 니 취향이나 빨리 말해봐.
알아서 뭐하게?
국 끓여 먹을려나?
........최소한 스프라고 해라. 위화감이 없게.
거듭 놀라는 거지만 이 녀석의 말투는 진짜 한국 사람 이상으로 속어나 관용어에 강했다. 한국에 10년 가까이 살고 있다고 하니 당연할 걸까. 그러나 취향 타령을 하던 그녀는 날 향해 의외의 이름을 꺼냈다.
......현아는 어때?
갑자기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사소한 건 신경쓰지 말고, 현아는 어때? 마음에 들어?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늘 현아에 대해서 과도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나에게 현아에 대해 묻는 경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마음에 들고 자시고 할 게 어디있어. 그냥 동기 사이인데.
어라. 정말 아무 생각 없어? 여자로서 말야.
어째 질문이 집요하다.
왜 꼭 남자 여자랑 있으면 엮어야 되냐?
아, 진짜 말야. 아무 생각 없다고? 정말? 요만큼도?
마치 취조라도 하는 것처럼 비키는 테이블 너머로 몸을 숙여가며 나에게 바짝 들이대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기세에 놀라 몸을 조금 뒤로 물리고 생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방금 V자로 파인 상의 가운데서 언뜻 보였던 깊은 계곡은 얼른 머리 속에서 지워버린다. 날 향한 취조에 반문으로 답한다.
왜 그렇게 현아한테 신경 쓰는 건데?
........흐음. 내가 이유를 말해주면 말이야. 내 부탁대로 해줄래?
어라, 이런 대화를 전에도 어디서 해본 거 같은데.
니 이유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내가 부탁까지 들어줘 가며 들어야 되냐? 언제 내가 물어보기나 했어?
방금 물어봤잖아. 내가 왜 그렇게 현아한테 신경쓰냐고.
......그렇긴 하지.
아오. 이 녀석.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교묘한 함정을 만들어 파고 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다른 게 손에 잘 잡히지 않는 난 결국 한 발 물러섰다.
부탁이 뭔지는 일단 들어보고 결정할 테니까 말야, 이유나 먼저 말해봐.
그러나 비키도 보통 고집이 아니었다. 아니면 일찌감치 나의 성향을 파악했거나.
부탁을 들어준다고 먼저 말해. You first go.
그래. 이런 실랑이를 예전에 선영이랑도 했었다. 하긴 그때도 난 이기질 못 했다.
아, 알았어. 대신 너무 무리한 부탁이면 거절 할거야. 빨리 이유를 말해봐.
휴우. 알았어. 아까 내가 희승이... 그러니까 이제는 내 전 남친이 말야.... 걔가 날 찬 이유가 사실은 따로 있어.
그랬던가? 그런데 걔 이야기는 왜...
희승이가 좋아하는 애가 바로 현아야.
뭐?
시큰둥한 말투로 현아 이름을 내어놓는 비키를 보며 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비키는 찬찬히 설명했다.
희승이도 수학과거든. 아마 현아랑 동기일 걸? 군대 다녀오느라 학년은 좀 다르겠지만.
그랬냐....
내가 2학년 때 연합동아리에서 희승이를 만났는데 그 때 걔는 신입생 때부터 현아한테 완전 꽂혀서 맨날 쫓아다니고 그러고 있었어. 현아가 받아주지 않아서 다들 포기한 줄 알고 있지만 적어도 내가 고백을 할 때도 아직 마음이 있었어.
모르긴 몰라도 희승이라는 녀석이 그냥 평범하고 단순하게 쫓아다닌 것만은 아닌게 분명했다. 그래서 현아가 덩치가 커다란 사람을 싫어한다고 했던 걸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봐봐. 전역하고 나서 다시 학교 복학 해야 되는데 전역하고 나서 자취방을 하필 그 동네에 잡은 걸 보라고. 거긴 현아가 사는 동네 잖아. 누가 그걸 모를 줄 알고?
목소리가 점차 격해진 비키는 살짝 눈물이 고인 눈을 질끈 감았다. 먼저 좋아한 사람은 이렇게 된다. 손해 보고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몫을 감당해야 한다. 나도 지혜에게 성급히 고백하고 그랬었다.
난 내내 현아가 대체 어떤 아이인지 궁금했어. 그래, 솔직히 가끔 현아 뒤를 밟을 때도 있었어. 희승이한테 무슨 소리 들을지 몰라 대놓고 말을 걸거나 한적은 한 번도 없지만.... 현아가 자주 가는 분식집에 단골로 가기도 하고 수학과가 있는 이과대 건물 근처도 가보고 그랬어. 근데 마침 우리 학교에 교생으로 오길래 정말 깜짝 놀랐지.
그럼 그 때 현아한테 물어보지 그랬어?
비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먼저 들이대면 모양새가 이상하잖아. 과목이 겹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냥 말없이 눈여겨 보고 있었어. 그러다 니가 현아랑 친한 거 보고 너랑 엮이면 현아랑도 친해지리라 생각했지. 그 때 분식집에서 너랑 마주치고 나서 정말 잘 됐구나 하고 따라간거야. 니가 하도 얼빵하게 굴어서 들러붙기도 수월하더라.
이제야 비밀이 풀렸다. 이 싹퉁머리 부족하기 짝이 없는 금발 민폐녀가 나한테 굳이 들러붙은 이유 말이다.
하아...... 그런 이유라면, 그리고 니 성격이라면 나를 빼고 현아한테 바로 들러붙지 그랬냐. 뭐하러 그렇게 번거롭게....
그러자 비키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손가락을 들어 날 척 가리켰다.
재미있잖아?
뭐, 재미?
어이가 없었다. 지 남친이 좋아하는 여자와 가까워지려고 그 여자랑 친한 남자를 골려 먹겠다는 발상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저게 아메리칸 스타일.... 아니, 호주 스타일이냐. 단단히 따지며 그동안 녀석에게 휘둘린 나 자신에 대한 피해보상을 하라고 주장할 참이었는데 마침 치킨이 나왔다. 내가 포크를 들고 뒤적거리고 있으려니까 비키가 팔을 걷어붙이더니 다리 하나를 쥐어 내게 내민다.
쪼잔하게 뭔 놈의 포크야, 포크는. 그냥 손에 들고 팍팍 먹어.
조금 뜨겁기는 하지만 화끈하게 치킨 조각을 손에 들고 먹기 시작했다. 맥주잔은 이미 비었다. 비키가 맥주를 추가했다. 맥주가 새로 날라오자 그녀는 잔을 눈높이까지 들어올리며 말했다.
니가 너무 심한 부탁은 하지 말아달라고 통사정을 하니 내가 잘 생각해보고 나중에 이야기할게.
어째 불안한데....?
자자, 실연당한 빅토리아 베일리의 마음을 보듬어 주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어 치킨과 맥주를 사주신 한석 님을 위하여. Cheers!
Cheers...... 근데 내가 언제 지갑을 연다고 했던가? 여기 오자고 한 건 너잖아!
Whatever.
하아....
맥주잔이 부딪히고 이내 비운다. 닭의 살이 사라지고 뼈만 남는다. 저녁을 안 먹은 것도 아닌데 비키 말마따나 여기 치킨은 굉장히 맛이 좋아 쑥쑥 넘어갔다. 실연의 아픔을 닭고기로 풀려는 듯 무지막지한 속도로 먹어대는 비키에 지지 않게 나 역시 체면차리지 않고 먹어대었다. 곧 한 마리를 더 시켜야만 했다. 맥주도 더 시켰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얼굴이 빨개진 비키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언어학자인 그녀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자료 중에서 동양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걸 보고 자란 그녀는 아시아에 대한 환상이 있었고 공부도 꽤 했다. 우리 나라로 치면 중학교에 해당하는 High school 저학년 때 이미 삼국지 영역판을 다 읽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전위라고 하니 말 다했다. 때마침 그녀의 아버지가 연구를 위해 가족 전부가 한국에 오게 되었고 그녀도 기꺼이 따라왔다고 한다. 다들 원래부터 한국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의 가족은 한국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정착 3년차부터는 집에서 김치까지 담궈 먹을 정도라고 했다.
그렇게 적응을 잘 했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외모 때문에 조금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와 조금 지내보면 너무도 한국적인 그녀의 호쾌한 성격에 다들 좋아라 하기 때문에 - 자기 입으로 다들 자기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하아 - 한국에서의 생활이 그녀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대학교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신희승을 만나 처음으로 마음이 설레였다. 한참 고민을 하다가 그가 군대를 가기 몇 달 전에 전격적으로 고백을 했다. 그러나 희승의 대답은 평범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 그렇지만 네가 그걸 인정해주고 내가 네게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다면 사귈게.
누가 들어도 어처구니 없는 답변이었지만 그녀는 그래도 좋다고 했다. 그녀도 원래 희승이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걸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즐거우리라 생각했다. 연애라는 싸움에서 먼저 반한 사람은 손해다. 손해를 감수하기로 한 결정은 크나큰 오판이었다. 희승에게 끌려다닐만큼 끌려다니고 2년을 넘게 기다렸지만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녀는 빈 맥주잔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테이블에 뺨을 대고 중얼거렸다.
내 지난 시간은 어디서 보상받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 지난 시간 말야. 그건 다 어디 갔을까?
모르겠다니깐.
좀 찾아줘 봐.
일단 계산서부터 찾은 다음에 시간이 남으면 찾아볼게.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 녀석 취해도 단단히 취했다. 테이블 옆에 꽂혀 있는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갔다. 닭 두 마리를 먹어치운 건 알겠는데 맥주는 얼마나 마셨는지 감이 안 잡혔다.
오백 호프 열 여섯 잔에 반반치킨으로 두 마리 하셨네요.
.....언제 그렇게 먹었죠?
아까부터 들어오셔서 저희 지금 마감할 때까지 드셨잖아요.
앞치마를 두른 여자 점원이 씩 웃으며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최종 금액을 보여주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 지갑을 열어 계산을 했다. 이래저래 이 비키라는 녀석은 내 돈 잡아먹는 양놈 귀신임에 틀림없다. 자리로 돌아와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비키를 흔들어 깨웠다.
야! 일어나! 집에 가야지!
We take a great deal of pride in providing clients with a truly unique event! Reflecting our bride's style and vision for her big day is our number one priority.....
임마! 계산 다 했어. 외국인 디씨 안 받아도 돼...
It's the bride's time to show her style..... As you wish... makes all the details come together.............
비키는 계속 영어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억지로 일으켜 어깨를 부축하고 거리로 나오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무어라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임마, 정신 차려! 너 집이 어디야?
I have no place to back.... it's too far.... no place to go...
길가에 앉히고 뺨을 두드렸다. 그러자 풀린 눈이 조금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날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희승이는 이렇게 안 생겼는데....
난 희승이 아냐! 최한석이다.
희승아... 날 두고 가지마....
와락 날 끌어안는 그녀를 떼어내는 일은 참 쉽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녀석은 펑펑 울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는 게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집을 물어봐도 대답도 않고 전 남친만 찾고 있는 녀석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울음은 다 그쳤지만 녀석은 축 늘어져 있어서 거의 엎다시피 하고 데려왔다. 어쩔까 싶었다. 이대로 우리 집에 데리고 들어갈 수도 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여자를 재운다라..... 남들은 백마 탈 기회라고 좋아라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실연의 아픔으로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더 큰 아픔을 주기는 싫었다. 내 몸에 바짝 기대오는 비키의 뭉클뭉클한 흉부가 나를 꽤 자극하기는 했지만.... 결국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맞은 편 집의 문을 두드렸다. 이내 마리가 나왔다. 녀석은 나와 비키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이기 뭐꼬예.
저.... 마리야, 갑자기 이런 부탁해서 미안한데, 오늘 하루만 이 녀석을 부탁하면 안 될까?
자기가 그랬던 일도 있고 하니 흔쾌히 받아주리라 생각했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마리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싸늘했다.
이기가 무신 여관이라도 됩니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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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이는 과연 백마 탄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