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가 없어서 녀석을 한참동안 내려다보고 있었다. 녀석은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면 저 두고 아저씨 혼자서 그냥 가던가요.
아아, 알았다. 알았어.
내가 투덜거리며 쪼그리고 앉아 등을 내밀었더니 와락 업혀 온다. 손을 어떻게 할까 난감해서 되도록 엉덩이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허벅지 쪽으로 잡아 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미니스커트 입고 있었잖아. 이래도 되는 거야? 손에 닿는 허벅지의 감촉에 신경쓰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했다. 녀석은 내 목에 팔을 가득 두른 채 귀에 대고 말했다.
뭐.... 느껴지는 거 없어요?
뭐가, 임마.
여자가 등 뒤에 업혀 있잖아요. 등 쪽에 닿는 특별한 감촉 같은 거 말이에요.
.....없는데? 어라. 너 제법 무겁구나. 고만한 키 치고는 말야.
아, 진짜.
녀석이 버둥거리더니 바닥에 내려선다. 뭐야. 잘만 걷는구만. 녀석은 나를 두고 한참이나 휘적휘적 걸어가버렸다. 황급히 따라갔더니 녀석이 투덜거리는 게 들렸다. 뽕도 소용없네. 어쩌구 저쩌구. 한국영화의 길이 남을 야외섹스 촬영물의 걸작 뽕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거야, 대체. 나중에 가까스로 화가 풀린 유진은 다시 내 손을 잡아 끌고 이곳저곳으로 신나게 구경을 다녔다. 신발을 괜히 사줬나.... 너무 활기가 넘치 잖아, 이 녀석!
어? 저건....?
길을 걷던 유진이가 걸음을 우뚝 멈춰섰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저기로 들어가는 소란이를 본 거 같은데.. 맞나 모르겠는데요.?
녀석이 가리킨 곳을 쳐다보니 엄청 커다란 교회였다. 그런데 분명 교회인데 입구에 무슨 업소 간판 걸려있듯이 써 있는 이름이 뭔가 이상하게 길었다. 재림예수대비말세찬양교회. 뭐야. 말세를 찬양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게다가 결코 평범한 교회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입구 쪽에는 덩치 좋은 아저씨들이 마치 보초라도 서듯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저 분들은 기도를 하지 않고 있는 기도들인 모양이었다. 여하간 분위기가 이상한 곳이었다. 난 유진이의 팔을 잡았다.
소란이가 원래 저런 데 다녀? 알고 있었어?
아뇨. 전혀요. 평소에 그런 이야기는 일절 없었는데. 내가 잘못 봤나?
유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쪽에 가까이 가보려고 했지만 기도들의 제지로 인해 들어가지 못 했다. 나는 유진이에게 내일 소란이에게 물어보라고 이르고는 그곳을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유진은 소란이에 대해 꽤 걱정했다. 친한 사이라서 걱정이 더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잘못 봤을 거라고 애써 위로했다. 해가 지기 전에 녀석을 집에다 데려다 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녀석의 집 근처에 도착하자 그냥 보내기 좀 그랬다. 어차피 이 녀석이 집에 가면 늘 혼자 저녁을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밥 먹고 들어갈래?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기에 시간은 좀 이르지만 집 근처에서 저녁도 사주기로 했다. 점심은 느끼한 걸 먹었던 터라 밥을 먹기로 했다. 주변을 좀 걷다보니 철판볶음밥을 하는 집이 하나 보였다. 삼부자 볶음밥이라고 씌여진 간판이 좀 웃기게 생겼다. 유진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십시요!!
길게 놓인 탁자를 사이에 두고 주방과 직접 마주 보며 앉게 되어 있었다. 철판에서는 먹음직스러운 밥과 야채, 고기 등이 익어가고 있었고 머리에 두건을 두른 남자 세 명이서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가게는 작았지만 제법 사람이 있는 걸로 봐서 나름 맛집인 모양이었다. 안쪽에 빈 자리가 있어 유진과 함께 거기에 앉았다.
자! 시원한 물 받으시구요. 주문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내 나이쯤 되었을까. 굉장히 서글서글하게 생긴 남자가 우리 앞에 서서 묻는다. 탁자 위에 놓인 조그만 메뉴판을 들여다보니 메뉴가 딱 세 글자만 써 있었다. 육, 해, 공.
우리가 여기 처음 와서 그러는데요. 어떻게 주문하면 되요?
간단합니다. 돼지고기, 해물, 닭고기. 셋 중에서 마음에 드시는 걸로 볶아드립니다. 김치는 당연히 곁들여지구요.
아하. 그제서야 이해했다. 유진을 돌아보니 해물로 하겠단다.
그럼 해물 하나랑 닭고기 하나요.
예에! 여기 해공 둘! 막내! 일루 와라!
생긴 것 만큼이나 접대도 시원시원했다. 남자는 우렁찬 목소리로 반대편 끝에 있는 이를 불렀다. 막내라고 불린 녀석이 밥과 야채가 담긴 커다란 그릇을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왔다. 녀석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바다 하나, 하늘 하나, 맞으시죠?
여긴 손님이 해물과 닭고기라고 말하면 주문 받는 사람이 해와 공이라고 말하고 정작 만드는 사람은 바다와 하늘이라고 표현하는 독특한 시스템인 모양이다. 그러나 의미가 워낙 명료해서 헷갈릴 일은 없을 듯 싶었다.
네, 맞아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물을 마시던 유진이 우리 앞에 온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택용이 아냐?
어? 어... 유진이구나.
철판에 밥과 재료를 놓고 볶으려던 녀석은 유진을 보고 멍하니 있었다. 그냥 아는 사람 만난 것치고는 녀석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녀석은 유진이를 보다가 그 옆에 앉아 있는 나도 한번 쳐다본다. 그런데 그 눈빛이 어째 아껴서 숨겨두었던 과자를 냅다 꺼내먹은 형을 노려보는 그런 눈빛이다. 그때 아까 우리에게 주문을 받은 이가 성큼 달려와 택용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임마! 안 볶고 뭐해!
어?! 어... 알았어. 형.
그는 유진이 앞에서 뒤통수를 맞은 게 못내 아쉬운 듯 자기 형과 유진이를 번갈아 보며 투덜거렸다. 그 이후로는 고개도 들지 않고 밥을 열심히 볶았다. 쇠로 된 커다란 두 개의 뒤집개를 가지고 이리저리 뒤집으며 볶는 모습이 무척이나 능숙하다. 나는 유진에게 물었다.
친구야?
아저....아니, 선생님. 우리 반 택용이잖아요. 김택용.
으응?
그제서야 다시 얼굴을 쳐다보니 좀 낯이 익다. 택용은 날 보고 고개를 꾸벅했다. 지애는 출석부를 주며 사진과 이름을 빨리 외우라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여자 애들이라면 모를까 남자 얼굴을 내가 어떻게 외워! 내 어설픈 기억이 맞다면 이 녀석은 아마도 교실 맨 뒤에 앉아있던 녀석인 것 같은데 솔직히 잘 생각은 안 난다. 일단 변명을 하고 인사를 건넸다.
아, 그래. 두건 쓰고 있어서 못 알아봤다. 그래, 여기서 알바 하는 거야?
예. 저희 집에서 하는 거라...
택용은 시선은 철판에 고정시킨 채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젊은 사람보고 형이라고 했었지. 그러면 저기 끝에 있는 나이 든 아저씨는 아버지인건가? 간판에도 삼부자라고 씌여 있더만 정말 그런 모양이다. 이윽고 조리가 다 끝났는지 택용이가 우리 앞으로 그릇을 내려놓았다.
식사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오목한 그릇에 담긴 볶음밥이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고 위에 뿌려진 김가루와 깨가 풍미를 자극한다. 그런데 유진이와 내가 받은 게 좀 달랐다. 유진이는 해물도 가득 들어있고 계란 후라이도 하나 얹어져 있는데 내 꺼는 어째 닭고기도 별로 없고 밥만 잔뜩이다. 계란 후라이도 없다. 내가 고개를 들어 택용이를 쳐다보자 유진이 쪽을 빤히 보고 있던 녀석이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헛기침을 하며 다른 손님에게 갔다. 내가 말야, 여자의 눈치에는 상당히 둔한 편이지만 남자에 대해서만큼은 빠삭하다. 그렇군. 헤에. 그런 건가.
어이, 진유진.
왜요?
인기 좋아?
난데없는 내 소리에 유진은 숟가락을 입에 물고 날 빤히 보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밥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래?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
고기가 좀 적어서 그렇긴 하지만 양념도 잘 배어있고 밥도 따끈따끈하니 아주 맛이 좋았다. 한 그릇을 금방 뚝딱 해치우고 있노라니 유진이가 자기 것 좀 더 먹으라며 권했다. 유진의 그릇에서 내 쪽으로 덜어 담고 있는데 어쩐지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기분이다. 아까부터 저 녀석은 이쪽을 계속 힐끔거리고 있었다. 저 딴에는 안 들켰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내 레이더에는 제대로 걸려있었다. 난 일부러 유진이 쪽으로 몸을 가깝게 붙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택용이랑은 친해?
별로요. 그건 왜요?
흐음.... 아니, 내가 뭐 그렇게 눈치가 빠르거나 그런 건 아닌데 말야. 아무래도....
그 때 갑자기 나와 유진이 사이에 사이다 병이 턱 하니 놓인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야기의 당사자, 택용이다.
서비스입니다. 손.님.
아, 그래? 고맙네. 택용 군.
내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녀석에게 최대한 밝게 웃어주었다. 사이다를 후식 삼아 유진이와 나눠 마시고 가게를 나왔다. 나중에 학교를 가거들랑 좀 주의깊게 녀석을 관찰해보아야 겠다. 저 나이대의 남자애들이 저렇게 구는 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귀엽다고나 할까. 유진이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녀석은 이번에도 나에게 집에 들렀다 가지 않겠냐고 하였지만 난 정중히 사양했다.
그곳에서 우리 집까지는 걸어 돌아가기로 했다. 생각치도 못 했던 지출이 크기도 하거니와 하도 사람 많은 곳을 다녀왔더니 정신이 성가셔서 좀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시장을 가로 질러 가는 길에 어제 현아와 떡볶이를 먹었던 분식집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집에 혼자 있을 마리가 생각났다. 시간이 어중간하긴 하지만 집에 들어가 마리랑 간식을 먹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침 일도 있고.... 마치 어린 강아지 한 마리를 집에 혼자 두고 나온 기분이라 그걸 달래줄 겸 뭔가를 사갈 생각에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마리의 왕성한 식성을 고려하여 아줌마에게 떡볶이랑 순대, 튀김을 좀 넉넉히 달라 하고 포장을 부탁한다. 앉아서 기다리는데 안쪽에서 나오던 사람과 마주쳤다.
어?
금발의 벽안인 여자였다. 얼굴이 낯이 익다. 이름도 알고 있다. 빅토리아 베일리. K대 부속고등학교 2,3학년 회화를 담당하고 있는 외국인 교사였다. 기가연구실에서 본 적이 있고 금요일 회식에도 같이 갔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었다. 굳이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아니거니와 아무래도 영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랄까. 그녀가 말을 먼저 걸지 않는데 내가 먼저 말을 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와 이렇게 딱 마주치다니... 하아. 사람 많고 공간이 넓은 학교에서라면 모를까, 좁은 공간에서 딱 둘이 마주쳤는데 그냥 모른 척 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나 싶어서 일단 가볍게 손을 들고,
Hi.
라고 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지나쳐 아줌마에게 간다. 씹...씹혔다. 흐음. 뭐, 나를 못 알아보았거나 내 발음이 하도 부실해서 굳이 대화할 필요를 못 느낀 모양이다. 하긴 외국인들이 보면 한국 사람들은 다 똑같아 보인다고도 하잖아? 빅토리아가 다가 온 걸 안 아줌마가 순대를 썰다 말고 가게 안을 한번 돌아보았다.
오뎅이랑 떡볶이랑 순대랑 만두랑 해서 6,500원이야.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혼자서 저만큼이라니. 저쪽도 마리 못지 않은 대식가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빅토리아가 아줌마에게 내민 것은 오천원짜리 한 장이었다. 아줌마가 인상을 쓰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이 아가씨 또 이러네. 육천 오백원이라니까. 헤이. 그 뭐다냐. 그래, 깁미 머니. 천오백원 더. 오케이?
아줌마가 손짓발짓으로 천오백원이 부족하다는 의사를 열심히 표현했지만 빅토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두 손을 들어보일 뿐이었다.
하이구 답답해. 이봐요. 아저씨. 혹시 영어할 줄 알아요?
네? 저요?
난데없이 화살이 나에게 향한다.
이 아가씨한테 천 오백원 더 내야 한다고 말 좀 해줘. 자주 오는 아가씨인데도 맨날 돈을 부족하게 내는 통에 내가 아주 미치겠어.
아, 예에...
시장 분식집에 자주 오는 금발 아가씨라. 굉장히 미스매치한 광경이긴 하지만 지금 여기서는 직면한 현실이다.
젊은 사람이니 영어 좀 하겠지? 내 이야기 좀 통역해줘봐.
에? 전 공대생이라.....
공대생이면 대학생 아녀? 얼른 말 좀 해줘봐.
아줌마가 내 팔을 잡고 끌어다 빅토리아 앞에다 세운다. 전공수업 때문에 원서는 항상 읽고 있지만 그걸 소리내어 말해본 적은 거의 없다. 내가 아는 영어 단어라고 해봐야 제어공학이나 전기 혹은 기계공학에 관련된 용어 뿐인데 그렇다고 그 Control 이니 Impedence 이니 아니면 Torque 같은 단어가 여기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에...아... 그러니까.... 유 머스트 페이 모어 머니, 오케이?
최대한 간략하게, 그러면서도 의사 전달에 무리가 없는 문장을 만들어 내어 살짝 던져본다. 빅토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날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일단 어색한 미야설넷도 지어본다. 그러자 여태 아무 말도 안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빅토리아가 한 손을 들어보이며 무어라 쏟아낸다.
I have no money anymore. But a command economy is an economy in which production is in the hands of the state rather than the hands of private enterprises. It is similar to a market economy in that the goal is growth and the dependence on the natural world is mostly ignored. Do you agree with me?
....예스...! 아, 아닌가? 노인가?
으악. 사람 살려. 아니. 한국인 살려! 아무리 영어 쓰는 코쟁이라고 해도 이렇게 빠르게 말을 막 해도 되는 거야? 듣는 사람을 생각을 좀 해주란 말야. 이 나라에서 영어듣기평가는 아주 천천히, 그것도 두 번이나 불러준다고! 내가 쩔쩔 매고 있는데도 아줌마는 뒤에서 자꾸 재촉한다. 뭐라 그려? 전에 안 낸 돈도 내라고 말 좀 해주고 말야. 아줌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나오는 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구요. 빅토리아는 무어라무어라 말을 더 했지만 여전히 못 알아듣겠다. 앞에는 영어, 뒤에는 아줌마. 전장에 포위되어 사면에서 고향 노래가 들려올 때, 초나라 군사들이 느낀 심정이 이런 심정일까. 이 자리에서 도망치는... 아니,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다. 난 아줌마를 돌아보며 물었다.
모자란 돈이 얼마라구요?
이번엔 천오백원. 그리고 예전부터 안 냈던 돈들은 내가 어디 써 놨는데.... 여기 있네. 전부 해서 8만 5천원.
끄억. 그... 그렇게까지 외상이 있는 데도 계속 손님으로 받아주세요?
아줌마가 내 등 뒤에 서 있는 빅토리아를 넘겨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오지 말라고 하기도 그렇잖어.
그..그런가. 그럼요, 일단 이거 받으세요.
지갑에 있는 돈 중에서 세종대왕 세 분을 꺼내어 아줌마에게 건넸다. 아줌마가 갑작스런 대납에 의아해하며 이유를 물었다.
이 분이랑 저랑 같은 학교에서 일하거든요. 제가 나중에 모자란 만큼 받아다 드릴게요.
어머, 그래? 그럼 잘 됐네. 그려. 부탁 좀 할게, 총각.
생각지도 못한 지출에 어깨가 축 늘어진다. 손에 들린 비닐봉지에 담긴 아직 따끈한 떡볶이의 온기가 날 뎁혀주기는 하지만 역부족이다. 터덜거리며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누군가 내 뒤를 따라붙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빅토리아다. 아까 못다한 영어회화(?)를 마저 하러 따라 온 건가.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끝났다고. 물론 더 솔직히 말하면 외국인이랑 말하라는 마음의 준비는 앞으로 회화학원을 2~3년 다니고나서야 겨우 들까말까 하다고.
너 등신이지?
........라는 환청이 들린다. 아까 영어를 너무 많이 들었나. 이게 어디서 들리는 뭔 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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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분의 재촉을 보고 출근 직전까지 쳐서 한편 더 올립니다....
오타나 비문 발생시 저말고 킨투스 님께 따져주세요. 에고... 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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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페이스 빅토리아! 근데 이 녀석을 레귤러로 넣을지 말지는 아직 미정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일단 있는 애들 정리부터 하자구요. 에구구.
중간에 그녀가 지껄이는 영어를..... 굳이 해석할 분이 없다고 생각하여 아무 글이나 구글링해서 때려넣었습니다-_-;; 해석 하지 말아주세요. 그냥 검은 건 영어고 흰 거는 배경이구나... 하시길.
여기에 나 말고 한국말을 쓰는 사람이 또 있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빅토리아 말고는 아무도 안 보였다. 내가 말한 건 아닌데? 단 둘이 있는데 내가 말한 게 아니라면 상대가 말한 걸텐데 방금 그건 유창한 우리말이었잖아. 놀란 내가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있으려니 예의 그 한국말이 또 들려온다.
최한석이라고 했던가?
이번엔 빅토리아를 보고 있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도톰한 입술을 벌려 말을 했고, 그와 동시에 내 귀에 익숙한 언어가 들려왔다. 의심할 여지 없이 방금 그 소리는 이 여자가 한 말이었다.
맞는데요.......어라?
이 금발의 아가씨가 시방 뭐라는겨. 우리말이잖아! 내가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고 있는 동안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야, 니는 내가 니 모른체 하고 지나가면 그냥 사정이 있다 생각하면 되지 거기다 대고 초를 치니?
초....를 쳐요?
그래. 저기 떡볶이가 맛있고 아줌마도 착해서 내가 단골로 애용하고 있었는데 니가 그렇게 초를 쳐버리면 결국 돈을 내야 하는 거잖아.
다....단골?
아직 감이 안 와?
감이라니.....
하아. 이거 완전 또라이 아냐.
또라이라니....
바로 저기 저 분식집에서는 무지막지하게 쏟아낸 영어로 나를 혼란에 빠트렸던 빅토리아가 다시 나타난 이후에는 무지하게 유창한 한국말로 나를 다시 한번 혼란에 밀어 넣고 있었다. 혹시 다른 사람 아냐, 이거? 그게 아니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몰래카메라라던가. 그러나 틀림없이 그녀는 그대로였고 달라진 건 그녀가 사용하는 언어 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어째 이경규 씨가 카메라 메고 뛰어올 기미도 안 보인다. 난 일단 옆에 있는 금발녀를 제지했다.
자....잠깐만요. 빅토리아 씨. 한국말 할 줄 알았어요?
당근이지.
엄마야, 당근이래...... 그녀의 지나치게 풍부한 어휘에 당황하고 있으려니까, 그녀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나왔는데 이 정도도 못하면 등신이지. 안 그러냐.
그..그러셨군요.
야, 한국말 못 하는데 한국학교에서 어떻게 선생질 하고 있겠냐?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상식적으로.
그렇겠네요.
그렇군.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기 시작한다. 상식적으로 금발의 아가씨가 나한테 막말하는 건 이해할 수 있겠어. 그런데 아까의 그 비상식은 대체 뭐냐.
자....잠깐만요. 그럼 아까는 왜 한국말 하나도 못 하는 척하면서 그러고 있었던 거에요? 아줌마가 돈 모자라다고 한 소리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잖아요.
내가 몹시 따지고 드는데도 그녀는 몹시 태평했다.
그거야 외국인이면 디씨해주잖아.
.........외국인? 디씨?
오, 난 한쿡말 몰라요. 한쿡말 어려워요. 이러고 있으면 대충 사람들이 편의 봐준다고. 그런 것도 모르니? 이 등신아?
참 친절한 설명이긴 한데 끝에 따라 붙는 호칭은 상당히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성질이 나기 시작한 내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런 게 어딨어요! 자기가 먹었으면 먹은 만큼 돈을 내야죠!
아, 그 쪽에서 알아서 싸게 해 주겠다는 데 뭐 하러 돈을 더 내? 니 돈 많아?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면서 물어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텅 비어버린 지갑을 생각해볼 때 그렇다!라고 대답할 계제가 못 된다.
아...아뇨.
왜, 아까 보니까 만원짜리도 척척 내고 돈 잘 쓰더만.
그게 마지막 재산이었다구요.
울고 싶은 심정이다. 이 사기꾼 같은, 아니지, 같은 게 아니라 사기꾼 맞잖아! 분명 지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을 게 분명하다. 암튼 이 금발녀한테 나도 모르게 돈 떼인 꼴이 되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당당하게 나오는 여자한테 아까 대답한 돈을 달라고 하면... 아마 절대 안 주겠지? 또 다른 등신 취급을 하게 되는 덜미가 되고 말 것이다. 평생가도 돈을 받아내기란 아마도 불가능 하겠지. 우울한 내 기분과는 달리 그녀는 내가 들고 있는 봉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튀김도 샀어?
샀는데요.
그래? 그럼 나도 같이 먹자.
이 여자가 뭔 헛소리를 또 시작하는 거야. 아까도 엄청 많이 먹는 것 같더니만.
방금까지 먹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돈이 모자라서 튀김은 못 먹었단 말야. 오늘따라 고추튀김이 땡기는데. 고추튀김도 있지?
식성도 독특하군. 난 또 매운 고추 써서 할까 아줌마한테 꼭 물어보고 사는 구만.
있기는 한데...... 암튼 왜 내가 빅토리아 씨한테 튀김을 줘야 되냐구요!
화를 내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아까 돈은 대신 왜 내준 건데?
으아아아악!!
미치고 팔짝 뛰겠다. 그러나 빅토리아는 내가 가는 길을 끈덕지게 따라왔고 결국 집까지 도착하고 말았다. 그녀는 내가 사는 빌라를 훑어보더니 물었다.
여기 살아? 전세야, 월세야?
월세...인 거 알아서 뭐하시게요!
학교 가까우니 보증금 좀 쎄겠는데?
그렇긴 하죠.
한 달에 얼마야?
알아서 뭐하게요!
마이 페이스 그 자체다. 도무지 말이 먹힐 상대가 아니었다. 월세를 말해준 다음 반쯤 포기하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다시 나오다가 따라 들어오려던 빅토리아와 딱 마주친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안 들어가고 뭐해? 튀김 안 먹어?
전 그 쪽이랑 먹으려고 사온 거 아니거든요?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튀김이나 먹자고 일면식도 없는 남자 집에 성큼성큼 들어간단 말야? 아니, 일면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따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한 것도 아니니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지도.... 내 복잡한 머리와는 별개로 그녀의 조잘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어쩐지 일인분 치고는 좀 많이 산다 싶던데. 누구 또 있어?
난 한숨을 푹푹 쉬며 앞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당연히 마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검은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 나와 비슷한 눈높이.
예린 씨? 언제 올라온 거에요?
낮에 올라왔습니다. 오랜만에 뵙는 군요.
그래요. 일주일만인가요?
꽤 반가웠다. 그녀가 와있다는 건 그렇다면..... 근데 예린이 턱짓으로 내 등 뒤에 서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뒤에 계신 분은 누구신지요?
하아. 이 여자. 아직도 안 가고 있었나? 예린의 분위기를 보면 다들 예의상 혹은 본능적으로 일단 한 수 접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든가 할텐데 이 여자는 빨리 안 들어가냐고 내 등을 계속 찌르고 있다. 난 딱 잘라 말하기로 결심했다.
모르는 사람....
그렇게 힘주어 말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더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I'm his wife!
내가 아무리 리스닝이 딸려도 방금 그 헛소리까지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난 돌아보며 소리쳤다.
웃기지 마요! 뭐래는 거야, 진짜.
그러나 눈을 부라리는 나를 보면서도 빅토리아는 눈 하나 깜짝도 하지 않고 입을 열어 아까처럼 영어를 줄줄이 쏟아냈다.
Hey, relax. Accept the reality. Prime Minister David Cameron will address an emergency session of Parliament Thursday morning on the riots, after hosting a meeting of the government's emergency committee. Lawmakers have been called back from their summer break to respond to the crisis.....
방금 전까지 한국말을 누구보다 잘 구사하고 있던 이 금발 여편네가 다시 한번 영어의 폭포를 쏟아내는 광경에 정신이 아득해지려고 했다. 그런데 정말 의외인 건,
What the hell did you say? Stop the meaningless bullshit.
이라고 예린이 몹시 유창하게 말해버린 거다. 난 입을 딱 벌리고 양쪽의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빅토리아도 놀리던 입을 딱 멈추고 의외라는 표정으로 예린을 쳐다보았다.
영어 잘 하네? 와우.
그러는 그 쪽은 한국말 잘 하시는 군요. 영어로 쓸데없는 소리는 잘도 지껄이기도 하고..
남이사.
생긋 웃는 빅토리아와 선글라스를 낀 무표정의 예린 사이에서 스파크 같은 게 번쩍이고 있다고 느끼는 건 내 착각이겠지? 그렇겠지? 이 상황을 구제해주는 것은 역시 단 한 사람 뿐이었다.
어머, 오빠! 지금 오시는 거예요?
리사야....
집 안에서 리사가 나오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데다가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그녀를 보고 있으니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지옥에서 부처님 만나기라는 게 이런 거겠지? 일단 리사의 권유에 따라 나는 물론이고 빅토리아까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가지고 온 분식 꾸러미를 푸는 동안 어떻게 된 건지 묻는다.
그동안 연락도 없이... 그리고 오늘은 갑자기 올라온거야?
그러자 리사가 날 보며 생긋 웃었다.
음, 어쩐지 오늘 아침에 말이죠.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서울에 막 올라오고 싶더라구요. 급한 일은 후다닥 처리하고 언니랑 같이 올라왔죠.
이상한 기분도 아니고, 이~상한 기분이라. 나도 모르게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거실 소파 한편에 냉랭한 표정으로 있는 마리가 앉아있었다. 녀석과 눈을 마주치기 미안할 지경이다. 마리의 그 신기한 이야기는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침에 마리와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있을 때 마리가 느낀 기분은 분명 리사에게도 전달이 되었던 것이다. 그걸 느낀 리사는 일부러 여기 이렇게 와있고 덕분에 나와 마리의 단둘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완전히 빠이빠이다.
리... 리사야, 그건 말이지.
어머. 이거 떡볶이네요. 맛있겠다. 제가 그릇이랑 젓가락 준비할게요.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리사는 환히 웃으며 부엌으로 가버렸다. 마리 쪽을 다시 쳐다보니 녀석은 굉장히 불만인 기색을 푹푹 뿜어대고 있었다. 마리에게서 검은 빛의 오오라가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마리가 쿠션을 끌어안으며 부엌 쪽을 향해 매서운 눈빛을 날린다.
저 여시가 끝내 훼방을 놓을라고....
으음.
여기서 괜히 입 열어봐야 좋을 일이 없었다. 뒤통수만 북북 긁으면서 가만 있으려니 마리가 새로 나타난 사람을 보고 내게 묻는다.
근데 저 양키는 뭔데예?
양키라.... 그런 표현을 쓸 거면 목소리를 좀 낮추던가. 듣는 양키 기분 나쁘잖아!
응? 난 양키 아닌데? 호주 출신이야. 오스트레일리아.
처음 오는 남의 집 거실에 앉아있는 것 치고는 굉장히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던 빅토리아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금발 여자라고 다 미국인은 아니었구나.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내 사상에 수정을 조금 가했다. 그런데 거실 한쪽에 앉아있던 예린이 빅토리아 쪽을 유심히 바라보는 게 보였다. 뭐지.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경계하는 건가.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유심히 보고 있는 것 같다. 외국인이라고 경계하던 마리도 그녀가 한국말을 능숙하게 하자 놀란 모양이다. 마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날 보고 묻는다.
선배랑은 대체 뭔 사이라예? 와 달고 들어옵니까?
같은 학교에서 일하는 선생님이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빅토리아가 먼저 대답했다.
쟤가 날 샀어. 3만원에.
쿵- 소리가 들렸다. 내 마음 속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인가 생각했더니 다들 놀라는 걸로 봐서 그건 아닌 모양이다. 소리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리사였다. 그대로 부셔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박력을 선보이며 거실 탁자에다 들고 온 그릇을 메다 꽂은 그녀는 내게 시선을 던지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이게 무슨 소리죠?
리사야, 앞으로 그런 추궁을 할 때는.... 차라리 화를 내라! 웃으면서 따지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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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베일리(Victoria Bailey. 24세. 171cm. 65kg. D컵. 멜버른 출생. 금발에 푸른 눈.
........이라는 설정의 인물이며 모처럼 백마타는 거 아닌가 싶어서 벌써부터 좋아하는 분들 계시는데, 아직 안 나왔지만 이 녀석의 남자친구 이름이 신희승입니다. 이걸로 설명 끝.
작가가 알아서 스포일러하는 본격 막장 소설, 더블 데이트입니다. 꾸벅.
웃는 얼굴로 화를 내고 있는 리사를 달래기란 참 쉽지 않았다. 그 경직된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튀김과 떡볶이를 다 먹어치운 빅토리아가 내게 인사랍시고 뺨에 입맞춤까지 남기고 돌아갔다. 상황은 더욱더 안 좋아졌다. 그 후에 난 무릎까지 꿇고 앉아 바른 몸가짐에 대한 훈계를 리사로부터 한참이나 들어야만 했다. 발바닥에 쥐가 났다.
다음 날, 모처럼 리사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지애를 따라 학급 조회에 참석했는데, 어라? 유진이 옆 자리가 비어있었다. 지애에게 물어보니 소란에게서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고 했다. 무슨 일일까 싶었다. 문득 어제 유진이가 말한 게 생각났다. 이상한 이름이 붙은 교회에 들어가던 소란이....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싶었지만 생각이 너무 과한게 아닐까 싶어 금세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는 택용이와도 눈인사를 주고 받았다. 지금 보니 녀석도 꽤 키가 크다. 하긴 맨 뒤에 앉아있으니 오죽하겠는가 싶다.
오전 일과를 마치고 점심시간에 등나무 쉼터에 앉아있으려는데 유진이가 다가왔다. 내 옆에 앉은 유진이와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유진이가 아까 쉬는 시간에 소란이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아버지가 전화를 받더니 굉장히 귀찮다는 투로 모르겠다면 화를 내더란다. 더 자세히 이야기 하려던 유진은 다른 학생들이 지나가는 걸 보자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은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나한테 평소처럼 대하질 않는다. 그러니까 뭐랄까. 나랑만 있을 때는 정말 귀찮고 얄밉게 구는데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정말 점잖고 예의 바르게 군다. 어제만 해도 택용이가 있다는 걸 알고 부터는 내게 말도 잘 건네지 않고 부를 일이 있어도 평소처럼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했다. 유진이 고개를 꾸벅하고 가버린 다음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나도 교무실로 돌아가야 하나 가늠한다. 그런데 등뒤에서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Hi, Mr. Choi!
최라는 발음이 안되는 것도 아니면 일부러 초-이 라는 식으로 발음하는 가증스러운 양키... 아, 아니, 호주 여자 같으니라구.
한국 땅에서는 한국말 써. 빅토리아.
No, no. I asked call me Vicky. Don't say so sticky. Bring our last fantastic night on. You are so cool - don't know what to do. Oh babe, I can't come close to you. I want you to just feel good And can't you see I'm in the mood. Want you touchin' mine. I'm just waiting for a sign. I wanna makes you feel so hot. I wanna find your tender spot. Turn me on.........
아오, 진짜 못 알아들을 소리 좀 그만하라니까. 비키! 샷 업 마우스 플리즈!
성질을 버럭 냈더니 빅토리아, 아니 비키가 씨익 웃으면서 허리에 손을 턱 얹는다. 그녀는 어제 자신을 비키라고 불러 달라고 했었다.
이러니까 대한민국 영어교육은 실패라니까. 어떻게 지성인이라는 대학생이 이런 간단한 회화도 못 알아듣고 말이야.
너랑 간단한 회화라도 하기 싫으니까 그러지!'
날 왜 이렇게 싫어해? 내가 너 잡아먹기라도 했어?
나는 안 잡아먹었어도 내 지갑의 돈은 잡아먹었지. 비키는 손가락을 턱에 대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이었다.
흐음. 이렇게 핫 스타일의 나이스 바디 금발녀가 말을 거는데도 마다 한다 말이지.
자기 자신을 핫 스타일의 나이스 바디라고 말하다니 낯짝도 두껍다. 뭐... 그녀의 늘씬한 키와 훌륭한 흉부를 보고 있노라면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인정하기 싫다. 녀석은 뭔가 궁리하더니 나를 손가락으로 척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면 취향이 이쪽이 아니라... 아주 영~ 아니, 좀 더 나가서 페도필리아, 그 쪽이라서 나같은 성숙한 성인 여성에는 취미가 없는 건가?
페....뭐시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기분 나쁜 단어인걸. 나한테 갖다 붙이지 마.
아까 저쪽에서부터 오면서 보니까 쪼끄만 여고생이랑 굉장히 사이 좋게 이야기 나누고 있길래 그런 줄 알았지. 정말 아냐?
아니라니깐!
페도...뭐시기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 녀석 입에서 나온 이상 결코 인정하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불길한 기분이 든다. 녀석은 내 불길한 기분의 정체를 설명해주었다. 친절도 하셔라.
아, 페도빌리아가 뭐냐면... 아직 미성숙한 육체를 가진 여성에게 성적 흥분을 갖는 일종의 도착증세를 이르는 건데 대개 영유아나 저연령의 소녀를 상대로 욕정을 하는 그런 종류의...
미치겠다. 누굴 정신병자로 모는 거야, 이 여자가! 난 폭발하고 말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버럭 소리 질렀다.
아오, 진짜! 난 그런 거 아니라니깐! 난 쭉쭉빵빵하고 가슴 큰 여자가 좋아!
헤에.
뭐가 헤에야!
남은 열받아 죽겠는데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아니, 난 그냥 너보고 뒤를 보라고 권하고 싶어.
뒤?
뒤를 돌아보니 아연실색한 표정의 현아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의 은애, 웃음을 꾹 참고 있는 표정의 태근이 형이 나란히 서 있었다. 언제 온 거야, 이 사람들은.... 현아는 몹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석이 취향이.... 그랬구나. 미안...
니가 왜 미안한데! 반면에 태근이 형은 참았던 웃음을 빵 터트렸다.
역시 남자다! 우리의 호프, 최한석!
은애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몹시 경멸하는 눈빛만으로도 백마디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해머로 뒤통수를 후려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 내가 입만 벌리고 뻐끔 거리고 있노라니 비키가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솔직하다는 점에서 플러스 1점. 사회적 품위에서는 마이너스 십점. Congratulation, Mr Choi.
그렇게 나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지나치고는 실습 동기들이랑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저 천역덕스러운 모습이 주는 분노라니!! 비키의 뒷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외쳤다.
'신이여! 제가 기필코 저 녀석 잡아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
내 마음에 비장미를 더하듯이 예비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오. 또 지애한테 혼날까 싶어 서둘러 교무실로 향했다. 다행히 큰 문제 없이 오후 업무가 끝나고 퇴근 시간이 되었다. 모처럼 정상 퇴근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의 소박한 기대는 오래 가질 못 했다. 교무실을 나서자마자 딱 마주친 태근이 형을 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덩치에 안 어울리게 묘한 웃음을 짓고 있다.
왜 그래요. 사람 불안하게 실실 웃고.
그러자 형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나를 지극히 환대했다.
오오. 확고한 여성관을 가진 우리 한석 군. 지금 퇴근하는가?
다 끝났는데 퇴근해야죠.
에이, 그러지 말고 우리 가볍게 한 잔 하러 가자.
지난 주에 그렇게 마셔놓고 또 술 먹자는 소리가 나와요?
그렇게 무식하게 마시는 거 말고 우아하게 먹자고, 우아하게.
곰 같이 생긴 사내가 동작으로 말하는 우아하게는 몹시 닭살스러운 광경이었다. 내가 손사레를 치며 빠져나가려고 하자 형은 그 우악스러운 팔로 전혀 우아하지 않게 내 목을 감아버렸다.
동기들끼리 한 잔 하는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래. 가자, 가.
켁켁.. 이렇게 납치할 꺼면 애초부터 의견을 묻지 말던가요....
형이 날 끌고 간 곳은 공대 쪽으로 넘어가는 언덕 입구였다. 거기에는 현아와 은애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형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임마, 현아가 너 안 오면 안 간다고 그랬단 말야. 나 좀 도와주는 셈치고 가자. 응?
켁... 차라리 목을 계속 조르세요. 남자 귀에 대고 귓속말 하지 말고.
별 수 없이 난 형의 차에 올라타고 함께 가야만 했다. 학교를 벗어나 30분 정도를 달려 남산 중턱에 있는 한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이라는 걸 확인한 난 조수석에서 형을 돌아보며,
설마, 형이랑 나랑? .... 아까도 말했지만 전 여자가 좋은데요. 남자는 그다지...
이라는 헛소리를 했다가 한 대 얻어 맞았다. 다행스럽게도 호텔로 가는 건 아니었다. 호텔을 돌아 뒤쪽으로 갔더니 으리으리한 대궐처럼 생긴 한식집이 있었다. 차를 세우고 들어가니 우리 자리가 예약되어 있었다. 흐음. 지난 번에 형에게 지나가는 투로 현아는 한식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이런 데로 와버렸구나. 하아. 좀 더 디테일하게 말해줄 걸 그랬나.
현아는 뭘로 할래?
저는 아무거나 괜찮아요.
현아는 메뉴판을 한 번 훑어보더니 이내 흥미가 없다는 듯이 내려놓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땅에서 한국 사람에게 파는 식사인데 왜 이렇게 우리 말 밑에 영어와 일어, 한자까지 붙어 있는 줄 모르겠다. 게다가 가격은 왜 또 안 써 있어? 대체 뭘 보고 주문하라는지 전혀 모르겠다. 거기다 퍽 부담스럽게도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의 태도는 마치 귀한 손님을 모시는 기생처럼 사근사근하기 그지 없었고 그녀가 입고 있는 한복은 퍽 곱고 비싸보였다. 메뉴판을 신나게 보고 있는 건 은애뿐이었다.
오빠, 저는 이거랑 이 코스도 맛있어 보이긴 하는데 오빠는 드셔보셨어요?
형, 은애, 나, 현아 이렇게 시계방향으로 앉았는데 은애가 과도하게 형에게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맞은 편에 앉은 나로서는 형의 표정이 점점 곤란해지는 것이 아주 잘 보였다.
뭐, 그게 마음에 든다면.... 솔직히 나도 이런데 뭐 보고 시키는 지는 몰라.
형은 종업원에게 물어 주방장의 추천 코스가 뭐냐고 물어보았다.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줄줄 나오자 형은 그걸로 3인분을 달라고 했고 은애 보고는 아까 먹고 싶다고 한걸 시키라고 했다. 종업원이 물러가고 나서 내가 물어보았다.
여긴 자주 오던 데가 아닌가 봐요?
그러자 형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동생한테 물어보니까 자기가 자주 가 본 곳 중에서 여기가 분위기 젤 좋았다고 해서 말이야. 그래서 한 번 와봤어. 난 주로 편하게 갈 수 있는 종로 쪽에서만 있어가지고 다른 데는 잘 몰라.
형의 시선은 현아 쪽에 머물렀지만 그녀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장지문 너머의 풍경만 구경하고 있었다. 정원이 좋기는 확실히 좋았다. 마치 나무 하나하나, 꽃 하나하나가 철저하게 가꾸어진 것처럼 정갈한 정원은 그림으로 그린 듯 했고 이리저리 오가는 종업원들도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답게 생긴 사람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현실성이 떨어진다. 이런 곳에 내가 있는 것이 참 불편하게 생각되었다. 효진이가 이런 데를 자주 온단 말이지? 하아. 녀석의 스타일을 생각해보니 전혀 상상이 안 간다. 방에 들어와 있기에 다른 손님들이 보이지 않지만 아까 주차장에서 언뜻 본 차들은 죄다 수입차에 대형차 뿐이었다. 이런 고급 한식당에 효진이가 어쩐 일일까?
여기 참 분위기 좋네요. 단 둘이 와도 참 좋을 것 같아요. 오빠.
그....그러니? 으음. 저기, 현아는 어때? 괜찮니?
네.
은애의 형을 향한 이런저런 사탕발림에도 불구하고 형은 꾸준하게 현아에게 말을 걸었고 현아는 주로 단답형으로 대답을 했다. 곧 이어 종지 만한 그릇에 담겨 나온 죽부터 코스가 시작되었다. 현아를 힐끔 보니 녀석은 식사도 깨작깨작거리고 있었다. 임마! 너 떡볶이 먹을 때처럼 먹어보란 말야. 이건 떡볶이 몇 십, 몇 백 그릇 어치 가격의 음식들이 줄줄이 나오는 코스라고! 보고 있는 내가 다 답답했다. 이름도 모를 무언가 쬐깐한 것들이 잔뜩 이어 나오는 동안 향이 엄청 강렬한 인삼주도 한 잔씩 나누어 마셨다. 덕분에 잘 얻어먹기는 했지만 형의 방향이 자꾸 어긋나는 것 같아 헤어지기 전에 조언을 해줬다.
형, 사실 현아는 이런 데 별로 안 좋아해요.
그래?
형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딱히 돈이 아깝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현아의 눈치를 살필 뿐.
그러면?
전에 살짝 들어보니까 매운 거 좋아하더라구요. 좀 토속적인 거 있잖아요. 떡볶이나 아구찜, 그런거.
아아, 그랬어? 통 말이 없어서 말야. 임마, 넌 그런 고급 정보를 좀 진작 알려주지, 그랬어.
한식이라고 말하면 대충 알아들을 줄 알았죠.
저 쪼끄만 녀석이 너무 커다란 당신을 무서워하고 있다고 말해주려다가 그건 너무 잔혹한 일인 것 같아 참았다.
그리고 펀치 브라이스라는 인형 한 번 찾아보세요.
펀...뭐?
펀치 브라이스. 전에 보니까 마음에 들어 하더라구요.
난 형에게 인형 이름을 다시 한번 일러주었다. 형은 자신이 직접 현아를 데려다 주고자 하였으나 한 잔 더하자는 은애를 떼어내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현아는 인사를 마치고 총총 가버렸다. 나 역시 같은 방향인지라 형에게 파이팅을 외쳐주고 헤어졌다. 한식당을 벗어나 호텔을 지나 앞으로 가다보니 먼저 가고 있는 현아가 보였다. 그녀를 불러서 동행한다.
형이 한 잔 더 산다는 데 따라가지 그랬어?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난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서 보조를 맞추었다.
아직 무서워?
아니, 뭐 그렇다고 아주 막 무서운 건 아닌데... 좀 거부감이 있달까. 저런 덩치를 가진 사람 중에... 으음. 뭐, 좀 그래.
뭔가 이상했다. 말을 들어보면 현아도 형을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런 태도일까?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건가?
형도 딱하네. 너한테 잘 해주려고 애쓰는데 말야.
나한테 왜 잘해줘?
그야 형이 널....
여기까지 얘기하다가 입을 딱 닫았다. 아직 본인이 직접 밝히지도 않았는데 미리 말해버리면 좀 그러니까. 나란히 걷고 있던 현아가 날 올려다 본다.
오빠가 날 왜?
어...어...니가 쫌 많이 작아서 많이 멕이고 싶었는가 봐. 다음에는 햄스터 사료라도 사오라고 해볼까?
놀리는 말인데도 현아는 그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다시 앞으로 했을 뿐이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제법 걸렸다. 꽤 오래 동안 같이 걸어가며 드문드문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직업군인인 아버지는 집에 잘 안 붙어 계시고, 나머지 가족이라고 해보아야 어머니, 여동생 하나에 언니만 둘 있는 딸부자집의 셋째로서 남자 대하는 데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여중, 여고를 나온데다가 그녀가 있는 과도 남자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고 한다. 아무래도 늘 여성적인 분위기에서만 지내온 모양이다.
남자 사귀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기회가 별로...
그래도 대학교에서는 다들 한 번씩 사귀고 하잖아. 현아 정도면 좋다고 쫓아다닐 남자도 제법 있을 것 같은데?
그러자 현아는 두 손을 흔들며 맹렬하게 부정했다.
그...그런 사람 전혀 없어. 진짜루.
그래?
난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나랑 완전 반대네. 난 남중, 남고에다가 공대... 좀 있으면 군대까지 갈테니 아주 그냥 남자들 냄새에 찌들어 살아.
그래? 그래도 국민학교는 남녀공학이었을 거 아냐?
그랬겠지?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도 안 난다.
그러자 현아의 발걸음이 조금 늦춰졌다. 그녀는 내게 물었다.
기억.... 안 나? 하나도?
그렇지. 뭐.
반장까지 했으면서?
안 그래도 4학년인가 5학년 때 반장 했었어. 근데 몇학년 때 했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
정말 기억력 안 좋네. 한석이.
어라? 뭔가 이상하다.
근데 내가 반장 했던 건 어떻게 알았어?
아, 전에 들은 것 같아. 왜 있잖아, 전에 떡볶이 먹을 때 그 때 니가 말했어.
그랬던가?
뒤통수를 긁적여보지만 그랬었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없다. 국민학교 이야기도 했었던가. 그때에. 내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현아가 재차 물어본다.
암튼 넌 지금 여자친구 있을 거 아냐?
나? 내가 여자친구 있는 것처럼 보여?
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여자한테 대하는 게 익숙한 거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당연히 여자친구 있는 줄 알았지. 아까 낮에 보니까 그 빅토리아라는 분이랑도 친근하게 이야기 잘 하고 있었고.
오오. 신이시여. 나 최한석. 드디어 이런 말까지 들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는 여자라고는 엄마와 사촌누나들, 과에 몇 명 있지도 않은 선후배가 다였던 제가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장족의 발전을 하였습니다. 지혜, 명희, 효진, 리사, 마리, 예린, 소란, 유진, 선영... 이 모든 게 그대들의 은공이다. 그나저나 비키랑 내가 그러고 있는 게 이야기를 잘 하는 것처럼 보이더냐, 니 눈에는. 그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잘라 거절할 필요가 있었다.
비키랑은 친근한게 아냐. 그냥 그 녀석이 들러붙는 거지.
그래? 흐음.... 한석이 취향도 쭉쭉빵...뭐, 그런 거라면서. 빅토리아 씨 정도면 좋겠네?
아오. 너까지 그 이야기 자꾸 할래! 그만 좀 하셔요들.
현아는 입을 가리고 살짝 웃었다.
나 안 그래도 우리 동네에서 그 영어 선생님 몇 번 본 적 있는데.
어, 그래?
응. 일부러 본 건 아니지만 머리 색이 눈에 띄잖아. 최근에 자주 봤어. 우리 동네 근처에 사나봐.
그랬구나.... 암튼 그 녀석 이야기는 좀 빼자. 내가 다 귀찮다.
귀찮을 정도로 여자가 많은 거야, 한석이는?
이런 오해까지 사다니. 나란 남자. 훗.
어쩌다보니 여자들이랑 친하게 지낼 기회가 늘어나서 그래 보이는 거지... 근데 지금은 사귀는 사람은 딱히 없어.
순간 선영과 리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렇다고 그녀들과 내가 딱히 사귀는 사이라거나 미래를 약속한 적은 없었다. 조금 찔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한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
응.
그래? 난 지레 짐작으로 넌 당연히 여친 있을 줄 알고 그래서...
무언가 더 말하려던 그녀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데 그녀는 고개까지 돌리더니 딴청을 피운다.
저기 버스 온다.
이상하다. 뭔가 더 말하려던 것 같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와 함께 버스를 타고 동네로 향했다. 중간에 한 번 갈아타기까지 하고 우리 동네로 도착하고 나니 시간이 꽤 늦어있었다. 길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어 그냥 보내기가 뭣해서 현아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녀의 집은 시장을 중심으로 우리 집에서 조금 반대편에 있는 주택지역에 있었다. 어떤 이층 양옥집 앞에 도착한 그녀는 발을 멈췄다.
여기야. 바래다 줘서 고마워.
아니, 뭐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얼른 들어가봐.
응. 내일 보자.
그녀는 손을 흔들어 보이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발걸음을 돌려 골목을 빠져 나왔다. 큰 길 쪽으로 나가려는데 누군가 날 불렀다.
Hey, Gentleman!
......어쩐지 뒤돌아보기 싫어서 그냥 무시하고 걸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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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근이 지못미.
선영이 루트에서는 현아를 Get 했던 그였지만... 과연?
그러니 남자는 업소나 야동을 멀리하고 확고한 여성관을 가지는 것이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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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뛰어오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내 어깨를 짚는 손이 느껴졌다.
야, 부르는 데 씹냐?
.......누구세요.
아, 진짜. 이러기야? 아니면 젠틀맨이라고 부르니까 본인이 신사가 아니라서 찔려서 대답 못 한겨? You brute!
아니거든.
화를 버럭 낼까 하다가 그래보았자 또 말려들겠다 싶어서 그냥 낮게 대답했다. 비키는 뭐가 웃긴지 키득거리면서 내 곁으로 오더니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힐끔 보았는데... 어라? 녀석은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눈매는 별로 그렇지 않았다. 살짝 얼룩도 있고.... 애써 일부러 웃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본인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걸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그냥 가만 있었다. 근데 이 녀석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날 미행이라도 한건가?
이야, 근데 정말 신사적인데? 대개 그렇게 바래다주면 찐하게 굿나잇 키스라도 해서 들여보내는거 아닌가? 그게 아니면 좀 더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밀어붙여서.....
비키미행설에 확증이 더 붙는다. 대체 어디서부터 미행 했기에 그걸 다 보고 있었지?
너 무슨 ... 미행 같은 거 하냐? 나를?
내가? 너를? 푸하하하하.
녀석은 한참을 낄낄거리며 웃다가 골목 한 쪽을 가리켰다.
내 친구가 저기 자취하는데 말이야. 거기서 나오다보니 너랑 그 현아라고 했던가? 둘이 오는 게 보이더라구.
아, 현아가 이 녀석을 동네에서 봤다고 했었지. 지나가다가 날 본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은 들러붙어서 괴롭히고 있고.... 이래저래 녀석이 귀찮은 내가 잠자코 있으니 녀석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래서 인사라도 할까 했는데 둘이 분위기나 시츄에이션이 묘해서 그냥 조용히 있었지.
묘하긴 뭐가 묘해! 그냥 바래다 줬구만!
그래? 너는 아니라도 현아는 안 그런 것 같던데? Isn't she lovely?
녀석은 주로 헛소리를 할 때 말미에 영어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
헛소리 좀 그만 하셔요.
으음. 이렇게 좋은 힌트 서비스는 어디가서 돈 주고도 못 받는다고.
필요 없거든요.
가만 냅두면 헛소리 레벨이 점점 올라가는 신기한 녀석이다. 비키는 놀란 듯한 제스츄어를 과도하게 취하며 말했다.
이야. 이미 배가 부른 모양이네. 가만 있어보자. 어라 혹시 벌써 둘이서.....?
아, 쫌!
점점 듣고 있자니 못 하는 소리가 없다. 화를 버럭 내고 발걸음 속도를 더 올려 떨쳐버리려고 하는데 이 녀석도 기럭지가 되는지라 뒤쳐지지 않고 따라온다.
왜 화를 내? 난 둘이서 벌써 저녁 먹었냐고 물어본 건데. 대체 뭘 생각한 거야? Something erotic?
........예, 예. 제가 죄송합니다. 그러니 제발 저리 가주세요. 전 집에 가야되니까요.
너 정말 현아랑 아무 사이 아냐?
그렇데도!
흐음. 그렇다면 뭐. 내가 잘못 봤나....?
시장에 도착했을 쯤 비키는 손을 흔들며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마주 손 흔들어줄 의리도 없는지라 그대로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저 녀석은 대체 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기에 나한테 들러붙는 건지 통 알 수가 없다. 지난주에는 얼굴 마주쳐도 입 꾹 다물고 있었기에 대화조차 없었는데 이번주부터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아주 입에 모터를 달았다. 한숨을 푹푹 쉬며 집까지의 걸음을 재촉한다.
집 근처 골목을 들어서는데 빌라 근처에 눈에 익은 실루엣이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키와 몸매를 가늠해 볼 때 리사와 예린이 틀림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들어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한테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어쩐지 분위기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골목 전체에 냉기가 서리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딱 멈추었다. 예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리사는 다소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칠성 애새끼들이나 태무 떨거지들 설치는 거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해서 그런 거 저한테 일일이 다 보고 하고 그래야 되요? 나 지금 서울에 와 있는 거 안보여요?
아가씨. 다들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화로 다 알려줬잖아요. 형제들은 뭐하고 계신거죠? 다들 날로 놀고 먹으라고 그 자리에 있는 거예요, 지금? 더군다나 송 부장 아저씨는 대체 어디서 뭐하고 있구요?
날이 바짝 선 리사의 말투는 종이를 베는 칼처럼 예리하고 무서웠다. 그러나 예린의 말투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침착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 형제들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아가씨가 요즘 들어....
요즘 들어, 뭐요? 해이해졌다고요? 지금 그 말 하려고 하는 거예요?
예.
나 이번에 부산 내려가서 그 헛소리 지겨울 만큼 들었어요. 언니까지 그래야 겠어요?
예린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이 리사의 화를 더 돋구는 모양이다.
병실과 집에만 갇혀서 살던 제가 이제 조금 사제 공기 좀 맛보고 일반인 흉내 좀 내봤어요. 그래서요? 그래서 무슨 큰 문제라도 있어요? 나 하나 없다고 조직이 무너지기라도 해요?
그러나 예린의 말투는 여전할 따름이다.
그런 이야기도 없지는 않습니다.
리사가 예린을 똑바로 쳐다본다. 키 차이가 있어서 조금 올려다보긴 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위압감이 조금이라도 감쇄되진 않는다.
그래서요. 설마 감히 내게 지금 불만이라도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요? 그래요?
.......
하!
리사는 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