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65)

여태까지의 스토리 요약 

(데이트 첫 날, 다시 데이트 첫 날, Route B와 Route D 거쳐서 현재까지)

대학생 최한석은 우연한 기회에 이명희와의 소개팅에 나갔다가 명희는 못 만나고 김지혜를 만나서 관계를 맺는다. 지혜는 한석의 맞은 편 집으로 이사를 오고 한석은 지혜의 친구 효진과도 관계를 맺는다. 한석은 지혜에게 고백하지만 지혜는 곧 결혼하게 된다며 그를 퇴짜놓는다. 그리고 바로 얼마 후에 지혜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다. 명희와도 좋은 관계가 되려나 싶었는데 몇 번 엇갈리고 나서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한편 한석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외를 하는데 과외를 받는 여학생의 이름은 진유진. 엄마의 이름은 진유미. 그리고 유진을 끔찍히 아끼는 언니 한선영이 있다. 유미와 선영은 ROSE라는 룸살롱에서 일한다. 지혜에게 차이고 그 분풀이를 ROSE에서 하다가 선영에게 덜미가 잡혀 손해금액 변제 대신 선영을 과외하기로 한다.

또한 한석은 올해 신입생 중에서 특이한 녀석을 알게 되는데 그녀의 이름은 김마리. 그녀와 쌍둥이 언니인 김리사와 리사의 수행원인 성예린은 한석의 맞은 편 집으로 이사를 온다. 여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리사의 말에 한석은 지혜에게 연락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러나 한석은 지혜를 연락처를 알지 못해 연락을 하지 못한다.

개강을 하고 나서 마리와 항상 붙어다니던 한석은 유진이가 부속고등학교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예전에 선영의 집에 있던 모습을 들킨 여자아이가 유진이 친구 양소란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또한, 우연한 기회에 리사와 놀이공원에서 데이트를 갖는다. 한석의 생일을 앞두고 어머니가 상경을 하게 되어 리사에게 도움을 많이 받는다. 옛 팝송을 듣고 눈물을 보인 어머니에게서 예전에 집나간 이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한석의 생일파티에서 술을 마시게 된 유진을 집에까지 데려다줬는데 다음날 연락을 해보니 유진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았다. 그래서 한석은 일단 수업에 갔다가 중간에 빠져나와 유진에게 가기로 마음 먹는다.

그러면 이제, 더블 데이트 Route F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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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유진이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수업을 아예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단 수업에 들어가기로 한다. 공대 실험실로 향한다. 익숙한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며 수업 시작을 기다린다. 같은 조원인 두 녀석은 둘 다 3학년이라 나에게 조장을 맡겼다. 좀 귀찮아지긴 하겠지만 프로젝트 방향을 내가 원하는 쪽으로 이끌고 갈 수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수락했다. 시간이 되니 조교가 들어와서 출결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후아. 들어오길 잘 했군.

아! 늦었습니다!

출석 체크가 거의 다 끝나갈 때쯤, 실험실 뒷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늦은 주제에 배짱도 좋군...이라는 생각으로 돌아보았다가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저 인간도 이 수업 듣는 거였어? 게다가 더 어처구니 없는 건 저 쓰레기 같은 놈이 나랑 한 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마음 같아서는 조교에게 항의라도 해서 조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조는 다들 네 명씩인데 우리 조만 세 명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야. 잘 부탁한다. 존나 모범생 최한석 씨? 너만 믿고 있으면 에이뿔은 문제 없겠네. 안 그래?

재윤은 비아냥 거리는 말투를 흘리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몹시 기분이 상한 나는 이를 악물고 답했다.

전원 다 함께 해야 하는 프로젝트 수업이니까요, 재윤 선배. 착실하게 임해주세요.

 이 새끼. 여전히 재미없게 사는 구나? 응?

 선배처럼 난잡하게 살지 않는 것 뿐이죠.

나도 모르게 격한 반응이 터져 나온다. 재윤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히히 웃고 만다. 3학년인지라 영문을 모르는 나머지 조원들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나와 재윤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보드의 작동 원리를 먼저 규명하고 목표치를 선정합니다. 첫번째로 제출할 건 이번 학기 내에 여러분이 만들어낼 보드의 사용처, 목적, 그리고 상세한 설명 등을 담은 레포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해당 레포트를 요약 정리한 OHP를 발표하도록 합니다. OHP 안하고 프리젠테이션 파일 가져와서 발표 하실 조는 미리 말씀해주시구요.

수업이 시작되고 이번 학기동안 진행될 프로젝트의 도입부에 대한 조교의 설명이 이어졌다. 평가와 직결되는 항목이기 때문에 하나도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이야기다. 노트에다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는데.... 있었는데..... 저 맞은 편에 앉아 후배 하나를 붙들고 노닥거리고 있는 인간 때문에 울화가 치민다.

야, 진짜 꼬시기 쉬운 애들은 예대 애들이 아냐. 문과대 애들 얼마나 어리버리한지 모르지? 걔들이 진짜 공부만 하고 대학 붙어서 들어온 애들이 태반이거든. 특히 기숙사생 애들. 원래 조금이라도 놀 생각 있는 년들은 기숙사 안 들어가. 그러니 기숙사 애들 잘 꼬셔 술 몇 잔 먹이면 바로 골뱅이 되는 거거든. 골뱅이 몰라? 이 새끼, 괜히 모르는 척 하지마, 임마. 푸하하하.

내 옆에 앉은 경태라는 후배 녀석은 내가 하듯 잠자코 조교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고 마레기 옆에 앉은 재민이라는 녀석은 꼼짝없이 마레기의 노가리 까기에 동참하고 있었다. 설명을 마친 조교가 밖으로 나가고 조별 토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마레기의 쓸데없는 짓은 여전했다. 토의 참석은 고사하고 괜한 사람까지 제대로 못 하게 막고 있다. 참다 못한 내가 결국 한 마디 한다.

선배. 지금부터 역할 분담 할 건데 신경 좀 써주세요.

 니가 다 알아서 해, 임마. 조장은 왜 뽑냐. 그런 거 다 알아서 하라고 뽑는 거 아냐?

키득거리며 되도 않는 소리를 주워 삼키는 저 면상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꾹 참는다.

그럼 제가 알아서 다 하겠습니다. 경태랑 재민이는 자료 조사 해오고 제가 발표 준비할테니까 재윤 선배는 레포트 써 오세요.

 어, 뭐야. 레포트도 조장이 써와. 발표할 사람이니까 미리 준비하는 셈 치면 되겠네.

 그럼 선배는 뭐하게요?

 나? 요렇게 꼽사리로 있다가 학점 따가는 거지, 뭐. 별 거 있나.

저 혼자만 웃기다고 연신 키득거리고 있다. 3학년 후배들은 내 눈치를 보고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있었다. 재윤은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잠시 후,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 맞다. 니 요새 맨날 옆구리에 여자 끼고 다니더라? 그 뭐더라? 마리인가... 마리아인가. 그 부산 애 말야. 혹시 벌써 땄냐?

 뭐라구요?

 아직 안 땄으면, 내가 먼저 따도 되냐? 예전에 내가 부산해양대 애들 꼬셔서 존나 해먹었잖아. 그 쪽 애들이 질이 참 좋아. 질이.

더는 못 참겠다.

........그럴 거면 나가세요.

 뭐?

 나보고 조장이라면서요? 조장의 권한으로, 선배랑은 도저히 한 조 못하겠으니까 나가주세요.

목소리를 올리면 더욱 분통이 터질 것 같아서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서야 여태 이죽거리던 재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못 나가겠다면?

 ..........

 안 나가겠다면? 씹새야. 왜? 너도 니 동기 새끼처럼 나 한대 치게? 엉?

 좋은 말로 할 때 나가주시죠.

 말로 하지 말고 한 대 쳐봐, 새끼야. 니 놈도 콩밥 먹어볼래? 아니지. 준규 그 새끼는 콩밥이 아니라 짬밥 먹으러 갔구나? 응?

쾅!

실험 테이블이 재윤의 면상이라고 생각하고 내리쳤다. 사람을 치는 건 예전의 그 술집으로 족하다. 떠들썩하던 실험실이 삽시간에 조용해진다. 다른 조들도 전부 우릴 보고 있다. 나는 재윤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선배면 선배답게 행동해주세요. 일단 조교에게는 우리 조는 세 명뿐이라고 이야기 해두겠습니다.

 뭐? 이 개새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재윤을 다른 사람들이 와서 뜯어말렸다. 의자와 테이블을 걷어차며 발광하는 마레기를 뒤로 하고 실험실에서 나와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이지 이 수업을 수강취소 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3학점짜리 전공이고 2학기에 따로 있는 수업도 아닌지라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한다. 

등뒤에서 마레기가 고래고래 내 이름을 부르고 거기에 아주 걸쭉한 욕을 섞어서 퍼붓고 있는 걸 애써 외면하고 공대 건물을 빠져 나온다. 머리 속이 복잡하다. 혹시나 싶어 학관으로 가보았지만 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 학교를 빠져 나왔다. 택시 하나를 잡아타고 유진이네 아파트로 향한다. 집으로 가서 벨을 눌러도 유진이가 나오질 않는다. 문을 두드리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하아. 이 방법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는데....

유진이네 집 현관은 넘버락 시스템이었다. 전날 유진이를 데려다 주면서 녀석이 누르는 번호를 무심코 봐버리고 말았었다. 외우기도 심플했다. 이 집 전화 번호 뒤의 네 자리였으니까. 번호를 누르니 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유진아.

집 안으로 들어서서 조심스럽게 유진이를 불러보았다. 여전히 답이 없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 안처럼 황량했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가 유진이 방으로 다가간다. 노크를 하고 나서 문을 살짝 열었다. 침대 하나에 책상 하나.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벽에 연예인 브로마이드 한 장도 붙여놓을만도 한데 그런건 전혀 있지 않은 참 담백한 방안이었다. 방의 인상이 참으로 녀석 답다는 생각을 해본다. 유일한 장식이라면 장식일까. 어디서 많이 본 눈만 커다란 인형이 창가에 올려져 있다. 이불을 둘둘 감싸고 침대 위에 누워있는 유진이가 보였다. 

유진아. 자니?

침대로 다가가 살펴보니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다.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서 이마에 달라붙어 있다. 욕실로 가서 수건을 하나 가져와 얼굴을 닦아주었다. 두 눈은 꼭 감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데 숨소리가 몹시 거칠다. 자고 있는 건지 깨어있는 건데 아무 말이 없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어깨를 짚고 살짝 흔들어본다. 그제서야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아저....씨?

 알아보겠냐? 어디가 안 좋아? 속 많이 안 좋아?

 추워요.....

 춥다고? 감기인가?

손을 이마에 대본다. 불덩이 같다. 어제부터 어쩐지 몸이 뜨겁더라니. 몸살이 분명하다. 이불을 잡아 당겼다. 녀석이 이불을 놓지 않아 잠시 끌려왔다.

춥다고 이불 뒤집어 쓰고 있으면 안 돼. 너 몸에 열을 내려야 된다고.

 추운데.....

 허이구.... 집에 혹시 해열제나 뭐 그런 거 있어?

고개를 젓는다.

밥은 먹었어?

다시 한번 도리도리.

빈 속에 약 먹기는 좀 그렇고... 일단 뭐라도 좀 먹은 다음에 약 먹자. 그 전에 몸에 열 낮추는 게 우선이야.

그제서야 고개를 좀 끄덕인다. 땀에 절은 머리와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온 몸이 땀투성이일 거 같다. 욕실로 가서 수건을 몇 장 더 가져왔다.

먹을 거 있나 찾아볼테니까 넌 그 사이에 옷 갈아입고 있어. 새 옷 입기 전에 수건으로 몸 좀 닦고. 땀 난 채로 있으면 더 안 좋아.

유진의 고개가 천천히 위 아래로 움직인다. 부엌으로 가서 뒤져보니 다행히도 밥통에 밥이 좀 있었다. 냄비 하나를 꺼내 밥과 물을 담고 가스렌지에 올린다. 간장을 찾는다. 밥과 물, 간장만 있으면 미음 정도는 쑬 수 있겠지. 라면 하나도 제대로 못 끓이는 나지만 어렸을 때 엄마가 이런 식으로 미음을 만드는 걸 가르쳐 준 적이 있다. 냉장고를 뒤져보니 주스 같은 것도 제법 있다. 주스 하나를 꺼내놓고 다른 걸 살핀다. 식재료도 있는거 같긴 한데 내가 조리할만한 건 없었다. 밥이 어느 정도 풀어지도록 주걱으로 저어가며 끓인다. 한참 저어보니 어느 정도 풀어진 것 같아 가스불을 끈다. 유진을 불러서 먹여야 겠다.

옷 다 갈아입었어?

방문을 두드리고 물어보는데도 아무런 대답이 없다.

나 들어간다?

역시 대답이 없다. 다시 잠들었나, 설마? 행여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흐음. 미...미안!

황급히 문을 도로 닫았다. 티셔츠를 벗은 채로 침대에 앉아있는 유진을 봐버렸다. 분홍색 브래지어에 담긴 야트막한 가슴의 모양새까지 봐버렸다. 그러나 방문 너머 들려오는 유진의 목소리에는 나를 책망하거나 탓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저씨.... 좀 도와줘요.

 뭐?

 등에 손이... 안 닿아요....

 그래도 내가 어떻게...

 빨리요,.....

 그럼... 지금 들어간다?

다시 한 번 문을 살짝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젖은 티셔츠를 손에 들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유진이 있었다. 브래지어만 입고 있는 상체가 몹시 신경 쓰이긴 했지만 애 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일단 곁으로 다가간다.

티....하나.... 벗는데....힘..... 다 썼어....요.

 원래 젖은 거 벗는 건 좀 그렇지. 돌아봐봐.

침대에 나란히 앉아 녀석의 몸을 돌려 등을 대한다. 땀이 흥건한 등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브래지어에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등만 닦아 내려간다. 그런데 유진이가 팔을 뒤로 돌리더니 후크를 푼다.

에에....!

브래지어라도 하고 있다면... 그래, 그 뭐시다냐,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사람 등짝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만 이러면 경우가 완전히 달라진다.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려니 유진이가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이것도... 다.... ..젖었네요...

 그...... 그러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애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자애 아닌가. 앙증맞은 레이스가 달린 분홍 브래지어가 그대로 바닥에 구른다.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유진의 등이 내 눈앞에 고스란히 놓여있었다. 그리고 이 앞 쪽으로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전경이 펼쳐져 있겠지. 으으.. 상상은 하지 말자. 상상은. 이 녀석은 지금 아프다고. 수건으로 등 전체를 깨끗이 닦았다. 어깨와 옆구리를 닦을 때는 나도 모르게 두근거렸다. 아래는 파자마 같은 걸 입고 있었는데 고무줄로 되어 있는 부분이 조금 내려가 있어서 녀석의 분홍색 팬티가 살짝 엿보였다. 이상한 기분이 자꾸 들기에 서둘러 마무리하고 일어난다.

자, 등은 다 닦았으니까... 앞은 네가 닦으렴.

등을 다 닦고 나서 일어나려는데.... 세상에나. 

잠깐만요.

내게 등을 보이고 있던 유진이가 몸을 돌린다. 이...임마! 너 지금 위에 아무 것도 안 입은 상태란 말야.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그 쪽을 쳐다보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유진은 태연한 목소리로, 그리고 또렷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마저.... 닦아주세요......

 그....그게.....

 왜요? .. 설마... 아픈 사람을 상대로 흥분을 하는 거에요?

 그럴 리 없잖아. 이 바보야.

이 녀석 정말 아픈거 맞나. 이럴 때만 말투가 아주 또박또박이다. 물론 꾀병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몸의 열이나 땀이 장난이 아니라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 

흠흠. 알았어. 빨리 닦아줄게.

 네.....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다시 앉아 녀석의 앞 부분을 닦기 시작한다. 아무리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여자의 알몸은 남자로 하여금 달아오르게 만드는 묘약이라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평소보다도 더 하얗게 질린 얼굴이지만 두 뺨만큼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만히 감고 있는 두 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녀석도 긴장하고 있는 것 같다.

뭐해요... 지금 감상하는 거에요?

 아, 아냐!

얼굴 아래 쪽으로는 안 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다. 안 보고 닦으려니 더 이상하다. 제대로 시선을 몸에 두고 수건으로 녀석의 몸 전체를 닦아준다. 작은 밥그릇을 뒤집어 놓은 듯한 둥근 유방도, 그 위에 살짝 얹어놓은 듯한 분홍빛 유륜과 유두도. 쌕쌕거리는 숨소리에 따라 들락날락 하고 있는 뽀얀 뱃살 부분도 너무도 뇌쇄적이다. 그러나 그만큼 빨리 뇌리에서 지워야만 한다. 오래 보고 있으면 나까지 열이 옮아 이상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록 수건 너머라고는 하지만 살결을 따라 움직이는 내 손에 와 닿는 그 느낌이.... 말로 표현을 못 하겠다. 손에 와 닿는 감촉이 내 말초감각 하나하나를 일깨운다. 여자 알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왜 이럴까.

새삼 내 숨소리가 신경 쓰인다. 혹시 거칠어지진 않았을까. 이런 걸 가리켜서 속된 말로 차려놓은 밥상이라고 한다지. 아니다. 지금 내가 무슨 망발을... 그러나 우리가 아주 야한 영상을 가리켜 살색 영상이라고 표현하듯이 지금 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건 살색 몸. 여리디 여린 살색 몸. 분명 몸이 좋지 않아 흘리고 있는 땀마저도 마치 그런 은밀하고도 거친 행위 후에 몸에서 흐르는 땀을 연상시키는 아찔한 광경이다. 복잡한 머리 속 생각들을 애써 억눌러가며 기계적으로 녀석의 몸을 닦아낸다. 내 손길이 닿을 때마다 유진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진다. 온 신경이 거기에 쏠리다 보니 난 어느 새 주변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 하고 있었다. 현관이 열리는 소리도. 방문이 열리는 소리도. 누군가가 이 방에 들어오는 소리도.

지....지....금......... 뭐하고 계신 거죠? 최. 한. 석. 씨?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보니 방문에 웬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아니, 그림자가 아니라 선영이었다. 입고 있는 검은 옷과 대조적으로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들이 떨어진다. 바닥에 뒹군다. 그녀는 뚜벅뚜벅 그대로 내게 걸어오더니 손을 높이 들었다. 무어라 변명을 하기도 전에,

찰싹-

손바닥이 아니라 숫제 주먹으로 친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얼얼한 충격이다. 내 얼굴이 홱 돌아간다. 유진이 당황하여 선영을 향해 일어서려고 했다.

언니! 그게 아니라!!

 넌 가만 있어!

유진을 밀어낸 선영의 손이 내 멱살을 잡더니 들어올린다. 그녀의 눈이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말해! 대체 이게 뭐 하자는 짓이야!!!

──────────────────────────

*

더블 데이트 Route F 시작합니다. 

Route E와 타임라인이 많이 겹치고 미리 써놓은 이야기가 많아 바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등장인물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Q : 명희 씨, 요새 어떻게 지내요?

 명희 : 별 거 있나? 그냥 병원갔다가 퇴근하면 놀러가고 뭐 그렇지.

 Q : 더블 데이트에 다시 나올 생각 없으세요?

 명희 : 내가 나가면 한석이 곧장 죽을 텐데 괜찮겠어?

 Q : ......인터뷰 감사합니다.

써야 할 레포트가 있었지만 펜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침대에 누워 이리뒹굴 저리뒹굴하며 시간을 죽였다. 이제 과외를 그만 두었으니 알바를 다시 구해야 하나 아님 용돈을 더 보내 달라고 해야 하나도 고민한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문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요~ 선배님예. 안에 있는교?

마리였다. 문을 열어보니 마리가 머쓱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아까 앞집에는 아무도 없던 것 같던데 이제 들어온 건가?

무슨 일이야?

 열쇠를 두고가가... 언니야에게 전화했드니 들어올라면 한참이라네예. 선배집에 쪼매만 있으면 안 되겠심니꺼?

하아. 이 녀석은 어쩜 이리도 타이밍이 최고일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안 돼.

 엣? 에에....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당연히 허락할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마리의 당황한 표정이 꽤나 볼만하다.

나 지금 나가서 술 한 잔 하려고 했거든.

 술예?

 응. 혼자 마실까 했었는데... 너도 같이 나갈래?

그러자 마리가 히죽 웃으면서 답했다.

하모요!

 모르긴 몰라도 내가 사주는 마지막 술이 될지도....

 와예? 이제 술 끊으실랍니까?

 그런건 아닌데.... 돈 버는게 없어지니까 이제 근검절약 해야지.

처음에는 술집을 갈까 생각도 해보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도 꽤나 무시 못할 비용이었다. 단골 치킨집에 가서 집으로 배달 하나를 시켜놓고 근처 슈퍼에 가서 소주와 맥주를 사왔다. 마리가 쭐래쭐래 따라와 과자 몇 개를 계산대에 스윽 올려놓는다. 집으로 돌아와 상을 펴고 일단 술을 따랐다. 30대 70의 소맥 정량 비율이 황금 비율이로다.

몬 바람이 불어가 혼자 술 드시나 했는디... 과외 짤렸심까?

 짤리다니... 내가 그만 둔거야.

사실 짤린 게 맞긴 하지만.

와예? 유진이가 말 안 듣나보네예?

새우깡 봉지를 뜯던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본다. 난 새우깡 하나를 집어 들어 우적우적 씹으며 중얼거렸다.

너무 잘 들어서 탈이랄까....

과유불급. 차라리 유진이가 남자애였거나 날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냥 무난하게 계속 과외를 했을텐데 말이다. 못 가르쳐서 짤리거나 가르치는 녀석의 성적이 영 안 나와서 짤리는 거면 차라리 받아들이기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던 마리는 이해가 안 간다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봉지를 넓게 뜯어 상위에 펼쳐놓고 자기도 하나 집어먹으며 말한다.

아가 억수로 귀엽게 생긋는데.... 선배님 쪼까 아깝겠심니더.

 아깝다니. 뭔 소리냐.

 거 왜, 있잖심니까. 잘 키워가 나중에 델꼬 가는 거.

 푸핫. 내가 무슨 민며느리 들인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마셔, 임마.

전혀 엉뚱한 포인트에 집중하고 있군. 일단 녀석과 잔을 부딪힌다. 첫 잔은 원 샷. 저녁도 안 먹고 마시는 술이건만 잘만 넘어간다. 잔을 비우고 캬- 하는 소리를 내뱉은 다음 아까 궁금했던 것을 묻는다.

참.... 아까 학관에 가봤는데 없더라? 조원될 사람들 만난다며?

 아, 맞나긴 했는데예. 학관이 원체 시끄러버가 공대에 빈 강의실로 옮겨가가 했심니더. 조 이름이랑 주제 같은 거 대충 마 잡았는데...

 그랬구나. 뭐, 알아서 하고 나중에 월요일 날 보고 다시 이야기 하지 뭐.

 그럴까예? 근데 갸들이 기숙사생인데예....

분명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을텐데 뭔 그리 이야기를 많이 주고 받았는지, 마리가 하나씩 꺼내놓는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었다. 걔네들이랑 저녁까지 먹고 돌아오느라 지금 들어온 모양이다. 그 덕분에 나는 아직 만나지도 않은 남은 조원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 안경테 색깔까지 말이다. 수다왕 마리의 이야기가 한창 이어지는 와중에 치킨이 도착해서 난 그걸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마리도 다리 하나를 집어서 열심히 뜯다가 뭔가 생각난 모양이다. 간신히 치킨으로 막아놓았던 입이 다시 열린다.

아참, 지 나올때예. 그 선배도 만났는데예.

 그 선배? 누구?

 거 왜. 있잖심니꺼. 접때 학관에서 선배랑 밥먹다가 만나가... 선배가 자리 차뿌리고 일어났던 날....

학관에서? 마리랑 학관에서 본 선배?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인물에 대해 떠오르자 손에 들고 있는 치킨 맛이 뚝 떨어질 정도로 기분이 나빠진다.

마렉...아, 아니. 재윤 선배 말야?

 야.

 어디서?

 저희가 밥을 후문에 있는 분식집에서 먹고 나왔는데예 애들이랑 후문에서 빠빠이 하는데 거서 봤심니더.

 후우.... 안 그래도 오늘 그 선배랑 나랑 한바탕 했었는데....

궁금해하는 마리에게 오늘 수업에서 있었던 일을 짧게 요약해서 들려준다. 마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 선배님은.... 어쩐지 뭔가 좀 분위기가 안 좋던데예.

 선배도 아냐! 그런 자식은..... 휴우.

전에 없이 격한 반응을 보이는 날 보며 마리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 분이랑 한석 선배야랑은 왜케 사이가 안 좋심니꺼?

어쩔까 싶다가 기분도 꿀꿀하겠다, 뇌에 알코올 코팅 좀 했겠다.... 내침김에 3년 전에 있었던 일을 가감없이 마리에게 들려준다. 나와 같은 학번인 녀석들이 마레기를 증오하게 된 계기를 듣고 있던 마리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다가 마지막 대자보 이야기까지 나오고 나니 경악을 금치 못한다. 마리는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세상에나..... 금마 엄청 쥑일 놈이네예! 아니, 어떻게 그런 놈이 학교에 계속 나옵니꺼!

 내 말이.....

비어있는 마리의 잔을 채워주자 녀석은 단번에 들이킨다. 목이 바싹바싹 타는 모양이다. 하긴 나도 그런데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녀석은 또 어떠겠는가.

점마, 그러고도 안 잽혀갑니꺼?

 친고죄라서 당사자가 신고 안 하면 안 된데.

친고죄가 뭔지 못 알아듣는 마리에게 몹시 아름다고 훌륭한 우리나라의 미풍양속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준다. 마리는 채은이가 그런 식으로 대자보만 붙이고 가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마레기를 고소했었어야 한다는 거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그때의 동기들을 떠올렸다. 이런 주장을 하는 녀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여자가 그렇게 되면 신세 망친다고 하지?

 신세여?

 그래. 신세. 그런 이야기가 길어지고 공론화 되면 가장 상처 받는 사람은 누구일꺼 같아?

 그야 당연히 재윤 선배 아닙니꺼?

난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가장 고통 받는 사람은 당사자인 채은이야. 예전에 S대에서 있었던 우조교 사건 몰라?

 모르는데예. 지는 부산에 있었는데 서울 일을 우째 압니까?

 .....임마. 넌 신문도 안 보고 사냐.

마리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스치지도 않았건만 마리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아프다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움마야. 하아.... 그럼 아까 지헌티 한 소리도 결코 좋은 소리가 아니였갑네예.

 너한테? 뭐라 그랬는데?

눈을 부릅뜨고 마리를 노려본다. 내 기세에 놀란 마리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내보고 한석이 깔이라고 한석이한테만 주지 말고 지한티도 한 번 주라고..... 저는 첨에 뭔 소린가 싶어가 뭐 선물이나 밥 사주는 이야긴갑다 하고 알긋다고 했는디.....

 뭐야?!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가 갑작스럽게 핑 도는 머리 때문에 다시 주저앉았다. 술에 강하기는 하지만 급히 먹는 술에는 나도 이렇게 핑 돌 때가 있다. 마리는 자기가 죄를 지은 것처럼 미안해했다.

참말 그런 소리인지 몰랐는데예.... 분위기가 좀 이상타 하긴 하지만 제깐에는 선배라고 그냥 인사하고 지나온긴데 그런 소릴 해가가...

나는 침대를 등에 기대고 앉아 고개를 젖혀 천장을 향하고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아아, 마리야. 내가 말했잖아. 그 선배랑은 되도록이면 엮이지 말라고.

 야.

 앞으로는 조심해.

 야아.....

마레기의 행태에 분노한 내가 화를 내고 마리는 그런 내 눈치를 보느라 둘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분위기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가만 있기 좀 그래서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너한테 화내는 게 아니야. 그냥.... 휴우. 아까도 들었지만 그런 선배가 근처에 있다는 게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야.

 분위기만 잡쳤다. 자, 한 잔 더해.

괜히 이야기했다고 생각했다. 결코 여자애한테 들려줄 이야기가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경고를 해놔야 마리도 마레기를 경계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마레기가 마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앞으로 마리를 될 수 있으면 혼자 다니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술이 거의 떨어져 갈 때 쯤, 졸음이 밀려왔다. 술에 취할 정도로 마신 건 아닌데 어제도 꽤나 마신데다가 무엇보다 정신이 피곤했다. 침대에 기댄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노라니 마리가 올라가서 자라고 권한다. 마리에게 상은 내가 나중에 치울테니 냅두고 돌아가라고 이야기해놓고 침대로 비척비척 기어올라간다. 마리가 불을 끄고 밖으로 나갔다. 안녕히 주무시라고 하기에 너도, 라고 답해주고 꿈나라로 향한다. 

몸에 열이 오르는 통에 옷을 벗어던졌다.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잠결에 문소리가 나고 뭔 소리가 더 나는 것 같았는데 확인하기 귀찮았다.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알몸의 유진이가 울고 있었다. 다가가 안아주려고 하였으나 왠지 몸이 무거워 녀석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녀석의 슬픔이 내게 전달되는 것 같다. 꿈 속에서, 난 좀 울었던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누군가 우리집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잠에서 덜 깬 나는 비몽사몽 간에 외쳤다.

누구세요!

 저에요, 리사!

그래, 리사구나. 아침부터 듣기에 참 맑고 경쾌하며 아름다운 목소리이긴 하지만... 오늘은 늦잠 자도 되는 토요일 아닙니까! 한창 잘 자고 있었는데.... 아침의 꿀맛 같은 단잠에서 깨어나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신세를 많이 진 리사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비척비척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내 팔을 점령하고 있는 어떤 머리 하나가 팔을 놔주지 않는다.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이다. 눈을 비비고 면면을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정신이 조금 돌자 그제서야 사태가 파악된다.

마리?

당황한 나는 현관 밖을 향해 소리친다.

리...리사 씨! 그게, 제가, 지금!!

 어머, 아직 안 일어나셨어요?

 아니, 일어나긴 했는데 얘가 안 일어났.......아니, 그게 아니라!

 천천히 씻고 옷 입고 나오세요. 저희가 기다릴게요.

저희...라고 하면 리사와 예린, 둘을 전부 말하는 건가? 한 놈은 여기에 있으니까 말이다. 이 녀석은 대체 언제 내 침대로 기어들어온거야? 혹시나 싶어서 이불을 들춰본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웃통을 벗고 자고 있기는 했지만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고 무엇보다 마리가 어제 입고 있던 옷 그대로의 차림이었다. 별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살짝 아까운데.... 으아아아아아!!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머리를 흔들어 요상한 생각을 빨리 털어내 버린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세수를 마치고 옷을 입었다. 마리를 깨워야 되나 어쩌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이 녀석을 깨워서 같이 리사네 집으로 간다는 건 지난 밤에 동침했다는 걸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혼자 간다. 앞집에 도착하니 맛있는 냄새가 가득 풍겨온다.

이게 웬 진수성찬입니까?

 한석 씨 오늘 생일이잖아요. 제가 새벽부터 준비했어요.

리사가 겸연쩍다는 듯 웃으며 말한다. 그러고 보니 미역국이 올려져 있다. 잡채나 다른 것도 그렇고 거참... 다들 손이 많이 음식들인데 아침부터 이렇게나 차려주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음... 어제부터 리사 씨에게 너무 신세만 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는데요.

 자꾸 신세라고 하시니까 좀 서운하네요. 제가 해드리고 싶어서 하는 거에요.

리사가 수저를 내주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정말 말 그대로 어여쁜 새색시 같다. 이 자리에 예린만 없다면 콱 안아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다. 그녀의 모습을 넋 놓고 보고 있는데 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묻는다.

근데 마리는 아직 안 일어났나 봐요? 깨워서 같이 오시지 그랬어요?

 푸홧!-

미역국을 한 입 떠먹으려다가 체할 뻔했다. 숟가락을 손에 들고 리사를 쳐다본다. 그녀의 생글거리는 표정이 무언가 의미심장하다.

어제 마리가 그쪽에서 자지 않았나요? 걔가 아침에 잘 못 일어나는 편이라 흔들어 깨우셔야 되요.

 그....그.....게 그러니까요......

 제가 들어가서 깨울까 하다가 아직 옷도 다 입고 둘 다 알몸으로 있으면 서로 난감할 것 같아서 그냥 안 들어갔는데.

 아뇨! 저희는 옷을 모두 다 입고 있었습니다!

 어머나, 코스튬 플레이인가요? 꽤나 매니악하시네요.

코....뭐시기가 대체 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매니악한 건 내가 아니라 그런 소리를 알고 있는 그 쪽 같은데? 대체 나랑 마리랑 어젯밤에 무얼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런 거 절대 아니구요... 그냥 그게 그러니까.....

 뭘 그렇게 쑥스러워 하고 그러세요. 남자가 그럴 수도 있죠. 마리는 제가 깨워올게요.

리사는 빙긋 웃어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을 나섰다. 뻘쭘하기 그지 없는 나는 돌부처 마냥 움직이지도 못하고 자리에 앉아 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상 건너편에 앉아있는 예린은 단 한마디도 안 하고 밥만 묵묵히 먹고 있다는 점에서 나의 이 뻘쭘함과 당황스러움을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졸려 죽갔는데.... 내 이따 묵으면 안되나?

 안 돼. 차려놨을 때 얼른 먹어.

 히잉.

잠에서 아직 덜 깬 모양으로 뒤통수를 북북 긁으면서 나타난 마리가 내 옆에 털썩 주저 앉는다. 녀석은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리사가 밥그릇과 수저를 챙겨준다. 내 앞에 놓인 밥그릇의 높이가 어째 다른 이의 두 배는 되는 거 같다.

리사 씨, 왜 이렇게 많이....

 어머, 어젯밤에 이런 저런 수고 많이 하셨을텐데 많이 드셔야 하지 않겠어요?

여전히 생글거리며 특히나 많이에 악센트를 두는 리사에게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내가 말을 할 틈을 주지 않고 자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또 생일이시잖아요.

계속 생글거리며 나를 보고 있는 리사를 상대로 도저히 눈싸움에 이길 자신이 없어 시선을 거두고 고개 처박고 밥만 먹기로 한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드세요. 생일 축하드려요.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데이.

 감사합니다.

자리가 바늘방석이라는 것만 차치한다면 생일 날 아침에 이만한 대접이라니, 나는야 정말 행복한 녀석이다.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제 엄마가 차려온 음식보다도 더 맛있었다고나 할까. 이래서 아들 놈은 키워봐야 다 헛방이라는 건가 보다. 다만 끊임없이 이것저것 챙겨주려는 리사의 행동이 꽤나 부담스러울 따름... 

오늘은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

맛은 있었지만 거북하기 그지 없는 식사를 간신히 마쳤다. 후식으로 커피를 끓여온 리사에게서 잔을 받아들었다. 

에... 딱히 없었는데요. 학교 가서 공부나 할까 했는데....

마음 같아서는 이 집에서 빨리 나가고 싶다. 더 정확히는 저 미소천사 리사의 시선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죽겠다. 그러나 리사는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역시 모범생이시네요. 저희는 어디 놀러 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요.

순수하게 감탄을 표하는 것 같아 보이긴 한데 어째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 리사는 마리를 돌아보았다.

전에 마리가 여기에서 신세지는 동안 남산에 다녀왔다고 하더라구요. 얘기 들어보니 재미있을 것 같던데 같이 안 가시겠어요? 일정도 딱히 없으시다면서요?

 그....그럴까요?

거절을 하면 큰일 날 것 같은 기분이라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했다. 여자들이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일단 나는 집에 돌아가 있었다. 어제의 흔적, 그러니까 먹다 남은 치킨과 빈 술병들을 치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리와 썸씽은 없었던 게 확실하다. 

아마도 내가 먼저 침대에서 잠이 들고나서 나중에 무슨 이유에선가 마리가 기어들어와 같이 잠만 잤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남녀가 같이 잤다라는 게 단순한 sleep이 아니라 또 다른 s로 시작하는 단어로도 받아들여 질 수 있다는 점에서 리사의 오해는 근거가 아주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대체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난감할 따름이다.

으아아아아악!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를 한 번 내질렀다. 고민이 많아봤자 아무 소용없다. 빨리 털어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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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 리사 본색 드러내기 루트.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하다가 예전에 유진이네서 받아온 정장을 입어본다. 그나마 이게 제일 낫다. 캐쥬얼한 느낌의 단색 남방을 안에 입고 타이를 매지 않으니 그렇게 딱딱한 느낌도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 기다리고 있으려니 예린이 제일 먼저 나와 차를 가지고 와서 빌라 앞에 댔다. 차 문을 열고 먼지 털이개를 꺼내더니 차를 닦기 시작한다. 시간이 꽤 흘렀다. 빌라 쪽을 한번 돌아보고 예린에게 묻는다.

리사 씨랑 마리는 아직 인가 보죠?

 ........여성들의 준비시간은 원래 깁니다.

예린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린 씨는요? 예린 씨도 여자잖아요.

 .......저는 일상복이랑 외출복이 차이가 없으니까요.

 아아...

그녀는 대답이 항상 늦었다. 뜸을 들인다라고나 할까, 아니면 자신이 할 말을 천천히 골라서 펼쳐 보인다고나 할까.

평상시에도 그렇게 선글라스랑 정장 차림이에요? 항상?

 .......가능하면요.

 안 불편하세요?

 ......십 년 이상 이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익숙합니다.

십 년이라.... 그럼 대체 몇 살 때부터 이렇게 살아왔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예린이는 대체 몇 살이지? 스무살인 마리나 리사가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는 걸 봐서 그들보다는 위인 건 알겠는데 나랑 비슷한 연배려나? 궁금한 건 못 참는 터라 대놓고 물어보았다.

실례지만 예린 씨 나이가....?

 ......한석 씨보다 많지는 않습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스물 한 살에서 스물 두 살 정도라는 말이네.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으니 나이를 통 짐작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야 대충 알겠다. 

하하, 그럼 제가 오빠네요?

 ......

 하하하....?

 ......

급격히 뻘쭘 해졌다. 아니, 상대가 말을 하면 무슨 대답이라도 하란 말이야. 반응을 보이라고. 이 인간아! 그렇게 장승처럼 멀뚱멀뚱 서서 쳐다보고 있지 말고. 내가 딱히 오빠 소리를 듣고 싶어서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지만 말을 하다보니 그런 모양새가 되고 만다. 여기에 아무 대답 없는 예린의 반응까지 겹쳐지고 나니 내가 방금 한 소리는 희대의 뻘소리가 되고 말았다.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돌렸다. 예린은 멈추었던 청소를 다시 시작했고 나는 괜스레 빌라 쪽을 보면서 얘들이 왜 이렇게 안 나오나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 외에는 딱히 할 일도 없던 터라 아까처럼 다시 또 예린을 본다.

빌라 입구에 기대어 서서 예린의 동작을 보고 있노라니 참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들이 눈에 들어온다. 급하게 한다거나 그렇다고 느릿느릿하게 하는 것도 아닌 절제된 동작에 절제된 각도로만 움직인다. 저쯤에서 차를 닦는 걸 멈추겠다 싶은 시점에서 딱 멈추고 유리세정제와 걸레를 꺼내 든다. 차문을 모두 닫고 유리를 닦아 나가기 시작한다. 동작 하나하나가 꽤나 절도있다. 뒤로 한데 모아 묶은 머리카락마저 절도가 있을 정도다.

한석 씨.

 ........네?

그녀의 움직임을 넋 놓고 보고 있느라 대답 타이밍이 좀 늦었다. 예린이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얼굴이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는 거지 그렇다고 그녀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지 어떤지는 저 새까만 안경 덕분에 전혀 알 수 없다.

그렇게 빤히 보고 계시니 좀 그렇습니다만...

 아, 예. 죄송해요. 움직임이 좋아서요.

 .......그렇습니까?

내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웠나? 딱히 음흉한 생각이나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보고 있던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움직임이 보기 좋아서 그랬던 것 뿐인데.... 예린은 청소도구를 트렁크에 갈무리했다. 차 옆에 기대어 서 있기에 전에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로 한다.

지난 번에 예린 씨가 주신 명함 보니까 부장님이시던데요? 젊은 나이에 대단하시네요.

 ......저희는 실력으로 서열을 매기니까요.

 실력이요?

예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사무처리능력이나 영업능력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역시 예전에 리사와 마리 이사하는 걸 보았을 때 들었던 생각이 맞는 걸까. 예린에게 조심스럽게 다시 묻는다.

저기... 이런 거 물어도 될려나 모르겠습니다만.... 마리네 집은 어떤 일을 하시는지 혹시 여쭈어봐도....

예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말을 해놓고 나니 괜히 물었나 싶다. 그러다 잠시 후 예린은 고개를 살짝 기웃거리더니 내게 다가왔다. 안 그래도 나보다 조금 작은 정도로 키가 큰 그녀가 내 곁에 서니 더 위압적이다. 그녀는 한 손을 내 귓가에 대고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요량으로 조용조용히 말한다.

.......각종 사소한 분쟁을 해결해드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소한 분쟁이라.... 그 사소하다는 기준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말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귓속말이라니. 이렇게 자극적인 짓을 아침부터 해주시다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부탁드리..... 암튼 내 귓가에서 가만히 얼굴을 떼어내는 예린을 쳐다본다. 얼굴 간의 거리가 불과 수십여 센티도 되지 않는다. 괜히 긴장이 된다.

그....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예린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처음이다. 피부가 무척이나 하얗다. 까무잡잡한 마리와 대조적으로 리사도 하얀 편이긴 하지만 리사는 맑다고나 할까. 투명한 피부톤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그런 쪽인데 예린의 피부는 다소 창백하다고 할 정도다. 혈액순환이 안 좋은 걸까?

문 앞에서 뭐 하세요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리사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비켜선다. 예린은 어느샌가 물러나 입구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돌아보니 짙은 회색의 플레어 스커트에 옅은 자주 빛의 블라우스를 걸친 리사가 방긋 웃으며 서 있었다. 

아, 예린 씨랑 잠깐 얘기 좀....

내가 조금 당황한 듯 이야기하자 리사는 놀라는 표정을 과도하게 지으며 말했다.

어머나. 이젠 예린 언니까지?

 .....그런거 아니라니까요.

나를 골려 먹는 거에 취미를 붙이신 겁니까. 리사 씨. 그녀에게 무어라 반박을 더 하려는데 마리가 집에서 나오는게 보였다. 녀석은 꽤나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기 뭐꼬. 쓸데없이 치렁치렁 해가가....

마리를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은 몸에 착 붙는 라이더 슈트 차림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거의 예외없이 트레이닝복 아니면 청바지에 면티셔츠 차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마치 리사처럼 차려입고 있다. 마리가 리사처럼, 이라는 말은 상당히 여성스럽게 차려 입었다는 말과 이음동의어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잘 어울리게도 검은 색 블라우스에 평야설넷면 결코 입지 않을 나풀거리는 스커트까지 말이다. 순간적으로 마리가 아니라 리사인줄 알았다, 물론 차려 입은 것과는 별개로 전혀 조신하지 않게 궁시렁거리며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오고 있고 입으로는 걸걸한 사투리를 쏟아놓고 있었지만, 겉모습만 놓고 보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아름다운 아가씨의 모습이다. 그런 마리를 가만히 보고 있던 리사가 나를 쳐다보며 한 마디 했다.

너도 이젠 선머스마가 아니라 여자가 된거라고. 안 그래요, 한석 씨?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저한테 말하는 거냐구요. 리사는 그렇게 말해놓고 딱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나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 차에 올라탔다. 마리가 내 곁으로 오더니 내게 묻는다.

언니야가 대체 머라카는교?

뒤통수를 빌라 유리문에 콩콩 들이받으면서 내가 신음을 흘렸다.

내가 묻고 싶다. 임마.

일련의 소동을 마치고 예린과 나, 리사와 마리가 올라탄 차는 남산을 향해 출발했다. 남산에서 이런 저런 구경과 식사를 마치고 내려와 대학로에 들려 연극 한 편을 관람했다. 수녀님들이 나와 춤과 노래, 개그를 펼치는 공연이었는데 리사와 마리는 아주 박장대소를 하며 즐거워했다. 나 역시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예린을 돌아보았는데.... 그녀는 늘 그렇듯이 무표정하게 앉아있었다. 배우들에게 왠지 내가 다 미안하다. 게다가 이 어두운 곳에서도 선글라스라니... 그녀는 대체 언제 선글라스를 벗는 걸까. 자거나 씻을 때도 안 벗는 게 아닐까 모르겠다. 관람을 마치고 나와 마로니에 공원을 거닐면서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눈다. 주로 리사와 마리가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하는 편이었고 뒤에서는 나와 예린이 따라가고 있었다. 예린에게 가끔씩 뭔가 물어보거나 말을 걸어보았지만 단답형의 짤막한 답변만 돌아올 따름이었다.

저희 아이스크림 먹을까요?

리사의 제안에 다같이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먹게 되었다. 공원 한 쪽에 있는 농구코트에서 고등학생 쯤 되어보이는 애들이 꽤나 시끌거리며 농구를 하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갈 때쯤 농구공이 우리 쪽으로 굴러왔다. 데구르르 구르더니 예린의 발 앞에 와 닿는다.

공 좀 던져주세요!

짜슥들이. 그렇게 멀지도 않건만 와서 가져가야지. 내가 속으로 불평을 하고 있는 사이에 예린은 허리를 굽혀 공을 집어들었다. 공을 들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천천히 슛자세를 취하더니.... 어라라?

우와아아아!

예린이 던진 공이 링 안으로 정확하게 들어간다. 그물에 걸리는 ?- 소리마저 일품이다. 고등학생 녀석들이 환호를 지르며 예린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런 엄청난 슈터가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니. 여기는 3점 슛 라인에서도 4~5미터 더 떨어진 곳인데도 말이다. 은근히 승부사 기질이 발동한다. 내가 슬램덩크를 보면서 농구를 시작한 이래 이토록 격렬한 승부욕을 느껴본 적이 없다. 굳이 표현하자면 마지막 승부에서 손지창이 장동건에게 느꼈던 감정이랑 비슷하다고나 할까. 예린에게 다가가 물어본다.

어때요, 예린 씨. 한 게임 뛰어보시겠어요?

싫은 눈치는 아니다. 예린은 대답 대신 리사 쪽을 한번 쳐다본다. 아직 아이스크림을 다 먹지 못한 리사는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겠네요.

내가 고등학생들 쪽으로 다가가 협상을 벌인다. 3대 3으로 반코트를 하던 녀석들이 저들끼리 쑥덕거리더니 각 팀에서 한 명씩 쉬겠단다. 나는 팔을 걷어붙인 팀으로 들어가고 예린은 안 걷어붙인 팀으로 들어갔다. 가위바위보로 선공을 정하고 30점 내기게임을 시작한다. 우리 팀의 선공이었다. 내 손에서 우리의 공격이 시작된다.

일단 천천히!

드리블을 유지한 채로 바깥에서부터 안쪽을 살핀다. 원래 있던 고등학생 녀석들끼리는 맨투맨 마크가 붙었다. 자기들끼리는 이미 전력을 파악하고 있겠지. 예린이 내 쪽으로 온다. 슛이야 방금 보았는데 수비 실력은 어떨까. 자랑이라면 자랑이겠지만 동네에서나 학교에서 농구를 할 때에 과감한 돌파와 격렬한 몸싸움으로 이름을 날린 이 몸이다. 외곽으로 서서히 돌다가 안쪽으로 파고 들어간다. 예린을 힐끔 살핀다. 안정적인 낮은 자세에 섣불리 달려들지 않는 모범적인 마크. 쉽게 파고 들기 어렵다. 게다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니 그녀의 시선이 어딜 향하는지 정확히 가늠하기도 어렵다. 일단 몸으로 밀어붙이고 안으로 도는 척을 하다가 바깥쪽에 있는 팀원에게 패스했다. 예린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 사이에 돌아들어가 빠르게 안쪽으로 파고든다.

여기!

높게 들어오는 패스. 점프해서 낚아채고 땅에 닿자마자 재차 점프하여 슛을 한다. 백보드를 맞고 들어간다.

선배님! 화이팅!

내 쪽을 향해 손나팔을 만들어 외치며 응원하는 마리 쪽을 향해 손을 흔든다. 예린팀의 공격이 시작된다. 내 담당은 역시 예린. 드리블이 나쁘지 않다. 안쪽을 향해 무리하게 돌파하려고 하지도 않고 어느 정도 파고들다가 외곽으로 공을 돌린다. 한 명이 노마크가 되어서 그쪽에 신경이 팔린 순간 예린에게 공이 돌아갔고 순간적으로 내가 예린을 놓쳤다. 그녀가 가볍게 슛을 던진다. 역시나 클린샷. 게다가 3점 라인 바깥이다.

언니! 화이팅!! 이기고 있어!

이번에는 리사가 외치며 예린을 응원한다. 호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아무래도 내 응원단은 마리이고 예린 응원 담당은 리사로 정해진 것 같다. 여자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불타오른다.

그 이후로 주로 에어리어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려는 나의 움직임과 그것을 막으려는 예린의 마크, 외곽에서 기회를 잡아 슛을 던지려는 예린의 찬스 노리기와 그것을 막으려는 나의 움직임이 번갈아 펼쳐진다. 점수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예린이라고 무조건 3점만 노리는 건 아니었다. 자기 편에 볼 돌리는 것도 꽤나 정교했고 틈이 있으면 비집고 들어와 레이업도 시도한다. 고등학생들에게 공을 돌리는 동안에도 예린과 나의 몸싸움은 치열했다. 특히나 리바운드를 잡으려고 할 때는 거의 등짝을 부비다시피 하여 뛰어올랐고 에어볼 다툼은 싸움을 방불케 했다. 점프슛을 막으려 들때는 공중에서 거의 끌어안다시피 한 적도 적지 않다. 처음에는 예린이 여자라는 점 때문에 몸을 붙이는게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막상 게임이 격화되면서 붙어보니 이건 뭐 봐주고 자시고 할게 없었다. 키는 나보다 좀 작을지 몰라도 점프력이나 몰아붙이는 힘은 남자 그 이상이다. 치열하게 마크하지 않으면 절대 안되는 수준이었다.

후아...후아...후아....

가볍게 한 판 뛰려고 했었는데... 이게 어딜 봐서 대체 가볍게인지 모르겠다. 땀이 장난 아니게 흐른다. 등에 달라붙는 셔츠의 느낌이 꽤나 거추장스럽다. 아웃볼이 된 사이에 웃통을 벗어버렸다. 고등학생들 녀석들도 한 놈을 빼고는 다들 이미 웃통을 벗어버린 후다. 봄날씨치고는 햇살이 꽤나 뜨거웠다. 예린을 힐끔 쳐다본다. 물론 그녀도 자켓은 벗어놓은 터지만 그렇다고 안에 입은 드레스셔츠까지 벗지는 못 하겠지. 예린도 꽤나 땀이 날텐데 선글라스도 여전하다. 보고 있으니 내가 다 덥다.

꺄아- 선배님!! 화이팅!

마리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며 손을 흔든다.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 코트로 향한다. 제법 구경꾼까지 몇 명 있을 정도로 게임이 재미나게 흘러가고 있었다. 고등학생들도 꽤나 잘 해주고 있었고 무엇보다 예린과 나의 경쟁이 치열했다. 몸싸움에서는 내가 좀 더 낫고 슛 쪽에서는 예린이 앞서고 있었다. 

다만 내가 웃통을 까고 나니 예린이 좀 당황하는 눈치다. 몸싸움에서 되도록이면 안 붙으려고 몸을 떨구는게 눈에 띄게 보인다. 왠지 치트를 쓰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시합은 시합이다. 손오공도 웃통까면 전투력이 올라가지 않았던가. 게다가 30점 내기로 했는데 우리쪽은 아직 4점이 남았고 저기는 3점슛 한번이면 끝날 점수다. 샤프 슈터가 있는 저쪽에서라면 단번에 끝내버릴 수도 있다. 이기기 위해서는 일단 이번 골을 무조건 넣고 다음 것을 막은 다음에 또 넣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

바깥쪽에서 날 부르는 녀석에게 볼을 돌리고 링 아래쪽을 향해 돌진한다. 왼쪽으로 주춤하다가 쏜살같이 오른쪽으로 턴해서 파고 들어간다. 아니,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내 진로상에는 예린이 서 있었고 우리 두 사람은 그대로 충돌하고 말았다.

꺄!

 으악!

내 어깨에 그녀 얼굴이 부딪힌다. 달려들어가던 힘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다.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예린과 내가 한데 엉켜 바닥을 구른다. 다행이라면 그녀가 콘크리트 바닥에 쳐박히기 전에 내가 그녀를 끌어안고 굴렀다는 거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자빠진 꼴이 웃기게 되었다. 졸지에 쿠션이 되어 버린 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고 예린은 내 가슴팍에 안긴 채였다. 예린이 내 가슴을 짚고 상체를 일으킨다. 그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괘....괜찮으십니까?

 아, 뭐..... 그야......

동그랗게 뜬 두 눈 가득 걱정을 담고 있다. 이거 참 사람 미안하게 만드시네. 난 손을 뻗어 바닥에 구르고 있던 선글라스를 주워들고는 예린의 얼굴에 씌워주었다. 자신이 선글라스를 벗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챈 그녀가 흠칫 놀라다가 내가 씌워주자 두 눈을 감고 잠자코 있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거였군.

괜찮아요?

 안 다쳤어예?

쌍둥이 자매가 황급히 달려온다. 두 사람 다 놀란 표정을 하고 있으니 안 그래도 똑같은 얼굴이 더욱더 정말 판박이다. 어째 사람들 시선도 부담스럽고 넘어졌다는 꼴이 창피하기도 해서 벌떡 일어난다. 예린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이 정도야 문제없.... 아야야.....

오른쪽 발목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제대로 짚고 설 수가 없을 정도다.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 하자 리사가 나를 부축한다. 

왜 그러세요? 많이 아파요?

 어, 그게..... 좀.......

좀이 아니다. 눈물이 쑥 나올 정도다. 그러나 여자들 앞이라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 

잠깐 접질렸나 보죠. 좀 쉬면 괜찮을 거에요.

리사의 부축을 받은 채로 벤치 쪽으로 가서 앉았다. 한때 우리 동네의 대표 센터로 군림했던 자존심이 처절히 망가지고 있었다. 역시 구두를 신고 농구를 하는 건 좀 무리였나. 내 양 옆에는 마리와 리사가, 앞에는 예린이 서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 어쩌다보니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모양새가 되어 굉장히 머쓱해진다.

농구하다보면 자주 이래요. 잠깐 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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