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65)

펜을 내려놓고 마지막 시험지를 제출 하는 순간, 나의 여름 방학이 시작 되었다. 강의실을 나온 다음 기말고사 동안 혹사당한 정신을 쉬게 하고자 태근이 형에게 연락을 했다. 교생 실습을 마치면서 형은 나에게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었다. 여름 방학 전까지는 현아를 꼬셔 볼 테니 그 결과를 알려주겠노라고 말이다. 전화를 걸어보니 학교 안에 있다고 했다. 30분 후에 도서관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면서 몇 달 전에 있었던 교생 실습 때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선영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고 곧바로 내가 직접 하는 수업 실습이 시작되었다. 연습도 많이 못 해보고 바로 시작하느라 초반에는 애를 좀 먹었지만 지애가 나름 신경을 많이 써주고 도와주어서 큰 실수를 하지 않고 마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의 짓??은 질문에도 웃으면서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금세 익숙해졌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최종 평가는 합격. 마지막 금요일에 선생님들을 모시고 전체 회식을 했고 또 그 다음날 토요일에는 실습 동기끼리 모여 서로를 축하하며 식사를 했다. 4주가 지나면서 태근이 형은 현아에게 들이대는 모양이 점점 나아지고 있었고 처음에는 겁만 내던 현아도 점점 그런 형을 덜 무서워 하는 것 같았다. 뭐.... 은애의 표정이야 뭐 씹은 표정이겠지만.

나중에 임용고시 붙으면 연락해요. 도와줄테니.

 감사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내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담당 사수였던 지애와는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에 대해 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그녀와 더 이상의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게 조금, 정말 아주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녀는 내가 아니라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느낌이 어렴풋하게 들었다. 그렇게 그녀와는 끝이 났다.

유진의 과외는 다시 재개되었다. 녀석과 얼굴을 다시 마주하는 게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교생이 끝나고도 내가 과외를 가지 않고 있자니 녀석이 우리 집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안 잡아먹을테니 순순히 따라오라는데 당해 낼 재간이 없다. 그나마 잡아 먹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고 따라갔다. 녀석은 날 잡아먹지 않는 대신 본격적으로 수업을 칼같이 진행하는 과외를 시작했다. 학교 진도는 물론이고 어디선가 영어로 된 문제집까지 구해와서는 그걸 풀겠다고 도와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얼마 전까지는 분명히 녀석의 목표는 S대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외국에 있는 대학으로 바뀌었다. 내가 이유를 묻자 녀석은 날 힐끔 보더니,

꼴 뵈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아예 한국을 뜨려구요.

라고 답했다. 계집애가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마리와 리사는 그 이후로 전혀 보질 못 했다. 교생 실습이 끝날 때쯤 앞집은 비어졌고 얼마 뒤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후배들에게 지나가다 넌지시 물어보니 마리는 부산에 있는 대학으로 편입하기 위해 자퇴를 하고 내려 갔다고 한다. 녀석도 녀석이지만 리사가 가끔은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 커다랗고 선량한 눈망울에 한 가득 실망을 담게 만든 사람이 바로 나이기에 차마 보고 싶다는 내색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더 이상 그 빌라에서 살지 않게 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니 태근이 형이 나타났다. 늘 그렇듯이 혼자가 아니었다. 

여어, 한석 군. 시험 다 끝난 거야?

 방금이요. 형은요?

그러자 형은 옆에 있는 현아를 가리키며 웃었다.

난 다 끝났는데 우리 꼬맹이가 아직 덜 끝나서 말야. 내일까지는 학교에 나와야 할 것 같아.

 한 과목이니까 굳이 따라 나오지 마요. 오빠.

 그래도 우리 공주님 혼자 다니게 할 수는 없지. 누가 채어가서 주머니에 넣어가면 어떻게 해. 이렇게 쪼끄마한데.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건 부끄럽다고 형을 가볍게 투닥거리는 현아를 쳐다 보면서 뭐 먹으러 갈지 묻는다. 형이 호기롭게 외쳤다.

아구찜 맵게 잘 하는 데를 찾았어. 가자!

맛있겠다며 좋아하는 현아를 보며 난 알았다는듯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맵다... 이 말이지.

호의는 고맙지만 전 여기까지... 

정중히 사양하고 물러나려고 하였으나 형에게 목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갔다. 으악. 제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걸로 먹으러 가자구요! 네에?

그렇게 끌려가다시피 하여 고문과도 같은 식사를 맞이했다. 어느 정도 먹고 나서 입과 속에서 일고 있는 불길을 다스려가며 먼저 일어섰다. 두 사람에게 남은 시간 즐겁게 데이트 하시라는 말을 남기고 내가 가야할 곳으로 향했다. 방학이 되면 가겠노라고 미리 약속해놓은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 한석 씨.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아, 오늘부터 방학이라서요. 전에 말씀드린대로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흐흠. 낭군님 너무 험하게 굴린다고 선영이한테 욕이나 안 먹을려나요?

 하하, 설마요.

교생이 끝나고 3주 정도 지났을 무렵, 유진의 과외를 하고 있으려니까 유미가 나타나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선영이 보름 정도 무단으로 나오질 않아서 가게가 점점 안 굴러가고 있다고 하소연이다. 예전에 선영이 없어도 잘 굴러갈 가게라고 말한 것은 아무래도 허세였던 모양이다. 

사실 유미만 그녀를 못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장례를 치른 날, 밤을 함께 보내고 다음 날 아침에 되어 선영이 날 내보낸 이후, 거의 한 달을 그녀를 못 보고 살았다. 한 번 보러가고 싶었지만 완고한 그녀의 고집이 날 또 다시 밀어낼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유미의 말을 들어보니 연락도 안 받고 집에도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 길로 유미 모녀와 함께 선영을 찾아갔다.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별 수 없이 내가 도어락을 열고 번호를 입력하자 문이 열린다. 내가 선영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것을 보고 유진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방바닥에는 빈 보드카 병과 음식 찌꺼기 등으로 개판이 되어있었다. 눈물 자국이 얼굴에 선명한 선영이 방 한구석에 폐인처럼 널부러져 있었다. 딱히 자살을 기도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두문불출하는 동안 불규칙한 식사와 폭음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길을 향해 특급으로 달려가고 있던 모양이었다.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약간의 영양실조 기색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몸에 이상은 없었다. 선영은 입원까지 필요없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일어나면 정말 안 볼 거라는 엄포를 놓는 유진이까지 동원하여 그녀를 꼼짝 못 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약 이틀간 링겔을 맞아가며 요양한 그녀를 데리고 돌아오면서 나 역시 준비해두었던 짐을 가지고 그녀 집으로 같이 들어갔다.

지금 뭐하는 거야?

 짐 푸는 데?

 그러니까 그 짐이 뭐냐고.

 내 짐.

내 짐이라고 해봐야 옷가지 몇 벌과 책이 다였다. 어영부영 눌러 앉은 날 보고 선영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날 밀어내진 않았다. 그렇게 그녀와 나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방 안 가득한 곰인형들과 살고 있던 그녀의 방에 가장 큰 곰 한 마리가 더 얹어진 셈이다. 가게에 나가지 않는 선영 대신 내가 유미에게서 일거리를 받아와 집에서 처리했다. 내가 하는 일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선영은 중간중간 잔소리를 하면서 내가 하는 일에 끼어들기 시작했고 결국은 그녀가 다시 맡아서 하게 되었다. 그러나 ROSE에 나가지는 않았다. 집에 가져와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래도 제약이 많았다. 유미는 나에게 방학이 되거든 본격적으로 ROSE에서 일해주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고 관리하는 일에 슬슬 재미가 붙던 참인 나는 선영과 의논한 끝에 수락했다. 그래서 지금 방학 첫 날이 되자마자 난 ROSE에 와 있는 것이다.

유미 씨. 요새 미수금이 많아요. 아직 현금 흐름에 여유는 좀 있지만 영업 쪽 회사 위주로 빨리 청구하는 게 좋겠어요.

 아무래도 전 싫은 소리 같은 건 어려워서....

 아무리 그래도 어음 같은 걸로 받아오지는 마세요. 요새 명동 분위기 안 좋다고 할인도 잘 안 해줘요.

 안 해주면 말죠, 뭐.

 속 편한 소리 하실래요! 가게 망하는 꼴 보고 싶어요?

이젠 제법 유미를 다루는 법을 알 것 같다. 이제 어지간한 업무는 그녀에게 대부분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살짝 삐진 얼굴로 나가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며 남은 전표들을 살핀다. 반대쪽에는 아가씨와 주방의 요구사항을 적어놓은 공책이 있었다. 한편에는 등기부등본과 부동산 관련 자료들이 쌓여있었다. 선영의 충고에 따라 요새 유미의 자산관리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후아아... 진짜 다들 힘들긴 힘들구나.

아직 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나와 달리 학교에서 구직활동을 벌이는 4학년들이 죽는 소리를 하는 걸 보고 요새 경제가 불황이라는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현금의 흐름으로 대번에 표가 났다. 선영은 지난 몇 년간의 자금 흐름을 굉장히 충실하게 잘 정리해두었고 나는 그걸 전산화 시키는 과정에서 확실히 올해의 분위기는 작년과 다르다는 것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기업들이 판공비나 영업비를 줄이고 있었고 그 여파는 이곳에도 찬바람을 불어오게 하고 있었다. 나는 유미를 닥달하여 가게의 규모를 줄여 내실을 기하고 쓸데없는데 돈을 못 쓰도록 감시하는데 집중했다.

여름부터 느낀 나의 불길한 예감은 그 해 11월, 기말고사를 한창 준비하고 있을 무렵에 현실로 닥치고 말았다. 졸업논문 심사를 위해 과사로 들어간 나는 사람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자 TV를 가리킨다. 과사 한쪽에 놓인 구형 텔레비전에는 긴급뉴스라는 나오고 있었다. 앵커는 IMF다 뭐다 하는 소리를 계속 쏟아냈다. 

저게 무슨 말이에요?

팔짱을 낀 채로 TV를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선배 한 명에게 물어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짧게 대답했다.

우리 나라가 망했데.

 네에?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못 알아먹겠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알아들을 수 밖에 없었다. TV든 라디오든 신문이든... 모두 그 이야기만 주구장창 해대는 통에 모를 수가 없었다. 회사 하나둘 망하는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큰 뉴스거리도 못 되었다. 그 후로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졸업논문은 의외로 쉽게 통과되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교수들도 정신이 없더랜다. 기말시험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흘러갔다. 시험이 끝나고 나니 이제 남은 건 졸업 뿐이다. 대학 졸업 후에는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던 내 예정도 대대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러 날을 고민하다가 선영에게 털어놓았다.

나, 어디 좀 다녀오려고.

 어디?

 어딘지는 나도 아직 모르는데 기간은 약 26개월 정도야. 2년 하고 4개월.

선영은 잠시 멈칫했다. 

군대... 말야?

 응.

 하아.. 언제 가는데?

 몰라. 아직은. 난 여태 연기신청만 계속 해오고 있던터라 다음에 병무청에 가서 신청을 좀 해봐야 할 거야.

 신청하면... 바로 가는 거야?

 나야 모르지.

선영은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보았다.

내 곁에 항상 있어주겠다고 했잖아.

 있지 말라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그 땐 그 때고... 지금은.....

그녀는 말 끝을 흐렸다. 아무리 둔한 나라도 이제는 알 수 있다. 그녀의 텅 빈 마음을 가장 크게 채우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라는 사람이 그녀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지.

영영 가는 것도 아닌데?

 자긴 거짓말쟁이야.

딱히 심하게 비난하는 투는 아니었지만 가슴이 아팠다. 선영을 꼭 안아주었다. 병무청에 가니 자원입대의 경우 날짜를 정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졸업식은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3월로 정했다. 내년 3월 첫째 주 월요일이 내 입대일로 정해졌다.

3월 2일?

 응.

 알았어.

내 입대일을 듣고도 선영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집에 한 번 내려갔다 왔다. 엄마에게 군대간다고 이야기하고는 삼촌들과 술을 마셨다. 연이은 술에 간덩이가 붓기 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선영과 함께 지냈다. ROSE에 가지 않는 그녀였지만 가끔씩 아침 일찍 나갔다가 며칠 만에 돌아올 때가 있었다. 어디 갔다 왔냐고 물으면 말을 얼버무리곤 했다. 나도 자세히 묻지 않았다.

입대까지 별다른 일이 없는 나는 대부분 그녀의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오전 느즈막히 일어나 선영이 먹을 아점을 차린다. 같이 밥을 먹고 외출을 했다. 마트를 가거나 근처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겼다.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이도저도 아니면 공원에서 산책을 즐겼다. 집에 들어와 몸을 섞었다. 콘돔은 쓰지 않았다. 항상 그녀의 안에 나를 쏟아넣었다. 오후에는 비디오를 빌려와 같이 보다가 잠이 들곤 했다. 때로는 그녀의 몸을 마사지해주었다. 그녀는 내 손길을 즐기며 잠이 들었다. 그런 생활이 겨울 내내 이어졌다. 

그녀와 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대개는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영화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정작 같이 살고 있는 우리임에도 서로의 가족이라든가 과거라든가... 앞으로 어떻게 지낼 것인가 등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누지 않았다. 몸의 대화는 많이 나누었지만 말이다. 군대를 가고 나면 나를 기다릴 것인가 어쩔 것인가에 대해 묻지도 않았고 그녀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현재만이 존재했다. 

쉬는 동안 ROSE에 잠깐씩 나가서 일을 도왔다. IMF 이후 잠시 휘청거리던 그 가게는 놀라울 정도로 발휘되는 유미의 지도력에 금방 자리를 잡아 나갔다. 심지어 다른 가게를 인수하기도 했다. 내가 그런 것에 대해 놀라워 하자 유미는 싱긋 웃으며 이런 게 공격적 M&A라는 소리까지 해댔다. 그냥 놀고만 있는 게 아니었구나... 이 여자...

내 졸업식에는 유진이가 왔다. 선영과 함께 학교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유진이가 선영의 오피스텔로 찾아온 것이다. 더 이상 이 방이 선영 혼자 사는 곳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오래 전에 눈치채었을 텐데도 유진은 그 점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졸업을 축하한다고만 했을 뿐이다. 셋이서 학교로 갔다. 엄마와 큰 삼촌이 교문 앞에 와있었다. 엄마는 내가 예전 빌라에서 방을 빼고도 서울에 머무른다고 말했을 때부터 누군가와 지낸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은 한 모양이었지만 내색은 크게 하지 않았다. 선영을 힐끔 보고 내게 나이가 어떻게 되냐.라고만 물었을 뿐이다. 내가 두어 살 많다고 했더니 애 낳기 안 좋은 나이라고 좀 싫은 내색을 했다. 애라니... 우리 엄마는 생각이 너무 앞서 나가서 탈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3월 1일이 되었다. 아침부터 나보고 나갈 준비를 하라고 재촉하더니 자기는 무슨 이삿짐을 싸듯이 짐을 챙겼다. 사실 난 논산으로 갈 준비는 이미 다 끝내 놓은 상태였다. 그녀까지 왜 짐을 싸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지만 선영은 비밀이라고만 했다. 함께 차에 올라타고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차가 충남에 들어서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의 행선지를 말해주었다. 나도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산 속에 자리한 그곳에 도착하자 낯익은 얼굴을 한 분이 나와서 맞아준다.

어서 와요. 그동안 와 준 것도 고마운데 이렇게까지....

에스더...라고 했던가. 저 나이드신 수녀님이. 그나저나 그동안 왔었다니, 항상 나가서 며칠씩 안 들어오던 건 이곳에 왔었다는 걸까. 선영을 힐끔 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당분간 신세를 지겠습니다.

선영은 수녀님께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에스더는 그럴 거 없다면서 선영의 손을 맞잡았다.

신세는요. 저희가 다 고맙죠. 그런데 남편 분은 어떻게?

그러자 선영은 날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이이는 좀 멀리 출장을 가서요.

 아, 그러시구나.

선영은 수녀님들이 묵는 방 한쪽에 자기 거처를 배정받았다. 그녀가 짐 푸는 것을 돕고 나서 수녀님들에게 양해를 얻어 다시 차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가까운 곳에 강이 있다고 해서 그쪽으로 간다. 강가에 가니 모텔촌이 하나 있어 거기에 묵기로 했다. 내일 아침이면 훈련소로 들어가야 하기에 이게 민간인으로서 맞이하는 마지막 하루다. 저물어가는 해의 마지막 빛을 서쪽에 두고 선영의 손을 잡고 강가를 거닐었다. 봄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좀 쌀쌀했던 터라 자켓을 벗어 선영에게 덮어 주었다. 그녀는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자기랑 나랑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 그게 벌써 1년전이야.

 그렇네.

생각하면 할수록 민망하기 그지 없는 만남이었지. 나는 지나에게 한창 서비스를 받는 중이었고 선영은 소리도 없이 다가와 그런 모습을 차가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진이한테 과외 선생님 생겼고 남자라는 말을 듣고는 꽤 걱정했었어. 게다가 그렇게 마주치고 나니 아무래도 자기를 유진이 곁에 두기가 너무 겁났던 거야.

 알만하다.

 나중에 그때 ROSE에 와서 깽판치는 걸 보고 나름의 계획을 세웠어. 자기를 유진이가 아니라 나한테 붙들어놓을 계획.

그러고 보니 그런 노예문서가 있었지. 정신 없는 와중에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설마, 그럼 그게 진짜 그런 금액이 아니라....

 어머, 정말 믿었던 거야? 그런 어처구니 없는 청구서를?

 끄응....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머리를 감싸 쥐는 날 보며 선영이 살포시 웃었다.

후후. 그런데 말야. 어느 순간부터 자기를 나한테 붙들어 놓은게 아니라 내가 자기한테 붙들렸다는 느낌이 들었어. 난 그런 자격이 없는데.

 선영아....

 유진이하고도 이야기를 많이 했어. 유진이가 처음에는 내가 미웠데. 그런데 그 때 아빠 돌아가실 때 자기가 내 곁에 있는 걸 보고 마음을 접었다고 하더라고. 유진이가.... 자기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지?

 응? 으음....

대답을 얼버무렸더니 선영이 팔뚝을 살짝 꼬집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뜨끔했다.

이렇게 인기 많은 우리 자기가 군대 간다는 이야기 한 이후로 수녀님이랑 이야기 많이 했어. 그리고 당분간 거기 일을 돕기로 했어.

 그래서 돌봄의 집으로 간거야?

 응.

 난 아까 니가 거기 가는 걸 보고 수녀 되겠다고 하는 건 줄 알고 기겁했어.

선영이 소리 내어 웃었다.

거기 분들은 자기가 내 남편인 줄 알고 있는데 유부녀가 어떻게 수녀가 돼? 안 그래?

 그... 그런가.

남편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썩 나쁘지 않다. 선영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작년 봄에 거기서 몇 주 지내면서 한 가지 깨달은게 있어. 햇빛 아래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기분 말야. 다시 서울로 가서도 늘 여기가 생각나서 종종 내려오곤 했었어.

그녀는 나보다 한 발 더 앞서 나가더니 몸을 돌려 나와 마주한다.

자기야. 난 전혀 순결하지 않아. 내 과거를 다 알고 있는 자기를 그저 아무 것도 안 하면서 기다릴 자신이 없어. 아무도 잡아주지 못한다면 난 아마도 금방 흔들리고 말거야. 그래서 그 분들에게 몸을 맡기는 거야. 내가 그분들을 돌보는 게 아니라 그분들이 날 돌봐주게 될 거야.

 선영아....

넘어가기 직전의 햇빛이 그녀를 비추었다. 낮도 밤도 아닌 그 경계에 서 있는 그녀를 보면서 나 역시 순결하지 않다는 것을 고백한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그걸 굳이 말하는 이유가 뭐야?

 그럼에도 난 내가 순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뭔 소리야, 그건.

 마찬가지로 너도 순결하다고 생각해.

 ......자기는 내가 하던 일을 모르지 않잖아.

난 고개를 저었다.

그 모든 건 지난 일이야.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 없는 과거라고. 난 이제 앞으로를 보며 살거야. 내가 선영이 너한테 순결한 사람이 되듯이 너도 나에게 순결한 사람이 되어주면 돼. 그걸 약속해줘.

내 말을 들으며 가만히 강가를 바라보던 선영은 마침내 내가 바라던 말을 해주었다.

약속할게. 그리고 기다릴 테니까 꼭 돌아와줘.

대답 대신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몸이 으스러지도록 안아준다. 서로의 입술을 찾아 빨아본다. 한 번 붙은 두 입술은 좀처러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해가 저문 뚝방을 떠나 방으로 옮길 때까지도, 우린 서로를 탐하고 또 탐했다. 달빛이 모두 사라지고 새벽녘이 다가오고 나서야 우린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몸 안의 정액이 고갈되어버린 느낌이다. 내 안에 있던 모든 것이 선영의 안으로 완전히 옮겨져 버렸다. 헐떡일 힘조차 없어 숨을 간신히 가누며 그녀를 끌어다 안아본다. 등 뒤에서 그녀를 안은채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사랑해.

그녀의 허리를 두르고 있는 내 팔에 그녀의 손이 얹어진다.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며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넌 결코 혼자가 아니게 될 거야. 늘, 나와 함께야.

선영이 잠시 꿈틀거리더니 몸을 돌려 나와 마주한다. 십센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간격을 두고 그녀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잘 다녀와.

나 역시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속삭였다.

다녀올게.

──────────────────────────

*

[한선영]의 [노말 엔딩]을 달성하였습니다.

*

한석이가 군대를 갔다 와서의 이야기까지 쓰고 싶었지만.... 

너무 루즈한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 같아 좀 줄여야 겠다고 생각되어 여기서 끝이 납니다.

 한석이 선영을 선택하고도 그 특유의 우유부단함에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다가 결국은 선영에게 정착하는 걸로 귀결입니다. 아오, 이런 녀석한테 진짜 여자가 아깝다... 아까워... (....라고 작가가 생각하면 안 되겠지요? )

제 머리 속의 오피셜 엔딩은 한석이가 군대 갔다와서는 전처럼 한눈 안 팔고 정신차려서 선영에게 돌가고 그녀랑 같이 고향 내려가서 직장도 잡고 어머니 도와 농사짓고 잘 사는 걸로 마무리입니다.

 선영이로서는 시집살이이긴 한데 부모의 애정이 고픈 그녀로서는 시어머니에게도 잘 해드리죠.

 전직 경력을 십분 살려 술 상대도 아주 잘 해드리고요-_-;;;

 애 낳고 살고 있으면 가끔 대학생 유진이도 놀러와서 애랑도 놀아주고 훈훈하게 마무리. 디 엔드. 끝.

*

이제 시간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립니다.

좀 많이 돌려서 유진이가 아파서 드러누워있던 그때로 돌아가신다면 

──────────────────────────

 F) 수업에 일단 참석했다가 유진에게 가봐야 겠다.

 ──────────────────────────

 이 경우, 공통루트 - Route B - Route D 에서 이어지는 3월 중순의 이야기가 시작합니다.

조금 돌려서 유진이와의 약속을 앞둔 새벽, 선영의 전화를 받은 그때로 돌아가신다면

 ──────────────────────────

 I ) 아무래도 어렵겠어.

 ──────────────────────────

 이 경우, 공통루트 - Route B - Route D - Route E - Route H 에서 이어지는 4월 초의 이야기가 시작합니다.

48시간의 선택을 받은 후에 준비가 되는 대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가지 청이 있다면, F냐 I냐 선택도 선택이지만 이번 엔딩에 대한 개인적 소감도 함께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높은 데 올라와서 그런 게 아니라 여기 올라오기도 전에 신나게 구른 탓이다. 이 악마 같은 조교들은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런 높은 데 올라오면서 다리에 힘이 없으면 어떻게 하라구. 만약 다리에 힘이 풀려 자빠져서 굴러 떨어지기라도 하면 지들이 책임질꺼야? 아니다. 조교를 탓할 일이 아니다. 탓을 하려면 우리 훈련조에 있는 저 미친 고문관 새끼를 탓해야 한다. 마지막 구호 없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도 이 미친 놈은 스물!, 마흔!, 여든!을 외쳤다. 아오, 내가 진짜. 대체 그 놈 때문에 팔벌려뛰기를 몇 번이나 한 거냐. 숨이 턱까지 차오느르라 단순한 덧셈도 잘 안 된다. 우리가 얼마나 빡시게 팔벌려뛰기를 했는지 원래 막타워 층마다 PT를 하게 되어있는데 이미 죽을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리를 본 조교들이 PT를 경감시켜 줄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안 시키지는 않는다! 이 악마 같은 놈들!!

애인 있습니까?

 있습니다!

분명 교육받을 때는 인간이 가장 공포를 느낀다는 11미터라고 했거늘.... 뭐야, 이건 20미터는 충분히 넘겠구만. 되도록 아래를 쳐다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정면을 바라본다. 내 발 아래 높이에 있는 나무에 앉아있던 새와 눈이 마주친다. 오오. 

그렇다면 애인 이름! 힘차게 3회 부릅니다!

 선영아! 선영아! 선영아!

 기세 좋습니다! 올빼미 하강!

 으아아아악!!

이를 악문다. 떨어지지 않겠다고 버티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뛰어내린다. 어차피 가야할 길, 제 발로 가는 게 속편하다. 내 바로 앞에 있던 121번 훈련병은 버티고 버티다가 아주 친절하신 조교님의 발길질을 받고 나서야 뛰어내렸다. 아니, 밀려 떨어졌다고 해야 정답이겠지.

막타워에서 땅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극히 짧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자대에 돌아가면 선영이 편지가 와 있으려나. 지난 편지가 유격 오기 사흘 전에 받았으니 돌아가면 당연히 있을 리라는 기대가 절로 든다.

착지 자세가 불량한 올빼미들은 이쪽으로 집합! 다시 PT 시작하겠습니다!

 으악!

 목청 봐라! 집합!

 으악!!!!

온몸 비틀기를 하면서 올려다 본 1998년 6월의 하늘은 맑았다. 젠장! 비가 오란 말이다. 제발 비!

──────────────────────────

 한석은 모른다 02 - Start

 ──────────────────────────

포장마차 한 귀퉁이가 들리더니 한 아가씨가 들어선다. 오고가는 걸쭉한 욕설과 함께 조개가 익어가는 이런 포차와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처자였다. 산뜻한 베이지 색의 블라우스에 단정한 남색 치마. 뽀얗고 산뜻해 보이는 얼굴이 무척 아름다웠기에 무심결에 그녀를 돌아본 남자들은 한 번씩 더 쳐다볼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향한 시선에 크게 개의치 않고 가게를 스윽 둘러보았다. 자신이 찾던 대상을 구석에서 발견하자 곧바로 다가간다.

마리야.

구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그녀와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좀 더 그을리고 머리카락이 짧다는 점만 제하고.

언니 왔나. 거 앉아라.

마리의 언니, 리사는 동생의 맞은 편에 앉았다. 서비스로 나오는 우동만 놓여있었고 다른 안주는 없었다. 소주병만 두 개 놓여 있었는데 이미 둘 다 빈병이었다. 리사는 가볍게 혀를 차더니 포차 주인장 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여기 잔 하나 주시구요, 시원 하나 더 주세요.

 안주는 안 시키는교?

 모듬 하나 주세요.

여태 마리가 안주 하나 안 시키고 술만 축내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주인장은 그제서야 싹싹한 표정을 지으며 조개구이 철판을 세팅해주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조개들이 익어감에 따라 점점 입을 벌린다. 리사는 집게를 들고 국물이 안 빠지도록 주의하며 뒤적거렸다. 이윽고 익은 녀석 하나를 들어 마리 앞에 놓인 접시에 놔주었다. 

먹어.

 됐다, 마.

 안주 먹어가며 먹어야지. 속 배린다.

 배리면 말제, 뭘 또.

 말 안 들을래?

 와? 말 안 들으면 쥐패게?

 이게 진짜?

 진짜 뭐? 지 해먹을 거 다 해먹은 언니야가 뭔 벼슬하겠다고 또 동생을 잡는데?

리사는 가볍게 혀를 찼다. 예전부터 마리가 성격이 괄괄하긴 해도 원래 언니의 말이라면 잘 듣는 편이었다. 엉뚱하고 갑작스럽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기색도 꽤 있어서 가끔씩 화를 내며 타일러보지만 그때뿐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대들기까지 하는 녀석은 결코 아니었다. 이게 다 작년 일 때문이다. 리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알았어. 내가 미안하다고 하잖아.

 미안하다면 다가? 닌 사람 찔러죽여놓고도 미안하다고 할끼가?

 내가 누구 칼침 놓은 건 아니잖아. 없는 일 지어내지마.

 언니가 한 짓이 내 등 찌른 게 아니고 몬데? 니 참말 내 맘 몰랐나? 말해봐라.

 ......알았다, 알았어. 그래, 다 내 잘못이다.

리사 앞에 놓인 소주 잔은 비어있었다. 마리가 따라주지도 않았기에 리사는 스스로 잔을 채웠다. 그리고 홀짝 마셔버렸다.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는 쓰디 썼다. 리사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잔을 채우고 마리의 잔도 채워준다. 마리는 입을 벌리다 못해 쩍쩍 벌어지고 있는 조개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한참만에 마리가 말문을 열었다.

벌써 일년이제?

 그래.

 그럼 이자부릴때도 됐다. 내도 더는 추태 안 부릴게.

마리가 잔을 들자 리사도 같이 들었다. 둘의 잔이 살짝 닿았다 떨어진다. 소주를 반쯤 마시고 내려놓은 마리는 젓가락을 들고 조개를 뒤적거렸다. 입을 벌리고 있는 조개 한 녀석의 살점을 떼어 입에 가져가면서 무심하게 묻는다.

근데 요샌 뭐한데?

 .......잊는다며?

 그러는 언니야도 뭐하는지 마, 다 알고 있을끼 아닌가.

마리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기에 리사는 입을 다물었다. 

말해봐라. 내또 쫓아간다 어쩐다 안칼테니.

리사는 몇달 전에 술 잔뜩 마신 마리가 자전거 끌고 서울 가겠다고 부렸던 난동을 떠올렸다. 고개를 저어 나쁜 기억을 털어내고는 대답했다.

3월에 군대 갔어. 지금은 파주에 자대 배치 받았고.

 파주? 거가 어딘데?

 경기도 북부.

 하이고, 마. 윽수로 머네. 차로 가도 하세월이겠구만.

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생소한 지명이었던 터라 보고를 받은 직후 지도를 꺼내어 확인해보았었다. 자신들이 있는 부산과 정반대의 곳이었다. 여기는 최남단 동쪽끝. 거기는 최북단 서쪽끝. 대한민국에서 두 장소를 꼽았을 때 가장 먼 거리를 가질 수 있는 곳을 일부러 골라서 뽑은 듯한 느낌이다. 같이 지도를 보고 있던 예린이 평소의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섯 시간 이상은 걸리겠군요. 아직 자신이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조금 창피했다. 서울에 두고 온 이를 잊지 못하고 꽤 오래동안 방황하는 마리를 애써 소리내어 탓하지만 그녀의 마음 속 한켠도 꽤 오래도록 시렸다.

조개구이를 다 먹지도 않았지만 술이 좀 들었기에 두 사람은 포차를 나왔다. 두 사람 일어난 테이블에는 시원 소주 네 병이 깨끗이 비어진 채로 놓여있었다. 포장마차 건너편에 세워둔 차 옆에 서 있던 예린이 다가왔지만 리사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좀 걸을게요.

그녀는 동생을 부축한 채로 해안 도로변을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마리는 뭔가 궁시렁거리고 있었지만 술 때문에 혀도 꼬여있고 발음도 불분명해서 뭐라 그러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가끔씩 나오는 이름에 가슴이 좀 아플 따름이었다. 조금 걷다보니 몽돌로 가득한 해안이 나온다. 발 아래 밟히며 자그락 소리는 내는 자갈을 따라 한참 더 걷는다. 밤에 바라본 바다는 새카맣다. 두 사람은 해변에 앉았다. 세 병 가까이 마신 마리는 무릎을 끌어안고 그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옆에 나란히 앉은 리사는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 때, 오빠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어.

마리는 대답이 없었지만 리사는 이야기를 천천히 이어나갔다.

내가 마리 널 선택했듯이 오빠도 나름의 선택을 하신 거겠지.

파도 소리가 대답을 대신한다. 두 사람을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었다. 도로 변에 서 있던 예린이 다가와 자켓을 리사에게 덮어주려 했다. 리사는 그것을 마다했다.

바람이 찹니다.

 이리 주세요.

리사는 자신의 동생에게 자켓을 덮어준다. 자신을 따뜻하게 덮는 느낌에 마리가 머리를 들더니 고개를 돌려 언니와 시선을 마주한다.

아직 세상에 남자는 많제? 그치?

리사가 살포시 웃으면서 동생의 오류를 수정해주었다.

억수로 많제.

 하모.

두 사람은 씨익 웃었다. 똑같은 얼굴에서 똑같은 웃음이 피어난다. 마리가 손을 뻗어 언니의 손을 찾았다. 리사는 손에 닿은 동생의 손을 꼭 쥔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향해 걸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마리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언니를 돌아본다.

우리 약속은 아직 유효한기고?

 그렇지.

 근데 언니야는 이미 한번 깼고?

 음.... 너도 한 번은 봐줄게.

 참말이제?

 그럼, 내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봤어?

두 사람은 서로에게 통하는 느낌을 주고 받으며 까르르 웃었다. 차에 올라타자 예린이 시동을 걸었다.

출발하겠습니다.

──────────────────────────

 한석은 모른다 02 - End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