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울음을 그친 선영은 그대로 멍하니 한참동안 앉아있었다. 난 그녀의 옆에 앉아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산중턱이라 꽤 먼 곳까지 잘 보였다. 산속이라 도시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 종종 들려왔다. 바람소리, 새소리. 마치 내 고향을 연상시키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선영이 가만히 날 불렀다.
자기야.
응?
이제 어쩐지 그녀가 날 이렇게 부르는 거에 애정이 듬뿍 담긴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아니, 착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일까.
아깐 왜 그렇게 대답했어?
뭘 말이야?
아까 말이야.
아까 일이라.... 아까 선영이 아버지가 나에게 남편이냐고 물었을 때 말인가. 왜 그랬냐고 물으신다면 몹시 쑥스러운데...
아니라고 하면 설명이 길어지잖아.
그것뿐이야?
음? 기분 나빴어?
아니, 전혀.
선영은 날 돌아보더니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준다. 어쩐지 짠 맛이 날 것 같은 짧은 입맞춤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지개를 거창하게 편 그녀는 무언가 결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앉아 있는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먼저 돌아가.
무슨 소리야?
난 여기서 좀 더 있다 갈게.
남는다고?
응.
선영은 바닥을 보며 돌 하나를 발끝으로 툭 찼다.
그 사람의 끝을 내 눈으로 봐야 겠어. 그래야 나중에 잠이 잘 올 것 같아.
무슨 무협지에서 원수를 가리켜서 그런 말 종종 하는 것 같던데.... 설마 여기 남아서 직접 해코지를 하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물론 농담이다. 그녀의 표정이나 태도에서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느낌이 더 강했다.
후우. 그래. 니 결심이 그렇다면....
미안해. 이 먼 곳까지 오게 해놓고 혼자 돌아가게 해서.
아냐. 괜찮아. 근데 차는 어떻게 할까? 여기 두고 갈까?
선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자기가 가지고 올라가.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연락할테니까.
알았어.
무슨 일이라. 어떤 일이려나.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겠지. 선영에게 내 삐삐 번호를 알려주었다. 명희와 헤어지고 난 후 한 번도 울린 적이 없는 삐삐였지만 그래도 늘 가지고 다니긴 했다. 내가 차에 올라타자 그녀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조심해서 올라가. 운전 조심하고.
너보단 안전운전하니까 걱정 마.
선영은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배웅해주었다.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차를 돌려 산을 내려갔다. 산길을 벗어나기 직전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손을 흔들고 있는 선영이 보이길래 마주 손을 흔들어준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건 그닥 어렵지 않았다. 다만 지루할 뿐이었다.
고속도로에 접어들면서 휴게소에 한 번 들렸다. 뒷자리에 던져놓은 작은 상자가 눈에 밟혀 유진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본다. 그러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다시 차를 몰고 서울로 향한다. 일요일이라 들어오는 길이 꽤 막힌 탓에 빌라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했다. 차를 세우고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누군가 빌라 앞에 서있는 게 보였다.
유...유진아.
짧은 미니스커트에 옅은 색의 블라우스. 손바닥만한 핸드백까지 들고 있는 모양새는 마치 여대생 같아 보이는 차림이었지만 그 특유의 얼굴 때문에 어려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제 오는 건가요.
녀석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계단을 올라 녀석과 마주한다.
미안... 새벽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너한테 연락을 했으면 했는데 전화를 안 받더라.
급한 일....?
어... 좀 아는 사람이 어디 급히 가야 할 일이 있다고 해서....
유진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평소에도 녀석의 얼굴이 인형처럼 귀엽게 생긴 얼굴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무표정하게 날 바라보는 지금 녀석의 얼굴은 생기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더 인형같다. 눈빛마저도 그저 유리구슬이 박혀있는 봉제인형처럼 초점이 흐릿하다. 녀석은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어딘가로 돌리면서 말했다.
그게, 선영 언니 일이죠?
어? 어.....
어떻게 알았지? 문득 유진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녀석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뒤에 있는 차를 향한다. 유진이라면 선영을 차를 모를 리가 없다. 내가 이걸 끌고 왔으니... 하아.
응. 선영이 아는 분이 위독하셔서...
아버지라고 말할까 하다가 본인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데 함부로 말하면 안되겠다 싶어서 말을 아꼈다.
암튼 미안하다. 내가 나중에....
아뇨.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차갑기 그지없는 유진의 말이 내 말허리를 자른다. 녀석은 나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면서 천천히 말했다.
이젠, 안 봤으면 좋겠어요. 아저씨랑 나랑.
유진아....
내 이름 부르지도 말고... 내 눈 앞에 띄지도 말아주세요.
유진아.....
거듭 불렀지만 녀석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차분하게 걸어 나갈 뿐이었다. 녀석을 따라가 붙잡고 싶었지만 워낙 날이 선 녀석의 말투가 예사롭지 않다.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저 모습을 하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기다렸을 녀석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녀석을 따라가 잡고 싶었지만 왠지 화만 더 돋구게 될 것같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유진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생각한다.
선영의 아버지과 유진의 약속. 내가 대체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다시 교생 실습 2주차가 시작되었다. 아침에 동기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늘 그렇듯이 담당 사수인 지애를 따라다닌다. 아침 조회시간에 1학년 3반에 들어갔을 때 유진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특별히 날 쳐다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나에게 싫은 내색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제의 일을 어떻게 사과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아 따로 유진에게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혹시나 싶어서 점심시간에 등나무 쉼터에서 괜히 앉아 있어보기도 했지만 전처럼 소란이나 유진이가 등장하지는 않았다. 대신 태근이 형이 농구라도 한 판 뛰자고 했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거절했다.
퇴근 후, 모처럼 회식이 없는 정상적인 퇴근이었다. 태근이 형이 은애나 현아를 불러서 같이 저녁이라도 먹으러 가자고 꼬셨지만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다. 아쉽다는 듯이 먼저 가는 형의 모습을 뒤로 하고 유진이네 집으로 향했다. 전에는 과외 선생이라는 이유로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가던 곳인데 막상 사과를 하러 오니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잘못을 한 건 나이기에 분명히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 앞에 도착해서 벨을 누른다. 벨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려도 답이 없다. 아직 안 들어왔나? 혹시나 싶어서 다시 벨을 누르니까 그제서야 문이 열린다. 아직 교복 차림을 하고 있는 유진이였다.
무슨 일로 오셨죠?
유진아. 어제는 내가 진짜 미안했어. 이렇게 사과할 테니까 봐줘라. 응?
두 손을 모아 비는 포즈를 취해보지만 유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미리 준비해 간 선물을 내민다.
사실 일요일날 주려고 선물도 미리 준비해 놨었단 말야. 정말이야.
이게 뭔데요?
녀석은 그것을 받아들 생각도 안 하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정말 전화했었다니까. 근데 아무도 안 받아서....
일단 들어오세요.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는 유진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선다. 굉장히 오랜만에 오는 느낌이다. 전에 과외할 때 쓰던 책상이 그대로 있어서 거기에 앉았다. 유진이도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언제부터죠?
뭐...가?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물어보는 통에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유진은 고개를 들어 가만히 날 바라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선영이 언니랑 잔 거 말이에요.
....뭐...어?
그럼, 안 잤어요?
말문이 턱 막힌다. 이게 지금 고등학교 1학년 짜리가 할 소리야? 선영이랑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언제부터 잤는지를 물어보다니...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고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틀어본다.
그게 내가 어제 네 약속 못 지킨 거랑 무슨 상관인데?
아니라고 대답은 안 하는 군요.
야, 그...건 그러니까...
나까무라 순사가 독립군 잡아다 놓고 취조하는 것도 아닌데도 녀석의 기세는 무섭기 그지 없다.
이 문제가 선영이 언니랑 상관 없을 것 같아요?
그야 당연히.....
당연히 없지! 라고 대답하려다가 답이 궁했다. 가정을 해본다. 만약 선영의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난 당연히 유진이와의 약속을 지키러 나갔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선영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상관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할 말이 없어진 난 변명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유진아, 그러니까 선영이도 굉장히 급한 일이 있어서....
알아요.
유진은 내가 말을 길게 하는 꼴을 못 보는 모양이다. 녀석은 칼같이 내 말을 자르고 들어온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엄마한테 어느 정도는 들었어요. 내가 궁금한 건 언니가 그런 일이 있다고 왜 아저씨가 나서냐죠.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 일에 그렇게 발벗고 나섰을 리는 없고 분명 모종의 관계가 있으니 그런 급박한 부탁에도 뛰쳐나간 거 아니겠어요? 내 약속은 뒤로 미루면서까지.
유...유진아.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라고 해봐야 뻔하잖아요. 둘이 잤겠죠. 그것도 한 두 번 실수도 아니라 여러 번 서로 원해서 여러번. 그런 사이가 아니고서야 언니 전화 한 통에 그렇게 무작정 튀어나갔겠어요?
올해로 열 일곱이 된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도무지 믿기 힘든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 말 하나하나가 틀린 말이 아니라는 점이 더 무섭다.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그 되도 않는 헛소리를 해가며 중학생 과외를 하고 있다고 할 때부터 말이죠. 그리고 제가 아파 누워있었을 때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고 확신했다구요. 내가 그런 것 하나 눈치 못 챘을 것 같아요?
......
말문이 막힌다.
난 아저씨보다 언니가 더 미워요. 아저씨는... 그래, 남자니까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언니는 나밖에 없다면서, 날 위한다면서 어쩜 그렇게 뒤에서 그러고 있을 수가 있죠? 두 사람 다 나를 영원히 속이려고 했단 말이에요?
거기에는 사정이....
사정? 남자가 여자랑 자는 데 무슨 놈의 사정이 있겠어요! 둘이 눈 맞으면 끝난 거지.
유진이 테이블을 거칠게 내려치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는다. 나까무라 순사의 취조는 물샐 틈 없었고 독립군은 이제 본거지를 불기 직전이다. 열 일곱 여고생이 아니라 세파에 닳고 닳은 노숙한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포장도 뜯지 않은 상자는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떤 말을 할 자신도, 자격도 없는 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고 하고 싶은 말을 한참이나 쏟아낸 유진은 숨을 고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한참 후에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길래 고개를 들어본다.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고개를 들고 녀석을 올려다본다. 녀석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언니가 그렇게 좋아요?
좋다기 보단... 우리 사이에는 사정이 있어서...
끝까지 그 소리네요.
유진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을 테이블을 돌아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언니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어요.
어쩐지 불안하다. 녀석은 날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어제.... 하루 종일 아저씨를 기다리면서 생각했죠.
뭘?
녀석은 자신이 입고 있던 교복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결국 엄마 말이 맞았다고.
엄마 말?
유미의 말이라니. 뭔가 불길하다. 게다가 넌 지금 그걸 왜 다 풀고 있는 건데! 경악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벙어리 흉내를 내고 있는 내게 녀석이 다가온다. 차갑고도 무거운 기운을 물씬 풍기는 유진에게 압도되어 꼼짝도 못 하고 있는 내게 다가와 내 무릎에 걸터앉는다. 녀석은 두 팔을 뻗어 내 목을 휘감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남자를 가지려면 몸을 내주는 게 가장 좋다구요.
──────────────────────────
한석은 모른다 01 - Start
──────────────────────────
너가 여긴 어쩐 일이야?
아, 그냥 놀러왔어. 엄마 바빠?
바쁘긴. 그냥 있지 뭐. 영업 시작 전인데 밥이라도 시켜줄까?
응. 돈까스 시켜줘.
그래. 잠깐만.
유미가 전화를 걸어 돈까스 하나와 백반 하나를 시키는 동안 유진은 사무실을 잠시 둘러보았다. 벽에 붙어있는 일정표를 들여다 보던 유진은 유미를 불렀다.
이거 언니가 쓰는 거지?
선영이 말야?
응.
그렇지, 뭐. 왜? 뭐가 틀렸어?
유진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틀리지 않고........ 똑같네.
뭐가?
그런 게 있어.
유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유진은 예전에 카페에서 보았던 시험지를 떠올렸다. 한석이 새로 과외를 시작했다는 중학생의 글씨는 어디서 많이 본 글씨체였다. 중학생의 글씨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낯익은 글씨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이렇게 같은 글씨체가 벽에 씌여있다. 유진은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갔다. 등 뒤에서 유미가 좀 있으면 밥 온다고 이야기했지만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다. 유진은 생각했다. 설마라는 생각과 어째서?.
어라, 유진이 아냐?
가게 밖에서 선영과 마주쳤다. 유진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며 말했다.
응. 엄마 좀 보고 가려고.
지금 가는 거야? 밥이라도 먹고 가지.
생각 없어.
잘 좀 챙겨 먹어. 너 식사를 제때 챙겨줘야 되는데 언니나 나나.... 휴우.
유진은 한숨을 내쉬는 선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정확히는 선영의 흉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 같이 속옷을 사러 갔을 때 선영의 사이즈는 D컵이었다는 걸 기억해낸다. 유독 특정부위만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선영은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여긴 왜?
그러자 유진은 선영을 올려다보며 물어보았다.
밥 잘 먹으면, 나도 언니처럼 가슴 커지나?
글쎄에. 우유가 좋다고는 하는데, 난 잘 모르겠어.
선영은 웃으면서 유진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조심해서 들어가.
응, 언니도 수고해.
유진은 집에 들어가기 전에 슈퍼에 들렀다. 500mL 우유를 집었다가 내려놓는다. 대신 1000mL 짜리를 들고 계산대로 갔다.
이거 주세요.
──────────────────────────
한석은 모른다 01 - End
──────────────────────────
*
1인칭 시점으로 계속 써오다 보니... 가끔은 이런 외도도 하고 싶어집니다.
스토리 몰입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한데... 허락만 해주신다면 앞으로도 한번씩 해볼까 합니다.
무엇에 홀리듯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유진을 품에 안았다. 작디 작은 그 녀석을 안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힐 때까지, 그래, 난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모든 단추가 풀어진 블라우스가 녀석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옅은 핑크빛의 브래지어가 소담스러운 두 살덩이를 담아내고 있는 광경을 내려다본다. 내 몸 아래 온전히 놓여있는 작은 몸체는 나이와는 전혀 맞지 않게도 고혹적인 빛을 뿜어내며 나를 홀리고 있었다. 도덕, 윤리... 그런 것들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만져지지 않는다. 오직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날 기다리는 하나의 여체와 내 손길 아래 만져지는 싱그러운 살결 뿐이다.
유진의 얼굴과 목, 가슴과 배를 천천히 더듬어 간다. 두 눈을 질끈 감은 녀석의 몸이 살짝 떨리고 있다. 이론으로는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남자의 손길을 겪어보지 않은 그 몸짓이 사랑스럽다. 작다 못해 어리다. 그런 몸이 내 손 아래 만져지고 있다.
삐빅- 삐빅- 삐빅-
눈을 떴다.
아니, 여태까지 눈을 감고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새롭게 눈을 뜬다.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이제 겨우 여성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어리디 어린 소녀다. 작은 꼬마다. 내 학생이다. 귀에 들려오는 삐삐의 호출음을 듣고 있노라니 언젠가 어떤 여인이 나에게 당부했던 말이 떠오른다.
당신이 원할 때, 언제든 제 몸을 제공하죠. 대신에 유진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대답해요.
난 그때 무어라 대답했던가. 알았다고 했었지.
당신의 성욕은... 내가 처리해 줄테니, 절대로 유진이를 탐하지 마세요. 알았죠?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남자라는 생물은, 그래, 그녀의 말버릇 대로 자지를 달고 있는 녀석들은 어쩔 수 없이 여체를 탐하게 된다는 것을, 그녀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근데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멈추지 마요.
어느새 눈을 뜨고 날 바라보고 있는 유진이었다. 녀석의 눈이 차갑기 그지 없다. 날 잡으려 팔을 뻗는데 나도 모르게 그걸 피해냈다.
미...미안. 유진아. 난 이럴 수 없어.
뭘 이럴 수 없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랑.... 아, 안 돼. 우린 이러면 안 돼.
그러자 유진은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남들 다 하는 거잖아요. 아저씨도 다른 여자들이랑 많이 했을 거 아닌가요? 그게 왜 나는 안 되요? 선영이 언니는 되고 왜 나는 안 되냐구요.
일단 옷부터 입자.
싫어요!
내가 내민 옷을 거칠게 뿌리치는 유진.
난 말주변이 없어서 설명은 잘 못 하겠지만.... 널 소중하게 생기는 사람이랑 약속을 했어. 그 사람이 결코 넌 건드리지 말라고 부탁을 했단 말이야. 그 부탁을, 그 약속을 난 어길 수 없어.
내 약속은 어겨 놓구요?
그건 어쩔 수 없었잖아.
이것도 어쩔 수 없다고 하면 되잖아요!
억지 부리지 마!
유진은 코웃음을 쳤다.
억지는 아저씨가..... 아니, 날 소중하게 생각하는 언니가 부리고 있겠죠. 참 대단히도 생각해주는 언니로군요. 저 건드리지 말라고... 핫. 자, 잠깐. 설마 그런 이유로 아저씨를 꼬시던가요? 자신이 대신 대주겠다면서?
말이 너무 심하잖아!
심하긴 한데 틀린 말은 아니지. 유진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심하다구요? 틀린 말이면 차라리 날 때려보든가요!
유진아!
다 필요 없어요! 아저씨나! 선영이 언니나! 엄마든 뭐든 다 필요없다구요!
유진아!
손대지 마!
유진은 날 밀쳐내고 이불을 거칠게 당겨 자신의 몸을 덮었다.
내 곁에 정말 있어줄 게 아니라면 차라리 눈에 보이질 말아요. 그런 어줍잖은 호의가 난 제일 싫어. 싫다구!!!
차라리 울고 있는 녀석이라면 달래주기라고 할텐데 녀석은 눈에 핏발을 세워가며 나에게 손에 잡히는 대로 뭔가 집어 던졌다. 몇 개는 내 몸에 맞고 또 몇 개는 벽에 맞고 바닥에 굴렀다. 내가 예전에 사주었던 펀치 브라이스 인형도 그 중 하나였다. 바닥에 드러누워 그 큰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인형을 마주하고 있기 쉽지 않았다. 난 유진에게 아무런 말도 더 건네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문을 닫고 나서는데 그제서야 유진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불에 얼굴을 묻고 애써 소리를 죽여 우는 그 소리는 처연하기 그지 없었다.
패잔병의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맞은 편 집도 조용했다. 집으로 들어와 자켓을 벗어던지고 침대에 눕는다. 한숨을 내쉰다. 대체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유진이와의 첫 만남, 과외, 어설픈 데이트, 은행나무침대 같은 게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다. 무표정하게 날 경계하던 첫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다 조금씩 표정을 보여주었고 어느 순간에는 나한테 메롱을 던지고 도망가는 아이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익숙치 않은 술에 취해 딸꾹거리면서 아무도 없는 자기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고, 열에 들떠 꼼짝도 못하는 주제에 나에게 상반신의 나체를 보여주기도 했었다. 녀석의 어른스런 말투와 행동, 때로는 너무도 성인 여성같은 느낌에서 잊고 지냈지만 유진은 틀림없이 어린 녀석이었다. 아이였다. 그런 녀석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 건 내 책임이다.
문득 아까 삐삐가 울렸던 사실이 생각나 안주머니에서 꺼내 든다. 번호를 보니 잘 모르는 번호다. 지역번호를 보고 혹시나 싶어서 전화를 걸어보니 역시 성 바오로 돌봄의 집이었다. 선영이를 찾으니 금방 바꿔준다.
미안. 삐삐 온 걸 지금 봤어. 무슨 일 있어?
아, 아니. 그냥 자기 목소리 듣고 싶어서.
응. 그렇구나...
어제 새벽에도 그녀는 내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했다. 그닥 미성도 아닌 내 목소리가 왜 듣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듣고 싶다니 많이 들려준다.
식사는 했어? 아버님은 좀 어떠셔?
식사는 했고... ......그 사람은 그냥 그렇지, 뭐.
결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건 여전했다.
곁에 계속 있어드려. 나도 주말엔 내려갈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어.
아냐. 그래도 사위라고 해주시는 데 찾아 뵈어야지.
선영이 조금 웃었다. 다소 건조한 웃음이긴 했지만.
그리고 혹시 필요한 거나 그런 거 있으면 말해. 준비해서 내려갈게.
안 그래도 말이야. 내 오피스텔에 있는 것 좀 보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었어.
뭔데?
선영은 자신의 옷가지와 기본적인 생활 물품 몇 가지를 말했다. 그리고 덧붙인다.
혹시 비밀번호 기억해?
그때 한번 들은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
자기도 아는 숫자일텐데.... 유진이 생일이야. 0213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렇게 유진이를 끔찍히도 아끼는 이 여자에게 방금 전까지 유진이가 그녀를 향한 독설을 내뱉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나.
.....아, 알았어. 일단 짐부터 챙겨서 소포로 보낼게.
아냐. 자기 주말에 내려온다면 그 때 가지고 와도 돼. 여긴 소포 한 번 보내도 한참 늦게 오는 동네라더라.
그래도 일주일 씩이나 늦게 가?
그렇다고 하네. 아.... 자기야. 우리 통화 너무 오래한 것 같다. 여기 수녀님들 사무실인데....
어, 그래. 알았어.
선영은 잘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지난 주와 별 다를 바 없는 교생실습의 하루가 지난다. 다른 점이 있다면 현아가 지난 주보다 나에게 더 친근하게 대했고 태근이 형이 그 비법에 대해 물어보았으며 은애가 형에게 많이 들러붙고 있다는 점일까. 교실이나 복도에서 유진이를 두어 번 마주쳤지만 녀석은 내게 학생답게 깍듯이 인사할 뿐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오히려 소란이가 더 친하게 굴 정도다.
다시 정상 퇴근을 했다. 일주일만에 주어지는 저녁 시간의 자유스러움에 감동했다. 이 값진 시간을 어찌 보낼까 하다가 발걸음이 저절로 선영의 집으로 향한다. 그녀가 집에 없는지 뻔히 알면서도 들어가는 기분은 묘했다. 0213. 유진이의 생일을 찍고 방으로 들어간다. 방주인이 없는 방안은 삭막한 기분마저 감돌았다. 그녀의 옷과 속옷, 크림 따위를 챙긴다. 이것들을 담아갈 커다란 가방을 찾다가 옷장 아래쪽에서 예전에 그녀가 자주 입던 검은 옷들이 차곡차곡 개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그 옷도 챙겨야 하나 고민했다. 모르긴 몰라도 조만간 그녀는 다시 검은 옷을 입게 될 것이다.....
그 때 삐삐가 울렸다. 꺼내어 확인해보니 어제 한 번 보았던 전화번호였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전화기로 가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기 전에 선영이 직접 받았다.
바로 전화 올 줄은 몰랐어. 퇴근했지?
응. 안 그래도 지금 니 방에 와 있어.
어머,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막 들어가고. 자기 응큼한데?
그러게 말이야.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기대하고 막 이상한 기대 잔뜩 하면서 들어왔는데 아무도 없어서 지금 실망 중이야.
수화기 너머 선영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럼 자기야, 기왕 부탁한 김에 몇 가지 더 부탁할게.
뭔데, 말해봐.
선영은 어제 말한 옷가지 말고 좀 다른 것을 주문했다. 그녀가 말하는 대로 화장대의 서랍과 보조 서랍 등을 열어 안에 있던 장부 따위를 챙긴다.
이걸 ROSE에 갖다 주면 되는 거야?
그러긴 한데.... 하아. 아무래도 정리가 안 되어 있을 거야. 언니한테 갖다 줘봤자 제대로 하지도 못할 거고..... 거래처에 줄 돈도 합산이 채 안 끝났는데.....
장부를 열어서 내용을 확인해 본다.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일목요연하게 써 있어 알아보기는 쉬웠다. 그러나 유미에게 맡기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거란 선영의 걱정에 나도 공감한다.
그럼 말야, 내가 정리할까?
자기가 할 수 있겠어?
걱정스러운 선영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을 치며 당당하게 답한다.
이래뵈도 사무정보기기응용기사 자격증도 준비하고 있다고.
사무.......뭐?
뭐, 이름만 들으면 좀 못 알아들을 정체의 자격증이긴 하다.
엑셀이나 액세스 다루는 거 말야.
.......엑셀이랑 액세스는 또 뭔데? 지금 나 공부 덜 했다고 놀리는 거야?
아니, 그런게 아니라.
엑셀이랑 액세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렇지만 짧게 말로만 설명하는 걸로 스프레드시트와 데이타데이스에 대해 알아듣게 하는 건 무리였다. 그러나 선영은 핵심을 짚어서 이해할 줄 아는 여자였다.
솔직히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수치를 다루는 거라고?
응. 이 장부도 그런 식으로 정리하면 어느 정도 될 것 같아.
하아. 괜찮을까....
선영은 꽤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나름 ROSE의 경영에 애정이 있는 그녀인지라 내부정보나 다름없는 걸 외부인에게 맡긴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마담인 유미에게 맡기는 건 더 불안하고.... 선영은 결국 결정을 내렸다.
그럼 자기 믿고 맡겨볼게. 일단 급한 건 거기 장부에 씌여 있는 것들부터고 사무실에 가면 내가 지나에게 시켜서 정리해놓은 전표도 있을 거야. 그건 다음 주까지니까 일단은....
선영은 자신들의 거래처와 입금 방법 등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해주었다. 내용이 좀 길어 받아 적으려고 펜과 종이를 찾았다. 선영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책상을 뒤져본다. 메모지와 펜을 찾았다. 그리고 찾으려고 하진 않았는데도 찾은 게 하나 더 있었다. 전화로 돌아가 선영에게 전달 사항을 모두 듣는다. 그걸 다 듣고 나서 선영에게 묻는다.
내가 방금 뭘 찾았게?
뭔 소리야?
아주 예전에 어떤 여자가 나랑 단둘이 차에 있다가 다짜고짜 울길래 손수건을 줬었거든. 근데 그 여자가 그걸 돌려줄 생각은 안 하고 그걸 가지고 있던 모양이네.
아....
목소리 뿐이었지만 선영이 얼굴을 붉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 돌려 주려고.... 했었어. 타이밍이 안 좋아서 안 준 거지.
그럼 이제 내가 가져간다?
아, 안 돼.
왜 안 돼? 이건 원래 내 껀데
....흥, 알아서 해. 난 몰라.
살짝 토라진 선영의 얼굴을 생각하니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선영도 마주 웃는다. 잠시 후, 선영이 다소 걱정스런 목소리로 묻는다.
내가 괜한 부탁하는 거 아닐까 몰라.
괜한 부탁이라니.
자기 공부도 해야 하고 교생 일도 해야 하잖아. 근데 내 일까지 떠맡기는 거라....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거기서 아버님이나 잘 보살펴 드려.
휴우. 알았어. 정말 고마워.
전화를 끊고 선영의 집을 나와 학교로 갔다. 공대 전산실로 가서 액세스를 켜고 필드를 구성한 다음 레코드 별로 장부의 숫자들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거래처의 목록, 대금, 납기일, 물품 재고 현황 등이 빼곡하게 입력된다. 아가씨마다 TC의 합계와 비율도 산정한다. 처음에는 쉽게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이게 슬슬 쌓이기 시작하니 어지간한 수치제어 레포트보다도 훨씬 빡세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전산실 조교가 와서 이제 문 닫아야 한다고 할 때까지도 다 끝내지 못 했다. 그냥 장부에서 직접 계산할 걸 괜히 전산화 시킨다고 한 게 아닐까 싶은 후회가 들었다.
디스켓에 데이터를 담아 좀 더 늦게까지 운영하는 도서관 전산실로 자리를 옮긴다. 도서관 전산실이 문 닫기 전에 가까스로 필드 구성과 데이터 입력을 완료했다. 공용 프린터에서 거래처와 아가씨 개개의 금액 지급 내역서를 뽑아냈다. 깔끔하게 계산되어서 나온 출력물을 보니 나름 뿌듯했다.
시계를 보았다. 조금 늦은 시각이긴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세계이고 다른 세계인 ROSE는 이제 한창인 시각이리라. 버스를 타고 가게로 향했다. 취객들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 ROSE에 도착한다. 좀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괜히 온 것도 아니기에 당당하게 들어간다. 날 룸으로 안내하려는 웨이터에게 선영이 시킨 일 때문에 왔다고 말하고 사무실로 향했다.
어머, 선생님. 요새는 자주 오시네요?
유미가 혼자 있었다. 여전히 부담스러운 노출도의 옷을 자랑하며 반갑게 날 맞이한다. 그녀의 깊은 계곡을 보며 아주 잠깐, 정말 잠깐 생각했다. 유진이가 특정 부위에 있어서 자기 엄마를 좀만 더 닮았다면 정말 완벽했을 텐데.
──────────────────────────
*
제가 언제 이게 유진이 루트라고 말했습니까~~~?
머리 속에 떠오른 황망한 생각을 후딱 지워버리고 유미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만들어 온 지불 내역서를 유미에게 보여준다. 선영에게 들었던 내용과 내가 정리한 내용을 한참 설명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깨닫게 되었다. 유미가 전혀 못 알아 듣고 있다는 걸 말이다.
저, 그러니까. 유진이 어머님. 여기 적힌대로 입금을 해야 한다는데요. 선영이 말에 따르면 이번 주 안으로 입금을...
근데 요새 과외는 안 하신다면서요?
네?
사람이 설명을 하고 있으면 좀 들어!
지난 주인가? 유진이한테 물어보니 요새는 과외 안 하신다면서요? 유진이가 별로 마음에 안 드세요?
무슨 애엄마가 자기 딸이 하던 과외 안 하는 걸 이제 알았냐는 별개의 문제로 치더라도 안 하는 이유가 자기 딸이 마음에 안 들어서라니. 뭐 이런 엄마가 다 있나.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 지금 교생실습을 나가서 말이죠. 아무래도 유진이 학교이다 보니 과외를 계속 하기는...
어머, 아니라는 말씀은 여전히 유진이가 마음에 든다는 말씀이죠?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에 집중을 좀 해!!! 내가 지금 과외 왜 안 하는지 설명하고 있잖아! 정말이지 아까부터 유미랑 이야기하면서 이 여자의 목을 쥐고 흔들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선영이는 대체 이런 여자 밑에서 몇 년씩이나 어떻게 일한거야?
아뇨. 그게 아니라요, 어머님. 유진이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가 교생으로 나가야 되다보니 당분간은 과외를 하기 어렵다는 거예요.
교생이 끝나고 나서도 다시 과외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긴 하다. 어제 나에게 가버리라고 소리치던 유진의 모습이 언뜻 떠올라 스쳐 지나간다.
흐음. 교생이라... 그럼 앞으로 진짜 선생님 되시게요?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제 겨우 실습 나가는 정도구요, 나중에 임용고시도 봐야 하고, 그 전에 군대도 다녀와야 되고....
어머, 복잡하기도 해라. 뭐 간단한 게 없네요.
간단한 게 없는게 아니라 본인이 생각을 길게 하기 싫어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난 다시 장부 이야기로 돌아가 지급내역서를 설명하려 했다. 그러자 유미는 손을 내젓더니 서랍에서 뭔가 꺼내어 내게 건네준다.
아무리 설명하셔도 저는 잘 모르겠으니까요, 그냥 선생님이 다 처리해주세요. 비밀번호는 1234에요.
이걸 그렇게 대충 맡겨도 되는 물건이냐!
에에? 그래도 이걸 저한테.....
왜요? 은행 갈 시간 없으세요?
그야 점심시간에 가면 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간이 되신다니 다행이네요. 부탁 좀 드릴게요.
뭐라고 표현해야 되나, 이런 기분을. 유미의 생각없는 거야 내가 몇 번 보아온 일들과 선영의 설명에 의해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여자는 내 예상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는 레벨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 손에 들린 통장과 도장을 내려다보며 어처구니 없다는 게 정말 무언지 확실히 깨달았다.
저, 유진이 어머님. 그게 말입니다.
네? 무슨 문제라도?
아뇨. 문제는 제가 아니라 이... 이런 걸 남한테 막 턱턱 맡겨도 괜찮은 겁니까? 정말로?
혹시나 싶어서 열어본 그 통장에는 잔액만으로도 내가 과외로 버는 한 달 수익의 100배 정도는 가볍게 넘는 금액이 찍혀있었다. 유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뭐 어때요.
아무리 아는 사이라도 그렇죠.
이 여자는 아는 사이라면 자기 집 열쇠도 맡길 여자로다.
어차피 매일 장사 끝나면 김군 시켜서 입금하는 통장인데요, 뭘.
그건 입금이고 제가 하는 건 출금이란 말입니다.
그게 그렇게 다른 일인가요?
완전 다르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다 보니 머릿골이 띵하다. 서서 말하는 것도 피곤할 지경이라 소파에 털썩 주저 앉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말했다.
제가 이걸 가지고 나쁜 마음이라도 먹는다면 그땐 어떡하시려구요?
나쁜 마음이라, 후후. 그게 뭔데요?
내 옆에 나란히 앉은 유미는 내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말했다. 진한 화장품 냄새에 섞인 성인 여성의 내음이 진하게 내게 풍겨온다. 나는 몸을 옆으로 좀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뭐... 이걸 가지고 도망을 간다거나... 돈을 다 빼서 쓴다거나....
그런 건 나쁜 마음이 아니죠. 그냥 욕심이지.
그....그게 다른 가요?
이야기를 하면 그냥 거기서 이야기를 할 것이지 이 아줌마는 왜 자꾸 붙는 거야. ?薦?어깨끈에 간신히 매달린 실크 원피스 너머 아주 둥글게 둥글게 자리 잡은 그녀의 유방이 내 팔에 쩍하니 들러붙는다.
욕심은 사람이면 누구나 드는 자연스러운 마음이구요, 나쁜 마음은 하면 안 되는 걸 하고 싶어지는 마음이죠.
뭔 소리야, 대체! 그럼 내가 이 돈을 들고 튀는 건 자연스러운 마음이라는 소리냐! 유미의 말은 이어졌다.
제가 선생님한테 통장을 맡긴 이상 선생님이 어떻게 하든지 그건 어디까지나 제 책임이죠. 설령 그걸 가지고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가신다고 해도 선생님의 잘못은 전혀 없어요. 사람을 잘못 보고 그 사람에게 맡긴 제 잘못이죠.
유미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내 코를 살짝 밀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의 숨결이 내 귀를 간지럽게 한다.
근데 전 여태 한 번도 사람을 잘못 본 적이 없어요.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왜 귀를 핥는 건데?! 깜짝 놀란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유미는 살짝 아쉽다는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내려다보니 가슴에 깊이 파인 계곡이 더욱 적나라하게 보이는 터라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그러면 이건 장부에 적힌 대로 제가 지급 처리를 하겠습니다. 나중에 출납명세서랑 통장 가져다 드릴게요.
흐음. 그러시든가요.
그리고 선영이가 그러던데 아직 처리 안 된 전표는 지나라는 아가씨한테 맡겨 놨다고....
지나요? 그랬던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버리고 나자 유미는 뭔가 흥미를 잃은 사람처럼 대충대충 대답했다. 내가 지나를 만날 수 있냐고 묻자 그녀는 시큰둥하게 책상에 붙어있는 벨을 가리켰다. 내가 가서 그걸 누르자 잠시 후, 웨이터 한 명이 사무실로 왔다. 내가 지나를 불러 달라고 하자 웨이터는 알았다며 사무실을 나갔다.
여기 오시면 꼭 저 말고 선영이나 지나 찾으시네요, 선생님?
기분 탓인가. 어쩐지 비꼬는 말투로 들리는데.
아뇨. 그게 전 볼 일이 있어서....
황급히 변명을 해보지만 유미의 말투는 여전했다.
역시 애엄마는 별로겠죠? 아직 탱글탱글한 애들이 더 마음에 드시겠죠. 분명히.
에엑? 유진이 어머님, 전 그냥...
그러자 유미가 고개를 흔든다.
또, 또! 여기서 절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렇게 부르면 자꾸 내가 애엄마 같잖아요.
당신 애엄마 맞잖아!
그럼 뭐라고 부르나요?
그냥 편하게 유미라고 부르세요. 전 마담이라 불리는 것도 왠지 나이 들어 보여서 싫다구요.
그...그러신가요.
거참, 쉬운 게 없군.
한 번 불러봐요.
넷? 지금요?
지금은 부를 일이 없는데...
그럼 언제 부르시게요? 내일?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아... 저, 유미 씨?
네, 선생님.
뭔가 야리꼬리한 기분이 들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유미한테 그런 기분을 말하기도 애매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더니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았다.
말 잘 들은 상이에요.
상이라. 상이라. 대개 이런 시츄에이션에서는 그냥 볼이나 이마에 쪽 해주고 마는 것 아니었습니까. 어째서 마우스 투 마우스의 딥키스죠?
언니, 나 찾았다면.......서?
웁웁!!
문을 열고 들어오던 지나가 우리 모습을 보고 우뚝 멈춰 선다. 문소리에 눈을 뜬 나는 유미를 떼어내려고 바둥거렸지만 흡사 빨아들이고 있는게 아닐까 싶은 그녀의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간신히 유미와 떨어져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고 있자니 지나가 날 보면서 고개를 갸웃한다.
헤에~ 한석 씨 역시....
그런 거 아닙니다!
손을 내저으며 부정해보지만 저 눈빛은 이미 확정짓는 눈빛이다. 으아. 유미 씨. 그렇게 생글생글 웃고만 있지 말고 뭐라고 부정을 좀 해줘요! 네에?
형, 먼저 들어가세요. 전 볼 일이 있어서요.
뭔데?
은행에 좀...
그래, 갔다 와. 우린 먼저 간다.
다음 날, 태근이 형과 은애, 현아와 함께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나는 학교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손에 들린 파일에는 어제 컴퓨터로 정리한 대로 적어놓은 입출금 요청서가 담겨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사람이 좀 있었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동안 통장을 살핀다. 통장은 진미자라는 이름으로 되어있었다. 누구지, 이 사람은. 혹시 유미의 언니나 동생인가?
곧 내 차례가 되어 계좌이체할 것과 돈 찾을 것을 모두 마쳤다. 아가씨들에게 주어야 하는 돈은 각각 봉투에 담아 따로 안주머니에 넣어두고 출납명세서와 통장은 챙겨 파일에 다시 넣어둔다. ROSE에서 일하는 아가씨는 대략 오십명. 그들에게 주어야 하는 페이가 내 안주머니에 들어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어제 정리하면서 계산한대로라면 지금 내 안주머니 들어있는 금액만 해도 내 4년치 등록금보다도 훨씬 많았다. 이만한 금액을 가지고 다녀본 적이 없어서 자못 긴장이 되었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게 사람 심리라고 하던데 돈 생기면 대체 뭐가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어제 내 귓가에 대고 너무도 촉촉하게 말했던 유미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자신은 사람을 잘못 본 적이 없다는 그 말. 고개를 흔들어 이상한 생각은 털어버리고 학교로 곧장 향했다. 평소와 같이 수업과 잔심부름을 마치고 퇴근을 서둘렀다. 태근이 형이 한 잔 하러 가자고 꼬드겼지만 안주머니에 그만한 돈을 넣어둔 채로 술 먹으러 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다음에 같이 가자는 약속을 하고 먼저 나와 바로 ROSE로 향했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유미가 반색을 하며 맞이한다.
선생님, 잘 오셨어요. 이것 좀 봐주세요.
네? 뭔데.... 그러죠?
사무실 책상에 못 본 게 하나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날 끌고 책상 앞에 앉혔다.
어제 선생님이 컴퓨터로 장부 적어오셨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아까 낮에 가서 하나 사와 봤어요. 근데 이게 안 켜지네요?
일본 대기업 로고가 박힌 노트북이었다. 이걸 대뜸 가서 하나 사왔다 이거지. 무슨 과자 사오는 것도 아니고....
아까까지는 켜졌는데, 지금은 눌러도 안 켜져요. 비싸게 돈 주고 새 거 사온 건데 왜 안 될까요? 고장났나?
책상 옆을 보니 노트북 가방이 놓여져 있었다. 그 안에서 어댑터와 전원케이블을 꺼내어 콘센트에 놓고 노트북에 전원을 연결시켰다.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켜지면서 윈도우95 로고가 나타났다. 유미가 깜짝 놀란다.
어머나. 벌써 고치신 거에요? 역시 대단하네~
아뇨. 그게 아니라 전원을 연결 안 하셔서 그런 건데요.
응? 노트북이면 들고 다니면서 쓸 수 있다고 하길래 사온 거였는데, 코드 꽂아 쓰는 거면 못 들고 다니잖아요.
그건 배터리가 충전되어 있을 때구요, 아마도 아까는 배터리가 다 방전 되서 안 켜진 게 아닐까 싶은데요.
헤에. 대단하네요.
그나저나 이 자세는 참 고맙기도 한데 부담스럽기도 하고... 뭐랄까.... 의자에 앉아있는 내 등 뒤에서 유미가 바짝 붙어서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터라 그녀의 얇은 옷 너머 풍만한 무언가가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압박하고 있었다. 내 어깨 너머 팔을 뻗어 키보드까지 만지고 있으니 거의 등 뒤에서 나를 포옹한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몸에서 가득 풍겨오는 몸내음에 취할 지경이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물어본다.
근데 컴퓨터는 왜 갑자기 사신 거에요? 뭐에 쓰실 건데요?
요새 정보화 시대니 뭐니 하잖아요. 그래서 그냥 우리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사봤어요.
룸살롱이 정보화해서 대체 뭐할건데! 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대충 사양을 확인해보니 결코 나쁘지 않은 성능이다. 펜티엄MMX에 시디롬은 물론 모뎀까지 다 달려있는 최신형 사양이었다.
이 정도면 꽤 비쌀 텐데 뭐 하실려고요? 유미 씨도 컴퓨터 쓰세요?
제가요? 제가 왜요?
무슨 소리냐며 유미가 반문한다. 난 좀 기가 막혔다.
쓰실려고 산 거 아니었어요?
아아, 선생님 쓰시라고 사놓은 거죠. 이 정도면 쓰실만 해요?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다.
에엑? 저요?
왜요? 마음에 안 드세요?
마음에 안 든다기 보단..... 갑자기 이런 걸....
컴퓨터를 하나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비싼 가격에 선뜻 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 다니면서야 전산실에서 쓰는 걸로 괜찮긴 한데 막상 급할 때 레포트나 시뮬레이션 등을 돌릴 때는 전산실에 자리가 쉽게 나지 않아 연구실에 기웃거리며 데이터를 들고 다니는 불편함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저희 유진이도 잘 보살펴 주시고 선영이도 도와주시고 무엇보다 저희 가게도 도와주시는데 이 정도는 해드려도 괜찮지 싶어요. 선영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분간 여기 못 올거 같던데 지금은 걔 하던 일을 선생님이 대신 해주고 계시기도 하잖아요.
그래도 이건 너무 부담되는데요.
이 정도 성능의 노트북이라면 못해도 이삼백만원은 충분히 나가고 남았다. 게다가 국내 제품도 아니고 외국꺼라 더 하면 더했지 결코 값싼 물건이 아니다.
전 물건 마다 다 주인이 있고 그 쓰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걸 여기 두고 가봐야 아무도 제대로 쓰지 못할 고철에 불과하죠. 그렇지만 선생님이라면 가져가서 잘 쓰시리라 믿어요.
언제나 변함없는 얼굴로 생긋 웃으며 유미가 말했다. 거절하기 힘들었다.
──────────────────────────
굉장히 부담이 되었지만 그래도 유미의 말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에게 통장과 도장, 그리고 아가씨들 월급봉투를 건네주었다. 유미는 자기랑 술이라도 한 잔 하고 가라고 권했지만 그건 정중히 사양하기로 하고 먼저 일어났다.
일단 과사로 돌아가 노트북에 필요한 유틸이랑 실험데이터 등을 옮겨 담았다. 혹시나 싶어서 액세스랑 엑셀도 깔아두었다. 지나가던 진호 선배가 웬거냐고 묻기에 착한 일 하고 선물로 받은 거라고 했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 한다. 선영에게 호출이 들어와 전화를 건다. 전표 처리한 이야기를 전하고 그녀에게서 가게에 물건 입고 되는 거랑 새로 아가씨 뽑는 문제 등에 대해 전달받았다. 어째 점점 업무지시처럼 변하는 느낌이긴 하지만 선영이 지내고 있는 곳의 생활도 편한 것은 아니기에 군소리 없이 선영의 지시를 받아 적었다.
그렇게 낮에는 학교에서 교생실습, 밤에는 ROSE에서 선영의 업무를 대행하는 일이 주욱 이어졌다. 그렇게 한 주가 정신없이 흐르고 마침내 토요일이 되었다. 퇴근하면서 바로 충남으로 내려갈 생각에 선영의 차를 가지고 출근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내리는데 마침 차를 가지고 온 지애와 마주쳤다. 주차장에서 본관까지 같이 걸어갔다. 주차장에 놓인 내 차,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영의 차를 힐끔 돌아본 그녀가 묻는다.
차도 있었어? 한석... 아니, 최 선생?
학교 밖에서는 누나 동생으로 지내기로 했지만 여긴 학교다.
제 차는 아니구요. 당분간 맡아둔 거에요.
혹시 아버지 차?
검은 색의 중형 세단이라 어쩐지 좀 나이 들어 보이는 분들이 몰고 다니면 딱 어울릴 차이긴 하다.
아뇨. 그냥 아는 분인데요.
내 말을 들은 지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흐음. 운전하는 사람들은 어지간해서 자기 차를 남에게 잘 안 맡기는데... 굉장히 친밀한 사이인가 보네.
그런가요.
친밀하긴 친밀하지. 몸이야 이미 여러 번 섞었고 그녀의 아버지에게는 사위라고 소개된 사이인데, 친밀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뭐, 교생이라고 해서 차를 가지고 오란 법은 없지만 좀 의외여서 말야.
아,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아뇨. 그런 지적을 한 건 아니었어요. 가져와도 괜찮아요.
토요일은 오전 수업 뿐이라 일찍 끝났다. 여전히 싸늘한 유진의 눈빛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한시 바삐 충남으로 내려갈 생각에 서둘러 학교를 나섰다. 태근이 형이 지난 번처럼 다같이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꼬셨지만 다음에 다시 보자고 하고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쩐지 형에게는 요새 공수표만 남발하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토요일 오후에 서울을 빠져나가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요금소를 빠져나가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린 것 같다. 그나마 좀 트인 고속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린다. 전에 한번 갔던 길이라 눈에 익은 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다행히도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돌봄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서와. 많이 피곤하지?
차에서 내리던 나는 마중 나온 선영의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랐다.
한선영 수녀님?
놀리지 마.
여기 계신 수녀님들이 입고 있는 옷과 같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머리에 두건은 두르지 않고 있었지만 한데 모아 틀어 올렸기에 꽤나 단정해 보였다.
내가 준비해온 옷이 따로 없어서 얻어서 입고 있었어. 근데 너무 안 어울리지?
아냐, 잘 어울려.
일주일 만에 보는 거라 반가운 마음에 안아주려고 했지만 선영이 슬쩍 몸을 뒤로 뺀다.
에스더 수녀님한테 인사부터 드려.
그... 그럴까?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기에 사무실에 모여있는 수녀님들 모두에게 인사를 드렸다. 인사를 받은 수녀님들은 선영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영 자매님의 봉사가 모두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는 말에 선영 쪽을 쳐다보았다. 다소 부끄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이질적이다. 난 준비해 간 간식거리와 선영이 사오라고 부탁했던 생활용품 등을 건넸다. 만성적인 물자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이들이라 큰 감사를 표하며 받아주었다.
아버님은 어때? 많이 좋아지셨어?
사무실을 나와 병동 쪽으로 가면서 선영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가만히 흔들었다.
자기야. 여긴 병원이 아냐. 닥쳐온 죽음을 피하려거나 맞서려고 하는 곳이 아냐. 치료보다는 마음의 평안을 우선으로 하고 있어.
그러면?
몸은 계속 안 좋아지고 계시지만 마음은.... 모르겠어. 조금 편하게 이야기 하게 되었을지도.
선영을 따라 그녀의 아버지가 누워있는 병실로 다가갔다. 맞은 편 침대에 있던 다른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왜 보이지 않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인기척을 느낀 노인이 내 쪽을 바라본다.
자넨가.
예, 어르신.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그는 애써 몸을 일으키려고 했고 난 얼른 그런 그를 부축했다. 선영의 아버지라면 그렇게 나이가 들은 편도 아닐텐데 어떤 고생을 했는지 그의 몸은 훨씬 나이들어 보였다.
아닙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매일매일 천주님께 가까워지고 있지. 허. 전에는 언제라도 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눈에 밟히는 게 있어서 그게 쉽지 않네.
전보다 기침은 더 잦았고 가래를 들끓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 하는 것도 그에게는 꽤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다만 입을 여는 게 쉽지 않아 대화는 좀 오래 걸리고 더뎠다.
식사 하세요.
먹기 싫은데...
입 벌리고 억지도 넣기 전에 협조 좀 해봐요.
어느샌가 선영이 그릇을 들고 옆에 와 있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가 거기에 대신 앉았다. 의자를 침대 쪽에 바짝 끌어다 놓고 숟가락으로 옅은 죽 같은 것을 떠서 조금씩 제 아버지에게 먹이고 있었다. 애처럼 흘리지 말고 잘 좀 받아 먹으라며 탓하는 말을 계속 하는 입은 비록 험했지만 그 손길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흘린 죽을 닦아주는 손길도, 떨리는 입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는 숟가락도 그녀가 감추고 있는 본심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나와 차에서 짐을 마저 내렸다. 수녀님 한 분께 여쭈어 숙소 한편에 선영의 짐을 옮겨다 두었다. 마당으로 나와 어두워져 가는 산 속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당 반대쪽에서 수녀님 두 분이 사다리와 의자를 놓고 무언가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도와드릴까요?
가만히 있기도 뭐해서 다가가 물어보니 흔쾌히 수락한다.
어머, 좀 그래 주시겠어요?
키가 큰 분이라 좋겠다.
젊은 수녀 두 분이서 조명을 이어 달고 있었다. 산속이라 빨리 어두워지는 통에 저녁만 되어도 마당을 다니기 힘들단다. 전선의 피복을 벗기고 소켓을 연결한 다음 못을 쳐서 각 병동 기둥에 하나씩 조명을 달았다. 하나를 겨우 끝내고 나니 수녀님 한 분이 다른 기둥을 가리켰다. 혹시나 싶어서 바닥에 놓인 전등을 보니 무려 다섯 개나 더 남아있었다. 괜히 도와드린다고 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하나를 해보고 나니 의외로 손에 익어서 금방금방 해 나간다. 전등 설치를 다 마치고 났더니 다른 한 분이 오셔서 가스통 좀 옮겨 달란다. 시키는 대로 가스통을 옮기고 났더니 이번에는 뒷마당에서 하고 있던 평상 만들기에 투입된다. 손에 망치와 못, 그리고 톱이 쥐어진다. 얼추 다 만들어지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어떤 분이 불러서 병동에 있는 침대와 환자 옮기기에 동원되었다. 그렇게 팔자에도 없는 육체노동에 한참 시달리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났더니 어느새 별이 보이고 있었다.
수고했어.
선영이 가지고 온 대접에 담긴 물을 단숨에 들이킨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내가 앉아있던 긴 의자 옆에 나란히 앉은 선영이 수건 하나를 꺼내 내 얼굴을 닦아준다.
수고는 뭘. 근데 여기 수녀님들은 무슨 다들 철인이야? 가만히 쉬는 분이 어째 한 분도 없어? 아니, 수녀면 수녀답게 앉아서 기도 좀 하고 그런 시간도 있고 그래야지.
쉴 틈도 없이 내내 시달려온 내 불평을 들은 선영이 풋하고 웃었다.
그 분들은 그게 기도래. 아픈 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여기를 가꾸고 하는 일이, 그게 하나하나가 다 신에게 닿는 기도라고 하시더라.
아이고. 난 교회도 안 나가는데 뭔 놈의 기도에 육체노동까지 하고 있지.
후후. 그러니까 수고했다고 하잖아. 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