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65)

여태까지의 스토리 요약 

(데이트 첫 날, 다시 데이트 첫 날, Route B와 Route D, Route E, Route H를 거쳐서 현재까지)

대학생 최한석은 우연한 기회에 이명희와의 소개팅에 나갔다가 명희는 못 만나고 김지혜를 만나서 관계를 맺는다. 지혜는 한석의 맞은 편 집으로 이사를 오고 한석은 지혜의 친구 효진과도 관계를 맺는다. 한석은 지혜에게 고백하지만 지혜는 곧 결혼하게 된다며 그를 퇴짜놓는다. 그리고 바로 얼마 후에 지혜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다. 명희와도 좋은 관계가 되려나 싶었는데 몇 번 엇갈리고 나서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한편 한석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외를 하는데 과외를 받는 여학생의 이름은 진유진. 엄마의 이름은 진유미. 그리고 유진을 끔찍히 아끼는 언니 한선영이 있다. 유미와 선영은 ROSE라는 룸살롱에서 일한다. 지혜에게 차이고 그 분풀이를 ROSE에서 하다가 선영에게 덜미가 잡혀 손해금액 변제 대신 선영을 과외하기로 한다.

또한 한석은 올해 신입생 중에서 특이한 녀석을 알게 되는데 그녀의 이름은 김마리. 그녀와 쌍둥이 언니인 김리사와 리사의 수행원인 성예린은 한석의 맞은 편 집으로 이사를 온다. 여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리사의 말에 한석은 지혜에게 연락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러나 한석은 지혜를 연락처를 알지 못해 연락을 하지 못한다.

개강을 하고 나서 마리와 항상 붙어다니던 한석은 유진이가 부속고등학교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예전에 선영의 집에 있던 모습을 들킨 여자아이가 유진이 친구 양소란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또한, 우연한 기회에 리사와 놀이공원에서 데이트를 갖는다. 한석의 생일을 앞두고 어머니가 상경을 하게 되어 리사에게 도움을 많이 받는다. 옛 팝송을 듣고 눈물을 보인 어머니에게서 예전에 집나간 이모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한석의 생일파티에서 술을 마시게 된 유진을 집에까지 데려다줬는데 다음날 연락을 해보니 유진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았다. 그래서 한석은 당장 수업도 제쳐놓고 유진에게 간다. 거기서 유진의 반나신을 보게 되고 그녀를 간호한다. 후에 선영이 찾아와 한석에게 제의를 한다. 자신의 몸을 제공하는 대신 유진을 건드리지 않기로 합의한다. 그리하여 선영과 관계를 갖는다. 나중에 선영의 검은 옷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육체적으로 그녀와 좀 더 친밀해진다.

한편, 한석은 자신에게 잘해주는 앞집 리사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데 그녀 역시 한석에게 호감을 표한다. 교생실습을 앞두고 그녀와 데이트를 하던 한석은 리사가 원하는 대로 하루 동안 애인이 되어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다음 날, 리사는 자신의 일 때문에 부산으로 내려가고 그동안 감춰두었던 지혜의 청첩장을 전해준다. 한석은 마리와 함께 효진을 만나 결혼식이 있는 춘천으로 향한다. 지혜와의 어색하고 짧은 만남이 지나고 한석은 결혼식장에서 의외의 사람을 발견한다. 그러나 빨리 올라가야 한다는 효진의 요구에 한석은 서울로 향한다.

서울로 돌아온 한석은 우연히 마리의 자위 장면을 목격하지만 얼굴을 마주하고는 뻘쭘함에 도망가고 만다. 곧 한석의 교생실습이 시작된다. 교생생활 동안 한석을 담당할 사수 이름은 송지애. 그외에 쾌활한 박태근, 이기적인 박은애, 조용한 양현아와 실습 동기가 된다. 첫 회식에서 동기들이 술에 취해 뻗어있는 걸 건사하던 한석은 선영의 도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곧 가게된 ROSE에서 선영의 서비스도 받는다. 우연한 기회에 태근이가 효진의 오빠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말에 만나기로 한 유진에게 주려던 인형을 고르던 한석은 현아에게 도움을 받는다. 마리와 다시 마주치지만 어쩐 일인지 마리는 화를 내며 나가버리고 그녀를 기다리던 한석은 새벽에 선영의 전화를 받는다. 갑작스럽게 어딘가 같이 가달라는 선영에게 한석은 함께 가겠다는 대답을 한다.

그러면 이제, 더블 데이트 Route J 시작합니다.

──────────────────────────

저, 선영아... 알았어. 같이 가줄게.

머리 속에 두 얼굴이 떠올랐다. 유진의 얼굴보다는 선영의 얼굴이 더 슬퍼 보인다.

무리하는 거 아냐?

 아냐. 약속이 있긴 했는데 사정을 말하면 이해해 주겠지.

 알았어. 지금 끝나니까 곧 데리러 갈게.

 지금 바로?

 응.

성질도 급한 녀석 같으니라고. 꽤 이른 시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잠들기도 애매한 시간대였다. 일단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책상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노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차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신발을 꿰어 신고 나가본다. 나가기 직전 책상 위에 올려놓은 작은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유진이 주려고 사다 놓은 인형이었다. 일단 챙겨서 가지고 나간다. 빌라 앞에 있는 차는 역시 선영의 차였다. 운전석에 다가가니 핸들을 감싸 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선영이 보였다. 운전석을 열고 물어본다.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 내가 운전할까?

 그럴래? 부탁 좀 할게.

선영은 순순히 내리더니 조수석으로 옮겨 탔다. 내가 운전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둘러 맸다. 

어디로 가면 돼?

 충남.

 알았어.

충남이 다 니네 집이냐 라고 농이라도 걸고 싶었지만 착 가라앉은 선영의 분위기를 보아 함부로 그런 이야기도 못 꺼내겠다. 일단 서울을 빠져 나와 고속도로 쪽으로 올라탔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워낙 이른 시간이라 도로에 차도 별로 없이 한산했다. 한 시간 넘게 달린 후 휴게소 하나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우동을 시켰는데 선영은 먹는 둥 마는 중 하더니 미뤄놓는다. 난 그녀의 우동을 받아들며 말했다.

차에서 좀 자지 그랬어?

 잠이 안 와.

 밤에 계속 일 했을 텐데 안 피곤해?

 피곤이라.... 모르겠어.

선영은 내가 우동을 먹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우동을 다 먹자 가방에서 어떤 봉투 하나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뭐야, 이게?

 지금 거기 가려고.

편지봉투였다. 수신인에는 선영의 이름이 씌여 있었고 발신인에는 어떤 단체의 이름과 충남 어딘가의 주소가 인쇄되어 있었다. 단체의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다. 성 바오로 돌봄의 집. 뭐 하는 곳일까, 대체.

여긴 왜?

 안에 내용을 봐.

봉투를 뒤적여 안에 있는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문방구에서 파는 흔한 편선지 위에 볼펜으로 눌러 쓴 또박또박 정갈한 글씨체가 적혀 있었다. 한선영 자매님께로 시작하는 그 이야기는 자신들이 무얼 하는 단체라는 점에 대해 간략하는 설명하는 걸로 서두를 열었다. 노숙자, 무연고자들 중에서 병이 깊은 이들을 구호하는 그들은 한양구라는 사람을 보호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폐렴 및 기타 합병증에 의해 죽어가고 있으며 죽기 전에 자신의 딸을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의 상태가 좋지 않아 부디 빠른 시일내로 꼭 찾아주시길 바란다는 그 이야기는 마음의 평화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며 끝났다. 다 읽은 나는 선영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성이 한 씨였다는 점을 상기해낸다. 딸을 보길 바라는 사람이라.

이 분이.... 네 아버지야?

여태 침울해져 있던 선영의 표정이 돌변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선영은 토해내듯이 외쳤다.

그 새끼는....... 그런게 아냐!

 ........알았어.

한 번 더 물었다가는 때릴 기세다. 휴게소를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오르기 전에 공중전화에서 유진이네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자는 건가 싶었다. 자는 걸 깨우는 것도 미안하게 생각되어서 두 번 걸지 않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충남에 이르러 고속도로를 빠져 나왔다. 선영은 휴게소를 나온 이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간간히 한숨 소리로 보아 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국도로 접어들어 한참을 달리다가 중간중간 멈춰 서야만 했다. 초행길인데다가 주소만으로는 방향이 가늠이 안 되어서 가다가 보이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가며 돌봄의 집을 찾아 갔다. 산 중턱에 숨어있는 그곳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를 한참 달리고 나서 비포장 도로를 또 한참 꺾어 들어가서 몇 개의 가건물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을 찾아냈다. 서울에서 새벽에 출발했는데도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여러 개의 건물 중에서 사무실이라고 써붙여진 건물로 들어갔다. 말이 좋아 건물이지 컨테이너 몇 개와 조립식 주택 몇 개를 이어 붙여 놓은 게 다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회색 수녀복을 입은 한 중년 여자가 우리를 맞이한다. 선영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그녀는 반색하며 선영의 손을 맞잡았다. 편지를 보낸 분이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한양구 씨가 참 많이 기다렸답니다.

이제 마흔쯤 되어보이는 그녀는 자신을 에스더라고 소개했다. 그녀와 몇 명의 젊은 수녀들이 이곳에서 갈 곳 없는 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에스더의 안내를 받아 마당을 가로질러 안쪽의 다른 건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커다란 방에 여섯개의 간이 침대가 놓여있었다. 네 개의 침대는 비어있었고 두 침대에만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한 분씩 누워 계셨다. 젊은 수녀 한 명이 한 명을 돌보고 있다가 우리를 보곤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나도 엉겁결에 마주 인사했지만 선영은 꼿꼿이 선 채로 있었다. 왜 그런가 싶어 그녀를 돌아보니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방금 수녀가 돌보고 있던 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검버섯이 가득 피어있고 백발이 성성한 그 노인은 눈을 반쯤 뜨고 있었지만 검은 자위보단 흰 자위가 더 많았다. 에스더가 한 발 나서더니 선영을 팔을 잡고 이끌었다.

한 선영씨. 이쪽이....

 놔요!

날카로운 선영의 말.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이 으르렁 거리듯이 그녀의 말투는 꽤 공격적이었다. 뿌리치는 동작도 상당히 거칠었다. 그러나 에스더는 크게 놀라지 않은 듯 보였다. 그녀는 손을 들어 노인을 가리키며 조용조용 말할 뿐이었다.

저희는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필요한게 있으면 마당에 나와 저희를 불러주세요.

병원같은데서 곧잘 사용하는 호출벨 같이 호화로운 설비는 여기에 없는 모양이었다. 젊은 수녀가 작고 동그란 의자 하나를 가져다 주었다. 감사를 표하며 의자를 받아 침대 곁에 두었다. 선영의 등을 한 팔로 감싸고 천천히 그 쪽으로 다가간다. 선영은 마치 사형집행을 위해 절벽으로 밀려나고 있는 죄수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간신히 뗀다. 다행히도 아까 그 수녀에게 한 것처럼 나를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뻣뻣해진 그녀의 몸 전체가 그 노인에게 다가가기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간신히 그녀를 의자에 앉힌다. 나는 그녀의 뒤에 서서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짚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노인의 가뿐 숨소리만이 방안에 가득했다. 맞은 편 침대에 누워있는 또 다른 노인의 가래 끓는 소리가 유일한 효과음이다. 한참만에 선영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건 인삿말이라 하기에는 좀 묘한 소리였다.

당신.... 여태 안 죽었어?

사막보다 더 건조한 선영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녀의 몸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평생.... 평생 남에게 고개 한 번 안 숙이고 뻣뻣하게 살던 당신이.... 지금 여기 누워서 뭐하고 있는 거지? 응?

선영의 말투는 점차 격앙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난 그녀의 말투에서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쿨럭... 그래. 안 죽었다. 이 년아....

노인의 말문이 드디어 열렸다. 가뿐 숨소리와 잦은 기침 때문에 그의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도 길게 말하지도 못하고 중간중간 한참을 쉬어가며 말해야만 했다. 그는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흰자위만 가득한 눈이 우리를 보는 건지 아닌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말자... 그년이 죽고 나서.... 3년만인가......

 엄마 이름 함부로 말하지마!

선영이 으르렁거리듯 말했지만 노인은 가볍게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래? 그럼 뭐라고 부를까. 니 에미를 말야... 내 마누라를.....

 당신은... 당신은 엄마 이름을 부를 자격 없어.

 쿠쿠. 내가 자격이 없다면.... 누가 있느냐. 에미를 버리고 도망간 딸년인 네가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선영은 거칠게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외쳤다.

난 도망친게 아냐. 아니라구. 당신이야 말로 도망쳤지! 가족이라는 것에서! 의무라는 것에서! 그렇게 가족을 내팽개치고, 필요할 때는 와서 빼앗고, 눈에 보이면 발로 차버리고..... 그게.... 그게 당신이 우리 가족에서 도망친 거잖아. 비겁하고! 잔인하고! 또... 또!!!

선영의 울부짖음은 노인의 단 한마디에 딱 멈추고 말았다.

미안하다.

노인의 말이 천천히 이어진다. 선영은 노인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멍하니 있었다.

널 도망치게 해서.... 그렇게 만든 건 나다. 미안하다......

그러자 선영이 노인에게 와락 달려들어 멱살을 쥔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깡마른 노인네의 몸이 상할까봐 얼른 선영을 뜯어내어 제지했다. 나의 품에 안긴 선영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다고?! 그게 미안하다고 하면, 끝이야?! 끝이냐구! 이제와서.... 이제와서 그런 소리를 뭐하러 해! 그럴거면 차라리 엄마를 살려내! 이 자식아! 살려내라구!!!

무어라 더 외치긴 했으나 그녀의 울음소리가 말소리를 삼켜버렸다. 내 품에 안긴 선영은 한없이 울었다. 그녀가 우는 것을 여태 몇 번 보아오긴 했지만 이렇게 서럽게 우는 것은 처음 본다. 그녀가 진정되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노인은 천장을 보며 뜨문뜨문 말을 이어갔다.

말자를 그렇게 보내고.... 장례에서 널 마지막으로 보고...... 그러고 나서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널 찾기가 힘이 들어 길바닥에 주저 앉았지..... 그래도 천주님이 보살펴주셔서.... 이렇게 보는 구나.

선영의 훌쩍거림이 잦아들어간다.

말자는..... 네가 보낸 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두 모아두었다..... 아무리 개망나니인 나도 그건 쓰지 못 했다.... 내 베개 밑에 통장하고 도장이 있을 게다..... 내가 가거든 네가..... 쓰도록 해라.

 엄마 쓰라고 보낸 돈이야. 내가 쓸 일은 없어.

 말자는 이제 없다... 그건 나도 알고 너도 알잖아.......

선영은 눈물을 닦아냈다.

.......엄마 기일에 못 온 건 여기 누워있느라 그런 거야?

 쿨럭...쿠.... 흐흐. 수녀님들 아니었으면, 그냥 길바닥에서 죽어 나자빠졌을텐데.... 그래도 어찌하니 모진 목숨 안 죽고 살아가는 구나....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선영과 벽제에 있는 산소를 찾아가던 날, 그녀는 관리사무소에 누군가 왔다 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 때 어머니 산소에서 찾던 건 아마도 이 사람의 흔적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지난 어머니의 기일이면 이 사람이 낮에 왔다가 간 듯 하다. 그러고 보니 선영이 밤늦게 가는 것도 이 사람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모양이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수녀 한 분이 오셔서 식사를 하라고 불렀다. 선영은 생각이 없다고 하기에 나만 수녀님을 따라 나섰다. 아직 거동이 가능한 노인 분들 몇 분과 수녀님이 모여 앉아 조촐하기 짝이 없는 식사를 앞에 두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나 역시 한자리 껴서 점심을 얻어 먹었다. 

후식으로 나온 녹차를 한 잔 더 달라고 하고는 선영에게 돌아갔다. 자신의 아버지를 마주한 그녀는 마치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시선은 한결같이 힘겹게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노인의 흉부에 고정되어 있었다. 노인은 간간히, 아주 간간히 자신이 여태 살아온 이야기와 지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잠자코 앉아 있는 선영에게 녹차를 건넨다. 그녀는 그걸 조금 마셨다. 인기척을 느낀 노인이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이미 빛을 잃고 번뜩이는 흰자위가 날 향한다.

자넨.... 이 애 남편인가?

 네? 아, 예.....

잔을 입에 대고 있던 선영이 눈만 치켜 뜨고 날 쳐다보았지만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나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대답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군..... 이런 꼴 보여서 미안하군...... 사위 보면 주려고 담궈 놓은 술도 있었는데....허허...

웃던 노인은 기침을 해댔다. 타구통에 가래를 뱉는다.

선영이를 부탁하네. 내가 애비로서 해준 것도 없는데..... 자네라도......

 알겠습니다. 아버님.

노인은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 했으나 이내 격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기침은 쉬이 멈추질 않았다. 그의 몸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선영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수녀님을 불러왔다. 수녀 두 분이 달려와 노인을 진정시키고 한 명이 주사를 놓았다. 들썩이던 몸은 어느덧 가라앉았다. 노인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한참동안 내려다보던 선영은 먼저 밖으로 나갔다. 수녀님들이 노인의 몸을 바로 눕히는 것을 도와드린 나는 조금 뒤늦게 따라 나갔다. 선영은 아까 그 에스더라는 분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말하는 수녀님의 태도에서 직감적으로 뭔가 깨달았다. 그리 멀지 않은 게 분명하다.

가자.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선영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녀와 나는 차를 세워둔 곳까지 함께 걸어갔다. 난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괜찮아?

 그럼, 괜찮지. 내가 뭘.

애써 태연한 척 하는 그녀의 태도는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힘들어 보여.

 밤에 일하니까 그래.

 그게 아니라.... 잠깐 앉아봐.

내려가는 길가에 나무를 깎아 만든 조잡한 의자가 하나 있어 선영을 앉혔다.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들여다본다. 수심이 가득한 그 얼굴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다.

나야 사정을 잘 모르니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네 아버지잖아. 오랫만에 아버지 얼굴 본 건데 이런 표정이면 어떻게 해?

 저 인간은 아버지같은 게 아니라니까. 그냥 개자식이지.

 선영아.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말하지마. 그렇게 말하면 니 마음이 더 아프잖아.

 자기야.....

선영이 고개를 떨군다. 맞잡은 손에 힘을 준다.

난.... 아버지가 없이 자라서 니 기분을 잘 모르겠어. 아까 들은 이야기를 볼 때 결코 좋은 사이가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저 분이 네 아버지라는 건 사실이잖아. 네 어머니가 사랑했던 분이고 널 이 세상에 있게 한 분이야. 아무리 밉고 또 미워도 얼마 안 있으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게 되는 분이라고.

선영은 한참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소리도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이내 그녀가 팔을 뻗어와 내 목을 끌어안았다.

으아아앙....

내게 와락 안긴 선영은 어린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쌓아 온 원망과 미움이 어찌 한 순간에 없어질 수 있겠냐 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사슬에 묶여 그것을 아예 모른 척 할 수 없는 그녀의 통한이 쏟아져 내린다.

──────────────────────────

*

더블 데이트 Route J 시작합니다.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립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