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65)

최 선생님, 괜찮아요?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말의 내용만 보면 날 걱정하는 것 같지만 말투는 지극히 군대식이다. 아직 가보진 않았지만 들은 풍월에 따라 나 역시 군대식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답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그거 들고 따라오세요.

 네.

어제 그렇게나 마셔대었는데도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멀쩡했다. 내 담당인 송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들은 술 잘 마시는 사람 순서로 뽑는 건가 싶다. 그래서 교생이 오면 그렇게 술을 먹이는 건가. 일단 담당 사수가 시키는대로 교구가 들어있는 박스를 들고 따라간다. 복도를 걸어가며 어제의 난리를 생각한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지만 은애 때문에 기분 잡친 거 때문에 생각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다.

어젯밤, 현아를 따라 휴게실로 갔다가 그녀의 오해를 확정 짓는 지나의 인사를 받았다. 곧바로 해명을 하긴 했지만 현아의 의심 가득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 장소에서 그러고 있어보았자 오해는 풀릴 것 같지 않아 형이랑 은애부터 깨우기로 했다. 찜질방 수면실에서 진상짓 떠는 연인들 저리가라 할 정도로 태근이 형이랑 꼭 끌어안고 자고 있던 은애를 간신히 깨운다. 형은 어지간히 어깨를 잡고 흔들었는데도 꿈쩍도 안 한다. 

반면, 부스스한 표정으로 눈을 뜬 은애는 잠시 후 방방 뛰면서 자기를 이런 곳에 왜 데려왔냐고 되려 나에게 삿대질을 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놓았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경우가 바로 이런 건가. 어이가 없어서 대답을 바로 못하고 있었더니 은애는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을 한 번 스윽 둘러보고는 자기를 술집 여자처럼 하찮게 보는 거냐는 그녀의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하고 만다. 그 소리에 지나를 비롯한 다른 아가씨들의 표정이 상당히 험악해졌다. 발끈해 하는 그녀들을 보면서도 은애는 사과는 커녕 몸이나 파는 주제에 뭘 쳐다보냐는 식으로 도발을 해버렸고 결국은 격한 쌍소리와 함께 아가씨들이 들고 일어날 기세가 되어버렸다. 다급해진 내가 아가씨들에게 대신 사과하고 말리고 있는 사이 현아가 간신히 은애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야 휴게실 내부는 겨우 진정이 되었다.

그 난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서도 전혀 깨지 않고 코를 골며 꿋꿋이 자고 있는 태근이 형은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결국 나는 거기에서 태근이 형을 업고 나와 택시를 타고 우리 집으로 데려가 재웠다. 키는 나와 거의 비슷하지만 부피는 두 배가 넘지 않을까 싶은 형을 그렇게 데려가는 일도 보통이 아니었고 선영은 굳이 그렇게 가지 말고 아침까지 있다 가도 된다고 하였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불편했다. 자신들이 쉬는 장소를 내주었음에도 좋은 소리 못 들은 아가씨들에게도 미안했고....

오늘 아침에 태근이 형을 깨워서 같이 출근했다. 학교에서 만난 현아는 나를 보며 굉장히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지만 은애는 날 본척만척도 하지 않았다. 아오, 저걸 그냥 확..... 그때 그냥 길거리에 두고 신문지나 덮어줄 걸 괜히 챙긴다고 고생만 한 생각을 하니 아침부터 뒷골이 땡겼다. 더군다나 현아가 날 보는 눈초리는 아무래도 날 룸살롱에 자주 가는 날라리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으아. 비록 내가 거기 다니는 여자랑 친한데다가 깊은 사이이긴 하지만 가게에는 자주 가질 않았는데! 이런 오해라니. 머리가 복잡복잡하다.

그러나 복잡한 머리는 오전 내내 이어진 단순 노동으로 인하여 풀리게 된다. 내 담당인 송 선생은 자신이 부려먹을 수 있는 인원이 있을 때 최대한 부려먹자는 게 모토인 듯 실습실의 대대적인 단장을 시작했고 덕분에 나는 오전 내내 짐을 나르고 기자재의 위치를 옮기느라 땀을 빼게 되었다. 몸에서 배출된 땀처럼 어제의 나쁜 기억을 말끔히 지울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오전에는 수업이 전혀 없어서 내내 송 선생과 함께 실습실에 있었다. 점심시간 종이 울렸다.

수고했어요. 점심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혹시 싸왔어요?

송 선생은 그러면서 만약 싸왔다면 연구실에 가서 어제의 그 아줌마들이랑 같이 먹자고 한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같이 실습 온 분이랑 먹기로 해서요. 먼저 가세요.

 그래요. 그럼 늦지 않게 오세요.

 예.

송 선생은 두 번 권하지 않고 자기 짐을 챙겨 먼저 가버렸다. 오늘 점심은 어제 재워준 보답으로 태근이 형이 쏘기로 했다. 바로 교문 쪽으로 나가니 태근이 형 뿐만 아니라 은애와 현아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둘만 먹는 거 아니었어요, 형?

 쟤네들도 해장은 해야 될 거 아냐. 어제 그렇게 마셨는데.

 아휴.... 전 쟤네들이랑 있기 좀 그런데....

 난 남자랑 단 둘이 밥먹는 게 더 그렇다. 잔말 말고 따라와, 임마.

형과 나란히 걸어가며 궁시렁거려 보았지만 그저 여자랑 같이 밥먹는다는 사실에 신이 난 형의 귀에는 씨알도 안 먹혔다. 형이 뒤에 따라오는 현아에게 다가가 묻는다.

식사 뭐 좋아하세요?

 예? 저는... 그냥 아무거나...

안 그래도 쪼그만 녀석인데 저 커다란 형 바로 옆에 있으니 더 작아 보였다. 형은 현아에게 거듭 메뉴를 선택하라고 졸랐고 결국 현아는 주변을 돌아보다가 길 건너편에 있는 해물탕 집을 가리켰다. 그러자 은애가 못 마땅하다는 듯이 짜증을 부렸다.

저런거 말고 좀 맛있는 것 좀 먹으러 가면 안 되요?

 왜요? 저거 맛있겠는데. 현아 씨가 좋다고 하니 가보죠.

은애의 불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근이 형이 앞장서서 음식점으로 향했다. 해물탕 대짜와 공깃밥을 시켜놓고 넷이 둘러앉았다. 은애는 계속 형을 향해 투덜거리고 있었다.

어제 회 그렇게 먹고도 또 해산물이 먹고 싶어요?

 회랑 해산물은 다르잖아요.

 뭐가 달라요. 똑같지. 바다에서 온 거잖아요.

 그럼 하늘에서 온 거라면 비랑 눈이랑 같아요?

 조성은 같잖아요. 에이치투오! 문과인 저도 아는 건데.

 아, 예예. 근데 에이치투오는 산소 아니었어요?

 하아. 역시 체대생 아니랄까봐.....

 농담이에요. 농담. 하하핫.

 농담 아닌 것 같은데요.

태근이 형과 은애의 만담 아닌 만담을 귓등으로 넘겨가며 마주 앉은 현아를 살핀다. 수저통을 열고 다른 사람들의 수저를 챙기는 그녀를 돕는다. 수저를 다 놓고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

 아, 예.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나를 굉장히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속에서는 아무래도 최한석이라는 인간이 룸살롱에 단골로 입장하는 놈팽이 정도로 자리 잡은 모양이다. 여러 술집 여자들이랑 친분도 깊고 말이다.

저기, 오해를 좀 하신 모양인데요, 어제도 말씀 드렸지만 전 결코 그런 데에 자주 가는 사람이....

애써 변명하고 있는데 은애가 초를 친다.

어제 우리를 룸살롱에 데려간 사람이 한석 씨 라면서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는 태근이 형을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보니 태근이 형은 줄창 자고 있느라고 ROSE에 갔던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야,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어제 2차로 룸에 갔냐?

 그게 아니라요.....

선영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거기 책임자라서 어제 술에 뻗은 니들을 데리고 곤란해 하고 있는 날 만나 옮기는 것을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안 그랬으면 그냥 길바닥에 재우고 신문지나 덮어주고 말았을 거란 이야기도 곁들였다. 은애가 휴게실에서 난리 피운 이야기는 생략했다. 태근이 형은 그 커다란 손으로 내 등을 팡팡 치며 잘했다고 칭찬했다.

내가 곱게 자라서 그런지 냉한 데서 자면 입이 좀 돌아가거든. 고맙다, 야. 기왕이면 거기서도 깨워서 꽁술 좀 먹게 해주지 그랬어.

 아, 예에....

댁이 곱게 자랐다면 나는 아주 별나라 공주 대접을 받으면서 자랐겠네. 허이구. 어이없어 하고 있노라니 형이 은근한 말투로 묻는다. 몹시 진지하다. 이토록 진지하게 말하는 건 처음인 것 같다.

근데 말야. 너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디씨 좀 안 되냐?

 디.... 디씨요?

 그래. 담에 한 번 가자. 내가 쏠게. 아가씨까지 풀로다가. 으하하하.

두 여자가 날 쏘아보던 경멸의 눈초리는 이로써 태근이 형에게 돌아간다.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으니 상관없으려나. 마침 음식이 나왔다. 은애는 저질.이라는 말을 남기고 숟가락을 들었다. 지가 저질이라고 하는 인간이랑 어제 찐하게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줄까 말까 고민했지만 해물탕이 너무 맛있어서 그냥 참아주기로 했다. 아휴.

식사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떠났다. 은애와 현아처럼 나도 바로 교무실로 갈까 하다가 시간이 조금 남아있어서 등나무 쉼터로 가서 음료수 한 잔을 뽑아 먹었다. 요새 부쩍 일교차가 심해져서 낮에는 무척이나 더웠다. 체육관에 간다는 태근이 형은 땀 좀 흘리겠다. 음료수를 반쯤 마시고 있을 무렵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선생님, 저희도 한 잔 사주세요.

 응?

돌아보니 양갈래로 머리를 땋은 조그만 녀석이 활짝 웃으면서 있었다. 그 옆에는 시큰둥한 표정의 또 다른 꼬맹이가 있었고... 바로 소란이와 유진이었다.

성장기의 청소년들에게 탄산음료는 별로 좋지 않은데....?

 거기 주스도 있어요.

소란이가 곧 바로 자판기 버튼 하나를 가리킨다. 크윽. 저건 900원짜리잖아. 뭐 이렇게 비싸? 100%냐! 그런거냐?! 그러나 내가 이미 탄산이 좋지 않다는 소리를 한 터라 군소리 없이 500원짜리 사이다 대신 900원 짜리 주스 두 개를 뽑아서 소란이에게 준다. 소란은 하나를 유진이에게 넘기고 내게 꾸벅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아유, 요 인사성 좋고 착한 녀석 같으니라구. 그에 비해 유진이 저 녀석은 왜 이렇게 떫은 표정이야? 

식사 하셨어요?

자리에 앉고 보니 나, 소란이, 유진이 이렇게 나란히 앉게 되었다. 유진은 운동장 쪽을 보며 내게 관심없다는 투였고 소란이가 내게 살갑게 물어본다.

엉. 나가서 먹고 왔어.

 도시락 안 싸오세요?

 도시락 같은 건 영 젬병이라. 집에서 밥도 안 해 먹는데 도시락이라니.

 어, 그러시구나.

그러자 유진이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아니, 선생님은 집에 그릇도 없어. 밥을 아예 안 해 먹으니까.

 어, 그래?

소란이가 유진 쪽을 돌아본다.

근데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전에 과외 받으면서 들었어.

제 아무리 유진이라도 우리 집에 직접 왔었다는 이야기를 하긴 어려운 모양이었다. 소란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날 보고 묻는다.

참, 그럼 요즘에도 유진이 과외 하세요?

 어? 아... 그건 좀 그렇잖아. 지금 선생님 일 하고 있는데 그걸 같이 하는 건.

 그렇기도 하겠네요.

소란은 유진이를 돌아보더니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유진이가 쪼~끔 아쉽겠어요? 그쵸?

 내가 뭘!

유진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먼저 휙 가버렸다. 소란이는 내게 인사를 남기고 유진이를 따라 가버렸다. 밝고 명랑한 소란이와 이야기하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지만 몹시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던 유진이의 얼굴이 신경쓰였다. 그러고 있는 사이 예비종이 울려버렸고 난 또 송 선생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오후를 시작해야 했다.

정신없이 오후가 지나고 났더니 오늘은 또 남자 선생님들끼리 회식하는 날이라고 나와 태근이 형을 참가시켰다. 거부의사를 낼 겨를도 없이 삽겹살 집으로 끌려가 진탕 마시고 또 포장마차까지 이어지는 2차를 달린다. 결국 어제의 재연처럼 태근이 형은 뻗어서 쿨쿨 잠들어 버렸고 내가 처리해야 했다. 이런 일이 있을까봐 미리 형 집 주소를 미리 알아두었다. 강남 어디라는 곳을 운전사에게 알려주고 그대로 택시에 태워 보낸다. 그 무거운 인간 옮기느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집으로 겨우 돌아와 시계를 보니 밤 12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씻을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다음 날은 1학년 담임들 회식, 목요일은 행정실 직원들 회식이라고 불려가서 또 술을 마셨다. 내가 교생실습을 하러 온건지 술로 간을 담그러 온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길바닥에 쓰러져있는 태근이 형을 끌고가서 택시에 던져넣는 일이나 저 혼자서 휘적휘적 걸어가려는 현아를 붙드는 일에도 능숙해지기 시작했다. 은애 고 얄미운 계집은 신문지도 안 주고 내버리고 싶었지만 이미 집이 어딘지 알아둔 터라 녀석도 택시에 태워보내곤 했다. 집에 돌아오면 12시는 기본. 다음 날 제 시간에 일어나는게 지상 최대의 숙제가 된다. 이렇게 한 주를 보내고 있으려니, 송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화들짝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

 네엣?! 에... 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직속 담당이 있냐고 물어보는데 없을 시간이 있을 쏘냐!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더니 손 선생이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긴장하지 말아요. 오늘 연구실 분들이랑 저녁 먹기로 했으니까 이따 끝나고 주차장으로 와요.

 예.

 일단 이 서류는 행정실에 내주시구요.

 옙.

첫 출근 날, 날 몰아넣고 질문 세례를 퍼붓던 아줌마들을 떠올린다. 그 날 이후로는 점심식사를 다른 선생님들 나가서 먹을 때 같이 묻어가서 먹느라 연구실에 간 적이 없었다. 아줌마 선생님들의 얼굴이 희미해질 지경이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마셔대려나. 제 아무리 최한석이라도 물량 공세 술 세례는 점점 견디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하루하루 마시는 술이 누적되는 양만 따져도 한 트럭은 될 것 같다. 내 간장과 위장에게 조금 더 버텨 달라는 당부의 말을 속으로 하며 행정실에 서류를 제출하고 교무실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 날 불러 세운다. 돌아보니 유진이였다. 표정이 상당히 딱딱한게 몹시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다. 그래, 넌 기분이 안 좋구나. 난 속이 안 좋단다, 얘야.

요새 집에 안 들어가요?

 뭔 소리야, 다짜고짜.

난데없이 던지는 질문이 무슨 그 모양이냐. 유진은 주변을 살피더니 내게 한 발 더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들어가긴 하냐구요.

 들어가지, 그럼 어디 가?

 그럼 왜 맨날 전화 안 받아요?

 전화?

뭐냐, 이 녀석. 그럼 맨날 전화를 했다는 소리인가. 

열두시 넘어서 들어간 적이 많아서 말야. 너 몇 시에 전화했는데?

 ........쳇. 알거 없어요.

그러고 보니 리사에게서 전화가 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들었다. 리사는 잘 지내고 있는 걸까. 게다가 마리조차 요 며칠 통 얼굴을 못 보았다. 하긴 아침에는 내가 의도적으로 녀석과 마주치지 않게 일찍 나오고 밤에는 아주 늦게 들어가다 보니까.... 오랜만에 리사에게 전화를 해볼까.

.......래서 그 날은..... 잠깐, 내 말 듣고 있어요?

 어, 엉? 뭐? 뭐가.

요새 체내에 알콜이 너무 축적되어 그런가 때론 이렇게 멍해진다. 내 대답을 보고 상태를 짐작했는지 유진이가 내 팔뚝을 꼬집으며 말했다.

사람이 말하면 좀 들어요!

 아야야.... 알았다, 알았어. 말해봐. 뭔데?

유진이가 다소 우물쭈물하면서 말한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요.

 영화?

 해리슨 포드랑 브레드 피트 나오는 건데... 재미있데요.

 그래, 그럼 가서 재미있게 봐라. 난 이만 가볼.... 아얏!!!

손등이 다시 얼얼해진다. 벌개진 손등을 비비고 있노라니 유진이가 발을 구르며 낮게 소리친다.

아저씨한테 보여 달라고 하고 있잖아요.

 니가 언제 그랬어!

 방금요!

이런 어이없는 녀석을 보았나. 니는 영화 보여 달라고 타인에게 부탁하는 태도가 꼬집는 거냐!

내가 왜 보여줘야 되는데?

 저한테 거짓말 했잖아요.

 내가 언제?

 뭐 멀리 간다, 한 달 동안 못 본다 이래 놓고는...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구요?

 으으.... 그래 알았다, 알았어.

거짓말 하면 영화를 보여줘야 한다는 명제가 대체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고 대체 어느 나라에서 통하는 관습법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유진이와 난 일요일 아침 9시에 종로에서 만나기로 했다. 

늦으면 안 돼요? 알았죠?

 알았으니까 걱정 마.

 늦으면 진짜 진짜 안 돼요. 5분이라도 늦으면 전 그냥 가버릴 거에요.

 알았다니깐.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안 나오거나 그러면 진짜 진짜 진~짜 가만 안 둬요.

 예, 예. 삼가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유진이는 과도하게 굽신거리는 내 태도를 보고 잠시 피식 웃더니 한 번 더 다짐을 하고 몸을 돌려 가버렸다. 아오. 저 녀석은 나이도 어린 게 아주 사람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려고 해서 큰 일이다. 거참. 저거 데려가는 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고생 꽤나 하겠군.

퇴근 후, 난 주차장에서 송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송 선생은 물론 전에 기가연구실에서 보았던 다른 선생들까지 우루루 몰려왔다. 

어머나, 최 선생. 오랜만이에요?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

 송 선생이 안 놔주나 보지.

 난 또 내가 들러붙어서 도망간 줄 알았지. 호호호.

 박 선생이 들러붙으면 총각이 아니라 총각 할애비라도 도망 가겠어요.

 어머나, 연상도 나쁘진 않은데 할아버지는 좀 심하잖아.

나에게 질문 던지고 자기들끼리 대답하는 건 여전했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어색한 표정으로 애써 따라 웃는다. 우리는 송 선생 차와 양 선생 차에 나누어 타고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일식집으로 갔다. 산 중턱에 있는 꽤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요새 다른 선생들이 술 많이 먹이지?

 아, 예.

 원래 그래. 술 잘 먹어야 직장 생활 잘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신념을 가진 아저씨들이 꽤 많아서 말야. 아마 다음 주부터는 좀 괜찮을 거야.

 그런가요.

확실히 여자들의 회식은 남자들의 회식과는 많이 달랐다. 술이라고는 청주 딱 한 병을 시켜놓고 다들 한 잔씩 하더니 그게 다였다. 나에게 필요하면 술을 더 시켜주겠다고 했지만 사양했다. 음식은 코스로 나오는 거라 이것저것 쉬지 않고 나왔고 여자들은 쉬지 않는 수다와 함께 그것들을 먹어치웠다. 여자들이 밥 조금 먹는다는 건 죄다 거짓말이다. 저렇게 잘 먹다니. 아무래도 먹으면서 하는 수다로 에너지를 다 소비하기 때문에 계속 먹어도 괜찮은 것 같았다.

다만 끝에 앉아있는 빅토리아는 젓가락으로 음식만 집어먹을 뿐 통 말이 없다. 한국 말을 잘 못하는 걸까. 처음에는 같은 자리에 외국인이 끼어 있다고 상당히 긴장했는데 그 과묵한 예린보다도 말이 없으니 외국인이라는 부담감이 많이 없어졌다.

많이 먹어요.

 아, 예.

옆에 앉은 송 선생이 자기 몫으로 나온 초밥 몇 개를 내 접시에 덜어주었다. 

일주일 해보니까, 어때요? 할 만해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모르면 어떻게 해? 평가 점수 깎을까요?

 넷? 아, 저... 그게.....

송 선생의 무심하고 진지한 말에 내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으니 다들 까르르 웃는다. 

최 선생. 송 선생이 농담한거야. 송 선생은 농담하는 말투가 저렇게 진지하다니까?

 아, 예에.....

아무래도 이 아줌마들은 단체로 날 놀리는 거에 취미가 들린 모양이다. 술은 마시지 않는다고 하나 나를 안주거리 삼아 끊임없이 입을 놀려대는 아줌마들의 틈바구니에서 심신이 지쳐갔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와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대부분 애들 엄마라서 일찍 들어가니까요. 2차는 따로 없어요.

 아, 예. 그러셨군요. 다행입니다.

중간에 한 명씩 내려주고 나니 이제 차에는 송 선생과 나만 타고 있었다. 

최 선생은 어디서 내려줄까요?

 아, 전 가까운 지하철 역 아무데나 내려주셔도 되요.

 그래요, 그럼. 내일은 출근 안 하죠?

 예. 학교에 실습 보고 하러 가야 되서요.

 대학생은 좋겠네요. 토요일은 쉬고.

 쉴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왜요?

 밀린 레포트도 써야 되고 교안도 써야 되고..... 이번 주 내내 술만 마시느라 집에 가면 뻗기 바빴거든요.

술 많이 마신다고 평가점수를 깎지는 않겠지. 자기들이 사준 술인데 말이다. 그러자 송 선생은 꽤 의외라는 듯이 대답했다.

착실하네? 대개 막판에 닥치면 하곤 하던데.

 제가 손이 좀 느려서요. 미리미리 안 해두면 나중에 곤란해지거든요.

학교생활과 교생실습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후두둑 소리와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송 선생은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봄비 치고는 꽤 오네?

 그렇네요.

 우산 있어요?

 아뇨.

송 선생은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비도 오고 그런데, 한 잔 더 할래요?

어느 분 말씀이라고 감히 거절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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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이는 이번 주에...

 월 : 출근 - 술

 화 : 출근 - 술

 수 : 출근 - 술

 목 : 출근 - 술

 금 : 출근 - 아줌마들과의 회식 - (예정) 지애랑 술?

 토 : (예정) 학교?

 일 : (예정) 유진이랑 데이트?

송 선생과 함께 간 곳은 작은 수입맥주 전문점이었다. 가게 앞에 딸린 지붕 있는 테라스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기도 하고 비가 오고 있는 터라 가게는 한산했다.

집 근처라서 자주 와요.

 네에.

그녀는 메뉴판도 보지 않고 익숙하게 두 병의 맥주를 시켰다. 처음 들어보는 맥주였다. 우리 나라 맥주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여긴 수입맥주 전문점이지?

안주는 뭐 좋아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배가 부르거든요.

 그래도 뭐 하나 있는 게.... 음.

송 선생은 나쵸인가 뭐시기 하는 것을 주문했다. 맥주는 금방 나왔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상표의 병맥주였다. 컵도 하나 같이 나왔는데 생맥주 잔은 아니었다. 병맥주면 병맥주지 잔은 왜 따로 나오는 거지? 내 표정을 보고 있던 송 선생은 내 앞에 놓인 병을 가져가며 묻는다.

처음 마셔봐요?

 네.

괜히 아는 척 하다가 망신 당하기보단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좋다. 송 선생은 웃으며 내 병을 따주더니 컵에 반쯤 따랐다. 그리고 병을 내게 준다.

흔들어봐요.

시킨 대로 했더니 이젠 그걸 컵에 마저 따르란다. 그렇게 했더니 뽀얗게 거품이 쌓이며 맥주잔에 아주 먹음직스럽게 담긴다. 송 선생도 자신의 잔을 같은 방법으로 채웠다.

코로나도 좋긴 한데 난 이게 더 좋더군요. 최 선생도 한 번 마셔보세요.

가볍게 잔을 부딪히고 마셔본다. 생맥주랑은 다른 느낌이면서 일반 병맥주랑도 약간은 다른 느낌이 난다. 그래봤자 맥주지, 지가 어쩔껀데. 그래도 사주는 사람 체면을 생각해서 겉치레를 한다.

맛있네요.

 그렇죠?

마침 안주가 나와서 바삭거리며 그것을 먹는다. 우리 둘은 별다른 대화없이 비가 내리는 창 밖을 물끄러미 보았다. 한참만에 송 선생이 묻는다.

여자친구 있다고 했던가요?

 에.... 그게 미묘한데요.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는 거라....

 후후. 뭐에요. 그게. 완전히 작업 멘트 분위기인데?

송 선생과 밖에서 이렇게 단 둘이 이야기하고 있노라니 학교에서의 딱딱한 이미지는 많이 옅어져 있었다.

저도 설명을 잘 못 하겠는데요. 친하게 지내고 있는 애는 분명 있지만 딱히 고백을 했다거나 사귀고 있는 사이는 아니라서요. 그게 그러니까......

선영과 리사의 얼굴이 머리 속을 번갈아 스쳐 지나간다. 둘 다 나에게 깊은 호감을 보임과 동시에 자신의 몸을 허락한 이들이다. 그러나 이들과 연인 사이냐고 묻는다면 그것 역시 대답이 곤란하다. 내심 연인으로 발전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선영에게는 어쩐지 그런 말을 꺼내기가 좀 난감했고 리사는 그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그러고 보니 나와 함께 했던 여자들은 어째 다들 내 곁에 머무르질 않는다. 지혜는 이미 유부녀고 명희는 그 날 밤 이후 본 적도 없다. 효진이도 잠깐 생각이 났지만 이 녀석은 지가 무슨 마도로스라도 되는지 한 번 나갔다 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녀석이라 논외다. 관계를 맺은 건 아니지만 그보다 더한 쪽 팔리는 상황을 직면했던 마리는 지난 번의 그 사건 이후로 얼굴도 보지 못 했고....

생각이 길어지네요? 생각을 오래 하면서 정리할 만큼 여자가 많은가 봐요? 최 선생, 아니, 한석 씨는.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요. 송 선생님. 제 말은...

 밖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남들이 들으면 그닥 좋지 않으니까요.

 네? 아, 네....

송 선생, 아니 지애는 뭔가 곰곰히 생각하더니 내게 물었다.

올해 몇 살이라고 했죠?

 스물 세살입니다.

 똑같네. 그럼 밖에서는 그냥 누나라고 불러요.

 네?

뭐가 뭐랑 똑같다는 소리일까.

왜 그렇게 놀래요. 난 아직 서른 셋 밖에 안 된 미스인데 누나라고 부르는게 싫어요?

 아뇨, 부르겠습니다.

졸지에 누나가 생겨버렸다. 근데 미스라고?

결혼... 아직 안 하셨어요?

 왜요? 이 나이면 꼭 해야 되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좀 의외였다. 기가연구실에 있던 그 외국인 교사를 제외하고 아줌마들은 다 기혼이었던 터라 당연히 이 사람도 기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럼 나는 말 놔도 되겠죠?

 그러세요. 누나.

입에 아직 잘 붙지는 않지만 그녀가 원하는 칭호대로 불러준다. 그러자 지애는 살짝 웃었다.

후후. 그래. 고마워.

난데없이 뭐가 고맙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창 밖을 보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저기, 누나.

 응?

 누나는 남자 친구 없어요?

 나?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잔을 들어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피식 웃는다. 대답은 않고 창 밖을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날 돌아보며 말한다.

왜? 없다고 하면 누구 소개라도 시켜주게?

 아... 아뇨. 그런 사람은 없는데요.

 없으면 한석이가 한 번 해봐도 괜찮고.

꽤 진지한 말투로 이쪽을 돌아보며 말을 건네는 통에 좀 놀랐다.

에엑?

깜짝 놀랐더니 지애가 풋 하고 웃는다.

농담이야, 농담. 진짜 똑같네. 하하.

대체 아까부터 뭐가 똑같다는 거냐. 그러나 지애는 그 후로 별다른 소리 없이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 역시 특별히 할 이야기도 없어 그냥 앉아있었다. 술집답지 않게 꽤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어느 순간 지애는 그걸 따라 가볍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흘렀고 비가 그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일어났다. 별다른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특별히 무언가 한 것도 아닌데 꽤 편한 시간을 보냈다. 그녀에게는 다음 주에 뵙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토요일, 학교에 나가 행정동 앞에서 태근이 형을 만났다. 보고서를 아직 덜 썼다는 형에게 내 보고서를 보여준다. 형은 엄청 신나하더니 내 보고서를 베끼기 시작한다. 

아, 형. 아무리 그래도 수업 내용 까지는 베끼지 마요. 형은 체육이고 전 기술 가정인데.

 아, 그런가?

체육 선생이 현대의 기술발달을 가르쳐서 뭐 할 건데. 형은 대수롭지 않게 볼펜으로 두 줄을 찍찍 긋고 그 위에 농구라고 썼다.

으으.. 아무리 형식적이라 그래도 명색이 보고서인데 그렇게 막 써도 되요?

 뭐, 어때. 이딴 건 그냥 대충하면 된다니깐.

본인이 괜찮다는데 내가 굳이 곤란할 필요는 없으려나. 그런데 어느샌가 다가온 은애가 형의 보고서를 슬쩍 넘겨보고는 혀를 찼다.

참나. 진짜 생긴대로 무식하시네요.

 내가 뭘?

 체대생들은 진짜 다 그래요? 뇌까지 근육이라는 게 사실인가 봐요?

 뇌가 근육이면 튼튼하고 좋지 뭘 그래.

지난 일주일간 이래저래 마주치며 이야기를 많이 나누기는 했지만 난 아직 은애나 현아와 말을 트지 못 했다. 그러나 형은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에게 굉장히 편하게 말을 한다. 물론 은애는 형이 건네는 말에 곱게 대답하는 법이 없고 현아는 거의 말을 잘 안 하니까 별 상관없으려나. 비아냥 거리는 은애 뒤로 현아도 보였다. 형과 티격태격하는 은애는 무시하고 현아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다. 전에 이야기할 때 보고서 쓰는 거 가지고 걱정을 하기에 조언을 해줬었다.

보고서 잘 썼어요?

 그냥저냥 이요. 사실은 어떻게 쓰는지 잘 몰라서 선배들한테 물어보고 그랬어요. 결국 한석 씨가 하라는 대로 일단 쓰긴 했는데...

 그러셨구나. 저도 뭐 크게 다르진 않아요.

현아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형이 다 썼다고 하기에 모두 다같이 행정사무실로 가서 보고서를 제출했다. 접수를 하면 뭔가 내용을 보거나 이럴 줄 알았는데 그냥 대충 사람 수와 표지의 이름만 확인하더니 결재 도장을 찍는다. 내용을 어떻게 쓰나 고민했던 나의 지난 시간이 허무해질 지경이다. 사무실을 나오면서 형이 내 옆구리를 찌른다.

것 봐라. 내 말 맞지?

 그렇네요. 거참.

투덜거리고 있노라니 형이 여자애들에게 다가가더니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권한다. 점심 먹기는 좀 이른 시각이긴 하지만 못 먹을 시간도 아니었다. 은애가 노골적으로 싫다는 투로 거절했지만 태근이 형의 설득 대상은 현아였고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그녀는 형의 권유를 수락하고 만다. 그러자 은애가 나선다.

좋아요. 대신 메뉴는 제가 정할 거에요.

혼자만 돌아가는게 싫었는지 은애는 투덜거리면서도 빠지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자기가 먹고 싶은 걸 이야기한다.

스파게티 먹으러 가죠. 저희.

아오. 저 것은 왜 싫다면서 지가 메뉴를 정하고 있냐. 그러면서 학교 근처에 스파게티 전문점이 어디 있나 생각하고 있는데 태근이 형은 은애 쪽은 아예 신경도 안 쓰고 현아를 돌아보며 재차 묻고 있었다.

현아는 뭐 먹을래?

 네? 저는 그냥 아무거나....

목소리도 조용조용하고 그닥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도 않는 현아는 꽤 어려 보였다. 형은 머리를 잠시 긁적이더니,

그래? 음... 그럼 내가 자주 가는 데로 가자.

하면서 결정해버렸다. 자기 의견이 철저히 무시당한 은애가 짜증을 부렸지만 아무도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형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었다며 차를 가지러 공대 뒤쪽에 있는 주차장으로 갔다. 우리는 학관 앞에서 형이 오길 기다렸다. 그냥 학교 앞이나 가고 말지 무슨 차를 끌고 오겠냐며 똥차라면 차라리 타지 말고 그냥 걸어가자고 투덜거리고 있는 은애의 군소리를 못 들은 척 하면서 말이다.

잠시 후, 은빛의 커다란 차가 우리 앞에 와서 선다. 운전석에 탄 태근이 형이 창문을 열고 우리에게 얼른 타라고 한다. 대형차가 내는 그르렁 소리가 어쩐지 귀에 익숙하다. 모양도 그렇고... 혹시나 싶어서 차 전면에 붙어 있는 로고를 확인해보고 잠깐 놀랐다. 저 로고를 분명히 얼마 전에 봤는데 말이다. 물론 세상에는 차들이 참 많이 있으니 같은 모델에 같은 색의 차도 많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외제차가 그리 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여자들이 뒷자리에 타고 내가 조수석에 탄다. 조수석에 타서 대쉬보드를 보니 실내장식도 꽤나 익숙하다. 그제서야 확신이 선다. 차가 학교를 벗어나 시내 쪽으로 향하는 동안 형에게 물어본다.

저기, 형. 뭣 좀 하나 물어봐도 되요?

 물어뜯는 게 아니라면 뭐든지.

여전히 썰렁한 사람이다.

혹시 동생 있지 않아요? 여동생?

 엥?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 나 뒷조사 하러 다니냐?

그제서야 확신이 든다. 그러고 보니 즐겨하는 썰렁한 농담도 그렇고 가벼운 말투도 그렇고 어쩐지 내가 어떤 녀석이랑 많이 닮았다.

그럼 형이 효진이 오빠였어요?

 어라? 너 효진이 알아? 이야. 세상 좁네.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냐?

 지난주에 효진이가 이걸 몰고 오더라구요. 외제차라 좀 뜨악했는데 자기 오빠 차라고.....

내 설명을 들은 형은 갑자기 크게 웃으며 핸들에 얹은 손을 두드렸다.

푸하하. 그럼 그때 지혜 결혼식에 같이 갔다는 얼빵이가 너냐?

지혜랑도 아는 사이인가 보다. 하긴 효진이랑 지혜랑 오랜 친구 사이라고 했으니 효진이 오빠가 지혜를 아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효진이 고것은 나를 그렇게 밖에 표현 못 하나.

이야. 암튼 신기하다야. 안 그래도 효진이가 가끔 그런 이야기 했거든. 지혜 좋아하다가 이번에 닭 쫓던 개 신세 된 웃긴 녀석이 하나 있는데 하는 짓 보면 진짜 웃기다고 말야. 근데 그게 너였을 줄이야. 얌마. 그렇다고 진짜 결혼식 까지 가냐? 대단하다, 대단해. 영화를 찍어라. 짜샤.

 ........지혜 이야기는 그만 좀 하시면 안될까요?

나중에 효진을 만나면 헤드락이라도 걸어주리라 다짐한다. 그러고 보니 뒷자리의 두 여자가 신경 쓰였다. 그러나 운전석에 앉은 지상 최대의 무신경남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뭐, 어때. 좋아하던 여자가 유부녀 된다면 더 불타 올라야지. 처녀보단 유부녀가 자빠트리기는 더 쉬울 거 아냐. 처녀는 좀 그렇지만 유부녀야 뭐 티도 안 날테고 말이야. 안 그래? 으하하하.

하아. 좋아하던 여자 결혼식에 갔다는 나에 대한 평가는 그렇다 치고서라도 이 형은 저질소리 한 번 더 듣겠구만. 지난번에는 다 같이 있는데서 룸에 가자 어쩌자 하더니 이번에도 역시나 여자들 있는데서 진짜 못 하는 소리가 없다. 그러나 내 생각은 살짝 빗나갔다.

오호로. 태근이 오빠 진짜 재미있으시다. 호호호.

.......내가 방금 잘못 들은게 아니라면 이 썰렁하고 격 떨어지는 아저씨 유머에 맞장구 치면서 웃은 녀석이 은애 맞나. 현아는 잠자코 아무 말도 안하고 있으니 저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소리는 은애가 분명하군. 아까까지의 은애 태도와 지금의 태도의 차이에서 유발된 아노미에 버금가는 가치관 혼란을 느끼고 있는 동안 차는 종로에 도착했다. 

어떤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모두 내리자 누군가 나와서 형에게서 키를 받아간다. 오. 저게 말로만 듣던 발렛 파킹? 주차원이 차를 대는 동안 우리가 2층으로 올라가자 중후하고 이국적인 분위기의 레스토랑 입구가 나타났다. 입구에 나무를 조각된 간판에는 이탤릭체로 뭔가 써 있기는 한데 영어는 아니고 못 읽을 글씨였다. 프랑스어인가 이태리어인가. 암튼 그런 분위기다.

안으로 들어서자 지배인이 태근이 형을 알아보며 정중히 인사하고는 안쪽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칸막이 너머 별도의 공간에 자리한 널찍한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판이 한 사람마다 하나씩 주어지긴 하는데 들여다봐도 뭔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 얼핏 보니 은애나 현아의 표정도 마찬가지인 걸로 보아 나처럼 곤란한 모양이다. 내가 대표로 나서 형에게 주문을 부탁했다. 흔쾌히 알았다고 대답한 형은 메뉴판을 펼칠 생각도 않고 지배인에게 바로 묻는다.

오늘 세프 추천 메뉴가 어떻게 되죠?

 샤토브리앙 스테이크입니다.

 소스는요?

 양송이 포트 소스와 페퍼콘 소스가 준비되어있습니다.

뭔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가 마구 쏟아지고 있다. 

지난번에 보니까 소스가 너무 무겁던데요. 그 이야기 좀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아가씨들도 있으니까 고기는 좀 더 연하게 해주시구요.

 예.

형은 그 외에도 거위간이라느니 녹두 스프라느니 샐러드, 디저트, 즐겨 먹던 와인 등을 익숙하게 늘어놓으며 주문을 마쳤다. 우리에게서 스테이크를 굽는 정도에 대해 묻고 나서 지배인이 물러가고 나서 또 다른 웨이터가 와서 테이블 위에 놓인 초를 밝히고 식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나는 형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형,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여기 비싸 보이는데.

그러나 형은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그래 보았자 다 사람 먹는 건데 뭐 어때?

라며 씨익 웃는다. 돈이야 뭐 형이 낼테니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전혀 안 보였는데 이 사람 돈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효진이만 하더라도 평상시에는 그런 거지꼴...까지는 아니고 아무튼 대충 입고 다니다가 외제차를 끌고 와서 나를 놀라게 하더니 이 사람도 평상시에는 그다지 돈 있는 티를 내지 않는 게 신기하다. 그렇지만 이런데 와서도 결코 재거나 뻐기지 않고 늘 그렇듯이 사람을 꽤 편안하게 대해 주는게 한결같다. 여러 면에서 효진이를 생각나게 한다.

요새 효진이는 뭐해요?

먼저 나온 스프를 떠먹으며 묻는다. 형은 테이블에 놓인 빵까지 찍어 먹으며 열심히 먹고 있었다. 프랑스 식당인지 이탈리아 식당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고 형이 이런데 자주 오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테이블 매너는 참 한국적이다. 곧 이어 사토브리앙인지 사탕불알인지 뭐시기 하는 스테이크가 나왔다. 형은 꽤 큼직큼직하게 썰어 먹으면서 답했다.

걔야, 뭐. 별거 있나. 맨날 집에서는 선보라 그러고 본인은 도망다니고 있고 그러지. 아버지가 차 압수했는데도 어디서 오토바이 하나를 끌고 와서는 그러고 다니더라. 걜 누가 데려가나 몰라.

오토바이를 탄 효진이라.... 머리 속에서 저절로 그림이 그려진다.

전에는 지혜 집에서 살다시피 하더니 말야. 요새는 어디 박혀 있는지 도무지 보이질 않더라구. 나도 뭐, 신경 끄고 산다. 지가 알아서 잘 하겠지.

태근이 형의 지나치게 대범한 성격과 효진의 털털한 성격을 조합해보니 그도 그럴 것 같다. 서로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기 전까지는 그냥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맘 편하게 살아갈 가족 사이. 어쩐지 저절로 납득이 되어서 고개를 끄덕인다. 효진이 이야기는 그만 물어보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고기를 썰어먹는다. 입에 넣어 씹어보니 상당히 부드럽고 육질이 좋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육적만큼이나 말이다. 아니, 육적보다도 더 얇다고 해야하나.

여기 진짜 맛있다. 그치, 현아야?

어떤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은애와 현아를 바라본다. 나와 마주 앉은 은애는 아주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하며 현아에게 말하고 있었고 현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는 다소 깨작거리면서 먹고 있었다. 보고 있는 내가 다 답답하다. 은애가 밝은 표정으로 형에게 말을 건다.

오빠는 여기 자주 오세요?

 나? 뭐.. 그냥 고기 먹고 싶으면 오고 그러지. 내가 입이 좀 짧아서 말야.

 어머나. 그래도 몸이 좋으신데 무슨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어요?

아아. 속이 거북하다. 전에는 태근이 형이 무슨 말만 했다하면 아주 총알이라도 나갈 것처럼 쏘아대던 은애가 지금은 형에게 과도한 시선을 퍼부으며 꿀 발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형은 은애에게는 건성으로 대답해주며 맞은 편에 앉은 현아를 계속 신경썼다.

고기가 질기지 않아? 내가 썰어줄까?

 아뇨. 괜찮아요.

그러자 은애가 나선다.

오빠, 저는 잘 못하겠어요.

 그래? 근데 넌 웰던이라 그냥 썰면 될 거야. 힘내라.

울상이 된 은애의 모습이 몹시 웃겼지만 속으로만 웃기로 했다. 그녀는 입을 삐쭉거리며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들이켰다. 그러면서 현아에게 묻는다.

현아야. 넌 와인 안 마셔?

 응. 난 별로 그다지... 맥주라면 모를까.

현아의 말을 들은 은애는 크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어머, 얘. 원래 스테이크에는 레드 와인인거 모르니? 상식이잖아. 무식하게 맥주가 뭐야. 맥주가.

그... 그런 상식이 있었나. 난 내 앞에 놓인 와인 잔에 채워진 붉은 술이 영 술 같지 않고 달짝지근해서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스테이크 먹을 때는 레드 와인을 먹었어야 하는 거구나. 하아. 오늘도 지식이 하나 늘었다. 그러나 태근이 형은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형은 웨이터를 불렀다.

여기 맥주 두 잔 주세요.

웨이터가 가져와 현아와 형 앞에 놓은 맥주잔을 보면서 은애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나도 맥주를 청한다. 솔직히 상식이라는 와인과 스테이크는 대체 어떤 궁합인지 모르겠는데 맥주에 스테이크는 꽤 잘 어울렸다. 현아도 맥주는 한 잔을 다 비웠다. 그런 분위기로 식사는 주욱 이어졌고 후식으로 나온 샤베트까지 먹고 나서 한참만에 레스토랑을 나섰다. 은애는 잘 먹었다는 인사를 남기고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먼저 휑하니 가버렸다. 태근이 형은 은애는 신경도 쓰지 않고 현아를 돌아본다.

현아는 어떻게 할래? 태워줄까?

 아뇨. 전 지하철 타고 갈게요. 그리고 오빠 술 드셨잖아요.

 아, 그랬지. 참.....

잘 먹었노라고 꾸벅 인사를 하고 떠나는 현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입맛을 다시는 태근이 형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임마.

 쟤가 어디가 좋아요?

 귀엽잖아.

순간 머리 속으로 형과 현아가 나란히 걸으며 데이트를 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여태 참았던 웃음이 한꺼번에 터져서 크게 웃어버렸다.

이게 비싼 밥 먹고 돌았나, 왜 웃냐. 임마.

 아, 아뇨. 형이랑 현아랑 사귀는거 잠깐 상상해봤는데....

 그래? 어때? 잘 어울리지 않냐?

 네. 진짜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부녀지간 같아요.

잘 어울린다는 소리에 잠깐 좋아하던 형은 뒤에 이어진 단어의 의미를 좀 늦게 파악하고는 나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으윽. 효진이가 헤드락 걸 때는 좀 좋았던 말캉함이라도 있었지만 남자가 걸 때는 정말 괴롭구나. 탭! 탭! 기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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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종로에 왔기에 태근이 형과 헤어지고 교보문고에 들렀다. 베스트 셀러 쪽과 신간 서적 쪽을 기웃거리며 보고 싶었던 책 몇 권을 골랐다. 문체가 마음에 드는 소설을 서서 한참동안 읽기도 한다. 마음 같아서는 더 사고 싶기도 했지만 이번 달은 유진이 과외를 쉬기 때문에 집에서 보내준 용돈 말고는 쓸 돈이 별로 없다는 생각에 자제했다. 계산을 하고 나가려다가 팬시 매장에 놓인 인형 판매대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유진이에게 사주었던 그 인형과 같은 시리즈인 모양이었다. 생긴 건 이상하게 생겼는데 다른 종류가 계속 나온다는 건 이게 나름 인기 있다는 건가. 하긴 내 침대 위에도 하나 올려져 있으니 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인형들을 들여다보게 된다. 내일 녀석을 볼텐데 사과의 의미로 하나 사다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갑을 확인해보니 으음.... 좀 아슬아슬 하긴 하지만 인형 하나 못 살 정도는 아니다. 가격표를 보니 두 개도 살 수 있긴 하다. 그런데 막상 사려고 하니 이것도 꽤나 난이도가 있는 선택이다.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겼는데 옷차림이나 포즈 같은게 조금씩 다르다. 고민이 깊어진다.

여기서 뭐 하세요?

으아. 깜짝이야. 생각에 잠겨있어서 뒤에서 누가 다가온 줄도 몰랐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현아가 서 있었다. 손에 들린 종이봉투로 보아 그녀도 여기서 뭔가 산 모양이다.

아, 책 좀 사려고 왔어요.

내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살짝 들어 보여준다. 그러자 현아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내 앞에 놓인 인형 판매대를 가리킨다.

근데 펀치 브라이스 인형은 왜 보고 계세요?

 펀... 뭐요?

 펀치 브라이스요. 지금 바로 앞에 있는 거 말이에요.

인형이면 그냥 인형이지 무슨 이름 씩이나 붙어 있냐 이건 대체. 눈만 커다란 그 인형 중에 하나를 집어 들고 살펴본다. 그제서야 박스에 휘갈겨 써 있는 글씨가 펀치 브라이스라는 걸 알았다. 한 번 사보기도 했고 선물 받아보기도 했는데 이름을 안 건 처음이다.

헤에. 이게 이름이 있었군요. 몰랐네요.

 어머, 이거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데.... 들여다보고 계시기에 당연히 아시는 줄 알았어요.

현아가 자연스럽게 내 곁에 서더니 자기도 인형을 골라본다. 내가 보기엔 입고 있는 옷만 다르고 다 똑같은 녀석인거 같은데 현아의 말에 따르면 애들마다 종류가 다 다르단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고르기가 더 어려워졌다.

전에 한 번 사본 적은 있는데... 뭐가 좋은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요.

 선물 하시게요?

 아, 예. 고등학생인 녀석인데... 전에도 한 번 사준 적이 있구요.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서....

순간 우리 고등학교 녀석이라고 말할 뻔했다. 어쩐지 그건 밝히지 말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동생이세요?

 아뇨. 동생은 아니고.... 전에 과외를 한 적이 있어서.

 그러시구나....

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러 인형 중에서 두 개를 골라 각각 한 손에 집어 들고 날 보여준다.

얘네들 어떠세요?

내가 볼 때는 둘 다 똑같이 못 생겨 보인다. 별 수 없이 현아 보고 골라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녀는 인상까지 써가며 한참 고민하더니 둘 중에서 빨간색 외투를 입고 있는 녀석을 내민다. 나는 그걸 받아들고 군말없이 계산을 치른다. 포장까지 해 달라고 해서 돌아오니 현아가 아직도 그 인형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것저것 들어보다가 가격표를 확인하고는 도로 내려놓는다. 혹시나 싶어서 물어본다.

마음에 드시나 봐요? 현아 씨도 하나 사드릴까요?

 네? 아뇨. 뭐하러요. 괜찮습니다.

 골라주신 거에 대한 보답으로라도?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구요. 괜찮아요.

두 손을 뻗어 맹렬하게 흔드는 그녀를 보니 태근이 형 말마따나 나름 귀엽긴 했다. 나중에 형한테 이 인형을 사라고 귀띔을 해주어야 겠다. 난 이제 볼일이 끝났고 현아도 책을 다 샀다고 하기에 함께 서점을 나와 전철역을 향해 걸었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학교 근처란다. 나랑 같은 방향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내가 사는 동네 이름을 말했더니 맞단다. 역시 우리 동네는 학교랑 가까우면서도 빌라 같은 게 많아 학생들이나 교직원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나는 버스정거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라면 여기서 버스 타고 가는게 더 빨라요. 전철은 한 번 갈아타야 되는데 버스는 한 번에 바로 가거든요.

 아, 정말요? 전 몰랐는데...

우리 둘은 발걸음을 돌려 버스 정거장으로 갔다. 버스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주에 있었던 교생실습 이야기가 주된 화제였다. 현아는 자기 담당인 선생이 엄청 늙은 남자 선생님인데 말을 하도 웅얼거려서 뭔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는 고충을 털어놓았다. 나는 술에 찌든 나날과 아줌마들에게 둘러싸인 고충을 이야기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 동네로 가는 버스가 도착해서 올라탔다. 자리가 딱 한자리 남아있기에 현아를 앉혔다. 나는 의자 등받이와 천장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짐은 저 주세요.

 그럴까요?

책과 인형이 담긴 종이봉투를 현아가 받아들었다. 포장되어 있는 인형 박스를 만지작거리던 현아는 내게 물었다.

과외하는 학생이 귀여운가 보죠?

 엑? 귀엽다기 보단... 건방지죠. 쪼끄만 게.

그러자 현아가 풋하고 웃으며 말했다.

저도 쪼끄마한 데요?

 아아. 죄송해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쪽도 만만치 않게 쬐깐하군. 굉장히 실례되는 이야기를 한 것 같아서 미안했다. 내가 사과하자 현아는 손사래를 치며,

아뇨. 정말 괜찮아요. 제 별명도 그런데요. 뭘.

란다. 그녀의 태도가 날 안심시켰다. 안심은 되는데 궁금한 게 생겼다.

별명이요? 뭔데요?

 아...... 그게....

현아는 한참이나 부끄러워하고 고민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햄스....터요.

작게 움츠러든 그녀의 모습과 별명이 너무도 싱크로율이 좋아 순간적으로 대폭소할 뻔했지만 방금도 실례를 저지른 터라 간신히 참아냈다.

귀...귀엽네요. 잘 어울리세요.....

 지금 필사적으로 웃음 참고 있죠?

 푸?.... 아. 아뇨. 그럴 리가요.

현아는 잠시 샐쭉해 졌지만 이내 자신의 신입생 때의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다. 환영회에서 도저히 술을 못 마시겠다는 그녀에게 누군가 빨대를 권했다. 영문도 모른 채 시키는대로 빨대로 소주를 빨아먹고 있는 그녀 모습은 모두를 웃다 나자빠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 누가 그걸 보고 햄스터 같다고 딱 한 마디 했는데 그게 대학 생활 내내 따라붙는 별명이 되어버렸지 뭐에요.

지금도 그녀의 과에서는 그녀를 현아가 아니라 햄아라고 부른다고 한단다. 결국 참지 못한 나는 껄껄 웃어버렸고 나를 향해 가볍게 눈을 흘기는 햄아, 아니, 현아의 뾰로퉁한 얼굴을 보아야만 했다. 다시 정중히 사과했다. 현아는 사과를 받는 대신 조건을 걸었다.

사과하는 의미로 저녁 쏘세요.

 그...그래야 되나요?

 안 쏘면 사과 안 받아드릴 거에요.

 알겠습니다.

사과 대 저녁이라는 협상이 완료되자 현아는 활짝 웃더니 떡볶이나 먹으러 가잔다. 그러고 보니 배도 출출하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긴 했다. 동네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린다. 현아는 근처 시장에 떡볶이 맵게 잘 하는 집이 있다며 앞장 서서 나를 이끌었다. 둘이 나란히 걷고 있는데 현아가 이야기를 꺼낸다.

저기요.

 네?

 우리 동갑 아닌가요? 맞죠?

 아마 그럴 껄요.

그러자 현아가 환한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그럼 우리 말 놓는게 어때요?

 그럴까요? 아니... 그럴까?

하긴 동갑인데 항상 존칭 쓰는 것도 좀 웃기긴 했다. 말 놓은 김에 아쉬운 점을 이야기한다.

근데 왠지 억울하다. 내가 다 쏘는 건.

 왜?

 햄아, 니가 먹으러 가자고 했잖아.

아까 배운 별명을 얼른 써먹는다. 현아는 자기 별명을 듣고 눈썹을 살짝 씰룩거리기는 했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알았어. 알았어. 여고생한테 비싼 인형 사줄 돈은 있어도 동기한테 떡볶이 사줄 돈은 없다 이거지?

 .......여고생인지는 어떻게 알았어? 내가 이야기 했던가?

 그럼 남자애한테 그런 걸 사다 주겠어?

 것두 그렇네.

다소 옥신각신한 끝에 떡볶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내가 사기로 했다. 우리가 간 곳은 우리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시장 내에 있는 분식집이었다. 현아가 자리에 앉으며 주문을 했다.

이모, 저희 오떡순으로 주세요. 순대는 간만 주시구요.

 오떡순이 뭔데?

 오뎅, 떡볶이, 순대.

 아하.

굉장히 심플하면서도 명확한 네이밍 센스다. 순대가 먼저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를 보니 입맛이 돌았다. 젓가락을 들어올리며 호기롭게 외쳤다.

많이 시켜.

그러자 현아가 눈을 빛내며 묻는다.

그럼 떡볶이는 1인분만 시키고 오뎅이랑 순대 많이 시킬까?

 윽. 얼마나 먹을라고? 그게 니 쪼끄만 몸에 다 들어가?

 너 햄스터가 자기 체중에 비해 얼마나 많이 먹는지 모르지?

우리 둘은 마주 보고 한참을 웃었다. 곧 떡볶이도 나오고 그릇에 국물과 함께 담긴 오뎅도 나왔다. 4월이라고는 하나 아직 따끈한 오뎅이 현역으로 뛰고 있었다. 떡볶이는 현아의 장담대로 상당히 매웠다. 오뎅 국물 리필을 몇 번이나 시켰는지 모른다. 떡 하나에 오뎅 국물 하나를 마셔대는 나를 보며 현아가 물었다.

매운거 잘 못 먹나 보네?

 응. 우리 엄마는 무지 잘 먹는데 난 전혀...

 저런. 매운게 얼마나 맛있는데.

아닌게 아니라 현아는 그 매운 떡볶이를 엄청 잘 먹었다. 진짜 저게 다 어디로 들어가는지 미스테리였다. 문득 낮에 있었던 점심식사가 생각난다. 계산서를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모르긴 몰라도 일인당 순대 50인분 가격은 너끈히 나온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막상 거기서 현아는 상당히 깨작거리며 먹었다. 그때는 작은 녀석이라 별로 안 먹는가 싶었는데 지금 보니 적게 먹는 녀석은 절대로 아니었다.

혹시 말이야. 낮에 레스토랑은 별로였어?

 아? 거기... 신기하긴 했는데 막 입에 맞거나 하진 않더라고. 옆에 누가 계속 서서 왔다갔다 하는 것도 좀 이상하고.

 그랬구나.

태근이 형에게 귀띔 해줘야 하는 항목이 늘어났다. 다음에는 무지 매운 쫄면이라도 먹으러 가라고 권해야 겠다. 물론 난 빠질테다. 그런 건 대체 무슨 정신으로 먹는지 모르겠으니까 말이다. 난 아줌마에게 튀김과 순대를 더 가져다 달라고 했다. 아무래도 나에게 이 떡볶이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덕분에 떡볶이는 전부 현아 차지가 되었다.

저기 말야.

 응?

오뎅 하나를 간장도 아니고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고 있는 현아에게 물어본다.

태근이 형 어때?

 어떻냐니.

 사람 괜찮지 않아?

 그건 왜 묻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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