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태라는 친구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인 녀석이었는데 희한하게도 성은 기억이 안 난다. 별명은 변태. 그런 강렬한 별명을 가지게 된 데에는 이름도 이름이거니와 하는 짓이 정말 기가 막혀서 그렇기도 했다. 녀석은 생리대 감촉이 궁금하다고 직접 슈퍼에 가서 생리대를 사와서 교실에서 뜯어보기도 했고, 용돈 받으면 곧장 남들이 잘 모르는 어떤 곳으로 가서 비디오 테이프며 책이며 하여간 이상한 물건들을 사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물 건너 영상물들을 어떻게든 입수해서는 그 내용이 궁금하다고 학교 공부는 도외시하고 영어 공부와 일어 공부에 매진을 할 정도니 말 다했다. 녀석이 가져온 것들을 친구들끼리 돌려보며 희희덕거리던게 엊그제 같다.
그때 병태가 가져온 것들중에서 그런 내용도 적잖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자가 혼자서 자기 몸에 대고 응응응하고 있을 때 남자가 등장하면, 여자가 황홀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달려들며 오, 마이갓! 이걸 원했어! 이 길고 단단한 걸로 어서 날 쑤셔줘! 퍽 미! 라는 판에 박힌 대사와 함께 둘이서 응응응 하는 걸로 돌입하는 내용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서....선배?
황급히 이불을 그러모아 몸을 말아버린 마리 앞에서 난 얼음땡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불 바깥으로 나와있는 녀석의 발목에 팬티로 추정되는 어떤 천이 걸려있는 것까지는 보았는데 내 시선이 거기에 닿자마자 후다닥 이불안으로 다리가 감춰진다. 녀석은 마치 갑옷처럼 이불을 꽁꽁 싸매고 나를 굉장히 경계하는 눈초리로 살핀다. 똘똘 말린 이불이 마치 공격자를 만난 아르마딜로를 연상시킨다.
여....여긴 우짠 일로.....
아직까지 신음소리의 여운이 가시질 않는 마리의 목소리. 그걸 쥐어짜면 당황이라는 액체가 줄줄줄 흐를 것 같다. 붉게 상기된 표정은 잘 익은 홍시를 연상시킨다.
바.....밥 말이야. 밥 먹자고 불렀는데 대답이 없어서.....
덩달아 나까지 당황하고 만다. 솔직히 말해 녀석을 소리높여 부른 적은 없지만,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만다.
지....지는예... 생각이 없어가.....
그...그러냐? 아, 알았어.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마리는 이불만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않고 있었고 나는 어느 타이밍에 빠져야 되는가 고민하면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그럼 난 밥 먹으러 갈게.
뒷걸음치듯이 방에서 나와, 도망치듯이 그 집을 벗어나, 바람처럼 단골 음식점까지 뛰어간다.
으아아아아! 난 머저리야!!!!
벌거벗고 유레카를 외치던 아르키메데스는 금관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 부피 측정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는 환희에 넘쳤겠지. 반면에 나는 전혀 벗지 않았음에도 벌거벗은 기분을 느끼며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쪼다 멍청이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어처구니없음에 진저리 치며 비명을 질렀다. 거기서 바보처럼 왜 그러고 있었는지 나 자신에게 몇 번이고 묻는다. 설마 남자답게 돌진했었어야 하나? 아아. 정말 모르겠다. 마리, 이 녀석은 사람 심란해지게 왜 그러고 있었을까. 도무지 알 수 없다.
답도 안 나오고 해결 방법도 전혀 모를 생각만 연신 거듭하다가 나중에 쪽팔릴 일을 안 당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성장기의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내용의 영상물과 출판물을 접하게 해야 한다는 진지한 결론도 도출했다. 머리통을 감싸쥐고 이마를 테이블에 쿵쿵 박고 있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음식점 아줌마한테는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나 번개같이 준비하고는 집을 나선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오늘부터는 교생실습이라 당분간은 마리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 앞집 문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애쓰며 빌라를 빠져나온다. 문득 지혜가 떠오른다. 지금쯤 신혼여행가서 재미나게 잘 지내고 있을 그녀. 그러고보니 그 때 지혜랑 잘 안 되고 나서 앞집 여자랑은 절대 하지 말자라는 내 나름의 원칙을 세웠던 것 같기도 한데 말야. 어제는 내가 뭐에 홀린 것 같다. 그 전에는 리사에게 홀린 거고.... 한숨을 푹 쉰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우리 학교 공대 옆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하나 있고 그 너머에는 부속고등학교가 딸려 있었다. 동산에 올라 학교 쪽으로 가는 길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사온 빵과 우유를 먹었다. 항상 리사가 차려주던 아침밥을 먹다보니 아침을 먹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새삼 리사가 그리워진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에 그녀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예린에게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할 일이 있다고 저 멀리 부산까지 내려간 사람이니 너무 귀찮게 하지 않는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한참을 서성인다.
어? 김한석? 일찍 나왔네?
언덕 아래에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요 근래 교생준비 한다고 교생 나갈 사람끼리 사전에 모임을 몇 번 가진 적이 있었다. 그 때 봤던 박태근이라는 체대생이었다.
태근이 형, 전 최한석이라니까요.
아, 그러냐? 어차피 남자이름이야 대충 기억하면 되지, 뭐.
쾌활하게 웃으면서 악수를 청한다. 산만한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손이다. 나는 가볍게 쥐었는데도 그쪽은 와락 붙잡고 세게 흔든다. 살짝 아프다.
몇 명 더 있지?
저희 말고 두 명 더요.
여자였지?
예.
흐음. 2대 2라. 딱 좋은데.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굉장히 친한 척이다. 그러나 기분은 나쁘지 않다. 사람이 말투와 행동에서 여유가 있고 붙임성이 상당히 좋았다. 덩치는 곰처럼 커다랗고 말투가 지극히 남자다운면서도 호쾌하다. 내 성(姓) 같은 사소한(?) 거에는 별로 얽매이는 스타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군대 갔다 와서 지금 4학년이라 나보다 나이도 많았다. 첫 만남에서부터 대뜸 형이라 부르라고 할 때부터 성격을 알아봤다. 담당과목은 체육. 정말 딱 보기에도 체육선생 같은 인상이다. 지금 입고 있는 정장은 살짝 쫄려 보여 절대 안 어울리고 트레이닝복에 호루라기 물고 있으면 정말 잘 어울릴테다.
한 명은 스타일이 마음에 들던데 나머지 한 명은 영...
별로던가요?
뭐랄까. 나쁘지는 않은데 내 맘에 안 든다고 해야 하나.
남자끼리의 대화의 오랜 화두, 여자 이야기로 대화의 꽃을 피운다. 부속고등학교에 실습 배정 받은 사람은 네 명이었는데 나를 빼고 나머지는 여기 태근이 형과 두 명의 여학생이었다. 그 두 명은 영 딴판이었는데 키가 크고 스타일이 좋은 쪽이 국어교육학과의 박은애였고 키가 작고 수수하며 얼굴만 놓고 봤을 때 여고생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여학우가 수학과의 양현아였다. 아마도 형이 말한 건 글래머한 몸매의 박은애를 말하는 거겠지. 일단 여자 둘은 나와 같은 4학년이었다.
양반은 못 되는갑다. 저기 오네.
우리 두 사람은 벤치에서 일어나서 두 여학생을 맞이했다. 오늘은 첫 출근이다보니 다같이 모여서 들어가기로 약속을 정한 터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학교로 향한다. 나와 태근이 형이 앞장 서고 두 여자가 뒤에 따라오는 모양새가 되었다. 태근이 형은 나에게 살짝 귀띰한다.
야, 저기 은애라는 애는 내가 찜할테니 잘 좀 밀어줘 봐. 알았지?
힐끔 뒤를 살핀다. 검정 투피스 치마에 하얀 블라우스. 여동생이 자기 언니 옷 빌려입고 면접보러 가는 복장이 아닐까 싶은 복장의 현아와는 달리 화사한 색상의 원피스를 차려입은 박은애는 키도 늘씬하니 스타일이 참 좋았다. 태근이 형에게 대답했다.
둘 다 하셔도 전 상관없으니 알아서 하세요.
크크. 진짜지? 나중에 무르기 없기다?
일단 저 둘의 의사는 제쳐두고서라도 태근이 형은 이미 혼자서만 핑크빛 모드다. 이 사람아. 우린 지금 실습하러 가고 있다고. 사랑의 스튜디오 찍으러 가는 게 아니라!
행정실에 들러 수속을 마치고 실장의 안내를 받아 교장실로 향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느글느글한 교장에게서 20여분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교무실로 갔다. 교무회의에 앞서 전체를 향해 소개된다. 태근이 형이 먼저 씩씩하게 인사를 하고 그 다음이 나였다.
기술,가정을 맡은 최한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수가 터져나온다. 몇몇 아줌마 선생님들이 나와 태근이 형을 번갈아 보며 쑤근거리더니 더욱더 열렬하게 박수를 친다. 어쩐지 불안하다.
수학을 맡은 양현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맨 앞자리의 사람에게도 들릴까 말까한 목소리의 현아. 다들 박수를 반쯤 치다 만다. 그 다음이 박은애였다.
국어를 맡은 박은애라고 합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현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우렁찬 박수 소리가 터져나온다. 환호에 휘파람까지.... 은애가 그래, 좀 늘씬하고 나올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제대로 들어간 훌륭한 몸매에 나름 멋을 부린 화장까지.... 남자들이 보면 몹시 좋아할 스타일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선생님이라는 분들이 저렇게 팔을 흔들어가면서까지 좋아할 필요는 없지 않나? 이래서 남자는 남자인가 보다. 나도 좀 그렇지만. 흠.
야, 쟤가 박은애 였냐?
태근이형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묻는다.
네. 왜요?
아, 난 또 쟤가 현아인줄 알았지. 그랬구나.
이 사람은 진짜.... 남의 성을 갈아치우질 않나, 이름을 바꾸질 않나. 자기 이름은 어째 안 까먹고 다니나 모르겠다. 그나저나 현아가 자기 스타일이라고? 방금 사람들의 반응을 봐도 알겠지만 대개의 남자들이라면 현아보단 은애를 선택할 텐데 취향 한번 독특하다. 그 이후 이어진 뭔 소리일지 하나도 못 알아먹을 교무회의가 어찌어찌 끝나고 각각 담당 사수에게 인계되었다. 내 담당은 송지애라는 여자 선생님이었다.
안녕하세요. 최한석입니다. 한달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송지애라고 해요.
손을 척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여자가 먼저 악수를 청하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예쁜 여자이긴 한데 그와 동시에 말투가 몹시 남자답다. 나이는 3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짧게 친 머리도 그렇고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악세서리 하나 안 달고 있는 모양새가 퍽이나 특이했다. 그녀는 내게 서류더미를 안겨주며 말했다.
앞으로 4주간 저희 반 부담임을 맡게 되실 겁니다. 오늘 안으로 이 출석부의 이름과 사진을 외우세요. 3주간은 제가 하는 수업의 참관 및 수업 보조를 하실 거구요, 마지막 1주차에는 최 선생님이 수업을 진행하시게 됩니다. 그 전까지 수업계획서 및 교안 작성을 마치세요. 질문 있습니까?
......에, 있어도 왠지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분위기랄까.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일사천리로 끝낸 송 선생은 나보고 따라오라고 이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미새를 따라가는 아기새처럼 나는 그녀를 졸졸 따라가야 했다. 뭐랄까. 말투가 몹시 철두철미한게 마치 군인같은 스타일이다. 아직 가본 적은 없지만 신병훈련소에 갓 입소해서 고참을 대하는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교생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선생님입니다. 우리는 소수이고 학생들은 다수죠. 학교에서 혹은 인근 지역에서의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감시하는 눈이 있다고 생각하시고 모든지 한 번 더 생각하고 움직이기 바랍니다. 단순히 저와 교감 선생님의 평가만이 최 선생님의 실습 평가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 명심하세요.
네.
만에 하나 불미스런 일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나면 실습은 전면 중지입니다. 해명 따위는 먹히지 않아요. 학교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시끄러워질 심산이 보이면 바로 손을 떼니까요. 선생님들이야 노조도 있고 경력이 있으니 상관없지만 교생은 전혀 다른 입장이라는 거, 알고 있죠?
아, 예.
좋아요. 앞으로 4주간 잘 해내길 빕니다.
옙.
교무실을 나설 때 수업 종이 울리고 있었다. 복도에서는 교실로 복귀하려는 학생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요만한 녀석부터 이따만한 녀석까지 참 다양했다. 내가 최근에 보아온 고등학생이라고는 유진이와 소란이 둘 뿐인데 걔들은 원체 조그마한 녀석들이라 고등학생은 다 그럴거란 착각 아닌 착각을 하고 있었다.
1층이 교무실 및 행정동. 2층이 3학년, 3층이 2학년, 4층이 1학년 교실입니다. 건물의 양쪽 끝에 화장실이 있고 과학실, 음악실, 체육관을 비롯한 각종 시설은 별채에 모여있습니다. 남교사 휴게실은 1층 끝에 있구요, 여교사 휴게실은 아직 없습니다. 전부터 설치해달라고 계속 요청중인데 이 놈의 학교행정은 도무지 발전이라는게 없군요.
아, 예.
어쩐지 나라도 대신 사과해야할 것 같은 박력이다.
다행히 별채에 연구실은 있으니 기가 담당 선생님들과 계약직 선생님들도 거기에서 대기하고 쉬곤 하죠. 이따가 점심시간에 그쪽에 안내하겠습니다. 이 밖에 질문 있습니까?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오르고 교실을 찾아가면서 이어진 그녀의 설명을 놓치지 않기 위해 꽤나 노력해야 했다. 발음은 꽤나 명료했지만 말투가 워낙 빨랐기 때문이다. 설명에 귀 기울이고 있던 터라 그녀가 우뚝 멈춘 것을 몰랐고 하마터면 그녀의 뒤통수에 코를 들이박을 뻔 했다. 왜 멈췄나 싶었는데 알고보니 여기가 그녀의 반이었다.
없습니다.
좋아요. 들어가죠.
송 선생이 앞장서서 문을 옆으로 밀고 들어갔다.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제자리로 찾아 돌아가고 송 선생이 교탁 앞에 섰다. 나는 뻘쭘함을 애써 감추며 교탁에서 2미터 떨어진 곳에 섰다. 남녀 도합 사십여명의 학생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혹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이 정도의 시선이라니. 몸이 배배 꼬일 지경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난 꼬이던 몸을 바로 펴게 되었다. 낯선 시선들 사이에서 낯익은 것을 발견했기에.
반장, 인사해.
송 선생이 지시하자 교탁 바로 앞 2분단 첫번째 자리의 여고생 하나가 일어난다. 하얀 얼굴에 동그랗게 뜬 눈이 어디서 많이 보던 녀석인데 말이다. 게다가 방금 일어나 반장 옆 자리에 앉은 또 다른 쪼끄만 녀석은 날 알아보고 활짝 웃으면서 살짝 손까지 흔들고 있었다.
차렷. 경례.
반장의 구령에 맞추어 학생들이 한 목소리로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면서 인사한다. 송 선생은 내게 손짓하여 자기 쪽으로 오게 한다.
자, 오늘부터 4주간 교생실습을 하면서 우리 반 부담임을 맡게 되실 최한석 선생님이다. 최 선생님? 이쪽으로 오세요.
예.
교단에 올라서서 학생들을 둘러본다. 각양각색의 표정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런 자리에, 이렇게 서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안녕하세요. 최한석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하자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소란이가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박수소리는 반 전체로 퍼졌고 이내 나를 환대해주는 아이들의 각종 환호로 뒤바뀌었다. 처음 보는 나를 이렇게나 반갑게 맞아주다니. 참으로 고맙구나, 얘들아. 딱, 한 사람.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고 팔짱을 낀 채로 나를 째려보고 있는 유진이만 빼고 말이다. 넌 좀 반갑다는 표정 좀 지으면 어디가 덧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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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대 부속고등학교 1학년 3반, 출석번호 3번, 양소란
K대 부속고등학교 1학년 3반, 출석번호 4번, 진유진
키 순서로 번호를 매겼으니 유진이가 소란이보다는 좀 큰 편이군요.
정신 없죠?
아뇨. 괜찮습니다.
이그, 표정이 바짝 얼었는데 뭘. 편하게 있어요. 여긴 쉬는 데니까.
박 선생이라고 했던가, 이 아줌마가. 나이가 제법 든 그녀는 몹시도 푸근한 표정으로 내 등을 두드리더니 앞에 놓인 떡 좀 더 먹으라고 권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양 선생이 까르르 웃으면서 말했다.
박 선생님, 너무 친밀하게 구는 거 아니에요? 뭔가 흑심 있어 보이는데?
왜요? 흑심 좀 있으면 안 되나? 단신부임이라 나도 지금 당장은 솔로인데 말야.
박 선생의 능청스런 대답에 다들 까르르 넘어간다. 난 웃기지도 않았지만 애써 웃으면서 분위기를 맞추려고 노력한다. 얼굴에 경련이 날 지경이다. 여자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건 퍽이나 좋은 일이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게 아줌마들이 되면 총각으로서는 꽤나 난감하게 된다는 걸 실감한다. 윽. 누가 날 좀 여기서 구해줘.
내가 지금 있는 곳은 별관에 있는 기가연구실이라고, 기술.가정 담당 선생님들이 모이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이 학교에 세 명 있다는 기가 담당은 죄다 여선생뿐이라 이 곳의 분위기는 숫제 동네 아줌마들의 반상회 같은 분위기다. 박순미 선생, 양효주 선생, 송지애 선생 세 명 말고도 계약직이라는 여자 선생이 두 명 더 있는데다가 빅토리아 뭐시기 하는 이름의 금발 미국인까지 함께 있었다. 도합 여섯 명의 여자들이 마치 포위하듯 나를 둘러싸고 반원을 그리며 앉아있었다. 빅토리아는 말이 없었지만 나머지 다섯 여자들의 수다는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날 향한 청문회 비스무리 한 게 시작되었다.
K대생이라고 그랬죠?
예.
공부 잘 했나 보네. 우리 학교에서는 정작 몇 명 못 보내는데 말야.
하하, 그냥 그럭저럭....
그럼 지금 어디 살어?
학교 근...
아직 답변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음 질문.
애인은 있고?
이번에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른 질문.
이그, 있겠지. 이만한 키에 이만한 얼굴이면 댓명은 있지 않겠어?
순진해 보이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나 보네?
요새 대학생 애들이 그렇게 잘 논다잖아.
......질문을 하고 지들끼리 답하고 있을 거면 난 여기 없어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곤욕스러워 하고 있는 나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송 선생이었다.
식사 다 했으면 나가봐요. 5교시 시작하기 전에 교무실 제 자리로 오시구요.
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고는 연구실을 벗어났다. 후아. 점심시간은 아직 40여분도 더 남았는데 저기서 계속 있었으면 아마도 수다라는 어마어마한 괴물에게 눌려서 압사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점심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음에도 아줌마 선생님들에게 이것저것 얻어먹어서 점심을 때울 수 있는 건 좋았지만 말이다. 다음부터는 점심 도시락을 사오든가 나가서 먹든가 해야겠다.
일단 별관 건물을 벗어나 이곳저곳을 돌아본다. 애들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받는 게 꽤나 생경한 느낌이다. 결국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운동장 한 켠에 있는 등나무 쉼터로 간다. 옆에 있는 자판기에서 차가운 음료수 하나를 뽑아 들고 벤치에 앉았다.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 놀고 있는 학생들이 한 눈에 보이는 자리였다. 선선한 바람을 맞아가며 잠시 앉아있었다. 그때 누군가 쉼터로 다가오며 날 불렀다.
나도 하나 사주라.
어? 형.
태근이 형이었다. 땀을 좀 흘리고 있기에 스포츠 드링크 한 캔을 뽑아서 던져준다. 형은 그걸 받아들고 원샷으로 들이켜면서 아래 쪽에 있는 체육관을 가리켰다.
저기 체육관에서 니 이쪽에 올라오는게 보이더라.
체육관이요?
응. 애들이랑 농구 한 판 뛰고 있었지.
무서운 친화력이구나. 난 복도에서 애들이 인사할 때마다 깜짝깜작 놀라서 당황스러운데 벌써 단 반나절만에 같이 어울려 놀기까지 한단 말인가. 농구라고 하니까 얼마전에 대학로에서 예린과 뛰었던 일이 생각난다. 예린과 제대로 못 낸 승부를 언젠가 내야 될텐데...
수업은 어때? 할만하냐? 담당은?
담당은 송지애 선생님인데요. 수업이야 뭐 그냥 그렇죠. 멀뚱멀뚱 서 있는 거지. 제가 뭘 하나요.
2주간 우리는 수업에 참관하도록 되어있다. 그 다음 주는 수업보조, 마지막 한 주에 직접 수업을 하게 된다.
이야. 그거 좋겠다. 난 오자마자 애들 데리고 운동장 뛰고 아주 난리도 아닌데.
아... 체육은 그러겠구나.
어쩐지 벌써 트레이닝복 차림이다 싶었다. 아침에도 예상했지만 정말 무섭도록 잘 어울린다. 태어날 때도 이런 체육복을 입고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따 저녁에 회식이라는 거 들었지?
예. 횟집 간다던데요.
아, 난 회 싫은데....
태근이 형과 술에 대한 이야기를 좀 했다. 잠시 후, 형은 한 판 더 뛰겠다며 체육관으로 내려갔다. 나도 같이 갈까 했는데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온 것도 아니고 해서 다음에 함께 하기로 했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홀짝거리던 캔커피도 다 마셨다. 시계를 보니 이제 슬슬 교무실로 가도 될 것 같았다. 캔을 휴지통에 던져넣고 본관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누군지도 모를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해대는 통에 곧장 걸어가기 힘들 지경이었다. 건물 입구로 막 접어드는데 누군가 날 불렀다.
선생님?
아침까지만 해도 누가 저렇게 날 부르면 절대 돌아보지 않았을테지만 오전 내내 그런 칭호로 불리고 나니 이젠 좀 다르다. 밝은 표정을 유지한 채로 날 부른 쪽을 바라본다. 밝게 웃으며 대답하려다가 상대를 확인하고 만다. 덕분에 대답이 좀 샜다.
네.........에?
날 불러 세운 녀석은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 늘 보던 교복 차림에 마치 날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난 또, 유진이구나. 무슨 일이야?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난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으윽.... 이 녀석.....
가긴 어딜 멀리 가요! 나원참. 괜히 사람 들쑤셔 놓고는, 뭐? 교생? 한달동안 못 봐? 참나. 기가 막혀.
기가 막힌 건 니가 아니라 나다. 이것아. 제 아무리 반가움의 표시라지만 뚜벅뚜벅 다가와 냅다 쪼인트를 까는 건 너무 과하지 않냐? 지나가는 녀석들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누가 봤다면 남자 망신은 물론이요 교권 추락의 산 현장이었다고 하겠지.
코 앞에서 반갑다고 인사한다고 누가 퍽이나 반가워하겠어요? 진짜 아저씨는 최악이야, 최악!
크으.. 그래도 난 진짜 반가웠는데 말야. 너네 학교인줄은 알았지만 니네 반일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
뻥치지 마요.
진짠데.... 아니면 난 이 학교에서 너 찾아볼까 생각하고 있었다고.
반쯤 주저 앉아 종아리를 문대고 있노라니 날 가만히 내려다보는 유진의 시선이 느껴진다.
.....정말이죠? 진짜 반가웠어요? 빈 말 아니라?
그래, 임마. 좀 놀라기도 했지. 내가 아는 얼굴이 떡 하니 맨 앞자리에 앉아있으니.
쳇.
유진은 괜스레 바닥을 툭툭 차며 입을 삐쭉거렸다.
그나저나 니 반장이었냐? 몰랐는데 말야.
처음에 임시반장은 성적순으로 뽑잖아요. 거기서 그냥 반장으로 굳은 거죠.
진짜 공부 잘 하나 보네.
핫. 제가 공부 잘 하는 거 이제 알았어요?
농담인 줄 알았지.
유진이가 내 머리를 잠시 투닥였다. 평야설넷면 불가능한 높이에 있는 거라 못 때리겠지만 지금은 내가 쭈그리고 앉아있어서 가능했다. 예비종이 울리자 녀석은 교복치마를 나풀대며 계단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1층에 양호실 있어요. 거기서 약 바르세요.
니가 때려놓고?
엄청 쓰라린 약 발라 줄거에요.
녀석은 혀까지 내밀어 보이고는 이내 사라졌다. 아유, 저 메롱쟁이 녀석.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를 움직여보니 약 바를 정도는 아니었다. 교무실로 가자 이미 자리에 앉아있던 송 선생이 예비 종 치기 전까지 여기에 오란다. 예, 아주아주 잘 알겠습니다.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회식까지 참여한다. 야자감독 하는 분과 사정이 있어 빠진 몇 분을 빼고 1,2,3학년 담임 및 과목 선생님들까지 도합 마흔 명은 족히 되어보이는 인원이 다닥다닥 이어붙인 테이블에 빼곡히 들어앉았다. 교장의 선창에 다같이 위하여를 외치고 들이킨다. 이런 자리가 있으면 어떻게 행동하라는 선배들의 귀띰을 잘 들어놓은 터라 그 이후부터는 잔과 술을 들고 일일히 찾아가 인사를 하며 술을 따르고 또 받는다. 그러다보니 최하 40잔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다. 술에 어지간히 강한 나도 아찔할 지경이니 다른 교생들은 말도 아니었다. 그나마 태근이 형은 등빨이 있어서 그런지 버티고 있었지만 여자애들은 진작에 뻗었다.
이촤! 이촤 가야지! 최 선생~~!!!
누구랬더라. 암튼 어떤 남자 선생님 하나가 내 목을 감아 걸고 호기롭게 외치고 있다. 난 다른 여자 선생님들에게 부축받고 있는 현아를 힐끔거렸다. 은애는 이미 태근이 형에게 엎혀서 축 늘어져 있었다.
안 과아? 안 과면~ 난 따른 사람이랑~ 오! 박 선생!!!
잔뜩 꼬인 혀로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며 내게 들러붙어 있던 이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심호흡을 하고 있노라니 잔뜩 얼굴이 붉어진 송 선생이 내게 다가왔다.
내일, 늦지, 않도록, 하십, 시요.
트림이 나올 것 같으면 하면 될텐데, 이 아줌마 애쓰시네.
걱정마세요.
좋아, 요.
송 선생은 숨을 가다듬으며 다른 여선생들이 모인 곳으로 가버렸다. 2차를 외치는 술꾼들이 사라지고 높으신 분들이 가는 곳까지 인사를 다 마친 후에 횟집 앞으로 다시 돌아온다. 태근이 형은 은애를 엎은 채로 계단에 앉아 졸고 있었고 현아는 옆에 있는 쓰레기통을 붙잡고 웩웩 거리고 있었다. 참.... 현실적이고 노골적인 장면들이다.
형! 일어나요! 형! 여기서 잠들면 어떻게 해요!
미안하지만 그래도 형 체질이라면 살짝 때려서는 안 일어날 것 같아 좀 세게 뺨을 두드린다. 너무 아프게 때린게 아닐까 싶은데도 이 인간은 게슴츠레 눈을 한번 떴다가 다시 감을 뿐이다. 여긴 포기. 이따 신문이나 덮어줘야 겠다. 이번에는 형에게 엎혀 있는 은애라는 여자애를 깨운다.
저기, 은애 씨! 은애 양?
원피스가 말려올라간데다가 얘가 엎혀있는 태근이 형이 주저앉아 있는 상태라서 허벅지가 훤히 드러났다. 나름 잘 빠진데다가 적당히 살이 잘 붙어있는 보기 좋은 모양이었다......아악. 이거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저기요! 은애 씨? 이봐요!
어깨를 흔들어 보지만 요지부동이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태근이 형한테는 잘 매달려 있는지 미스테리다. 얘도 포기해야 되나. 여자애니까 신문지는 두 장으로 해야겠다. 이제 남은 건 현아라는 애인데.....
야! 너 죽고 싶어!!!
등 뒤에서 빵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난데없는 욕설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현아가 뒤척거리며 도로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도로로 걸어들어온 그녀 때문에 급정거를 하게 된 운전자가 창문을 열고 그녀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황급히 도로로 달려가 현아를 잡아 끌어오고 운전자에게 사과했다. 현아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집에 가야 되는데.....
이 녀석은 무슨 좀비도 아니고 가만 냅두면 도로고 벽이고 전봇대고 간에 아무 방향으로나 비척비척 걸어간다. 환장하겠네. 별 수 없이 손을 잡고 끌고 가 횟집 계단 앞에 앉혔다.
현아 씨! 집이 어디에요? 정신 좀 차려봐요.
집에 가야 되는데....에..... 우욱!!
내가 대학생활 하면서 딱 하나 내 몸에 대해 불만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술에 대한 내성이었다. 어린 시절, 삼촌은 물론 엄마까지 내게 술을 권했으니 말 다했다. 물론 급히 먹거나 아주 많이 먹으면 취하긴 하지만 다들 곯아떨어지거나 쓰러지는 신입생 환영회나 OT 등에서 내가 뻗은 적은 손에 꼽는다. 그러니 자연히 술에 꼴은 녀석들을 챙기는게 내 담당이 되어버린다.
다시 쓰레기통을 붙들고 꽥꽥거리는 현아의 등을 두드리면서 방법을 떠올려 본다. 집이 어딘지라도 알면 택시라도 태워서 보낼텐데 그것도 곤란하다. 솔직히 세 명을 각각 태워보낼 돈도 없었다. 한 명이면 내가 그냥 업고서 우리 집에라도 갈텐데 그것도 여의치 않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횟집 사장님이 나오더니 계단 좀 비워달란다. 아직 장사한다나 어쨌다나.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에는 현아, 한 손에는 태근이 형을 이끌고 걸어간다. 좀비 같은 현아는 그렇다치더라도 태근이 형도 신기하다. 눈은 감고 있고 등에는 은애가 매달려 있는데도 잘만 걸어간다. 이 인간 이거 정신 차린 거 아냐? 싶은 의심도 든다.
몇 미터 안 가 셔터를 내린 가게가 있기에 그 앞에 다시 멈춘다. 그냥 콱 놔두고 혼자 집에 가버릴까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햇님달님 동화에서는 간절히 기도하면 하늘에서 동앗줄도 내려오고 그러는데 난 왜 그런게 없을까. 교회를 안 다녀서 그런가. 아니지. 햇님달님 거기 나오는 애들은 분명히 절에 다녔을 거야. 아직 우리 나라에 본격적인 선교가 들어오기 전이니까 말이야. 음. 아닌가. 절에 다니는 애들이라면 동앗줄로 호랑이를 피하는게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로운 설법을 들어 호랑이를 감읍시켰겠지. 끄아아아아. 사람이 꼼짝달싹 못하는 상황이 되니 별 쓸데없는 생각이 무궁무진하게 든다.
그러나 내 동앗줄은 차를 몰고 나타났다
거기 한석이 아냐? 거기서 뭐 해?
오, 만세. 니가 이토록 사랑스러워 보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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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서 후광이 보일 정도다. 비상등을 켠 채로 도로에 차를 대고 있는 선영을 보며 만세를 불렀다. 두 팔을 번쩍 들고 환영하자 그녀는 날 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고 갈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부 들고 갈 수도 없는 인간들에게 묶여 있는 사정을 설명하자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자기 차에 우리 인원을 모두 태우도록 했다. 한 명씩 끌어다가 뒷자리에 처박아두고 나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선영이 내 쪽을 보더니 빙긋 웃었다.
한 명이라도 토하거나.... 그러면 알지?
헉. 알았어.
그랬다간 1년짜리 계약이 종신계약으로 연장되겠지. 다행히 아까 열심히 속을 게워내던 현아는 더 이상 분출이 없었다. 뒷자리에 짐짝처럼 던져놓은 세 사람을 한 번 더 돌아보았지만 특별히 이상 징후는 없었다. 멀미를 하게 될지도 모를 인원들이 타서 그런지 선영은 평소와는 다르게 차를 천천히 몰면서 내게 물었다.
지나가다 보고 한석이인가 싶어서 차를 돌렸는데 역시 맞았네. 자기는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
회식을 했는데 말야. 다들 어마어마하게 드시더라구.
흠. 자긴 그러면 엄청 뺀 거야, 아님 마셨는데 멀쩡한 거야?
왜 이래, 나도 지금 취한 상태라고.
평상시보다 더 정상으로 보이는데? 하긴, 자기는 평상시가 좀 이상하긴 하지.
뭐야?
선영과의 이런 식의 대화가 요새는 일상이다. 그녀가 날 부르는 자기라는 호칭이 처음에는 좀 어색했지만 그녀라면 나 뿐만 아니라 숱한 이들에게 그런 호칭으로 부르겠다 싶어서 굳이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의 옷차림은 전처럼 검은 옷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밝은 옷은 아니었다. 안쪽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재킷을 걸친 회색의 투피스 차림이었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일반 사무직 여성 같아 보이는 패션이었다. 치마가 좀 짧아서 허벅지가 많이 드러났다는 점 말고는 평범한 차림이었다. 너 아니었으면 저 사람들은 길바닥에 재웠을 거란 이야기를 했더니 선영이 한참 웃었다.
일단 우리 애들 쉬는 곳에 자리를 내줄테니까 거기서 정신 좀 차리게 해서 내보내. 봄이긴 한데 그래도 아직 길바닥은 추우니까.
ROSE 앞에 차를 댄다. 선영은 웨이터 몇 명을 불러 시체놀이 중인 내 실습동기들을 옮기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선영이 날 불렀다.
자긴 어떻게 할래? 한 잔 더 하고 갈래?
ROSE의 간판을 올려다본다.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 이긴 하지만 실려 들어간 녀석들이 걱정되기도 했다. 자다가 일어났더니 룸살롱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도록 설명도 필요할 테고 말이다.
술은 됐고, 쟤네들 일어날 때까지는 좀 있을게. 그냥 두고 가긴 좀 그래.
그래, 그러면.
가게에 들어가는 선영을 따라 들어갔다. 비녀를 꽂아 틀어 올린 그녀의 뒷머리를 보면서 불러본다.
선영아.
응?
계단을 내려가던 그녀가 돌아본다. 화장을 그리 진하게 한 것도 아니고 무척이나 단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고마워.
그러자 그녀는 살짝 웃더니 몸을 마저 돌려 나를 마주한다. 안 그래도 키 차이가 있는데 그녀가 계단 아래쪽에 있어서 높이 차는 좀 났다.
말로만?
그러면?
또 청구서라도 작성하라는 건가 싶어서 불안해 하고 있는데 선영이 가볍게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진다.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있었더니 선영이 내 볼살을 확 쥐고 아래로 잡아당긴다.
아얏.
잡아당겨진 볼의 얼얼함에 비명을 지르는 사이 반대편 볼에는 전혀 다른 느낌이 감촉이 와 닿았다. 그렇게 남의 얼굴을 잡아당겨 볼에 입맞춤을 해준 선영은 잠시 내 얼굴을 들여다 본다. 이내 손을 놓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아직 남아있는 몸 안의 술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방금 전 선영이 보여준 수줍은 표정 때문일까. 몸이 확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는 흔히 말하는 갈 때까지 간 사이인데도 이런 익숙치 않은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묘해진다. 얼얼한 볼과 달달한 볼이 양쪽에서 나를 혼란에 빠트린다.
한참만에 정신을 추스리고 안으로 들어간다. 선영은 보이지 않았다. 전에 왔을 때보다 꽤나 바빠 보이는 내부였다. 하긴 그때는 훤한 낮이었고 지금은 밤의 장막이 드리워진 시각이니 인구밀도가 다를 수 밖에 없겠다. 줄지어 지나가는 아가씨들과 커다란 쟁반을 들고 왔다갔다 하는 웨이터들을 피해 전에 가보았던 사무실로 향했다. 선영에게 동기들을 어디다 두었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그녀가 갈만한 곳이 여기 말고는 생각이 잘 안 났다.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다.
어머, 선생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유진의 엄마, 유미였다. 애엄마라고는 믿을 수 없는 날씬하게 쭉 벋은 바디에 전보다 훨씬 더 과감한 앞트임으로 가슴의 계곡을 가득 강조하고 길게 낸 슬릿으로 허벅지의 탄력을 강조하는 패션의 그녀가 몹시 반가운 표정으로 날 반겨주었다. 그 옆에는 선영이 서 있었다.
아, 저기..... 안녕하세요.
호호, 저야 늘 안녕하죠. 오늘은 어쩜, 잘 차려 입고 놀러 오셨네요? 저흰 그렇게까지 딱딱한 가게는 아닌데. 물론 이렇게 멋있게 생긴 젊은 손님이 오시면 다들 좋아라 하긴 하죠. 호호호.
교생 첫 출근이라고 나름 차려 입고 온 옷차림을 유미가 칭찬한다. 그나저나 놀러 왔다니. 그런건 아닌데.... 난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전 그게 아니라 선영이한테 볼 일이...
어머, 벌써 지명이세요? 아직 다른 애들도 안 보셨는데?
유미가 깜짝 놀란 표정을 과장스럽게 지으며 선영을 돌아본다. 어떤 전표 꾸러미를 들여다보고 있던 선영이 고개를 살짝 들어 유미와 나를 번갈아 본다. 날 보고 살짝 인상을 쓰긴 했는데 난 그걸 못 본 척 했다. 유미는 박수를 짝짝 치더니 선영을 데리고 온다. 그리고 내 팔짱도 끼더니 문을 열고 나가면서 나와 선영을 어떤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럼 제가 방 하나 내드릴 테니 선영이랑 재미있게 노세요. 원래 얘가 이렇게 놀 군번은 아닌데 선생님이니까 특별히 내드리는 거에요. 그나저나 저희 가게에 별로 오시지도 않았으면 선영이는 어떻게 딱 아시나 몰라요?
아, 저... 그게.....
호호호. 암튼, 선영아. 이 분 중요한 분인거 알지? 잘 모셔 줘.
유미의 등쌀에 밀려 선영과 나는 한 방에 들어가서 자리하게 되었다. 고급스러운 노래방을 연상시키는 너댓 평짜리 방이었다. 벽에 붙은 의자가 몹시 푹신하다. 과일 안주와 음료, 맥주 등이 테이블에 세팅된다. 웨이터들이 빠져 나가고 나자 옆 자리에 앉은 선영이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봐. 중요한 분. 술 생각 없다며.
아니, 난 꼭 술을 마시겠다고는 안 했는데.
테이블에 놓인 캔음료 하나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선영이 먼저 캔을 잡아 따더니 잔에 얼음을 채우고 따라준다. 내게 잔을 건네며 한숨을 푹 내쉰다.
월초라서 정리할 것도 많은데, 어휴....
아까 그녀가 들고 있던 전표 뭉치들을 떠올린다.
그런걸 네가 다 하는 거야?
당연하지. 언니한테 맡겨봐. 한 달도 못 가서 여기 살림 다 거덜날거야.
선영의 말을 듣고 언제나 웃는 표정의 유미를 떠올린다. 몇 번 본 것은 아니지만 어째 표정이 항상 같다. 웃는 얼굴로 무슨 일이든 오케이인 그녀. 과외 선생을 구하고 페이를 정하는 것도 지 딸래미가 하고 싶다는 대로 오케이. 지 딸래미를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보내는 것도 오케이. 딸래미 과외 선생님이 놀러 오면 비싼 술에 아가씨도 오케이. 흐음. 듣고 보니 그런 사람의 밑에서 일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선영이 신경써야 할 업무량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영의 성격상 그런 것을 또 그냥 가만히 두고 보지 못 했겠지.
고생이 많네.
알면서 날 지명해?
아니, 난 딱히 지명이라니 보단 그냥 뭣 좀 물어볼라고.....
선영이 따라준 음료를 마신다. 우롱차다. 시원하게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걔네들이라면 저기 안쪽에 있어. 나중에 깨면 연락 오겠지.
선영은 내가 뭘 물어볼지 미리 알고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그러면서 손으로 방울 토마토를 하나씩 따서 내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 좀 받아 먹었다. 그러나 아까 좀 많이 먹어서 그런지 배가 불렀다.
배부르다. 그만 먹을래.
자기 회식에서 많이 먹었나 보네?
선영은 내 입으로 가져오던 방울 토마토를 자기 입에 넣는다.
술로 배 채웠다니깐.
학교 선생님들이라면서 뭔 술을 그렇게 먹어?
내 말이.
우롱차를 조금씩 마셔가면서 오늘 있었던 학교에서의 일에 대해서 조금씩 이야기 해 주었다. 출근 이야기, 교무회의, 담당 선생, 선생님들의 수다.... 선영은 자기도 음료 하나를 따서 홀짝이면서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 유진이 이야기가 나오자 반색한다.
어쩜.... 걔네 반이 자기 담당이라고?
그러게 말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반에 들어갈 때는 나도 놀랐다니깐.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내 담당이라기보단 내 사수가 담임인 반이지.
암튼간에. 유진이 걔가 반장이라고? 역시 유진이는 대단해. 근데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안 했을까?
유진이 이야기만 나오면 선영은 얼굴이 활짝 핀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그렇게나 좋아?
뭐가?
유진이 말야. 넌 유진이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이 바뀌어.
그랬나, 내가?
응. 확실히.
흐음. 그랬었나, 내가....
선영은 크게 부정하지 않으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전에는 쉽게 볼 수 없었던 그녀의 이런 미소가 너무 아름답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목을 살짝 잡고 내게 당겨 입을 맞추었다. 잠깐의 입맞춤이 몹시 달콤하다. 입을 떼자 선영이 눈을 뜨며 가볍게 날 밀친다.
지명 아니라며?
지명이면 이런거 마음대로 해도 돼?
내 손은 이미 그녀의 허벅지를 지나 그 안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익숙한 그 곳이 날 기다린다.
원래는 안돼.... 그치만,
내게 몸을 기대오며 선영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기니까 괜찮아.
이번에는 선영의 입술이 내게 다가온다. 어느새 내 옆에 바짝 다가앉은 선영은 내 바지 위를, 정확히 말하자면 내 허벅지 위쪽을, 좀 더 세심하고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내 자지 부근을 쓰다듬고 있다. 손 전체로 전체의 윤곽을 훑고 네 손가락으로는 불알 아래쪽을 살살 긁으면서 엄지로는 귀두가 있으리라 추정되는 곳을 정확히 쓰다듬는다.
흐음....
신음이 절로 나온다. 그녀의 집에서도 곧잘 받아보았던 환상의 핑거 테크닉은 여전했다.
오늘 내가 빨간 날이라서.... 그냥 입으로만 해줄게.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고 여름의 열대야처럼 끈적거리며 가을의 잘 익은 과일보다도 더 농염하고 짙은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와 박힌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선영의 손이 미끄러지듯 들어와 내 물건을 꺼낸다.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기대감으로 가득한 자지는 자신의 존재를 자랑하며 꼿꼿이 일어난다. 뜨겁기 그지없는 살덩이를 매끄러운 손가락이 휘감는다. 쥔다. 내 것이 그녀에게 쥐어진다.
나 말고도 다른 데다가 이거 가끔 쓰지?
이거라는 건..... 그녀 손에 쥐어진 자지를 말하는 거겠지? 다른 데라면 역시 다른 여성의 보지를 말할 테고.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짓말을 못 한다는 게 이럴 때 참 불편하다. 선영은 한숨을 가볍게 내쉬고 내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여태껏 손에서 주물럭거리던 것을 입에 가져간다. 입술로 살짝 문 상태에서 날 올려다보며 묻는다.
확 깨물어 버릴까?
에엑....
그럼 나도 못 쓰겠지. 흥.
예에....
지금 깨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아.... 흐으.... 아.....으아...... 으읍......
정말 프로의 테크닉은 다르구나 싶었다. 선영의 집에서 이런 서비스를 안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장소가 주는 묘한 느낌이 나의 흥분을 더욱 부채질 한다. 선영의 테크닉은 단순히 입에 물고 빠는 게 아니라 뭐랄까. 그냥 빠는 게 아니라 살짝 물고 빠는 것도 아닌 묘한 울림이 입안에서 일어나 내 자지를 감싸고 돈다. 숫제 진동마사지기로 훑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넣고 빠는 건 기본.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목 깊이까지도 들락날락하고 귀두 아래쪽의 파인 부분을 입술로 가볍게 물고 혀끝으로 오줌구멍을 살살살 문지른다. 손가락으로 육봉의 아랫 부분에서 중간 부분까지 가볍게 쥐고는 잔뜩 발린 침을 윤활유 삼아 부드럽고도 힘차게 문지른다. 츄룹거리는 음란한 소리가 내 자지를 타고 흐른다. 입술에 머금었다가 요도를 한번씩 자극한다. 앞뒤로 흔들리는 선영의 머리의 스피드가 점점 더해간다. 단정하게 입은 그녀가 이렇듯 내 자지를 물고 아래쪽에서 흔들어대고 있다는 시각적 자극은 굉장한 쾌감이었다.
서...선영아.... 지금은......
아래로부터 치밀어져 올라오는 사정감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선영에게 경고를 했지만 그녀는 입을 떼지 않았다. 귀두를 입술로 살짝 물고 엄지와 검지로 만든 링으로 내 자지를 더욱 빠르게 스트로크 한다.
서...선영아... 으음...
뿜어진다. 나아간다. 선영의 입안으로 사정하고 말았다. 꿀럭이며 제2파와 3파를 쏘아내는 동안에도 선영은 자지를 살짝 물고 있었다. 손으로 아래로부터 쭈욱 훑어 올리더니 마치 남은 치약 짜내듯이 중간부분을 힘주어 쥐고는 입으로 쪼옥 빨아낸다. 그제야 입을 뗀다. 내 자지의 끝 부분과 그녀의 입 사이에 여릿한 현수교가 생겨난다.
하아...하아.....
입 안 가득 싸버린 내 정액을 삼키는 선영을 보면서 좀 놀랐다. 저걸 뱉는 것도 아니고 삼키다니..... 섹스도 아닌 고작 오랄 뿐이었는데도 탈진 아닌 탈진을 느끼고 만다. 아득해지는 기분이 꽤 나쁘지 않다. 머리에 꽂았던 비녀를 뽑아 다시 틀어 올리고 있는 선영을 보고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데 나만 바지를 까 내리고 물건을 꺼내고 있으니 말이다. 황급히 물건을 넣는다. 사정 직후이긴 하지만 아직 덜 부드러워진 녀석을 넣느라 조금 애먹었다. 우롱차로 입을 헹구는 선영을 보고 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거.... 많이 해?
그러자 선영의 표정이 다소 굳었다. 웃는 얼굴이긴 하지만 묘하게 그늘졌달까.
그런거 묻는 건 매너가 아냐.
어? 어... 미안.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생각에서 입까지 전해지는데 중간에 버퍼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내 못난 사고 회로를 탓해보지만 선영의 표정은 이미 살짝 차가워져 있었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바로 잡더니 문가에 섰다.
자기가 원하면 풀로 뛸 수 있는 다른 애로 넣어줄게. 난 좀 바빠서.
아냐. 괜찮아. 나도 이만 가볼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영을 따라 나섰다. 이렇게 그녀를 보내는 건 다소 아쉬웠다. 문 손잡이에 손을 얹고 있는 선영의 팔을 가만히 잡아 당긴다. 별다른 저항없이 선영의 몸이 돌아서서 내게 안긴다.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 저녁에 쉬면 미리 연락 줘. 놀러 갈게.
그러자 선영이 피식 웃으며 날 살짝 밀어낸다.
자기 말고도 같이 놀 사람 많거든?
누구?
내가 말하면 알려나?
야, 너 진짜....
선영은 웃으면서 문을 열고 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방에서 나가려던 우리도 덩달아 놀랐다.
누...구시죠?
선영이 의아하다는 듯이 묻는다. 딸꾹거리고 있는 쪼그만 여자가 대답을 못하고 있기에 내가 대신 대답했다.
아까 같이 온 동기인데.... 현아 씨, 여기서 뭐하세요?
아? 예? 저? 그게, 그러니까. 한석 씨가, 여기 계시다고 해서....
대체로 가볍게, 혹은 헐벗게 입은 아가씨가 많은 이곳에서 그녀의 복장은 참 답답해 보이기까지 했다. 선영은 그제서야 아까 자기가 싣고 온 사람 중에 한 명이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내게 알아서 하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그 자리를 떴다. 난 현아를 따라 휴게실이라는 곳으로 향한다. 가면서 현아에게 물었다.
술이 좀 깨셨어요? 속은 어때요?
아.... 아직 머리는 좀 그렇고.... 속은 이제 괜찮아요.
하긴 그렇겠지. 아까 이 아가씨가 쏟아놓은 것만 모아서 전을 부쳐도 동네 잔치가 가능할 지경인데 그 정도로 쏟아놓고 나면 누구라도 속이 편해지겠지.
다른 사람들은요?
아직 자고 있어요. 저만 먼저 일어나서 다른 분께 여쭤보니 한석 씨는 저 방에 있다 그래서....
그렇구나.
참으로 보기만 해도 눈요기가 고맙게 되는 아가씨들이 한 무리 지나가는 바람에 대화가 잠깐 끊겼다. 현아는 그 아가씨들을 힐끔거리더니 내게 조용히 묻는다.
저, 근데 여긴 대체 어디에요?
아, 제가 아는 분이 하는 데라서요. 아까 도움을 좀 받았어요.
그....그래요?
현아는 꽤나 위축이 된 듯 주변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하긴 평범한 여대생이라면 이런 곳을 와보기는 커녕 들어보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주변을 보다가 이내 나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한석 씨는 꽤 익숙하신가 봐요?
네? 저요? 그럴 리가요. 이제 딱 두 번째 와보는 건데요?
아까 그분이랑도 되게 친하게 보이던데....
아하하하. 에에. 그게. 그냥 어쩌다 알게 됐어요.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현아와 함께 휴게실로 들어갔다. 널찍한 온돌방에 이미 몇 명의 아가씨들이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사물함 같은 것이 주욱 늘어서 있고 맞은 편 벽면에는 커다란 거울이 달린 화장대가 세 개나 있었다. 이쪽 벽면에는 이런 저런 옷들이 걸려있었고 바닥에는 태근이 형과 은애가 부둥켜 안은 채로 자고 있었다. 방에 있던 아가씨 중에서 한 명이 날 보고 아는 체 한다. 에.... 저 분이 누구였더라. 얼굴은 낯이 익은데...
어머, 한석 씨인가? 맞죠?
그래. 맞다. 지나라고 했었지. 내 물건을 입에 넣고 굴려주시던 그 고마운 분. 한 번 보았던 지나 씨. 참 반갑기는 한데 말이죠. 지금은 상황이 너무 안 좋네요. 그렇게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현아가 중얼거리는게 들렸다.
거짓말쟁이.
아오. 진짜 딱 두 번째 오는 거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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