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65)

꿈을 꿨다. 길고도 지루한 꿈이었다. 꿈 속에서 나는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날아다니는 것 같은 신나는 느낌은 결코 아니었다. 뭐랄까. 마치 썩은 물 속에서 부유하는 해파리의 기분이었다. 한 번씩 물 속 깊은 심연에서 날 잡아당기는 해류가 느껴질 때가 있었다. 몸이 저절로 쓸려갈 뻔 하기도 하고 내심 기분이 좋지 않아 그냥 혼자서 내려가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누군가 위에서 나의 손을 잡아주어 끌어올려 주었다. 손의 주인은 매번 달랐다. 어떨 때는 리사, 또 어떨 때는 유진이, 언젠가는 선영, 또 어떨 때는 마리, 다시 또 예린이 ... ..... 그리고 나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엄마.

눈을 떴다. 나는 눈을 떴다고 믿고 있는데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눈을 뜬 것일까 아닐까. 이윽고 깨달았다. 잠에서는 깼지만 아직 눈꺼풀을 다 밀어 올리지 않은 터였다. 눈에 힘을 주어 떠보기로 했다. 고작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일이 천근만근의 추를 들어올리는 것보다도 힘든 기분이다. 도시락 하나 다 까먹고도 남을 시간이 걸려서 겨우 눈꺼풀을 들어올리는데 성공했다. 그제서야 날 내려다 보고 있는 커다란 얼굴을 하나 발견한다. 사람 얼굴은 아니었다.

달이다.

둥근 달이 창 밖 가득 날 비추고 있었다.

길고도 지루한 꿈을 꾸는 동안 보지 못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달이 이토록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것인지 미처 몰랐다. 눈물이 자꾸 흘렀다. 눈물이 흐르는 바람에 기껏 힘들게 뜬 눈이 다시 얼룩진다. 시야를 가린다. 눈꺼풀은 간신히 들어올린다고 해도 눈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손을 들어 닦고 싶었지만 마치 나에게 손이 달려있지 않은 기분이다. 달에게 말을 건다. 대답이 없다. 누군가 떠오르게 하는 달의 둥근 얼굴이 내 기억을 간질간질하게 만든다. 

아예 눈을 감고 한숨 자기로 했다.

밝아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때 달은 보이지 않았다. 하얗고 둥근 구름만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귀를 기울여보니 누군가 라디오를 틀어놓은 모양이다. 라디오 앵커가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는 기사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환율이 불안하고 기업들이 곤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기업들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은 내가 곤란하다. 고개를 돌려 주위에 뭐가 있나 확인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내 목을 무언가로 콱 눌러놓은 듯한 기분이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꺼풀뿐 이었다. 떴다, 감았다를 반복한다. 푸른 하늘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다.

어머니, 들어가서 주무시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낮은 목소리. 예린의 목소리였다.

하이구. 음. 내가 까묵 잠들었구만. 예린이 왔는감?

엄마 목소리다. 하아. 맨날 자고 있으면서 깨우면 안 잤다고 우기는 뻥쟁이 우리 엄마.

오늘은 제가 있을 겁니다.

 에구.... 이거 미안해서 워째쓰까.

 저녁에는 마리 아가씨가 오기로 했으니 오늘은 안 나오셔도 됩니다.

 아녀. 그래도 밤에는 내가 봐야지루. 집에가 눠도 잠이 안 온께.

 주말이라도 좀 쉬셔야죠. 들어가세요, 어머니.

 희유우....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 예린이는 말수가 적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그나저나 엄마가 예린이랑 저렇게 살갑게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친했던가? 내가 기억하기로 엄마가 예린이를 본 거라고는 내 생일잔치 벌이던 날 하루 밖에 없을텐데.

나가 복이 없제.... 남자 복이 없어..... 하나 밖에 없는 아들래미는 반병신이 되뿌리고.....

엄마의 장탄식이 이어진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났다. 반병신이라니. 이렇게 멀쩡한 나를 보고 그게 뭔 소리다냐. 몸이 안 움직이는 것 때문에 그런가? 눈꺼풀은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감았다 떴다, 얼마나 잘 하고 있는데 말야. 곧 이어 의자 끄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니 숨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누군가 혼자 내 옆에 있는 모양이다. 엄마는 아까 나갔으니 아마도 예린인가 보다. 다시 창 밖을 보기로 한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아예 안 보이다가..... 어라?

내 눈 앞을 덮는 손이 보인다. 눈을 뜨고 그것을 본다. 커다란 손.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리고 이내 예린의 얼굴이 나타난다. 여전히 선글라스는 새까맣다. 

하....한석 씨. 눈 뜨신 겁니까?

예린의 당황한 목소리라니. 생전 처음이다. 그나저나 눈 멀쩡히 뜨고 있는 사람에게 눈을 떴냐고 물어보다니, 그건 또 무슨 경우야?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내 고개를 여전히 움직이지 않기에 대신 눈꺼풀을 닫았다가 다시 연다. 그러자 예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다.

제....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그렇다면 눈을 두 번 깜빡여주세요.

그건 쉽다. 난 니가 예린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눈을 두 번 깜빡였다. 그러자 예린이 그 커다란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더니 황급히 어디론가 달려간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예린이 무언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간호사! 간호사!

아따 목소리 한 번 오지게 크네. 그리고 또 부스럭부스럭. 

아...아가씨! 한석 씨가 눈을!!! 네. 지금 방금 확인했습니다......예.... 예..... 잠시만요.

귓가에 차가운 감촉의 무언가가 닿는다. 기다랗고 단단한 무엇인 거 같은데 거기서는 뜻밖에도 내가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석 오빠? 내 말 들려요?

예린이 내 얼굴을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눈을 깜빡인다고 소리쳤다. 아마도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그것을 내 귀에 가져다 댄 모양이었다. 차분한 리사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리사의 목소리는 다소 젖어있었다.

지금 바로 보러 가고 싶지만...... 여기 일이 해결 되면 바로 가도록 할게요. 너무 보고 싶어요. 오빠.

나도 보고 싶다, 리사야. 그러나 말은 할 수 없기에 그저 두 눈만 거듭 깜빡일 따름이었다. 예린이 다시 전화기를 가져가 무어라 한참을 이야기한다. 곧 이어 의사가 들어와 내 눈에 핀라이트를 들이대고 간호사에게도 뭔가 지시한다. 정신이 없다. 

그러나 정신이 없는 건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나타나 내 얼굴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고 곧 이어 숨을 헐떡이며 나타난 마리가 내 팔을 붙잡고 통곡을 했다. 얼마 후 찾아온 유진이는 내 손을 자기 이마에 대고 나지막이 기도를 올리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교회 다니는 녀석인지는 몰랐는데... 또 어느날 밤에 혼자서 찾아온 선영은 내 몸을 끌어안고 울다가 날 숨막히게 할 뻔 했다. 이 사람들이 내가 무슨 통곡의 벽으로 보이나. 왜들 하나같이 날 붙잡고 이렇게들 우는 거야.

그렇게 아름다운 달과 푸른 하늘을 보며 눈을 뜨게 된지 이제 한 달 정도가 지났다. 뻣뻣한 나무토막이 아닐까 의심되던 내 몸뚱아리도 서서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의사는 이제부터 하루 한 시간 정도 걸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내 다리가 아니라 남의 다리 같은 기분이지만, 그래도 다리가 움직이기는 했다. 팔과 다리가 훌쭉해진 게 아주 방금 아프리카에서 직수입한 에티오피아 난민 같아 보인다. 병실에서 창을 통해 보았던 낙엽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날 부축한 마리에게 고집을 부려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밖에 나가도 된다고는 안 했는데예.

 안에만 있으라고도 안 했잖아.

마리는 찬 공기 맞으면 안 된다고 투덜거렸지만 날씨는 11월치고 그렇게까지 춥지 않았다. 숨을 가득 들이마신다. 무려 7개월만의 바깥 공기였다.

지금이 11월이라고?

 야아.

 신기하네. 내가 눈을 감았을 때는 분명 4월이었는데. 타임머신이라도 탄 기분이야.

정말 그랬다. 결코 길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봄에 잠이 들어 눈을 떠보니 이미 늦가을이라니.

타임머신이 아니라 요단강 근처 가서 뱃놀이 하고 오신 거죠.

저렇게 밉살스런 소리를 하는 녀석은 정해져 있다. 학교 끝나고 바로 오는 건지 교복차림의 유진이가 다가와 내 팔을 잡는다. 이 녀석은 요새 아주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월급이라도 줘야 되려나. 그게 아니면 개근상이라도 하나 만들어 줄까 보다.

벌써 나와 있어도 되는 거에요?

 암, 그렇고 말고.

 의사 선생님한테 이를 거에요. 바른대로 말해요.

 아, 정말이라니깐.

호기로운 내 목소리와 달리 내 걸음걸이는 갓 걸음마를 배운 돌배기처럼 위태위태했고 결국 마리와 유진에게 연행되다시피 양쪽 팔짱을 끼워진 채 다시 병실로 향한다. 대신 병원 복도를 왔다갔다 걷는 걸로 걷기 재활을 이어갔다. 내 몸 전체가 이제서야 슬슬 내 명령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4월의 어느 날, 북한강변 도로에 널부러져 있던 나를 처음 발견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시체인줄 알고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난 아직 살아있었고 춘천 시내의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팔과 다리에 심각한 골절, 두부 손상, 내장 파열, 과다출혈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고 했다. 신분증은 없었지만 품안에 예린의 명함을 가지고 있던 터라 경찰은 내 신원 파악을 위해 그녀에게 연락을 취했다. 나의 사고 소식은 그렇게 예린을 거쳐 리사와 마리로 전달되었다. 그녀들은 곧바로 각각 부산과 서울에서 춘천으로 달려왔다고 한다. 그녀들은 통해 신원이 확인된 나는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겨졌다. 엄마나 유진에게 연락이 닿은 것도 이때쯤인 모양이다. 그때부터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내 곁을 지켜준 것은 엄마, 유진과 선영, 리사와 마리, 예린 등이었다. 내가 꾼 꿈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실제로 내 곁에 있어주었다. 내게 손을 내밀어 주어 내가 아주 먼 곳으로 떠나가지 않게 잡아 주었다.

한편 경찰은 내가 발견된 지역 근처 도로에서 타이어자국과 부숴진 차체 파편 몇 조각을 찾아냈지만 그걸로 뺑소니 차를 찾는 건 무리인지라 몇 달 가지 않아 수사를 포기했다. 10월 중순에 내가 눈을 뜨자 경찰이 다시 찾아왔다. 내게 사고 직전 목격한 것에 대해 진술하도록 요구했지만 나는 입을 닫았다. 내가 거기에 간 이유도, 나를 치고 달아난 녀석의 차에 대해서도 함구했다.

의식을 회복했다고 하지만 6개월 동안 침상에서 꼼짝없이 누워있던 내 몸은 말라 비틀어진 수수깡만도 못한 몸이 되어버렸다. 팔과 다리의 골절은 의식이 없는 동안 제법 다 나았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의 감각을 되찾는 데에 일주일, 발가락의 감각을 되찾는데 일주일이 또 걸렸다. 말을 하게 되는 데는 3주가 소요되었다. 삐꺽 거리는 내 몸에서 관절이 제 역할을 깨달아가고 피가 원래대로 순환하며 뛰어야 할 기관이 제대로 뛰게 되는 데에 결국 한 달이 걸리고 말았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이려 하는 것은 꽤나 고통스러웠다. 재활치료는 하루하루가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내 안에 불타고 있는 검은 욕망은 내게 끊임없이 채찍질을 해댄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리사는 언제 온데?

유진이가 사온 귤을 까고 있던 마리가 흠칫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리사 이야기만 꺼내면 이 녀석의 반응이 이상하다.

언니는 여전히 몸이 안 좋아가.... 아무래도요.

 그런가.

리사와는 종종 전화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기운이 없었다. 물론 여전히 상냥하고 밝은 목소리이긴 하지만... 뭐랄까. 생기가 부족하달까. 그녀를 무척이나 보고 싶지만 부산에 있는 그녀를 보러 가기엔 내 몸이 좋지 않았고 그녀가 날 보러 오기에는 그녀가 좋지 않았다. 내가 누워있던 초기에는 함께 있었다고는 하는데 밤에 잠도 자지 않고 날 간호하느라 몸이 급격하게 상했다고 한다. 그렇게나 몸이 많이 안 좋은 걸까. 몹시 걱정되었다. 예전에 그녀에게서 들었던 그녀의 병원생활이 떠오른다. 설마 다시 그렇게 병원에 드러누운 걸까.

아저씨는 내가 왔는데도 딴 사람 찾고 있어요?

 니가 여기 있는데 굳이 또 널 찾을 필요는 없잖아.

 으이구. 말이나 못하면!

유진이는 내 입에 귤을 쑤셔 넣었다. 껍질을 깠으면 귤을 조각조각 갈라서 하나씩 넣어주어야지 이 무식하게 과격한 녀석은 한 개를 통째로 넣어 제낀다. 숨막히는 줄 알았네. 사이가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티격태격 하는 마리와 유진을 보고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되어 예린이 왔다. 

그럼 저희는 갈게예.

 그래, 조심해서 가.

병원은 우리집에서 그닥 멀지 않은 곳이었다. 마리에게 유진이 좀 바래다 달라고 부탁했다. 

언제 퇴원해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 조만간 하지 않을까?

 퇴원하면....

유진이는 몹시 우물쭈물했다. 평야설넷면 딱 부러지게 말할텐데 이 녀석은 예린을 좀 어려워했다. 잠시 후 유진은 예린 쪽을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내게 물었다.

.....다시 과외하는 거죠?

 머리에 충격을 받아서 고등학교 과정을 다 까먹었어. 무리일 거 같다.

 정말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폼이 참으로 놀려먹는 재미가 있다.

뻥이야.

 이익!!!!

이쪽으로 달려와 나를 받침대 마냥 두고 다듬이 방망이질이라도 리드미컬하게 때려주고 싶은 표정이지만 내 곁에 예린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쳐다본 유진이는 혀만 쏘옥 내밀고는 마리와 함께 병실을 떠났다. 오늘 밤 담당은 예린인 모양이었다. 침상에 반쯤 기대 앉은 난 예린을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이젠 그렇게 불침번 설 필요가 없지 않나? 무슨 일 있으면 내가 전화해도 되고 말야.”

 “어머님이 아직 마음을 놓지 못 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오시겠다는 거 겨우 쉬게 하고 나왔습니다.”

아아. 우리 엄마. 엄마에게는 미안할 따름이다. 공부한답시고 집 떠나와 지내면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뻘짓하러 춘천갔다가 사고까지 당한 아들래미가 뭐가 이쁘다고 그렇게 보살시피십니까. 엄마만 보면 미안해 죽겠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에 대한 조사를 끝냈습니다.”

예린이 어떤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올 것이 왔다. 예린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 얼마 전 내가 깨어났을 때의 그 당황하던 표정이 겹쳐 보인다. 심호흡을 하고 꺼내본다. 꿈엔들 잊혀질까 싶은 그놈의 사진이 제일 먼저 나온다. 어떤 집에서 나오는 모습,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모습, 차에 올라타는 모습..... 아랫입술을 꽉 깨문다. 부들부들 떨리려는 손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다음 장을 펼친다. 녀석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였다.

이름은 임필복. 나이는 50세. 대물물산에서 전무를 맡고 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승진가도를 달린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지방 쪽 공장에서 현장 기반을 닦고 서울로 올라와 요 몇 년 사이에 전무자리까지 꿰찼다. 수완이 좋은 모양이었다. 요즘처럼 경제가 뒤숭숭한 시기임에도 꽤나 잘 나가는 모양이다. 글을 읽어내려가는 것만으로도 녀석에 대한 분노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손에 쥔 사진을 구겨버리고 만다. 예린에게 물었다.

양.... 규호라고 했던가. 지혜 남편이?

 예.

 그 사람이랑은 어떤 관계인데?

 대물물산이 올해 초 물류쪽으로 사세를 확장시키면서 거기에 소요되는 차량은 전부 양규호를 통해 구매한 모양입니다. 양규호는 그 덕분에 이 지역에서 올해의 판매왕이 되었죠.

 그게 올해 초라고?

 예.

기억을 더듬어 본다. 모르긴 몰라도 임필복이 양규호에게 접촉한 것은 분명 지혜가 선을 보고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한 게 틀림없다. 자동차 세일즈맨인 양규호에게 환심을 사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즉 대량의 자동차를 사면 된다. 말이야 쉽지만 어지간한 추진력과 강단이 없고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고작 자기를 차버린 여자 하나 엿먹이는데 그만한 에너지를 쏟는 녀석이라니. 제대로 돌은 녀석이다. 

지금도... 수시로 그 지혜라는 분과 접촉하는 모양입니다만....

 뭐?!

갑자기 소리를 지르니까 뒷골이 땡긴다.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도로 드러눕는다.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불규칙하게 별도의 장소에서 가끔 만남을 가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대체 그 놈이 지혜에게 무슨 짓을.....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예린. 거기까지 조사를 안 한건지 아니면 조사를 했는데 나에게 말을 안 해주는 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머리 속으로는 이미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어지러운 생각이 내 머리 속을 헤짚어 놓는다. 대단히 미친 놈이다. 그놈은 제대로 미친 놈이다. 그놈은 아울러 자기와 지혜의 관계를 알고 있는 한 사람을 차로 그대로 밀어버리는 과감성도 갖추고 있다.

지혜의 결혼식이 생각난다. 시간적으로는 7개월 전의 일이지만 나에게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능글맞게 인사하던 임필복의 뱀같은 언사와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의 너털웃음. 돌처럼 굳어버린 지혜의 등..... 눈을 감고 있으면 그때의 결혼식이 낡은 영사기에 얹어진 필름처럼 자꾸 돌아간다. 

차라리 그 녀석을 모른 척하고 떠났다면.... 그놈의 차에 올라타지만 않았다면..... 덧없는 후회는 반복해서 내 기억에 아픈 상처를 남길 뿐이다. 돌아보면 거기에는 후회만이, 아픔만이 가득하다. 난 앞으로 가야한다. 그러나 그 기억과 후회는 끊임없이 나를 붙잡고 놓질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뒤에서 나를 붙잡고 있는 사슬들을 끊어내야만 한다. 그놈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지 않고는 그 사슬들이 영영 나를 묶은 채로 놓아주지 않을 것 같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눈을 떴다. 한 달만에 보는 보름달이 두둥실 떠 있었다. 한달 전, 움직이지 않는 몸에서 오직 눈만 껌뻑이며 바라보았던 아름다운 저 달. 나로 하여금 눈물짓게 만들어버린 저 달. 달을 보고 있노라니 한 사람이 떠오른다. 달처럼 환한 미소를 짓던 지혜.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이제 내 여자는 아니지만.... 그녀를 향해 구렁이 같은 필복의 검은 혀가 넘실대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소름이 돋는다.

예린 씨.

 예.

예린은 늘 그렇다. 갑작스럽게 불러도 당황하는 일 하나 없이 곧장 대답을 해온다. 마치 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사냥개처럼. 버튼만 누르면 곧장 작동하는 기계처럼.

나를 도와 줄 수 있어?

 예.

진지한 예린의 대답인데, 난 괜스레 웃어버렸다.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예린 쪽을 향해 돌아본다. 어두운 밤하늘보다도 더 새까만 선글라스 너머 그녀의 시선을 느낀다.

내가 뭘 도와달라는 줄 알고 무조건 대답부터 하고 있어. 내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달라고 하면 어떻게 도와줄려고?

반쯤 웃으며 말했지만 예린은 언제나 그러하듯 진지하다.

한석 씨를 어깨에 짊어지고 별에 닿으실 때까지 뛰어오르겠습니다.

하아. 이래서 문제야. 내 주위의 여자들은 어째 리사 말고는 다들 고분고분한 맛이 없어. 하긴 그래야 예린이지. 사실 리사도 그리 고분고분한 녀석은 결코 아니고 말이다. 한숨을 살짝 내쉬고 부탁의 서두를 펼친다.

내 뺨을 친 놈이 있어.

아주 세게, 혹은 죽여 버릴 요량으로 라는 말은 뺀다. 굳이 넣지 않았다.

성경에서는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주라고 하지만 말야.... 성인도 아니고 도 닦는 사람도 아닌 평범한 나로서는 그럴 생각이 없어. 녀석의 뺨을 나도 쳐야겠어. 그래야 내가 내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러지 않고서는 살아도 산 게 아냐.

 그렇습니까?

 나..... 그놈을 죽여버리고 싶어.

지난 한달간 내내 머리속을 맴돌던 이 말을 결국 꺼내고 만다. 사람이 머리 속으로는 어떤 상상이든 할 수 있다. 세상을 멸망시키는 컴퓨터의 작동 버튼을 누르는 일이라든가 지나가는 여자를 쓰러뜨리고 옷을 찢고 강간을 하는 일이라든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들을 싹다 엮어다 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리는 일이라든가. 생각으로는 뭘 못하겠는가. 

그러나 말은 다르다. 생각으로 머물고 있던 무언가가 음성이라는 신호로 나오는 순간, 그것은 내 손을 떠나 그 자체로의 생명을 가지게 된다. 이 엄청난 소리를 내뱉은 나는 그 말이 가지는 무게만으로 온몸이 쩌릿쩌릿하다. 

그렇습니까?

................솔직히 좀 맥이 빠지긴 한다. 나로서는 정말 미칠듯이 번뇌하고 죽을듯이 끙끙거리며 고민하며 꺼낸 말인데도 예린의 이런 무뚝뚝한 반응 앞에서는 어제 빵을 먹었는데, 맛이 더럽게 없었어. / 그렇습니까?라는 정도 말 밖에 안되는 느낌이다.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정말 예린 씨는....

 네? 무슨 문제라도?

 아냐. 늘 한결 같아서 보기 좋다고.

 감사합니다.

결연한 마음에 금이 갔다. 이래 가지고는 무슨 애가 장난간 사달라고 꼬장 부리는 꼬라지만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예린의 말을 들으며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까요?

 ......뭐?

놀라서 예린을 쳐다본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다.

저희는 약보다는 연장을 더 선호하는 편이긴 합니다만 일반인이라면 아무래도 약이 깔끔하겠지요. 뒤탈도 없을테고 처리도 쉽겠지요. 연장은 아무래도 좀 주변이 지저분해지니까요.

 ....무....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러자 예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한다.

죽인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마....말이 그렇다는 거지, 구체적인 방법을 물은 건 아니었어.

 그렇습니까?

 하아.....

침대에 몸을 깊숙히 파묻는다. 30도 각도로 세워놓은 등받이가 삐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 몸을 지탱한다. 창 밖의 달을 다시 본다. 짙은 구름이 흘러와 달을 살짝 가리고 다시 벗어날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혼란스러운 내 마음이 점점 하나의 형체를 이루고 하나의 길을 따라 나아간다.

예린 씨.

 네.

 정말 방법이 있는 거야?

 그렇습니다.

복수. 내 마음 속에 결국 자리잡은 하나의 단어.

그렇다면 날 도와줘.

 직접.... 하실 생각입니까?

 그래.

이번에는 예린을 똑바로 쳐다본다. 그녀는 내가 하는 말에 이렇다 저렇다할 반대를 하지 않는다. 평가를 하지 않는다. 오직 내가 무언가를 요구하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길을 제시할 따름이다. 그녀는 나의 도구였다. 아주 날카로운 칼인 동시에 치명적인 독이었고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와도 같았다. 

내 손으로.... 반드시.....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조만간 준비가 끝나는대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손을 뻗어 담요를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벽으로 가더니 불을 껐다. 내 손에 움켜잡고 있는 서류와 사진을 수거해간다. 보조의자에 앉은 예린은 마치 아기를 재우는 것처럼 내 가슴을 토닥여준다. 눈을 감았다. 까무룩 잠이 온다. 몸이 내 말을 듣지 않는 요즘은 걸핏하면 잠이 온다. 잠결에 예린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저라면....

낮은 허밍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그렇게 나에게 자장가가 된다.

왼뺨을 맞기전에 녀석의 팔을 꺾어버립니다. 다시는 감히 팔을 뻗어 저를 치지 못 하도록. 그렇게 해줍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방긋 웃음이 나온다. 그래, 그래야 예린이 답다니깐.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부탁하는 거야.....꿈을 꾼다. 꿈에서 나는 달리고 있었다. 돌뿌리에 발이 치이고 나동그라져도 다시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쉬지 않고.

저게 어딜 봐서 재활이에요?

오전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마리와 유진이였다. 둘은 맨날 티격태격하면서도 어째 늘 붙어다니는 모양이다. 마리가 날 가리키며 예린에게 투덜거리는게 들렸다. 난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어? 왔네?

 왔~네~에?

유진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쏜살같이 달려온다. 키만 맞으면 멱살이라도 잡을 태세였지만 아쉽게도 녀석은 짧았고 난 길었다. 게다가 웃통도 안 입고 있으니 잡을 멱살이 없지. 속살이라면 모를까.

아저씨는 어디 좀 갈 때 온다간다 소리 좀 하면 어디가 덧나요? 또 연락도 없이 잠수해버리기에 이젠 아예 죽어버린 줄 알았잖아요!

 이렇게 살아있는 걸?

씨익 웃으면서 답해준다. 매일 난 살아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 아주 처절하게.

말이면 단 줄 알아요? 내가 얼마나 걱정을....

 알았다. 알았어. 방학 한 거야?

난 유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려다가 내 손이 결코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내고는 그냥 긴 의자로 가서 털썩 앉았다. 맞은 편에 앉은 예린에게 오늘은 망월바위까지 갔다 왔다고 이야기했다. 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수첩에다가 뭔가 기록했다. 난 그 사이에 예린이가 가져다놓은 주먹밥 한 덩이를 먹은 다음 다시 신발끈을 고쳐맨다. 근 한달만에 만난 유진과 마리가 반갑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내게 주어진 시간은 허투루 쓸 수가 없다. 

또 올라간다구요? 저길?

송진가루를 다시 묻히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노라니 유진과 마리가 곁에 와서 내가 가야할 코스를 올려다보며 신음을 흘린다.

으윽.... 저긴 성한 사람도 올라가기 힘든 거 아니에요?

 할 수 있습니다.

나 대신 에린이 대답한다.

지난 한달간 한석 씨는 충분히 잘 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해낼 겁니다.

엄격한 교관에게서 들은 모처럼의 칭찬에 박수를 몇 번 쳐준다. 송진가루가 휘날리자 유진과 마리가 불평을 해댔다. 손을 한 번 휘저어 주고는 벽에 달라붙어 오르기 시작했다.

퇴원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무리하는 거에요? 이게 대체 말이나 되요?

아래를 내려다보니 유진이가 예린에게 대들다시피 쏘아붙이고 있었다. 예린을 어려워하던 녀석이었는데... 꽤나 무리하고 있구나.

이런 산 속에서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냐구요. 저렇게 무식하게 산만 타고 있으면 사람이 저절로 낫나요? 사람이 좀 푹 쉬고, 몸에 좋은 것도 좀 먹고 그렇게 해서 건강을 회복해야죠! 운동생리학 같은 것도 몰라요?

 모릅니다.

인정사정 없이 딱 잘라 대답하는 예린의 딱딱한 어조는 안 그래도 붙같이 화가 나있는 유진에게 기름을 끼얹는 꼴이다.

안 그래도 겨울인데 좀 더 따뜻한 곳에서 지내지는 못할 망정 저런 개집 같이 생긴 곳에서...

 사방에서.

예린의 목소리가 잘 갈아진 칼처럼 예리하게 유진의 말허리를 잘라낸다. 평소 그녀의 목소리보다 톤이 좀 높다.

.....사방에서 좆같은 것들이 수십명이 연장들고 달려들고, 뒤에는 한 새끼가 사시미로 쑤시고 있고, 우리 애들은 다 디졌고, 눈 까뒤집고 아무리 둘러봐도 나 도와줄 사람 하나 없다고 한다면.

저렇게 격한 표현이라니, 예린은 안 그래도 가만히만 있어도 무서운 사람인데 더 무섭다.

어떠시겠습니까. 잡히면 죽습니다. 그때도 휴식 타령 하시겠습니까? 아까 말씀하신 그 운동생리학인가 뭔가 나부랭이대로 일단 좀 쉬고 먹을 것 좀 먹고 다시 붙자고 그러겠습니까? 할만큼 했다고 했으니 밝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거기서 끝냅니까? 대체 거기서 살아나려면 뭘 어떻게 해야 될까요. 말해보십시요.

예린의 박력에 눌린 유진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라고 하자 예린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일단은 한석 씨를 지켜보는 겁니다.

뭔가 엄청난 소리를 늘어놓은 것 같기는 한데 영양가 있는 소리는 하나도 없다. 난 아래쪽을 보며 씨익 웃어보이고는 다시 올라간다. 고립무원. 여기에 이렇게 매달려 올라가면서 철저하게 이 단어를 깨달았다. 뼈속까지 파고 들어와 새겨진다. 지금 여긴 오로지 나만 있고 나를 도와줄 것은 내 손과 내 다리 뿐이다.

조심해요!

 화이팅!

안타까운 목소리로 응원하는 유진과 마리를 뒤로 하고 삽시간에 땅으로부터 멀어진다. 처음에는 1미터도 채 못 올라가고 벽에 달라붙어 있는게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문제 없다. 겨울의 찬 바람도, 얼음처럼 차가운 돌덩이도, 모두 내 한 몸 같다. 두 손과 두 발. 내가 기진 모든 것을 활용해서 틈과 틈을 붙잡고 기어올라간다. 오늘은 반드시 저 목표를 달성하고 말겠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약 한 달 전, 내가 예린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장소를 수배해놨다고 알려왔다. 엄마에게는 재활치료를 하러 간다고 이야기하고 병원을 나왔다. 엄마는 걱정을 태산같이 하며 내 곁을 떠나지 못하고 안달복달 해댔지만 예린이가 엄마를 데리고 가 뭔가를 이야기하자 놀란 표정으로 알았다며 나를 보내주었다. 하루 몇 시간 걷는게 고작이었지만 그래도 퇴원을 강행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굳이 연락하지 않았다. 선영이나 유진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예린이 날 데리고 간 곳은 경남 어딘가에 있는 산이었다. 그곳은 수직에 가까운 암벽이 병풍처럼 드리워지고 뒤로는 끝없는 임해가 펼쳐진 곳이었다. 절벽 밑에는 커다란 가건물 하나가 숙야설넷고 지어져 있었다. 간단한 생활도구는 갖춰져 있었으나 황량하기 그지 없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희가 단합대회하러 종종 오는 곳입니다.

 단합대회라.....

레포츠 동호회는 아니지 않나? 그쪽이?

지금 한석 씨가 가진 것은 두 팔과 두 다리 뿐입니다. 그걸 단련하는 방법이 한석 씨가 회복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걷지 못하니 뛸 수도 없습니다만 기어다닐 수는 있겠죠. 대신 바닥이 아니라 이곳, 여기서 기어오르는 겁니다. 두 팔과 두 다리로 떨어지지 않는 것부터 배우십시요.

 여기....를 나보고 올라가라구요?

 예.

 내가 복수를 도와달라고 했지 언제 이런 걸 시켜달라고 했어?

 그럼 그놈에게 지금처럼 아장아장 걸어가서 한 대 때려주시겠습니까?

예린이 그놈 이야기를 꺼내자 나도 모르게 오기가 생겼다. 하겠다고 대답한다. 예린은 암벽의 가장 높은 곳, 가장 멀리 있는 곳에 있는 깃발을 가리키며 저걸 가져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다고 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기가 막혔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암벽등반이라니. 그러나 예린은 진심이었고 체중을 분배하는 법부터 자세, 손가락 힘 키우는 법 등을 세세히 알려주었다. 하루 종일 암벽에 들러붙어 있다가 떨어지길 반복한다. 몸 회복은 고사하고 골병드는 줄 알았다. 저녁마다 예린이가 날 엎드리게 해놓고 근 한 시간 정도를 꾸준하게 마사지해주었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몸 구석구석을 내맡기는 것에 쑥스럽기도 했고 야릇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손에 완전히 내 몸을 맡기게 되었다. 하루 종일 시달린 근육들이 그녀의 손길 아래에서 노곤노곤하게 풀어졌다. 

그러기를 한 달. 이제는 먹고 자고 마사지 받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무조건 암벽에 달라붙어 있게 되었다. 처음 예린이 목표로 잡았던 정상까지는 불과 몇 미터 남지 않았다. 예린은 나의 빠른 회복과 성장을 진심으로 기뻐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불만이었다.

이제는 슬슬 다른 걸 가르쳐 달라니깐.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몸은 이제 완전히 회복된거잖아. 그러면 본격적인 걸 가르쳐 달라고.

해가 지기 전에 마리와 유진이가 돌아가고 나서 난 예린을 졸랐다. 이 먼곳까지 힘들게 온 녀석들이긴 하지만 함께 어울려줄 수는 없었다. 마음이 급한 나는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혜가 그 구렁이 같은 놈에게 농락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들부들 떨린다.

언제나 그러하듯 하루의 훈련을 마치고 간이 침대에 엎드려 예린의 마사지를 받으며 투덜거렸다. 벌써 며칠 전부터 계속 해온 말다툼이었다.

내가 맨 처음에 예린 씨에게 부탁한 거 잊은 거야? 난 여기에 그저 암벽등반이나 하자고 온게 아니란 먈야.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서.... 으아아악.....

허리를 꾹 누르니까 무지하게 아프다. 예린은 거의 나에게 올라탄 자세로 허리를 누르고 있었다. 어찌보면 상당히 에로틱한 자세라고도 할 수 있지만 온 몸을 짜르르 하고 관통하는 욱신거림과 시원함 때문에 흥분할 겨를이 없다. 그녀는 내 엉덩이를 올라타고 허리부터 시작해서 등 전체를 마사지하며 천천히 말했다.

깃발을 가져오시라니까요.

 쳇.

깃발까지는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며칠 이내면 거기까지 도달하는게 꿈만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게 목표가 바로 눈 앞에 있으면 더 안달이 나는 법이다.

깃발을 가져오면 산을 내려갈 수 있다는 거야?

 예.

 그러고보니 그건 누가 정한 거지?

 .......리사 아가씨가 정했습니다.

 그래?

리사......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면 내 마음이 약해진다. 여전히 몸이 좋지 않은 리사였다. 내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고나서 보러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지만 자신의 지금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오지 말라고 했다. 요 근래에는 전화도 잘 오지 않는다. 생각보다 몸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그럴 수록 난 더욱 리사가 보고 싶었지만 그녀의 태도는 단호했다. 

다음 날, 다시 암벽을 오르기 시작한다. 철저한 고독과 싸워가며 해가 지기 직전 결국은 해내고 만다. 

축하드립니다.

저녁 식사 시간도 지나버려 사방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내가 내민 깃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린은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그대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서울로 가는 거야?

나도 내 짐을 챙기며 그녀에게 묻는다. 기다려라. 임필복. 네 놈 목을 따러 내가 가마. 그러나 예린의 목소리가 내 생각을 부정한다.

아니요. 저희는 서울로 가지 않습니다.

 .....뭐라고?

예린은 챙기던 그릇을 가방에 몰아넣고 내 쪽을 쳐다보았다. 

제 도움은 여기까지입니다. 전 복수까지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뭐야?!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예린 씨는 나한테 약속했잖아! 도와주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한다는 소리가 여기까지라니.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구.

나도 모르게 반응이 격해진다. 들고 있던 짐을 바닥에 내팽게치고 예린에게 다가간다. 그녀는 차분하게 답했다.

리사 아가씨의 명령입니다.

 뭔 소리야, 대체.

리사? 명령? 그 앙큼한 녀석이 또 무슨 농간을 부리는 거지?

한석 씨가 꼭 직접 나서지 않아도.... 말씀만 하시면 언제든 녀석을 거꾸러뜨리는 건 가능합니다. 결코 흔적이 남지 않게.... 이 세상에서 더이상 보이지 않도록 처리해 버리는 일도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습니다.

어찌보면 꽤나 잔인한 이야기인데도 예린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 점이 더 잔인하다면 잔인하달까. 확실히 예린에게서는 피냄새가 난다. 단 한번도 그녀가 누군가를 해하는 광경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와 가까이 지내면 지낼 수록 그녀에게서 풍기는 이질적인 냄새를 맡게 된다.

한석 씨가 정말 원하신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런 일을 대신 해드릴 수 있습니다. 꼭 당신의 손을 더럽혀야만 하겠습니까?

 내가 직접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그래서.

예린이 말을 잠깐 끊고 나를 쳐다본다.

정말 사람을 죽이시겠다는 겁니까? 정말로요?

 ....그래. 난 그래야 겠어.

 리사 아가씨를 슬프게 하면서까지요?

리사. 리사. 리사. 예린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이름이 자꾸 거슬린다. 그 이름이 내 앞을 막고 있다.

그래.

 그렇다면 전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뭐?

 리사 아가씨는 당신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리사 아가씨를 버리고 엉뚱한 길로 달려가는 걸 두고 볼 수 만은 없어요. 저는.

예린에게 바짝 다가선다. 그녀의 멱살을 움켜쥔다. 근 한달간의 지독한 단련 속에 손아귀의 힘은 나도 놀랄만큼 세져 있었다.

그럴거면! 애초부터 복수를 도와주겠다는 헛소리를 하지 말았어야지! 기껏 사람을 부추겨놓고 이제와서 한다는 소리가! 뭐? 못 도와주겠다고? 리사가 하지 말라고 했다고? 넌 대체 뭐야! 리사가 시키면 시키는대로 다 하는 똘마니야?!

 한석 씨는....

이런 상황에서도 예린은 지극히 침착했다. 

....목표가 있었기에, 복수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이렇듯 빠른 회복이 가능했습니다. 원초적인 분노야 말로 가장 훌륭한 에너지니까요.

 개소리 집어쳐!!!!!

그래, 난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를 때린다는,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하물며 나에게 이토록 물심양면의 도움을 준 고마운 예린을 상대로 폭력이라니. 그런 끔찍한 짓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난 분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예린을 밀쳐내고 오른손을 쳐들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으아악!!

어떻게 움직이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번개같은 움직임으로 멱살을 풀어내고 몸을 움직여 내 등 뒤를 차지한 예린이 내 오른 팔을 꺾어 등쪽으로 바싹 몰아붙인다. 그 상태에서 내 다리를 걸어 바닥에 자빠트린다. 바닥에 부딪힌 충격과 팔의 고통 때문에 나는 계집아이처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아아악!! 이거 놔! 놓으라구!!!

 제가 말씀 드렸죠.

버둥거리는 나를 등 뒤에서 제압하고 있는 예린은 숨소리조차 평온했다. 목소리만 들으면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며 나누는 대화 같다. 물론 난 커피가 아니라 지금 흙먼지를 마시고 있지만.

저라면 제 뺨을 치려는 인간의 팔을 꺾는다고요. 지금이라도 가능합니다. 팔이 부러지면, 당분간은 또 꼼짝도 못 하시겠죠. 그러면 잠자코 다시 재활에 돌입해야 합니다만....

 놔! 놓으라니깐!!!

 그렇게 복수가 하고 싶으시다면, 일단 저부터 쓰러뜨리고 가십시요.

 놔앙아아아아아!!!!!

더러운 흙바닥에 온 몸을 부비며 용을 써보았지만 팔 하나를 뒤로 꺾인 채 움직일 수 있는 폭이라는 것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한참동안이나 버둥거리며 난리를 피웠지만 자세를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포기다. 예린을 이기는 건 내가 몇 번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좋아... 놔 줘.

내 등에서 예린의 무게가 사라졌다. 얼얼한 오른팔을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몸에 붙은 검댕과 흙먼지를 털어내며 예린을 쏘아본다. 맘같아서 다시 달려들고 싶지만 그랬다간 또 어떤 험한 꼴을 볼까 두렵다.

그러면 예린 씨는 여기서 내 몸을 회복시키면서... 그러면서 리사가 시킨 대로 내가 복수를 포기하는 걸 기다리고 있었단 거야? 날 도와주겠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었고?

 .....결과적으로는요.

 젠장.

입에 머금고 있는 흙먼지와 함께 침을 뱉았다. 

리사 아가씨는 한석 씨의 몸이 회복되면, 마음도 회복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한석 씨의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일에 대해 저보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말씀하셨지요.

리사.... 리사..... 예전에 지혜 결혼식 전 날도 그렇지만 난 정말이지 끝까지 너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 인형이구나. 네 맘도 이해한다. 그렇지만 니가 예린에게 내린 명령은 내게 있어 너무 가혹하다. 잔인해.

한석 씨가 원한 것도 들어드리고 싶었지만.... 그렇지만... 리사 아가씨는....

내 몸을 털어주려던 예린의 손을 밀쳐낸다. 예린을 똑바로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말해봐. 내 말이 우선인지 리사의 말이 우선인지....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물심양면으로 나를 언제나 도와주고 있는 예린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그녀에게는 열번이고 백번이고 절해가며 고마워해도 모자를 판이다. 그러나 지금 내 마음은 일그러진 모양을 한 채로 들끓고 있었기에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예린을 보며 울분이 쌓여간다.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소리쳤다.

말해보라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할 건지 리사가 시키는 대로 할 건지! 말하라니까!

속에서 무언가 울컥한다. 평소같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3초 안에 재깍재깍 기계처럼 대답해오던 예린이었는데 지금 그녀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가 대답하기에 곤란한 소리라는 뜻이겠지. 내 안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나쁜 기운은 그런 그녀를 더 몰아세우라고 말하고 있다. 외치고 있다.

좋아. 리사가 하라는 대로 해.

그녀의 드레스 셔츠에 손을 가져간다. 단추에 내 손가락이 닿자 그녀가 흠칫거리는게 느껴진다.

리사가 내 회복에 있어서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했다며. 지금부터는 그 말대로 하는 거야.

나는 비열한 놈이다. 더럽게 저열하고 치졸한 놈이다. 그녀가 거부할 수 없는 굴레를 말로 빚어내어 그녀에게 강요하고 있다. 하나씩 단추를 풀러낸다. 여태껏 단 한번도 보이지 않았던 예린의 속살이 점차 드러난다.

이건 회복활동의 일환이야. 그렇게 생각해.

드레스 셔츠를 모두 벗기고 나니 뭔가 복잡한 모양의 코르셋 같은 것이 그녀의 상체를 감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끈으로 꿰매게 되어있는 것 같은 거였는데 푸는 법이 상당히 복잡했다. 그러나 거의 뜯어내다시피 하여 그것을 벗겨낸다. 출렁거리며 튀어나온 그녀의 유방이 잠자고 있던 내 욕구에 풀무질을 해댄다. 

내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고 싶다했지? 이것보다 확실하게 마음이 회복되는 일도 없지.

예린의 바지마저 벗기고 나신이 된 그녀를 매트 위에 눕혔다. 예린은 한 마디 신음도 비명도 내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내 손길을 거부하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다만 선글라스는 여전히 쓰고 있는 채였다. 어쩐지 꺼림칙하여 그것에는 손대지 않았다. 바지를 벗어버리고 그녀 위에 몸을 실었다. 근 반년 넘게 사용하지 못한 자지가 꺼떡거리며 그녀의 배 위에 얹어진다.

지금이라도 내 말대로 하겠다면 그만하겠어. 예린, 대답해봐.

그녀의 선글라스에 비쳐진 내 얼굴이 언뜻언뜻 보인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추악한 얼굴이다. 내 얼굴이지만 못 본 척 한다.

대답하지 않겠다면....

그녀의 다리를 M자로 밀어올린다. 보슬거리는 옅은 음모를 헤치고 채 젖지도 않은 살동굴의 입구에 자지부터 쑤셔넣는다. 뻑뻑한 느낌 때문에 제대로 밀어넣기 어렵다. 다리를 더 밀어올려 가득 벌린다. 길쭉한 그녀의 한쪽 다리가 내 어깨에 걸쳐진다. 매끈하게 뻗은 다리의 모양새가 참 보기 좋다. 앞뒤로 슬적 움직이며 자지를 입구에 뭉개본다. 딱딱하게 굳은 녀석의 끄트머리를 넣는데 성공한다. 안쪽은 그나마 좀 젖어있는 듯.... 앞뒤로 쑤셔보자 어느 순간부터는 진입이 가능했다. 단숨에 치고 박아넣는다.

하윽.......

여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예린에게서 나지막한 신음이 터져나온다. 평소의 목소리보다도 한층 더 고양된 소리였다. 그녀의 유방을 각각 움켜쥐고 허리를 거칠게 들이민다. 퍽퍽퍽- 하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퍼지며 예린의 몸이 출렁거린다. 낮게 매달아놓은 희미한 랜턴에 비춰진 그녀의 몸은 창백하리만큼 하얗다. 

끄음..... 한석 씨이.... 하악.....

신음을 애써 참아내는 예린을 보면서 더 괴롭히고 싶어진다. 그녀에게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여태까지 내 곁을 지켜주고, 엄마를 보살펴주었으며, 무리한 부탁임에 틀림없는 일까지 기필코 해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좋은 후원자였다. 그러나 쓰레기같은 난 그런 그녀에게 감사하기는 커녕 더 많은 것을 내놓으라며 이렇게 그녀를 범하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한 비난, 예린에 대한 애증, 임필복에 대한 분노, 리사에 대한 미안함....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하얗게 타버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있는 건 외딴 산중에 지어진 가건물 안에서 저항할 수 없는 입장의 여자를 덮치고 있는 성욕 덩어리 뿐이다. 

하으....음...... 한석 씨......

오랜만에 맛보는 여자의 육체는 실로 마약과도 같았다. 늘 허공에 붕 떠있던 기분의 내가 악착같이 땅 위에 달라붙어 공이질을 해댄다. 흘러내리는 예린의 짧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가느다랗지만 단단해보이는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며 손으로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움켜쥔다. 애정을 담기에는 너무 거친 애무였지만 쫄깃하기 그지 없는 그녀의 안은 애액을 철철 흘리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그녀가 흥분하고 있다는 신호는 아닐 것이다. 거칠기 짝이 없는 살몽둥이의 폭력적인 난입에서 음부를 보호하기 위한 윤활액이겠지.

하아악- 하윽.... 하앗! 하으....음...... 한석 씨......

어느 순간부터 예린은 자신을 억누르지 않았다. 비명처럼 터져나오는 그녀의 새된 소리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 내 가슴을 후벼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날 억제하지는 못 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날 부르며 날 찾았다. 멈추어 달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두 다리는 내 엉덩이를 감싸고 있었다.

흐아악.... 흐엉..... 하악.....

사정이 임박한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내 입술이 닿자 그녀는 입을 가득 벌려 내 입술을 삼킬듯이 빨아들이며 혀를 얽혀 왔다. 짜르르한 감촉과 함께 제 일파, 제 이파의 사정이 그녀의 안으로 쏘아졌다. 

커헉....억.....

그녀의 몸을 부둥켜 안고 한참을 그대로 경직해 있었다. 뜨거웠던 몸이 점차 식어간다. 하나로 붙어 있던 몸이 떨어진다. 그녀에게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아래쪽에 무언가 꽤나 흥건하다. 몸이 식어가니 머리도 차분하게 식어간다. 예린의 알몸을 내려다보면서 방금 전 내 행동이 급격하게 후회되었다.

미안해. 예린 씨....

그러나 예린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런 식으로 사과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면도도 제대로 못하고 지내는 터라 내 턱을 까실까실했다. 그 부분을 쓰다듬으며 예린은,

이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나마.... 조금이라도 마음이 풀리셨다면, 언제든 저를 이용해주셔도 됩니다.

라는 소릴 한다. 이용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사람을 이용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용이라니. 무슨 말을.....

그러나 예린이 고개를 들어 내게 입을 맞추었기에 나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길고 긴 키스를 마치고 예린은 입술을 떼내더니 내게 귓속말을 한다.

지금도... 지금 이 순간에도 복수하고픈 마음이 있습니까? 정말로?

 ........

바로 대답하지 못 했다. 솔직히 그랬다. 남자라는 생물은 사정 직후에는 모든 것이 귀찮은 법이다. 천하일미의 음식이라도, 천상의 미녀라 할지라도.... 일단 사정하고 나며 그것 모두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하물며 복수라니. 예린은 손을 뻗어 내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까 물어보신 거에 대답하겠습니다. 사실 전....

도로 누워버린 그녀를 따라 나도 따라 엎드린다. 예린이 선글라스를 벗고 얼굴을 내 가슴에 묻었다.

사실 전...... 한석 씨 명령에 더 따르고 있습니다. 이런건.... 이런건 리사 아가씨는 시키지도 않을 거라구요.

 예린......

나도 손을 뻗어 그녀를 꼬옥 안아준다. 내 품 안의 그녀는 여느 때보다도 작고 연약하게 느껴졌다.

새벽에 산을 내려왔다. 뒤를 돌아본다. 거기에는 밤새도록 내 아래 깔려 거듭 들뜬 신음을 흘리던 예린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올 때 그녀의 재킷을 들고 왔다. 그 안에는 그녀의 차 키와 약간의 돈이 들어있었다. 산을 벗어나 근처 도로에 세워둔 차에 올라탄다. 시동을 걸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푼다. 기어를 변속한다. 핸들을 틀어 서울 방향의 도로에 올라탄다. 액셀을 밟았다. 예린에게는 몹시 미안하지만 그래도 난 가야한다.

지난 밤, 내 품에 안긴 예린에게서 리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를 보고 싶어하면서도 병든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망을 가진 리사의 이야기를 예린은 차분하게 꺼내놓았다. 내가 임필복에 대한 복수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리사는 예린에게 서포트를 지시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빠른 회복을 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리사도 내가 빨리 회복되길 바란 모양이다. 병이 얼마나 깊은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도 시간이 많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말 내가 회복이 다 된다면 그때까지 자신도 어떻게든 낫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겠노라고 리사가 말했다고 한다. 예린이 전해주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내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그렇지만 나는 내 마음 속에 존재하는 어둠을 그냥 외면할 수가 없었다. 리사에게도, 예린에게도.... 심지어 우리 엄마에게도 미안하지만 별 도리가 없다.

한참을 달려 서울에 도착했다. 필복의 회사 근처에서 잠복을 시작했다. 녀석을 미행하다가 혼자 있게 되면 반드시 처리하고 말겠다는 다짐을 한다. 시간이 흐르고 녀석의 차가 회사 주차장을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너무 바짝 붙지 않게 주의하면서 녀석의 뒤를 따른다. 도심으로 들어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천만다행으로 녀석의 차는 외곽으로 향했다.

도심을 벗어난 필복의 차는 조금 더 외곽지역으로 나아가 어떤 주택가에 도착했다. 몇 번이고 놓칠 뻔했으나 간신히 따라붙었다. 단독주택이 있는 집 앞에 차를 세우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금 떨어진 골목에 차를 세운다. 차에서 내려 녀석이 들어간 집을 확인한다. 단층짜리 양옥이었는데 좁은 마당이 딸려있었다. 주위를 확인하고 뒷담을 넘어간다. 매일 같이 타던 돌벽에 비하면 여긴 장애물도 아니었다. 단숨에 매달려 후다닥 뛰어넘는다. 자세를 낮추고 집으로 다가간다. 커튼이 쳐진 창 가까이 붙는다. 몸이 많이 드러나지 않게 주의하면서 창 안의 동정을 살폈다. 거실인 모양이었다. 필복이 소파에 앉아있는게 보였다. 만약 녀석이 혼자 있다면 집으로 쳐들어가야 하나 고민했다. 일단 내부의 소리를 들어보기로 했다. 몸을 옮겨 환기구 쪽에 귀를 바짝 대고 있자니 희미하게나마 안의 소리가 들려온다. 필복이 부엌 쪽을 향해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온 건가? 응? 허허허.

너털웃음. 그러나 그 웃음이 나에겐 너무도 소름 끼치게 여겨진다.

이리 좀 와서 앉지? 간만에 보는 건데 와서 서비스도 좀 해주고.

태도를 가만히 보니 옷도 벗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자기 집이 아닌 모양이다. 그럼 대체 여긴 어디지? 누구한테 말하고 있지? 말투가 엄청 편한데?

아직 규호 올려면 시간 좀 있는데 한 판 뒹굴고 있을까? 응? 어때?

느글거리는 저 목소리에 토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나저나 규호라니....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설마? 난 몸을 옮겨 거실 창문을 벗어나 부엌 쪽 창으로 다가간다. 작은 창이라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각도가 좋지 않다. 간신히 자세를 바꿔보니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옆모습이 보였다. 세상에나..... 

너와 나는 대체 어떤 연으로 맺어진 걸까. 이것이 단순히 우연일까. 우연이 겹치고 겹쳐 이루어진 모양을 세상은 인연이라 부르지 않던가. 난 지금 아찔함마저 느끼고 있다.

너와 내가 처음 만난 건 순전히 나의 착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도 사정이 있었기에 너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받아들여 하룻밤을 함께 보냈었다. 그리고 헤어졌다. 다시는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너와 나는 바로 다음 날 다시 만났다. 약속도 하지 않았고,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 들어간 술집 화장실에서 그렇게 마주치고 다시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헤어졌다. 다시는 볼 일이 없다는 생각에 너는 자신의 치부까지 이야기해 버렸다.

그리고 너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바로 내 옆 집에 이사 오면서 말이다. 거기서 결코 잊지 못한 관계를 가졌지만 너는 다시 내 곁을 떠났다.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위해. 난 그 결혼을 축복해 주었다.

그리고 임필복. 날 죽이려던 그 놈을 죽이려고 내가 독을 품고 나선 이 길 위에서 나는 너를 이렇게 다시 마주한다.

어떻게 내가 너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는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부엌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지혜였다. 나의 첫 여자. 내가 처음으로 고백했다가 차인 여자. 내가 처음으로 결혼식에 직접 가서 내 이름으로 축의금을 낸 여자.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아니다. 필복을 죽이려던 나의 필사적인 마음 한편에는 예린이 말해주었던 지혜와 필복의 관계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 결국은 만날 운명이었다.

왜 이렇게 대답이 없어? 서방님이 부르는데 말야.

필복이 부엌으로 들어오는게 보였다. 지혜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싱크대에 서서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필복이 지혜의 뒤로 바싹 붙는다.

또 구멍을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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