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데없는 부탁이긴 하지만 딱히 거절하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예쁜 아가씨의 부탁인데다가 무엇보다 난 지금부터 시간이 많다!
근데 그 누구냐... 수행원 예린 씨는 안 보이네요?
아, 부산에서 일이 있어서요. 어제 내려갔어요.
그런가요.
리나와 나는 전철역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에 동기들과 한번 놀러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가는 길은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놀이동산이라니....
좀 뜬금없죠?
솔직히 좀 그래요.
전철이 도착해서 그녀와 난 올라탔다. 오후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제법 붐볐다. 나와 리사는 문 옆에 봉이 있는 곳으로 가서 섰다.
전부터 서울에 가면 그런데 가고 싶었거든요. 근데 예린 언니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고 마리는 놀이기구라면 질색을 하거든요.
마리가요?
정말 의외였다. 녀석이라면 롤러코스터 맨 앞 자리에 타고도 더 빨리 안 달리냐고 성화를 부릴 것 같은데 말이다.
문득 깨달아보니 예린 언니도 그렇고 마리도 없는 시간은 정말 오랜만이더라구요. 그래서 뭐가 좋을까 생각해보니 셋 중에서 저만 좋아하는 놀이동산에 가는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 예....
근데 아무래도 혼자 간다는 건....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자니 리사가 그제서야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아참. 혹시 한석 씨 놀이기구 안 좋아하거나 그러신 건 아니죠? 제가 괜히 모신 건가요?
그럴리가요. 예전에 친구들이랑 돈 모아서 가기도 하고 그랬는데요.
어머, 다행이네요.
뭐가 그리 좋은지 리사는 다시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는 창 밖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노라니 머리카락에 풍겨오는 샴푸 냄새가 참으로 그윽하다. 허리까지는 아니지만 등의 중간까지 내려온 생머리는 몹시 윤기 있었고 결코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수수하지도 않은 디자인의 원피스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허락만 해준다면 가만히 뒤에서 안아주고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고 싶을 지경이다. 나는 신사이므로 그런 짓은 머리 속 상상으로만 하기로 했다. 대신 아까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한다.
근데 리사 씨.
예.
내가 부르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아까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여쭙는건데요.... 마리랑 점심 드시려고 오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그랬죠.
마리와 내가 수업을 마치고 나온 시각, 그러니까 마리를 보내고 내가 리사를 만난 시각은 거의 세 시가 다 되는 시각이었다. 그 시간에 점심이라니?
집에서 열 한시 정도에 나왔는데 헤매다보니 그때 도착한 거 있죠? 저도 참....
.....아.하하...하하아....
우리집은 학교랑 가깝다는 이유로 내가 웃돈을 더 주고 계약한 집이었는데.... 내 걸음으로 가면 이십분도 안 되어 현관에서 학관까지 도착할 정도의 거리였다. 그런 거리를 대체 어떻게 얼마나 헤매면 네 시간 만에 도착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녀를 처음 본 것도 아마 그녀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혹시 길을 잘 못 찾으시나봐요?
네. 어릴 때부터 그랬는데도 잘 안 고쳐지더라구요. 게다가 서울은 복잡하기도 하구요.
아, 예에...
서울이 복잡하다곤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라고 외치고 싶었다. 정말 상상 이상의 길치인가 보다. 비록 평일이라 붐비지는 않을테지만 그래도 놀이동산에 가면 결코 그녀를 시야에서 빠트리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했다. 한번 잃어버리고 어디 있나 찾아보면 전라도에 가 있거나 하진 않겠지? 걱정이 많이 되는데 아예 양해를 구하고 줄이라도 하나 매어두는게 안심이려나. 미아방지용 그런 거 있잖는가.
참, 지난번에 그 아가씨랑은 잘 지내고 계시나요?
예? 아... 그게 좀..... 잘 안 되었어요.
아마도 명희를 말하는 거겠지. 나는 씁슬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내 가방에는 아직도 삐삐가 들어있다. 그 날 이후 단 한번도 울리지 않고 있지만 습관처럼 넣어가지고 다닌다. 리사는 몹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어머, 저런.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얼굴을 내게 가까이 대며 말했다.
그러면 말이에요.
예.
안 그래도 작은 목소리인데 리사는 목소리를 더 낮춘다. 거의 속삭이듯이 말한다. 귀를 기울여야 했다. 내 귓가에 그녀의 숨결이 와닿는다.
그럼 지금은 솔로시죠? 누군가 애인으로 입후보해도 괜찮은 거죠?
옛?
뜻밖의 이야기에 깜짝 놀라 그녀의 얼굴을 바로 본다. 싱긋 웃는게 놀리려고 하는 소리인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 무슨 뜻으로 한 소리냐고 물어보려고 하는데 때마침 환승역에 도달하여 뭔 놈의 인간들이 우루루 들이닥친다. 사람들에게 밀린 리사가 한쪽으로 밀린다.
꺄~
리사 씨! 이쪽으로....
이번 역에서 열린 문 반대편 문쪽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도처럼 밀어닥치는 인간들은 장난이 아니다. 그들에게 리사가 휩쓸려 가려던 것을 재빨리 구해낸다. 실례되긴 하지만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들어 잡아당긴다. 문 옆에 있는 사각의 공간에 그녀가 서 있게 하고는 대각선으로 비껴 서서 그녀를 커버링한다. 틈틈이 농구하면서 익혀온 맨투맨 마크의 요령대로 등으로 사람들을 버텨낸다. 등 뒤로는 사람들의 압력이 가해지고 있었고 앞으로는 리사와 너무 바짝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팔뚝에 힘을 주어 버텨낸다. 너무 많은 사람에 기가 질린 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서울엔.... 사람이 많긴 확실히 많네요.
네, 그렇죠?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팔뚝 힘만으로 버티기에 사람들의 무게는 점점 더해진다. 어쩔 수 없이 리사쪽으로 내 몸이 점점 더 다가선다. 리사와 나와의 간격은 이제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을 지경이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 근육에 쥐가 날 지경인데 리사는 꽤나 태평한 표정이다. 오히려 좋아하는 표정이려나.
후후. 왠지 득 본 기분인데요?
네에?
남은 힘들어 죽겠는데 왜 웃고 있나요, 이 아가씨야! 몸은 점점 더 밀려 이미 다리쪽은 그녀에게 바짝 붙은 꼴이 되었다. 내 가슴과 그녀의 얼굴은 이제 5센티미터도 안 될 정도의 간격 뿐이다. 그녀가 내뱉는 숨결이 내 가슴에 와닿고 있고 그녀의 정수리가 내 턱 밑까지 바로 다가왔다.
리사 씨. 이제 다섯 정거장만 더 가면 내리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어머, 겨우 다섯 정거장 뿐인가요?
예에?
난 그녀에게 실례가 되지 않도록 안 닿으려고 발악을 하고 있는데 오히려 리사가 앞으로 다가와 내게 붙는다. 언젠가 딱 한번 아주 짧은 순간 스쳐지나가듯 보긴 했지만 암튼 그때 확인한 결과 결코 작지 않은 사이즈의 가슴이 내 가슴 바로 아랫 부분을 가볍게 누른다. 원피스의 네크라인 너머 옅은 빛의 브래지어가 엿보인다. 브래지어에 감싸인 가슴살의 윗부분이 눌린 모양이 몹시도 뇌새적이다. 리사는 자신의 두 손을 들어 내 허리에 가볍게 얹었다. 허거덩. 이렇게 하면 거의 끌어안고 있다 시피하는 모양새잖아. 내 배에 와닿는 뭉클한 무언가가 저를 몹시도 흥분시키고 있는데 이래도 정말 괜찮겠습니까, 리사 씨?
그녀는 다리를 모으고 서 있고 난 그 바깥쪽으로 다리를 벌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바짝 붙어버리니 내 쥬니어의 바로 앞에 그녀의 허리가 위치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자극, 어쩔 수 없는 혈류의 흐름, 어쩔 수 없는 이 놈의 발기!!!
마리한테는 비밀이에요. 알았죠?
예.....
뭘 비밀로 하라는 걸까. 놀이동산에 놀러간 거? 아니면 지하철에서 진상짓 하는 연인들처럼 끌어안고 부비부비하고 있는 거 말입니까. 사람들에게서 리사를 커버하느라, 그리고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녀 때문에 한창 혼란스러워 아까 했던 소리가 뭔 소리냐고 다시 물어볼 기회를 놓쳤다. 몇 정거장 더 가서 우리는 내릴 수 있었고 밖으로 나가 놀이공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버스는 좌석버스여서 아까같은 밀착은 벌어지지 않았다. 난 아직도 가슴이 벌렁벌렁 하다.
와아!!
자유이용권을 끊고 안으로 들어가자 리사는 평소의 조신함을 벗어던지고 활짝 웃으며 만세를 하듯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이내 내 팔을 잡아 끌며 호기롭게 외친다.
한석 씨! 우리 저거 타요!
천천히 가도 돼요.
평일의 놀이공원은 확실히 한산했다.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휴일때의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어지간한 놀이기구는 5분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탈 수 있었다.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는 리사의 모습은 평소의 매력과는 또 다른 활달한 모습을 보여주어 무척 보기 좋았다.
역시 자매는 자매인가....
독수리 요새 다섯 번, 토마호크 일곱 법, 바이킹 여섯 번째 탑승을 하고 나서도 다시 또 독수리 요새를 타러 가자고 나를 이끄는 리사를 보면서, 나는 그녀가 단지 마리와 얼굴만 닮은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마리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자전거로 달려왔던 일이 떠오른다. 종류는 다르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은 강골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이미 아까 전부터 기진맥진한 참이다.
리....리사 씨. 일단은 저녁부터 먹지 않을래요? 제가 배가 고파요.
그럴까요?
게다가 리사 씨 아까 점심도 안 먹었을 거 아니에요.
어머, 그러고 보니 그랬네요.
노는데 정신이 얼마나 팔리셨으면 배도 안 고프셨습니까.....
프리패스는 그녀가 샀기에 저녁은 내가 사기로 했다. 각종 인형탈과 풍선으로 장식되어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함께 들어갔다. 이런 곳에서의 메뉴는 잘 모르기 때문에 리사에게 주문을 일임했다. 그녀는 익숙하게 2인분의 요리를 주문했다. 식사를 기다리면서 오늘 리사에게 느꼈던 점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오늘의 리사 씨를 보고 있노라니..... 정말 마리랑 쌍둥이라는게 실감이 나요.
후후. 제가 좀 많이 들떴지요? 너무 간만이라서요.
그녀는 멋적게 웃으며 늘 그렇듯 얌전하게 앉아있었지만 이미 나에게 보일 건 다 보이고 난 후다. 이제는 얌전한 척을 해도 소용없다구!
근데 제가 궁금한게 있는데, 한석 씨에게 여쭤봐도 되려나요?
뭔데요?
유진이가 누구인가요? 또 다른 애인이세요?
물을 마시고 있었다면 뿜을 뻔 했다. 다행히도 입에 머금고 있던 것은 없기에 뿜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힐 뿐이다.
그리고 지혜라는 분도 있었고... 효진이라는 분도 있었고..... 한석 씨는 여자가 굉장히 많은가 봐요?
손으로 꼽아가면서까지 그녀는 내 주변의 여자들에 대해 하나하나 언급하고 있었다.
켁..... 아니, 대체 그 이름들은 전부.....
마리가 이야기 하던 걸요?
그...그렇군요....
나는 황급히 유진이는 과외하는 애고 지혜는 지금 리사네 집에 먼저 살던 입주인이며 효진은 그녀의 친구였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아무 사이 아닙니다요.
후후, 그래요? 무슨 사이라고 해도.... 뭐 딱히 상관없는데요?
네?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마침 음식이 나와서 잠시 대화가 끊겼다. 리사는 음식을 먹으며 이 다음에 뭘 탈까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타고도 또 타겠다는 건가 싶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그 이야기가 빈말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여자 정말 대단하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직 안 타봤던 것을 위주로 한 바퀴 더 돌고나니 이제 완전히 깜깜해졌다. 나는 돌아가는 시간을 재보고 리사에게 이제는 가야한다고 말해주었다.
더 놀고 싶지만 밥때 되었다고 놀이터에서 엄마에게 귀 잡혀서 끌려나오는 꼬마 아이와 별 차이 없는 표정을 한 리사를 데리고 나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버스에 올라타자 그녀는 곧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나란히 앉아 가는 버스였는데 내 어깨에 기대오는 리사의 머리가 향긋한 냄새를 풍겨온다. 스르륵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내 옆구리를 간지럽힌다. 버스에서 내리고도 비몽사몽해 하기에 지갑의 출혈에 눈물을 삼키며 택시를 잡았다. 동네 입구에 도착해서 그녀를 흔들어 깨웠지만 여전히 반쯤 잠들어 있다.
리사 씨, 리사 씨! 다 왔어요. 일어나세요.
흠냐... 흠냐.....
취한 사람도 아니고 .... 하아....
별 수 없이 그녀를 들쳐메고 동네 골목을 지나 빌라에 들어선다. 뒤에 두른 손이 엉덩이에 닿지 않게 주의한다고는 했지만 내 등을 부드럽게 압박하는 두 개의 언덕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꾸 흘러내리려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엉덩이와 허벅지를 단단히 붙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마리야! 마리야!
자꾸 흘러내리려는 리사를 추스리며 간신히 마리를 불러낸다. 잠시 후, 나오라는 마리는 나오지 않고 예린이 나온다.
마리 아가씨는 지금 부재중이...... 이런.
예린은 얼른 나에게서 리사를 받아들었다. 공주님 안기라니, 힘도 좋군. 이 여자. 난 그 정도 거리 오는데도 땀이 뻘뻘 나는데. 예린은 나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리사를 내려놓고 돌아오는 모양이다. 그녀는 자켓 품안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 여자는 집에 있으면서도 선글라스에 정장 차림이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다만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있을 경우 제게 연락주십시요.
그래요? 알겠어요. 꼭 그러죠.
예린이 건네준 것은 명함이었다. 경남산업개발이라는 상호 아래 기획부장 성예린이라는 이름이 박혀있었다. 뭐냐. 나랑 비슷한 나이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데 부장?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은 휴대전화를 늘 켜놓고 있습니다.
예린은 손가락으로 명함 하단에 있는 한 번호를 가리켰다. 017로 시작하는 10자리의 번호가 씌여있었다. 휴대전화라니. 이 여자 돈도 많군. 아니, 리사네가 돈이 많은 건가.
그럼 이만.
예린은 고개를 까딱 숙여보이고는 문을 닫았다. 나도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어제의 피로가 아직 남아 있어서 침대에서 꽤나 미적거렸다. 선영의 과외는 한 시부터 시작이었기에 오전 내내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지냈다. 어제,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그저 조신하고 얌전하기만 한 줄 알았던 리사였는데 그녀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해야 하겠다. 물론 예전에 과사에서 보여주었던 폭발도 있었고 말이다. 게다가 예린.... 평상시에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 쓰고 있는 거야 그런건가 싶었는데 집에 있으면서도 그런 차림이라니. 놀랍다. 나가면서 점심도 먹고 선영이 과외도 가야 해야 겠다가 싶어서 침대에서 나와 옷을 꿰어입기 시작한다.
띠리리리리-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받아보니 엄마 목소리였다.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지금 버스 타러 가니께 이따 오후쯤에 도착할게다.
에엑?
방 안을 황급히 돌아본다. 이곳저곳 널려있는 옷가지와 대충 쑤셔박아 넣은 빨래감들. 먹다 버린 빵봉지와 우유팩등이 널려있는 방안의 꼴이 새삼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현기증 정도이니 우리 엄마는 이걸 보면 아마도 졸도를 할 테다.
갑자기 뭔 일이야?
갑자기라니. 이번주 토요일이 니 생일 아니냐. 올라가서 미역국이라도 끓여줄려 그러지.
아아. 그러고 보니....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틀 후가 내 생일이었다. 천리안을 가진게 분명한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어진다.
니 또 집안 꼴 엉망으로 해놓고 사는 건 아니지?
아...아냐.
지난번에 이 에미 식겁했었응께 또 그랬다간 당장 방빼라고 할껴.
알았어. 몇시 버스야?
엄마가 불러주는 버스 시간을 보고 역산을 해본다. 으아...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르다. 전화를 끊고 나서 대충 쓸어담아 정리를 해보았지만 이 방안의 꼴이 몇 분 정리한다고 될 모양새가 결코 아니다. 한참동안 고민하던 나는 전화기를 들고 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난번에 미리 받아둔 전화번호가 있었다.
여보세요?
네. 누구시죠?
저, 한석인데요....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런데 과외를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될까요?
급한 일?
자다깼는지 선영의 목소리는 나른나른했다.
예,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어서....
알았어요. 사정은 다음에 듣죠.
감사합니다.
선영은 의외로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그러고서 이젠 유진이네 집으로 전화를 건다. 신호가 한참이나 가고서야 누군가 전화를 받는다.
네에.....
아, 저어, 유진이 어머니?
하암.... 누구시죠?
역시나 이 시각에는 유미가 집에 있었다. 인사를 하고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자 그쪽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돌아온다.
어머. 선생님이셨구나. 근데 어쩐 일이세요?
아, 예... 지금 집에 손님이 오시기로 되어있는데 집이 엉망이라서요.
저런. 얼른 준비하셔야 겠네요.
예, 그래서 아무래도 유진이 과외를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바쁘거든요.
전화를 하면서도 발로는 걸레를 밟아 바닥을 대충 슥슥 닦아보고 있었다. 으으... 걸레로 닦은 부분이 더 더러워 보이는 건 착각이려나.
고양이 손이라.... 호호. 그럼 제가 고양이 한 마리 보내드릴까요?
네?
조크에요, 조크.
아, 예....
혹시 선생님 댁이 K대학 뒤에 있는 OO동 맞죠?
네? 맞습니다만....
음... 여기 주소 적어놓은게 있네요. 알았어요. 유진이에게는 제가 말해두죠.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사방에 있는 쓰레기를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쓰레기 봉투를 찾아다가 쓰레기를 주워담았다. 옷가지는 그러모아 세탁기에 쳐넣었고 어디 쳐박혀 있었는지 지난 몇 주간 구경도 못 했던 빗자루를 간신히 찾아다가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자욱한 먼지가 일고 걸레로 닦아내는 부분마다 장판 본래의 색이 살아났다. 물건을 정리한답시고 들쑤시다가 선반도 엎어뜨리고 아주 장난이 아니다.
흐아......
이 정도면 대충 되었겠다 싶어서 허리를 펴고 방을 둘러본다. 그런데 아무리 객관적으로 봐도 꾀죄죄한 꼬라지는 여전했다. 일단 쓰레기를 버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현관을 열고 나갔다. 집 근처 버리는 곳에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려는데 리사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한석 씨. 좋은 아침이에요.
그...그런가요. 전 그닥 좋지 않네요.
왜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그게요오....
뒤통수를 긁적이며 지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엄마가 오기로 했는데, 방 너저분하게 하고 있으면 잔소리만 2박 3일 동안 듣거든요. 그래서 지금 청소하느라 정신없어요.
어머, 그러시구나.
리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제가 도와드릴까요?
그녀가 고양이는 아니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았다.
어머나.
──────────────────────────
*
이제사 고백하지만 제가 편애하는 캐릭터는 리사였습니다.
나머지 애들은 기가 너무 쎄서... 휴우....
남자 혼자 사는 방에 여자를 들이는 거라 처음에는 거절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어차피 내 방에 여자가 일이 없던 것도 아니고 .... 아까 유미에게도 말했다시피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구세주 같은 분이라니. 그녀 뒤에서 후광이 다 보일 지경이다.
부탁드리겠습니다아....
후후. 맡겨만 주세요.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인 리사는 준비할게 있다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방으로 돌아가 있으려니 문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한석 씨! 문 좀 열어주세요.
네!
황급히 현관을 열어보니 방금 가정 교과서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양새의 리사가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진공청소기를 얼른 받아들었다. 그녀는 내 방으로 들어와 한 바퀴 둘러보더니 청소 시작을 선언했다.
그럼 시작할까요?
....뭐랄까. 꽤나 본격적이시네요.
후후, 그런가요?
홈드레스 위에 두른 앞치마는 그렇다 치더라도 삼각천으로 만든 머리수건이라니. 난 저런 건 중학교 시절 배웠던 가정 교과서 삽화 말고는 못 본 거 같은데.... 모르긴 몰라도 리사는 겉모습에 꽤나 신경을 쓰는 타입인 거 같다. 그렇다고 겉멋이 들었다거나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 적재적소의 의상이랄까. 의상을 갖추면서 일에 임하는 마음 가짐을 다진다고나 할까. 흐음. 나중에 누가 아파서 드러누웠을 때는 간호복이라도 입고 와서 간호하는 거 아닐까 몰라. 궁금한데 아프다고 하고 한 번 드러누워 볼까?
아까 보니까 쓰레기는 다 버리시는 거 같던데. 그럼 물건은 지금 어느 정도 정리 된 거죠?
그런 셈이죠.
그러면 일단 이 청소기로 창틀이랑 바닥을 전부 밀어주세요. 전 부엌을 정리할게요.
옙.
리사의 지시를 받고 부리나케 움직인다. 진공청소기로 밀어버리니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르고 깔끔하다. 구석구석 밀고 있으려는데 리사가 내게 손짓을 하고 있는게 보인다. 청소기를 끄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세요?
저, 한석 씨.
그녀는 꽤나 황당하다는 표정, 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내게 묻는다.
예?
혹시 최근에 집에 도둑이 들거나 아니면 부부싸움을 하신 적이 있나요?
.......도둑은 들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는데 부부싸움이야 상대가 있어야 하지요. 그건 왜 물으세요?
부엌에 선 리사가 찬장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어떻게 부엌에 그릇이 하나도 없죠? 컵 말고는 그릇이나 접시가 하나도 없는데요? 이런 것만 있구요.
그녀가 내민 것은 납땜할 때 쓰는 인두기랑 PCB판넬이었다. 아아. 마이크로보드 프로젝트 수업 들을 때 필요한 건데 저게 저기에 있었군. 난 그녀가 내민 것을 받아들어 갈무리 해놓고 대답했다.
저희 집에는 원래 그릇이 없어요.
어머? 왜요?
왜긴요... 집에서는 밥을 안 해먹으니까요.
전에도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갔던 기억이 나는데 말이다. 그러나 리사의 반응은 그냥 웃고 넘겼던 지혜보다도 더 엄했다. 리사는 허리에 두 손을 얹고 큰 소리로 말한다.
안 돼요!
네?
그럼 안 된다구요. 사람이 꼬박꼬박 식사를 하고 다녀야지요. 분명 대충 굶고 맨날 밖에서만 사먹고 다닌다는 거 아니에요?
그....그렇지요......
얌전한 그녀라고 생각했는데 기세가 꽤나 무섭다.
밖에서 파는 것들이 얼마나 해로운 게 잔뜩이라구요. 앞으로는 꼭 집에서 식사 챙겨드세요. 만약 반찬이나 밥 모자라면 저한테 말씀하시구요.
예에....
어쩐지 네, 엄마라고 대답해야만 할 것 같다. 그나저나 그쪽은 동생이랑 잡지에서 본 맛집 찾아가지고 다니던 분들 아니었나요? 이런 반론을 할 틈도 안 주고 훈계를 마친 리사는 걸레를 빨아오더니 구석구석 닦기 시작했다. 나도 걸레 하나를 들고 이곳저곳을 닦아나간다. 역시 여자 손이 닿아서 그런가. 쓰레기장 되기 일보 직전이었던 집이 점점 사람 사는 곳의 모양새를 갖춰간다. 이 정도면 엄마의 잔소리를 충분히 피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무렵, 리사는 옷장을 열어보더니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한석 씨!
넷!
선임의 부름을 받은 쫄따구마냥 후딱 달려갔다. 리사는 살짝 인상까지 찌푸려가며 옷장 바닥에 쌓여있는 옷가지들을 가리켰다.
이건 대체 뭐죠?
......한번만 입은 옷들인데요.
빨래가 몹시 귀찮은 나의 옷 분류법은 다음과 같다. 한 번 입고 벗은 옷은 잘 두었다가 다음에 다시 입는다. 두 번 입은 옷부터는 냄새를 맡아보아서 심하면 빨고 안 심하면 다시 입는다. 입을 옷이 없어질때까지 그렇게 하기 때문에 지금 내 옷장에 걸려있는 옷은 점퍼 하나 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바닥에 쌓여있었다. 지금 그녀가 가리킨 것은 내가 한번 입고 벗어둔 옷을 모아둔 더미였다.
그럼 빨랫감이잖아요. 왜 안 빨고 둔 거죠?
.....다시 입을라고...
한석 씨!!!
아이고, 깜짝이야. 애 떨어지겠네. 내가 찔끔 놀라있는 사이 그녀는 그 빨랫감을 한데 모아서 한꺼번에 안아들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집 세탁기는 내가 아까 넣고 돌린 세탁물이 아직 끝나지 않고 여전히 작동중이라 넣을 곳이 없었다. 리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내게 말했다.
이건 저희 집에서 빨아올게요. 청소는 이제 다 끝난 거 같구요... 이제 남은 건....
리사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팔을 들어 몸을 가려보았지만 그녀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석 씨만 씻으면 되겠네요. 지금 입고 있는 옷 싹 벗어서 저 주시구요, 샤워하신 후에 옷 갈아 입으세요.
그러면 갈아입을 옷이 없는데요.
하아. 그래도 일단 다 벗고 씻고 계세요. 저희 집에 한석 씨에게 맞는 옷이 좀 있을 거에요. 속옷은 있으시죠?
예.
그럼 얼른 벗으세요.
엄마야. 이 아가씨가 왜 이렇게 진도를 빨리 빼시지.
지금요?
이거랑 한꺼번에 빨아야죠.
예에....
리사가 얌전하고 조용조용한 여자라고 생각했던 거 다 취소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폭발하는 걸 이미 본 적 있는데도 왜 나는 그녀가 얌전하다고만 생각했을까. 끄응.... 난 욕실로 들어가서 옷을 다 벗고 문 앞에다 내놓았다. 문틈으로 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다 돌려놓고 한석 씨 입을 옷 가져다 드릴게요. 구석구석 깨끗이 씻으세요.
예에....
다시 한번, 네, 엄마라고 대답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지적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생각해보면 방안 청결상태도 상태와 마찬가지로 내 몸의 청결상태도 엄마가 늘 잔소리하는 대상 중에 하나니까 말이다.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씻고 닦는다. 한참동안 신경써서 구석구석 비누칠을 한다. 이제 헹구기만 하면 된다. 밖에서 문소리가 들린다. 리사가 돌아왔다고 생각한 나는 욕실 문에 대고 외쳤다.
리사 씨! 옷은 욕실 문 앞에 두세요. 그럼 제가 알아서 입을게요!
알았다는 대답이 들려올 줄 알았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다. 인기척은 있는데... 혹시 못 들었나 싶어 다시 외친다.
리사 씨! 옷은 욕실 문 앞에.....
그런데 그 때 욕실 문이 벌컥 열린다.
아저씨. 지금 누구한테 하는 소리죠?
으악!
갑작스럽고 난데없는 데다가 예상치 못 했던 인물의 등장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비누거품이 가득한 샤워타올로 황급히 다리 사이의 중요한 부위를 가린다. 몸을 반쯤 돌려 내 나신의 전면이나 후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고개만 돌려 문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교복 차림의 유진이 문을 열고 서 있었다.
니.....니가 여긴 웬일이야!
왜요? 제가 오면 뭐 곤란한 일이라도 하고 있었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지. 곤란하다. 몹시도 곤란하다! 그러니 제발 빨리 문부터 닫어!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죠?
임마! 그럼 넌 목욕하고 있는데 누가 문 갑자기 열면 안 놀래?
하긴... 그렇기도 하군요.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알아들었으면 빨리 문부터 닫아주지 않을래?
알았어요.
문이 닫힌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빨리 비누거품을 씻어내기 위해 샤워타올은 내려놓고 샤워기에 손을 뻗었다. 그 때,
근데 말예요.
으악!!!
지금 손에 들린 건 샤워기 뿐이다. 몸을 다시 돌려 손과 샤워기로 중요 부위를 가린다.
아까 누구한테 말한 거였어요? 리사? 그게 누구에요?
그건 좀 이따가 나가서 이야기 하면 안 될까?
왜요? 지금 말하기 곤란해요?
곤란하다니까!!! 너어! 이젠 문 열지마! 내가 나갈 때까지!
쳇. 알았어요.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문을 닫았다. 나는 왠지 순결을 뺏긴 처녀의 기분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었다. 한숨을 푹푹 쉬려는데 그 때, 또!
사실 가릴 필요 없어요. 예전에 다 본 건데요. 뭐.
임마!!!!!
기어이 폭발한 나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손에 집히는대로 뭐 하나를 들어다가 열린 욕실 문으로 내던졌다. 그러나 그게 문에 닿을 때쯤에는 이미 유진은 혀를 살짝 내미는 것까지 잽싸게 마치고 문을 닫은 터라 샴푸통은 녀석의 머리통을 맞추질 못하고 문에 부딪힌다. 샤워기를 최대한 크게 틀어 몸의 거품을 황급히 씻어낸다. 욕실에 미리 가지고 들어온 팬티를 입는다. 지금 당장 욕실 밖으로 뛰쳐나가서 유진에게 헤드락이라도 걸어버리고 싶었지만 아무리 마음이 그렇다고 해도 속옷 차림으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욕실 문 앞에서 씩씩거리고 있는데 다시 현관 문소리가 들린다.
어머, 넌 누구니?
리사의 목소리.
사투리 아줌마.... 당신이 여긴 또 왜?
이건 유진의 목소리다. 나는 황급히 문 밖을 향해 외쳤다.
리사 씨! 옷 좀 빨리 주세요!
어머, 제가 좀 늦었죠?
문을 살짝 열고 손을 내밀자 리사가 내민 옷가지가 잡혔다. 티셔츠와 면바지였다. 최대한 빨리 꿰어입고 밖으로 나간다. 냉랭한 표정의 유진과 어리둥절한 표정의 리사가 대면하고 있었다. 난 유진에게 소리쳤다.
임마! 너 장난 좀 작작해!
아, 그건 됐구요. 아저씨. 이 아줌마는 학교 후배라고 하지 않았어요? 왜 집에까지 들어오는 거죠?
부르지도 않은 니도 들어왔잖아! 라고 외치고 싶었는데 리사의 대답이 먼저였다.
아아. 혹시 네가 유진이니? 맞지?
그제서야 유진도 뭔가 다르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유진이 곧바로 대답을 못하고 주저하고 있으니 리사는 환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마리 말한대로 엄청 예쁘게 생겼구나. 우리 마리랑 친하게 지낸다면서?
핫. 제가요?
유진이 어처구니없어 하는 것과는 달리 리사는 무척 기뻐하고 있었다.
난 마리 언니 리사라고 해. 마리랑 똑같이 생겼지? 우리 둘은 쌍둥이야.
아, 네에....
마리랑 대면했을 때는 꽤나 전투적인 유진이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유순하다. 신기하군. 아니지, 지금 신기해하고 있기만 할 때가 아니지. 교복 차림의 유진이 여기에 어떻게 갑자기 나타난 거지? 아직 학교 끝날 시간도 아닐텐데.
그나저나 넌 여기 어쩐 일이야?
하아... 엄마가 갑자기 학교에다 전화를 했어요.
학교에?
예. 갑자기 방송으로 교무실에 제 앞으로 전화 와 있다고 해서 깜짝 놀랐는데 갑자기 여기로 가보래잖아요. 주소 하나만 덜렁 알려주고....
고양이 한 마리 보낸다는 건 이 소리였습니까. 유진이 어머님. 저한테 조크가 아니라 거짓말을 하셨군요. 이건 고양이가 아니라 암사자 아니면 암표범이잖습니까.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급하게 왔더니 이러고 있고.... 여기가 아저씨 자취방이에요?
그래. 임마. 근데 넌 남의 집에 노크도 안 하고 그냥 막 들어가고 문 벌컥벌컥 열고 그러냐?
억울하면 아저씨도 다음에 우리집에 올때 그냥 들어오세요.
끄아아아....
요 얄미운 녀석을 콕 쥐어박고 싶은 감정이 우럭우럭 샘솟는 건 꼭 내가 성격이 드럽고 나쁜 놈이라서 그런 건 아닐거라 믿고 싶다. 정말 진심으로 믿고 싶다. 몸 안에 사무치는 격한 감정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진정시킨 것은 리사였다.
우리 이러고 있지 말고 차라도 한 잔 할까요? 한석 씨도 청소하느라 수고하셨는데요.
수고는 리사 씨가 많이 하셨죠.
일단 앉아 계세요. 제가 준비해올게요.
리사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아까 청소하며 찾아낸 앉은뱅이 탁자 하나를 거실에 펴두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온 몸에 퍼지는 피로감에 지친 내가 그 앞에 털썩 앉아버리자 방안을 둘러보던 유진도 맞은 편에 앉는다.
설마 저 언니랑 동거한다거나 그런 거에요?
아니거든.
근데 아까 그건 대체 뭐에요?
아까 그거라는 건 옷 갖다준거 말하는 건가. 나는 오늘 엄마가 오는 거랑 청소하느라 리사의 도움을 받은 일을 해주었다. 조금 창피한 이야기지만 빨래감 이야기도 했다. 그래야 옷 가져다 준 것도 설명이 되니까 말이다. 내 설명을 다 듣고도 유진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흥 거리는 소리를 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신기해서요.
뭐가?
아저씨 같은 사람도 구르는 재주가 있구나 싶어서요.
구르는 재주는....... 굼벵이가 가진 재주 아니었냐?
뭐든간에요.
몹시 빈정 상하게시리 비아냥 거리던 유진의 목소리도 리사가 돌아오자 딱 끊겼다. 쟁반에 유리로 된 주전자와 유리잔을 받쳐들고 돌아온 리사 덕분에 따뜻한 국화차를 마실 수 있었다. 유진은 제법 리사에게 겸양까지 떨어가며 조용히 차를 마셨다. 뭐지, 이 녀석. 마리한테 대하는 거랑 너무 다르잖아.
한석아~ 에미다.
현관 밖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에 잔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올 것이 왔구나... 아니, 올 분이 오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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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의 욕실 씬은, 개콘의 발레리NO를 떠올리며 보시면 되겠습니다.
내심으로.... 남자 알몸 따위는 묘사하고 싶지 않아...... ( -_-) 이러고 있었습니다.
짐 좀 받아라. 에구, 허리야....
뭘 또 이렇게 잔뜩 싸와.
니 또 암것도 안 해먹고 살거 아녀?
그래도 이렇게까지....
엄마의 몸보다 더 큰 부피가 아닐까 싶은 머릿짐을 받아든다. 엄마는 그제서야 허리를 주욱 펴며 에구구 소리를 낸다. 그 때 우리집에서 두 여자가 나와서 엄마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석 씨 어머님 되시죠?
아... 안녕하세요.
리사는 무척이나 예의바르게 인사했지만 유진은 좀 뻣뻣했다. 엄마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아들래미 혼자 사는 집 안에서 여자 둘이 튀어나오니까 놀란 모양이다. 리사와 유진의 인사를 받을 생각도 안 하고 눈을 껌뻑이며 나를 쳐다본다. 설명을 해 줄 필요가 있었다.
여긴 앞집 사는 리사 씨고 쟤는 내가 과외하는 유진이라는 애야.
그려어? 으음... 그려. 반가워요들.
엄마는 나에게서 의심 섞인 눈초리를 쉽게 거두지 않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가 바리바리 싸온 짐은 전부 먹을 것이었다. 떡이랑 전 부친 거, 산적꼬치랑 찰밥 등등.... 먹음직스러운 것들이 한 가득이다. 안 그래도 점심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나있어서 꽤나 배가 고팠다. 엄마는 기숙사의 사감 선생처럼 방안을 둘러보다가 흠 잡을 곳을 발견하지 못 했는지 감탄 어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근데 웬일이여? 집이 아주 그냥 번뜩번뜩 하네?
하하. 엄마 온다고 청소 좀 열심히 했어. 그리고 여기 리사 씨가 많이 도와줬고.
리사를 가리키자 그녀는 살짝 부끄러워 하는 기색으로 답했다.
제가 뭘요.
흐음... 그려요? 고마워요.
엄마는 뭔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리사는 엄마가 싸온 먹을 것들을 가리키며 물어보았다.
제가 이거 뎁혀다 드릴까요? 모처럼 맛있는 거 드시는데 식은 상태면 아쉽잖아요.
그럴까요? 아, 그리고 리사 씨도 같이 드세요. 그래도 되지, 엄마?
그려. 맘대로 혀.
리사가 음식들을 들고 자기 집으로 건너갔다. 양이 많아서 유진이도 거들었다. 그러는 사이 엄마는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작년 여름 방학 때 올라와보고 처음이라 여전히 낯선 듯 했다.
이건 뭐시여?
엄마가 가리킨 건 침대였다.
엉... 그게... 이 건물에 살던 사람이 이사가면서 주고 갔어.
침대 같은 건 함부로 받는 거 아녀.
응? 그래도 ... 뭐...
하이고. 야가 암것도 모르네.
리사네로 음식 배달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 한쪽에 멀뚱멀뚱 서 있던 유진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요. 남의 침대 함부로 가져오면 귀신 든다고요.
....끄아... 이게 무슨 은행나무침대냐....
야가 누구라고?
엄마는 유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유진은 엄마의 시선을 느끼고 다소 부끄러워 했다.
어, 내가 과외하는 애야. 유진이라고.....
과외를 여 와서 받는겨?
아니, 그런건 아닌데 오늘은 그냥 ..... 지나가다 들렸어.
설명하기가 참 난감했다. 얘네 엄마가 전화로 콜 해서 이곳으로 보냈습니다만 라고 하면 이야기가 너무 꼬일 것 같다. 엄마는 유진에게 엄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학상. 교복 입은 걸 보아하니 학상 맞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함부로 오고 그러는거 아녀.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제?
아, 예.....
오늘의 유진이는 어쩐지 꽤나 순했다. 나한테나 혹은 마리에게 대들던 것처럼 억세지 못 하다. 흐음. 이 녀석이 이런 날도 있군, 그래. 어디 아픈가?
오늘은 일단 왔으니께 밥이나 한 숟갈 하고 가드라고.
예.
유진이에게서 시선을 거둔 엄마가 이젠 나에게 화살을 돌린다.
닌 공부 잘 허고 있냐?
아무렴. 이번에도 장학금 받았잖아.
그려. 니가 그것만 아니면 진즉에 학교 때려치고 군대나 가라고 했을낀데.
아하하하....
우리 엄마는 말 뿐인 사람이 아니다.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내가 장학금 심사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당장에 내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가서 병무청 앞에 떨구어 놨을지도...
니 군대는 어쩔겨?
병특 지원도 남아있고 아니면 학사장교로 갈 수도 있고....
뭐시 그리 복합하다냐. 그냥 영장 나오는대로 가는게 아니고?
그럴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 좀 편하게 가려는 거지.
편한거 찾다가 나가리 되는 수도 있어야. 뭐, 니가 알아서 하겠다만 잘 생각해보구 혀.
알았어.
그때 예린이 나타나 나에게 물었다. 아까 청소할 때는 없던 거 같던데 어디 다녀온 모양이다. 물론 여전히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 차림이다.
리사 아가씨가 저희 쪽에서 드시는게 어떠냐고 하시는데요. 큰 상으로 준비해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요? 엄마, 저기 바로 앞집인데 거기서 먹으면 안 돼?
예린이 전한 리사의 초대 메시지를 엄마에게 전하자 엄마가 손사래를 친다.
뭐더러 남우 집에 신세를 진다야.
내 방은 거실에 침대를 놔서 좁잖아.
멀쩡히 제 집 놔두고 뭐하는 짓이여.
엄마는 툴툴거리면서도 내가 이끄는대로 앞집으로 건너갔다. 새로 나타난 예린을 보고 엄마는 딱 한마디 했다.
아따, 크네.....
나와 엄마, 유진과 예린이까지 한꺼번에 리사네 집에 들어갔다. 거실에는 큰 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엄마가 싸온 음식들이 큰 접시에 나누어져 먹음직스럽게 담겨있었다. 개인별 앞접시는 물론이고 언제 준비해두었는지 막걸리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막걸리는 정말 나이스한 선택이로군. 우리 동네의 전설적인 여자 술꾼, 우리 엄마의 표정이 막걸리병을 보자마자 확 바뀐다. 자리에 앉은 엄마는 막걸리 병을 잡고 흔들어 보더니 리사에게 묻는다.
히야시까지 제대로 해놨네. 아가씨, 이거 언제 준비한겨?
저희 집에 막걸리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항상 준비해놓고 있답니다. 많이 있으니 사양 말고 많이 드세요. 어머님.
하이고.... 이런 막사발까지 준비혀놓다니.... 아주 지대로네....
리사가 내어주는 커다란 사발이 모두에게 돌아갔다. 유진에게도 줘야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했는데 유진이가 내 손에서 뺏어가다시피 사발을 가져가 엄마가 따르는 술을 받는다.
탁주는 술이 아니라 곡주니께 괜찮허.
내가 그 말도 안되는 논리에 무려 초등학교 시절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지. 하아. 내가 주변 어른들에게 받았던 술교육 대신 제대로 된 영재교육을 받았다면 지금쯤 하버드대에 갔을지도 모른다. 생각치도 못한 술에 신이 난 엄마는 싱글벙글하며 유진와 예린은 물론 리사에게도 찰랑찰랑 아낌없이 따라준다. 아아. 왠지 예감이 안 좋아. 우리 엄마가 저런 표정으로 술자리를 시작한다는 건 오늘 끝까지 달리겠다는 의지 표현인데....
근데 어머님, 이렇게 맛있는 거 바리바리 싸들고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아, 이눔 생일이잖어. 이번주 토요일이.
아까는 몹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리사를 보고 있던 엄마가, 이제는 아주 그냥 친구 대하듯이 자연스럽다. 옆자리에 앉은 리사의 등까지 두드려가며 친근하게 군다. 리사는 내 쪽을 향하며 묻는다.
어머. 한석 씨 생일이에요? 축하해요.
아직 아닌데요. 뭘. 그러고보니까 엄마 왜 이렇게 빨리 올라왔어? 토요일에 안 오고....
니 에미 토요일 날 계원들이랑 놀러가기로 했단 말여. 니 생일상 미리미리 챙겨두고 나도 놀러가부러야지.
아, 예에......
뭐냐. 아들 생일 일찍 챙겨주려고 올라온 게 아니라 결국 자기 놀러가는 일에 방해 안 되게 일찌감치 생일 치르자고 올라온 거잖아! 쳇. 결국 첫 잔의 건배사는 내 생일을 축하하는 걸로 시작하게 되었다.
축하혀! / 축하해요. / 축하합니다. /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호탕하게 꿀꺽꿀꺽 마시는 엄마. 그에 뒤지지 않는 예린. 살짝 입만 대는 건가 싶었는데 꽤나 길게 입에 대고 천천히 꾸준히 마시는 리사.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찡그렸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고는 인상 한번 쓰고 다시 주욱 들이키는 유진까지 모두 잔을 비웠다. 나는 물론이다.
흐흐. 장승 같은 아가씨가 역시 생긴거 만치로 잘 마시네.
엄마가 병을 들고 예린의 잔을 채워준다. 예린은 잔을 받아들고 꾸벅 한다. 아무래도 이 집에서 막걸리 마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라? 이게 갑자기 무슨 파티야?
한창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마리가 나타났다. 게다가 혼자가 아니었다.
효진아! 오랜만이다. 안 그래도 내가 너.....
전부터 효진에게 연락을 하려다 못한 내가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체를 하려니 마리가 소리를 꽥 지른다.
선배는 내보다는 효진 언니가 우선이지예? 그래봤심더. 어라? 니가 우리 집엔 왠 일이래니?
내가 효진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동안 마리는 가방을 내려놓고 유진의 옆에 앉았다. 이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유진은 마리를 보고 잠시 경계했지만 마리가 유진의 빈 잔을 채워주자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난 엄마에게 마리와 효진을 소개하고 자리에 앉게 했다.
쌍둥이여? 둘이?
예. / 야.
그렇구나....
엄마가 깜짝 놀란 표정이다. 쌍둥이가 흔한게 아니니 신기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좀 너무 놀라는데? 무엇보다 난 효진에게 지혜의 이야기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새로 온 인물들에게 잔이 돌아가고 술이 채워진다. 이 집은 대체 막걸리를 몇 병이나 상비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막대한 수요에도 불구하고 공급물량이 달리지 않은 걸로 보아 적잖이 준비해놓고 사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막걸리 빈 병이 엄청 늘어났다. 못해도 1인당 한 병 이상씩은 돌아간게 아닐까 싶다.
엄마가 해온 음식이 떨어져 갈때쯤에는 리사가 부엌으로 가서 두부김치도 해오고 파전도 부쳐온다. 안주도 푸짐하고 술도 떨어지지 않고.... 우리 엄마가 꿈꿔오던 천국이 바로 여기 있도다. 누구의 제의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바탕 노래 자랑도 시작된다. 반주도 없고 마이크도 없는데 아주 다들 명창이다.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부산 아가씨 리사가 부르니 감회가 남다르군.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유진의 노래.... 임마! 넌 이제 열일곱 이잖아! 어디서 뻥을 쳐!
보내주는 사람은 말이 없는데 떠나가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해~ 뱃고동 소리도 울리지 마세요~
또 다른 부산 아가씨 마리의 열창. 음... 신기하게도 노래를 부를 때는 사투리를 안 쓰네. 신기하네...
돈 오백원이 어디냐고 난 고집을 피웠지만~ 사실은 좀 더 일찍 그대를 보고파~
음... 우리 엄마가 모를 것 같은 노래이긴 하지만 그래도 신나는 고로 좋은 선곡이었다. 효진이가 불렀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백년 살고 싶어~
크으... 우리 엄마가 왜 남진 노래를 안 부르나 싶었다. 다들 한 곡조씩 불러제끼고 아주 그냥 잔치의 흥은 극으로 달했다. 노래를 안 부른 사람은 이제 나랑 예린만 남았는데 다들 내 노래보다는 예린의 노래를 듣고 싶어했다. 여기 모인 사람 중에서 우리 엄마만큼이나 막걸리를 많이 들이킨 그녀였지만 얼굴 색은 그대로 였다.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모르겠지만.. 아마도 눈은 시뻘개지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처음에 한참을 사양하다가 결국에는 방으로 들어가 통기타 하나를 들고 나왔다.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기타 현을 몇 번 퉁기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노래가 시작되자 리사와 마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항상 낮은 저음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그녀가 그렇게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낼 줄은 몰랐으니까... 게다가 우리 나라 노래도 아니었다.
You are the answer to my lonely prayer
You are an angel from above
I was so lonely till you came to me
With the wonder of your love~~
저 노래 제목이 뭐더라... 라디오에서 어쩌다 한 번은 들어봄직한 노래인데 제목은 생각이 안 난다. 평소 팝송이라면 질색을 하던 우리 엄마라서 안 좋아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웬걸.... 가만히 눈을 감고 노래를 즐기고 있었다.
I don`t know how I ever lived before
You are my life my destiny
Oh my darling I love you so
You mean everything to me....
If you should ever ever go away
There would be lonely tears to cry
The sun above would never shine again
There would be teardrops in the sky
So hold me close and never let me go
And say our love will always be
Oh my darling I love you so
You mean everything to me....
그래. 제목이 저거였다. You mean everything to me. 가수는 모르겠지만.... 암튼 끊어질듯 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좌중을 휘감았다. 박자를 맞추기 위해 두드렸던 젓가락들도 모두 내려놓은 상태다. 리사와 마리는 이 노래를 이미 많이 들어본 모양인지 제법 허밍까지 해가며 듣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자...잠깐. 저게 뭐야. 지금 엄마 눈가에 맺힌 이슬 같은게 설마 눈물인건 아니겠지? 여장부로 소문난 우리 엄마가 눈물을 짓다니!!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So hold me close and never let me go
And say our love will always be
Oh my darling I love you so
You mean everything to me......
오 마이 달링이 나올 무렵, 엄마는 빠르게 눈물을 훔쳤다. 예린의 손이 멈추고 현의 떨림마저 멈추자마자 우리 엄마는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다들 노래에 취해 멍해있다가 엄마가 선행한 박수세례에 다들 동참했다. 예린은 고개를 꾸벅하고는 통기타를 가지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두고 나왔다. 엄마가 몹시 감탄하며 예린에게 물었다.
나이도 젊은 사람이 이 노래를 워째 안당가.... 내 처녀적 노래인디.
저희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노래에요.
말수가 적은 예린 대신 리사가 대답했다. 엄마는 노래주라며 예린의 잔을 듬뿍 채워준다. 저렇게 마시고도 연주가 된단 말인가. 나는 멀쩡한 상태에서도 학교 종이 땡땡땡도 못 하는데.... 하기야 원래 기타를 못 치니까.
예린 언니야가 그래서 저 노래만 죽어라 연습했다 아입니꺼. 저거 말고 딴 노래는 아예 연주도 할 줄 몰라예.
마리가 키득거리며 말하자 엄마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신다.
그려? 나가 남진 노래로다가 반주 좀 부탁허려했는디 못 쓰겠네.
그러자 마리가 엄마 말투를 따라한다.
암요, 참말 못 쓰지라~
부산 아가씨의 전라도 사투리 흉내에 다들 배꼽을 잡고 웃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별로 웃긴 것도 아닌데 이미 취할대로 취한 좌중은 어지간한 일에 다들 폭소를 터트렸다. 이후로도 리사나 마리, 효진이의 춤과 노래가 이어졌다. 유진도 우리 엄마가 알 법한 옛노래를 곧잘 불렀다. 나도 딱 한번 노래를 불렀다가 모두의 야유를 받고 중도에 탈락했다. 아아, 나도 잘 부르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쩝. 음정, 박자, 가사가 안 맞는게 뭐 대수라고. 참나.
어둑어둑해져서야 잔치가 끝났다. 이른 오후부터 시작했는데 벌써 해가 지고 있다. 내 살면서 생일파티를 이렇게 거하게 해본 건 손으로 꼽을 지경이다. 물론 시골 살때야 내 생일 핑계 대로 삼촌들이 몰려와 술파티를 열긴 했지만 그건 하도 일상적이라 기억도 안 나고 말이다. 엄마를 일단 내 방 침대에 모셔다드리고 나서 술자리로 돌아가 뒷정리를 도우려했다. 그런데 리사가 나를 잡아 끌더니 유진을 가리킨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거실 한 쪽에 얌전히 앉아 딸꾹거리고 있는 녀석을 말이다.
한석 씨는 저 아이 집 아시죠?
아, 예. 끄읍.....
대화를 나누면서도 실례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안 그랬다가는 뱃속에서 잘 삭힌 막걸리 깊은 향 그대로 상대방 얼굴에 뿜을 판이니까. 이 정도로 마셔놓고 리사와 마리, 예린이 멀쩡한 것은 정말 미스테리다. 이 여자들도 술에 어지간히 강한 모양이다. 효진은 일찌감치 뻗어서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서 티셔츠 안쪽에 손을 넣어 배를 북북 긁으며 자고 있었다.
정리는 저희가 할테니까 유진이 좀 부탁드려요. 이 시간에 혼자 보낼 수는 없잖아요.
그...그렇죠....
나는 유진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유진은 마리와 리사, 예린에게 일일히 머리를 꾸벅하고는 나를 따라나섰다. 택시를 잡을까 싶었는데 유진이가 지금 차를 탔다가는 위험할 것 같다고 말하기에 같이 걷기로 한다. 걸어서 가면 꽤 한참을 가야 하는 거리인데 안 힘드려나. 좀 걷게 하다가 술이 어느 정도 깨면 택시를 잡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알 것 같아요.
뭐가?
한참 조용히 걸어가던 유진이 꺼낸 첫 마디는 굉장히 뜬금없었다.
사람들이 .... 흡.... 으음.......왜 술을 마시는 건지.
하아. 그런 건 벌써 알면 곤란한데.
언니들이나.... 엄마가 마시는 걸 보고 있으면..... 참 불쌍해보였는데.....오늘 보니 ...... 참 즐겁구나.... 싶어요.
그 분들이야 일이니까 그런 거지....
그럴까요?
그 분들에게도 즐거운 술자리가 있을 거야. 니가 못 본 곳에서.
유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고보니 나도 참 생각이 없는 놈이다. 과외하는 학생을 데려다가 술이나 잔뜩 먹여서 돌려보내다니. 순간, 유진의 집에 가끔 출몰하는 검은 옷의 사신을 떠올린다. 끄아아아악.... 만약 이 상태로 그녀를 만났다면 나는 그대로 사망이다!
유...유진아, 혹시 너희 집에 지금 누구 있니?
아뇨. 그건 왜요?
아... 아무 것도 아니다.
동네를 벗어나 번화가로 접어들었다. 본격적으로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어지럽게 길을 밝힌다. 그러나 그런 번화가를 벗어나고 나니 또 금방 어두워진 골목길이 적막감에 휩싸여 있다. 이런 길을 혼자 가게 두었으면 좀 안 좋을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할 무렵 내 손에 무언가 와 닿는다.
응? 어지러워?
.....
녀석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가만히 내 손을 잡은 채로 걸어갔다. 어두운 길이라 무서운 걸까? 안 그래도 키도 쪼그마한 녀석이라 마치 어린 아이를 데리고 어디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 손 안에 들어와 있는 녀석의 손이 몹시도 뜨거웠다. 술을 엔간히 먹이는 건데 잘 못 했다. 그렇지만 내가 말린다고 안 먹일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니 생각보다 유진이네 아파트에 금방 도착했다. 현관 앞에 도착하자 그제서야 녀석이 손을 놨다. 그렇게 꽉 잡은 것도 아닌데 워낙 한참을 잡고 온 탓에 녀석의 온기가 내 손에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다.
잘 자. 내일 아침에 좀 어지럽겠지만 물 많이 마시면 괜찮아.
그 말 말고는 할 말 없어요?
양치질 꼭 해라. 막걸리 먹고 자면 입냄새 장난 아냐.
......그거 말고는요.
없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