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음.... 시간이 거의 다 되었는데....
명희를 찾아가지 말라고 조언한 선영의 말에 분명 고개를 끄덕였지만 난 아무래도 명희가 마음에 걸려 다른 일을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려고 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선영에게는 거짓말을 한 셈이라 미안하다. t선영과 헤어지고 난 후 다음 날 명희의 직장을 다시 찾아갔을 ??도 반응은 싸늘했다. 집에는 더 이상 찾아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였다.
일요일이 되자 미리 시간을 맞추어 예전에 명희가 다니던 교회 근처에서 그녀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교회 입구에 서 있노라니 잘 알지도 못 하는 사람들이 눈인사를 던지며 지나간다. 엉겁결에 마주 인사한다. 그러면서 기억을 잘 더듬어 보니 예전에 명희 노예질 할 때 교회에 끌려와서 예배 볼 때에 면식이 있던 사람도 몇 있었다. 그러다가 진짜 아는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다.
어라? 한석이 아냐?
어, 선배님.....
진호 선배였다. 말쑥한 차림에 단정한 얼굴. 전형적인 교회 오빠 패션이로군.
니가 여긴 웬일이냐?
아, 그게....
아, 맞다. 명희 만나러 온 거야?
예. 그런 셈이죠. 그나저나 선배는....
나도 모르게 선배 옆에 서 있는 이를 빤히 쳐다보고 만다. 진호 선배 옆에 있는 여자의 얼굴이 낯이 익다. 그쪽도 내가 초면은 아닌지라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있다.
하하.... 오늘부터 교회 분들에게 인사 좀 시키려고 같이 다니기로 했어. 근데 어떻게 너랑 이렇게 딱 마주치냐. 하하하. 부탁이 있는데, 학교에는 조만간 발표할테니 그때까지는 좀 비밀로 해주라.
그....그러죠.
진호 선배 옆에 서 있는 그녀는 다름 아닌 과순이, 과사무실에서 서무 보는 아가씨였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상고 졸업하고 들어온 새파랗게 어린 아가씨인데 내년이면 서른인 진호 선배가 데리고 다니다니! 이게 무슨 조화냐! 게다가 진호 선배의 말투로 보아서는 결코 가벼운 사이가 아닌 것 같다.
명희는 아직인가 보네. 우리 먼저 들어갈게.
그러세요. 선배.
이따 청년부 모임에서 보자.
네.
진호 선배와 그 파트너는 교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한참 후, 내가 기다리던 얼굴이 나타난다.
명희 씨!
...........
교회 입구를 들어서던 명희의 발걸음이 딱 멈춘다. 갈색 투피스를 위아래로 점잖게 차려입고 낮은 구두를 신고 또박또박 걸어오던 그녀는 한번 멈추어섰다가 이내 점점 빨리 걷기 시작한다. 내 옆을 지날 때는 속도를 더 올리는 것 같다.
명희 씨! 잠깐만요! 제발요.
명희의 팔을 붙잡았다. 확 뿌리칠 줄 알았는데 그러질 않는다. 그리고 차가운 표정으로 내게 돌아보며 한 마디 한다.
놓으시죠.
명희 씨, 미안해요. 그때는 제가 정말 정신이 없어서.....
지금 어떤 사과를 하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일단 제가 예배 시간에 늦을 것 같으니까 좀 놓아주시겠어요?
명희 씨.....
명희의 말투는 지극히 사무적이고 차가웠다. 손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대로 몸을 돌린 명희가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나도 따라 들어간다.
주께 바친 마음이~~ 하나로~~~
남녀노소 한데 부르는 찬송가 소리를 립싱크로 따라하면서 뒷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저기 저쪽에 명희의 뒤통수가 보인다. 이어지는 목사의 헛소리도 참아내고 돌아다니는 헌금 바구니에 동전도 넣어두며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마지막 기도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명희 근처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다시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한석아, 명희 만났어? 어, 저기 있네. 명희야~!
내 뒤에서 나타난 진호 선배가 내 등을 한번 치고 나서 곧바로 명희를 부른다. 진호 선배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이 활짝 피었던 명희는 진호 선배 바로 옆에 있는 나를 보고는 다시 표정이 싸늘해진다. 그러나 아무래도 진호 선배 앞이라서 그런지 결코 크게 내색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다.
명희가 전도해서 한석이까지 우리 교회에 나오고, 참 잘 됐어. 안 그래?
사정을 모르는 진호 선배는 껄껄 웃으며 우리 둘 사이에 선다. 과순이도 진호 선배를 따라 살폿 웃었다. 명희는 진호 선배와 인사를 나누고 진호 선배의 곁에 있는 여자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내게는 인사를 생략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어디냐.
진호 오빠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옛날부터 잘 아시는 사이라구요?
과순이가 명희에게 살갑게 굴며 말을 건다. 그러나 명희의 표정은 상당히 떨떠름했다. 아마도 명희는 아직까지 그녀가 왜 진호 선배랑 같이 있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았다. 우리 과사무실에 종종 왔던 명희이기에 과순이의 얼굴을 모르진 않을텐데...
오빠, 이 분은 어떻게 여기에....?
명희는 결국 진호 선배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진호 선배가 큰 소리로 웃으며 답했다.
아, 아직 너한테는 말 안 했구나? 하하. 나 올해 가을에 이 사람이랑 결혼한다. 축하해주지 않을래, 명희야?
겨.....결혼?
명희의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비록 내가 나타났더라도 싸늘한 표정 까지는 지어도 저런 흉한 표정까지는 안 지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린다. 명희의 변화를 미처 깨닫지 못한 진호 선배는 자기 이야기만 이어간다.
너도 과사에서 몇번 본 적 있지? 이름은 이혜진이고 올해...
자, 잠깐만요.
진호 선배의 예비 신부 소개가 채 끝나기도 전에 명희는 얼굴을 가린 채 교회 밖으로 뛰쳐나갔다. 멀뚱멀뚱 서 있는 진호 선배와 과순이를 제치고 나는 그런 그녀를 쫓아간다.
명희 씨! 명희 씨!!!
교회 마당은 예배 끝나고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던 터라 명희가 멀리 가진 못 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기 곤란한 건 나도 마찬가지여서 교회를 빠져나오고도 한참을 더 달려가 명희를 붙잡을 수 있었다.
명희 씨! 잠깐만요.
명희는 길가에서 전봇대를 붙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내가 찾아온게 눈물이 날만한 일인가? 방금 있었던 일이라고는 진호 선배를 만나고 예비 신부를 본 것 뿐인데? 그녀의 모습이 너무 낯설어 말도 붙이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서서 우는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힐끔거리기 시작한지 적어도 십분은 넘은 것 같다. 명희는 손을 들어 눈가를 닦아내었다. 얼굴 화장이 엉망이다. 손수건을 찾아 내밀었지만 명희는 받지 않았다.
후우.....
그녀는 나지막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숨을 골랐다. 고개를 들어 반대편 하늘을 응시한다. 다시 손을 들어 눈가를 슥슥 비볐다. 얼굴 화장이 한층 더 엉망이 되었다.
야.
네?
오랜만에 들어보는 반말이 반갑다니, 나란 놈은 좀 문제가 있다.
술 사라.
이 시간에요?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는 시각이었다. 좀 있으면 밥 때가 되긴 하지만 저녁시간이 아니라 점심시간이다. 이런 시각에 문을 연 술집이 있으려나.
저기로 가 있을테니 술 사와.
명희가 가리킨 곳은 허름한 모텔이었다. 대낮부터 너무 대담한 장소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화장이 잔뜩 번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빨리 어디라도 들어가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일단 명희가 먼저 모텔로 들어가고 근처 슈퍼에서 소주 몇 병을 산 내가 따라 들어간다. 명희가 들어간 방번호를 묻자 카운터의 아줌마가 이상하게 쳐다보면서도 이내 알려준다. 방으로 들어가니 이미 명희는 샤워중이었다. 침대 위에 그녀의 옷가지가 흩어져 있다. 소주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서 그녀를 기다렸다. 한참만에 나이트 가운 차림의 명희가 방으로 돌아와 내 맞은 편에 앉았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아무런 말을 꺼내질 못 했다. 그렇게 어색하고도 긴 침묵이 흘렀다. 한참만에 명희가 입을 열었다.
너 내가 뭐땜에 화냈는지 모르지?
.......껍데기 집에서는 정말 죄송했어요.
휴우.
명희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내게 손짓으로 술을 달라고 했다. 종이컵을 꺼내 소주를 따라 그녀에게 내민다. 좀 많이 따른 것 같다. 종이컵에 따르는 거라 양을 잘 못 맞추겠는데도 그녀는 그걸 단숨에 비운다. 빈 종이컵을 우그러뜨리며 명희가 나를 쳐다본다. 고양이 같은 눈매는 여전했다.
정말 모르는구나. 병신.
거친 입도 여전했다.
........그럼 그게 아니라 다른 거 때문에 화나셨나요?
됐어, 새끼야. 모르면 그냥 닥치고 있어.
예.
설마 그때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그걸 안 따라갔다고 이 정도로 화내는 건 아니겠지? 명희가 나를 기다릴리도 없거니와 그냥 지나가는 소리라고 생각해서 찾지 않은 건데 만약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문득 생각해본다. 그러나 고개를 젓는다. 그녀가 나를 기다릴 리는 없다. 여태까지의 경험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그러면 말이다.
네.
넌 내가 처음에 널 왜 만나자고 했는지도 모르겠군. 안 그래?
그러게요.
진호 선배가 말은 건 그때가 생각난다. 원래 명희는 진호 선배가 주선해준 우리 과의 다른 누군가와 소개팅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녀석이 사정이 생겨 빠지는 바람에 내가 대타로 나간 거였다. 딱히 명희가 나를 지목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래 놈이랑 일면식이 있던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새삼 궁금하다. 명희는 왜 대체 나를 다시 만나기까지 한걸까.
대체 넌 아는게 뭐냐? 여자 꼬시는 거? 자지로 후리는 거? 엉?
그....글쎄요....
아무 것도 모르는 새끼가 왜 자꾸 나를 쥐고 흔드는 거야! 엉?!
제가 언제 명희 씨를.....
점점 톤이 올라가는 명희의 목소리가 불안하다. 어째 잘하면 한대 칠 것 같기도 하다.
오늘 내가...... 운 것도, 그래 그것도 이유를 모르겠지. 안 그래?
.모...모르겠는데요.
넌 대체 아는 게 뭐야!!!!
쾅- 소리가 난다. 명희가 테이블을 부서져라 내리쳤기 때문이다. 그녀 손에 잡힌 종이컵은 사정없이 우그러져 있었다. 무서웠다. 그녀의 폭력적인 모습은 여태껏 많이 보아왔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의 분위기는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뭐랄까. 지금의 그녀는 화내야할 방향을 잃고 아무거나 물어 뜯어버리는 미친 야수같은 분위기다.
아는 게 뭐냐고! 씨발놈아! 대체 아는 것도 없으면서! 정말 아무 것도 모르면서! 엉?!
..........
넌! 너는! 넌 그저 네 놈 기분도 없이 남 따라 줏대없이 떠밀리고 있는 고자 새끼야! 그런거라고! 알아?!
명희 씨....
다 틀렸어! 다 틀렸다고! 알아? 너나 나나 개뻘짓만 해 온 거야! 그런데도.... 그런데도! 난 지금 이렇게 개좆같은 니 놈 면상이나 마주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씨발! 씨발!!!!
테이블을 몇번이고 내려치다가 그녀는 이내 다시 흐느껴운다. 이미 화장은 모두 지운 얼굴이라 아까처럼 눈화장이 번질리는 없었다. 의자에서 구르다시피 내려와 바닥에 엎드려 또 한참을 운다. 그녀를 안고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어쩐지 잘못 건드리면 순도 100% 리튬 조각이 물과 반응할 때처럼 대폭발이 일어날 것 같다. 나는 잠자코 있는 걸 택했다.
흐읍....
위로해주는 이도 없는데, 또 울리는 이도 없는데 그녀는 혼자 울다 멈추기를 또 반복한다. 그리고 혼자 침대로 기어올라가더니 대자로 드러눕는다. 허리끈이 풀린 나이트 나운은 그녀의 나신을 온전히 가리지 못해 그녀의 속살이 은근히 드러난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수습할 생각도 없는 것 같다. 한참이나 코를 훌쩍이며 숨을 가다듬더니 고개를 돌려 내쪽을 본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이상하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울고 있던 그녀 눈빛이 이상하게 빛나고 있다. 마치 개구쟁이 꼬마가 부수기 좋은 모래성을 발견한 것처럼, 혹은 배고픈 뱀이 토실토실한 개구리를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눈빛이 못내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하며 물어보았다.
왜.... 왜 그러시는데요?
너, 나 좋아하냐?
예??
나 좋아하냐고.
갑자기 물으시면.....
나도 모르게 뒤통수를 긁적인다. 그 순간,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불과 며칠 전에 지혜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게 생각나버렸다. 여자랑 모텔에 있으면서 다른 여자를 생각하는 건, 좀 안 좋겠지. 그 아픈 기억을 빨리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다.
내가 너무 어려운 거 물어봤나. 음.... 그럼 말야. 나랑 하는 건 어땠어?
갑자기 부드러워진 말투가 몹시 적응하기 어렵지만, 간신히 대답한다.
.......좋았어요.
하아. 그러시겠지. 암. 젠장.
그녀는 다시 시선을 돌려 천장을 본다. 나는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마시면서 그녀의 속살을 은근슬쩍 훔쳐보고 있었다. 전에도 한번 보았지만 어쩐지 생경하다.
하자.
너무도 갑작스럽게 나온 말이라 내 반응은 좀 느렸다. 명희의 시선은 여전히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을 재확인 해주었다.
하자고.
아, 네.
무언가에 홀리듯 나는 침대로 다가갔다. 내 앞에는 몹시도 도발적이고 흐트러진 차림으로 누워있는 명희가 있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명희는 눈짓으로 테이블 쪽을 가리켰다. 난 그녀의 눈짓이 무엇을 뜻하는지 한참만에 이해했다.
저걸 다요?
명희가 가리킨 것은 내가 사온 소주병들이었다.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사들고 온 세 병의 소주병. 하나는 방금 따서 조금 마셨고 두 병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저거 다 한 방에 마시면 하게 해줄게. 싫으면 그냥 나가.
하아.... 아무리 그래도 저걸 어떻게 한 번에....
왜? 쫄았냐? 그 때 보니 술 잘 마시더만.
비꼬는 말투. 아마도 전에 껍데기집에서의 일을 말하는 거겠지. 그녀의 자비심 없는 말투에 배알이 뒤틀린 나는 그래 죽어보자라는 심정으로 소주병을 땄다. 보드카도 글라스로 마셨는데 소주 정도야...... 게다가 이걸 다 마시면 하게 해준다는데 마다할 리가 없나.
꿀꺽꿀꺽-
숨도 안 쉬고 한 병을 그대로 비워버렸다. 웩- 목 뒤에서 시큼한 느낌과 느끼한 기분이 동시에 올라온다. 소주의 맛이 비리다고 느낀 적은 이때가 처음이다. 태어나서 소주를 처음 마셨던 국민학교 6학년 때도 이 정도로 힘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한 병 그리고 좀 남았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명희의 말에 다시 손을 뻗어 남은 새 병을 딴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간다. 심호흡을 하려는데 입을 크게 벌리면 방금 마셨던 게 밀려올라올 것 같아 참아낸다. 다시 마시기 시작한다.
꾸울꺽- 꾸울꺼억---
아까보다 더 힘들었다. 두 배로 힘들었다. 아니, 두 배의 두 배만큼 힘들다. 그러나 간신히 다 마셔냈다. 끝인가 싶었는데 아까 마시다 만 첫번째 병이 눈에 들어온다. 아, 씨발. 나도 모르게 욕지기가 올라온다. 이 짓까지 해가면서 해야 되나 싶다만은 내 몸의 쥬니어는 벌써 이 상황을 눈치깠는지 나보고 성화다. 빨리 마셔! 그리고 꽂아라!
이히거엇도.... 딸꾹, 마셔어요?
젠장. 급격하게 증가한 체내 알코올 수치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나도 모르게 혀가 꼬였다. 단시간에 이 정도로 마셔본 건 대학교 신입생때 과에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이랍시고 강요당했던 사발식 이후로는 처음이다. 아무리 개판으로 놀아제끼는 우리 삼촌들이랑 동네 형들도 이 정도까지 마시게 하진 않았다. 그러나 난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참이다. 병 모가지를 손으로 움켜쥔다.
크아아아아아악!!
이와 삼분의 이 정도의 소주병을 3분도 안 되는 사이가 비워버리고 나는 포효했다. 내쉬는 숨에서 소주 냄새가 날 지경이다.
진짜 하네. 병신 새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비아냥 소리에 몸을 돌린다. 방금 그 비아냥 소리가 나온 쪽으로 몸을 돌린다. 저 입이 그런 건방진 소리를 내뱉은 그 입이냐. 얼른 가서 그 입에다가 내 입을 겹쳐주지. 침대까지 걸어가는 길이 험난하고도 멀게 느껴진다. 왼발을 내딛고 오른발을 내딛고 그래 그 다음은 오른발 맞지?
꾸억!
걸음마는 훨씬 전에 졸업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넘어지는 방향에는 푹신한 침대가 놓여있었다. 그 위로 나자빠진다.
명휘쒸이...... 즈....증말..... 나 용서해주는 거에요오오?
나도 모르게 혀짧은 소리가 난다.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명희가 웃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그 웃는 표정이 어째 평범하지 않다.
새끼야. 너 그래가지고 제대로 박겠어? 일단 누워봐.
명희가 시키는 대로 일단 침대에 드러눕는다. 명희 몸위로 올라타고 싶어도 그녀를 타고 흔들었다가는 멀미가 날 것 같았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바지를 벗기는 손길이 느껴진다. 팬티도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쥬니어가 모처럼 바깥 공기를 쐰다. 거기에 와닿는 싸늘한 손길이 있다.
일단 이걸로 한 번 싸게 해줄게.
따뜻한 숨결이 다가오더니 이내 집어삼킨다. 뜨뜻하고 질척한 입속으로 자지가 들어가는 느낌이 내 머리 속을 뒤집어 놓는다. 아래부터 주욱 한 바퀴 훑어낸 그녀는 귀두에다 잔뜩 침을 바르고 그것을 윤활유 삼아 음란한 손짓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불알을 만지는 느낌도 동시에 든다. 고개를 들고 아래를 볼 수 있다면 내 물건을 딸쳐주고 있는 명희의 모습이 보일텐데 고개를 들어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다. 천장의 무늬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질어질하다.
쌀 때되면 말해.
눼에에에.......
자지를 문지르는 스트로크는 점차 강해졌고 어느 순간 내 한계치를 지나갔다. 내가 명희의 이름을 간신히 불렀을 때 그녀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내는 듯 싶었다. 난 이미 눈을 감고 온 몸에 퍼지는 나른함을 즐기고 있었기에 명희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와닿는 것을 예사로 듣고 있었다.
다시 세우려면 시간이 걸릴테니까 이대로 쉬고 있어. 난 좀 나갔다 올게.
예에.......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명희는 어딜 간다는 걸까. 눈을 떠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기도 쉽지 않다. 갑작스런 폭음과 그 직후 이어지는 사정. 이 두 가지는 나를 수면의 심연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문소리가 난다.
나를 원망하지는 마.
문이 닫히기 직전, 명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문이 마저 닫힌다. 경첩이 삐꺽거리는 소리에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 했다. 누군가 내가 아는 사람의 이름을 말한 것 같은데 도무지 누굴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호 오빠를 원망하던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난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
누가 말했더라.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져 있다고.
나 역시 그러했다. 한숨 뻗어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어쩐지 유명해져 있었다.
[ 명문대생이 스토커. 결국은 강간까지 ]
[ 주변인들은 전혀 눈치 못 채. 그런 사람인줄 몰랐어요. ]
[ 간호사 성폭행 사건. 범인은 명문대생 ]
나를 무척이나 안 좋은 방향으로 유명하게 만들어 버린 언론들이 사용한 화려한 수식어들이다. 모텔 방으로 쳐들어와 나를 연행한 경찰들이 한 말에 따르면 내가 강간범이란다. 그럴리 없다고 항변했지만 곧이어 채워지는 수갑에 내 온 몸은 굳어버렸다. 정신도 멈춰버렸다. 경찰들이 제대로 설명해주지도 않았지만 훗날 내 사건을 온전히 흥미 위주의 가십거리로 샅샅이 취재해 낸 황색 언론들의 이야기를 읽고 종합해본 결과 내가 동의하지 않고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명희였다. 언론에서는 L양으로 표시되어 있었지만 내가 소개팅으로 만나고, 간호사로 일하고 있고, 싫다고 한사코 거부하는데도 내가 쫓아다닌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 뿐이다. 누구겠는가.
모월 모시, 모 지역 지구대에 구르다시피 난입한 L양은 온몸에 폭행당한 흔적이 엿보였고 옷은 반 이상 찢겨있었다. 곧바로 산부인과로 이송되어 경찰관 입회 하에 진찰된 그녀의 질 안쪽에서는 내 정액이 발견되었다. 질 입구는 강제로 시도된 거친 행위로 인한 상처가 가득했다. L양은 자신을 덥친 범인이 있는 모텔의 방번호를 진술했고 곧바로 출동한 경찰은 그곳에서 잠들어 있는 범인을 체포할 수 있었다. 곧 이어진 탐문조사에서 그녀의 주변인들은 내가 직장이며 집까지 쫓아다녔다는 사실을 진술했다.
땅땅땅-
완벽한 증거. 많은 증인. 어떤 감형도 받지 못하고 고스란히 3년형을 받았다. 선고하겠다는 판사의 무감동한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눈 앞이 캄캄하다. 눈을 떠도, 캄캄하긴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찬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 3년이 지났다. 나의 캄캄하고도 캄캄한 3년이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내가 눈을 뜬 건 교도소를 나서고 등 뒤에서 철문이 닫히는 차가운 소리가 나면서다. 눈을 감고 있던 동안의 일을 일일히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기억이 나지 않을 리 없다는 사실이 고통스럽다.
그곳에서 나는, 인간 이하의 대접에 모멸감을 느끼고, 나 역시 범죄자이긴 하지만 그런 나보다 더한 범죄자들의 자랑 섞인 무용담을 들어가며 치를 떨고, 면회를 온 어머니가 울부짖고, 그렇게 돌아가 고향에서 결국은 몸져 누워버렸다는 편지를 받았다. 서열을 정하고자 하는 치졸한 것들의 구타를 받아가며, 한편으로는 여자가 없는 곳에서의 성욕처리를 담당하는 도구로 쓰였다. 매일매일 차가운 시멘트 바닥보다도 더 깊고 차가운 인간의 본성을 느껴버렸다.
매일 아침 일어나며 행여나 있을지도 모르는 가석방 심사를 하루 종일 기다리고 저녁 소집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하루 하루 이렇게 지나가 버린 사실에 분노하며 이를 갈았다. 희망이랑 절망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배우고 현실이라는 지옥도의 진실을 알아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바로 이명희라는 년 때문이라는 사실을 뼛 속 깊이 새기고 또 새겨왔다.
이. 명. 희.
그 저주스런 이름이여.
이명희만 생각하면 이 세상 냄비들에 대한 분노로 이성이 마비될 지경이었지만 그런 나를 다잡아 주는 건 단 한 사람, 선영 뿐이었다. 선영은 내가 수감되고 한 달만인가 두 달만인가 찾아와 내게 말했다.
계약은 이행하셔야죠.
그리고 자신이 풀던 문제집이나 시험지 등을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처음에는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거들떠 보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다시 찾아와 나에게 간곡한 말투로 말했다.
어디에 있든, 당신 자신으로서의 모습을 잃지 마세요. 저와 모든 사람이 당신을 믿으니까요.
감방으로 돌아와 곰곰히 그녀의 말과 표정을 떠올린다. 밤새도록 뒤척이며 고민한 결과 그제서야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그때 나를 더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 했던 것을 후회하는 것 같았다. 처음엔 웃음이 나왔다. 결국은 내 잘못인데 왜 그녀가 후회를 하는 걸까. 그녀가 왜 가슴 아파 할까.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 한다. 그녀는 분명 경고했고 방법을 알려주었는데도 내가 따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 모든 것은 내 탓이다. 내 탓이다. 그래, 내 탓이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빨간 펜을 들고 그녀가 풀어온 문제집을 채점하고 틀린 문제에 대해 첨삭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의 집에서 마주 앉아 수업을 진행하던 그 기분을 조금이나마 맛 볼 수 있었다. 은테 안경을 쓰고 이마를 살짝 찡그려 가며 문제를 풀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그라미와 빗금이 반쯤 그려진 문제지를 내려다본다. 틀린 문제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코멘트를 달았다. 그걸 다시 우편으로 그녀에게 보냈다. 그러면 얼마 후, 다시 그녀가 푼 문제집이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의 계약을 이행했다.
가끔은 그녀의 담담한 말투 그대로가 담긴 편지가 동봉되어 있기도 했다. 편지를 받은 날은 하루 종일 두근거리며 편지를 거듭 읽었다. 사실 별 내용은 없었다. IMF가 터지고 나서 경기가 안 좋아 ROSE가 침체되었다는 이야기나 여전히 유진은 학교에서 1등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주류였다. 자기 이야기는 거의 쓰지 않았다. 언젠가 받았던 편지에서 그녀가 자기 자신에 대해 기술한 내용은 딴 한줄이었다. 주름이 좀 늘었어요. 난 그녀의 주름이 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처음 그 이후로 면회를 오지 않았다. 하긴 면회를 왔다면 난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선영의 문제집과 편지가 없었다면 아마도 난 거기서 그대로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내 생명의 은인이다.
그리고 그녀와의 계약은 딱 1년짜리 였는데도 그런 문제집과 편지 왕래는 내가 출감할 때까지 이어졌다. 계약 기간은 훨씬 전에 지났고 심지어 그녀가 목표로 삼았던 고등학교 과정은 유진이 진작에 졸업해 버린 후라 별 필요도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 두 사람 다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편지에 따르면 내가 출소하기 몇 달 전, ROSE는 그녀가 맡기로 하고 유미는 유진의 뒷바라지를 위해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유진은 미국 무슨 주의 주립대로 진학을 했다. 다시는 볼 일이 없겠지. 처음에는 유진의 그 무뚝뚝한 얼굴이 가끔 기억이 나곤 했는데 이제는 그것조차 희미하다. 수감 전, 알고 지내던 다른 여자들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단, 선영과 명희 만은 예외다. 두 사람 다 내가 꼭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다. 만나고 해야할 일이 하늘과 땅 정도로 차이 나긴 하지만.
그래서 난 지금 ROSE에 와있다.
선영 씨를 불러주세요.
초이스를 위한 아가씨를 넣어드리겠다는 술상무에게 일단 먼저 선영을 불러달라고 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룸을 나간다. 잠시 후, 꿈에도 그리던 그녀가 룸으로 들어온다.
나오셨네요.
그녀의 첫 인사는 몹시 건조했다. 주름이 늘었다는 그녀의 말은 거짓말인 듯 했다. 3년전 모습 그대로다. 윤기 있는 짙은 검은 색 옷도 그렇고 무표정한 얼굴도 그렇고. 그녀의 인사에 제대로 답도 못 하고 그냥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시선이 교환되는게 못내 쑥스러워 나 먼저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미안해요. 고향에 내려가기 전에 얼굴이나 한 번 볼까하고 와봤어요.
아니요. 잘 오셨어요.
그녀는 내 옆에 앉았다. 테이블에 세팅되어 있는 잔을 하나 뒤집고 거기에 음료수를 따라주었다.
고향에 가실 거에요?
그래야죠. 가서 농사나 지으려구요.
한석 씨가 농사라니. 안 어울려요.
이래뵈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여름방학마다 오이밭에서 알바했었어요. 경운기나 콤바인도 잘 몰고요.
선영이 웃었다. 여태까지 딱딱하게 굳어있던 내 마음 속 응어리가 단번에 풀리는 기분이다. 물론 100%는 아니지만.
고마워요. 그리고 정말 미안해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영 씨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말 듣지 않아서 미안해요.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대한 끈을 놓지 않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선영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데 나는 서러워지고 있었다. 3년간 단 한번도 울지 않고 참아왔는데 선영 앞에서는 참을 수 없었다. 체면 차리지 않고 펑펑 운다. 그런 나를 선영은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
[이명희]의 [배드 엔딩]을 달성하였습니다.
[트루 배드 엔딩]을 보시겠습니까? ( Yes or No )
──────────────────────────
Yes 돌이킬 수 없습니다.
No 더블 데이트 Route D를 바로 시작합니다.
──────────────────────────
여태까지의 스토리 요약
(데이트 첫 날, 다시 데이트 첫 날, Route B 거쳐서 현재까지)
대학생 최한석은 우연한 기회에 이명희와의 소개팅에 나갔다가 명희는 못 만나고 김지혜를 만나서 관계를 맺는다. 지혜는 한석의 맞은 편 집으로 이사를 오고 한석은 지혜의 친구 효진과도 관계를 맺는다. 한석은 지혜에게 고백하지만 지혜는 곧 결혼하게 된다며 그를 퇴짜놓는다. 그리고 바로 얼마 후에 지혜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다. 명희와도 좋은 관계가 되려나 싶었는데 몇 번 엇갈리고 나서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한편 한석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외를 하는데 과외를 받는 여학생의 이름은 진유진. 엄마의 이름은 진유미. 그리고 유진을 끔찍히 아끼는 언니 한선영이 있다. 유미와 선영은 ROSE라는 룸살롱에서 일한다. 지혜에게 차이고 그 분풀이를 ROSE에서 하다가 선영에게 덜미가 잡혀 손해금액 변제 대신 선영을 과외하기로 한다.
또한 한석은 올해 신입생 중에서 특이한 녀석을 알게 되는데 그녀의 이름은 김마리. 그녀와 쌍둥이 언니인 김리사와 리사의 수행원인 성예린은 한석의 맞은 편 집으로 이사를 온다. 여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리사의 말에 한석은 지혜에게 연락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러면 이제, 더블 데이트 Route D 시작합니다.
──────────────────────────
그럴려면 아무래도, 지혜에게 연락을 취해봐야 겠다. 그녀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또 그녀의 침대에서 계속 잠이 들면서 내내 마음에 걸렸다. 결심했다. 지혜에게 연락을 해야 겠다고.
.......그러나 연락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그 순간, 난관에 부딪히고 만다. 나에게 지혜 연락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효진이라면 알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겐 효진이 연락처조차 없다. 바로 앞 집에 살고 있었으니 따로 연락할 필요를 못 느꼈기에 그랬던 걸까. 아무래도 다음에 효진이가 오면 꼭 물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했던가. 효진을 보면 물어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요 년이 당최 오질 오질 않는다. 어디 사는지도 모르니 내가 찾아갈 수 있을지도 만무하고 효진이 연락처를 알 리도 만무하다. 혹시나 싶어서 마리에게 넌지시 지혜 연락처를 아는지 물어보았다가 눈총만 더 받았다. 마리도 모른다고 했다. 하려던 일이 막혀버린 답답함이 나를 짓누른다. 하긴 효진이 놀러왔던 건 지혜를 만나기 위해서 였는데 지혜가 가버리고 난 지금 굳이 그녀가 나한테 올 일이 뭐가 있겠냐 싶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고 개강 초의 바쁜 나날이 지혜에 대한 생각을 잊게 만들어주었다. 더군다나 학교에만 가면, 아니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기만 하면 마리가 졸졸 따라다니는 통에 녀석을 건사하느라 안 그래도 바쁜데 더 정신없이 바빠졌다. 다다음주에는 팔자에도 없는 신입생 MT에도 가게 생겼다. 진호 선배가 항상 붙어다니는 나와 마리를 보고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진호 선배 입에서 명희 이야기가 나오면 어쩌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별 다른 이야기가 없는 걸로 봐서 그가 소원해진 우리 사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란 추측을 해본다. 명희에 대한 생각은 애써 지워버렸다.
선배님, [문학 속의 성] 수업 발표 조 어떻게 하실 거에여?
아직 생각 안 해 보았는데...
그럼 일단 저랑 선배랑 한 조 먹고 두 명만 더 찾으면 되겄네요.
언젠가 내 수강표를 한 번 가져가더니 자기 교양과목들을 죄다 나랑 같은 거로 수강 변경 해가지고 온 마리는 내가 아직 수락도 안 했겄만 나를 이미 한 조로 잡아 놓고 있었다. 전공과목이야 학년이 다르니 어쩔 수 없다고 쳐도 4학년이 듣는 교양을 듣겠다고 덤비다니. 학점관리의 무서움을 아직 모르는 녀석이로군. 뭐, 그렇다고 해서 딱히 거절할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전체 대학을 대상으로 한 교양과목 같은 건 아는 사람 찾기도 애매하기 때문이다. 조원을 찾는 문제는 마리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대학 수업들은 원래 다 이럽니꺼?
뭐가?
아, 아까침에 수업시간에 말이에여, 막... 자....하따. 남새스러버 말도 못 꺼내겠네. 그런 소리를 교수라는 분이 막 하고 그래도 됩니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가 들어도 좀 파격적이긴 했는데 원래 또 그런 맛이 있어야 교양 수업도 듣는 거 아니겠는가. 다만, 마리는 면역이 없는 듯 싶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퍽이나 귀엽다. 나도 모르게 악동의 기분이 들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자지 말야?
꺄악! 선배님요!
마리는 마치 불이 난 걸 발견한 사람처럼 파닥거리다가 황급히 내 입을 자기 손으로 막는다. 여자아이 답게 부드럽고 가느다란 손가락에서 좋은 향이 풍겨온다. 여자애 귓가에 대고 자지라고 속삭이고.... 손가락 냄새나 맡고 있고.... 나 변태 아닐까?
그...그런 말을 마 이런 디서 막 해쌌고 그래도 됩니까.
마리는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사방을 살폈다. 사람이 좀 많고 북적거리는 학관 입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대화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마리의 손가락을 떼어내며 웃어 넘겼다.
뭐 어때, 수업 시간에 나왔던 말인데. 그 단어랑 다른 적나라한 것 까지 다 넣어서 써보라는 교수님 말씀 벌써 잊은거야?
그래도 그랬지예.....
자지, 보지, 좆, 씹.
[문학 속의 성] 교수가 오늘 수업을 시작하면서 칠판에 대문짝하게 쓴 단어였다. 여학우들은 비명을 질렀고 남학생들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마리는 얼굴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지난번에도 공지했지만 제 수업에서 중간고사는 보지 않습니다. (학생들 환호가 잠깐 지나갔다.) 다만 중간고사 대체 레포트로 성애문학, 좀 순화된 표현으로 하자면 성인소설, 그러니까 까놓고 말해서 야설을 받을 겁니다. (여기서 학생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최소한 200자 원고지 50장, 물론 최대 양은 제한하지 않겠습니다. 더 길게 써올 분은 써오셔도 되고 책 한 권까지 적어오셔도 상관없습니다.
교수는 자신이 칠판에 적어놓은 단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만 이 단어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록 가산점을 주겠습니다. 괜히 페니스, 그것, 거시기, 바기나 등과 같이 돌려 말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분들은 점수를 깎겠습니다. 명확하고 좋은 단어가 있는데 왜 대체 사용을 안 하시는 겁니까. 근데 또 말이죠. 지난 학기에 이렇게 이야기 했더니 얌전해 보이던 한 여학생은 자지, 보지 이 두 단어로만만 써서 원고지 50장을 채워왔더군요. 참신한 발상은 놀라웠지만 저는 그 학생에게 F를 줬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일었다.
야설이라고 해도 분명 하나의 소설이고 문학작품을 쓴다는 생각으로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소설적인 기법이 적절히 사용될 것. 완결된 이야기일 것. 이 두 가지를 명심하십시요. 다음에 계속, 뭐 이런 식으로 시리즈로 적어오는 분은 아무리 재미있어도 C 드립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수업 시작하죠.
교수는 그러면서 천일야화와 춘향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수업을 이어갔다. 수업이 끝나고 나오면서 마리는 나한테 뭐 이런 수업을 듣는거냐고 한참이나 항의를 했다. 이...이봐, 내가 무슨 수업을 듣는지는 자유지만 따라온건 너지 내가 오라고 한게 아니잖아.
선배님, 저 잠깐 좀 댕겨올테니 자리 좀 맡아주이소.
어, 그래.
수업을 마치고 나온 마리와 나는 지금 학관 식당 앞에서 줄을 서고 있는 중이었다. 3월의 학관 밥은 아직 먹을만 해서 사람이 제법 붐볐다. 마리는 화장실 쪽으로 사라졌다. 저 녀석도 이제는 좀 동기들이랑 돌아다닐 때가 되었는데 너무 나랑 붙어있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줄이 언제쯤 줄어들려나 고개를 빼들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앞에 어떤 쪼끄만 녀석이 끼어든다. 교복을 입은 걸 보아 부속 고등학교 여학생인 모양이다.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주의를 주었다.
이봐요. 새치기는.... 어라?
아는 사람끼리, 같이 좀 서죠?
으음....
하얀 피부. 또렷한 이목구비. 작고 도톰한 붉은 입술. 단정하게 빗은 머리카락. 인형같은 외모를 가진 녀석이지만 정말 인형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인간미가 없는 녀석.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 전에도 몇 번 본 적 있는 그 교복, 그래, 이 교복이 우리 학교 부속 고등학교의 교복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기억해낸다. 평소에 캠퍼스에서 많이 보긴 하는데 눈여겨 보질 않아 기억에 떠올리지 못 했던 거다.
너, 이 학교였냐?
네.
넌 원래 M여고 간다고 하지 않았어?
M여고는 유진이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진학률 높기로 소문난 학교였다. S대를 가겠다고 선언하던 유진이었으니 당연히 거기로 갈 줄 알았는데.
거기 교복이 별로더라구요.
그런 이유로?
왜요? 안 되요?
안 될 것 까지야 없지만.....
희한한 녀석일세. 빈 말로라도 우리 학교 부속고가 엄청 좋은 곳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그렇다고 아주 나쁜 곳이라고 까지는 아니지만... 교생 실습 나갔던 선배들 이야기로는 아주 면학에 힘쓰는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놀자판도 아닌, 그저 그런 평범한 고등학교였다. 인근에는 드문 남녀공학이라는 게 유일한 메리트라면 메리트일까. 유진이 성격이라면 좀 더 깐깐한 곳으로 갈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혹시 연합고사 못 본 거 아냐?
할 수 있는 추측은 이게 다다. 그러자 유진이 살짝 웃으며 답한다.
체육에서 2점만 안 깎였어도 만점이었거든요?
아, 그러세요.
어지간하면 대부분 만점을 주는 체육에서 2점이나 깎이다니. 녀석은 보통 운동치가 아닌 모양이다. 나머지 과목에서 만점 받았다는 거야... 뭐, 그닥 놀랍지도 않다. 녀석의 실력이라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왜 여태 말 안 했어?
핫... 말을 안 해요? 계속 이 교복 보여줬는데?
그.....그랬나.
그러고보니 그렇다. 빨리 화제를 돌려야겠다.
근데 점심을 여기서 먹어?
귀찮으면 그냥 매점에서 빵 사먹고 마는데... 요즘은 밥이 먹고 싶어서요.
......니 들고 있는 그 식권으로는 밥이 아니라 면류인데?
아무튼요. 되게 깐깐하네. 거참.
도시락 안 싸가지고 다니냐고 물어보려다가 관두었다. 모르긴 몰라도 얘 엄마나 선영이나 새벽까지 일하고 오전에는 내내 자고 있을 텐데 누가 싸주겠나 싶다.
아저씨도 맨날 여기서 먹죠?
맨날은 아니고 되도록이면 여기서 먹지. 여기 아니면 저쪽 중앙도서관 식당에서 먹던가 아니면 저쪽 멀티관 식당이나 것두 아니면 나가서 먹든....
아, 됐고. 앞으로는 항상 여기서 드세요. 이 시간에요.
내 말을 중간에 끊으면서 유진이 딱 잘라 말한다. 난 좀 어이가 없었다.
내가 왜?
사람이 규칙적으로 식사를 해야죠. 그렇게 들쭉날쭉 먹으면 어떡해요.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앞뒤가 안 맞는 거 같다. 여기다 괜히 아니라고 대답하면 귀찮아질 것 같아 대충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 마리가 돌아왔다. 마리는 아까처럼 내 옆에 서려다가 유진을 보더니 살짝 놀라며 내게 묻는다.
야는 누구라예? 선배님 아는 아인교?
어, 내가 과외하는 앤데, 여기 부속고에 다닌다나봐. 저쪽 공대 뒤에 넘어가면 거 왜 학교 있잖아. 고등학교. 거기.
내 설명을 들은 마리는 활짝 웃으며 유진을 이모저모 살핀다.
아따, 쪼~매한 딸아가 억수로 귀엽네예. 니 참말 고등학생이가?
그러나 친근하게 구려는 마리에게, 유진은 몹시도 차가운 태도로 대한다.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마리의 손을 탁 쳐내고는 냉랭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그 쪽은 누구신데요?
어, 여긴 내 후배인데, 이름은 김마리라고....
아저씨가 왜 대답해요? 난 이쪽에 물었는데!
.......그게 그렇게 버럭 화를 낼 일이냐? 유진은 짜증을 부리더니 몸을 홱 돌려 앞을 향한다. 그런 유진의 등을 보며 마리가 내게 소근거렸다.
아가 승질이 보통이 아닌갑네예. 얼굴 값을 하닌가 봅니데.
그러나 마리의 목소리는 원래가 좀 큰 편이고 그녀가 소근거린다고 한 것도 일반적 기준에서는 별로 작은 소리가 아니었다. 그쪽 지방 분들이 대개 목소리가 큰 편인데 마리는 좀 더 그랬다.
다 들리거든요? 그리고 그쪽은 자꾸 누구보고 아가라고 해요? 게다가 딸? 내가 그쪽 딸이에요?
다시 홱 돌아서 마리에게 따져묻는 유진에게 마리는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니가 딸아지, 머스마가? 그리고 내 이름은 그쪽이 아니라 마리다. 김마리.
말인지 소인지 내가 알바 아니네요.
하, 고 녀석, 발끈하는게 음청 귀엽네예. 꼭 우리 우리 언니 맨치로.
지금에서야 생각나는 건데 마리는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에 대해 굉장히 둔한 것 같다. 예전에 리사가 펼쳤던 폭풍방언 화풀이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했던 게 어쩐지 납득이 간다. 설마 리사가 그랬던 걸 이 녀석은 귀엽다고 보고 있었던 거야? 이거 대체 얼마나 둔탱이인거야!
아저씨! 앞으로는 여기 이 사투리 쓰는 여자랑 다니지 말아요. 알았어요?
싸움의 불똥이 엉뚱하게도 나에게 튄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후배인데 그럴 수는 없어. 수업도 같이 듣고....
그러자 유진이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그럼 최소한 밥 먹을 때는 혼자 다녀요. 이 아줌마랑 다니지 말구요.
아지매? 내는 아지매 아닌데?
아악! 그쪽한테 말한거 아니라니까요!
내 이름은 그쪽이 아니라 김마리라카이!
......앞으로 나의 평온한 점심시간은 글러먹은 것 같다. 두 사람의 티격태격은 밥을 먹고 헤어질 때까지도 계속된 데다가 유진이 말하는 폼을 보았을 때, 그 녀석은 점심시간마다 이곳으로 올 요량인 모양이다.
오, 신이시여.
──────────────────────────
*
더블 데이트 Route D 시작합니다.
호감도 시스템을 다시 살릴까 싶다가... 정신없다고 하는 분이 많아서 그냥 접습니다.
이야기만 착실히 쓰겠습니다.
매주 두 번, 화요일과 목요일. 유진의 과외가 있는 날에는 선영의 과외가 먼저 있었다. 처음 문제집 사건 이후로 선영의 과외는 순조로왔다. 초반의 부진과는 달리 그녀는 수업에 적응을 꽤 잘 해주었다. 물론 내가 잘 가르치는 편이긴 하지만 그녀 역시 좋은 학생이었다. 이해도 빨랐고 자신이 어려워 하는 부분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문제집에 빗금은 나날히 줄어갔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에 뵐 때까지 이 문제집 85페이지까지 풀어주세요.
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가벼운 차림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민소매 검은 티셔츠, 짧은 반바지. 머리를 한데 모아 묶어 내렸고 얼굴에는 예의 그 안경을 쓰고 있었다. 수수한 디자인의 은테였다.
왜 그렇게 빤히 보죠?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좀 쑥스러웠다.
아, 아뇨. 안경 쓰신 게 신기해서.
안경 쓴 사람 처음 봐요?
그건 아니지만 선영이 쓰는 건 왠지 달라보여서... 평소에도 쓰셔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분위기가 좋은데요.
그러자 선영이 살짝 웃는다. 보일듯 말듯한 미소였지만 워낙 가까이 마주 앉아 있기에 볼 수 있었다. 선영이 웃는 장면이라.... 꽤 드물게 본 것 같다. 이런 여자도 웃긴 웃는 군.
평소 분위기는 어떻길래요?
에.... 그게.....
그렇게 물으니 대답이 궁했다. 전투적으로 보입니다.라고 답하면 기분이 안 좋겠지?
좀 사나워 보이죠?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있으니 그녀가 대신 대답한다. 황급히 손을 뻗어 부정해보지만 이미 그녀는 납득을 먼저 하고 있다.
안 그래도 그런 이야기 종종 듣습니다. 제가 일부러 그렇게 하고 다니는 것도 있구....
일부러요?
놀랐다. 그런 사람도 있나? 아니, 그런 여자도 있나? 자기를 일부러 사납게 보이려고 하는 여자가? 그리고 새삼 돌이켜 보건데 이 여자는 서비스업에서 종사하는 사람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아름답게 보이게 치장하고 꾸미는 것이 중요할텐데 대체 왜 그럴까. 궁금해진다. 그러고 보니 항상 검은 옷 입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궁금한 것 투성이다.
궁금해요?
네.
몰라도 되요.
에엑!
사람 궁금하게 해놓고 이 여자가 누굴 잡을라고 이러나....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재차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끈질긴 거 빼면 시체인 이 몸을 궁금하게 해놓고 어디 발을 빼시려고. 몇 번이나 거듭 물었더니,
공짜로 알려주긴 싫고.....
선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수첩을 꺼내어 뭔가 확인한다. 그러더니 내게 제안을 했다.
다다음 주 일요일 저녁에 시간 돼요?
일요일이라....
2주후의 일요일이면 아마도 신입생 MT 따라갔다가 돌아오는 날이니 저녁이면 시간이 될 것 같다.
아마도 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라는 말은, 안 될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 때 학교에서 단체로 어딜 좀 갔다오느라구요. 돌아오는 건 일요일 오전일테니 저녁에는 시간이 될 겁니다.
확실하게 하세요. 괜히 약속 잡았다가 그때가서 안된다고 하지 말고. 전 약속 어기는 사람이 제일 싫으니까.
편하게 입고 있어서 잊고 있었지만 다시금 사신, 선영의 포스가 느껴진다. 나는 느슨해지려던 마음을 다잡고 똑바로 대답한다.
됩니다. 그럼 저녁 몇 시에 볼까요?
선영과 나는 그녀의 집 앞에서 저녁 6시에 보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뭐 대단한 이야기를 해준다고 따로 시간을 정해서 만나기까지 하는가 싶기도 한데 어느새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서 약속까지 해버린 터라 다시 따져 묻기도 애매했다.
나는 선영의 집을 나와 유진의 집까지 걸어갔다. 전에도 그랬듯이 시간이 남기에 먼저번에 갔던 커피숍에 다시 들렀다. 혹시나 싶어 카페 전화로 유진이네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전에 주문해놓고도 제대로 마시지도 못 했던 커피를 다시 주문해놓고 예의 그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친다. 이번 학기에는 전공 3과목과 교양 4과목, 총 15학점을 신청해놓은 터라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았다. 전공은 전공서적만 읽으면 된다지만 교양들은 대개 이런저런 책을 읽도록 하고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다음 달에는 교생실습도 나가야 되서 4주동안 빠질 수업의 진도를 미리 따라가기가 많이 벅찼다. 교직 이수를 괜히 했나 싶기도 한데 그래도 안 하는 것 보다는 하는게 낫다는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교직을 신청했었기에 기왕 하는 거 끝까지 잘 해보자는 다짐을 해본다.
점원이 커피를 가져다 주었다. 한 모금 마셔본다. 맛이 나쁘지 않다. 동네 커피숍 치고는 좋은 원두를 쓰는 것 같다. 특이하다면 특이한 게,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동네의 한 다방에서는 흔히 말하는 다방커피가 아니라 원두를 갈아 내린 커피를 내어왔었다. 그 독특한 맛도 맛이거니와 젊고 탱탱한 마담에 환장한 많은 남정네들이 다방에 들끓었고 작은 삼촌이 거기에 아주 그냥 단골로 출근 도장을 찍었었기에 나도 거기에 붙들려 많이 따라가 본 기억이 있다. 작은 숙모가 삼촌 귀를 잡아당기며 대체 읍내에 뻔질나게 드는 이유가 뭐냐 따져물었고 삼촌은 엉겁결에 좋은 커피 마시러 간다는 그럴듯한 변명을 해댔다. 추수가 끝나고 목돈이 생기자 작은 숙모는 단번에 커피 머신을 사왔다. 삼촌은 그 이후 찍소리도 못하고 읍내 다방에 얼씬도 못 했지만 나는 고등학교 시절 내내 원두커피를 마시며 수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씁슬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그윽한 이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그 때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카페의 분위기는 조용했다. 더더의 내게 다시가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여자 보컬의 잔잔한 목소리가 무척이나 상큼하고 매력적이다. 교육사회학 이론이라는 딱딱한 책을 읽으며 듣기에는 부적절할지는 몰라도 조용한 카페 분위기와는 무척 잘 어울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 거리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카페 창 밖에 선 유진이 이쪽을 들여다보면서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책을 덮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녀석이 안으로 들어왔다.
왜 항상 여기 계세요?
녀석이 인사도 안 하고 따지기부터 시작한다. 니가 빚쟁이냐, 아님 바가지 긁는 마누라냐.
여기가 딱 적당한 위치거든. 너네 집 바로 앞이고....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구요?
다른 이유?
나는 바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유진이 들어와 내 옆 자리에 앉는게 더 빨랐다. 나란히 앉은 녀석은 내 가방을 끌어다 뒤적이더니 책들을 하나하나 살핀다. 남의 가방을 막 뒤지다니.... 혼을 좀 내야하겠는데? 가방에 들어있는 책을 다 꺼내놓은 유진은 한권씩 집어들고 제목을 읽어내려간다.
DC Motor Control... Robot Control Engineering.....교육사회학.... 중2수학 문제집......
남의 책은 왜 보는데?
그러나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나를 돌아보며 물음에 물음으로 답한다.
아저씨 전공이 대체 뭐에요?
나?
갑자기 그건 왜 궁금해하지?
책 보면 알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봐선 통 모르겠네... 참, 이 중학생은 과외 계속 하는 거에요?
어? 어.....
나는 이 화제에서 빨리 돌려야겠다고 생각해서 방금 유진이 던진 질문에 답하기로 한다.
제어공학인데.
그게 뭐하는 거에요?
뭐하는 거라니.....
그렇게 갑자기 물어보니 대답이 궁했다. 그러고보니 대체 우리 과가 뭐하는 거지?
제어하는 거지.
한참만에 나온 답변이 이 모양이다. 그러자 유진이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린다.
제어? 뭐를 제어하는 거에요?
프로세스 제어도 하고 플랜트 제어도 하고.... 디바이스도.....
그러자 유진이 성질을 낸다.
아, 쫌. 잘 알아듣게 말해봐요. 그래가지고 진로조사서에 뭐라고 써요.
진로조사서?
그러니까 아저씨 학과 나오면 사회 나가서 뭐하는 건데요. 간단하게 말해봐요.
우리 선배들이 어디로 갔더라. 최대한 궁리해본 후 간단하게 말해준다.
자동차, 선박, 플랜트, 계장, 전기, 전자, 로봇공학.....
아, 진짜!
유진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성질을 부린다. 본인은 몹시 짜증이 난 모양이지만 어쩐지 녀석의 그런 모습은 귀엽기 그지 없다.
하나만 말해요. 하나만. 간단하게 말하라니까 뭘 그렇게 주구장창 늘어놔요. 아저씨는 나중에 뭐할 생각인데요?
나 말야?
예. 이번에도 흐리멍텅하게 말하지 말고 딱 잘라서 하나만 이야기하세요.
흐리멍텅이라니.... 나보다 여섯살이나 어린 여자애한테 이런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다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막상 유진의 질문을 듣고 나서도 곰곰히 생각해보니 졸업 후 내가 딱히 무얼하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대학을 4년이나 다녔는데도 말이다. 구직 활동 하던 선배들이 면접 가면 다 아는 건데도 생각이 안나 말문이 턱턱 막힌다고 하더니 어쩐지 그 기분을 알 것도 같았다.
........취업이려나?
이익!!!
유진이 자기 머리를 감싸쥐고 커다란 한숨을 뱉더니 이내 손을 뻗어 내 팔뚝을 사정없이 꼬집는다.
아얏! 왜 그래?
쪼그만 녀석이 제법 손이 매웠다. 꼬집힌 팔뚝이 꽤나 얼얼하다.
그러니까 어.디.에. 취업할건데요. 그걸 말하라니깐요.
그게 그러니까......
후아.... 아저씨 정말 대학 졸업반 맞아요? 어떻게 자기 미래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그러게 말이다.
이래 가지고야 어린 여자애한테 흐리멍텅하다고 혼나도 할 말이 없겠군 그래.
모레에 수업 오실 때까지는 확실하게 정해가지고 오세요. 이번주 안으로 진로조사서 내야한단 말이에요.
어어.. 그래..
니 진로조사서를 내야하는데 내가 졸업후에 뭘 해먹고 살건지에 대해서 너한테 왜 이야기를 해야 하냐라고 묻고 싶은게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남아 있는 커피와 함께 후딱 삼켜버렸다. 괜히 따지고 들었다가 꼬집히는 것 정도로 안 끝나면 어떡하나 싶었다. 일단 나가기로 하고 가방을 둘러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한다.
3,500원입니다.
여기요.
돈을 내자 짤막한 키의 알바생이 잔돈과 영수증을 내주었다. 그것을 받아들고 몸을 돌려 카페를 나서는데 유진이 바로 따라나오질 않는다. 왜 그런가 싶어서 돌아보니 녀석은 카운터쪽을 계속 보고 있었다. 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