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생각에 너무 골몰해 있느라 맞은 편에 있는 마리가 몹시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 했다.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마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묻는다.
선배님요, 여기 마음에 안 드시나예?
아, 아냐. 그냥 좀....
황급히 변명을 하지만 마리는 이미 침울해져 있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마리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괜히 왔다부네.
아냐. 아냐. 너 때문은 아니고.... 그냥 좀 그랬어. 이제는 괜찮아.
애써 표정을 펴고 점원을 부른다. 뭐가 있냐고 물어보려다가 어차피 여길 오자고 한 게 마리였으니까 그녀에게 주문을 일임한다. 마리는 나에게 정말 아무거나 시켜도 되냐고 거듭 확인하고는 메뉴판을 보며 이것저것 주문을 한다. 점원이 주문을 확인하고 돌아가고 나자 자기도 뭔가 짚이는게 있는지 한 마디 보탠다.
아까 그 분 땜에 그러신가여?
아니라고 부정할까 싶었다. 결코 좋은 이야기가 아니니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마레기와 같은 과에서 남은 학교 생활을 보내야 하는 마리에게도 더 이상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간략하게 대답했다.
그 사람 없는데서 이야기하는 건 뒷담화 같아서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까 그 선배는 좀 그래. 너도 되도록이면 그 선배랑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하렴.
예.
특히 괜히 친하게 굴거나 단 둘이 있자고 하면 절대로 응하지 마. 알았지?
그 정도임니꺼?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마리는 자못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날 따라 고개를 끄덕인다. 왜 그러냐고 자세하게 물어오면 어쩌나 걱정되어 화제를 돌려야겠다는 생각에 수업 이야기를 꺼내본다. 아까 이야기하던 최교수님 수업에서의 주의점을 생각나는대로 이야기해주고 있는데 그때 마침 가게로 들어서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그쪽도 우리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어머?
리사와 예린이었다. 거의 항상 같이 다니는 두 사람이었지만 드레스 코드는 참 극과 극이다. 리사는 예전에도 그랬는데 오늘도 꽤나 화사한 드레스풍의 옷차림이었고 예린은 늘 그렇듯이 검은 정장으로 온 몸을 감싸고 있다. 반 발자국 뒤에서 리사를 에스코트하는 예린의 모습을 보니 마치 중세시대 때 귀부인을 모시고 다니던 수행기사 같은 느낌이 물씬 든다. 허리춤에 칼집만 채워주고 투구만 씌워주면 정말 이미지 딱이다. 완전 검은 색까지는 아니지만 갈색빛이 진한 선글라스도 항상 끼고 있어서 얼굴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그녀의 신비스런 이미지를 만드는데 일조한다.
언니야가 여긴 우짠 일이고?
어제 잡지 같이 봤잖아. 점심 먹을까 싶어서 예린 언니랑 왔지.
역시 쌍둥이인가. 생각이 제대로 통했나보다. 리사는 차분한 걸음걸이로 우리 테이블로 다가온다. 내게 인사를 하기에 나도 인사를 했다. 예린에게는 눈인사를 건넨다. 보일 듯 말 듯 그녀도 고개를 끄덕여 인사에 답한다.
4인용 테이블에 나와 마리가 마주 앉아 있었는데 두 사람이 더 왔으니 나랑 마리가 옆으로 조금씩 옮겨 자리를 만들었다. 마리 옆에는 리사가 앉고 내 옆에는 예린이 앉았다. 리사가 나와 마리를 돌아보더니 살짝 웃으며 말했다.
마리랑 한석 씨랑 데이트 중이었나보네? 괜히 우리가 방해한 거 아닌가 몰라요.
딱히 놀리거나 놀란 말투도 아니고 꽤나 평온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마리의 반응은 좀 달랐다.
데이트는 무신~
마리는 부끄럽다는 듯 몸을 베베 꼬며 부정했다. 그런데 그런 말투로는 전혀 부정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이고 오히려 반기는 것 같아 보여기에 내가 부연설명 한다.
데이트 절대 아니구요, 그냥 밥 먹으러 나왔습니다. 예전에 제가 마리한테 라면 얻어먹은 것도 있구요.
너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 걸까. 마리가 살짝 샐쭉해져서 피잇- 소리를 내더니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리사는 내 대답을 듣고 입을 가리며 웃더니 이내 점원을 불러 자기와 예린 몫의 메뉴를 주문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하긴 한석 씨 이미 애인 있으시잖아요. 귀엽게 생기셨던데요.
명희를 말하는 건가. 그러고보니 리사에게는 명희와 키스하고 있는 장면을 들킨 적 이 있다. 명희에 생각이 미치자 머리 속이 다시 복잡해진다. 그 때 술집에서 그런 추태를 보여 놓고 다시 연락하는 건 너무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예 연락조차 하지 않는다는 건 내가 저지른 무례에 대해 사과하지 않겠다는 것이기에 더 염치없는 짓거리라고 생각된다.
선배님요, 애인 있어여?
내 맞은 편에 앉은 마리가 눈이 동그래지더니 나에게 따져 묻는다. 명희 생각 하느라 대답이 늦었더니 그 짧은 사이를 못 기다리고 마리는 자기 언니에게 재차 묻는다.
선배님이 애인 있는지 언니야는 우예 아노? 니 봤나?
급한 말투의 마리와는 달리 리사는 여전히 여상스럽다.
봤는데? 둘이 키스하고 있던데?
에에~!
마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 바람에 테이블이 흔들려서 물컵이 쓰러질 뻔 했다. 마리는 내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선배님 접때 지혜 언니야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가 깨진 거 아니였습니꺼? 지혜 언니 결혼한다카기에 선배님은 이제 마 솔로인줄 알았는데예?
지혜. 그래, 지혜가 결혼한다는 것도 왠지 잊고 지내고 있었군. 효진 말마따나 친한 친구가 결혼한다고 하는데 축하한다는 소리 하나 못 해준 못난 놈이 나다. 물론 그 당시의 나는 차였다는 생각에 그리 좋은 마음을 먹지는 못 했지만... 지금이라면 효진의 바람대로 지혜에게 결혼 축하를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혜 생각을 하느라 마리의 질문, 아니 추궁에 답하기도 전에 리사가 먼저 고개를 주억거린다.
아, 그 분 이름이 지혜라는 분이었구나.... 전에 마리가 신세졌다는 그 분 맞죠?
뭔가 좀 이야기가 꼬인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으으.. 그게 아니라 리사 씨가 본 애는 명희였는데....
그런데 이 말은 아무래도 하면 안 되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지혜 언니 말고도 또 있었습니까아~!
다시 이어지는 마리의 절규. 안 그래도 목소리가 큰 녀석인데 저렇게 소리지르다시피 말하고 있으니 가게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식은 땀이 줄줄 흐른다. 마리는 너무 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리사는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으며 예린은 별 관심없다는 듯이 계속 출입구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선배님예, 그렇게 안 봤는데 억수로 바람둥이네예. 실망했심더.
자리에 털썩 주저 앉은 마리가 몹시도 볼멘 소리로 투덜거렸다. 내가 바람둥이인데 왜 니가 실망이냐 묻고 싶다. 그나저나 변명을 하려고 해도 워낙 이야기가 꼬이고 꼬인 터라 설명하기도 난감했다. 설명하다보면 개인적인 치부도 나올테고.... 대답이 궁해 한숨만 쉬고 있었는데 의외의 구세주는 따로 있었다.
남자가 여자 많으면 어떻습니까? 그것도 다 능력이죠.
예린이었다. 시선을 계속 출입문 쪽에 두고 있어서 이쪽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리가 코웃음을 치며 묻는다.
그게 먼 소리입니꺼. 예린 언니는 참말 그렇게 생각하나여?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음식이 나오는 통에 우리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먹음직스러운 스파게티의 향연이 눈 앞에 펼쳐진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마늘빵의 냄새도 아주 좋다. 포크를 들고 면발을 뒤적거리며 예린이 특유의 그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여자만 많다고 다가 아니라 그 많은 여자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면, 혹은 실망시키지만 않는다면 그건 이미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님을 생각해봐요.
뜬금없이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왜 하는 거지? 게다가 그녀는 방금 우리 아버님이라고 했다.
언니야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펄쩍펄쩍 뛰던 마리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거리며 얌전히 수긍했다. 난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는데 리사가 내쪽을 보며 빙긋 웃는다.
한석 씨가 훌륭한 사람이길 빌게요.
응원인가요. 놀리는 건가요. 그러나 그녀의 평상시 말투 그대로 조롱같은 말투는 결코 아니기에 힘내라는 소리로 듣겠습니다만 그녀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 했다. 난 아무래도 훌륭하기는 그른 것 같다. 리사의 말을 끝으로 화제는 마리의 대학 생활 이야기로 돌아갔다. 나도 좀 거들었다. 마리의 과장 섞인 이야기를 들으며 리사는 호호 웃고 있었다. 예린은 먹는데 집중하고 있었고.
잠시 뒤, 식사를 마치고 뒤이어 나온 후식까지 해치우고 나니 내 수업시간이 다 되어갔다. 마리는 아직 여유가 있다고 한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계산은 제가 할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계산서를 집어들자 리사가 말린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아니요. 원래 마리에게 사준다고 했으니까요. 리사 씨나 예린 씨에게 고맙기도 하구요.
인사를 나누고 가게를 나왔다. 교양 수업이라 종합강의동으로 향했다. 수업을 듣는 동안 예린의 그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하던 이야기가 자꾸 생각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훌륭한 사람되는 건 무리다. 그러나 최소한 못된 놈은 되고 싶지 않다. 그럴려면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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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명희에게 연락을 취해봐야 겠다.
──────────────────────────
D ) 지혜에게 연락을 취해봐야 겠다.
──────────────────────────이 이야기는 조아라 기준, 카라차의 연재작 더블 데이트 1화에서 18화,
그리고 Route B를 거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복잡하다는 거 쓰는 본인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완결되면 총 집편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더블 데이트 Route C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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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려면 아무래도, 명희에게 연락을 취해봐야 겠다. 그날 그렇게 추태를 부려놓고 아무런 사과를 하지 않는 건 어쩐지 마음이 불편하다. 그녀와 비록 처음부터 좋은 관계로 맺어진 것은 아니었을지언정 지난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이 통했다고 나름 믿어왔는데 이렇게 끝내기는 너무도 아쉬웠다. 결심이 정해지자 행동으로 옮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교를 빠져나와 명희가 일하는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앞에 도착하고 나니 그냥 들어가긴 좀 그랬다. 마침 병원 근처에 꽃집이 하나 있어 꽃다발 하나를 주문한다. 어떻게 해드리냐는 점원의 물음에 그냥 작게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안개꽃 약간과 장미꽃 하나만 넣어서 정말 작게 만들어준다. 이래놓고 만원씩이나 받다니.... 대한민국 꽃집들은 정말이지 떼돈을 벌겠구나.
병원 문 앞에서 심호흡을 가볍게 하고 문을 밀고 들어간다. 평일 오후인데도 사람이 꽤 많았다. 접수대로 갔다. 명희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이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저, 혹시....
네, 어떻게 오셨나요?
접수대에 앉아있던 간호사가 내 얼굴을 보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나를 가리킨다.
아, 명희 친구분? 맞죠?
네. 기억하시네요?
전에는 자주 오셨더니 요새는 좀 뜸하시네요.
전이라 함은 한창 명희 노예질 하고 있을 때를 말하는 거로군. 그때는 정말 뻔질나게 이곳을 드나들었으니 내 얼굴을 알 법도 싶다.
요새 일이 좀 있어서요. 근데 명희 씨는 어디 갔나요?
어머. 아직 모르셨나봐요? 명희 근무 시프트 바뀌어서 오늘은 비번이에요.
그래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전에는 그녀 근무시간을 줄줄이 꿰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못하다. 설마 나 때문에 일부러 시프트를 바꾸었을리는 없고.... 바뀐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 병원을 나와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그녀의 집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삐삐에 지금 찾아간다고 미리 말을 남길까 싶다가 괜히 화만 더 내게 할 것 같은 기분이라 직접 얼굴을 보고 사과하는게 낫겠지 싶어 관두었다.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녀가 사는 동네로 향하는 버스다.
여기였던가?
예전에 노예생활 중에 주인님 모셔다 드린다고 종종 오던 동네였다. 그런데 하도 동네가 요상하게 생겨셔 길을 잃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으으... 저쪽에 삼화슈퍼인가 있었는데.... 이 길이 아닌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아까 내린 버스정류장을 기준으로 해서 다시 출발한다. 내가 길치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 아무래도 이 동네는 미로가 틀림없다. 한참 걷고 보니 여기는 또 어딘가 싶다. 눈에 익은 길이 나올 때까지 다시 되돌아 간다. 으아... 미치겠다.
저, 죄송한데 길 좀 물어볼게요.
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지나가는 사람 중에서 가장 친절하게 생겨 보이는 아가씨 한 명을 붙잡고 삼화슈퍼 위치를 묻는다. 선하게 생긴 아가씨는 생긴대로 친절하게 위치를 알려주었다. 자기도 그쪽으로 가는 중이라나. 그래서 쭐래쭐래 아가씨의 뒤를 따라간다. 한참 따라가다보니 이제서야 내가 어딘지 그리고 목표한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기억이 난다. 삼화슈퍼에 도달했다. 방금 길을 알려준 아가씨와는 눈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참 선한 인상이다.
그래, 삼화슈퍼를 지나서 저 쪽 골목에서 두 번째로 빠지면.... 어라?
내 기억대로 길을 쭈욱 걸어가고 있는데 아까 길을 알려준 아가씨가 명희네 집 앞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살짝 불만이 있는 표정이다.
저기요.
예?
왜 자꾸 따라오죠? 삼화슈퍼는 저쪽이잖아요.
아, 그게요... 제가 이쪽 집에 볼일이 있는데 가는 길이 잘 기억이 안 나서 생각이 난 곳이 삼화슈퍼였던 거 거든요.
이쪽 집?
예. 정확히는 그 쪽이 서 있는 바로 그 집이요.
그러자 아가씨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되묻는다.
우리 집에 무슨 일로요?
우리 집....?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며 어색한 침묵을 나누었다. 아무래도 찾아온 내 목적을 말해야 될 것 같다.
전 여기 사는 이명희라는 분 만나러 왔는데, 혹시....?
그러자 상대에서도 알겠다는 반응이 나온다.
아, 명희 친구분이구나. 난 또 누구라고. 전 명희 언니에요.
내 소개를 하고 간략하게 인사를 나눈다. 명희 언니는 호호 웃으며 문을 열어주고는 나를 들인다.
명희한테 남자친구 있다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이렇게 키크고 잘 생긴 분으로 숨겨놨을 줄이야.
아하하... 남자친구까지는....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까지 도달한다. 그러고보니 집안까지 들어가는 건 처음이다. 항상 집 앞까지만 바래다 주었는데...
들어오세요.
예. 실례 좀 하겠습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려는데 집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언니! 대체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오늘 식사 당번은 언니가.....
부엌에서 나오던 명희가 나와 딱 마주친다.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는 국자까지 들고 있는 모습이 몹시도 인상적이다. 그대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고 있던 명희는 이내 국자를 가지고 나를 가리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더 이상 볼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최한석 씨.
에?
최소한 야, 임마. 좀 심하면 야이, 새끼야! 정도는 들으리라 생각했겄만 그런 것도 아니고 최한석 씨? 여지껏 들어보지 못한 차가운 말투가 날아와 내게 박힌다. 평소와는 너무 딴판의 반응에 내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 하고 있으려니 명희 언니가 나를 돌아보며 곤란한 표정으로 말한다.
어머, 죄송해요. 전 또 집에까지 찾아오셨기에 명희랑 친한 분인줄 알고..... 죄송하지만 돌아가주시겠어요?
에? 예..에....
이미 명희는 몸을 돌려 집안으로 사라져버린 후다. 친절해보이는 인상의 명희 언니가 나서서 내 진입을 몸으로 막는다. 안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이다. 벗던 신발을 다시 신었다. 명희 언니는 다시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며 나를 대문 밖까지 배웅해 주었다. 혹시나 싶어서 들고간 꽃다발이라도 전해줄 수 없냐고 명희 언니에게 내밀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곤란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젠장, 사과하는 것도 쉽지 않네.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한다. 패배감이 나를 감싼다. 괜한 짓을 한건가 싶은 후회가 밀려온다. 침대에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해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여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결국 혼자만의 자만이었던 걸까. 되도 않는 착각이었던 걸까. 밤새 고민해도 떠오르지 않는 결론에 잠을 제대로 이루질 못했다.
어젯밤에 뭐하셨나요?
다음 날, 선영의 과외를 하는데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받게 되었다. 잠 못 잔게 제대로 티가 나나보다.
별로.....
술 냄새가 나질 않는 걸로 보아 과음은 아닌 것 같고.... 여자 냄새가 나지 않는 걸로 보아 밤새 놀아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당신은 개입니까! 냄새로 사람의 지난 행적을 판단하게? ....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귀찮았다. 나는 대충 고개를 흔들면서 하던 채점을 이어나갔다. 전에 비해서 많이 틀리지 않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건 문제의 난이도를 낮춘 내 공이 크다.
흠, 저는 별로 상관없지만... 그 형편없는 낯짝을 오후까지 가져가진 마시길 바랍니다.
형편없는 낯짝이라니... 저런 심한 소리를 당사자의 정면에서 차분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도 선영의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그나저나 왜 오후까지라는 거지? 그점에 대해 물어본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니까.
왜긴요. 이따 오후에 유진이 과외하러 갈 거 아닙니까?
가는데요. 그거랑 제 표정이랑 뭔 상관이죠?
......정말 모르시나요?
네.
선영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더니 혼자 뭐라고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귀찮음이 더 커서 그냥 넘겨버렸다. 시간이 흘러 과외를 마치고 그녀의 방을 나설 때도 다시 한번 주의를 준다.
얼굴 펴세요.
.........알겠습니다.
이젠 잔소리까지 하냐. 니가 내 마누라도 아니고.... 휴우.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겨 예전의 그 커피숍으로 향한다. 커피숍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시간 맞추어 유진이네 집에 찾아가 과외를 시작했다.
후유~
어제 일을 생각하니 한숨 밖에 안 나온다. 창 밖의 날씨가 구리구리해서 더 기분이 우울하다.
그거 아세요?
응?
고개를 돌려보니 유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저씨 지금 과외시작한 이후로 정확히 열 일곱번째 한숨이거든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어? 어.. 뭐... 그다지...
유진이가 나를 한번 째려보듯이 쳐다보고는 다시 문제집을 풀기 시작한다. 나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고층 아파트들이 도미노처럼 늘어서 있는 광경을 눈에 담는다. 사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데 말이다.
커피숍에서도 끙끙거리며 고민해보았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긴 어젯밤에 그리도 고민했는데도 결론이 나질 않는 문제였다. 되도록이면 아예 잊어버리는게 속편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진과 나 사이의 과외 방법이라는 자체가 내 머리를 쓸 일이 없다보니 온갖 잡다한 생각이 자유롭게 머리 속을 드나든다. 복잡한 상념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 책을 펴놓아도 글씨가 눈에 안 들어오고 유진이가 잔소리를 하는데도 그게 귀에 안 들어온다.
명희는 대체 나한테 왜 그렇게 대하는 걸까. 정말 내가 싫어져서 정나미가 떨어진 거라면 차라리 화를 내고 욕을 내야 정상일텐데 그 싸늘한 태도는 대체 어떤 뜻일까. 아직 사과가 부족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내가 제대로 더 사과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뿌리내린다. 물론 그녀의 사나움을 생각해 볼 때 바로는 무리더라도 계속 사과를 하면 언젠가는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러고 보니 명희는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그저 골려 먹고 뜯어먹기 좋은 호구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아아, 정말 모르겠다. 사실 뭘로 생각하든 좋다. 일단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사과를 하고 싶다. 내 본심은 그런게 아니었고 단지 지혜에게 차인 것 때문에 심사가 비틀어져서 그런 거라고.
휴우....
나도 모르게 한숨을 또 내쉰다. 한숨이 끝나기도 전에 탁- 하는 소리가 난다. 쳐다보니 유진이가 볼펜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다. 유진의 눈빛이 날카롭다.
제가 한 번 이야기 한 적 있죠? 아저씨를 계속 과외 선생으로 쓰는 이유 말이에요.
어. 그랬지.
분명 저는 절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아저씨를 쓰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식이면 몹시 곤란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지금 사람 신경쓰이게 하고 있잖아요! 아까부터 한숨이나 푹푹 쉬고!
따박따박 따져대는 묘한 박력에 밀려 나도 모르게 사과한다.
아, 미안. 그냥 일이 좀 있어서 말야.
사과를 듣고 잠자코 있던 유진이 잠시 후 묻는다.
뭔데 그래요?
응?
무슨 일이 있길래 그렇게 티 팍팍 내면서 한숨 쉬고 있냐구요. 여자 문제에요, 돈 문제에요?
여자? 돈? 이게 지금 열일곱살짜리 입에서 나올 소리냐. 물론 돈은 늘 없어서 고민이고 여자도 비슷한 정도의 레벨로 고민이긴 한데....
으음..... 설령 있다고 해도 그건 내 프라이버시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아저씨가 한숨을 푹푹 쉬고 있고, 그것 때문에 제 공부가 방해받고, 그래서 제가 아저씨에게 이렇게 묻고 있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이상 아저씨만의 문제가 아니라구요! 빨리 말해봐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엄청난 박력과 논리력에 나도 모르게 대답을 할 뻔 했다.
........아니, 그냥 별 일은 아냐. 정말이야. 그러니 신경쓰지 마.
진짜 말 안 할 거에요?
자꾸 왜 그러니? 니 일도 아닌데... 그리고 애들에게 얘기할 거리가 못 돼.
흐음. 그렇단 말이죠. 애들에게는.....
내 말을 들은 유진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거실의 전화기로 다가간다.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무선전화기를 집어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아직 수업 시간도 남았고 초밥 시킬 시간도 아닌데 왜 그러나 모르겠다. 한참만에 자리로 돌아온 유진은 별다른 멘트도 없이 다시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 나도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숨을 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말이다.
얼마 후 수업 시간이 다 되고 으례 배달시킨 초밥을 먹고 있었다. 다 먹어갈 때쯤 현관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벌써 그릇을 가지러 왔나 싶었는데 불쑥 들어온 사람은 초밥 배달원이 아니었다.
식사 다 하셨으면 가시죠.
서....선영씨?
사신.... 아, 아니, 레이디스 인 블랙의 선영이 차키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어딜 말이에요?
선영은 대답 대신 유진 쪽을 힐끔 본다. 유진은 선영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선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따라 오시면 압니다.
안 가면 안 되나요?
선영의 차에 또 타라고? 차라리 날 죽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 따라가시면 선생님 과외 앞으로 안 받으려구요.
.....헉.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되어 하늘에 대고 외친다.
'신이여! 이 어린 양을 구원해주소서!'
물론 속으로만.
──────────────────────────
*
더블 데이트 Route C 시작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어디서 많이 본 장면들이 다시 재탕되고 있지만 앞뒤 문맥이 미묘하게 달라져있고 원인과 결과가 조금씩 바뀐다는 점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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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루트를 쓰기 전에 이전 내용을 다시 주욱 읽어보고 있는데 이 시리즈의 가장 첫번째 글에 해당하는 단편 데이트 첫 날에서 중대한 오류를 발견했습니다. 나중에 총집편에 가서 수정하겠습니다만.... 지금은 그냥 두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 퀴즈로 드리죠. 무슨 오류인지 아시는 분은 여기에 댓글로 달아주세요. 첫번째로 정확히 맞추는 분께 예전에 어느 분께도 드렸던 요구권을 선사하겠습니다.
힌트는.... 지혜 대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