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65)

원래 난 술에 꽤 강한 편인데 오늘은 퍽 약해져 있었다. 정신적 고통 때문인지 육체적 고통 때문인지.... 어찌어찌하여 가게에 들어오고..... 요금 안 냈다고 기사는 쫓아오고....... 박군인가 김군인가 그 뭐시기인가 하는 인간한테 택시비 좀 내달라고 그러고....... 옥신각신하는 와중에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싼 죽음의 사신.... 아, 아니, 선영이구나. 암튼 그 여자가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나타나고....... 지난 일들이 명확히 기억나질 않는다. 머리 속에 남아있는 건 시간도 장소도 뒤죽박죽 되어있는 의미 없는 단편적인 기억의 파편 뿐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떤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고 옷은 입고 있지 않았다. 밖은 어두웠고 시계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 밤인가? 새벽인가? 짐작조차 가질 않는다. 

어둠에 점차 익숙해진 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를 가득 둘러싸고 있는 곰인형들이었다. 크기로 보아 침대는 킹사이즈급이었는데도 워낙 인형들이 많아 좁을 지경이었다. 그 뭐다냐. 테디베어인가 테리베어인가 하는 녀석들이 크고 작은 사이즈로 다양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창가에도, 테이블에도 곰새끼들이 최소한 하나씩은 놓여 있었다. 술 먹고 뻗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태평양 위에 있는 새우잡이 배라더라 하는 카더라 통신은 가끔 들어보았는데 이건 뭐시기 시츄에이션이냐. 설마 곰굴에 끌려온 건가. 아님 인형 눈깔 붙이기 강제 노동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머리를 움직였더니 뇌가 깨져 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팠다. 몸을 굴리다시피 억지로 움직여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는 스탠드의 전원을 올렸다. 푸르스름한 빛이 어둠에 가득찬 방의 일부를 밝힌다. 원룸인 듯 싶었다. 침대에서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싱크대와 벽붙이 냉장고가 보인다. 그 쪽으로 다가가 냉장고 문을 연다. 먹을 만한 것이라고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황량한 냉장고 안에서 그나마 생수병이 보이길래 꺼내서 마신다. 좀 살 것 같다. 

다시 방 안을 둘러본다. 내 옷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벌거벗고 있자니 좀 추웠다. 이불을 끌어다가 몸에 둘렀다. 이불을 몸에 둘둘 말은 채 방 안을 더 둘러보았다. 벽에서 전등 스위치를 찾아 올렸다. 밝아졌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게 지금 새벽 12시인지 낮 12시인지도 감이 안 잡힌다. 창문에는 아주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 검정색 커텐이 걸려있었다. 저래 가지고는 밖에서 땡볕이 쏟아지더라도 여긴 빛 하나 안 들어오는 암실이다. 방 안에는 침대 하나, 책상 하나, 화장대를 겸한 장식장 하나 말고는 가구가 없다. 아무래도 여자방 같다.

자세히 보니 한쪽 벽이 붙박이 옷장이었다. 옷장을 열어보았으나 전부 여자 옷만 있었다. 그것도 검은 색 일색..... 왠지 슬슬 불안해졌다. 책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 위에는 탁상용 액자가 이십여개 정도 놓여있었는데 죄다 한 인물이었다.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사진 속 인물을 살펴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만다.

유진이....

그렇다. 그건 전부 유진이였다. 요즘 모습부터 시작해서 그 이전까지 다양한 모습이 찍혀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 다섯 살 정도 되어보이는 아이 사진도 아마 유진임에 틀림없다. 이 쯤 되면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 때 문 쪽에서 띠리릭-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몸을 감싸고 있는 이불을 꽉 잡는다.

깨어났군요.

선영이었다. 그녀는 작은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봉지 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어 준다.

숙취해소음료입니다. 드세요.

 아, 예.....

쭈볏거리며 그녀가 내민 병을 받아들었다. 손 하나를 놓았더니 이불이 좀 내려갔다. 황급히 고쳐잡아 다시 올린다. 그 모습을 보며 선영이 이맛살을 찌푸린다.

이미 볼 건 다 보았습니다. 한석 씨 옷을 누가 벗겼을 것 같나요?

 에엑? 그....그게 그러니까....

 토악질로 잔뜩 더러워져서 도저히 그 꼴로는 내 집에 들이지 못할 것 같아서 일단 모두 벗기고 샤워기를 대충 닦아드렸습니다.

 가....감사합니다.

이 여자에게 알몸을 내맡겼단 말인가. 정신이 아득해진다.

괜히 남의 이불 안쪽에다가 그 흉한 자지 문지르지 말고 그냥 두세요. 쳇. 이불이랑 시트도 다 빨아야겠네.

.........나왔다. 그녀의 자지 소리. 그래, 그래야 한선영이지. 이불이 내려가든 말든 반쯤 포기하고 의자에 걸터앉아 음료를 마셨다. 약간 한약 냄새가 나는 듯한 걸쭉한 음료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속이 화악- 하면서 다소 진정되는 느낌이다. 어라? 이거 효과가 꽤 좋은데? 무슨 구정물이나 양잿물... 것두 아니면 독이라도 타서 먹일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 안도하는 표정은 뭔가요? 내가 무슨 독이라도 먹일 줄 알았나요?

귀신이냐, 이 년은. 그게 아니면 정말 나란 놈은 그 때 그 때 드는 기분을 전혀 숨길 줄 모르는 모양이다. 선영의 날카로운 찌르기에 대충 웃으며 넘어갔다. 테이블에 마주 앉은 선영이 뭔가 내밀었다. 무슨 목록 같은게 적힌 종이였다.

뭔가요, 이건?

 읽어보고 말하세요.

 예....

A4 용지 위에 검정색 볼펜으로 따박따박한 느낌이 드는 글씨로 다음과 같이 씌여 있었다.

『청구목록 및 비용

택시비 1만 5천원

 영업방해 손실금 278만원

 취객 운송비 8만 7천원

 카시트 교체비 153만원

 1일 숙박비 15만원

 의류 세탁비 3만 3천원

 숙취해소음료 1만원

합계 4,605,000원』

점점 어처구니가 사라져가는 나에게 선영이 크게 선심쓰듯이 말한다.

십만원 미만으로는 절사처리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사백 육십만원만 주시면 되겠네요. 아참, 그리고 제 침대시트 세탁비는 일단 세탁소에 맡기고 금액을 물어볼테니 추후 정산해 주시길 바라요.

 에... 이게 대체?

 뭐긴요. 최한석씨가 저에게 지불해야 할 금액입니다. 결코 임의로 증액하거나 하지 않았으니 나중에 해당 요금의 영수증도 모두 보여드리죠.

차분한 말투의 선영과는 달리 나는 제대로 폭발하고 말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친다.

이걸 나보고 내라구요?! 당신한테?! 밑도 끝도 없이 이런 종이나부랭이만 들이대면 내가 예 알겠습니다 하고 순순히 넘어갈 순댕이 같아 보이나요?

종이를 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누구네 집 개이름도 아니고.... 이만한 돈이 있을 리가 있나. 게다가 무슨 항목들이 이 모양이야?

그 흉한 자지부터 안 보이게 일단 앉으세요.

아차, 내가 지금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너무 갑자기 벌떡 일어나버렸다. 그 바람에 두르고 있던 이불도 바닥에 떨어져 있던 참이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 앉고 이불을 끌어당겨 하반신을 덮었다. 차분하고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가 이어진다.

항목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제 설명을 모두 들은 후에도 지불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다시 묻도록 하죠.

 좋아요. 설명해 보세요.

내 비록 지금 발가벗고 있어서 위엄이 다소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디 이런 여자가 나를 등쳐먹게끔 놔둘 수 없다.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마주본다. 선영은 나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다만 저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만약 한석씨가 지불을 거절한다면 법의 힘이라던가 다른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겠네요. 제가 잘 아는 어떤 분들은 떼인 돈만 전문으로 받으러 다니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다른 방법? 떼인 돈 전문?.... 살짝 불안해진다.

어디 보자.... 우선 택시비. 기억나시죠? 한석씨는 택시를 타고 와서 저희에게 내달라고 생떼를 부리셨죠. 제가 지불했습니다만 저는 한석씨에게 부디 택시를 타고 저희에게 왕림해주십사 부탁드린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 비용은 한석씨가 내주셔야겠지요.

 예에.... 그건.... 그렇죠......

그제서야 내 지난 밤의 행적들이 조금씩 기억나기 시작한다. 택시에서 내릴 때는.... 으으.... 가관이었지.

그것도 조용히 들어오셨다면 다행일텐데 입구에서부터 기사님과 한 바탕 하시고, 또 들어오면서 박군과도 드잡이질을 하셨구요, 덕분에 그 때 들어오려던 단골 손님 중 한 분이 몹시 언짢아 하시며 발길을 돌리셨어요. 그 분이 평상시에 저희 가게에서 쓰던 비용과 인원수를 산출하면 손실금이 나옵니다.

 헉...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저희 단골 손님 앞에서 무슨 추태를 부렸나 까지 일일히 설명해드릴까요?

 아뇨. 됐습니다. 저는 그저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많은 금액이 제게 부담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되어서....

 나중에 이 손님이 평소 어느 정도의 매출을 올려주시는지 장부를 보여드리도록 하죠. 장부는 가게에 있으니까요. 나중에 가게로 가면 확인시켜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예에....

어라. 이건 좀 아닌데 싶으면서도 그녀의 말빨에 함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리고 영업이 끝나고 그때까지 그러했듯 대충 방에 쳐박아두고 잠가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괜히 룸에 있는 물건을 더럽힐까봐 제가 직접 끌고 여기로 왔습니다. 운송비는 그에 상응하는 값이구요. 제 차를 타고 오면서 뒷자리에서 오바이트를 제대로 하셨습니다. 덕분에 제 차는 지금 쓰레기 냄새를 피우면서 공장에 입고되어 있어요. 카시트를 싹 교체해달라고 하니 저 금액을 청구하더군요.

 그....그랬다고 싹 교체라니! 청소도 아니고.... 그러면 금액이 너무!!!

그나마 협상을 해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항의를 해보았더니,

몹시 더러운 기분이 들어 이참에 아예 폐차시키고 새로 뽑을까도 생각했습니다만... 무슨 불만이라도?

 ........아뇨. 없습니다. 계속하시죠.

서슬 퍼런 저 눈빛에 감히 대항을 못 하겠다. 선영은 그 이후로도 나를 이 방에서 재운 비용과 내 옷을 가져가 세탁하는 비용, 거기다 방금 먹은 그 효과 좋은 숙취해소음료의 가격까지도 모두 언급했다. 

졌다. 

완벽한 KO패다.

꾸깃꾸깃해진 종이를 들여다본다. 아무리 보아도 그 숫자는 변하지 않는다. 내 일년치 등록금 플러스 생활비에 맞먹는 비용이 거기에 고스란히 적혀서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반박을 해보려고 해도 뭐하나 대들 구석이 없다. 아니라고 하고 싶다.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 너머에서 어렴풋하게 흘러나오는 기억의 단편들은 지난 밤의 내 추태를 생생히 재연하고 있다. 술집에서, 차안에서, 길바닥에서 벌인 온갖 추태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 아프게 떠오르는 건 껍데기 집에서 나에게 끝이라고 외치며 먼저 나가버리던 명희의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옷을 황급히 꿰어입고 나가버린 나에게 뭔가 더 이야기하려던 지혜의 모습..

제가 해드린 설명에 이의가 없으시다면 해당 금액을 기준으로 차용증을 작성하도록 하죠.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이내 다른 종이를 꺼내어 거기에 뭔가를 기록하기 시작하는 선영을 보며 최대한 물기 어린 목소리를 짜내어 물어보았다.

저..... 선영씨. 정말 미안합니다만.... 어떻게 좀 안될까요? 학생인 제가 무슨 돈이 있다고.....

 돈도 없는 분이 택시를 타고 룸살롱에 오시나요? 그것도 곱게 오는 것도 아니고 와서 깽판을 치고?

 그건 그러니까 모르는 곳도 아니고....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발 부탁 좀 드릴게요.

 무슨 부탁인지 모르겠군요. 그래도 아는 분이니까 직접 제가 모시고 금액을 청구하는 거지, 모르는 분이 이랬다면 바로 경찰에 넘겼겠죠?

 .........넘겨주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그런데요....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어떻게 안 될까요?

 한 번만 뭐요?

 봐주세요.

그러자 선영이 쓰던 것을 멈추고 나를 쳐다본다. 

그게 부탁하는 태도인가요?

 예?

 한석씨가 한 짓을 돌이켜보면 지금 바닥에 엎드려서 빌어도 시원찮을 판인데 그렇게 똑바로 쳐다보면서 사과를 한들, 받아들이겠어요?

후다닥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엎드렸다. 이마를 땅에 대고 외친다.

잘못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흐음.....

선영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펜을 테이블에 올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꼴 사납군요.

순간 움찔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태껏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 중 가장 차가웠다. 물론 그렇다고 평상시 내게 건넨 말 중에서 따뜻하게 말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던게 아니지만 지금만큼은 결코 아니다. 지금의 말투는 정말이지 겨울 중에서도 한 겨울, 그 중에서도 시베리아 벌판에서나 느낄 수 있을 만큼의 한기를 담아 내게 말하고 있다.

남자가 고작 돈 몇 푼에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곧바로 엎드려 비는 건가요? 그게 당신이라는 사람의 수준인가요? 정말이지.... 한심하고도 한심하군요.

뭔가 좀 울컥했다. 고작? 몇 푼? 아, 진짜! 고개를 쳐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좀 높아졌다.

고작? 당신한테는 고작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일 년 등록금보다도 더 된다구요! 생활비로 치면 2년치도 될 것이고.... 그만한 금액이 고작이라니? 무릎을 왜 못 꿇어! 내가 이렇게라도 해서 당신 마음이 풀리면 좀 줄여줄지 어떻게 알고.....

 안 풀리는데요. 전혀.

 ........크윽! 당신 진짜!!!!

 일단 앉아봐요. 정 그러하다면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자리에 앉는다. 채권자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자지가 보이지 않도록 잘 덮었다. 선영이 다른 종이에 펜으로 뭔가를 적으며 묻는다.

지금 유진이 과외로 한 달에 얼마 받으시죠?

 에? 40만원인데요....

 460만원을 40만원으로 나누면 12가 조금 안 되겠군요. 좋습니다. 지금부터 1년간 과외를 해서 그 돈을 갚도록 하세요.

뜬금없는 과외 소리에 고개를 갸웃한다.

학생이 있나요? 제 과외를 받을 학생이 유진이 말고 또....?

 있습니다.

선영이 대답한다. 그리고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리킨다.

저 말입니다.

바로 이해하지 못 하고 약 3초간 멍때리고 있었다.

에엑?

내가 잘못 들었나 한참을 고민했지만 선영은 침착하게 다시 말했다.

저를 가르치시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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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ute B 2화입니다. 야설넷에서는 그나마 제목으로 분류되지만 조아라쪽에서는 통째로 합쳐서 나가느라 더블 데이트 24화인가 23화로 되어있죠;; 제 작업 파일에서는 17B-02.txt입니다. 여기가 어디지.... 쓰는 본인이 뭐가 뭔지 모를 지경이 슬슬 되어갑니다. 헷갈린다고 하는 분 있으시던데.... 이해합니다. 저도 그렇다니깐요.

게다가 지금 플로우차트를 그려놓고 생각해보니 앞으로 세 번의 분기가 더 남았고 Route E까지 계획되어 있습니다;;; 각 루트에서 트루 엔딩으로 갈지 안 갈지도 분기로 잡으면..... 허거덩. 아, 내가 이걸 왜 시작했지. 슬슬 후회도 나는군요... 암튼 완결나거든 각 루트 별로 정리 제대로 해서 하나의 글에 하나의 루트를 때려박아서 정리하도록 할테니 그때까지는 조금만 불편해도 참아주세요. 저도 최대한 보시기 편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지난 화에서 지혜랑 응응했는데 플러스 10점을 안 했더군요. 지혜가 결혼은 하지만 그렇다고 히로인 명단에서 빠지지는 않습니다....? 어라?

현재까지의 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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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지혜 : 65 pt

 | 이명희 : 47 pt

 | 진유진 : 45 pt

 | 한선영 : 38 pt

 | 박효진 : 22 pt

 | 김마리.김리사 : 18 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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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댓글이 많이 안 달려있어서 집계는 다음에 몰아서 하겠습니다.

 대학을 가시려구요?

 아니요.

 그럼 왜요?

 과외 하나 받자고 굳이 자신의 공부 목적까지 말해야 합니까?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난감했다. 과외를 몇 번 해보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가르친 적은 없었다. 그러고보니 선영은 나이가 어떻게 될까? 대충 나랑 비슷하거나 좀 더 위일 것 같은데...

그래서 할건가요, 말건가요.

 안 하겠다고 하면 아까 그 금액을 고스란히 청구할거죠?

 그렇습니다.

 하겠다고 하면 따로 청구하지 않구요?

 예.

그렇다면 따로 대답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그러자 선영이 다른 종이를 꺼내어 거기에 계약서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한참동안 적어내려가던 그녀는 얼마 후 인주통을 가져오더니 계약서와 함께 내민다.

지장 찍으세요.

쓰고 있는 와중에 계속 힐끔거리면서 들여다 본 내용이라 더 볼 것도 없었다. 나는 460만원짜리 차용증에 하나, 지급각서인 동시에 과외계약서인 종이에 하나 더 지장을 찍었다. 거기에는 460만원의 금액을 월 40만원의 과외로 12개월 동안의 갚는다는 내용이 지극히 사무적으로 씌여있었다. 40곱하기 12하면 480만원 아니냐고 살짝 묻자 엄한 표정으로 이자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아, 예. 그러세요. 

얼마전에는 명희에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붙들려 노예생활을 하였건만 이건 또 뭔 노예계약이냐. 자본주의 만세다. 애덤 스미스 만만세! 사회계약설, 그 뭐시기 어떤 시키냐.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군. 암튼. 한숨만 푹푹 나온다. 자기도 지장을 찍고 나더니 선영은 몹시 흡족한 표정으로 서류를 갈무리한다. 나중에 복사해서 나에게도 한 부 주겠다나 어쨌다나. 예, 예, 그러십시요. 부디 그러십시요.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시간을 정해보죠.

 그 전에 잠깐만요.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묻기로 했다.

아까는 그냥 얼버무렸는데, 이제 과외를 시작하게 되면 선영씨가 정확히 뭘 하실 건지 알아야 합니다.

 ......그냥 가르치는 건 안 됩니까?

 아뇨. 안돼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과외선생님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선영씨의 최종학력을 알아야겠구요, 그리고 공부를 배워서 뭘 어떻게 하실 건지도 알아야겠어요. 검정고시를 치를 건지, 아니면 수능을 치려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뭔가 다른 공부를 하시려는 건지 말입니다. 그래야 학습 방법이랑 교재 같은 것을 정하죠.

그러자 여태까지 지극히 사무적이고 딱딱하던 선영의 표정에 다소 변화가 생겼다.

최....종학력이요?

 예. 이런 거 묻는 건 다소 실례지만 앞으로의 교육을 위해서는 꼭 알아야겠네요.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는다. 여태껏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고양이 쥐잡듯 따박따박 대꾸하던 선영이 처음으로 템포를 잃는다. 그녀가 아무 대답이 없기에 내가 묻는다.

대학은 안 나오셨죠?

 ................예.

 고등학교는 인문계인가요, 실업계인가요?

 .............

뭔가 입은 우물거리는데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선영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소리친다.

당신이 내가 학교 어디까지 나왔는지 알아서 대체 뭘 할려고?!

시뻘개진 얼굴로 나에게 소리쳐보았자 이쪽은 그저 심심하다거나 궁금해서 물어본게 아니란 말이다. 최대한 평정을 유지한채로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뭘 하긴요. 그래야 수업 진도랑 난이도를 정하죠.

 이....이익.....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올리는데 설마 그걸로 날 내려치려는건 아니겠지요? 잠시 후 그녀는 탁자를 탕 한 번 내려치고는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러나 아까처럼 마주 앉는게 아니라 살짝 방향을 틀어 옆을 보면서 앉는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옆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한참동안 붉어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던 그녀가 가만히 말한다.

고등학교는.....

 예.

 ..........나왔어요.

 네?

여전히 웅얼거리는 말투라서 잘 안 들린다. 나도 모르게 귀를 그녀쪽으로 기울인다.

어디 나오셨다구요?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순간,

안 나왔다구요!!!!!!!!!!

아이고, 귀떼기야. 고막 터져나가는 줄 알았다. 벼락같은 외침에 직격당해버린 왼쪽 귀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안 나오셨다구요? 그럼 중퇴?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그럼 중졸?

 ......중학교는 들어는 갔는데.....

 그럼 중학교 중퇴?

그제서야 선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러면 일단 중학교 과정부터 시작하시고 고등학교 레벨은 천천히...

 아뇨, 빨리 해요.

 에? 

빨리 고등학교 과정부터 시작하자구요.

 중학교 과정을 제대로 해야 고등학교 과정을 익힐 거 아닙니까.

그러나 그녀는 막무가내로 고등학교 과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우겼다. 비록 무뚝뚝하긴 하지만 그래도 늘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한 번 우기기 시작하니 대책이 없다. 그나저나 그녀가 딱 어떤 한 문제에 대해서만은 어떤 양보도 타협도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혹시 유진이 때문에 그럽니까?

혹시나 싶어서 한 마디 던져 본 건데 제대로 꽂힌 모양이다. 선영의 입이 딱 다물어진다. 

설마 이 과외 받겠다고 하는 것도 유진이 때문에 그러세요?

나와 시선을 피한 채 한참동안 망부석처럼 있던 선영이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자신이 굳이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이유를 털어놓는다.

만약 유진이가 공부할 때, 언니, 이거 잘 모르겠어, 라고 물어봤을 때.... 그 때 제대로 대답해주고 싶어요.

.............중증이구나. 이 여자. 진심으로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될 진성 골수분자 유진이 빠순이구나. 나는 뒷목을 잡고 잠시 멍해져 있었다. 내가 아는 유진이라면 딱히 누구한테 무슨 문제를 물어보지도 않을 뿐더러 그렇게 살갑게 말하지도 않을텐데... 

그러고보니 그때 나와 유진이가 과외를 하고 있는 광경을 무척이나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선영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에게는 그저 과외를 하는 일상적인 장면이었지만 그게 선영에게는 이루고 싶은 어떤 꿈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일단은 제가 가르치는 거니까요...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해주세요. 최대한 빨리 고등학교 과정에 접어들테니 다음에는 중학교 과정에 대해 간단히 테스트 해봐서 공부 수준을 정하는 걸로 하죠.

그제서야 선영도 수긍한다. 

그런데 이런 거라면 굳이 과외를 따로 받지 않으셔도 학원 같은데 다니셔도 되는 거 아닌가요?

 안 그래도 작년에 한 번 마음 먹고 등록을 해본 적이 있어요. 검정고시 학원에.

 아, 예.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자지 달린 놈들이 자꾸 추근거려서 때려쳤어요.

 에? 예에.....

지금 당신 앞에 앉아있는 놈도 그게 달렸습니다만...... 하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괜한 긁어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아 그냥 잠자코 있기로 했다. 그러나 내 표정은 이미 그녀에게 묻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신은 상관없어요.

 에? 저 말 입니까?

 그래요, 당신.

웬일로 선영이 나를 좋게 평가해주는 건가? 그러나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바퀴벌레나 날파리를 보고 암수를 구별하진 않잖아요. 그냥 싫은거지.

 ............

졸지에 벌레급이 되어버렸다. 젠장할.

이후로 그녀와 나는 과외 시간을 정했다. 교습은 이 방에서 하기로 했다. 이제 나는 수업이 없는 화요일과 목요일 낮이면 이 방으로 와서 그녀를 가르쳐야 한다. 교재는 내가 알아서 준비하기로 했다.

당신이 나를 가르치고 있다는 건 절대 비밀이에요. 알았어요?

 유진이에게도요?

 당연하죠!

 예에....

꽤나 단호한 태도라서 적지 아니하게 놀란다. 과외받는 일이 뭐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진장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 않나? 그러나 그녀의 태도는 확고했다. 나를 두고 맹세라고 시킬 참이다.

누군가에게 이 사실이 누설된다면 그대로 계약 파기에요. 알았어요? 어떻게든 들키면 절대로 안 된다구요.

 예, 예....

 만약 당신과 나 말고 다른 사람,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사실을 알게 될 시에는......

 시에는?

꼭 쥐어진 선영의 주먹이 파르르 떨린다. 잠시 후 손을 들어올린 선영은 나를 가리키며 비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당신을 고자로 만들어 버리겠어요.

 으엑!

왠지 모르게 설득력 충만한 그녀의 선언을 듣고 있노라니 아랫도리가 후덜덜 하다. 내가 수긍을 하자 그녀는 서류들을 한 데 모아두고는 나를 쳐다본다.

그거 언제까지 둘둘 말고 있을 건가요?

 이거요?

옷이 하나도 없는 나는 침대에 있던 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 있던 참이다. 그녀는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 때문에 시간을 많이 뺏겼어요. 지금부터라도 빨리 자야 되니 그 이불 내놓으세요.

 에에? 그럼 전 옷이 하나도....

 앞으로 세 시간 이내로 세탁소에서 당신 옷을 가져다 줄 거예요. 옷이 오면 받아입고 나가세요.

 알몸으로 세탁소 사람을 만나라구요?

 무슨 문제라도?

 당연히 문제 있죠!!

그러나 그렇다고 선영의 옷을 입을 수는 없었다. 사이즈도 사이즈거니와 내가 옷을 입었다가 그 옷에 불싸지를 것 같은 여자이니까. 옥신각신 하던 우리는 결국 합의점을 찾았다. 이불을 내놓을 수 없는 나와 이불이 필요한 그녀가 함께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운 것이다. 물론 서로 등을 돌린 채로 말이다.

세탁 아저씨가 올 때까지만 입니다. 행여나 당신 몸 이쪽으로 돌려서 자지가 내 몸에 닿기라도 하면 바로 잘라버릴 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예에....

그러나 원래 2인용 침대도 아니거니와 침대 한 켠에 가득 차 있는 곰인형들 때문에 자리는 비좁기 그지 없었다. 나는 나의 물건을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아이고. 자세가 불편하니 잠도 안 온다. 선영에게 말을 걸어본다.

선영 씨는.... 절 싫어하던 거 아니었나요?

 맞아요.

 근데 어째서 싫어하는 사람에게 과외를 맡깁니까?

 .........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서로 등을 맞대고 있으니 얼굴이 보일 리 없다. 한참 만에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변덕이라고 해두죠.

 변덕이요?

 흥미가 생기더군요. 언니가 말 한 당신 이야기를 들으니....

그러고 보니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선영이 말하는 언니라는 사람은 아마도 유진의 엄마, 유미를 말하는 거겠지.

유미 씨가 저에 대해서 대체 뭐라고 하시기에.....

 궁금해요?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신 것 같아서요.

 흐음....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조금 부시럭거리더니 대답한다.

언니는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 볼 줄 아는 여자랍니다.. 이 바닥에선 유명하죠.

 사람을 볼 줄 안다니...?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그 사람의 기운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그런 걸 느낀 다나 봐요.

 아니, 무슨 길바닥에서 도를 아십니까 하는 분도 아니고....

 후후, 그러게요. 나도 처음에는 농담이거나 아니면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정말 언니가 말한 사람 중에 잘 된다고 하는 사람은 정말정말 잘 되었고, 언니가 안 된다고 말한 사람들이 안 되는 걸 보고 있으니 저절로 믿게 되더군요.

지난번에 한 번 봤던 유미의 분위기로 보면 전혀 안 그럴 것 같은데... 의외로 무속인 타입인가?

그럼 유미 씨가 저에 대해서도 무슨 말씀 하셨나요?

 ......그랬죠.

 뭐라 그러셨는데요? 잘 된다고 하던가요? 아니면?

평상시에 점이라든가 운명이라든가 그런 거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막상 나에 관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몹시도 궁금하여 귀를 바짝 세우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막상 등뒤에서 들려온 소리라고는,

휘둘리는 타입이라고 하더군요.

란다. 나도 모르게 김새는 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에엑?

좋은 거냐, 나쁜 거냐.. 그게.

정확히 말하면 휘두르고 싶은 타입. 당신이 곤란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걸 더 보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많을 타입이라고 하더군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슬프네요....

지혜, 명희, 효진... 그리고 유진이나 마리, 그리고 여기 지금 나와 한 이불을 덮고 있는 선영까지도 그 사실을 충분히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만다. 정확하기는 더럽게 정확하네. 진짜 자리 까셔도 될 듯.

좋은 사람에게 휘둘리면 당신은 잘될 거예요. 나쁜 사람에게 휘둘리면 당신은 망할 거예요.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다른 사람들이라고 안 그러겠어요?

 당신은 그 정도가 좀 심한 거죠.

 끄응.....

 그리고 또....

 또 있어요?

또 얼마나 안 좋은 소리가 나오려고 그러나 싶어서 몸을 돌려 선영쪽을 보는데 그때 마침 나를 향해 몸을 돌리던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쩌다 보니 눈싸움이 된다. 잠시 후 선영은 시선을 거두더니 다시 등을 돌린다.

말하지 않겠어요.

 에엑?

 정 궁금하면 열심히 궁리해봐요. 숙제라고 해두죠.

 숙제인가요.....

젠장. 선생님은 난데 왜 당신이 숙제를 내?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그렇다고 딱히 태클을 걸 도리도 없었다. 그러고보니 지금 이 상황이 뭐랄까. 이상하기 그지 없다. 비록 나를 싫어하는 여자라고는 하나 지금 여자랑 단 둘이 한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거란 말이다. 게다가 나는 알몸이고. 기분이 요상했다. 어쩔 수 없이 등이 닿았는데도 선영은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등으로부터 전해지는 따뜻한 사람의 기운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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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트B 1,2화 집계 결과입니다.

김마리 2표, 한선영 5표, 진유진 4표, 김지혜 2표, 이명희 1표입니다.

 진희 2표는 기각합니다 ;;;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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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지혜 : 67 pt

 | 진유진 : 49 pt

 | 이명희 : 48 pt

 | 한선영 : 43 pt

 | 박효진 : 22 pt

 | 김마리.김리사 : 20 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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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이가 2위로 올라서는군요. 으악. 어쩌냐... 얘 먹으려면 아직 멀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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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 투자한 점수는 회수가 안 됩니다. 고객님.

 투표할 때는 마음대로여도, 회수할때는 아니랍니다.

*

 엄격한주인님,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원래 처음 구상은 그랬는데 루트A 때 트루엔딩 획득에 필요한 득표수가 미달되었답니다. 제 집필실 가보시면 쓰다만 트루엔딩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른 애들 다 쳐내고 메인만 가는 거죠. 다음 루트부터는 그 캐릭이 안 나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

 좋은 밤 되세요.

눈을 다시 떴을 때, 몹시도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찌르르르르르- 찌르르르르르- 여전히 숙취가 가시지 않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몸이 무겁다. 몸을 마음대로 일으킬 수 없다. 정확히는 왼팔이 몹시 무겁다.

고개를 들고 왼쪽을 바라보니 내 왼팔을 베개 삼아 베고 있는 선영의 머리가 보인다. 으윽. 이런 자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채권자님께서 일어나서 본다면 또 나의 귀중한 그곳을 자른다고 덤비겠지. 최대한 팔을 조심조심 빼내어 침대 밖으로 나온다. 그러는 와중에도 차임벨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골 아프게 시리.... 나는 짜증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현관에 대고 외쳤다.

나가요, 나가!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비비며 현관문을 연다. 거기에는 세탁은 물론, 다림질까지 완벽하게 잘 되어있는 낯 익은 옷이 누군가의 손에 들려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몹시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언제나 신속, 정확, 깨끗을 자랑하는 ...... 꺄악!! 변태!!!

참나, 세상이 어찌되려고 어떤 놈의 변태가 신속하고 정확하며 깨끗하기까지 한단 말인가. 말세로다. 말세. 안 그래도 요새 좀 있으면 지구 망한다고 지하철역마다 시끄럽게 떠드는 놈들이 있던데 그 놈들이 설치는 이유가 있었구만.

그러나 오피스텔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날카로운 비명소리는 그 때까지 덜 깬 수면에 헤롱거리고 있던 나의 뇌를 일깨웠고 그제서야 그 놈의 신속, 정확, 깨끗한 변태가 누굴 가리키는 건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이를 테면 세탁한 옷을 배달 온 꼬마 아가씨 앞에서 알몸으로 나타난 녀석이라던가. 뭐 그런 놈 말이다.

우왁!!!

황급히 손을 뻗어 눈 앞에 보이는 내 옷을 낚아채어 몸 앞을 가린다. 앞에 서 있는 꼬꼬마에게 이미 보일 것 다 보였다고는 하나 이제부터라도 가려야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꼬마 아가씨, 눈을 가리려면 손가락을 착 붙여서 눈 전체를 가려야지 손가락이 그렇게 벌어져 있으면 눈이 전혀 안 가려지잖니!!

죄...죄송합니다!!!

사과를 해야할 사람은 난데 앞에 서 있는 꼬마 숙녀가 90도로 허리를 굽혀 먼저 사과한다. 

아니요. 제가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나 역시 가볍게 목을 숙여 인사를 하고 문을 닫으려는데 이 년이 문을 못 닫게 한다. 

잠깐만요!

왜! 더 보고 싶은 거냐? 그런 거냐!!

네?

한 손으로는 문 손잡이를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옷으로 전면을 가리느라 자세가 좀 어정쩡했다. 게다가 이 옷을 감싸고 있는 비닐 때문에 제 자리에 고정이 안 되고 자꾸 흘러내리려고하는 통에 미쳐버리겠다. 나 좀 빨리 들어가게 해줘! 아, 쫌!

세탁비 안 주셨는데요?

 에에?

세탁비? 아, 세탁소에 옷을 맡기면 돈을 주어야 하는 건가? 살면서 세탁소에 옷 맡겨 본 적이 손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이라 그런 훌륭한 제도가 있는지 잘 모르고 살았다. 그나저나 어떤 훌륭한 제도든 뭐든간에 나 좀 빨리 안에 들어가게 해주고 하면 안 될까?

저.... 일단 이 문을 닫고 제가 옷을 입은 다음에 돈을 찾아서 드리면 안 될까요?

아직 추운 날씨인데다가 알몸인데도 불구하고 땀이 철철 날 것 같다. 사정조로 나오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처절했다. 그러나 소녀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죄송하지만요, 그렇게 문을 닫고 다시 안 여는 분도 종종 있어서요. 되도록이면 지금 바로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한 발을 문틈으로 스윽 집어넣는 모양새가 흡사 프로 수금꾼이로다. 너 세탁소 그만 다니고 일수 받으러 다녀도 되겠구나. 그나저나 으갸아악!! 니가 그렇게 안쪽으로 자꾸 들이밀면 나랑 더 가까워지고 있잖아!! 여전히 미끄러져 내려가려는 옷들을 추스리느라 내 자세는 영 바르지 못한다. 황급히 돈을 찾아 본다. 알몸 어딘가에 주머니가 달려있어서 거기서 돈을 꺼낼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지금 내 수중에 돈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러고보니 내 지갑은 어디있지? 소지품들은 아직 선영에게 받지 못 했는데?

지금 뭐하는 거죠?

서늘한 목소리. 잠이 덜 깬 목소리이긴 하지만 여전히 박력을 담고 있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선영이었다.

아, 선영 씨! 저기, 이 분이 세탁비를 달라고 하시는데.... 으악!

뒤를 돌아다본 나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어찌나 놀랐는지 들고 있던 옷을 죄다 떨어뜨리고 다시 한번 신속, 정확, 깨끗을 자랑하는 변태가 될 뻔 했다. 당신은 아까 평상복으로 잠들지 않았었습니까? 어째서 지금은 브라와 팬티 차림입니까? 그나저나 브라와 팬티도 검정색 일색이라니... 겉과 속이 참 일관된 분이군요. 선영은 자신의 차림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현관으로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한다.

음, 양씨 아저씨에게는 제가 매달 말일에 정산해서 드리고 있는데 지금 따로 돈을 받아가야 하나요? 사장님이 꼭 지금 받아오라고 하시던가요?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신 건 아닌데.... 아, 혹시 장부 손님이세요?

선영의 설명을 들은 수금원은 그제서야 발을 빼내고 뒤로 한 발 물러선다. 이제서야 녀석을 제대로 관찰한다. 얼굴은 귀여운 편이고 몹시도 똘망똘망하게 생겼다. 나이는 이제 열 대여섯살 정도 먹었을까 말까 싶은 쪼끄만한 녀석이었다. 유진이보다도 키가 작고 더 앳되 보이는 얼굴이지만 씩씩한 표정에 넘쳐흐르는 기운과 씩씩한 박력에서 어쩐지 유진이보다도 언니뻘일 것 같은 분위기였다. 녀석은 문에서 완전히 물러나 다시 꾸벅 인사를 한다.

그럼, 계속 수고하세요!

 에?

그러고는 나에게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화이팅! 까지 외치고 쏜살같이 사라진다. 뭘 수고하고 어떤 걸 화이팅하라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닫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옷이 왔군요. 얼른 입고 나가세요.

 아, 예.

쭈볏거리며 옷을 입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시츄에이션이 누가 보면 딱 전형적인 그 일 직후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몸의 남자와 가장 기본적인 속옷만 걸친 여자라....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군. 녀석이 나에게 수고하라 그러고, 화이팅이라고 외친 이유는 그 뭐시다냐. 좀 더 열심히 하란 말인가? 선영을 상대로? 으으.... 어쩐지 어색하군. 아무리 그녀와 한 침대에서 이런 차림으로 같이 잤다고는 하나 성욕보다는 오래 살고 싶은 욕구가 강한 나로서는 그런 망상을 지워버린다. 

내가 옷을 입는 동안 선영은 침대 머리맡에 있는 서랍장에서 내 소지품도 꺼내어 챙겨준다. 그녀는 속옷 바람인데도 내 앞에서 전혀 꺼리낌이 없다.

빠트린 거 없나 확인하세요.

소지품이라고 해봐야 지갑과 삐삐가 전부다. 확인이고 자시고 할 게 있나.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지갑을 열었는데 그 안에는 내가 소지하고 다니던 금액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 들어있었다. 원래 내 지갑은 엔꼬였는데 말이다. 이 푸르디 푸른 세종대왕님들은 대체 뉘신지.

저, 여기 제 돈이 아닌게 들어 있는데요?

그러나 나의 질문은 받은 선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나에게 관심을 잃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졸린 기운이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가 나른나른하게 대답한다.

착수금이에요. 그걸로 교재 준비하고 다른 필요한 거 챙기세요. 하아암.... 그리고 남자가 그렇게 너무 빈 지갑으로 다니는 것도 보기 안 좋아요..... 그러면..... 다음에.....

 아, 예.

대체 누가 보기에 안 좋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왕 주신 돈이니 잘 쓰겠습니다. 그나저나 침대로 들어간 그녀가 옆에 있는 커다란 곰돌이를 끌어다가 품에 안는 걸 못 본 체 하기로 했다. 어쩐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듯한 기분이다. 다행히 현관이 오토락이라서 따로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죽여 조용히 빠져나온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복도 양 옆으로 똑같은 모양의 문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헷갈리지 않도록 선영의 집 번호를 외어둔다. 

복도 끝에 엘레베이터가 있었다. 버튼을 누르고 기다린다. 곧 이어 도착한 엘레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밖으로 나간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여기가 어딘지 전혀 감을 못 잡겠다. 건물 밖에서 왼쪽으로 가야되나 오른쪽으로 가야되나 고민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난다. 가까운 전철역이라도 물어볼까 싶어 몸을 돌렸다가 나도 모르게 우뚝 서고 만다.

아, 안녕하세요.

 ....아, 예에....

배달을 아직 덜 마친 건지... 한 손에 옷가지 몇 개를 들고 있는 아까 그 소녀와 딱 마주친다. 그쪽에서 인사를 먼저 해오기에 나도 모르게 엉겁결에 인사를 받아준다. 살짝 미소마저 지은 채 나를 아래부터 위로 훑어보는 녀석의 흐뭇한 표정은 어쩐지 굴욕적이다. 

혹시 죄송한데요, 길 좀 물어도 될까요?

굴욕은 굴욕이고 지금 당장은 길 안내가 급했다.

예. 물어보세요.

 여기 가까운 전철역이 어디죠?

 아, 전철역이요?

녀석은 씩씩하게 대답하며 한쪽 방향을 가리킨다.

저기 보이는 전화국 지나서요, 좀만 더 가시면 사거리가 있거든요.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주욱 걸어가시면 ㅇㅇ역이 있어요. 4호선이요.

 아, 감사합니다.

ㅇㅇ역이라니. 유진이네 집 바로 근처잖아, 여기. 감사를 표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등 뒤로 어떤 시선이 날라와 꽂히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저 녀석, 나이도 어린 녀석이 말이다. 아까 선영을 볼 때는 일종의 경외마저 담고는 입을 헤 벌리고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나를 볼 때는 눈을 제대로 가리지도 않았고.... 그러고보니 선영의 가슴도 은근히 볼륨이 있었다. 항상 자켓 같은 걸 입고 있는 데다가 등빨이 좀 있어서 잘 몰랐는데 말이다. 하프컵으로 감싸인 젖의 푸근함이나 솟아오름새가 무척이나 만져보고 싶어지는 타입이었......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든다. 잘못 처신하면 자지가 잘리는데 손모가지까지 잘리고 싶지 않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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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다 날라간 줄 알고 식겁했습니다-_-;;; 복구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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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소란 (女, 17) 152cm, 40kg, A cup, 세탁소 양 씨네 딸래미.

 공략대상으로 추가할까요, 말까요? ( 참고로, 범죄입니다만.... )

 열 분 이상 찬성시 공략 대상으로 추가합니다. 

일단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레귤러 멤버이긴 합니다만 솔직히 공략 대상으로 할지 말지는 생각 안 하고 있었지요. 유진이 때는 추가할까 말까 고민하는 척이라도 했는데... 이제는 뭐.... 여러분의 손에 늘 맡겨버리는 무심 쉬크한 카라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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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화 득표는 한선영 3표, 김마리 2표, 이명희 1표, 진유진 3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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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지혜 : 67 pt

 | 진유진 : 52 pt

 | 이명희 : 49 pt

 | 한선영 : 46 pt

 | 박효진 : 22 pt

 | 김마리.김리사 : 22 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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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리사가 효진을 따라잡았군요.

 집이 가까워져 올수록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혜와는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태준이 선배였던가 대영 선배였던가.... 누군가 후배들에게 이야기했던 게 생각났다. 절대 CC는 하지 말라고 했던 말. 하더라도 최소한 다른 과, 다른 대학 여자랑 연애하라고. 잘 되면 뭐, 상관없겠지만 안 되면 그걸로 개박살이라고 말이다. 같은 과 여자랑 사귀다 깨지면 그 과를 떠나야 하고, 같은 공과대 여자랑 사귀다 깨지면 공과대 수업은 다 포기해야 한다는 거다. 

어떤 선배가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건만 내용만큼은 생생히 기억나는 이유는 필시 지금 나에게 너무도 제대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후배들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이야기해야겠다. 앞집 여자랑은 연애하지 마라! 라고 말이다. 지혜랑 나랑 언제 연애를 했냐 싶기도 하지만 또 그렇다고 아무 관계도 아닌 것도 아니었는데.... 최소한 그녀와 나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믿었던 것은 나뿐인 걸까.

다행히도 지혜와 나는 만나지 않았다. 쭈볏거리며 집으로 들어선 나는 불도 켜지 않고 그대로 매트에 드러누워 잠들고 만다. 사실 아까 잠깐 자서 잠이 잘 오지도 않았는데 억지로 잠을 청한 거다. 꿈에서 나는 지혜를 만났다. 명희도 만났다. 지혜와 명희는 서로 끌어안고 알몸으로 서로의 성기를 애무하고 있었다. 나도 끼고 싶었는데 둘은 나를 멀리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멀어져갔다.

다음 날, 아침부터 시끌벅적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도 먹어야 되고 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앞집의 문이 열려있고 인부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설마?

여어~! 한석! 이 잠꾸러기야. 이제 일어나는 거야?

누군가 계단에서 올라오며 내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친한 척을 한다. 내게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효진이었다. 나는 옷장을 들고 나가는 인부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뭐야, 저건.

 아, 오늘 이사하는 거잖아. 몰랐어? 지혜가 이야기 안 하든?

 어? 어......

이사라니. 이렇게 급작스럽게.... 멍하게 서서 인부들이 가재도구를 밖으로 나르는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집 안에서 나오던 지혜가 나를 보고 딱 멈추어 선다. 씁슬한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는 그녀. 시선을 피하는 나. 그러나 효진은 그런 사정을 알지 못 하고 지혜에게 다가간다.

짐도 얼마 없는데 뭔 인부를 두 명이나 불러? 여기 힘 잘 쓰는 놈이랑 년도 하나씩 있는데.

 번거롭게 하기 싫어서.

 그래도 섭섭하다, 야. 온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금방 또 가냐. 니 가면 난 누구랑 놀라고.

 미안. 결혼 전까지는 엄마랑 좀 지내고 싶어서 말야.

 아, 맞다! 한석! 너 알고 있었어? 지혜 좀 있다가 결혼한대.

 으응.....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는데 나도 모르게 자세가 자꾸 뻣뻣해진다. 

아저씨들 작업 좀 걸린다니까 그 사이에 우리 나가서 아침이라도 먹지 않을래? 내가 살게.

지혜의 권유에 효진은 좋아라 하며 내 팔을 잡아 끌었지만 나는 몸을 비틀어 팔을 빼냈다.

나...난, 일이 있어서 좀 나가볼게. 이사 잘 해.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간다. 뒤에서 효진이가 내 이름을 여러번 불렀지만 대꾸도 하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빌라를 빠져나갔다. 젠장. 무슨 표정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바라보던 지혜의 슬픈 눈망울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시내로 나가 아침 식사 되는 식당에서 아무렇게나 식사를 때우고 곧바로 서점으로 가서 선영을 가르칠 때 쓸 교재를 골랐다. 학교로 가서 필요한 페이지를 복사하고 문제들을 모아서 구성한 다음 시험지 형태로 뽑아냈다. 사실 대충 만들거나 모의고사 문제지 형태로 나온 걸 써도 되는데 굳이 심혈을 기울여 나만의 문제지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벌써 오후가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학교를 벗어나 집으로 향한다. 

이제는 지혜와 마주칠 일이 없으니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어제처럼 경계하며 걷지는 않았다. 그러나 또한 지혜와 이제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해진다. 문득 명희의 모습도 떠오른다. 명희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다. 삐삐를 먼저 칠 용기도 없다. 나란 놈은 정말 쓰레기다.

집 앞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난다.

뭘 하다가 이렇게 늦게 와?

효진이었다. 그런데 걸터 앉아있는 게....

그게 뭐야?

 뭐긴, 침대지.

길바닥에 놓여있는 건 침대였다. 나는 이 침대를 알고 있다. 여기서 나와 지혜는 뜨겁게 몸을 섞었다. 그녀의 몸 안으로 나의 것을 쏟아부었다.

이걸 왜 여기다 둬?

 지혜가 너 주라던데?

 뭐?

 니 방에 침대 없지? 맨날 이상한 매트만 깔고 자잖아.

 그건 그렇지만...

 강원도까지 들고가기는 너무 부피도 크고 말야. 거기서는 필요도 없고. 또, 조만간 시집갈 애니까 새로 사겠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시집이라는 단어에 나도 모르게 울컥한다. 효진을 지나쳐 방으로 향한다.

야! 어디가? 같이 안 들고 들어가?

효진이 따라오며 내 팔을 붙든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한다.

그냥 버려.

 뭐라고?

 내가 그지냐? 남이 쓰다 버린 걸 주워다 쓰게? 그러니까 그냥 갖다 버리라고.

 남? 허, 참나.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효진은 나로 하여금 몸을 돌리게 하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묻는다. 

진심이야? 너 정말 그렇게밖에 말 못 해?

 내가 뭐라고 했는데. 뭐 틀린 말 했어?

 이게 진짜... 지혜가 널 얼마나 생각했는데 그게 할 소리야? 남이라고? 널 거지라고 생각하냐고?

 날 생각해? 날 생각한다는 애가 어떻게 얘기 한 마디도 없이 있다가 결혼한다 그러고, 이사간다 그러고 그러는 건데? 생각은 쥐뿔도 안 하는 거잖아.

 핫. 진짜 웃긴 놈이네.

효진은 손을 놓았다. 항상 반쯤은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다. 그녀는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묻는다.

그럼 뭐냐. 그럼 지혜가 네 놈이랑 결혼이라도 해야 돼? 어? 그런거야? 지혜가 결혼한다는데 니가 뭐 보태준 거 있어? 말해봐. 너 지금 당장 지혜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게 해줄 수 있어?

 ......

 보아하니 지혜랑 몇 번 잤다고 기고만장하는 모양인데 그런 걸로 따지면 내가 지혜랑 살림 차렸어야 돼! 결혼을 해도 내가 걔랑 한 수십번은 했었어야 한다고! 알아? 이 자식아?

이건 또 뭔 소리냐. 효진과 지혜가 다소 끈끈한 사이인 건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라니. 효진의 울부짖음은 계속 이어졌다.

니가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거라면 웃는 얼굴로 보내주기라도 해야지. 결혼한다고 하면 빈 말이라도 축하한다고 해야지! 이사간다고 하면 돕는 척이라도 해야지! 게다가 아침에도 그게 무슨 유치찬란이니? 진짜 내가 다 지혜한테 미안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알아? 이 천하에 이기적인 놈아?!

그녀도 이미 반쯤 울고 있었다. 내 팔뚝을 두드리며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한참 꺼낸 그녀는 몸을 돌려 빌라 밖으로 나갔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계단에 걸터앉는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끊이지 않는 효진의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잠시 후, 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빌라 밖에 놓인 침대 앞으로 간다. 효진의 어깨에 손을 얹고 반쯤 잠긴 목소리로 용서를 구했다.

미안하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됐어. 저리 가.

 나 침대 옮겨야 하니까 거기서 일어나서 좀 도와줘.

 .........훌쩍.

 안 그래도 매트가 하도 불편해서 허리 디스크 생기려던 참이었어.

 .....훌쩍. 웃기시네. 크음.

효진은 서둘러 눈과 코를 닦아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군말 없이 침대를 옮기는 나를 돕는다. 기왕 하는 김에 거실에 있는 매트를 거둬내고 거기에 침대를 놓는 일까지 도와주었다.

침대를 방에 안 두고 거실에 둬?

 TV가 거실에 있잖아.

 이그....

 후우. 이제 됐다.

불과 며칠 전만해도 지혜네 집에 있던 침대가 여기에 놓여있다는 사실이 몹시도 생경했다. 바로 이틀 전 여기서 지혜와 내가 몸을 섞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깔려있는 시트와 이불도 지혜가 쓰던 것 그대로였다. 기분이 묘했다. 상념에 빠져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손으로 두드려 침대의 먼지를 털고 있는 효진을 돕는다.

깨끗하게 쓰던 거라 따로 안 빨고 그냥 써도 되겠다.

시트의 주름까지 일일이 펴고 있는 효진을 보며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그래?

먼지를 어지간히 털고나자 효진이 그 위로 벌러덩 눕는다.

뭐하는 거야. 남의 침대에.

 벌써 지꺼랜다. 쳇. 뭐하긴. 이제 여기서 한석이 냄새가 날텐데 그러기 전에 지? 냄새 쫌 더 맡아 두려고.

 참 나.

나도 따라 눕는다. 아닌게 아니라 지혜 냄새가 아직 남아있는 것 같다. 그렇게 두 사람은 떠난 한 사람의 냄새를 그리워하며 꼼짝도 않고 한참 그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까 들었던 말이 생각나서 효진에게 묻는다.

아까 말야.

 엉.

 니랑 지혜랑 그렇고 그랬다는 거.... 진짜야?

 ........너는 이미 그때부터 알고 있는 거 아니었?

그녀가 말하는 때라면 아마도 처음 지혜가 이사오고 나서 술 마시던 밤을 말하는 거겠지. 

솔직히 그때 나는 많이 취해있어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잘은 몰라. 그냥 니랑 지혜가... 나한테 뭔가 좀 했다는 건 기억나도....

 그래? 쳇. 괜히 말했네.

투덜거리기는 하지만 기분 나쁘다는 투는 아니었다. 효진쪽으로 돌아누우며 본격적으로 묻는다.

여자끼리.... 그게 돼?

내 질문을 들은 효진은 한참 쿡쿡거리더니 마찬가지로 내쪽으로 돌아누우며 답한다.

그거라니. 뭘 말하는 건데?

 아니, 그게 그러니까....

말로 못할 것도 없는데 이렇게 얼굴을 바짝 마주대고, 그것도 침대에 나란히 누운 채로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하려니 쑥스럽기 그지 없다.

말 해봐. 뭘 말하는 건데?

 으음... 그러니까 섹스 말이야. 섹스.

 그게 뭐 어쨌다고.

 그러니까 여자끼리 그걸 어떻게 하냐고.

 흐음.

그녀는 손을 뻗어 내 바지, 정확히는 그 부분 위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남자들은 여자 없어도 잘만 싸지 않나? 안 그래?

 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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