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물이요.
아. 고마워요.
지나가 건넨 물컵을 들고 단번에 원샷을 한다. 청룡열차보다 더한 것을 타고 오느라 뒤집어질 뻔 했던 속이 간신히 가라앉는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찬 물을 들이켜고 나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오, 신이시여!
후아. 죽는 줄 알았네. 덕분에 살았어요.
후후, 설마 살려준 사람에게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진 않겠죠?
그럴리가요.
내가 손사래를 치자 지나가 눈웃음을 치며 내민 물컵을 받아든다. 그러면서 묻는다.
오늘은 제대로 놀러 오신 건가 보네? 왕언니랑 동반까지 하시고.
그런 건 아닌데요.... 일종의 납치랄까.
납치?
안 오면 생계를 끊겠다는 협박을 받은 터라....
설마요. 왕언니가 그렇게 살벌한 영업을 했을리가 없는데?
지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쟁반에 이것저것 담아온 웨이터들이 테이블을 채운다. 놓여진 술을 보면서 지나에게 물어보았다.
저런 양주 말고 그냥 맥주 같은 건 없나요?
왜요? 말아드시게요?
아니. 그냥 맥주만 마시게요. 양주는 좀 독하잖아요.....
지나가 웨이터에게 뭔가 이야기하자 웨이터가 놓여있는 양주를 쟁반에 도로 담는다. 들고 나가려는데 방에 들어오던 이가 그걸 막는다.
치우지말고 냅둬. 그냥 맥주만 더 가져와.
여기서 선영이 왕언니라 불린다고 했던가. 왕언니 납시요.
윤기있는 검정색 재질의 옷으로 위아래를 쫘악 감싼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둠의 제왕 같다. 틀러올려 뒤로 한데 묶은 다음 비녀 비스무리한 걸 꽂아 고정한 머리는 결연한 의지를 품고 전쟁터에 나서는 장수의 투구 장식 같기도 하다. 웨이터는 선영이 뭔가 더 지시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사라져갔다. 마치 선영을 피하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바람같이 사라진다. 양주병을 손에 든 선영은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설마 저걸 내 머리통에 내려치려는 건 아니겠지? 내 쪽을 한 번 째려보더니 지나에게 시선을 돌린다.
넌 왜 여기 앉아 있어? 콜 없어?
언니는. 평일 이 시간에 누가 있어요? 다들 쉬고 있는데.
그래, 그럼 너도 나가서 쉬어.
음... 여기 한석씨 오셨는데 같이 놀면 안 돼?
탕-
대리석인가 뭔가 암튼 돌로 되어있는 테이블 위에 양주병을 거칠게 내려놓는다. 안 깨지나 저거.... 병 주둥이를 여전히 붙잡고 있는 선영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이 분은 놀러 온 거 아냐.
선영에게 압도되어 나나 지나나 둘 다 대답을 못 한다. 선영이 손을 들어 문을 가리키자 지나는 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조용히 나갔다. 그나마 선영의 파워를 두 사람이 나누어 받고 있었는데 한 명이 나가버리자 그 시선은 100% 오로지 내게 꽂힌다. 몹시 부담스럽다. 눈이 마주친다.
안녕하세요.
.........
생각해보니 아까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린 거 같아서요. 헤헤.
나도 모르게 저자세가 되어버린다. 아, 나란 남자. 정말이지.... 선영은 말없이 나와 직각되는 자리에 앉더니 양주병을 연다. 그리고 컵에다가 콸콸콸콸-
저, 그건 양주잔이 아니지 않나요?
........
뭐, 아무데나 따라 마시면 되겠죠?
아까 물 마신 컵보다도 더 큰 컵에 가득 담긴 양주를 내려다본다. 붉은 빛? 아님 갈색 빛? 뭐라 말하기 어려운 빛이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다. 선영의 앞에도 마찬가지인 잔이 놓여져 있다. 그나저나 설마 이걸 마시라고 따라놓은 건가?
드시죠.
에?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선영을 쳐다보자 그녀는 오른손으로 자기 잔을 들더니 내 잔을 눈짓으로 가리킨다.
첫 잔은 원 샷.
그러더니 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설마 저걸 원샷으로 마신다고?! 선영이 마시게 냅두면 나도 마셔야 할 판이다. 서둘러 그녀의 팔을 붙잡아 말린다.
왜 그러시죠?
아니, 무슨 술을 그렇게 무식하게 드세요?
많이 못 배웠으니 무식한 건 당연하죠.
꼭 그런 말이 아니라...
다행히도 선영은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럼 말씀해보시죠.
뭘요?
유진이가 그러더군요. 선생님이 뭔가 심란한 일이 있으신 거 같다고. 그래서 그런지 요즘 잘 못 가르치고 계시다고요.
내가 걔를 가르친 적이 있었던가 어쨌던가.... 하는 이야기는 선영에게 하면 안 되겠지? 내가 대답을 주저하고 있자니 그녀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자지 달린 놈들에게 문제라고 해봐야 대개는 돈 문제 아니면 계집 문제죠. 어차피 댁도 자지 달린 놈이니 대략 그런 문제겠죠. 해결해드릴 생각이나 사실 딱히 궁금하지도 않지만 유진이가 걱정하니까 물어봅니다. 그러니 말해보세요.
그 놈의 자지 타령은...... 이젠 태클 걸 기력도 없다. 이 여자는 입만 열었다 하면 이 소리다. 만약 나중에 이 여자가 애를 낳게 되면 산부인과 의사에게 물어볼꺼다. 의사선생님, 제가 낳은 게 자지인가요, 보지인가요....... 막 이래. 어휴. 그리고 유진이가 하는 사고방식 중에 몇 가지는 이 여자에게 이어받은 게 확실하군. 돈과 계집이 문제라니. 확실히 그 중에 하나가 내게 가장 큰 문제인게 맞기는 한데 듣고 있자니 기분이 좀 나쁘다.
유진이가..... 에휴. 걔는 왜 그렇게 남 일에 관심 많답니까. 관심 좀 끊으라고 해주세요. 이건 제 개인적인 문제에요.
다소 불만이 섞인 말투로 이야기했지만 선영은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대신 눈짓으로 내 앞에 있는 잔(이라기 보단 컵)을 가리키며 말한다.
말하기 싫으면 그거 마시구요.
에? 대체 그런 법이 어디에....?
원 샷.
...........
어안이 벙벙하며 대답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웨이터가 맥주를 가지고 들어왔다. 잔과 맥주병들을 테이블에 세팅해놓고 다시 밖으로 나간다.
저....저기, 맥주도 왔는데 맥주부터 마시면 안 될까요?
대답하세요. 아니면 원 샷.
아니, 아무리 그래도 첫 잔에 이런 독한 술로 그러기는....
그럼 이건 버릴까요? 이 비싼 술을?
그렇다고 꼭 버리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는데요....
안 마시면 버려야죠.
으으....
꼼짝없이 잔을 들게 생겼다. 이건 뭐 폐비 윤씨 사약 마시기도 아니고.... 내가 잔을 들고 망설이고 있자니 선영이 몸을 바싹 붙여오며 작은 소리로 소근거린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하세요. 말씀하시면 제가 흑장미 해드릴게요.
살짝 간드러지는 말투. 평소에 나에게 툭툭 던지듯이 하는 말투와는 천양지차다. 살짝 놀라 선영쪽을 바라보니 표정은 여전하다. 어쩐지 무섭다. 얼굴은 퉁명에 가까운 무표정한데 목소리는 사근사근 낼 수 있다니. 대단하구나, 서비스업이라는 건. 순간 넘어갈 뻔 했으나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렸다.
그....그래도 곤란해요.
말씀 못 하시겠다?
당최 자꾸 내 이야기를 파고 드는 이유가 뭡니까?
유진이가 궁금해하니까.
그녀의 단호한 말투를 듣고 있노라니 만약 그녀는 유진이가 궁금하다고 한다면 지옥 끝에 가서 염라대왕에게라도 술을 권할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이가 궁금하다고 하니 염라대왕님 이 술잔 받으시고 말씀 좀 해주세요. 첫 잔은 원 샷이에요. 이렇게. 아, 생각해보니 좀 웃기네. 그리고 맨날 선영을 보면서 사신(死神)을 느꼈던 건 괜한게 아니었어. 나한테 바짝 붙은 선영에게서 은은한 향기가 풍겨온다. 화장품 냄새이긴 한데 그래도 싫지만은 않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웃어요? 남은 심각한데?
아니, 그건 아니고 다른 생각 좀 하느라구요.
손을 내저으며 한사코 거절하자 그녀는 잠깐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손을 뻗어 맥주병을 딴다. 그리고 정상적인 글라스에 맥주를 따른다. 그리고 그걸 내민다.
어쩔 수 없네요. 유진이한테는 한석씨에게 별 일 없었다고 말해두죠. 그냥 컨디션이 안 좋은 거 같다고.
아, 예.
그럼 유진이는 계속 걱정을 할테고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저는 속에서 열불이 나겠지요. 저 착한 유진이에게 걱정을 끼치는 인간을 아주 그냥 산 채로 씹어먹고 싶겠지만 현실적으론 불가능하니 그냥 참겠지요.
.......아, 예에....
기왕 차린 거니 열심히 쳐드시기 바랍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맥주 마시다가 체하겠다, 이 년아! 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만 올라왔다. 입 밖으로는 내놓을 용기가 없다. 말없이 맥주만 홀짝였다. 선영도 자기 잔을 채워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앞에 차려진 건 평소 같으면 꿈도 못 꾸었을 고급 안주들이다. 특히나 과일 안주. 가난한 자취생에게 과일을 섭취할 기회 같은 건 학생회관 특식 나오는 날 곁들여 나오는 귤 반토막이 전부인데 이런 황금 같은 기회라니. 포크를 들고 잘 썰어진 사과를 하나 집어 우물거리고 있노라니 갑자기 입가에 방울토마토가 와 닿는다. 부지불식간에 입을 벌려 받아먹고 나니 대체 누가 이런 친절을 베푸는가 궁금해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 이 방에는 선영이와 나, 단 둘인데? 엥?
황급히 고개를 돌려 왼쪽을 보니 선영이 방울토마토 하나하나의 꼭지를 따면서 그걸 내 입에 넣어주고 있다. 시선은 내쪽을 보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히 내 입에 들어온다. 주니까 받아먹기는 한다만은 뭔가 좀 이상하다. 어쩐지 어색한 표정으로 반쯤 웃는 듯한 얼굴을 하고 시선은 테이블에 고정한 채 방울토마토의 꼭지를 따던 선영도 순간 멈칫한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표정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온다.
지금 뭐하고 있죠?
선영씨가 주길래... 받아먹고 있었는데요?
.......하아. 나도 참나.
손에 들고 있던 방울토마토를 도로 내려놓은 그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고 한번에 쭈욱 비운다. 잘 마시는 구나. 양주인데도..... 응? 맥주가 아니라? 결코 착각으로 그렇게 마시는게 아니다. 그 증거로 지금 빈 잔에다가 양주를 다시 채우고 있잖는가.
술... 쎄시네요.
그게 일인데 약하면 어쩔려구요.
것두 그렇네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먹던 바나나를 마저 먹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선영이 고개를 쳐든다. 나를 쳐다본다.
지금 속으로 나 경멸했죠? 술집여자라고? 그렇죠?
아니, 어떻게 제가 선영씨를 경멸해요. 결코 그렇지 않아요.
무서워하면 무서워했지. 이 말이 뒤에 생략되어 있는 대답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이는데, 응? 차로 모셔다가 술상까지 차려주고 옆에서 이쁜 여자가 앉아서 술까지 따라주는데도 그 작은 부탁하나 안 들어줘요? 진짜? 정말 그럴꺼에요?
나왔다. 아까의 그 살짝 간드러지는 말투!! 평소의 그녀라면 도저히 상상도 못할 말투다. 눈을 감고 목소리만 듣고 있노라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다. 그나저나 자기 스스로를 이쁜 여자라니.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만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게다가 언제 차로 모셨어! 생계를 빌미로 협박을 하고 납치를 했지!! 그리고 술상은 당신이 차린게 아니잖아!!! ........ 아, 맞다. 이거 계산은 누가 하는 거지?
말해봐요, 한석씨. 원래 사람 일이라는게 다 그래요. 사실 별거 아닌데도 그냥 혼자 끙끙 앓고 있다보면 썩어 문드러지기도 하고 그러는거에요. 제때 제때 꺼내서 바람 쐬어주고 말려주고 그러지 않으면 독이 된다구요.
독이요?
독 몰라요? 독? 마시면 죽는 독 말이에요.
그녀는 다시 자신의 잔을 비웠다. 그리고 빈 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도 그 독에.... 죽을 뻔 했지만......
네?
순간, 나는 그녀가 울고 있는 줄 알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하는데 그녀가 불쑥 내 곁으로 더 다가온다. 그녀와 나의 몸이 맞닿았다.
암튼 참지 말란 말이에요.
그러면서 손이 지금 어디로 오시는 겁니까? 네에?
남자들도 너무 참으면 여기가 큰 일 난다면서요. 안 그래요?
큰일은 지금 나게 생겼는데요. 으아아아아..... 어느새 내 옆에 바짝 다가앉은 선영은 내 바지 위를, 정확히 말하자면 내 허벅지 위쪽을, 좀 더 세심하고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내 자지 부근을 쓰다듬고 있다. 손 전체로 전체의 윤곽을 훑고 네 손가락으로는 불알 아래쪽을 살살 긁으면서 엄지로는 귀두가 있으리라 추정되는 곳을 정확히 쓰다듬는다. 맨날 자지자지 그러더니 자지의 위치와 모양에 대해서는 무슨 투시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분명 그녀와 손과 내 자지 사이에는 팬티와 바지라는 2중의 천의 놓여있지만 지금의 감촉만으로는 없는 거나 진배없다.
흐음....
신음이 절로 나온다. 뭐냐, 이 환상의 핑거 테크닉은....
자아, 이제 제가 이거 꺼내드릴테니깐요... 한석씨도 마음에 있는 이야기는 다 꺼내놓는 거에요? 알았죠? 약속이에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고 여름의 열대야처럼 끈적거리며 가을의 잘 익은 과일보다도 더 농염하고 짙은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와 박힌다. 항상 나를 대할 때마다 겨울보다도 더 차가웠던 그녀는 온데간데 없다. 여자의 변신이 무죄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명희나 다른 여자들을 통해서도 그런 모습을 간혹 가다 보긴 했지만.... 지금 이 경우는 변신 정도가 아니라 숫제 다른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순간만큼은 그녀는 너무도 사랑하는 연인의 몸을 애무해주는 것과도 진배없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선영의 손이 미끄러지듯 들어와 내 물건을 꺼낸다.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기대감으로 가득한 자지는 자신의 존재를 자랑하며 꼿꼿이 일어난다. 뜨겁기 그지없는 살덩이를 매끄러운 손가락이 휘감는다. 쥔다. 내 것이 그녀에게 쥐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