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65)

선배~

공대를 벗어나 학관쪽으로 가는데 등 뒤에서 누가 부른다. 특유의 어투에서 이미 누군지 알아버렸다. 뒤돌아 아는 체를 해준다.

벌써 수업 끝났어, 마리?

숨을 할딱이며 마리가 달려와 내 옆에 선다.

하모요. 뭐 허는 것도 없네예. 기냥 교재만 알려주더니 끝이라네예.

같이 학관쪽을 향해 걷는다.

교수님 누군데?

 누더라? 최 모시기 하는 교수님인데....

 설마.... 최강희 교수님? 설마 C프로그래밍 입문?

 아, 근가보네. 근데 와예? 그 선생님이 뭐 문제인가 보죠?

 뭐... 문제라면 문제인데.... 휴강을 자주 하시니....

 워메. 그럼 좋은 거 아닙니까?

 응. 그런데 레포트는 꼬박꼬박 나와. 수업을 하든 안 하든. 채점도 칼같이 하시면서 그걸로 평점 매겨.

 하이고야.

내가 하는 말에 웃다가 다시 울게 된 마리는 쭐래쭐래 나를 따라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둘은 학관 식당 앞에 길게 늘어선 줄에 합류했다. 아직은 학기 초라 학관밥의 퀄리티에 비교적 여유가 있다. 그리고 신입생들은 아직 학관밥에 절망하지 않았을 터다. 이때쯤이면 부속 고등학교의 학생들도 꽤나 몰려온다. 따라서 3월에서 4월까지는 학관 식당이 비교적 붐비게 된다. 제법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 한참 동안 마리는 내 옆에서 끊임없이 조잘거리고 있었다.

근까예, 그 때 태석이가 완전히 맛탱이가 가가 영호 선배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예? 내는 삼수생이랑 니랑 동갑이라 안 캅니까! 막 이랬다 아입니까. 억수로 웃겨가지고 다들 디집어지고.... 선배, 듣고 있어예?

 어어. 듣고 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하나도 안 듣고 있었다. 마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난 번에 있었던 신입생 환영회 이야기를 다시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리의 수다는 식권을 내고, 밥을 타고, 자리를 맡아 앉을 때까지도 이어졌고 덕분에 나는 가보지도 않은 신입생 환영회에서 벌어진 어지간한 이벤트를 모두 전해들을 수 있었다.

말하느라 수고 많았다. 밥 먹자.

 야아.

입으로 뭔가 먹을 것이 들어가면 좀 조용해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불행히도 그건 나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숟가락을 손에 들고 한참 이야기를 이어가던 마리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아!하며 나를 쳐다본다.

선배님예. 그 때 지한테 맛있는 거 사준다고 안 그랬심니까? 맞지예?

 어... 그랬었나?

 어메. 이 사람 보소. 지가 그랬지예? 제가 다른 건 기억 못 해도 지한테 맛난거 사준다고 한 사람은 반드시 기억한다고예.

철저한 추궁에 할 말이 없다.

으윽... 지금은 좀 곤란하고 나중에 과외비 받으면 사줄게. 뭐 먹고 싶은데?

그러자 마리는 뭐가 그리 좋은지 박수까지 쳐가며 신나하더니 뭐가 좋을까 한참을 고민한다. 그러면서 자기 친구들에게 들은 학교 주변 맛집에 대한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어휴, 누가 들으면 이 곳에서 산지 몇 년은 된 사람인 줄 알 정도다. 나도 우리 학교 주변에 맛집이 그렇게나 많은지는 미처 몰랐다. 그렇게 마리의 수다를 귓등으로 넘기며 밥을 퍼먹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여기 자리 비어? 같이 앉아도 되나?

 어? 조교님. 이리 오세요.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대각선 방향 자리에 진호 선배가 앉는다. 그 날 이후 참 잘 피해다녔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휴학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무리다. 아니면 명희처럼 아예 칩거를 하던가.... 진호 선배랑 눈을 마주쳤지만 입 안에 뭔가 들어있는 관계로 눈인사만 보내고 만다. 진호 선배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리에게 말을 건다.

뭔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 해?

 지가, 그 때 여기 첨 와가 헤매고 있을 때 여거 요 선배가 구해줬다 아입니까. 그리고 제가 라면을 착 끓여가 대접을 했드니 선배가 나중에 지한테 맛있는 거 사주기로 했어예.

 그랬어? 마리는 좋겠네.

 에헤헤헤.

대화에 끼지 않는 나를 빼고도 즐거운 대화는 그 이후로도 죽 이어졌고 그대로 세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식후 커피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 학관을 나서서 공대쪽으로 함께 이동한다. 진호 선배는 동전 몇 개를 내주며 마리에게 커피를 뽑아오라고 시켰다.

선배, 뭐 좀 물어 봐도 되요?

진호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온 마리를 보고 말했다.

마리야. 나 진호 선배랑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자리를 좀 비켜줄래?

 뭔데예? 지만 빼놓고 맛난 거 먹으러 갈라카죠? 그쵸?

자기 몫의 공짜 커피를 손에 들고 좋다고 실실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던 마리는 나의 진지한 표정을 제대로 읽었는지 뒤통수를 긁적이며 인사를 남기고 먼저 가버렸다. 마리를 보낸 후 진호 선배랑 나는 공대 옆에 있는 작은 동산으로 올라갔다. 동산 중턱에 나무 벤치가 있었다. 두 사람은 거기에 앉아서 말 없이 커피를 홀짝였다. 커피가 다 비워지고 빈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선배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날 말야. 명희가 많이 창피했나 보네?

 네?

 아니, 뭐.... 나도 좀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이제는 서로 성인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그런 곳도 이용할 수 있는 나이이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괜찮던데 말이야.

 으음...... 선배는 그저 명희가 선배를 보고 창피해서 도망간 거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뭐,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

 하아....

정말이지, 진호 선배는 자기를 좋아하고 있던 명희를 몰라도 정말 모르는구나. 명희 말로는 고백까지 했다고 하는데 그럼 그걸 예사로 생각했다는 건가. 그렇지만 나는 이런 내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솔직히 나도 명희라는 여자에 대해서 잘 모르겠으니까 말이다.

그 날의 장면을 다시 떠올린다. 눈만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른다. 요 며칠간 끊임없이 머리속에서 재생되고, 재생되고, 또 재생되고 있었으니까.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누군가와 함께 서 있던 진호 선배가 우리를 보며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피할 구멍도 도리도 없이 정면으로 진호 선배와 제대로 마주한 우리는 망부석마냥 덜컥 돌이 되었다. 명희는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에게 치정의 현장을 정면으로 들킨 것이니 그러할테고 나는 내 손을 황급히 던지다시피 놓아버린 명희에 대한 실망감으로 굳어버린 것이다. 

딸딸이치다가 엄마한테 걸린 것보다도 훨씬 더 어색하기 그지없는 그 순간에서 사람 좋기로 유명한 진호 선배는 그나마 가장 먼저 충격에서 회복했다. 늘 짓던 표정으로 웃으면서 우리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건네려고 하였다. 그러나 명희는 선배의 말을 끝나기도 전에 나를 밀치고 또 선배를 밀쳐내고 바람같이 달려가 버렸다. 그 바람에 밀려 내 쪽으로 쓰러진 진호 선배의 파트너를 부축하느라 나는 명희를 쫓아갈 타이밍을 놓쳤다. 게다가 의외의 인물이 진호 선배와 함께 있어서 놀라고 있느라 더욱 그러했다.

명희는 그렇다치고.... 아니, 대체 과순이랑은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어요?

 임마. 과순이가 뭐야. 과순이가. 앞으로 형수님이라 불러. 아니면 혜진 씨라 부르던가.

 에엑? 결혼도 할 거에요?

 그러면 안 해? 그럼 너는 결혼도 안 할 아가씨랑 막 그러고 다니는 거냐?

 아니, 뭐.... 그건....그러니까.....

의외의 포인트에서 정석의 역공을 당하느라 추궁할 템포를 잃어버렸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종이컵을 괜히 들이킨다. 화제를 돌린다.

언제 결혼할건데요?

 일단 이번 학기에 논문 통과되서 박사수료 되는가 보고..... 여름가기 전이나 가을쯤에 식 올릴 생각이야. 그 때 쯤이면 취직이 되겠지.

 하아.... 과순이... 아니지, 형수님이 지금 몇 살이죠?

 스무살.

 끄응.... 여덟살 어린 아가씨는 여자로 보이면서 여섯살 어린 여자는 여자로 안 보여요?

 뭔 소리야?

 아닙니다. 아무 것도.

내가 알기로 과순이....아, 아니. 혜진인가 뭐시기인가 하는 아가씨는 작년 초에 상고를 졸업하고 우리 과사에 들어온 아가씨였다. 다시 말해 작년까지는 십대였단 말이다. 감히 선배에게 도둑놈이라고 말은 못 하겠고.... 그나저나 대체 언제 꼬신걸까.

꼬시기는 임마. 그냥 맨날 같이 일하고 밥먹고 이야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거지. 특별한 계기 같은 건 별로 없어. 그냥 나 바빠서 늦게까지 학교 있고 그러면 같이 있어주기도 하고 그랬지, 뭐.

 그래도 먼저 사귀자고 한 사람이 있을 거 아닙니까? 선배가 그랬어요?

 아니. 혜진이가.....

 에엑? 언제요?

 우리 과사에 들어오고 얼마 안 되서.

아무리 놀라운 관계라곤 하지만 이것 역시 놀라운 소리다.

쿨럭..... 그때는 열 아홉이었단 말이잖아요! 선배! 아무리 상대방이 먼저 좋아한다고 그래도 그건 범죄에요!!

 알아, 임마. 나도 처음에는 부담스러워서 그냥 좋은 오빠 동생으로만 지내자고 했지. 그런데 작년 가을부터 나도 좀 그래서..... 암튼 그렇게 되었다.

 허이구. 아무리 그래도 혜진씨 나이가 있는데 벌써 결혼이라니.... 남들이 보면 무슨 사고 쳐서 가는 건 줄 알거에요.

 혜진이는 아무래도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내 나이 좀 있으면 금방 서른이야. 게다가 교수님 추천대로 취직해서 간다고 그러면 아무래도 지방이란 말이지. 떨어져 있는 건 서로 싫고 말야.

 아, 예에....

평소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극히 꺼리던 진호 선배였는데 한번 물꼬가 트이고 나니 아주 그냥 청산유수다. 신혼집은 구미 어디로 할 거고 혼수는 요새 같이 보러다니고 뭐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귓등으로 듣고 있었다.

참 나, 명희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기막혀 할까. 선배보다 나이가 어려서 동생으로만 보인다는 생각에 다소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잘 나가는 여자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사실 진호 선배는 명희보다 더 어린 여자애랑 결혼 약속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말이다.

후유~

한숨밖에 안 나온다. 창 밖의 날씨가 구리구리해서 더 기분이 우울하다.

그거 아세요?

 응?

고개를 돌려보니 유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저씨 지금 과외시작한 이후로 정확히 열 다섯번째 한숨이거든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어? 어.. 뭐... 그다지...

유진이가 나를 한번 째려보듯이 쳐다보고는 다시 문제집을 풀기 시작한다. 나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고층 아파트들이 도미노처럼 늘어서 있는 광경을 눈에 담는다. 사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데 말이다.

선배와 대화를 마치고 학교에서 이리저리 시간을 때웠다. 그 후에 과외를 하러 유진이네 집에 와 있는 참이다. 그러나 유진과 나 사이의 과외 방법이라는 자체가 내 머리를 쓸 일이 없다보니 온갖 잡다한 생각이 자유롭게 머리 속을 드나든다. 복잡한 상념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 책을 펴놓아도 글씨가 눈에 안 들어오고 유진이가 잔소리를 하는데도 그게 귀에 안 들어온다.

명희는 아직도 선배를 좋아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 때 내 손을 뿌리치고 간 것도 이해가 간다. 물론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굳이 머리로 이해하려 한다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무려 십 년 가까이 자기가 좋아하던 사람 앞에 우리 방금 섹스했어요라고 광고하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니 말이다.

명희는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그저 골려 먹고 뜯어먹기 좋은 호구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자기 욕구가 있을 때 딜도 대신으로 쓸려고 두는 여분의 모조 성기같은 건가. 뭔가..... 뭘로 생각하든 좋다. 일단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삐삐를 수도 없이 쳐보았지만 답은 오지 않는다. 병원에 갔더니 병가를 내고 쉬고 있단다. 집으로 한 번 찾아가 봐야 하나.

휴우....

나도 모르게 한숨을 또 내쉰다. 한숨이 끝나기도 전에 탁- 하는 소리가 난다. 쳐다보니 유진이가 볼펜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다. 유진의 눈빛이 날카롭다.

제가 한 번 이야기 한 적 있죠? 아저씨를 계속 과외 선생으로 쓰는 이유 말이에요.

 어. 그랬지.

 분명 저는 절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아저씨를 쓰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식이면 몹시 곤란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지금 사람 신경쓰이게 하고 있잖아요! 아까부터 한숨이나 푹푹 쉬고!

따박따박 따져대는 묘한 박력에 밀려 나도 모르게 사과한다.

아, 미안. 그냥 일이 좀 있어서 말야.

사과를 듣고 잠자코 있던 유진이 잠시 후 묻는다.

뭔데 그래요?

 응?

 무슨 일이 있길래 그렇게 티 팍팍 내면서 한숨 쉬고 있냐구요. 여자 문제에요, 돈 문제에요?

여자? 돈? 이게 지금 열일곱살짜리 입에서 나올 소리냐. 물론 돈은 늘 없어서 고민이고 여자도 비슷한 정도의 레벨로 고민이긴 한데....

으음..... 설령 있다고 해도 그건 내 프라이버시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아저씨가 한숨을 푹푹 쉬고 있고, 그것 때문에 제 공부가 방해받고, 그래서 제가 아저씨에게 이렇게 묻고 있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이상 아저씨만의 문제가 아니라구요! 빨리 말해봐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엄청난 박력과 논리력에 나도 모르게 대답을 할 뻔 했다.

........아니, 그냥 별 일은 아냐. 정말이야. 그러니 신경쓰지 마.

 진짜 말 안 할 거에요?

 자꾸 왜 그러니? 니 일도 아닌데... 그리고 애들에게 얘기할 거리가 못 돼.

 흐음. 그렇단 말이죠. 애들에게는.....

내 말을 들은 유진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거실의 전화기로 다가간다.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무선전화기를 집어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아직 수업 시간도 남았고 초밥 시킬 시간도 아닌데 왜 그러나 모르겠다. 한참만에 자리로 돌아온 유진은 별다른 멘트도 없이 다시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 나도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숨을 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말이다.

얼마 후 수업 시간이 다 되고 으례 배달시킨 초밥을 먹고 있었다. 다 먹어갈 때쯤 현관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벌써 그릇을 가지러 왔나 싶었는데 불쑥 들어온 사람은 초밥 배달원이 아니었다.

식사 다 하셨으면 가시죠.

 서....선영씨?

사신.... 아, 아니, 레이디스 인 블랙의 선영이 차키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어딜 말이에요?

선영은 대답 대신 유진 쪽을 힐끔 본다. 유진은 선영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선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따라 오시면 압니다.

 안 가면 안 되나요?

선영의 차에 또 타라고? 차라리 날 죽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 따라가시면 선생님 과외 앞으로 안 받으려구요.

 .....헉.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되어 하늘에 대고 외친다.

'신이여! 이 어린 양을 구원해주소서!'

물론 속으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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