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65)

아, 한석아. 잘 만났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말야.

 예, 진호 선배. 안녕하세요?

거의 보름간 좀비처럼 지내는 시험기간이 끝나고 방학이 되었지만 오전 중에 한번씩 학교에 들르는 일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호 선배에게 부탁해놓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니가 지난번에 부탁했던 과외 건 말이야, 하나 들어왔어. 방학동안 예비 고1 과정 가르치는 건데, 할 수 있겠어?

 예비 고1이요... 흐음....

겨울에는 시골에서도 농한기라서 방학이라곤 하나 딱히 내려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보나마나 삼촌들이랑 큰 형들이랑 어울려서 술이나 퍼마실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요새 펑크난 지갑도 때울 겸 해서 진호 선배에게 과외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놓은 상태였다. 

예비 고1이면 중학교 과정 복습 간단하게 하고 선행 학습 좀 시키면 되려나요?

 뭐, 내용이야 니가 알아서 하는 거고... 아, 맞다. 참고로 여자애다.

 에엑? 여자애요?

 임마 너무 노골적으로 좋다는 표시 하지 말어. 인삼산삼보다 좋다는 고삼, 그것보다도 좋다는 중삼이다. 크크큭. 오늘안에 연락해봐라. 거기서 빨리 구하고 싶다고 하더래.

저러니 아저씨 소리를 듣지.... 그나저나 어딜 봐서 좋다는 표정입니까, 깜짝 놀란 제 표정이.... 

그래도 예전 같으면 여자라는 소리를 듣고 손사레를 쳤겠지만 요새는 명희는 물론이고 지혜나 효진과도 잘 어울리는 나 자신이 대견했기 때문에 제안을 수락했다. 선배에게서 과외할 집의 연락처와 주소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일단 원래 내가 가려던 원래의 목적지를 향해 사이클을 몰았다. 등에 멘 배낭에는 꽤나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었고 나는 이것을 전달할 의무를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

야, 내가 검정색 구두도 가져오라 그랬잖아.

 ........다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 됐어. 빨리 가봐.

금요일이고 근무가 빨리 끝나는 날이면 명희는 모처에 있는 클럽으로 출동하는 모양이었다. 출근하면서 클럽의상으로 갈 수는 없을테니 대개는 근처 지하철역의 코인락커를 이용했었으나 이제는 내 방을 코인락커 대신 삼고 있다. 돈도 안 들고 게다가 이런 배달 서비스까지 제공하니까 편하기 그지 없겠지. 참고로 입고 난 것을 그녀가 갖다놓으면 세탁소에 맡겨서 세탁도 해온다. 물론 내 돈으로.

예, 그럼 수고하세요.

 수고? 뭘 수고해, 임마. 병신같기는...... 그리고 뭘 좋다고 실실 쪼개?

 아, 그게요. 이번에 알바자리를 구해서요.

 알바?

옷가방을 들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뭐하는 건데? 노가다 뛰냐?

 아뇨. 그건 아니고 학생 가르치는 건데요. 과외요.

 뭐? 과외?

명희는 코웃음을 쳤다.

야, 니가 누굴 가르쳐. 강간범 주제에. 괜히 애 건드려서 잡혀가지나 마. 설마 여자애야?

 아뇨, 아닙니다. 남자애에요.

황급히 부정했다. 왠지 그렇다고 대답하면 좋은 소릴 못 들을 것 같다.

그러겠지. 내가 엄마라면 너 같은 녀석은 내 딸 주변 10미터 이내도 못 들어오게 할거야.

 그...그러신가요.

 아니면 자지를 잘라버리고 과외하라고 하던가.

 ......그럴 바에는 과외를 포기하겠습니다..

여자애라는 사실을 먼저 말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랄까. 명희가 병원으로 돌아가고 나는 다시 사이클에 올라탔다. 집으로 돌아와 받아둔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 본다. 신호가 한참 가고 나서야 약간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졸린듯한 목소리.

예, 안녕하세요. 전 OO대학교 3학년 최한석입니다. 과사무실에서 소개받은 학생입니다.

보일리도 없겠지만 나도 모르게 꾸벅 인사까지 한다.

으음... 좀 이른 시간에 전화를 주셨네요.... 일단 이따 한번 오세요. 여기 주소도 받았나요....?

 아, 예.

 그럼. 이따 오세요.

달칵-

나도 모르게 시계를 보았다. 좀 있으면 점심 먹고 농구 한 판하기 딱 좋은 시간이다. 이 시간에 전화를 했더니 이른 시간이라고? 대체 얼마나 잠퉁이인거냐. 게다가 이따 오라는데 이따 몇시에 오라는지도 이야기 안 하고.... 왠지 이런 엄마 밑에 있는 애라면 엄청 게으름뱅이에다가 집중력 제로일 것 같다. 앞으로의 수업이 난항을 겪을 것 같아 한숨을 푹푹 쉬다가 일단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어머, 한석이네. 어디 가?

 어? 어. 밥 좀 사먹으러.

 점심?

 응.

빌라 입구에서 마침 들어오던 지혜와 마주쳤다. 이사 후로 오고가며 종종 마주치곤 했지만 내가 시험기간이라 정신이 없고 바쁘기도 해서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은 별로 없었다. 인사만 간신히 하고 지나갔다. 그러다보니 이미 한참전부터 말을 놓으라곤 했지만 왠지 또 어색했다. 그러나 지혜는 별로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도 지금 해먹을건데 같이 먹을래? 혼자 먹기는 좀 심심하잖아.

 그....그럴까?

어영부영 그녀의 집 안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2인용 식탁도 놓여있고 크진 않지만 작은 가구들도 센스있게 잘 배치되어 있었다. 확실히 여자가 사는 방은 달랐다. 낡은 텔레비전과 매트리스 한장, 구석에 쌓여있는 옷더미와 행거가 전부인 내 방과는 천지차이였다.

쌀 떨어졌어? 왜 밥을 사 먹어?

 어... 그게 말야... 난 따로 밥 해먹은 적이 없어. 집에서.

 엥? 한번도?

 어. 그냥 맨날 학교에서 먹던가 그냥 요 근처 분식점에서 먹던가 하는데. 아예 우리집에는 그릇이 없기도 하고.

그러자 찬을 늘어놓던 지혜가 살풋 웃음을 터트렸다.

아예 그릇이 없어? 진짜 남자들이란...

그녀는 밥공기에 밥을 가득 담아 내게 내밀었다. 계란후라이도 한장 부쳐준다.

나 혼자 맨날 먹는거라서 따로 차린 반찬이 없어. 이거라도 더 먹어.

 아냐.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지.

농담이 아니라 진짜 맛있었다. 이렇게 집밥을 먹게 된건 지난 여름방학에 집에 내려갔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아, 그러고보니 그때 지혜가 이사온 다음 날에도 여기서 북어국을 얻어먹었던 기억이 났다.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그녀가 내준 커피를 마시며 이 가슴속에 절절하게 다가오는 감상과 감동을 가감없이 들려주었더니 다시 또 웃으면서 재미있어 했다. 

또 먹으러 와. 어차피 요새는 맨날 집에 있으니까.

 그럼 너무 폐가 되잖아. 밥값이라도 낼까?

 밥값이야 나중에 하면 되지.

 하다니? 뭘 말야?

커피맛이 더블로 났다. 방금 내가 마신 커피맛 위에 그녀가 마신 커피맛이 더해진다. 살짝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수줍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이다.

이렇게.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커피가 아니라 다른 이의 타액을 마시고 싶었다.

흐음....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지혜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감상했다. 밀려올라간 셔츠와 브래지어 밑으로 불쑥 튀어나온 유방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맨날 술김에, 그리고 어두운 곳에서 바라볼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쥐어본다.

하악....

손가락으로 유두를 문지르자 나즈막한 신음소리를 낸다. 고개를 낮추고 혀를 내밀어 유두를 천천히 핥아나간다. 신음소리에 리듬이 더해진다. 손에 쥔 유방을 이리저리 주물러본다. 혀 끝으로, 또 넓은 면으로 유두의 면을 비벼본다. 여자의 가슴이 두 개인 이유를 알았다. 그건 남자의 손이 두 개이기 때문이다. 한 손마다 하나의 가슴을 쥐라는 신의 계시이다. 입이 두 개가 아니라서 양쪽 유방을 동시에 빨 수 없단 것이 가장 안타까울 따름이다.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보다. 긴 치마를 입고 있던 지라 걷기가 조금 거추장스러웠다. 허벅지 안쪽의 살결은 정말 보드랍다. 부드러운게 아니다. 보들보들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적당히 젖어있는 팬티가 준비되어 있었다. 팬티를 벗기려고 하는데 순간 지혜가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는다.

잠깐만..

 왜?

 그....그게 없어.

 뭐?

콘돔이 없단다. 그냥 하면 안 되냐고 묻자 그녀는 눈을 흘기며 절대로 안 된단다. 덕분에 나는 성이 날대로 나서 오를대로 올라 부푼 그 녀석을 달래며 서둘러 편의점으로 갔다. 플래시맨보다도 빨리. 앤드류보다도 빠르게!

삼천원입니다.

우욱.... 급한 마음에 물건을 집어다가 놓고 계산을 하긴 하는데 하필이면 단 한 명뿐인 점원이 여자였다. 창피해서 죽을 것 같은 내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예쁘장한 얼굴의 점원은 무슨 껌이라도 계산하듯 아무 표정없이 바코드를 찍고 계산을 한다. 물건을 챙겨 뒷주머니에 넣고 나는 듯이 달려 202호로 돌아갔다. 들어가자마자 바지부터 벗어버릴테다. 지금 내 자지는 폭발 직전이라구!!

여어~ 너도 놀러왔어?

 .........어? 어....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 라는 동요가 있었지.

여자 혼자 사는 방에 남자가 벨도 안 누르고 막 들어오고 그러면 안 돼~

 그...그렇겠지? 아무래도? 하.하.하.하.

 너두 비디오 보러 왔어?

 그....그런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콘돔을 잽싸게 뒷주머니에 우겨넣었다. 효진이 눈치채기 전에 말이다. 지혜는 별 다른 표정없이 사과를 깎고 있었다. 효진이 비디오 빌려 가지고 오는 길에 사왔다고 했다. 도로 나가기도 애매한지라 그냥 털썩 걸터앉아 지혜가 까놓은 사과 조각을 몇개 집어먹었다. 그리고 대충 시간 때우다가 볼 일이 있다고 하곤 내 방으로 돌아왔다. 

크아아아아아-

머리통을 부여잡고 방바닥을 몇 바퀴 굴렀다. 절호의 기회였는데!! 나는 왜 평상시에 콘돔을 가지고 다니지 않은 거냐!! 지혜는 왜 맨날 가지고 다니던 일제 초박형 콘돔을 안 가지고 있는거냐!! 옛 말씀에 유비무환이라고 하였거늘, 이토록 그 말이 뼈저리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설령 나나 지혜에게 콘돔이 있어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더라면 한창 삽입을 하고 있는 와중에 효진과 딱 마주쳤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랬으면 아마도 나는 쪽팔려서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한숨을 푹푹 내리쉬다가 오후에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그나마 상태가 괜찮고 점잖아 보이는 놈으로 골라 갈아입고 사이클에 올랐다. 진호 선배가 준 주소지는 여기서 그닥 먼 곳이 아니었다. 약 15분 정도를 사이클로 달린 후 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딱 보기에도 수입차들이 주차장에 즐비하다. 꽤나 비싸보이는 아파트 단지였다. 사이클을 벤츠인가 뭐시기인가 하는 놈 근처에 세워두고 동호수를 확인하여 목표한 곳을 찾아간다.

딩동-

인터폰이 특이하게 생겼다. 버튼과 스피커 말고도 왠 카메라같은 게 달려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화상인터폰인가?

누구세요?

어라? 목소리가 좀 어렸다. 학생인가?

아까 전화드렸던 최한석 학생입니다. 과외 일로 전화드렸더니 찾아오라고 하셔서...

 ...........

 저기, 어머님께서 따로 시간을 말씀 하지 않으셨거든요. 그래서 지금....

 ...........

묵언수행하는 스님도 아니고, 전혀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저쪽에서는 지금 내 얼굴이 보일테니까 최대한 밝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저기 말야, 혹시 지금 어머님 안 계시니? 좀 뵈었으면 하는데 말야.

 ............

여전히 대답은 없고 대신에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현관을 당겨 안으로 들어가며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십니까~?

그러나 넓은 거실에는 쪼끄만 키의 여자애만 하나 서 있었고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어, 안녕? 아저씨는 최한석이라고 하는데...

 ............

 어머니, 어디 나가셨니?

고개를 끄덕인다. 앙증맞은 게 꼭 여자애들이 가지고 옷 입히기 놀이할때 쓰는 가지고 노는 인형같은 얼굴이다. 얼굴이 깜찍한 것도 그렇고 꽤나 무표정인 것도 더욱 그러한 인상을 받게했다. 나이는 이제 십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초등학교 5~6학년쯤 될 것 같다. 아마도 과외하려던 애의 동생인가 싶었다.

언니도 어디 나갔니?

이번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현관에 멀뚱멀뚱 서 있기도 뭐해서 거실로 들어갔다. 

좀 앉아서 기다려도 될까?

역시 끄덕끄덕.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아이는 자기 방으로 쑥 들어가서 문을 닫고 나오질 않았다. 가방에서 책 한권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시간이 넘어가도록 과외할 애는 고사하고 그 애의 엄마도 들어올 생각을 안 했다. 아이의 방으로 다가가 노크했다. 문이 조금 열리고 아이가 빼꼼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저기 말야, 엄마 언제 오시니?

 ..............내일 아침이요.

크아아아악! 뭐냐. 사람 오라고 해놓고.... 그러나 나는 침착하게 최대한 당황하지 않고 물어보았다.

언니는? 언니는 일찍 오니?

그러나 아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낙담한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모처럼 잡은 과외알바자리가 시작부터 이래서야 앞으로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근데, 언니는 왜 찾죠? 아저씨는 과외하러 오신 분 아니었어요? 혹시 가게 단골인가요?

말을 못 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또릿또릿하게 말하는 폼이 꼭 다 큰 어른 같다.

너희 언니 과외하려던 거 아니었어?

 언니는 학교 안 다니는 데요.

뭔가 대화가 꼬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저기 혹시 언니 이름이.....

진호 선배가 준 쪽지를 꺼내보았다. 그리고 이어 물었다.

진유진 학생 아니니?

 아뇨. 진유진은 전데요.

 에엑? 니가?

 그런데요.

완전히 헛짚었다. 요 녀석이 내년에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녀석일 줄이야. 넌 왜 이렇게 생겨서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거니!

저기 말야, 그럼 아까는 내가 과외하러 온 사람이라는 거 몰랐니? 그때 왜 이야기 안 해주고....

 들어오자마자 언니를 찾기에 과외는 뻥이고 가게 손님인줄 알았죠.

 대체 언니가 뭐하는 분이길래...

 ......언니 몰라요?

 모르는데?

 ......몰르면 됐어요.

대충 오해는 풀린 듯 싶었다. 유진이에게 어머니께 연락을 취할 수 없냐고 하자 군말없이 무선전화기를 가져와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언니, 저에요. 유진이. .......네. .........네. 지금 엄마 있어요? 예. 좀 바꿔줘요........엄마가 말한 과외선생님 왔어......... 응. ........... 응. 잠깐만.

전화를 건네받았다. 아까 낮에 통화했던 나른한 목소리의 주인공이긴 한데 지금은 전혀 졸린 목소리가 아니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최한석입니다.

 어머~ 선생님. 미안해요. 내가 좀 일이 있어서 가게에 일찍 나왔거든요. 선생님 오신다는거 깜빡하고 말이죠. 일단 유진이랑 이야기해보시고 결정해주세요.

 저기, 어머님이랑은 의논을 따로 안 드려도...?

 호호호호. 괜찮아요. 제가 뭘 아나요. 그냥 유진이랑 말해서 정해지면 그대로 과외하시면 되요.

 아, 예.

유진이 쪽을 힐끔 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하게 있는 얼굴이었다. 

그럼 부탁드려용~.

굉장히 애교넘치는 목소리였다. 목소리만 들어가지고는 이게 정말 내년이면 고등학생 되는 딸래미를 가진 엄마의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 말투도 그렇고. 모르긴 몰라도 이 유진이라는 녀석은 엄마의 애교는 전혀 닮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기 말야, 어머님이 너랑 이야기해서 결정하라는데?

 다 들렸어요. 일단 여기 앉으세요.

거실 소파에 다시 앉았다. 유진은 작은 탁상달력과 펜을 들고 와서 대각선 편에 앉았다.

우선 말씀드릴게요. 전 별로 과외가 필요없어요. 근데 엄마가 굳이 시켜주겠다고 하니까 그냥 하는 거구요. 그러니 딱히 아저씨도 부담 크게 가지지 말고 그냥 시간만 맞춰서 왔다갔다 잘 해주세요. 그러면 때 맞추어서 페이는 지불할게요.

 ........필요없다니. 공부 안 하니?

달력을 들여다보고 있던 유진은 고개를 들어 나를 힐끔 보았다. 약간 무서운 눈초리다.

지금 K대 다니시죠?

 .......응. 그런데?

 저는 K대 따위가 아니라 나중에 꼭 S대 가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학원도 그거에 맞춰서 다니고 있어요. 그리고 누가 옆에서 걸치적거리는 거 싫어서 과외는 안 할려고 한 건데 엄마가 저 혼자 공부하면 외롭지 않냐는 쓸데없는 걱정을 해서 시켜준 과외에요. 그러니 부디 제 공부 하는 거 방해만 안 해주시면 되요.

 ........똑똑하구나.

 당연하죠.

K대 따위에 다녀서 미안하다. 그 이후, 유진의 일방적인 설명을 경청하는 처지가 되었다. 시간 조정 및 근래 과외 시세에 비추어 적정선의 페이까지.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이제 일주일에 두번씩 여기에 와서 두 시간씩 시간을 죽여야 한다. 물론 떠들면 안된다. 공부하는 유진을 방해하지 않도록 말이다. 그럴거면 대체 왜 오라고 하는 거냐!

기왕 돈 받고 하시는 거니까, 늦지 마시구요. 만약 시간을 변경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하루 전에 연락 주세요.

 어? 응.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래.

쫓겨나다시피 아파트에서 나왔다. 인형처럼 귀여운 것만큼이나 인형처럼 인간미가 없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공부 안하는 바보가 아니라서 다행이기는 하다. 게다가 그냥 시간만 채우면 돈도 제법 쏠쏠하게 나오고 말이다. 이렇게 좋은 과외자리라니! ... 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뭔가 좀 입맛이 썼다. 딱히 나쁜 애도 아니고 누구처럼 입이 험하면서 총을 겨누는 것도 아니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똑부러진게 오히려 안쓰러웠다.

이틀 후, 날짜와 시간을 맞춰서 유진이네 아파트를 방문했다. 여전히 커다란 그 아파트에는 유진 혼자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거실 한 컨에는 전에 없던 테이블이 놓여있었고 그 위에는 교과서와 노트 등이 있었다. 그리고 대각선 방향으로 두 개의 의자가 놓여있었다.

지금이 두시니까요. 네시까지 '과외' 하겠습니다.

 예.

 특별히 질문이 없으면 바로 시작할게요.

 예.

참고로 방금 예, 예하고 대답한 사람이 나다. 유진은 나에게 그다지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풀고 있던 문제집을 이어 풀기 시작했다. 얼핏 보니 고등학교 1학년 수학 문제집이었다. 크흠. 이건 뭐... 할일도 없고.... 그래서 나는 준비해 간 전공책을 꺼내놓고 읽기 시작했다. 중간에 화장실을 다녀온 것 빼고는 딱히 움직이는 사람도 없고 말을 꺼내는 사람도 없었다. 적막한 공간에서 책 넘기는 소리와 필기하는 소리만 있을 뿐.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고 나자 유진은 나에게 뭘 먹고 싶냐고 물어봤다.

먹고 싶은 거라니?

 엄마가 과외 끝나고 나면 식사를 대접하라고 했거든요. 드시고 싶은 거 있음 말하세요. 시킬게요.

 그...그래?

평범한게 좋겠지 라는 생각에 짜장면이나 시켜달라고 하자 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전화기를 들고 짜장 한 그릇을 시켰다. 그리고 다시 또 전화를 걸더니 초밥을 시킨다. 으악. 초밥이라니. 나도 초밥 시킬 걸. 젠장.

그럼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과외를 하는 거야?

 예.

 네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러면 굳이 돈 내가면서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상관없어요. 딱히 엄마도 내가 공부를 더 했으면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를 위해서 얼마만큼의 돈을 쓰고 싶다는 생색을 내고 싶은 거니깐요. 그렇다고 내가 쇼핑이라든가 다른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집에 돈이 많은가 보네. 솔직히 돈이 좀 아깝긴 하다.

 아저씨 돈은 아니잖아요?

인형같은 얼굴로, 그러면서도 또렷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하는 소리를 정면으로 받고 있자니 '참 싸가지 없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금 싸가지 없다고 생각했죠?

 으헉!

 나도 알아요. 그게 내 컨셉이거든요..

 ..........미안. 아니,.음.. 암튼 미안.

왠지 내가 미안해야 할 것 같았다. 얼마 후 시킨 음식들이 왔고 나는 짜장면, 유진이는 초밥을 먹었다. 하나 줄 법도 한데 하나도 안 준다. 얄미운 계집.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히 생각했다. 대체 쟤네 엄마는 뭐하는 사람이길래 코빼기도 비추질 않는 걸까. 애가 공부는 잘 하는 것 같다만 저렇게 싸가지가 없어서야 앞으로 사회 생활 하는데 애로사항이 꽃피지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한참 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뭐, 어떠랴. 내가 데리고 살 것도 아닌데. 그냥 냅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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