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65)

명희의 자취방 난입, 그리고 노예 선언 이후로 벌써 2주일이나 지났다. 

그 사이에 나는 이미 명희에게 여러번 불려나가 갖은 노력을 다 해야 했다. 퇴근 시간에 모시러 가는 건 기본이고 찢어먹은 레이스 팬티를 다시 사러 가는 곳도 따라갔어야 했다. 머리털나고 처음으로 여자 속옷 가게를 가보았다. 한두개가 있을 때는 남자들을 그토록 흥분시키는 물건이지만 그게 떼거지로 있는 곳에 가면 너무 압박이 되어서 나도 모르게 아주 그냥 자연스럽게 쫄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여자들끼리 친구 모임을 하고 있다는 곳에 가서 인사 드리고 개인기 펼치고 술값 계산하는 것은 물론 주말에는 교회까지 따라나가야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찬송가도 불러보았다. 의외로 리듬이 쉬워서 나같은 박치도 몇번 들으니 잘 따라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왠일인지 학교까지 찾아왔다. 이런 일은 처음인데....

레포트를 내고 조만간 있을 시험일정을 확인하러 과사에 들렀는데 이미 명희와 진호 선배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듣기론 명희가 국민학생, 선배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교회에서 만나 알던 사이라고 했다. 입을 가리고 호호 웃어 가며 선배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평상시 나와 있을 때의 모습과 지독하게 심한 갭이 떠올라 심히 불편해졌다.

일정표, 이거 대로 출력해주세요.

과순이에게 미리 적어놓은 신청서를 내밀면서 여전히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 쪽을 힐끔 보았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진호 선배이기에 선배의 모습은 별 색다를게 없었는데 명희의 모습은 뭐랄까, 좀 수줍어 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나랑 있을 때 처럼 또랑또랑하게 말하는게 아니라 약간 겸연쩍어 하는 기색도 엿보였다. 선배랑 알고 지낸지 오래되었다고 하는데 왜 저럴까.

저, 혹시 말이에요. 진호 선배랑 사이가 안 좋나요?

과사에서의 볼일이 끝나고 명희와 함께 나와 교정을 가로질러 가며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펄쩍 뛰며 반문한다.

뭐? 사이가 안 좋냐고? 대체 뭔 소리야?

 아니... 뭐... 좀 어려워 한다고 할까. 평상시에 명희씨는 말도 되게 잘 하고 그러시는데 아까 진호 선배랑 이야기하는 걸 보고 있자니..

 시...신경꺼. 니가 알바 아니잖아.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통에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진호 선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좀 불편한 모양이다. 그래도 명색이 우리 두 사람을 연결(?)해준 사람인데... 흐음.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근데 지금 어디 가는 거죠?

 따라와. 찍소리 말고.

 옙.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학교 앞에 있는 01X 통신사 대리점이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삐삐를 하나 고르더니 나에게 앵겨주었다.

사주시는 거에요?

 미쳤냐? 니가 사.

식비가 다 떨어져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물을 머금고 가입서에 싸인을 했다. 이제 매달 삐삐요금까지 고정적인 지출이 되게 생겼다.

맨날 니 학교 과사에 전화해서 연락 전해달라기도 귀찮잖아. 앞으로 이 삐삐가 울리면 당장 나한테 콜 해. 알았어?

 예....

그녀는 토끼 모양의 핀이 달린 펜을 꺼내어 마찬가지로 토끼 그림이 그려져 있는 표지의 다이어리를 꺼내어 거기에 내 삐삐번호를 적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명희씨는 삐삐 없어요?

 있어.

 근데 왜 저한테 안 가르쳐 줘요?

 내가 왜 니한테 번호를 까야 되는데? 대가리에 총 맞았냐?

 아뇨....

........아직 총은 맞지 않았지만 맞을 뻔한 적은 있지. 참고로 명희의 핸드백에는 예의 그 포텐셜머신인가 뻐킹머신인가 하는 놈이 항상 들어있다. 그녀는 호신용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사냥용을 잘못 말한게 아닐까 싶다.

야, 받아.

그녀는 다이어리 한 페이지를 찢어 내게 내밀었다. 거기에는 015로 시작하는 번호가 적혀있었다. 

내 번호야. 혹시나 싶어서 주는 거니까 비상상황 아니면 괜히 쓸데없이 연락하지 마라.

 비상상황이요?

 그래. 서울에 거대로봇이 쳐들어왔다거나 외계인이 널 납치하려고 하는 상황 아니면 연락 하지마. 괜히 쓸데없이 음성 넣어두고 이딴 짓 하면 진짜 죽는다? 응?

 네에.....

오래 살려면 이 종이는 그냥 고이 접어 가방 한 켠에 넣어두어야 겠다.

아, 참. 그리고 괜히 니 삐삐 생겼다고 주변사람한테 번호 알려주고 이딴 짓 하지 마라. 그건 어디까지나 노예 콜 전용이니까 나 말고 딴 사람이 거기에 연락 못 하게 해라.

 아니, 뭐하러 그렇게까지...

 그래야 니가 내 연락에 재깍재깍 응답하지. 안 그래?

 .......그렇기도 하네요.

그녀의 악마 웃음에 대들었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안 봐도 비디오. 

그 이후 그녀와 함께 시내로 가서 점심을 먹고 영화를 한편 보고 난 후 집에다가 모셔다 드리고 나서야 해방된 나는 자취방으로 향했다. 남들이 보면 남녀의 평범한 데이트 장면이라고 오해할런지도 모르겠다만 주인님 모셔야 되는 노예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이 100% 고스란히 내 지갑으로부터의 지출인지라 꽤나 뼈아프다. 용돈이 오려면 아직도 보름 넘게 남았는데 이제 슬슬 내 통장 잔고는 위험해지고 있다.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찾아야 할 것 같다.

집 근처에 왔을 때 앞쪽에서 뭔가 시끌시끌한 모습이 보였다. 어느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싶었는데 알고보니 내가 살고 있는 빌라의 입구에서 누군가가 언성을 높이며 다투고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인부 두 명으로 해달라고 했잖아요.

 아, 언제요. 나는 그런 연락 못 받았수다.

 아니, 그럼 아저씨 혼자서 이걸 어떻게 들고 가신다고요.

 아따, 그냥 하면 된다니껭.

비닐로 싸인 침대가 하나 길가에 놓여있고 왠 아가씨 한 명과 이삿짐 센터 인부로 보이는 아저씨가 옥신각신 하고 있었다. 그들이 입구를 막고 있는 통에 집에 들어가질 못하고 어영부영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대충 사정이 짐작이 갔다.

저기, 그럼 제가 도와드릴까요?

서로에게 신경질을 부리던 두 사람의 시선이 그제서야 나를 향했다. 그 눈빛은 누구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요기 2층에 사는 사람인데요, 지금 이러고 계시면 다들 드나들기도 불편하고요... 말씀들어보니 이 침대를 가지고 올라가면 되는 거죠?

 네, 맞수다.

인부 아저씨는 그러자며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아가씨는 좀 탁탁치 않은 눈치였다. 짧은 숏컷에 건장한 체구를 가진, 마치 운동선수 같은 느낌의 아가씨였는데 아마도 낯선 남자가 자기 물건에 손대는 게 마땅치 않은 듯 했다.

얘, 지혜야. 잠깐 좀 나와봐. 우리도 거들자.

숏컷의 아가씨는 집쪽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불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흔한 이름이라서 그런가 싶었다. 아저씨와 합을 맞추어 침대를 들어올리려고 하는데 집에서 나온 사람이 나를 알아보았다.

어머, 한석씨?

 어? 지혜씨?

얼마전 잊을 수 없는 밤을 내게 선사해준 여자. 그리고 그토록 뜨거웠던 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차가운 모습을 보이며 내가 등을 보이고 떠나간 여자. 그 여자가 지금 내 앞에 서 있었다. 

뭐야, 아는 사이야?

숏컷의 여자가 나와 지혜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어보았다. 지혜가 대답을 못 하고 어물어물 거리고 있기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먼저 대답하고 말았다.

예. 쫌 잘 아는 사이에요.

지혜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고 그 후로 내가 그녀의 이삿짐을 나르는 동안에도 내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용달차에 실려있던 짐들은 모두 202호, 그러니까 내 바로 앞집에 채워졌다. 짐 옮기기가 다 끝나고, 나는 효진이라는 아까 그 숏컷의 건장한 아가씨가 맥주 한 잔 하라고 가는 성화를 해대어 못 이기고 202호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로 이사 오신 거에요?

 ........네.

효진이 맥주와 안주거리를 사러 가고 지혜와 나는 앉은뱅이 탁자를 하나 두고 마주 앉았다. 상당히 뻘쭘했다. 고개를 돌려 방안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구조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과 방향만 반대고 똑같이 생긴 방에서 살고 있기에...

이렇게 또 만나게 되네요. 정말이지....

'인연'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혹은 '운명'? 인간 드글드글하기로 유명한 이 서울바닥에서 약속도 정하지 않고 어떤 사람을 세번이나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될까. 게다가 그 사람이 자기 집 앞으로 이사오는 일이라니. 정말 식상하기 짝이 없는 삼류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그러나 막상 지혜를 앞에두고 차마 인연이니, 운명이니 하는 단어를 말하긴 어려웠다. 내 시선을 피하고 방 한쪽을 보고 있는 지혜의 모습은 뭐랄까.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얇은 유리의 느낌이 났다. 다시 볼일 없으니 마음놓고 임금님 귀 당나귀 귀라는 소리를 외치는 심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그녀로서는 나를 대하기 꽤나 민망했을 터다.

그러나 입을 먼저 연건 그녀였다.

201호라구요? 여기 맞은 편?

한참만에 지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대답하느라 내 목소리는 약간 새된 소리가 났다.

아, 예. 여기 산지는 이제 막 2년 되어가는데요. 학교도 가깝고 해서 괜찮습니다. 가끔 온수가 좀 안 나와서 그렇지요.

그밖에 가까운 슈퍼, 독서실, 운동장, 동사무소 등에 대해서 설명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별 반문 없이 가만히 듣고 있던 지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는 걸까, 아님 무슨 뜻이려나. 다시 또 대화도 없이 멀뚱멀뚱 앉아있으려니 얼마 지나지 않아 효진이 돌아왔다. 

둘이서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해?

 아.... 방금까지 이런저런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흐음... 뭔가 수상한데?

효진는 캔맥주를 따서 하나씩 돌렸다. 일단 한 모금 들어 마른 목을 적신 후 본격적으로 추궁을 하기 시작한다.

내가 지혜를 알고 지낸지가 어언 6년인데 말이에요. 그 동안 한석씨라는 분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거든요?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알고 지낸거에요?

 아, 그게 그러니까.....

난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담아 지혜에게 보내보았지만 지혜는 나와 눈도 안 마주치고 혼자서 맥주를 홀짝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솔직히 알게 된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몇 주전에 소개팅을 했었거든요. 그때 처음 만났습니다.

내가 가진 능력 중에서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참 저급한 편에 속한다. 그나마 통밥을 굴려 나온 소리가 이런 소리다.

소개팅?

 예, 선배가 주선해주셨거든요...

 지혜가 소개팅?

화살은 지혜에게 넘어갔다. 효진는 의아함을 가득 담아 지혜를 이리 저리 찔러보았지만 지혜는 별 대답없이 그냥 조용히 넘어갔다. 그러나 대답을 해야 할때는 확실히 해주었다.

그럼 설마 한석씨랑 같이 지낼라고 이쪽으로 이사까지 한 거야?

 그건 아냐.

단칼에 잘라 즉시 대답한다.

대학 근처라서 작은 방도 많고 가격도 싸더라고. 어차피 회사도 그만 두었는데 회사 근처에서 계속 비싼 월세 내면서 있을 필요는 없잖아. 부동산에 물어봤더니 첫번째로 나온데가 여기였을 뿐이야. 게다가 니가 이쪽 동네를 추천했잖아. 기억 안 나?

 그으래? 뭐... 그건 그렇지만 말야.

아직 의혹이 덜 풀린 듯한 효진이었지만 지혜의 확고한 대답을 듣고 나니 어느 정도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남은 어색함은 술과 함께 한 시간이 해결해주었다.

저기, 효진씨는 뭐하시는 분이세요?

 아하하하하하핫! 뭐하기는, 그냥 놀지. 백수, 아니 백조닷! 화려한 백조! 백조 아시죠? 물위에 떠있을라고 발을 요?箚? 요?箚? 죽어라 휘젓는 애들 말이에요.

웃음소리가 꽤나 호탕하고 특이한 효진은 지혜와 동갑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셈이다. 직업은 백수. 아니, 백조. 본인이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하하. 더 좋게 말하면 신부수업중? 그렇게 말하면 좀 뽀대가 나려나? 아하하하.

그러고는 지혜의 어깨를 탁탁 치며 외친다.

자자, 니두 이제부터는 이 언니랑 마찬가지로 화려한 백조다! 알았어?

 ......알았어.

살폿 웃는 지혜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목이나 축이자고 맥주로 시작했는데 어느샌가 탁자에는 빈 소주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적어도 다들 맥주 서너캔, 소주 서너 병 이상은 들어간 상태였다. 효진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말이 많았고 처음에는 조용하던 지혜도 점점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이야기를 통해 대충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졸업 후로도 항상 연락을 주고 받아온 절친인 듯 싶었다. 이번에 개인 사정으로 직장을 그만 둔 지혜가 - 나는 왠지 그 사정을 알 것도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방을 옮기려고 조언을 구하자 근처에 살고 있던 효진이 이 동네를 추천했다고 한다. 서울 외곽이면서도 나름 교통도 편리하고 대학교 근처라서 작은 방의 매물이 제법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효진의 백수로서의 애환, 직장을 그만둔 지혜의 허탈함 등을 토로하던 자리는 어느덧 남자 문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물론 이 자리에 대한민국 건강한 남성인 나도 앉아있었지만 몹시 털털한 효진은 내 존재 따위는 쿨하게 잊은 채 지혜에게 직구를 던지고 있었다.

너 솔직히 말해봐. 니년 남자 있었지? 그렇지?

 ........왜 그런 걸 물어.

아마도 지혜는 효진에게 불륜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오랜 친구인 효진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 했을리 없다. 정확히는 몰라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침통한 표정의 효진은 낮은 목소리를 이야기했다.

야, 이년아. 귀신을 속여라. 니년 오늘 입고 있는 팬티가 무슨 색일지도 맞출 수 있는 나를 속일려고 하지마. 니가 굳이 이야기 안 하니까 나도 말 안 하고 있었던 거지.... 너, 그러는 거 아냐.

 효진아.....

울먹이던 지혜는 효진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둘이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며 펑펑 운다.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그러더니 좀 있다가 또 자기들 고등학교때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거리고 웃는다. 울다가 웃으며 어디어디에 털 난다고 하던데 그 어디어디가 정확히 어디어디인지 떠올리려다가 나는 어렴풋 잠들어 버렸다. 두 사람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조금씩 멀어져 갔다.

얼마나 잤을까. 이삿짐을 다 옮겼을 때가 늦은 오후 쯤이었는데 지금은 창밖에 완연히 어두워져있다. 방안에 불도 켜있지 않아 시계가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커다란 쿠션에 등을 댄체 반쯤 누워있었고 내 발치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있었다. 

지혜씨?

 쉿-

낮은 목소리의 대답. 그리고 다른 대답이 이어졌다. 입으로 하긴 했지만 소리를 내는 대답은 아니었다.

읍-

무언가 내 입술을 덮는다. 촉촉한 살덩이가 위 아래로 포개어져 있고 그 사이에서 마치 뱀처럼 움직이는 무언가가 비집고 나와서 내게 침입한다.

?-

내게도 같은 것이 있어 이쪽에서도 내밀어 그것과 이것을 섞어본다. 비벼본다. 문질러본다. 빨아본다. 휘감아 본다. 타액과 타액이 치밀하게 섞이고 숨결과 숨결이 끈적하게 엮인다.

손을 뻗어본다. 이쯤에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생각하고 있던 것이 만져진다. 뭉클하면서도 풍만하고, 둥글면서도 뾰족한 그것이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티셔츠 위로 만지는 것은 몹시도 감질났다. 손을 아래에서 위로, 셔츠를 들추고 안에 있는 브래지어를 밀어내고 그 안에 숨겨진 것을 움켜쥔다. 낮은 탄식과 거친 호흡. 한 손으로 모자라 두 손을 모두 그 작업에 투입시킨다.

그때였다.

다른 움직임이 또 있었다. 내 머리를 부둥켜 안고 있는 두 손말고도 또 다른 두 손이 내 하복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허리띠를 풀고 지퍼를 내리고 바지를 벗긴다. 물론 이쪽에서 협조를 좀 하긴 했지만 또 다른 손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내 트렁크 팬티까지도 탐했다. 그것까지 벗겨지고 나면 나의 아래쪽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쓰읍-

정확히는 이런 소리가 아니지만, 암튼 이런 비슷한 소리가 났다. 아니, 난 것 같이 느껴졌다. 내 입술을 탐하고 내 상반신을 부둥켜 안고 있는 이가 내는 온갖 신음과 한탄에 이미 내 시야와 청각은 마비되어 있었다. 방안 가득한 어둠 너머, 그리고 내 바로 아래부분을 탐하고 있는 그 입이 내 자지를 집어 삼키는 것은 그런 소리가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쭈웁-쭈웁-

흡사 펌핑을 하듯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내 자지를 훑어낸다. 쪽 빨아내고 있는 듯한 뺨 안쪽의 압착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혀끝이 자지끝을 핥아내고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기둥을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문지른다.

아아-

손놀림은 정교하면서도 세밀했다. 아래를 문지를때는 적당히 조여주고 있었고 윗 부분을 문지를때는 또 적당히 이완시켜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키스를 나누던 이는 아래로 내려가 혀의 애무를 보태기 시작했다. 두 개의 뜨거운 혀가 핥아대니 한 개 뿐인 자지는 녹아버릴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녹아내린다. 안에 잠재해있던 뜨거움이 공기중으로 산화하고 그 아득함에 나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역시 꿈은 이렇게 야해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방 한쪽 구석에 널부러져 자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지혜는 어디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나와 대각선 맞은 편 구석에는 효진가 쭈그리고 자고 있었다. 짐더미에서 이불을 찾아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어젯밤 그 야시시한 꿈이 떠올라 부끄러워졌다. 두 사람이 나와 함께 엉켜 물고 빨고를 하는 꿈 말이다. 예전에 동기 한 녀석이 정말 죽이는 거라며 가져온 비디오 테이프에서 그런 비슷한 걸 본 기억이 났다. 남자 하나에 여자 둘. 정말이지 환상적으로 꼴리는 비디오였다. 물론 그런게 현실일리는 없지만 말이다.

마른 입맛을 다시며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를 올리고 물건을 꺼내어 조준한다. 어젯밤 맥주를 많이 마셔서 그런지 오줌에서 술 냄새도 제법 올라오고 때깔도 노리끼리 하다. 졸졸졸 이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무거운 머리릍 좌우로 털어내고 있었다.

벌컥-

음? 누가 있네?

 히익!

기겁을 하고 문쪽을 보니 게슴츠레한 표정을 한 효진이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잠이 덜깬 표정으로 내쪽을 보다가 시선을 점점 아래로 내린다. 무심하게도 오줌 줄기는 끊어질 생각도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몸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남의 집 화장실 바닥에 오줌칠을 하게 될 판이다.

뭐야, 어제 먹었던 거잖아. 흠냐....

문이 닫혔다. 다시 홀로 되었다. 그리고 나는 패닉에 빠졌다.

'어제 먹었던 거라니요!!'

그럼 뭐야, 대체 어젯밤 그 일은 꿈이 아닌건가? 서....설마, 진짜로 효진이랑 지혜가 내 물건을 가지고 할짝할짝을 했다는 건가! 급속도로 당황해진 나는 서둘러 마무리를 하고 손을 씻고 방으로 돌아갔다. 효진은 다시 드러누워서 코까지 살짝 골아가며 자고 있었다. 때마침 현관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지혜가 들어온다.

어? 벌써 일어난거야? 더 자지 그래.

지혜의 말 중에서 내 귀에 전달된 것은 자지란 두 글자 뿐이었다. 마신 물도 없는데 나는 사레에 걸려 켁켁 거리게 되었다. 그러자 지혜가 다가와 걱정스럽게 등을 두드리며 묻는다.

저런? 속 안 좋아? 토한거야?

 켁...켁...아뇨...그런 아닌데....

 일단 물 한잔 마시고 쉬고 있어. 북어국 끓일게.

지혜는 내게 물 한잔을 건네고 싱크대로 다가가 음식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방바닥에 앉아 멀거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기... 지혜씨?

 응, 왜?

 아니, 저... 그게....그러니까.....어제 제가 말이에요....

 아, 맞다. 어제 우리 말 놓기로 했잖아. 기억 안 나?

 그...그랬었나요? 아니, 그래요? 아니아니, 그래?

파를 다듬던 지혜씨, 아니, 지혜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곤 살짝 미소지었다.

푸훗. 너 진짜 웃긴다. 어제는 한 살 차이라는 건 동갑이나 마찬가지라고 우리 보고 절대로 누나라고 안 부르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말야. 정신 덜 차렸으면 가서 세수라도 좀 해. 그리고 효진이 좀 깨워줘.

 어? 어....

 그리고, 어제 말인데....

 어?!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러나 지혜의 표정은 평온했다.

너랑 효진이 덕분에 이사도 잘 했고 그리고 이야기 나누면서 기분도 다 풀렸어. 고마워.

 어? 어...내가 뭘 했다고....

 후후. 그러니까 빨리 들어가서 씻어. 얼굴이 말이 아냐.

얌전하게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찬물로 얼굴을 닦고 나니 좀 정신이 돌아왔다. 지혜의 태도를 보고 나니 어제의 일은 아무래도 내 꿈이 맞긴 맞나보다. 효진이가 뭔가 잘못 말했겠지. 방으로 돌아가 효진을 흔들어 깨웠다.

음... 효진... 아, 아니. 효진아. 일어나.

 음냐음냐....

 아침 먹어야지.

 음냐음냐... 더는 못 먹어.... 흠냐....

몸을 뒤척이는 효진의 얼굴에 뭔가 말라붙은 자국 같은게 보였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정말 꿈이라니까. 그렇다니깐.

지혜가 끓여주는 북어국으로 해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해가 중천이었다. 기지개를 한번 펴고 바로 앞에 있는 내 집으로 들어간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이렇게 와보니 정말 가깝다. 그제서야 내 집 바로 앞에 지혜가 이사왔다는 실감이 났다. 뒷통수를 긁적이고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어 방문을 연다. 오늘은 휴일이니까 모처럼 집에서 푸욱 잠이나 자야겠다. 왠지 모르게 하반신에 힘도 없고 말이다.

철컥-

낯익으면서도 전혀 낯익고 싶지 않은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그러니까 공이를 당겨 장전을 하고 방아쇠만 당기며 그 안에 압축되어 있는 70 파스칼 압력의 가스가 분출되면서 그 전단에 있는 납구슬을 발사할 준비가 되었다는 그 소리 말이다. 참고로 그 납구슬은 십 미터 이내에 있는 합판을 가볍게 ?孃儲嗤?수 있는 운동에너지를 가진다. 나보다 먼저 집에 들어와 있던 이는 이런 흉칙한 물건을 항상 핸드백에 넣고 다니는 분이다. 그런 분이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물론 총구로 내 옆구리를 찌른 채 말이다.

흐음... 이젠 아주 그냥 외박이야? 응? 그런거야?

 아...아뇨, 여기에는 사정이....

 닥쳐!

하지만 난 잘 알고 있다. 이럴때 정말로 닥치고 있다가는 큰 화를 입게 된다는 것.

치...친구랑 만났거든요. 그래서 오랜만이라 이야기를 하다보니....

 아항. 그래서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주인님이 보낸 호출도 죄다 씹고 집에 전화해도 받지도 않고 그러셨다? 미친 거 아냐? 니가 요새 좀 감이 떨어졌지? 엉? 내가 중요한 볼일로 외출해야 되니까 따로 약속 잡지말고 아침부터 대기해놓으란 음성 남긴거 들었어 못 들었어?

 호출.....이요? 음성....?

 그래, 이 병신아! 호출! 삐삐말야, 삐삐!

주인님이 고맙게도(?) 뒤통수를 후려치며 외쳤기에 그제서야 나는 어제부터 나도 삐삐족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황급히 가방에서 삐삐를 꺼내 익숙치도 않은 손놀림으로 조작을 해보니 무려 20개 가까운 호출이 들어와 있었다. 이 삐삐 번호를 아는 사람이 스무명은 고사하고 두 사람도 안 되는데 말이다.

야이, 새끼야. 너 진짜 죽어볼래? 나 미치게 할려고 작정했어? 엉?

 아...아뇨, 정말 몰랐습니다. 진짜에요. 여태까지 안 쓰던 거라서 전혀 신경을 못 쓰고 있었습니다....

1mm 정도만 당기면 바로 발사될 총구 앞에서 나는 조아리고 엎드려 싹싹 빌었다. 거의 30분 가까이를 빌고 나니 그제서야 명희의 기분이 진정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마지막 경고야. 그 삐삐를 사준 이유를 잘 생각해. 알았어?

 아, 예.

삐삐를 산 것은 나지만 말이다. 그런 딴지는 여기서 걸면 안 되겠지. 나는 현명하니까.

알았으면 빨리 나갈 준비 해.

그러고보니 명희도 외출복 차림이었다. 살짝 정장차림?

어딜요?

 니가 알 건 없으니까 일단 준비나 해. 시간은 10분 준다.

 아, 예.

황급히 머리를 감고 대충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 입던 대로 입고 나가니 주인님이 친히 쪼인트를 까신다. 주인님의 닥달에 힘입어 생전 안 입던 셔츠를 찾아 입고 대충 정장 비스무리하게 입고 따라나선다. 명희를 따라 간 곳은 시내의 큰 백화점이었다. 거기서도 신사복 전문 매장이라 불리는 곳을 들어갔다.

키는 이 정도면 됐고.... 덩치는 좀 더 크려나?

 저기, 지금 뭐하시는 거죠?

 내가 말 하라고 할 때까지 닥치고 있어.

 예.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그녀는 점원의 도움을 받아 나를 마음껏 이용했다. 온갖 종류의 셔츠와 자켓, 다양한 종류의 정장바지를 입어보았다. 아마도 살아있는 마네킹 정도로 취급한 모양이었다. 적어도 마네킹은 자기가 직접 옷을 입을 수 없으니 내 쪽이 더 편리했겠지.

방금 입었던 옷 하고요, 저쪽의 저 바지, 예, 그래요. 그거하고, 이거랑 해서 그렇게 주세요. 수선은 아까 말한대로 해주시구요.

어찌어찌하다보니 정장 한벌이 완성되었다. 설마 나한테 사주려는 건가 싶었는데 가만히 있어보니 이건 분명 내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키는 나와 비슷하지만 치수는 나보다 한 치수 더 큰 사람의 것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내가 계산을 하지 않고 그녀가 계산을 했다는 점에서 이건 결단코 내 것이 아니었다.

야, 너 만약에 말야... 아주 만약에...

 네.

 흠, 혹시나 진호 오빠가 이거 얼마짜리냐고 물어보거든 싼 거라고 말해야 돼. 알았어?

 예.....

옷을 갈아입으며 얼핏 본 태그에는 내 한달 용돈을 넘어가는 금액이 자켓 한 벌의 가격임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런걸 가지고 싼 거라고? 게다가 아까 그녀가 계산할 때 카드로 6개월인가 할부로 결제하던데. 싼 거라면서 그렇게 사나? 그나저나 뭔가 깨달았다.

아, 알았다.

 뭐가?

 이거 진호 선배 주려는 거에요?

 뭐....뭐야. 그건 니가 알아서 뭐하게!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피한 채 나보다 먼저 저만치 걸어갔다. 진호 선배 이야기는 내가 아니라 그쪽이 먼저 꺼냈는데.... 나는 양손가득 들고 있는 짐꾸러미를 추켜올리며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걸어갔다. 

얼마 후, 진호 선배 생일이었다. 우리 과 애들이 다 같이 과사무실에 모여서 케익 하나를 사놓고 축하를 해주었다. 진호 선배는 내가 한번 입어보았던 정장을 입고 있었다. 누군가 브랜드를 알아보고 비싼거 아니냐며 물어보았지만 진호 선배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냐, 그냥 아는 애가 사준 거야. 이미테이션이라 싼 거래.

.......그게 아니라 백화점에서 산 거에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꾹 참았다. 주인님이 시키는대로 해야 별 탈이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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