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8)

# 12부에서 계속 됩니다.

1.확실히 다른 글을 보더라도 게시판이 한산한 듯 하네요. 조회랑 댓글이 줄어든 느낌?.;

2.11부의 글을 쓰기 위해서 10부까지 책 한 권 분량을 썼네요. 오늘이 지나가기 전까지

2시간 30분 정도 남았는데, 시간이 없어서 정말 미친듯이 타자를 쳤습니다. 

그냥 하루 지나고 내일 올릴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내일 글은 내일 또 올려야 하니;;

3.태풍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대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에 4학년이었던 여 선배가 있었다. 이름이 권미진이었고 비교적 보통의 여자들보다 작은 키였지만, 비율이 좋고 얼굴이 상당히 깜찍하게 생긴 여자였다. 마치 한때 포켓 걸로 불리던 이현지같다고 할까?. 

내가 1학년 때는 미진 선배가 휴학 중이었기 때문에, 서로 얼굴을 알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미진 선배의 존재조차 모르고 지내다가, 그녀가 다시 복학을 하고 과 생활을 하면서 친해질 수 있었다.

나보다 3살 연상이었던 미진 선배와 친해질 수 있었던 계기는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 사는 곳이 같은 동네였다는 것이다. 개강 파티를 하면서 조촐한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는데, 미진 선배와 대화를 하면서 서로의 집이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 때문에 그날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미진 선배와 함께 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야할 거리였지만, 술도 깰 겸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며 우리는 걸어갔고 그 사이에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약 40분 간 걸어서 미진 선배의 집 앞에 도착을 했을 때, 그녀를 들여보내며 얼마나 아쉽고 설레던지, 그 후로 과 술자리가 있으면 난 꼭 미진 선배와 함께 집을 갈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미진 선배와 나는 우연찮게 수업이 2개나 같았다. 그런데 그 중 한 수업에서는 조별 발표 과제가 있었는데, 서로 아는 사람이 없어서 낙심하던 차에, 서로를 발견하고 반가워했다. 당연히 우리 둘은 같은 조가 되었고, 미진 선배는 그 후 몇 차례 나 혼자 살고 있는 원룸에 찾아와 발표 준비를 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미진 선배와 친해진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조금씩 그녀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깜찍한 외모를 가진 미진 선배는 하는 행동도 매우 귀여웠고, 혼자 살고 있는 나를 신경 써주는 경우 - 식사라든지 - 도 있었다. 

그렇게 미진 선배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언젠가는 과 동기 하나가 나에게 미진 선배와 사귀는지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했는데, 동기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나에게 충격을 줬다. 

미진 선배에게 애인이 있다는 말이었다.

동기 말에 따르면 미진 선배와 같은 학번인 남 선배가 있는데, 새내기 때부터 미진 선배와 유명한 캠퍼스 커플이었다고 했다. 사귄 햇수로는 벌써 5년이라고 했고, 지금은 군대에 가 있는데, 전역까지 채 반 년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해준 동기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조언을 했다. 미진 선배와 내가 가까이 지내면서 과 선배들이 날 좋게 보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미진 선배 애인의 동기인 남 선배들이 나를 벼르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동기의 말을 듣고 난 두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왜 미진 선배는 애인이 있다는 말을 나에게 하지 않았을까?. 물론, 내가 물어 본 적도 없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미진 선배의 뛰어난 외모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게 애인이 없다고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두 번째로는 동기도 알고 있는 사실은 왜 내가 모르고 있었냐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쉽게 답이 나왔다. 미진 선배에 정신이 팔린 나는 과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음도 눈치 채지 못했으니, 누군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동기의 말을 듣고 많은 고민을 했다. 사실 정상적으로 따지면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애인이 있는 여자를 건들어서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미진 선배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못 잊을 만큼 좋아하지는 않았다. 내가 여기서 미진 선배와 거리를 두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됐다.

이런 결정을 한 후, 나는 미진 선배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에도 서로 인사 정도만 나눴고, 따로 연락이 오더라도 두 번에 한 번은 받지 않았다. 연락을 받아도 기계적인 대화만 했을 뿐, 철저하게 내 감정을 숨겼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미진 선배는 내가 예전 같지 않다며 내 행동 변화를 눈치 챘다. 나는 아무런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미진 선배는 자신이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가슴이 아프고 당장이라도 그녀를 껴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에 고민만 깊어졌다.

미진 선배 때문에 술이 생각났고, 나는 영민이를 불렀다. 그리고 녀석에게 미진 선배와의 일을 털어놨다. 한참 내 이야기를 듣던 영민이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결국에는, 미진이라는 여자를 먹고 싶은데, 그 여자에게는 애인이 있고, 너는 그것이 양심에 걸린다는 것 아니야?.”

영민이 말에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긴 개뿔. 오히려 네가 불같이 사랑했다면, 양심이고 나발이고 신경 쓸 것 같아?. 사랑 앞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오히려 사랑했다면 그 여자를 쟁취하려고 별짓을 다했겠지. 그러나 당장 넌 과에서 네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도 두려워하잖아. 그래서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이고?.

이것이 영민이의 장점이었다. 도저히 녀석을 속일 수가 없었다. 그랬다. 영민이의 말이 내 심정이었다. 

“네가 가진 호감 정도는 길에 지나가는 여자 100명 2-30명에게도 느낄 수 있지. 적당히 예쁜 여자와 같이 밥 먹고, 같이 영화 보고, 이런 시간을 보내면 안 좋아할 남자가 어딨어?. 당연히 최종적으로는 섹스도 해보고 싶잖아. 안 그래?.”

나는 영민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여자가 왜 너에게 잘해 주냐고?. 분명 어느 정도로 남자로 느꼈겠지. 군대에 간 애인과 헤어진 건 아니잖아?. 그 사람을 대신할 누군가 필요해. 고작 6개월 남았는데 무슨 소리냐고?. 너나 나랑 군대를 아직 가본 적은 없지만, 군대 내에서 6개월이며 피를 말릴걸. 또한 그 6개월을 기다리는 여자도 말이야.”

술 한 잔을 들이켜 목을 적신 영민이는 계속 말을 했다.

“일탈이란 말 알아?. 그 여자는 일탈을 하고 싶은 거야. 그 상대가 바로 너야. 증거를 대볼까?. 상황적 증거라는 간접 증거지만, 만약 그 여자가 너를 좋아 했다면 아까와 마찬가지로 보이는 게 없을걸. 그러면 다행이 군대에 간 남자와도 헤어졌겠지. 그러나 헤어지지는 않았잖아. 오히려 전역 날까지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기다리는 것은 힘들어. 그래서 자신의 외롭고 힘든 마음을 챙겨줄 대체자가 필요해. 그게 너라는 것이지.”

난 영민이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기서 선택해야 할 것은 그 여자가 아니고, 너야. 먹고 즐기느냐?. 아니면 양심에 따라 그 여자를 멀리하느냐?. 나 같으면 그냥 먹고 즐긴다. 이때 중요한 점은 절대 정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

영민이의 말을 들은 나는 그날 이후 다시 미진 선배에게 연락을 했다. 미진 선배는 다시 활기차게 자신을 대하는 나를 보고 좋아했고, 우리는 그렇게 자연스레 연인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우리는 과에서는 절대 모르는 비밀 연애를 했다.

그리고 대학 축제가 한창이던 5월의 어느 날, 미진 선배는 내가 사는 원룸에 놀러왔고 우리는 그날 밤 서로의 육체를 탐닉했다. 미진 선배는 뜨거운 여자였고, 적극적인 여자였다. 밤 새 몇 번이나 내 위에 올라타 허리를 흔들었다.

미진 선배와 첫 섹스를 한 후, 우리는 그 어떤 커플보다 뜨겁게 불타올랐다. 시간만 생기면 내가 사는 원룸에서 서로의 몸을 찾았다. 미진 선배의 몸에 빠져들수록 나는 그녀의 애인에 대한 미안한 생각마저 잊어버렸다. 양심이고 도덕이고 중요하지 않았다. 미진 선배의 뜨거운 육체만이 나에게 전부였을 뿐...

그렇게 우리는 몇 달간 육체적 사랑을 나눴고, 난 휴학을 하고 군대에 가야 했다. 내가 입대하던 날, 미진 선배와 마지막 전화 통화를 했는데, 그녀는 펑펑 울었다. 그리고 나에게 힘내라며, 주소만 알려주면 많은 편지를 쓴다고 했다.

내가 훈련소에 입대를 하고 미진 선배에게 편지를 썼다. 약속대로 미진 선배는 매일같이 나에게 보고 싶다며 편지를 썼고, 나는 힘든 나날 속에서도 즐겁게 답장을 했다. 그러나 채 두 달도 되지 않아서 미진 선배는 더 이상 나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전화를 해보았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왜 그럴까?. 미진 선배가 왜 내 연락을 피하는 것일까?. 남들이 다 자는 새벽에 사수와 탄약고 야간 경계 근무를 서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쉽게 정답을 알 수 있었다. 날짜 계산을 해보니, 미진 선배의 애인이 전역할 시기와 맞물렸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옆에서 졸고 있는 사수를 두고, 난 속으로 영민이가 해 준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일탈은 일회성이야. 그리고 일탈이 끝나면 돌아간 다는 뜻이지. 어떤 여자가 너를 정말 사랑하더라도 돌아갈 곳이 있으면 반드시 돌아간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 유부녀가 너를 사랑하더라도 보통은 큰 죄책감을 가지지. 거기에 자식과 남편을 떠올리면... 그 유부녀는 가정으로 돌아갈 수 밖 에 없어. 너를 선택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하거든. 버려야 할 것도 많지. 그냥 즐겨. 대신 정을 주지 마. 마음을 줬는데, 나중에 여자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면... 너만 상처 받을 거야. 미진이라는 그 여자도... 애인이 전역하면 다시 돌아가겠지. 부정하고 싶겠지만, 나랑 내기를 해도 좋아.”

***

다운이 엄마는 일주일 째 나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나와 만나주지도 않았다.

애가 탔지만, 만나지 않고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다운이 엄마가 나를 만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애초에 술을 마시지 않고 이성이 있었다면 나와의 육체관계를 맺지도 않았을 테니...

이대로 다운이 엄마와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었다. 일단은 어떻게 서든지 만나서 대화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다운이 아빠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었다. 다운이 아빠에게 연락을 해서 조촐하게 술 한 잔을 하자면, 그는 분명 나를 집으로 초대할 것이었다.

다운이 아빠에게 전화를 했고, 그는 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오히려 저녁까지 함께하자는 이야기도 했다. 일단은 내 계획대로 되었기 때문에 다운이 엄마를 만날 수 있을 듯 했다. 문제는 다운이 엄마에게 어떻게 말을 해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도서관에서도 일을 하면서 계속 생각을 했지만,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은 얼굴을 보고 이야기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대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 온 나는, 일단 찬물로 샤워를 했다. 정신을 제대로 차려서 다운이 엄마를 설득 시키리라 다짐했다. 저녁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 되자, 난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벨을 눌렀다.

“어서와.”

지난 일주일과는 달리 301호의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다운이 아빠가 나와 나를 반겨 주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래... 허허.”

다운이 아빠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고,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다운이 엄마를 볼 수 있었다. 난 다운이 엄마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줌마. 잘 지내셨어요?.”

“으..응. 민수도 잘 지냈니?.”

“덕분에....”

나를 본 다운이 엄마의 순간적으로 굳었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은 듯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생글 웃으며 인사를 했다. 

“당신. 준비 다 됐지?.”

“네. 다 됐어요.”

“민수야. 식탁에 앉아.”

“네. 아저씨.”

다운이 아빠가 식탁의 중앙에 앉았고, 다운이 엄마와 나는 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앉았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다운이 아빠는 내내 대화를 이끌었고, 나는 적당히 대답을 하면서 다운이 엄마를 쳐다봤다.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하려는 모습이 보였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면 애써 피하는 듯 했다.

“잘 먹었습니다. 아줌마.”

“그래. 잘 먹었다니... 다행이네.”

“여보. 술 상 좀 봐줘.”

“조금 기다리세요.”

식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운이 아빠와 나는 거실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다운이 엄마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등, 술자리에는 참여하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야구는 수비가 중요해. 타격이야 10번 쳐서 3번만 안타를 만들어 되지만, 수비는 100번 해서 99번을 성공을 해야 하니... 타격을 잘해도 수비가 안 좋으면 반쪽자리 선수지. 오히려 수비가 좋은 선수들이 오랫동안 야구를 할 수 있단다.”

“그렇군요.”

여지없이 다운이 아빠의 주된 이야기는 야구였다. 난 적당히 다운이 아빠의 야구 이야기를 들으면서 술을 먹이려고 했다. 다운이 아빠가 취하면 다운이 엄마와 단둘이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오산이었다.

“아. 몇 시지?.”

“9시가 조금 안 됐네요.”

“그만 마셔야겠구나. 내일 중요한 연습이 있거든...”

“..........”

생각보다 이른 시간 내에 술자리가 마무리가 되었다. 다운이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향했고, 내내 부엌에서 무슨 일을 하던 다운이 엄마는 거실로 와 술상을 들었다. 나는 그런 다운이 엄마에게 말을 했다.

“대화를 하고 싶어요.”

“난 할 말 없어.”

“조금만.... 시간을 내줘요.”

“.........”

다운이 엄마는 자꾸 나를 피하려 했다. 화장실에서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제가 나가고 아파트 앞에 벤치에서 기다릴게요. 대화 좀 해요. 5분이라도 좋아요. 자꾸 이렇게 피하시면, 전 다운이 아빠를 이용해서 계속 이 곳에 올 수 밖에 없어요.”

“...........”

다운이 엄마는 내 말을 듣고 얼굴을 찡그렸지만, 대답을 하지 않고 술상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다운이 아빠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아저씨 잘 마셨습니다. 저 이만 가볼게요. 아저씨 야구 이야기 들으면 참 즐겁네요. 다음에도 들었으면 좋겠는데...”

“하하하. 언제든지 우리 집에 와.”

유쾌한 웃음소리를 내는 다운이 아빠의 배웅을 받으며 난 301호를 나섰다. 그리고 현관문이 닫혔고, 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생각보다 일이 쉽지 않음을 느꼈다.

“휴....”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며 난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파트 앞에 있는 벤치에 도착했다. 어둠속에서도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벤치에 앉았다. 다운이 엄마가 내 말대로 나와 줄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기다려야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밖에 없었다.

5분 그리고 10분이 지났다. 다운이 엄마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반쯤 포기를 할 때였다. 발걸음 소리가 내 귀에 들렸고,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다운이 엄마가 나에게 오고 있었다. 다운이 엄마는 내 앞으로 다가왔지만, 벤치에는 앉지 않았다.

“음식물 쓰레기 버린다고 하고 나왔어.”

다운이 엄마가 처음 한 말은 시간이 없음을 나에게 간접적으로 알리는 말이었다. 

“일단 앉으세요.”

“그럴 시간 없어. 빨리 말해. 가봐야 해.”

다운이 엄마는 딱딱한 말투로 나에게 말을 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운이 엄마의 눈을 쳐다보며 말을 했다.

“보고 싶었어요.”

“...........”

“그날.....”

“기억하고 싶지 않아.”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다운이 엄마는 그날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음.... 분명 명희씨도.....”

“이름 부르지 마.”

“...... 네. 아무튼, 전 진심이었어요. 그러니까.....”

“술에 취해서... 실수한 것 뿐 이야. 그 점에 대해서는 어른인 내가 미안하다고 생각해.”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뜨거운 밤을 보냈던 그 날을 두고 다운이 엄마는 술에 취해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실수’라고 말하고 있었다.

“전, 실수가 아니였어요. 그리고 명희씨도....”

“이름 부르지 말라니깐...”

다운이 엄마가 조금은 소리를 높여 나에게 말을 했다. 이런 다운이 엄마의 모습이 너무나 어색했다. 난 다운이 엄마의 눈을 쳐다봤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할 말 없으면... 그만 가볼게. 그날 일은 잊어줘... 그리고 연락... 하지 마.”

“자... 잠시 만요.”

다운이 엄마가 가려고 하자, 난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다운이 엄마에게 진심을 물었다.

“명희씨는... 진심이 아니었나요?.

“난... 난...”

다운이 엄마의 눈을 쳐다봤다. 조금씩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러나 다운이 엄마는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난... 난... 실수한 것 뿐 이야.”

말을 마친 다운이 엄마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리에 힘이 풀려 벤치에 앉는 것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약 2주가 지났다.

내 삶에 다운이 엄마가 빠져 나간 것 뿐 이지만, 하루하루가 너무나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

날도 더웠지만, 난 잊혀 지지 않는 다운이 엄마 생각 때문에 힘이 들었다. 바로 아래층에 사는 다운이 엄마였지만, 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만나서도 안 되었다. 다운이 엄마가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줬는데, 이렇게 떠나버리니, 너무나 공허했다. 

세상이 아름다고 재밌는 것이 많다고 하지만, 지금에 있어 나에게는 세상이 전혀 아름답지도 않고, 재밌는 일도 없었다. 즐거움이 무엇이고?. 행복이 무엇이란 말인가?. 매일같이 늘어나는 건 한 숨과 술일 뿐...

만약에 과거 영민이가 ‘힘들기 때문에’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한다면, 한 마디 했겠지. 

식사를 거의 챙기지 못했고, 저녁에는 술로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 때문에 내 자신이 너무나 싫어졌다. 내가 다운이 엄마를 사랑했단 말인가?. 스스로 질문을 던져봤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에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사랑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즐기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이 감정이 무엇인지, 나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결국에는 마음보다 내 몸이 버티지를 못했다. 도서관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온 몸에서 식은땀이 흘렀고, 머리는 어질어질 거렸다. 더구나 에어컨의 냉기 때문에 몸은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결국에는 오후에 조퇴를 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힘겨웠다. 택시를 탔지만, 어떻게 집에 도착을 했고, 어떻게 계산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401호 현관문을 열었다. 어지럼증이 더욱 심했고, 난 술에 만취한 사람마냥 비틀 거리기 시작했다.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모든 형체가 흐릿하게 보인다. 그리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털썩.

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헉... 헉...”

일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내 몸에는 한 줌의 힘도 남지 않았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당장 생각나는 건 다운이 엄마 뿐 이었다. 힘겹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단축 버튼 1번을 눌렀다. ‘이명희’라는 이름이 핸드폰 메인 화면에 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헉... 헉...”

그리고 난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

여기는 어디지?. 지금은 또 몇 시일까?.

힘겹게 눈을 뜨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다. 어렵게 실눈을 떴는데, 누군가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아직은 주위가 잘 보이지 않는다. 내 이마에는 차가운 천이 느껴졌다. 물에 적신 수건인가?. 누워 있는 등에서 푹신함이 느껴졌다. 내가 침대에 누워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누가 나를?.

내 귀에는 물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물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뭘까?. 내 이마에 있던 물수건 느낌이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디찬 물수건이 내 이마에 다시 얹어졌다. 아, 물소리는 수건에 물을 적시던 소리였구나. 누구인지, 확인해야겠다. 그러나 너무나 피곤하다. 그리고 몸이 무겁다.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야 하는데, 힘이 없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시 눈이 스르르 잠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잠이 든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까와는 다르게 주위가 어두웠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몸은 많이 나아졌다. 어지럼증도 사라져 있었다. 

“으..으.”

상체를 일으켜 세워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내 옆에서 몸을 움직였다. 어둠속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깜짝 놀랐지만,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때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믿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 사람은 다운이 엄마였다.

“이제 괜찮니?.”

“엇?...”

다운이 엄마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내 눈은 어둠속에서 천천히 적응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다운이 엄마의 윤곽은 충분히 보였다.

“어... 어떻게?.”

“약도 먹었으니... 괜찮아 질 거야... 열도 내렸고...”

“어...떻게...”

차분한 다운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다운이 엄마가 나를 간호했던 것이지?. 내가 아팠던 것을 어떻게 알았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다운이 엄마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만 가볼게... 식사 챙기고...”

“자... 잠깐만요.”

다운이 엄마가 일어서서 움직이려고 하자, 난 황급히 그녀를 불렀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없어... 건강 잘 챙겨...”

“궁금해요. 어떻..게...”

궁금하다는 나의 말에 다운이 엄마가 잠시 뜸을 들인다. 그러나 이내 곧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후에 전화가 왔어. 무심코 발신자 확인도 안하고 받았는데... ‘으으’하는 소리만 들렸어. 장난전화인 것 같아서 발신자를 확인하니... 민수... 너더구나.”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끊겼어.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궁금했지만... 참으려고 했어. 이제 민수 너랑은 남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너무나 걱정스러웠어.”

“........”

“시간이 많이 흘렀어. 아저씨가 집에 왔고.... 저녁을 차려주고... 같이 텔레비전을 봤어. 그런데 온통 머릿속에는 민수 네 생각이었어. 도대체 무슨 일일까.... 도대체 무슨 일일까...”

다운이 엄마는 점점 격앙되기 시작했다. 다운이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왠지 모를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다운이 엄마는 조금씩 떨기 시작했다.

“다운이 아빠가 밤 9시에 잠이 들었어... 평소보다 이른 잠자리였어. 그때... 왜 내 머릿속에는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민수 너에게 전화를 했어. 하지만, 통화 연결이 되지 않았어... 내 가슴이 쿵쾅 거렸고...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망설이고 망설였어.”

“.........”

다운이 엄마는 이제는 조금씩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401호...민수 너희 집 앞이었어... 문이 열려 있었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민수....네가 쓰러져 있었어... 민수 넌 나에게 8시간 전에 도움을 청했는데... 난....난....그때서야....”

다운이 엄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눈물을 흘렸다. 다운이 엄마의 말을 들으면서 나도 가슴속에 무언가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울고 있는 다운이 엄마를 보며 나 역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이제... 괜찮아요. 누군가 나를 간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명희씨였군요. 이제 괜찮아요. 울지 마요. 난 행복한 꿈을 꿨으니....”

어둠속에서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울음을 멈춘 다운이 엄마가 나에게 말을 했다.

“아프지 마.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줄 아는 법이야.”

“네. 앞으로는.... 그럴게요.”

“이만 가볼게. 늦었어. 벌써 새벽 2시야....”

다운이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방을 나갔다. 이제 다운이 엄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새벽 2시, 다운이 아빠가 눈치 채기 전에 다운이 엄마가 돌아가야 하는 것을 알았지만, 이대로 보내기 싫었다. 

조금 더 다운이 엄마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재빠르게 다운이 엄마의 뒤를 따라갔다. 현관 앞에 도착을 했을 때, 신발을 신고 있던 다운이 엄마를 뒤에서 껴안았다. 다운이 엄마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가지 마요.”

“.............”

“나를 두고....가지 마요.”

다운이 엄마의 귓가에 가지 말라며 속삭였다.

그리고 내 말을 들은 다운이 엄마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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