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에서 이어집니다.15년 전.
사람이 사람을 못 믿고, 세상이 급속도록 각박해져서 이웃에 누가 살든 관심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15년 전의 전주의 한 동네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이웃과의 교류도 활발한 편이었고 동네의 골목길 등에서는 매일같이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지금과는 달리 사람 사는 맛이 나는 곳이었다고 할까?.
아마 다운이를 처음 본 것은 매미가 시끄럽게 울던 한 여름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름 방학이었지만 날이 무척이나 더웠기 때문에 해가 기울지 않는 이상 밖에서 뛰놀 생각이 없었다. 특히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는 집 안에만 틀어 박혀 선풍기 바람만 쇨 뿐이었다.
“아하. 덥다”
다운이를 처음 만난 그 날도 난 하릴 없이 방바닥에 뒹굴 거렸다. 체질상 추운 것보다 더운 것을 참지 못했기 때문에 여름의 찌는 듯 한 무더위는 나에게 있어 곤욕 그 자체였다.
‘딩동 딩동’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집에 혼자 있을 때는 누가 찾아올 거리가 없었는데, 내 귀에 들리는 초인종 소리는 의아한 면도 있었지만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더운 여름날 집에만 틀어 박혀서 매우 심심했는데, 누군가 우리 집을 찾아 주는 것 자체가 재밌는 일이 될 수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과 같은 시대라면 ‘강도가 아닐까’하는 두려운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에는 세상이 그렇지 않았다.
“누구세요”
“옆집에서 왔어요”
스피커폰으로 누군지 확인을 했는데, 예상외로 또랑또랑한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열기 버튼을 눌러 대문을 열어주고 나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보았다. 우리 집은 주택 2층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1층 대문을 통과한 후 계단으로 올라와야 했다.
현관문을 나서서 계단을 내려다보니, 하얀 원피스를 입은 어느 여자아이가 무언가를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여자 아이가 왜 우리 집을 찾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난 멍하니 그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히야...덥다. 안녕.”
“어....어...안녕”
어느새 내 앞에 선 그 여자 아이는 키가 나만 했다. 그리고 생글생글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자아이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는데, 그 쟁반에는 시루떡이 올려져 있었다.
“부모님 안 계셔?”
“으...응”
처음 본 나를 보고 친구처럼 자연스레 말을 건네는 여자 아이. 그때 나는 13살이었지만, 이런 경험이 전에는 없었기 때문에 약간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당돌하게 나오는 여자아이를 상대하는 법을 몰랐으니.
“어제 우리 집 이사 와서 떡 돌리고 있거든. 저기 바로 옆집이야”
“아....”
여자 아이가 손가락으로 바로 옆집을 가리킨다. 그 집도 2층이었다. 생각해 보니, 어제 시끌 시끌 했던 이유가 여자 아이집이 이사를 왔기 때문인 듯 하기도 했다. 날이 더워서 아예 밖을 내다보지도 않고 선풍기 앞에서 낮잠만 잤으니.
“자, 떡 받아”
“그래...고마워...”
여자 아이가 떡을 건네주자, 난 얼떨결에 그 떡을 받았다. 그제 서야 여자아이의 모습을 제대로 봤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 하얀 피부를 가지며 마치 인형처럼 예쁘게 생겼었다. 더구나 하얀 원피스를 입고 양 갈래로 묶은 머리는 발랄하고 귀여운 느낌마저 들었다.
“이만 가볼게...”
“그...그래...”
떡을 내게 건네 준 그 여자아이는 뒤를 돌아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고 했다. 난 그 여자아이가 계단에 올라올 때처럼 멍하니 그 뒷모습만 바라봤다.
“아참, 이름이 뭐야?”
“나?”
“이곳에 또 누구 있어?”
“나...김민수야...”
“정다운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새침한 듯 자신의 이름만 말하고 다시 돌아선 여자아이. 그게 정다운과의 첫 만남이었다.
다운이와의 첫 만난 날, 나는 조금은 설레 였던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설레 였다. 비슷한 또래 중에 다운이만큼 예쁜 여자 아이는 학교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예쁜 여자 아이가 옆집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에 자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도 들었다. 물론, 그때는 다운이와 잘해봐야지라는 생각 자체도 없을 만큼 어렸고 순수했다. 그냥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좋을 때였으니.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다운이에 대해서 약간은 충격을 받았다. 나와 비슷한 또래, 아니 동갑이라고 생각했던 다운이가 무려 3살이나 어렸기 때문이었다. 13살인 나와 10살이었던 다운이.
키가 크고 성숙해 보였기 때문에 다운이가 초등학교 3학년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아마 다운이의 나이를 알고부터는 다운이에 대해 생각이 바뀌었던 것 같다. 그냥 동네에 사는 예쁜 동생 정도랄까?. 어릴 때일수록 1살이 민감했기 때문에 다운이를 ‘또래 여자’라고 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나와 동갑내기 여자 아이 그 누구보다 성숙한 모습이었지만, 3살 차이는 3살 차이였으니.
다운이는 얼굴이 예쁜 만큼 성격도 활발했다. 그리고 명랑했다. 나이를 떠나서 동네의 그 어떤 아이와도 친하게 잘 지냈다. 물론, 나와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생글생글 웃고 다녔기 때문에 동네 어른들의 평판도 매우 좋았다.
그 당시에는 집에 틀어 박혀 컴퓨터 게임만 하고 놀던 시절이 아니었다. 컴퓨터 있는 집도 드물었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아주 무덥지만 않으면 동네의 한 어귀에 모여 놀이를 하며 놀았다. 숨바꼭질도 하고, 구슬치기도 하고, 고무줄도 하고...
다운이의 경우는 여느 여자 아이와 달리, 남자들처럼 제기도 차고 구슬치기도 하며, 딱지를 치기도 했다. 그래서 동네 남자 아이들과도 매우 잘 어울렸다. 그리고 동네 남자 아이들도 다운이와 노는 것을 좋아했다.
다운이가 남자 아이들과의 놀이에 열성적인 것도 한 몫을 했지만, 남자 아이들의 경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다운이의 경우는 원피스를 즐겨 입었는데, 놀이를 하다 보면 종종 치마 속을 노출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자 아이들끼리는 몰래몰래 다운이의 치마 속을 훔쳐보았고, 자기들끼리 희희낙락 거렸다. 물론, 놀이에만 열중하는 다운이는 그 사실을 몰랐다.
나 역시 그 사실을 알았고 처음에는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나 역시 보통의 남자 아이들처럼 다운이의 치마 속을 훔쳐보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다른 10살짜리 여자 아이의 치마 속을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운이의 치마 속을 보는 것과는 달랐다. 감흥의 유무 차이랄까?. 그 때는 성(性)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다운이의 치마 속이 매우 특별한 것은 사실이었다.
여름 방학 내내 다운이와 놀면서 다운이는 우리 동네 아이들의 틈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마치 몇 년 전부터 우리 동네에 살았던 아이처럼 익숙해졌다. 여름에는 무더웠기 때문에 우리 동네 아이들은 시원한 오전 혹은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 오후 4-5시경에 모여 놀았다. 더 놀고 싶어도 대부분의 아이들 부모가 정오가 되면 점심을 먹으로 오라고 했기 때문에 12-4시 사이는 동네 아이들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하나 둘씩 아이들이 집으로 향했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집에 가봤자 아무도 없었고, 굳이 점심을 챙겨 먹은 날이 많지는 않았지만, 아이들도 없는 무더운 시간대에 홀로 남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익숙하게 집 대문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얘”
“...”
누군가 해서 뒤를 돌아보니, 생글 생글 웃는 다운이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다운이보다 키가 한참이나 더 큰 아줌마도 보였다. 얼굴을 몇 차례 보기는 했지만, 다운이 엄마였다.
“우리 집에 와서 점심 먹을래?”
“.......”
다운이 엄마의 갑작스런 제안이었고, 난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못해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댔다. 이런 모습이 귀여워 보였는지, 다운이 엄마는 빙긋 웃으며 말을 했다.
“이름이 민수라고 했지?. 다운이에게 들었는데, 잘 대해준다면서?. 우리 집에 가서 점심 먹게. 이리 오렴”
“오빠, 이리 와”
내가 선택을 못하고 있자, 다운이가 나에게 와서 내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대로 다운이 손에 이끌려 다운이네 집으로 향했다.
다운이네 집에 도착해서 식탁에 앉았는데, 사실 반찬이야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맞벌이 때문에 음식 신경을 쓰지 못하는 우리 집보다 다양한 반찬에 맛도 있어 보였다. 날이 더워서 식욕도 없던 지라 점심은 거의 챙겨 먹지 않았는데, 다운이네 식탁 앞에 앉으니 모처럼 배가 고프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
“오빠 많이 먹어...”
모녀의 생글생글한 웃음이 나를 편안하게 해줬고, 난 자연스럽게 식사를 했다. 식사 도중에 다운이 엄마는 나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봤는데, 대부분은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부모님 맞벌이 하시니?”
“네.”
“바로 옆집에 사는데도 거의 본적이 없는 듯 하구나. 그럼 밥은 혼자 챙겨 먹어?.”
“네...보통은 그렇죠...”
“에구...”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물까지 벌컥 들이 킨 후, 다운이 엄마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맛있는 식사를 대접을 받았으니, 감사의 인사는 당연한 했다.
“잘 먹었습니다.”
“그래. 거실에 가 있을래?. 수박 줄게...”
“아...네.”
“오빠, 이리와...”
다운이를 따라와 거실로 향했다. 다운이네 집에 막 들어 왔을 때, 거실을 지나치기는 했지만 막상 자세히 볼 겨를이 없었다. 지금에서야 거실을 보니, 여타의 다른 집들과는 독특한 것이 있었다. 거실의 한 쪽 벽면에 진열대가 있었는데, 무수한 메달과 몇 개의 야구 방망이, 그리고 글러브가 있었다.
“어?”
“아하. 이거 우리 아빠 꺼야”
그때까지는 다운이 아빠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언뜻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스포츠형 머리처럼 짧은 머리에 까맣게 탄 피부, 그리고 무엇보다 주위에서 볼 수 없는 등치를 가진 남자였다.
“아빠 꺼라면?”
“몰랐어?. 우리 아빠 야구 선수인데...프로야 프로.”
다운이는 직접 스윙 폼을 잡으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야구 선수임을 알려왔다.
“정민석 선수 몰라?. 그게 우리 아빠인데....”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스포츠에 관심이 있던 나로서는 어지간한 선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정민석 선수라?.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기억은 나지 않았다. 내가 기억을 해내지 못하자, 다운이는 입술을 내밀며 뾰로퉁 해졌다.
“호호...다운아. 아빠 보고 야구 좀 열심히 하라고 해야겠다...”
“흥.”
어느새 수박을 가져온 다운이 엄마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했다.
“민수도 프로야구 A팀 알지?. 다운이 아빠가 그 팀 선수야...비록 1군 주전은 아니지만...”
“아...”
그제 서야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도 납득이 되었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프로 2군 선수들의 상황도 팬들이 체크할 수 있었지만, 15년 전에는 중계도 거의 없었고, 1-2군에 어떤 선수들이 있는지 파악하기도 힘들었으니.
“그래도 우리 아빠 야구 무지하게 잘해. 앞으로 홈런 뻥뻥 칠거야...”
“그...그래.”
다운이는 여전히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자신 만만 했다. 그런 모습은 영락없는 10살짜리 같은데, 평소에는 그렇지 않으니. 그런 다운이를 보면서 난 수박 한 조각을 텁석 입에 물었다.
“아...시원하게 다네요.”
“그래?. 어제 수박 사길 잘했네...호호”
우리 셋은 거실에서 한동안 수박을 먹었다. 여전히 다운이 엄마는 나에 대해 이것저것을 물어보는 입장이었고, 난 짧게 대답을 하는 쪽이었다. 대화 주제는 어느새 학교 문제였는데, 아무래도 방학 중에 전학을 온 다운이라 새 학기 때 새 학교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다운이 엄마는 그것이 걱정인 듯 싶었다.
“잘 적응 할거 에요. 동네 아이들과도 금방 친해지던데요.”
“그래?. 민수가 6학년이니까, 다운이 잘 돌봐주면 좋겠는데...”
“뭐, 제가 할 건 없는데...혹시라도 다운이 못 살게 구는 애들 있으면, 막아 줄게요...”
“오빠가? 하하하”
“호호호. 말이라도 고맙다 민수야...”
나의 말에 다운이가 웃었다. 아무리 봐도 이렇게 예쁜 다운이를 못 살게 굴 애는 없는 듯 싶었다. 괜한 말을 한 듯 싶어서 부끄러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모녀가 웃고 있으니 괜히 얼굴도 빨개지는 듯 싶어서 성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줌마, 이만 가볼게요. 점심이랑 수박 잘 먹었습니다.”
“벌써 가게?”
“많이 놀았으니, 오후에는 집에서 공부도 해야죠.”
“그래?. 그럼 조심히 가고...아니지. 바로 옆집이니...호호호...잘 가고 다음에 보자”
“네...안녕히....계세요.”
“오빠 잘 가...”
다운이네 집을 나왔다. 딱히 공부를 할 것도 없었지만, 아무래도 두 모녀와 함께 오랫동안 있는 것은 익숙지 않았다. 여자들 틈에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여느 날처럼 선풍기를 켜고 방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방금 전 다운이네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물론, 심적으로는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포근하고 따뜻하다는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이게 어떤 심정인지 정확히 표현을 할 수는 없지만, 불편한 듯 하면서도 편안함을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뭐지, 이런 감정은....”
생각해 보면 내가 의지를 가지는 순간부터 평일에 가족과 점심 식사를 한 적이 거의 없었던 듯 싶었다. 부모님이야 항상 일을 하셨고, 난 학교에 다녀오면 홀로 집에 있었으니. 때론 저녁까지 혼자 챙겨 먹어야 했던 적도 많았던 것 같고...
가족끼리 일상처럼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 어쩌면 당연한 것이 나에게는 예외적인 것이었으니, 그날의 다운이 엄마가 나에게 보여준 호의는 참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난 이런 저런 생각을 한 후 잠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다운이 집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 날이 많아졌다. 아니, 거의 매일같이 점심을 얻어 먹었다. 처음에는 다운이가 나를 데리고 갔고, 그 뒤로는 다운이 엄마가 아예 나를 보고 점심을 먹으로 매일같이 오라고 했다. 어차피 밥 한 그릇, 수저 하나만 더 놓으면 된다면서 부담 가지지 말라고 했다.
사람이란 게 항상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처음에는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거의 매일같이 다운 집에 가서 점심을 먹다보니, 다운이는 둘째 치고 다운이 엄마와 부쩍 친해지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이모와 같은 존재가 되었고, 다운이 엄마 역시 나를 친조카처럼 대해줬다.
나에 대한 다운이 엄마의 이런 호의 때문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도 감사의 인사를 표했고, 한번은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를 했다. 작게는 다운이 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지만, 크게 보자면 이웃사촌 간에 정을 쌓는 자리이기도 했다.
두 가족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날, 그날은 처음으로 다운이 아빠를 제대로 볼 수 있었는데, 상당히 과묵하지만 순수한 사람 같았다. 그리고 프로 선수라 그런지 일절 술도 입에 대지 않는 성실함마저 보여줬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운이네가 집으로 돌아갈 때, 다운이 아빠는 프로 1군 선수 몇몇의 사인 볼을 내게 선물로 줬다. 그것을 받고 난 얼마나 기뻐했던지....
저녁 식사를 함께 한 이후로는 우리 집과 다운이 집은 거의 한 가족처럼 지냈다. 물론, 우리 부모님이 매우 바쁘시고, 다운이 아빠가 프로야구 선수라 함께 모이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간소한 부탁도 들어주고, 음식도 나눠 먹는 등 활발한 교류를 했다.
물론, 그 교류의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2학기가 개학을 한 후, 다운이 집에서 점심을 얻어먹는 횟수가 확 줄어들었다. 하지만, 3-4시에 학교에서 끝나더라도 난 자연스럽게 다운이 집에 놀러 갔고. 다운이 역시 자연스레 우리 집에 놀러 왔다.
13살짜리 남자 아이와 10살짜리 여자 아이가 무엇을 하고 놀았을지 궁금할 수도 있었지만, 생각 외로 우리는 맞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 집에는 생각보다 많은 책이 있었는데, 다운이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왔다. 반면에 나는 다운이네 집에 가서 다운이 아버지의 글러브와 야구 방망이를 보는 것이 하나의 취미가 되었다. 물론, 다운이 엄마와 대화를 하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어라, 이 메달은 다른데요?”
언제던가?. 그 날도 다운이 집에 놀러가서 진열대에 놓인 것들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수십 개의 메달 중에서 다른 메달을 우연찮게 발견하게 되었다. 대부부의 메달은 ‘우수 타격상’, ‘우수 투수상’, ‘대회 MVP'처럼, 다운이 아빠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를 하며 각종 대회에서 받은 메달이었는데, 특정 몇 개는 그게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야구 분야에서 받은 메달이 아니었다.
“어떤 거 말하니?”
“이거랑 저것도 다르네요.”
“오빠, 어떤 거 말하는 거야?”
내가 진열대에서 몇 개의 메달을 집어내자, 다운이와 다운이 엄마가 진열대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메달을 보고 다운이 엄마는 잠시 방긋 웃더니 대답을 해줬다.
“호호. 그건 내 거야....”
“네엣?”
“엄마 꺼 라니?”
그 메달들에 대한 정체는 다운이도 모르는 듯 했다. 나와 다운이가 의아하다는 듯 다운이 엄마를 쳐다보자, 생긋 웃은 다운이 엄마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다운이도 몰랐구나. 엄마도 사실 운동 선수였어.”
“정말?”
“엄마도 중학교 때까지는 배구 선수였단다. 그러니까 이렇게 엄마도 키가 크고, 다운이도 키가 크잖니.”
중학교 때까지는 배구 선수였다는 다운이 엄마. 그제 서야 다운이 엄마의 키가 납득이 되었다. 일반 여자들보다 큰 키라고 생각이 되었는데, 다운이 엄마도 운동선수 출신이라니.
“우와, 그럼 우리 집은 다들 운동선수 였네. 다운이도 운동선수 할까?”
“호호호”
한참을 웃던 다운이 엄마는 안방으로 가더니 앨범을 꺼내왔다. 그리고 앨범 뒤쪽에 있는 빛 바랜 사진 몇 장을 꺼내더니 우리에게 보여줬다. 그 사진에는 배구 유니폼을 입은 단발머리의 10대 소녀가 방긋 웃고 있었다.
“이거 엄마야?. 우와 예쁘다....”
“진짜 배구선수 였네요?”
“그럼. 진짜지. 괜히 거짓말 할까봐?”
다운이 엄마의 모습을 사진 속 모습과 비교를 하면 확실히 지금과는 달랐다. 일단 헤어스타일부터 다운이 엄마는 긴 생머리를 뒤로 묶고 다녔지만, 예전에는 단발머리였으니, 풍기는 이미지가 다를 수 밖에 없을 듯 싶었다. 하지만, 다운이도 그렇고 피부가 하얗고 깨끗한 모습은 여전 했다.
“아줌마. 그런데 왜 배구 선수 그만뒀어요?”
“키가 작아서?”
“정말요. 그 키가 작은 거예요?”
“호호...아줌마 키가 171인데, 배구 선수 치고는 큰 키가 아니야.”
“그렇구나...”
“호호. 물론, 배구도 잘 못했고....”
그날은 다운이 엄마의 옛 사진과 옛 메달을 보며 옛 이야기를 들었다. 배구를 하게 된 이유, 배구를 하면서 벌어진 일, 시합 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었던 에피소드 등, 다운이 엄마도 옛 이야기를 하면서 좀 더 밝아진 모습이었고, 이야기 자체도 듣는 것 만 으로도 재밌었다.
그렇게 나와 다운이, 다운이 엄마는 자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서로의 사회적 지위가 다르고, 서로의 나이가 달랐지만, 함께 있을 때는 거의 친구와 없었다. 하지만, 즐거웠던 시간도 점차 세월의 흐름 속에 추억이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상당히 바쁘게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다운이 집에 놀러 갈 기회가 확연하게 줄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거기에 사춘기를 겪으면서 부쩍 성장해버린 나에게도 원인이 있었다. 사타구니에는 털이 나기 시작했고, 중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로 인해 성(性)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대가리도 많이 커서 이제는 초등학생과 노느니, 조금 더 성숙한 사람과 노는 것이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간단히 말해서 11살의 다운이가 유치하게 느껴졌다. 난 14살이 되었으니깐.
성적 호기심이 많아져 버린 14살의 사춘기 시절의 소년. 더구나 집에서는 아들이 성적도 상위권인 모범생이길 바랐기 때문에, 이런 것을 모두 만족 시키려면 더 이상 다운이 집에 갈 이유가 없었다. 이제는 나도 어른답게 놀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그렇게 가끔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운이 집과는 멀어졌다. 물론, 그 기간은 딱 1년뿐이었지만...
다시 1년이 지난 후, 내가 15살이 되었고, 예상하지도 못한 그 사건이 발생하면서, 난 다운이 집에 대한 교류를 시작했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해야 했다.
그것은 다운이 집에 대한 집착, 아니 다운이 엄마에 대한 집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