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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어쩌면 그녀는
태근에게 번쩍 들려진 하영은 소리 질렀다.
"왜 이래? 내려줘!"
"너 지금 발바닥 상태가 장난 아닐 거야. 이 동네는 바닥이 그렇게까지 고르지 못하단 말야. 가만히 있어봐."
그제야 하영은 발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욱신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신경 쓰지 않을 때는 몰랐는데, 이미 깨닫고 나니 몹시 아팠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태근의 목을 끌어안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하영은 그렇게 태근에게 안긴 채 빌라까지 돌아왔다. 빌라 안으로 들어오자 하영은 태근에게 부탁했다.
"내려줘. 여긴 괜찮잖아."
"그럴래?"
태근은 조심스럽게 하영을 내려주었다. 바닥에 내려선 하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남은 구두 한 짝도 벗어버렸다. 그제야 양 발의 높이가 맞아서 걷기 편해졌다. 태근은 한 손에 구두 한 짝을 들고 있는 하영을 보면서 말했다.
"그러게 왜 비도 오는데 무작정 뛰어나간 거야? 너땜에 나도 다 젖었잖아."
"....미안."
"미안은 무슨. 들어와서 말리고 가. 비가 쉬이 그칠 것 같지도 않고."
하영은 주저했다.
"내가 너네 집에? 그러다가 니.... 여자 친구가 오해하면 어떻게 하려고?"
"여자친구?"
태근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을 본 하영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거듭 질문했다.
"그 현아라는 아가씨가 네 여자 친구잖아..."
"아, 맞다. 넌 아직 그렇게 알고 있었겠구나...저기, 그게 말이야...."
태근이 뒤통수를 긁으며 멋쩍어 하고 있는데, 계단에서 내려오는 이가 있었다.
현아였다. 그녀는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하영이 언니는 모르셨군요. 저랑 오빠는 사귀는 사이 아니에요. 그날 하루만 부탁 받은 거고요."
아마도 이쪽의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
"하루? 부탁?"
하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태근을 쳐다보자 그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동생이 결혼할 사람을 데려온다고 그러는데 내가 혼자라고 그러면 아버지한테 분명히 한 소리 들을 것 같아서 말야. 그 날 하루만 현아에게 부탁했던 거야. 여자 친구인 척해달라고."
"뭐라고?"
하영은 어이가 없었다. 그제야 자신이 놓쳤던 퍼즐 조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때만 해도 아직은 사찰부대가 하영에게 태근의 주변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일상적으로 보고 하던 때였다. 그들은 태근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영은 그들이 놓쳤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태근에게 여자 친구가 없었다! 사찰부대는 제대로 일한 게 맞았다.
어이없어하는 하영의 얼굴을 보며 현아는 살짝 웃었다. 무언가 짐작 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언니."
"안심이라니...."
말끝을 흐리는 하영을 보며 현아는 빙긋 웃었다.
"그럼 들어가 보세요. 저는 이제 가볼게요. 버스 정류장이 바로 요 앞이니까 괜찮아요."
그녀는 태근과 하영에게 인사를 남기곤 우산 하나를 펴들고 빌라를 나섰다. 비 내리는 거리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영은 태근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태근은 덩치에 맞지 않게 큰 신음을 내며 엄살 부렸다.
"안 데려다 줘?"
"알아서 간다고 하잖아."
"매너 없기는..."
"그럼 널 여기 두고 쟤를 데려다 주라는 거야?"
태근의 반문에 하영은 입을 닫았다. 그건 또 싫은 이야기다.
"일단 들어가자. 너 몸이 싸늘해. 옷 좀 말리고 가."
태근이 하영의 손목을 잡고 집으로 이끌었다. 하영은 몸에 힘을 빼고 그를 따랐다. 여기에 찾아올 때만 해도 어찌해야 할지 몰랐지만,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는 다른 생각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까 태근이 그녀를 안아 올렸을 때의 느낌. 그 느낌이 너무도 크게 다가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태근의 자취집은 작았다. 부엌과 거실을 겸한 공간과 침대가 놓인 작은 방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거실의 집기라고 해봐야 1인용 소파 하나와 테이블 하나, 의자 하나, 장식장 위에 놓인 작은 오디오세트가 하나였다. 그렇다고 아주 없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국내 굴지의 그룹 회장의 아들이 머물고 있다고 하기에는 턱없이 수수한 모습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연습장과 책 등을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하영의 시선을 알아차린 태근은 씨익 웃었다.
"이제 곧 임용고시라서 현아와 스터디를 하고 있었어."
"둘이 많이 친한가봐?"
"친하다기보단... 교생도 같이 했고 학교도 같으니 자주 보는 거지."
"집까지 찾아올 정도면 친한 거 아냐?"
하영의 샐쭉한 말투에 태근은 살짝 웃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하영을 돌아보았다.
"평소에는 카페에서 스터디를 했는데, 오늘따라 손님이 많아서 자리가 없더라고. 당장 스터디 장소를 다른 곳으로 구하기도 애매하고 그래서 우리 집에 왔는데... 왜? 신경 쓰여?"
태근의 질문에 하영은 아차 싶었다. 그녀는 테이블에서 시선을 거두어 집 전체를 둘러보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집 작네..."
"네 사무실보다도 좁지? 내가 가진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을 구하다 보니 이 정도가 딱이더라고."
"네가 가진 돈?"
"응. 어차피 아버지 말도 안 듣고 내 맘대로 살아갈 건데, 독립한다면서 아버지 돈을 가져다 쓰면 그것도 웃기지 않겠어?"
태근이 사용하는 "아버지"라는 단어에서 하영은 은은하게 가슴 한편이 아팠다.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쁘진 않네. 너답다."
"그치? 외곽이라서 동네도 조용하고 좋아. 조깅하기도 편하고."
태근은 커다란 타월 하나를 꺼내오더니 하영의 머리 위에 얹어주었다.
"젖은 것 좀 말리고 있어. 보일러 켜놨으니 입은 채로도 금방 마를 거야."
하영은 수건을 만지작거리다가 태근을 쳐다보았다. 태근은 아직 알지 못했지만, 갈팡질팡하던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제 한 가지 중대한 결정이 내려졌다. 하영은 태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욕실은 저쪽이야?"
"욕실?"
"응. 좀 씻고 싶어. 옷은 네 옷 아무거나 하나 빌려줘."
하영은 태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수건을 가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이내 결심하고 옷을 모두 벗어버렸다. 비에 잔뜩 젖어 축축하게 들러붙은 옷이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벗은 옷가지를 잘 개어 한쪽에 포개어 놓고 샤워기를 틀었다. 처음에는 찬물이 나왔지만, 이내 따뜻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내린 비에 잔뜩 젖었던 몸이 따뜻한 물에 다시 젖기 시작했다. 같은 물이지만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빗물에 젖을 때는 마치 강제로 누군가 몸을 만지는 느낌이었지만, 따뜻한 물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포근하고 감미로웠다.
"하아...."
하영은 샤워기를 가져다가 가슴 위에 대보았다. 맨날 한석이 선미와 비교하며 놀려대곤 했지만, 그렇다고 하영의 가슴이 그렇게까지 작은 편은 아니었다. 하영은 봉긋하게 솟은 가슴 언저리를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기로 문지르며 생각했다. 지금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신은 완전히 알몸, 집 안에는 태근과 자신 두 사람뿐.
'내가 미쳤지... 무슨 생각으로 욕실로 들어와서 이러고 있지...?'
여러 번 물어도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영이 자신을 향한 물음에 빠져 있는 동안 노크 소리가 났다. 뒤이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태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티셔츠와 바지를 문 앞에 둘게. 필요하면 입어."
하영은 샤워기를 끄고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태근이 건넨 수건은 운동용 전신타월인지라 머리와 몸을 닦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였다. 하영은 태근의 모든 것이 참 크다고 생각했다. 덩치도 그렇고 손도 그렇고...
'그럼... 거기도 큰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하영은 자기 혼자 얼굴이 새빨개졌다. 측면에 있는 거울을 감히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미쳤나 봐. 이상한 사람이랑 한 사무실에 너무 오래 있어서 그래.'
하영은 황급히 몸을 마저 털고 욕실 문을 조심스럽게 보였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개만 내밀고 주변을 둘러보니 부엌 쪽에 서 있는 태근의 뒷모습이 보였다. 무언가 달칵거리고 있는 걸 보아 뭔가 만드는 모양이었다. 태근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외쳤다.
"그 앞에 있는 거 보이지? 사이즈는 안 맞겠지만, 대충 입어."
하영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기필코 이쪽을 돌아보지 않는 태근의 뒷모습이 너무도 듬직하게 느껴졌기에 포근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영은 바닥에 놓인 옷을 집어 들었다. 타월만큼이나 옷도 하나같이 다 컸다.
"옷 다 입었어. 이제 돌아봐도 돼."
"그래?"
태근은 머그잔 두 개를 각각 손에 하나 들고 돌아서다가 멈칫했다. 하영이 태근을 쳐다보며 여상스럽게 말했다.
"왜? 내 차림이 이상해?"
하영은 지금 전신에 티셔츠 하나만 걸친 상태였다. 속옷은 이미 다 젖은 상태라서 벗어놓은 상태였다. 여름 티셔츠라 그다지 두꺼운 옷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속살이 은은히 비치고 있었다.
애초에 태근이 준 옷은 트렁크 스타일의 러닝쇼츠와 반팔 티셔츠였는데, 워낙 사이즈가 커서 티셔츠 하나만으로도 하영은 짧은 원피스를 입은 모양이 되었다. 태근이 내어준 바지는 품이 너무 넉넉하고 입어도 그대로 아래로 흘러내려 버렸기 때문에 입을 수가 없었다.
하영은 내색하지 않기 위해 무던한 애를 쓰고 있었지만, 내심 그녀는 무척 떨리고 있었다. 한 번도 남 앞에서 이런 차림으로 나선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남자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이상하다기보단... 옷이 많이 안 맞았구나?"
태근은 허탈하게 웃으며 하영에게 다가와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내밀었다. 잔을 받기 위해 하영이 팔을 뻗을 때, 헐렁하기 이를 데 없는 티셔츠가 조금 흘러내렸다. 덕분에 하영의 한쪽 가슴 대부분과 팔이 노출되어 버렸다. 두 손으로 잔을 붙든 하영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동안 태근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하영의 옷을 끌어올려주었다. 자신의 팔에서 목까지 옷을 잡아 올리는 태근의 손동작에서 하영은 심하게 두근거리고 말았다. 마치 그가 자신의 몸에서 옷을 벗기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좀 더 작은 옷을 찾아볼까. 많이 안 맞지?"
"아냐, 번거롭게..."
"바닥은 차니까 이쪽에 앉아."
태근은 하영에게 소파를 양보하고 본인은 식탁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나란히 앉아 한참 동안 말없이 커피를 홀짝였다. 태근의 시선은 하영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베란다 쪽을 보고 있었다. 하영은 그런 태근의 측면을 보고 있었다.
'너무 달아....'
특별하게 다를 것도 없는 믹스 커피였음에도 하영은 그게 너무 달게 느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침묵을 먼저 깬 건 태근이었다.
"이제 말해봐."
조용하게 있던 태근이 하영에게 말을 건넸다. 시선은 여전히 반대편을 향한 채였다.
"뭘?"
"이런 야심한 밤에 갑자기 찾아온 이유 말이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
"문제..."
하영은 조용히 머그잔의 가장자리를 혀로 핥아보았다. 조금 남은 커피의 잔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내가 꼭 무슨 문제가 있어야 널 찾아오는 거야?"
"여태 날 찾아온 적도 없었잖아. 갑자기 찾아오지를 않나, 문 앞에서 도망쳐 버리지를 않나. 왜 그랬어?"
"그건 그러네..."
하영은 손에 든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커피는 남아있지 않았다.
"사과하고 싶어서 찾아왔어. 근데 그럴 용기가 아직 없었나 봐."
"사과?"
"이미 전에도 네가 말했지만... 그동안 사람을 써서 네 주변을 탐색한 것. 너와 관련된 일에 대해 허락 없이 끼어들었던 것... 그것들을 사과하고 싶어."
"사과라...."
태근 역시 손에 든 머그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두 개의 머그잔이 나란히 놓여졌다.
"그걸 네가 왜 사과해. 사과는 잘못한 사람이 하는 거야. 보나마나 아버지가 네게 시켰겠지. 넌 그걸 충실하게 이행했을 뿐이고. 그러니 넌 잘못한 것도 없고 사과할 필요도 없어."
"용서해 주는 거야?"
"용서는 무슨... 너랑 내 사이에 사과니 용서니 하니까 되게 웃긴다. 야. 그냥 웃고 넘겨, 인마."
태근은 바닥에 놓인 잔 두 개를 집어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에 놓고 물을 부어놓고 있는데, 그의 등 뒤로 하영이 다가왔다. 그녀는 태근의 등에 오른손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태근은 멈칫했지만, 하던 컵 씻기를 계속 했다. 태근의 등 뒤에서, 하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만 물어볼게."
"뭘?"
"....너랑 나 사이는 어떤 사이야?"
태근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그가 들은 마지막 말은 젖어 있었다. 비에 젖은 것도, 샤워기의 물에 젖은 것도 아니었다. 눈물에 젖어 있었다. 태근은 당황하고 말았다.
"야, 너 왜 울어? 내가 울린 거야?"
"아냐. 그런 게 아냐. 내 질문에 대답해줘. 너랑 나... 대체 어떤 사이야?"
"뭐?"
"친구야? 아님 형제야? 그것도 아니면.... 아니면....."
"하영아...."
태근이 멈칫하고 있는 사이, 하영이 뻗은 두 팔이 태근의 목을 감싸 안았다. 키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하영은 팔에 힘을 주어 태근의 머리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하영의 입술이 태근의 입술에 닿았다. 매달리다시피 한 하영은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는 태근의 팔을 느낄 수 있었다. 단단하고,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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