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65화 (46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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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어쩌면 그녀는

"하앙.... 항.... 한석 님.... 흐음...."

의자에 앉은 한석, 그리고 그의 위로 선미가 앉은 채로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하영의 위치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한석의 물건이 어디로 들어가 있는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문제였다. 하영과 눈이 마주친 한석은 야릇한 미소를 날렸다.

"입이나 손으로는 하지 말라면서요? 그럼 직접 박는 수밖에."

"......대체....."

"이것도 하지 말라면, 음, 당신이 여기 와서 대신 하든가요. 어때요?"

자신을 향해 손을 까닥거리는 한석을 보면서 하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고 하영이 업무를 쉴 순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던 일감을 싸들고 한석의 앞에 갖다놓았다. 그런 후 보고를 시작했다.

"정부 내년도 예산안 중 SOC관련 사항 분석철입니다."

그러나 한석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거기 둬요."

"회사소유분 주식 대상회사 재무제표 현황 검토안입니다."

"그것도 거기 둬요."

"신규 사업에 대한 재무팀의 의견서와 법무팀의 검..."

"그것도 전부 다 거기 둬요."

하영은 들고 있던 서류를 전부 다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한 평 정도 되는 한석의 책상은 각종 서류철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의자에 깊게 몸을 묻은 한석은 자신의 책상 앞에 서 있는 하영을 보고, 다시 책상 전체를 둘러보며 낮은 휘파람을 불었다.

"평상시에 이 정도의 서류를 하영 씨가 다 보는 건가요?"

"네."

"휘유. 많기도 해라."

"해외자산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국내자산 규모만 따져도 100조에 달하는 JS그룹입니다. 이 정도는 결코 많지 않...."

"아, 됐고."

한석을 손을 내저으며 하영의 말을 끊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중에 서류철 하나만 집어 올리더니 자기 앞에 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서류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한테 가져오기 전에 하영 씨가 이미 다 검토했겠죠?"

"그렇습니다만...."

"심각한 문제가 있는 서류가 있던가요?"

"그런 서류는 전부 반려했습니다."

"그럼 여기 있는 건 다 괜찮은 거고?"

"네."

한석은 두 손을 머리 뒤에서 깍지 낀 채로 서류를 둘러보았다. 말 그대로 표지만 둘러보았다. 표지만 봐도 넌더리가 나는 듯 해 보였다. 이윽고 그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럼 됐어요. 전부 제 이름으로 결재해서 그대로 진행시키세요. 제 이름으로 된 도장은 가지고 있겠죠?"

"네?"

하영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한석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영 씨가 검토했다면서요? 하영 씨가 괜찮은 서류라고 하면 괜찮은 거겠지. 나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제 도장 가져가서 찍으세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전부터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자리에 걸맞은 책임감을 보여주시죠. 서류 하나라도 제대로 들여다보고 검토하고, 또,"

"하나라도?"

"네."

"그럼 나는 이제부터 이걸 검토해야 하니 가보세요."

한석이 집어든 서류는 메이드양성아카데미의 신규 수료자에 대한 서류철이었다. 표지를 확인한 하영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하영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석은 서류철을 펼치더니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가며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강미루. 23세. 키는 162센티미터에 몸무게 50킬로그램. 쓰리사이즈는 35-28-36.. 특기사항은 미용 및 요리 자격증 보유중. 그리고 이경애. 22세. 키는 155센티미터에 특기는 요리와 자수. 특기사항으로..... 우와. 가슴 사이즈가 G컵?"

"....."

회사의 시급한 현안 따위는 나 몰라라 하고 메이드 인적사항이나 소리 내 읽고 있는 한석을 보며 하영은 기가 막혔다. 하영이 째려보거나 말거나 한석은 서류철에 첨부된 사진을 보며 연신 감탄했다.

"이야... 한국인에서도 이런 체형이 용케 나오는군요. 이거 수술하거나 그런 건 아니죠?"

"....."

하영은 대답 대신 한석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경멸과 혐오를 가득 담고 있었지만, 한석은 그런 기색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석은 고개를 들고 하영을 마주 보았다.

"묻는 말에 대답 좀 해줘요."

"제가 대답할 사항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지극히 사무적인 하영의 말투에도 불구하고 한석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에이... 하영 씨 질투해요?"

"질투.....라뇨?"

"하영 씨 가슴은 아무래도...."

잠시 말을 끊은 한석의 시선이 조금 내려간다. 조금 전까지 하영의 얼굴을 보고 있던 그의 눈은 이제 그녀의 흉부에 꽂혀있었다. 하영은 기가 막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지금 어딜 보시는 거죠?"

"당신 가슴을 보고 있었는데?"

한석은 뭐가 문제냐는 투였다. 하영은 부들부들 떨었다.

"....당신이란 사람은 대체..."

"대체 무슨 문제 있습니까? 어디 보자. 선미 씨 의견은 어때요? 내가 이상한 사람 같나요?"

한석은 절대로 혼자 출근하지 않았다. 메이드 복을 입고 있는 선미가 그를 따르고 있었고, 사무실에서 의자 뒤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선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영 님은 한석 님께 시선의 방향을 질문하셨고, 한석 님은 하영 님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였습니다."

사실만을 담담하게 늘어놓는 선미의 대답을 들으며 한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모욕감에 파르르 떨고 있는 하영 혼자만 바보가 되어버린 꼴이었다. 하영은 한석을 째려보던 시선을 거두어 그의 뒤에 있는 선미까지 함께 째려보았지만,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는 선미는 그런 시선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영은 씩씩거리며 말했다.

"제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세요. 아, 그리고 말야. 전에 제가 말했던 해외 신규 투자건. 제대로 진행하고 있어요?"

몸을 돌리려던 하영은 잠시 멈칫했다. 다른 회사 일에는 극도로 무관심한 한석이었지만, 그가 런칭한 몇몇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비상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회사 일에 잔뼈가 굵은 하영이었지만, 한석의 프로젝트 안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전부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나같이 회사의 돈을 가져다 해외에 대량으로 투자하는 안건이었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투자였지, 하영이 보기에는 돈을 빼돌리는 것과 진배없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기획을 냈다면 검토고 뭐고 폐기되고도 남을 기획이었다. 그러나 안건을 낸 사람이 한석이었다. 회사에 부임한지 고작 한 달도 안 된 초임 팀장이지만, 막강한 실세 중의 실세인 한석이었다.

아무리 무리한 안건이라고는 하나 그가 내놓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회사 전체의 관심이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박 회장의 재가는 일찌감치 쉽게 떨어졌다. 회장은 하영에게 딱 한 가지를 지시했다.

"한석이 하는 일은 무조건적으로 지원하게."

하영은 회장이 노망이 들었나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영은 한석의 프로젝트가 영 내키지 않았다. 실무를 담당하는 그녀 입장에서는 이런 막가파식 기획이 곱게 보일 리 없기 때문이다.

"....전부터 말씀드렸지만, 아직 재무팀과 법무팀의 검토가 다각적으로 필요한...."

"다각적이긴 무슨. 다들 서로 책임 안 지려고 보험 드느라 바쁜 거죠. 제가 말했던 대로 진행만 하세요."

"회사에는 절차가 있고 나름의 프로세스가..."

"흠. 그럼 하영 씨는 최한석이라는 사람이 회사의 절차와 나름의 프로세스를 거쳐서 이 자리에 온 사람으로 보이나 보죠?"

한석의 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걸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하영은 너무 버거웠다.

"....의견 주신대로 진행하겠습니다."

하영은 몸을 돌려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앞에 있는 서류철 중 하나를 들어 한석의 머리라도 후려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자기 자리라고 해보아야 한석의 책상으로부터 5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다른 책상이다.

하영이 자리에 앉아 다른 서류를 검토하려고 하는 와중에도 한석의 감탄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다시 "메이드양성아카데미"의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와! 얘는 H컵이래요! H컵! 믿겨져요? 지혜도 크긴 하지만 이 정도가 되려나.... 어디 보자. 선미 씨 가슴은 얼마나 되죠?"

"저는 D컵입니다."

"만져봐도 되죠?"

"물론입니다."

".....하아."

하영은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메이드복 차림의 선미를 끌어다 자신의 허벅지에 앉히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저 한석이라는 남자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보아온 모습 어떤 것도 그를 제대로 설명해주는 바가 없어서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여긴 회사란 말야!! 어디에 메이드 따위를 데리고 와서.... 대체 저놈은 바보....? 아니면 그냥 색마....? 그것도 아니면 바보인 척하는 천재.....? 아니, 그건 절대로 아닐 거야. 대체 그 날의 행동은 뭐였던 거지. 게다가 여태까지의 그런 짓들은....'

하영에게는 더없이 혼란스러운 나날이 자꾸 흘러갔다. 한석이 제17법무팀의 팀장이 된 지 몇 달이 지났다.

아무도 입 밖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명실상부한 회장의 후계자인 한석이었다. 회장의 하나뿐인 사위이자 그룹 내의 최고 실권자인 하영의 상관인 그였다. 회사를 들었다 놓았다 해도 누구 하나 이의를 달지 못할 정도의 힘을 가진 그였다.

말이 좋아 팀장이지 전무며 이사까지도 직접 사무실로 와서 한석에게 인사를 못 해서 안달이었다. 그런 그들을 적절히 달래어 돌려보내는 것이 하영의 주된 업무일 정도였다.

한석의 부임에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하영이었다. 한석이 신혼여행을 가 있는 동안, 하영은 극심한 혼란에 사로잡혀 있었다. 결혼식에서 그에게 당했던 일, 사찰부대에 대한 제어권을 빼앗긴 일, 자신의 상관으로 한석이 부임해 온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그녀 성격상 차마 그러지도 못 했다. 그렇다고 한석과 같은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단 둘이 있을 생각을 하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그 이후 한석의 행보는 파격, 그 자체였다. 그 파격을 제일 먼저, 제일 크게 겪은 사람은 역시 하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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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스토리를 처음 구상하던 3년 전만 해도, 아무 능력도 배경도 없는 한석이 대뜸 회사 수장으로 부임해서 회장 이름을 빌려 자기 마음대로 회사를 쥐락펴락하는 이야기가 너무 무리가 아닐까, 그런 우려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뭐... 너무 리얼리티가 넘치니 문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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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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