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62화 (46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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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어쩌면 그녀는

그 해 가을.

한석과 효진은 교외의 커다란 야외연회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박 회장에게 줄을 대고 싶어 하는 수많은 이가 구름같이 몰려들어 입구에서 하객을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운동장 정도 크기의 풀밭 위로 둥근 테이블이 천 개가량 놓였는데도 하객들이 테이블 의자에 다 앉지도 못 했다.

하영은 결혼식장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에 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수천 명의 하객이 웃고 떠들고 있는 모습은 분명 장관이었다.

'이게... 우리 회사의, 아니... 회장님의 영향력인가.'

새삼 감탄하고 있던 하영의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심코 돌아본 그녀는 다소 놀랐다. 여기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여기서 뭐하시는 거죠?"

"그러는 하영 씨는 뭐 하고 있습니까? 지나가다 보여서 한번 올라와 봤습니다."

한석이었다. 보라색으로 된 턱시도를 입고 안에는 검은색 드레스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영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옷을 거머쥐었다. 평소 그녀가 입던 옷과는 달랐다. 가슴은 깊게 패였고, 치마길이는 허벅지의 대부분을 드러낼 정도로 짧았다. 주빈들의 의상을 담당한 선미와 싸우다시피 했지만, 다른 옷을 받진 못 했다. 하영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내내 한석의 시선이 자신의 몸을 훑고 있다는 걸 느끼고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저는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여기서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한석 씨는..."

"신랑은 결혼식의 주연이 아니에요. 신부가 주인공이고, 나머지는 모두 엑스트라일 뿐이죠."

"하긴..."

하영은 결혼식장 한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신부 대기실로 쓰고 있는 천막 앞은 인산인해였다. 결혼식장 전체 인구의 삼분의 일은 그쪽에 몰려있는 것 같았다. 한석은 하영의 옆에 와서 섰다. 그는 하영이 보고 있던 광경을 둘러보며 휘파람 소리를 냈다.

"휘유. 대단하군요. 이게 JS그룹의 유명세라는 걸까요."

"JS그룹이라기 보단 회장님의 힘이죠."

"회장님이 정말 대단하시군요. 안 그래요, 손 선생님?"

한석의 끝 부분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 선생님이란 호칭은 그만 좀..."

"왜요. 저는 입에 착착 붙는데."

한석은 계속 하영을 향해 "손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부르며 농을 걸었다. 그가 하영을 이렇게 부르게 된 것은 몇 달 전부터다. 한석과 효진이 식을 올리기로 결정되자 하영은 색다른 업무에 돌입하게 되었다. 다름 아닌 한석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태근의 예상대로 박 회장은 한석에게 회사를 맡길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회장은 하영을 따로 불러 한석에게 경영 전반에 대해 알려주라고 부탁했다.

"자네 말고는 할 사람이 없군. 잘 부탁하네."

"어떤 걸 알려드리면 됩니까?"

"전부 다. 자네가 아는 전부를 다 알려주게."

회장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영으로서는 그의 표정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깨달을 수 있었다. 태근은 이제 완전히 이 회사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을... 하영은 아픈 기억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며 옆에 있는 한석에게 물어보았다.

"유진 양도 오늘 왔나요?"

"네. 들러리인걸요. 자기 드레스도 자기가 고르는 것 같던데..."

한석이 가리킨 쪽은 신부 대기실 쪽이었다. 하영은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유진'이라는 묘한 아이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본격적으로 한석에 대한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하영의 학생은 한 명이 아니었다. 한석의 옆에는 유진이 함께 있었다. 곧 유학을 갈 거라며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유진은, 집에 있기 심심하다는 이유로 한석과 붙어 다녔다. 하영의 경영수업에 참석하는 건 물론 가끔씩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럼 아줌마가 선생님이란 거네요?"

".....저는 아줌마가 아닙니다."

"올해 몇 살인데요?"

".....아직 서른도 안 되었는데."

"그럼 이십 대란 소리잖아요. 아줌마네요. 뭘."

십 대인 유진이 볼 때는 하영은 아줌마라고 불려도 마당한 사람이었다. 하영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유진에 대한 회장의 총애가 꽤 컸기에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유진은 차기 실세라고도 할 수 있는 한석을 향해 가장 무례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매사에 실없고 어리벙벙하기까지한 한석을 보고 예비신부인 효진도 종종 깔깔거리기는 했지만, 숫제 유진은 한석을 비웃기가 일쑤였다.

"에휴. 아저씨는 이 간단한 것도 몰라요?"

"간단한 거라니. 복잡해죽겠는데."

"저 아줌마... 아니, 선생님이 열흘 전에 컨테이너 분류 이야기 할 때 같이 이야기했잖아요. 국가마다 주고받는 송수신 규약에..."

열흘 전에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하는 유진을 보며 하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유진의 말대로 간단한 건 결코 아니었고, 하영은 반복해서 설명한 적이 없다. 지나가는 말투로 흘리듯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유진은 그걸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사진기와 같은 기억력이었다. 하영은 유진을 보면서 해외토픽에 나왔던 어떤 비상한 천재들을 떠올랐다. 한 번 들은 것은 모두 기억한다는 사람의 이야기 말이다. 그런 반면에 한석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회의 섞인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이런 흐리멍덩한 남자에게 회사를 맡겨도 좋은 것인가 하는 걱정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들곤 했다. 게다가 그녀가 보았던 "밤의 눈빛"을 다시 볼 일도 없었다. 자신이 보았던 것이 혹시 착각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곤 했다.

하영은 고개를 살짝 들고 옆에 서 있는 한석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이제 한 시간 후면 식을 올리는 그다. 재계의 일인자라 할 박 회장의 사위. 그 엄청난 자리에 들어가는 사람인데도 그에 대한 부담 따위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그저 순수하게 감탄하며 야외결혼식의 전경을 보고 있었다. 하영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려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직 시간 충분합니다. 손님들도 연회를 즐겨야 할 테고요."

"그렇긴 하지만...."

"오히려 저 말고 하영 씨가 내려가 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제가요?"

한석이 고개를 돌려 하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살짝 웃고 있었다.

"회장님이 회사를 세운 건 맞지만 그걸 키워낸 건 다른 사람의 공이 크다고 다들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 절반 이상은 다들 하영 씨에게 눈도장 찍으러 온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 저는 못 들어 보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사자가 그런 이야기를 듣는 걸 죽기보다 싫어한다면서요. 후후. 재미있는 분이군요."

한석의 말투가 바뀌었다. 하영은 지금 자신을 둘러싼 공기가 싸늘해졌다고 느꼈다.

"제가 가르칠 때는 계속 졸고 계시더니... 회사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다는 말투군요."

"아, 그냥 심심하기도 해서 이곳저곳 다니며 이야기를 많이 들어 보았습니다. 안 그래도 신혼여행 다녀오고 나면 출근해야 할 회사인데 제반사항은 알아두어야겠지요. 제아무리 낙하산 인사라도 말이에요."

"열심이시군요. 회사에서도 그런 태도를 유지해주세요."

"아무렴요. 이래저래 신세를 많이 지겠습니다. 제17법무팀 팀장 대리 손하영 과장님."

"저한테 신세 지을 게 뭐가 있죠?"

"어? 아직 모르셨나 보죠? 제가 그 팀의 팀장으로 부임합니다."

"뭐...뭐라고요?"

하영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안경이 조금 흘러내렸다. 한석이 손을 뻗어 하영의 안경테를 살짝 어루만지며 위로 올려줬다. 하영은 자신이 걸친 차가운 안경테가 단번에 달아오른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한석의 손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그의 손이 안경테를 떠나 하영의 얼굴에 와 닿는다. 눈 옆을 천천히 어루만지더니 뺨을 지나 턱을 쓰다듬는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란 하영은 자기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렸다.

"평상시의 표정도 섹시하지만 놀랄 때의 표정은 더욱 섹시하군요. 앞으로 많이 놀래켜 드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한석의 목소리는 굉장히 낮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이미 하영의 얼굴에 바짝 붙어있었기에 무리 없이 소리가 전달되었다.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한석의 손가락에 힘이 천천히 들어가고 있음을, 하영은 느꼈다.

"그게 무슨... 웁...."

한석이 하영을 당겨 입술을 훔쳤다. 하영의 생애 두 번째 키스였다.

첫 번째 키스와는 전혀 달랐다. 난폭하고 저돌적이었다. 상대의 입술에, 그녀의 전체가 빨려 들어가 먹혀버릴 것 같은 키스였다.

"웁....!! 웁....!!"

기선을 빼앗긴 하영은 한석의 손이 자신의 다리를 더듬는 것도 미처 막지 못했다. 마치 도미노가 무너지는 것처럼 그녀의 모든 방어가 무너지고 만다. 뱀의 움직임을 닮은 한석의 손길이 하영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가 안쪽을 만져대었다. 지나치게 능숙했다. 한석은 하영의 귓불을 핥으며 속삭였다.

"이런 감촉이었군요. 하영 씨의 다리는."

"이게 무슨... 흐읍....당장... 손을...."

"처음 봤을 때부터 제게 보여주고 싶어 했잖습니까?"

하영은 한석에게 "다리 보는 것이냐"고 핀잔을 주었던 그 날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저 놀려먹기 좋게 생긴 한석에게 농담을 건넨 것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다.

하영은 한석을 떼어내려고 애쓰며 간신히 반박했다.

"그렇지 않아요..."

"게다가 그 날 밤. 그 날은 가만히 제 눈길을 즐기시더니 오늘은 앙탈이 심하군요. 낮이라서 그런가요?"

한석이 말한 "그 날 밤"이 어떤 밤을 말하는지 하영이 모를 리 없었다. 눈이 마주쳤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하영은 등골이 서늘했다.

"미...미쳤어요? 여...여기서..."

"아무도 보지 않아요. 다들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죠. 그리고 지금의 제 할일은..."

한석의 손이 단숨에 그녀의 옷 속으로 향했다.

"...여길 만지는 것 같군요."

"하악...."

하영은 필사적으로 한석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의 손길은 집요했다. 나무 그늘에 숨은 하영은 한석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서도 동시에 이 모습이 다른 이에게 보이게 될까봐 쉽게 몸을 밖으로 빼내지도 못했다. 한석은 낮고 음흉한 목소리로 하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곧 같이 일할 사람들끼리, 친목을 다지는 게 뭐 어때서요."

하영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이런 게.. 친목일 리가..."

"남녀 사이에 친목이라는 게, 이것 말고 또 있나요?"

한석은 거침없이 손을 움직였고, 그 아래 놓인 하영은 어떤 방비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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