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31화 (43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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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두 사람을 다시 간신히 달래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 이대로 살 순 없잖아. 어떻게든 할 수 없을까?"

지혜는 고개를 사납게 흔들었다.

"모르겠어. 난 정말...."

"어떻게든 떼어놓을 방법이 없는 거야?"

"이미 우리 집은 물론 남편까지도 다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어버렸어. 무슨 수를 쓴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 남편은 임필복 전화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두 손으로 받을 지경이라고."

"그 정도야?"

지혜는 대답 대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말 답이 없었다. 숨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연락을 끊는다고 풀릴 일도 아니었다. 차라리 근원을 없애버린다면 모를까. 나도 모르게 이런 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차라리 죽여 버리는 게...."

"뭐?"

"어딘가에 살인청부라도 하면...."

"제정신이야? 지금 농담이 나와?"

지혜가 쏘아붙이기에 머쓱해졌다. 그녀는 내가 급한 마음에 막말을 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절반 이상은 분명 진담이었다. 내 머리 속에서 왜 그런 생각까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난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태 가만히 있던 효진이 말문을 열었다.

"남편한테는... 이야기한 거야?"

지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남편한테 어떻게 이야기하니. 하아. 절대 그럴 수 없어."

"놈이 바라는 게 뭔데? 돈이야? 뭐야?"

"그런 게 있을 리가... 필복이 그 자식은 나를 엿 먹이는 게 목적일 뿐이야. 나랑 몰래 만나던 그때도 결코 날 사랑하거나 그런 게 아니었어. 내가 그런 착각을 하고 있다가 겨우 눈을 떴지만...."

지혜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앙되었다.

"지혜야."

"하아. 정말 모르겠어. 난 내 모든 과거와 결별하고 결혼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 자식이 내 발목을 잡는 건지..... 그 자식 일 때문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

"결혼하고 나서... 나한테 계속 못 오게 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어?"

"어느 정도는..."

두 여자의 대화를 보고 있자니 속에서 열불이 났다. 목소리가 높아져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그렇다고 계속 참고 살 거야? 어제 그 새끼가 하던 짓을 보면... 앞으로 더한 짓을 하고도 남을 텐데!"

그러나 지혜는 날 빤히 보더니 오히려 차분하게 말했다.

"보았으니 잘 알겠네."

"지혜야."

"나 말이지. 그놈이 불러내면 불러내는 대로 나가서 가랑이를 벌려야 돼. 안 그러면 남편에게 말해버린다고 하니까. 하지만 몇 번 그러고 나니 이젠 그 사실까지도 남편에게 말할 빌미가 되어버리고 말았어. 해결 방법은 없어. 그러니... 한석이, 그리고 효진이 너희들은 이제 여기서 돌아가 줘. 너희가 이 사실을 알아버렸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더 미쳐버릴 것 같아."

효진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내가 널 그냥 두고 가겠어."

"가라면 가줘. 그게 날 돕는 거야."

나도 효진을 거들었다.

"무슨 방법이 있겠지. 우리 같이 그 방법을 찾아보자."

그러나 돌아온 건 싸늘하기 그지없는 지혜의 눈빛뿐이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끝없는 절망과 고통만이 엿보였다.

"그러면. 네가 날 책임이라도 지겠다는 거야? 이 모든 사슬을 끊고... 날 구해줄 수 있어?"

그렇게 말하니 가슴이 덜컥거렸다. 애초에 그녀는 내게 결혼하다는 말 하나 없이 혼자 준비하고 혼자 사라졌다. 이미 나보다 훨씬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그녀였다. 아직 대학 졸업도 하지 않은 애송이에게 어떤 기대를 품고 있지 않은 게,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지혜야... 나는...."

"하아. 방금 한 소리는 잊어줘. 그리고 여기서의 일, 여기서의 대화, 모두 잊어주길 바라.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지만, 그런 만큼 내 가슴은 더 찢어질 것 같아. 도저히 예전 같은 마음으로 너희를 바라볼 수 없는 날 이해해줄래?"

결국, 효진과 나는 집을 나왔다. 쫓겨났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굳게 닫힌 문은 지혜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모든 덧문과 창문을 닫아걸고 자기 안으로 침착해 들어가고 있었다.

연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절친했던 친구도, 한때 그녀에게 고백을 했던 남자도.... 모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이런 지경이라면 아예 보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력감과 패배감에 굴복하고 마는 걸까. 그러나 효진의 목소리는 나와 좀 달랐다.

"돌아가자."

"효진아...."

그녀는 뭔가 결심한 듯 보였다.

"여기 이대로 있어봐야, 죽도 밥도 안 돼. 돌아가서 방법을 생각해볼 거야. 아까 한석이 네가 말한 대로 사람을 고용해서라도 그 새끼를 죽여 버리거나... 그게 아니라면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라도 막아야겠어."

"지혜가 남편에게는 알리지 말아달라고 했잖아."

"그러면 저 미친 꼴을 그냥 두고 보자는 거야? 지금 법적으로는, 그 자식이 지혜를 책임지는 사람이야. 지혜의 남자라고! 다른 미친 새끼가 자기 마누라를 겁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남편이 가만있겠어? 걱정만 하고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우리보다는 훨씬 더 제대로 나설 수 있겠지."

"그래도...."

"아냐. 다른 방법은 없어."

"지혜를 더 슬프게 할 수도 있어. 일을 더 크게 만들 수도 있다고."

내 말을 듣고 효진은 잠시 침묵했다.

"좋아. 이렇게 하자."

효진은 날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난 남편에게 알리러 가겠어. 물론... 지금 당장은 아냐. 나도 뭔가 준비를 하고 생각을 해볼 테니. 그리고 넌 네가 생각하기에 지혜에게 가장 이득이 될 만한 일을 하도록 해. 비용이나 뭐 이런 건 내가 도와줄 테니 전혀 생각하지 말고. 네가 나한테 찬성하지 않으니, 우리 그렇게 하도록 하자."

"효진아. 넌 지금 억지를 부리고 있어. 지혜가 원치 않는 행동을 하려하고 있다고."

"지금 지혜가 너무 코너에 몰려 있어서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난 틀리지 않아."

거듭 말려보았지만, 그녀는 생각을 돌리지 않았다. 의외로 효진은 완강했다.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우리 둘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라디오도 켜지 않았다. 지나치게 조용한 차내에서 효진은 효진대로 생각에 골몰했고 나는 나대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런 일에 대해서 대체 누구랑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하자 효진은 하영을 전화로 불러냈다. 시내에서 하영이 오길 기다리는 동안, 효진이 내게 물었다.

"난 언니에게 도움을 받고... 방법을 찾아볼 거야. 너도 같이 갈래?"

난 고개를 저었고, 효진은 그런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난 여전히 효진이 네 방법에 찬성하지 않아.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당장 생각나지 않으니 말리지는 않겠어. 부디 네가 독단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하영 씨와 이야기를 많이 나눠보고 결정했으면 좋겠어."

효진은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효진을 뒤로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등 뒤에서 효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그녀와 생각이 달랐다. 제대로 잠을 자기는커녕 운전석에서 꼬박 보낸 어젯밤의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어디 한군데 드러누워 쉬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나 한참 고민했지만, 한 군데 말고는 마땅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발걸음을 재게 놀려 생각해둔 곳으로 향했다. 근거는 없지만, 내가 기댈 사람은 이 사람 뿐이라고 생각했다. 문 앞에 도착하여 인터폰을 눌렀다.

역시 한 번에 답이 오질 않았다. 여러 번 눌러서야 겨우 답이 왔다.

"누구세요....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아직까지 잠이 잔뜩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예요. 한석."

그러자 잠시 후, 그쪽에서 조금 놀란듯이 되물었다.

"선생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아니, 저...  그게...."

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준 유미를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일단 거실 소파에 앉았다. 유미는 기지개를 켜며 부엌 냉장고로 가더니 안에서 유리병에 담긴 주스를 꺼냈다.

"하아아암. 선생님한테는 대낮인지 몰라도 저 같은 사람한테는 아직 한밤중이라구요."

유미는 연신 하품을 해가며 유리컵에 쥬스를 따랐다. 두 잔을 들고 내 곁으로 와서 건네준다. 황송한 마음에 두 손으로 받들긴 하는데 그래도 여전히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이 사람아! 당신 차림을 똑바로 좀 보라고! 유미는 여전히 자기 차림을 깨닫지 못하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이런 시간에 우리 집엔 어쩐 일이세요? 유진이는 학교 가고 없는데."

"유진이가 아니라.... 유미 씨에게 볼일이....."

"저요? ROSE일 때문에요?"

"그게 아니라 .... 저기 근데, 유미 씨. 일단 옷 좀 입고 오시면 안 될까요?"

여태까지야 잠이 덜 깨서 그렇다고 치자. 이렇게 지적을 하면 화들짝 놀랄 줄 알았다. 적어도 브래지어도 하지 않고 위에 레이스가 잔뜩 달린 데다가 투명한 재질로 된 슬립만 입어서 훤히 유방이 다 드러난 자기 앞섬을 가리거나 그 투명해서 팬티가 다 보이는 그 부분을 좀 어떻게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유미는 전혀 그렇지 않고 슬며시 웃을 뿐이었다. 웃어?

"호호. 이거 기분 좋은데요?"

"네? 뭐가요?"

"저는 선생님이 ROSE를 드나들면서 저나 다른 애들한테 전혀 관심이 없으시기에 여자 쪽으로 관심이 없는 분인 줄 알았어요. 근데 제 차림에 당황하시는 건 보니 아예 그런 것도 아니셨나 보네요."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에 평소보다 더 짙은 교태가 보태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애써 그런 걸 무시하고 손을 내저었다.

"저기, 그러니까요. 암튼요."

"알았어요. 원래 제가 집에서는 편한 차림으로 있는 편인데 선생님을 위해 특별히 옷을 입어드릴게요."

"아, 예."

그러나 그녀는 바로 옷을 입으러 가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고맙죠?"

"네?"

"제가 선생님을 위해 옷을 입어드린다구요. 어때요. 고맙지 않아요?"

어쩐지 굉장히 고까운 기분이 드는데.......

".......고맙습니다."

"후후. 별말씀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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