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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박 회장은 딸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장난을 쳤다는 게냐?"
태근이 형은 맞은편에 앉아 소리 죽여 웃고 있었다. 그런 자기 오빠를 한 번 쏘아보고, 효진은 목소리를 좀 더 올렸다.
"장난 아니고, 진짜인데요."
"........너, 이년이 기어코...."
박 회장 표정이 일그러지며 효진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효진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고 엄한 나만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침에 먹은 밥상은 그리도 좋고 맛있더만, 설마 사형수의 마지막 식사였다거나 그런 의미는 아니었겠지.
"너, 패러독스 그룹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알고 그딴 식으로 까부는 게냐! 당장 그쪽에 연락해서 사과하지 못해?!"
식탁이 뒤집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박력 있게 소리 지르는 아버지를 두고도 효진은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도리어 까칠한 말투로 한마디 쏘아붙였다.
"딸보다 더 중요해?"
"뭐...뭐야?!"
"패러독스건 패러글라이딩이건... 뭐 하는 놈들이건 간에, 그게 아버지 딸보다 더 소중하냐구요."
"너 이 자식....."
그러자 효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아, 내가 깜빡했네. 우리 아버지는 자식이 원체 많아서 하나하나가 굳이 소중하시지는 않았지? 내가 깜빡했네요.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다른 자식들이랑 내가 유일하게 다른 게 있다면 친엄마가 일찍 뒈져버려서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거두어 키우면서 성을 박으로 했다는 정도...."
찰싹-
박 회장이 효진이 뺨을 때리는 걸 미처 막지 못했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태근이 형이 벌떡 일어나더니 동생 뺨을 후려친 아버지를 제지했다.
"아버지!"
형의 굵은 팔뚝에 밀려나면서도 효진의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여 소리쳤다.
"내 자식은 너희들뿐이다! 몇 번을 이야기했냐!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와서 그런 소릴 씨부려! 애비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정말? 정말 우리 둘뿐이야? 아버지가 여태 뿌린 씨가 못해도 열 트럭을 될 텐데, 우리 둘밖에 없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효진은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감싸지도 않은 채 지지 않고 소리쳤다. 박 회장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소리 질렀다.
"내가 너한테 베푼 은혜가 있거늘 그딴 식으로밖에 말 못 하겠느냐! 뭐가 어쩌구 어째?"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나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효진을 뜯어말렸다. 그러나 그녀의 입까지는 틀어막지 못했다.
"누가 언제 은혜 달라고 했어요? 애당초 낳아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다고!"
"효진아!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나도 모르게 효진의 어깨를 붙들고 소리 질렀다. 그녀의 이런 소리는 어쩐지 좀 슬픈 이야기였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그래도 네 아버지잖아... 어떻게 그런 슬픈 소리를...."
내 태도를 보고 효진은 잠시 입을 닫았다. 그러자 식당 내에 침묵이 찾아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들의 팔을 밀쳐내고 식당을 나가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아주 잠깐 보았는데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태근이 형이 식당 입구 쪽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곤 효진에게 다가왔다.
"아침부터 왜 그러냐. 밥맛이 별로였어? 소화불량이라 소리 지른 거야?"
나름대로 유머를 한다고 했겠지만, 별로 먹히진 않았다. 여전히 썰렁했다. 이 사람은....
"몰라. 그냥.... 요새 좀 생각이 많아서 아빠 얼굴 볼 때마다 기분이 안 좋았어."
효진은 식탁에 도로 앉으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 회사 사람에게 들은 게 있어. 우리 둘이 전부가 아니라는...."
"효진아!"
효진이 뭔가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태근이 형이 질책하는 바람에 그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자기 동생 얼굴과 내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내 어깨를 몇 번 토닥이면서,
"이런 동생이라서 말이야. 맡기기 미안하지만 그래도 잘 부탁한다."
하곤 나가버렸다. 별 도리 없는 나는 효진의 곁에 앉았다. 그녀는 내 어깨에 자기 머리를 기대오며 말했다.
"하아. 어떻게 된 게 자기 딸이 좋아하는 사람을 델따 앉혀 놨는데도 눈길 한번 안 주네. 이렇게라도 하면 관심이라도 보일 줄 알았는데."
효진은 속상하다는 듯이 말했고 그 문장 안에서 묘한 표현이 날 가리킨다는 걸 깨달았다. 손가락으로 나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
그러자 효진은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한석 군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야?"
"그야, 그렇겠지만.... 넌 일편단심 지혜라면서."
"그거야 앞에 범위가 생략된 표현이지. 남자 중에서 라는 말이 생략된 거지. 전 세계 사람 중에서는 당연히 지혜가 가장 좋고. 남자 중에서는 한석 군. 뭐, 그렇다고."
"아, 예....."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했다.
"우리 기분도 꿀꿀한데 나가서 놀자. 나 한석 군이랑 데이트 좀 하고 싶었어."
효진에게 끌려가 정장으로 차려입고는 - 다행히도 이번에는 선미가 들어와 옷만 주고 나갔다. 직접 입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집을 나섰다. 그녀의 아버지를 다시 볼 일은 없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계속 찜찜함이 남아있었다.
효진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고 이것저것 구경을 했다. 저녁까지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기색을 은근히 내비쳤지만 이번에는 가봐야 할 곳이 있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헤어지기 전에 다음 주 중으로 지혜를 만나러 가기로 약속했다.
"그걸로 연락할 테니까 꼭 받아야 돼. 알았지?"
내 손에는 효진이 사준 휴대전화가 쥐어져 있었다. 기계도 그녀가 사주었고 요금도 내주기로 했다. 어쩐지 예전에 명희의 강압에 의해 샀던 삐삐가 떠올라 조금 씁쓸했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내가 이거 막 써서 요금 많이 나오고 그러면 어쩌려고?"
그러자 효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요금 정도야 뭐. 내가 충분히 내줄 수 있어. 휴대폰 있으면 다른 여자랑 바람 피기도 편리하겠지?"
"어이, 어이. 나 좋아한다면서.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라는 소리야?"
그러자 효진은 정색을 하고 바싹 다가와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한석 군은 날 좋아해?"
"........응."
"나만 좋아해?"
"질문이 뭐 그래?"
뭐라 대답할 순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내 마음속에 그녀가 자리 잡았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효진은 다시 물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랑 좋아하는 사이가 되면, 그때는 날 싫어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널 왜 싫어해"
그러자 효진은 그제야 배시시 웃으며 원래의 표정을 회복했다.
"그거면 됐어. 나도 한석 군이 내가 싫어하는 짓만 하지 않으면 다 괜찮아."
어이가 없었다.
"그럼 네가 싫어하는 짓 중에는.... 내가 다른 사람이랑 만나는 건 없어? 내가 다른 여자랑 만나도 네가 날 싫어하지 않는단 말이야?"
"그럼, 한석 군은 내가 한석 군만 만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효진을 보면서 할 말이 없어졌다. 알면 알수록 모를 것 같은 그녀였다.
"알았어, 알았어. 네가 날 죽이려고 들지만 않으면, 난 다 괜찮아."
"이야. 역시 한석 군은 관대해."
효진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효진과 나, 나와 효진. 대체 어떤 사이인지 모르겠다. 아침 드라마 속 배경 같은 그녀의 집도 그렇고....
효진과 헤어진 후 ROSE로 향했다. 갑자기 그만두고, 또 연락도 없이 나타난 터라 유미에게 혼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빙긋 웃으며 내게 그동안 하나도 정리하지 못한 장부와 각종 전표를 건네주며 정리를 부탁할 뿐이었다.
잠깐 인사만 하고 유진을 만나러 갈 계획이었는데.... 글러먹었다. 쳇. 재킷을 벗어 벽에 걸어두고 끙끙거리며 일에 돌입했다.
유진을 만나러 간 건 다음 날이었다. 유진을 만나러 간 건, 과외를 그만두고 싶다는 의견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소란에 대한 미안함이 채 가신 게 아니었고, 유진을 보고 있노라면, 이 녀석과 같은 나이인 그 아이가 겪은 불행한 일이 자꾸 떠올라 내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유진에게 과외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자마자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내게 쏘아붙였다.
"아저씨, 혹시 사춘기예요?"
"뭐?"
"아직도 방황이 덜 끝났어요? 교생 실습 때려치우고, 잘 다니던 대학교도 휴학하면서까지 몇 달씩 방황했으면 이젠 자기 자리로 돌아올 때도 되었잖아요. 무슨 자기 괴로워하는 거 알아달라고 생떼 쓰는 애도 아니고 아직까지 그러고 있어요."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여자애한테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다니...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날 보면 소란이가 생각나서 그래요? 그런데 이걸 어째요. 아프고 다친 소란이도 이제는 조금씩 회복하고 있는데, 지금 그 사건에서 제일 못 벗어나고 있는 게 아저씨라는 거? 그거 아냐고요."
결국 유진이 과외 그만두는 건 물 건너가고, 어쩔 수 없이 계속하게 되었다. 사실, 효진의 위로와 마음 씀씀이에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있는 터였고 학교도 휴학한 마당에 딱히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받아들였다.
ROSE에서 받는 돈만 해도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였으니 돈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유진의 마음이 귀엽고 녀석을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보살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라 수긍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두 번, 오후에는 유진은 만나 과외를 하고 저녁에는 ROSE에 나가 장부 정리를 도왔다. 이제 내가 짜놓은 장부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이나 엑셀의 수식도 유미가 점차 이해하고 있었고 조만간 아예 인수인계를 끝내고 내가 안 나가도 되지 싶었다.
석 달 정도 그렇게 지냈다.
그날도 유진이 과외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x의 값을 먼저 계산하기보다는 수식을 간단히 한 다음에 y에 임의의 숫자를 대입하면, 아, 잠깐만."
유진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진동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화면을 보니 문자가 와 있었다.
[언제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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