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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422화 (42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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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옆에서 성냥개비로 탑을 쌓고 있던 레지가 흠칫 놀랄 정도였다. 나는 손을 내밀어 괜찮다는 표시를 한 후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게... 씨발.. 지금 말이 돼? 그러면 그 어린 애가 제 발로 교회에 들어가서 자기 손으로 약을 구해다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스스로에게 투약을 했다고? 지금 그런 소리야?"

"흥분하지 마. 지금까지 나온 걸로는 교회에서 그렇게 시켰다는 증거가 없대. 정황이야 충분히 짐작이 가지만... 약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제정신이 아니고 다른 증언을 해줄 사람도 없고....신도들은 죄다 한 목소리로 자발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젠장.....젠장....."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니 이젠 화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디다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모르다 보니 욕하기도 쉽지 않았다. 효진의 차분한 목소리는 이어지고 있었다.

"잠입수사까지 했던 송화 언니지만 그걸로는 역부족인가 봐. 오히려 검사의 위신에 맞지 않게 멋대로 움직였다면서 징계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일단 하영이 언니가 소란이 변호 준비는 착실히 하고 있어. 자의로 그 교회에 간 게 아니라는 증거를 수집하고 있고 또...."

울컥한 마음에 목이 메어왔다. 간신히 그 기분을 억누르며 분명하게 말했다.

"증인이 있어. 바로 나야. 내가 그 아이에게 분명히 그렇게 들었어. 엄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에 갔다고."

그러자 효진의 한숨이 이어졌다.

"하아. 네 주장은 소용없을 거야. 네가 문제라고 이야기한, 바로 그 엄마가 가장 크게 주장하고 있어. 소란이는 제 발로 와서 성령에 몸을 의탁했다고.... 걔네가 말하는 성령이라는 건 그 약을 통해 환각 속에서 신을 만나는 거래...."

"젠장!!!"

나도 모르게 탁자를 내려치고 말았다. 짧은 비명 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레지가 쌓아놓은 성냥개비 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후였다. 고개를 숙여 미안하다고 하고는 다시 효진의 이야기를 들었다.

"듣기로는 정치계, 재계, 꽤 높은 분들도 그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도 있고 나름대로 선도 닿아있고 한 모양이야. 수상하기 그지없는 그 교회가 종로 한복판에 있었다는 것만 봐도 뭔가 이상하잖아. 하영이 언니는 자기가 책임지고 소란이는 빼줄 테니까 너보고도 나서지 말라고 당부했어. 이건 이미 우리 손을 떠난 문제야."

"어떻게 그러니.... 그리고.... 그 교회 새끼들을 그냥 다 놔주었단 말야? 어떻게... 어떻게...."

"그러면, 네가 어떻게 할 건데? 무슨 사람들이라도 이끌고 그 교회에 쳐들어가서 불이라도 싸지를 셈이야?"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내일 서울에 가면 당장...."

"한석아."

효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가 젖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넌 많이 애썼어. 그리고 충분히 괴로워했고. 그러니 이젠 짐을 좀 내려놓아도 돼."

"효진아...."

"여태 너한테 말은 안 했지만... 네가 괴로워하고 있는 걸 보면 어쩐지 나도 괴로워. 니가 그만 좀 아파했으면 좋겠어. 내가 더 아프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래, 차라리 내 이기심이라고 해도 좋아. 난 나를 위해서 말하겠어. 니가 아프지 말라고."

"효진아... 나는...."

그녀의 애잔한 마음이 전화선을 타고 전해졌다. 사실 효진에게는 모진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정의감에 불타고, 분노하여 소리 지른다 한들, 실제로 조사를 진행하는 사람은 하영과 송화였고, 그런 그녀들을 도와주는 건 효진이었다. 난 그저 모두 내던지고 도망치듯 서울을 떠났을 뿐이었다. 효진에게는 빚진 게 너무 많았다....

"하아. 진짜, 내가 지금 무슨 소리까지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이거 하나만 알아둬."

"뭔데."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좀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무리 널 마음에 들어 해도 나는 일편단심 지혜 뿐이라는 걸."

"..........."

"..........."

할 말을 잃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이름에, 그리고 효진의 말투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푸...풋... 아하하하....아하하하하...."

좀 서글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나왔다. 어딘가 한쪽은 허전하고 슬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웃을 수 있었다. 그래. 이렇게 날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나만 혼자 이렇게 처져 있을 순 없었다. 효진은 내가 웃자 조금 발끈한 모양이었다.

"뭐야. 남은 지금 심각하고 중요한 이야기하는데 웃어? 넌 내가 지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직 잘 모르는구나."

"아아,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지혜가 유부녀라든가, 여자라든가, 그런 사소한 거는 우리 효진 씨에게 아무 문제가 아니겠지."

"당연하지."

이제야 효진의 원래 목소리가 나왔다. 이렇게 쾌활하고 구김 없는 사람에게 내가 너무 많은 어둠을 부탁했던 게 생각났다. 그래. 그렇구나. 내가 잘못했다.

"그래, 그래. 그럼 약속대로 지혜나 보러 가자. 내일 아침 차로 서울 갈 테니까 모레나 글피 정도에 지혜 보러 가도록 하자."

"흠. 알았어. 내가 지혜한테 미리 이야기해놓을게. 버스는 어디, 동서울로 오는 거야?"

"아마도?"

난 수화기를 잠시 떼고 옆에 있는 레지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동서울 가는 건 맞는데요. 여기서 바로 가는 건 없구요, 남원 갔다가 거기서 갈아타셔야 해요. 거기서도 한 여섯 시간 걸릴걸요?"

첫 차 시간까지 알려주는 친절함에 감사를 표한 후 효진에게 들은 대로 일러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도착시간에 맞추어 자신이 마중을 나오겠노라고 말했다.

"뭐 하러 그래. 번거롭게... 내가 도착하면 전화할게."

"안 돼. 나한테 안 오고 다른 사람 만나러 가면 내가 속상할 거야. 내가 제대로 픽업 해와야겠어."

"바람피울까 봐 감시하는 거야?"

"그야, 뭐.. 한석 군이 바람을 피워도 상관은 없지만... 나한테 갚아야 할 단백질을 다른 데 흘리고 다니면 곤란하잖아?"

자못 쑥스러워하기까지 하는 효진의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알았어. 내일 보자."

"늦지 않게 출발해. 알았지?"

"응. 잘자."

"한석 군도."

전화를 끊고 레지에게 건네주자 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받아들였다.

"애인도 있는 분이 이런 데는 뭐 하러 와요?"

"보시다시피 애인이랑 통화하러 왔잖아요."

어느 샌가 효진이 내 애인이 되어 있었지만, 딱히 부정하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피이-. 옆에서 들어 보니 바람 펴도 상관없다, 막 그러시던데?"

"그게 다 들렸어요?"

"제가 귀가 좀 밝거든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고, 인월동 소문은 김미영이가 다 듣는다고도 하죠."

"하하. 이름이 미영 씨예요?"

"아름다울 미에 꽃부리 영. 그냥 꽃도 이쁜데 그 앞에 아름답다고까지 했으니 얼마나 예쁘겠어요?"

넉살 좋게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빙긋 웃고 말았다. 본인 앞이라 대놓고 말은 못 하겠다만.... 솔직히 아주 그렇게까지 이쁘진 않았다.

최대한 예쁘게 꾸며본다고 했지만, 그래보아야 결국 시골 터미널 앞 다방 레지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래요. 이쁘시네요."

"쳇. 말씀에 성의가 없어요. 성의가."

"하하. 들켰네."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단번에 들이켰다. 볼 일도 끝났으니 다방을 나갈까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미영이 따라 일어섰다.

"벌써 가시게요?"

"네. 가서 좀 쉬려고요. 내일 또 온종일 버스 타고 가려면 피곤할 것 같아서요."

"아이, 참. 손님도 없는데 좀 더 놀다 가셔도 돼요. 뭘 그리 급하세요?"

옷깃을 잡아당기며 앉기를 권하는 미영. 주변을 둘러보니 다방에 손님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카운터의 마담은 신문을 펴놓고 손톱을 깎고 있었고 보지도 않으면서 틀어놓은 텔레비전 연예프로그램에서는 할리우드 노랑나비 열풍이라며 한 누드모델의 성공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님이 별로 없네요?"

"평일 이 시간에 누가 오겠어요? 주말에 등산객들도 있고 그래서 장사가 되죠. 그때는 저 말고도 애들이 더 나와야 할 정도로 손님이 제법 돼요."

"그런가요?"

자리에 앉았지만, 딱히 할 이야기도, 마실 것도 없었다. 커피 잔 옆에 놓인 싸구려 쿠키 봉지를 뜯고 있노라니 미영이 조곤조곤하게 속삭였다.

"아니면, 저랑 연애도 가능한데요."

"연애요?"

"요앞에 방 잡으셨다면서요. 한 번에 딱 네 장이면 돼요."

처음에는 뭔 소리인가 싶다가 미영의 은근한 목소리와 말투에서 감을 잡았다. 아까 여인숙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동네 장사는 참 저렴하기도 하거니와 영업을 아주 대놓고 하는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그렇다면 여인숙 노파가 말한 가격은 다섯 장이었다. 직거래를 제시하는 당사자는 넉 장을 불렀다. 그렇다면 여인숙 노파에게 떨어지는 몫은 한 장이라는 거군. 간단한 뺄셈이었다.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생각 없어요."

"흥. 내일 애인 만나러 가니까 아끼는 거예요?"

"뭐.. 그런 걸로 해두죠."

등산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주고받다가 다방을 나섰다. 한 번 더 은근한 눈빛을 보내는 미영에게 커피 값으로 만 원짜리를 내고 잔돈은 됐다고 했다.

여인숙으로 돌아와 낡은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소란을 만났다. 선영과 침대에 누워 있는데 벨 소리가 나서 나가 보니 소란이가 세탁물을 들고 서 있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내가 알몸이 아니어서 당황하지 않고 세탁물을 건네받았다. 남은 배달이 많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했더니 씨익 웃으면서 답했다.

- 전 괜찮아요. 선생님. 문제없어요.

소란은 그대로 몸을 돌려 복도를 따라 뛰어갔다. 발랄하게 뛰어가는 그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방으로 돌아오니 선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방 자체가 사라졌다. 텅 빈 공간에 홀로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러자 누군가 등 뒤에서 날 포근히 안아주었다. 그녀는 날 한석 군이라고 불렀다. 누군지 묻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다음 날, 해가 뜨는 것을 보며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날 안아주고 싶어 하는 그녀를 향해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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