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19화 (41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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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

소란이는 웃고 있었다. 분명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의 상태는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내 학생이 저기에 있는데, 앞으로 다가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간호사와 의사가 달려왔고, 누군가 소란에게 진정제를 놓았다. 내 어깨에 누군가 손을 올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하영이었다. 그녀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하영이 내민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복도 끝으로 데려갔고, 의자에 앉혔다. 하영의 친구가 뒤따라와 자판기에서 뭔가 꺼냈다.

"이걸 좀 마셔요."

"고...맙...습니다."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손을 내밀어 캔 커피를 받아들었다. 몹시 고맙게도 차가운 커피가 아니라 따뜻한 거였다.

채송화....라고 했던가? 꽃 이름을 가진 그녀는 나름대로의 센스도 가진 인물이었다. 이 상황에 만약 차가운 음료를 마셨다면 난 아마도 얼음여왕의 시샘을 받은 사람처럼 얼어버렸을지도 몰랐다.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병원 복도 끝에 있는 손바닥만 한 휴게실에 앉은 난 말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미안합니다. 그 아이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눈을 떼지 말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는 황급히 팔을 내저었다.

"아, 아뇨... 검사님이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그게.... 그걸....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커피 맛이 굉장히 썼다. 원래 캔 커피는 달달하게 나오는 게 정석인데 어찌 된 일인지 씀바귀보다 썼다. 나중에야 그게 커피 때문에 느껴진 맛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미각이 마비되었고, 이 세상 모든 맛이 다 쓰게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랬다.

아까 본 소란이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떠올랐다. 이마를 캔에 대고 있어도 떠올랐다.

자기 주먹을 음부에 찔러 넣고 히죽거리고 있던 소란의 표정은 내 오감을 앗아가 버렸다. 지금 내가 숨 쉬는 것인지 멍하니 있는 것인지조차 구별이 가질 않았다. 음부 전체에서 피까지 줄줄 흘리고 있었지만, 그 아이는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 그걸 쑤시기까지 하고 있었다.

달려든 사람들이 행동을 제지하자 그제야 울부짖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자지를 달라며 발버둥 치고 울부짖었다. 나중에 들은 송화의 설명에 따르면 처음에 이송되었을 때부터 소란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남자만 보면 달려들었고, 이후 남자는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있다고 했다. 남자만 가까이 오면 소란은 다리를 벌리며 자신을 쑤셔달라고 사정했다........

무엇이 날 그렇게 역겹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장면 자체가 충격이었을까.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교회라는 곳? 아니면 그 교회에 자신은 물론 아이를 내다 판 엄마라는 사람? 그것도 아니면... 그런 이야기를 미리 들었음에도 그저 방치하고 있던 나 자신...?

"집중치료실로 옮겨서 치료하고 있다고 합니다. 차후에 상태가 진정이 되면 회복실로 옮기게 될 거예요. 일단은 돌아가서 연락을 기다...."

"저 때문이에요."

"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참담함을 누구에게라도 토해내고 싶었다. 이제 겨우 오늘 알게 된 사람에게... 내 속을 털어놓고 싶었다.

"소란이는.... 저한테 말했었어요. 엄마가 이상한 종교에 빠져 있다고.... 걱정된다고..... 거기에 한 번 붙들렸다가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는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전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그저 잘 될 거라는 근거 없는 격려만 해주었을 뿐이죠. 그런데.... 그런데..... 이렇게 되고 마는군요.... 전 정말 쓰레기예요."

"한석 씨..."

바로 옆에 있는 송화가 난감해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쏟아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더 비참해졌다. 남자가 눈물이라니. 창피하게 생판 모르는 사람 앞에서.

그러나 그 비참함보다, 창피함보다도 더 뼈아픈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아프다. 나라는 인간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느껴진 적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쓰레기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합격품은 아닌 것 같군요."

독설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대번 알 수 있었다. 전에도 몇 번 들었으니까.... 옆에 있는 송화가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영아, 너....."

"송화. 넌 가만 있어봐. 이봐요. 최한석 씨. 그래서요. 말해보세요. 당신이 쓰레기라고 말하고 주저앉아 있으면 뭐가 해결이 됩니까?"

고개를 들어 내 앞에 서 있는 하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쓰고 있는 은빛 안경테가 천장 빛을 받아 번뜩였다. 눈빛만큼이나 매서웠다.

"소란이라고 했던가요? 저 아이는 지금 사이비 종교의 피해자인 동시에 향정신성약품의 투여자로서 피의자 신분이에요. 그런 그 아이를 위해 당신이 지금 뭘 할 수 있는데요?"

"......아무것도요."

"그걸 알면 당장 주접은 그만 떨고 일어나서 돌아가세요. 여긴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녀가 던지는 말은 날카롭고 재수 없었지만, 그만큼 정곡을 찌르고 있었기에 반박을 허용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려니 옆에 있는 사람이 대신 말려주었다.

"하영! 너 말이 너무 심하잖아. 이 분도 나름대로 걱정이 되고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오고 그런 건데."

"걱정이 되면 혼자 할 것이지 왜 엄한 사람까지 불러들여서 귀찮게 하냐 그 말이지."

"너 지금 이런 일에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손을 들어 두 사람을 제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은 이미 말라있었다. 하영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하영 씨는 변호사라고 했죠? 그리고 지금 소란이가 피의자 신분이기도 하다고요."

"그렇죠."

"그러면 의뢰를 하나 할게요. 소란이를 변호해주세요. 수임료는 제가 어떻게든 마련하겠습니다."

하영은 살짝 웃었다. 어찌 보면 그건 비웃음 같으면서도 자조 섞인 웃음이었다.

"저는 좀 비쌉니다만?"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했다. 송화와 그녀가 이야기할 게 있다고 하기에 휴게실에서 나와 복도로 접어들었다. 휴게실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효진이가 벽을 기대어 서 있었다.

"효진아...."

"응. 이제 좀 괜찮아?"

"어... 그래."

효진을 보니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저기, 하영 씨에게 의뢰를 하나 했어. 여기에 있는...."

그러자 효진이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다 들었어."

"그러니?"

그녀와 나는 복도를 따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병원을 벗어나 차에 도착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효진이 받더니 곧 나에게 전해주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담임인 지애였다. 경찰서에 이미 갔다 온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소란의 상태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아무도 면회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와 앞으로 치료 후에 있을 절차에 대해 일러주었다. 그녀는 눈물 섞인 목소리로 나에게 수고했다고 말했다.

몹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이런 소리를 듣고 있다니....

"전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저는 그저...."

하영의 독설을 들으며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또 울컥해졌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귓가에 들려오는 지애의 목소리도 이미 젖어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니에요. 최 선생이 애쓴 거 맞아요..... 일단 내일 학교에서 다시 이야기 합시다. 늦었으니 어서 들어가요."

"네에."

전화를 효진에게 건네주고 조수석에 앉았다. 의자를 젖혀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운전석에 앉은 효진도 말이 없었다.

한참 후, 하영이 돌아온 이후 효진은 차를 출발시켰다. 열두시가 넘어 디지털 시계에는 AM이라고 찍혀 있었다. 자취방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자 효진도 따라 내렸다.

"오늘,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 나중에... 갚도록 할게."

"그런 소리 하지 마. 갚다니...."

"아냐. 내가 신세 끼친 건 맞잖아. 조심해서 들어가."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내 옷깃을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효진이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이 녀석이 이런 표정이라니... 정말 녀석 답지 않았다.

"왜 그래? 그 표정은 뭔데?"

"아니, 저기...."

"너답지 않게 왜 그렇게 주저해? 똥 마려?"

그제야 효진의 원래 표정이 "조금" 회복되었다. 내 머리를 와락 끌어안더니 예의 그 헤드락을 확 걸었다.

"그래! 마렵다, 이놈아! 어이구!"

한참 내 머리통을 아프게 하더니 효진은 차에 올라탔다. 창문을 내리고 나에게 말했다.

"무슨 일 있거나 하면 바로 연락해, 알았지?"

"알았어."

"같이 있어주고 싶긴 한데, 내일 나도 일이 있어서 말이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차가 출발하기에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를 걱정해주는 효진의 마음이 퍽 고마웠다. 별로 해준 것도 없이 신세만 잔뜩 졌는데도 저렇게 걱정해주다니.... 어쩐지 효진이와는 남자, 여자를 떠나 정말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학교에 출근하자마자 지애와 마주 앉았다. 소란의 상태를 포함하여 채 검사에게 들은 이야기와 소란에게 들었던 이야기까지 빠짐없이 전해주었다.

소란의 엄마는 꽤 오래전부터 그 이상한 종교에 빠져 있었다는 건 이미 지애도 알고 있었다. 주변에 유명했다고 한다. 종교에 빠진 그녀는 집안 재물을 들고 나가는 것은 물론 가족도 그 교회에 나가길 원했다. 소란의 아버지는 그걸 거부했고 거의 이혼 상태와 같은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소란 역시 그 교회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런 상태가 되었다.... 그 교회는 이름부터 시작해서 결코 범상한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령을 접한다는 이유로 여신도들에게 어떤 약을 투여했고 그 약을 먹은 여자들은 남자를 받아들이기 쉬운, 아니, 남자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체질로 변해갔다.....

"그...그만 해요. 최 선생."

".....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애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찍었다. 그녀는 소란에게 바로 가고 싶어 했지만, 학생 하나를 위해 빠질 수 있을 정도로 일이 그리 편한 건 아니었다.

교무주임의 지시를 받은 학생과 선생들이 경찰에 가보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오늘부터 직접 교편을 잡게 된다. 교생 실습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교단에 서서 교실을 둘러보았다. 하필이면 첫 수업이 바로 우리 반이었다.

"안녕하세요. 기술, 가정을 맡은 최한석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해요."

허리를 숙여 인사해보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이전 같지 않았다. 아이들의 시선은 소란의 빈자리를 힐끔힐끔 살피고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도 이미 소문이 퍼진 걸지도 몰랐다. 나만 해도 뉴스에서 소란을 발견했을 정도이니.... 어떤 소문이 퍼져도 이상할 게 없지 싶었다.

아침에 우연히 보게 된 신문에는 해당 교회에 대한 온갖 추측성 기사가 난무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끌기 위해 일부러 더 선정적으로 묘사된, 여신도들에게 행해진 난잡한 행위에 대한 기사도 실려 있었다. 채 검사가 하겠다고 한 언론 차단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종로 바닥에서 그 난리를 쳐대던 교회였는데... 그에 대한 기사가 나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교탁에 서보니 바로 앞자리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소란이 자리는 물론 어찌 된 일인지 유진이 자리도 비어있었다. 출석부에는 "친척 장례식 참석"이라고 적혀있었다. 친척이라니... 유진에게 친척이 있었던가?

"그럼, 교과서 80페이지를 펴주세요. 발명과 기술의 이해....항목을 여러분께 설명하겠습니다."

몇 주간 열심히 짜놓은 교안대로 수업을 시작했다. 말은 좀 떨렸지만, 아이들의 시선을 받아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교실 뒤편에 서 있는 지애와 또 다른 평가 담당 선생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럼... 간단한 도표를 그려 이 내용을 설명해보겠습니다."

몸을 돌려 분필을 집어 들고 칠판을 마주했다. 검푸른 칠판에 이제부터 도표를 그려야 했다. 몇 번이고 연습했던 도표다.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눈을 뜨고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칠판에 분필을 가져다 대긴 했지만, 선을 그을 수가 없었다. 손이 부르르 떨렸다. 질끈 눈을 감았다. 차라리 눈을 감으면 생각이 날까 싶었는데 오히려 다른 게 생각나 버렸다.

-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선생님한테는 이런 이야기가 술술 나오네요. 왜 그럴까요?

- 글쎄... 나야 모르지.

- 저도 모르겠어요.

저기 등 뒤에 수많은 아이들과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학교에 다니며, 웃고 떠들던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는가.

- 제가 선생님이 애인 만나러 다니신다는 거 비밀로 해드리는 것처럼요, 선생님도 유진이한테 제 이야기는 꼭 비밀로 해주세요. 약속하실 수 있죠?

그래, 약속할게. 약속한다고 나는 말했어. 너에 대한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너가 그런 짓을 당할 동안...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었지. 그렇게 나는 약속을 지켰고 너는 그래서 이 자리에 없다.

"으흐흐흐....흑...."

분필이 우뚝 부러졌다. 부러진 분필 조각이 칠판을 긁으면서 괴상한 소리를 냈다. 등 뒤에서 웅성거리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몸을 돌렸다. 교탁에 바로 섰다. 이 자리는 아마도 내가 마지막으로 서는 자리가 될 지도 몰랐다.

"여러분."

어젯밤,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그래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해답을 찾지 못했는데 남에게 문제를 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교탁을 짚은 채로 맘에 담아둔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을 가르칠 자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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