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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누군가 문 쪽에 나타났다. 검고 커다란 그림자. 그 주인공은 이쪽을 향해 무언가를 벼락같이 던졌다. 대포알처럼 날아온 그것은 야구 배트였다. 총알처럼 일직선으로 쏘아진 배트는 그대로 쐐기가 되어 송 부장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윽!"
그는 나이프를 떨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저런 걸 맞았다간 뼈가 그대로 으스러졌을 것 같다. 배트를 던진 사람은 그대로 달려왔다. 달리는 말과 같은 기세를 떨어뜨리지 않더니 그대로 날아올라 송 부장의 얼굴을 무릎으로 찍어버렸다.
"크악!"
송 부장은 얼굴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그를 공격한 이는 동작이 정말 신속하고 유연했다. 플라잉 니킥이 꽂히자 그대로 바닥에 착지, 그런 다음 자세를 바로 잡기도 전에 몸을 빙글 돌려 뒤돌려차기로 송 부장을 날려버렸다.
송 부장이 바닥에 쓰러져 뒹굴자, 검은 사람은 쓰러진 이에게 마운트 자세로 올라탔다. 왼손과 오른손이 마치 해머처럼 휘둘러졌다. 송 부장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붉어지고, 깨지고, 으스러지고.... 송곳 같은 파운딩이 연이어 그의 안면을 번개같이 강타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두개골이 그대로 함몰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콘크리트로 된 바닥 전체가 울렸다.
난 서둘러 예린의 등에 매달려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멈춰! 예린!"
"놓으세요! 이 참에 다시는 ...."
"그만둬! 죽일 셈이야?"
예린이 내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피와 상처, 그리고 눈물로 그녀의 얼굴이 말이 아니다. 이미 선글라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푸른 눈 가득 눈물을 담고 외쳤다.
"이놈은 오빠를 죽이려고 했다구요!"
"나 아직 살아 있잖아."
"죽이려고 했다니까요."
"니가 막았으니 됐어."
어째 몰매를 맞는 것보다 흥분한 예린을 달래는 것이 더 힘들었다. 울먹이는 예린을 끌어안고 달래고 있다가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을 아주 크게 뜨고 있었는데, 그건 뭐랄까... 자기 딸을 데려간 남자가 다른 "여자"를 끌어안고 있는 걸 본 표정이었다. 나는 일부러 손을 들어 예린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내게 폭 안겨 있는 예린을 보며, 아버지는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빛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니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예린의 등을 두드리고 끌어안고 있는데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태호였다. 다급한 표정이었다.
"형님! 그렇게 영화 찍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리사 아가씨가... 아, 아니, 마리가!"
"뭐?"
두서없는 그의 말에 예린도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나와 아버지를 부축하며 말했다.
"여기 마무리는 태호에게 맡기고 아버님과 함께 얼른 가보시죠. 리사 아가씨 출산이 임박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뭐? 방금 저기에 있던 리사가 애를 낳는다고?"
이런이런...
송 부장뿐만 아니라, 아버지까지 속았단 말인가? 아버지까지 속일 정도로 마리가 연기력이 좋았다니. 놀랍다.
물론 아버지는 창밖을 내다보지 못했으니 마리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고 목소리만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게 어떻게 리사냐! 마리지! 딱 들어도 딴에는 서울말 열심히 썼다고는 하는데 여전히 서울말투 아닌 거 알겠구만.
이 사람들은 저게 리사 말투로 들린단 말인가? 난 태호의 부축을 받고 자동차로 갔다. 뒷좌석에는 오랜만에 보는 마리가 앉아있었다. 아버지를 뒷좌석에 태우고 난 조수석에 올라탔다. 예린이 운전석에 탔다. 마리와 인사를 채 나누기도 전에 차가 급발진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아버지는 옆에 있는 마리를 보며 말했다.
"그럼.. 아까 그게 마리였어? 네가, 네가 저 위에서 그런 말을 한 거니? 네 언니가 아니라?"
그러나 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녀석은 인상을 잔뜩 쓰며 배를 부여잡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왜 저러지?
아버지가 묻는 말에는 예린이 대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버님. 리사 아가씨를 여기 모시긴 어려운 상황이라서요. 마침 마리 아가씨가 돌아오셨기에...."
아버지가 눈을 크게 떴다.
"마리였다고? 마리가 그렇게 말을 잘했어? 치마까지 입고?"
친아버지에게도 저런 평가를 받아온 마리이니 다들 홀딱 속아 넘어간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사는 미리 연습도 하고 또 리사 아가씨가 전화로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서울말 이제 많이 느셨더군요. 그리고 치마는.... 역시 성공이었군요."
아버지가 감탄을 아끼지 않고 있는 동안 난 마리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평소라면 지금쯤 천마디도 넘게 쏟아냈을 녀석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너무 낯설었다. 오랜만에 보기도 하거니와 이런 녀석의 행동이 너무 이상했다. 굳이.... 조야한 비유를 하자면 똥 마려운 걸 몇 시간 동안 참아온 사람의 표정이었다.
"마리야, 너 괜찮아?"
"안.... 안 괜찮아예."
"뭐? 어디 다친 거야?"
마리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제야 아버지도 마리의 이상한 점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다친 게 아니라면 표정이 왜 그래?"
"언니야 때문에...."
"언니?"
난 뭔가 깨달았다. 아까 태호가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리사의 출산이 임박했다고 외쳤다. 리사와 마리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링크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 마리의 표정이 말하고 있는 건....
"지금 나오고 있는 거야?"
마리는 대답했다.
"그.....근가 봐예.... 흐아아아악!!!!"
비명이 터졌다. 그리고 나도 비명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창문이 모두 닫혀져 있는 차 안이었다. 출산이 눈이 확 까뒤집힐 정도의 고통이 있는 건...그래, 알겠는데 하필이면 뒤를 돌아보고 있는 내 머리카락을 마리가 움켜쥐고 확 잡아당기는 바람에 나까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운전하던 예린도 놀랐는지 차가 순간적으로 휘청했다.
"마리야! 이거! 아얏!"
"아아아아아아으아아아아! 아파! 아프다고예!"
"으아아아악!"
마리는 손을 결코 놓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다 뽑히는 게 빠를지 예린이 병원에 도착하는 게 빠를지 미치도록 궁금해졌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랄까. 병원에 도착했을 즈음하여 마리가 진정되었다. 내 머리도 그제야 놓았다. 아직 붙어 있는 머릿가죽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낳은 건가...?"
"하악....하악.... 흐으..... 그... 그런가 보네예."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내 내 머리털을 죄 뽑을 요량으로 난리를 피우던 마리도 기진맥진했지만, 거기에 시달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가발회사나 머리카락 심는 업체라도 알아봐야 할 지경이었다. 성한 사람 하나 없는 우리였다. 처참한 몰골을 하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부축하며 예전 그 산후조리원에 들어서 분만실로 향했다.
분만실 앞에 도착했더니 엄마가 있었다.
"어... 엄마."
"한석이 너! .... "
날 보고 눈을 크게 뜨며 비난하려던 엄마는 내 옆에 있는 아버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이미 둘 사이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때 문득 예전에 엄마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날 가지고 만삭이 다 되어 부산에 왔다던 엄마. 이제 생각해보니 엄마는 아마도 아버지를 보기 위해, 혹은 나를 보여주기 위해 아버지를 찾은 걸지도 모른다. 그게 잘 되지 않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내가 모르는 어떤 이야기, 아주 많은 이야기가 거기에 있을 터였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엄마에게 다가가 물어보았다.
"리사는 아직 안 나와요?"
"니는 엄니를 몇 년 만에 봐놓고도 리사부터 찾아? 이눔아!"
"아, 쫌. 안 죽고 살아있으니까 됐잖아요. 리사는 애 나왔대요?"
엄마는 나를 몇 번 두드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인가벼. 아까 지나간 간호사 말로는 또 있다던데...?"
"또...라니?"
나도 모르게 마리를 돌아보았다. 이제 조금 진정되어 숨을 고르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발작적으로 몸을 떨더니 정확히 내 머리카락을 다시 붙들었다.
으악! 지금 옆에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넌 어떻게 한 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내 머리채를 잡는 거니! 응?!
다시 시작된 마리의 발작은 꽤 오래갔다. 녀석에게 줄곧 시달린 나 역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잠시 후, 간호사 둘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녀들의 품에는 각각 한 명씩.... 채 눈도 뜨지 못한 핏덩이가 강보에 싸인 채로 안겨있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공주님들이에요. 축하드립니다."
아버지가 하나, 엄마가 하나 안아들었다. 만지면 부서지지 않을까 염려되어 나는 손도 댈 수 없었다. 난 산모의 상태를 물었다. 간호사 한 명이 날 분만실로 안내했다.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은 리사가 보였다. 이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워 보이는 그녀를 향해 난 달리기 시작했다.
"리사야!"
내 목소리를 들은 걸까.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녀가 날 바라보았다. 핏기 하나 없는 그 얼굴이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빙긋 웃는 그녀를 향해, 난 전력 질주했다. 온몸이 부셔져도, 세상이 무너져도 상관없었다. 그녀에겐 내가 있고, 나에겐 그녀가 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이렇게 마주했다. 잡은 두 손을, 다시는 놓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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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이 Route 3 엔딩이고, 몇 가지 후일담이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