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7 / 0471 ----------------------------------------------
Route 3
딱 잘라 부정했다. 지금 내심으로는 당신을 계속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진 않았다. 내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이건 내 진심이었다. 정말 미안하고 죄송할 따름이다. 자식으로서, 인간으로서.... 그러나 그는 날 탓하지 않았다.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했잖느냐. 그나저나 금동이라니. 벌써 이름을 지어놓은 게냐?"
"이름까지는 아니고... 그냥 부르는 태명이에요. 이름은 나중에 따로 지어야죠."
"금동이라.... 허허. 아들이냐?"
"몰라요. 아직. 저흰 초음파 같은 것도 한 번도 안 찍어봤으니까요."
"리사가 병원을 싫어해서?"
"그런 것도 있고... 여러 가지로 복잡하죠."
우리는 의료 보험이 없었다. 가짜 신분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본명은 병원에서 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돈 내고 받을 수 있는 양수 검사나 혈액 검사 같이 산모의 몸 상태를 확인하는 건 몇 가지 받았지만, 초음파 같은 건 받지 못했다. 의료 보험 없이 그건 너무 비쌌다. 따라서 우리는 금동이의 성별을 아직 알지 못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고 뭔가 기억에 떠오른 모양이었다. 먼 곳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들이면 요한이라고 짓고 딸이면 리사로 하자고 했지."
"요한? 리사?"
"그래. 리사 엄마 이야기다."
기분이 묘했다. 난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모 이야기인 동시에 장모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의 말은 이어졌다.
"그렇지만 나온 건 딸 쌍둥이였고 그녀는 두 아이를 채 안아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 그래서 난 성당도 안 다니는 주제에 미사 하고 있는 중간에 쳐들어가 신부님한테서 이름을 받아왔다. 그게 마리아, 그러니까 마리 이름이다."
"이모는, 아니, 리사 어머님은 가톨릭 신자셨나 보죠?"
그는 내 호칭 실수에도 빙그레 웃을 따름이었다.
"그랬지. 나중에 애들이 크면 성당에 보내겠다고 약속했는데 녀석들이 다른 일에 바빠 나가질 않더군. 한 녀석은 놀러 나가느라. 다른 한 녀석은 조직 일에 빠져드느라."
"부산에 돌아와 송 부장을 잡자고 한 것도 리사였습니다."
"그랬을 거야. 내가 이곳에 끌려오기 직전 예린이가 눈치껏 마리와 네 엄마를 피신시켰다. 내가 이곳에 끌려온 다음에도 난 어쩌면 리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 녀석이 조직 일에 손대는 건 그렇게 싫어했으면서도 막상 이렇게 되고나니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집 나간 그 녀석이더군."
"리사가 의지가 되긴 하죠."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그런 리사를 위해서라도 난 널 내보내겠다. 나중에 병구가 다시오면 협상을 할 테니 그때는 나서지 마라."
"안 돼요. 아버..... 당신을 두고 갈 수는 없어요."
말이 자꾸 헛나올라 한다. 침을 한번 삼키고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같이 가요."
"리사를 슬프게 할 셈이냐?"
"당신이 없어도 똑같이 슬퍼할 거예요. 어쩌면 더 슬퍼할지도 모르구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너 뿐이라면 확률은 있어. 그렇지만 나까지는 무리야."
"어떻게든 길이 있을 거예요."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도 인정한 리사라면 무엇이든 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 말은 내 입으로 꺼내기 좀 낯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손주 이름도 지어주셔야죠. 아...버지...."
내 말을 듣고도 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잠시 뒤, 그는 피식 웃었다. 뭐야, 남은 심각하게 말하고 있는데 웃어? 화를 낼 기력도 없어 그의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남자애면 요한이라고 하자. 그런데 여자애면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 나가서 말이야."
"진작 그렇게 나와야죠."
나도 마주 보고 씨익 웃었다. 그때였다.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아, 송 부장님, 아니 병구 아저씨에게 김리사가 고합니다."
확성기에 대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깥이었다. 게다가 저건 내가 아는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신사적으로 대해드렸는데 말이죠. 이거 너무 막 나가시니까 제가 못 참겠네요. 더는 신사적으로 못 대해드리겠고, 숙녀적으로 대해보도록 하죠."
억지로 몸을 일으켜 창 쪽으로 기어갔다. 한참을 헐떡이면서 벽을 짚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밖을 내다보았다. 송 부장쪽 인원들이 한데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쪽으로 나도 시선을 돌렸다.
반대편 공장 꼭대기에 어떤 실루엣이 보였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눈에 익었다. 높은 꼭대기 끝자락에 우뚝 선 이는, 치마를 휘날리며 확성기를 들고 있었다. 허리에는 손을 턱하니 얹고 있었다.
"송 부장님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에게는 딱 한 번 기회를 드리겠어요. 제가 없었으니 마음이 불안하셨으리란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 이유로 제가 돌아온 지금, 바로 지금이라도 이쪽으로 오신다면 여죄는 묻지 않아요. 저는 분명히 말합니다. 백당을 재건하고, 함께 살아갈 길을 모색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함께 가는 게 중요합니다."
송 부장 측에서 눈에 띄는 소요가 일어났다. 말단의 녀석들은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야야, 저기, 진짜 리사 아가씨가?"
"그런가 본데?"
"리사 아가씨가 돌아왔다면야...."
대오가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홀딱 넘어간 사람이 있는 만큼 의심하는 인간도 있었다.
"마리 세워놓고 뻥치는 거 아냐? 리사 아가씨가 떠난 지 몇 년째인데!"
"마리 아가씨 얼마 전에 유학간 거 몰라?"
"마리가 돌아오기 쉽겠냐, 리사 아가씨가 오기 쉽겠냐! 생각을 해 봐라! 이 문디 새끼야!"
그러나 정말 의외의 반격에 이런 갑론을박은 단숨에 종료되고 말았다.
"니 마리가 치마 입는 거 봤나? 저렇게 서울말이 청산유수드나! 저거 틀림없이 리사 아가씨 아이가."
조금 뜨악했다.
이들에게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난 이미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쌍둥이 두 사람이 사이좋게 치마를 입고 나와 함께 대학로로 놀러 갔던 그때. 하, 그게 벌써 몇 년 전이냐.
그런데 정말 더 대단한 건, 아주 어이없는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거기에 너무도 간단하게 모두 납득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치마를 입고 있으니 저건 틀림없이 리사다. 마리가 치마를 입을 리 없다. 마리와 리사를 너무 오래 가까이서 봐버린 이들은 스스로 세운 편견에 그렇게 갇혀버렸다.
그들이 저 실루엣을 틀림없는 리사라고 단정 짓는 이유도 이유거니와 마리의 취급이 참 안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사는 반드시 아가씨이고 마리는 그냥저냥 마리란 말이지. 저런저런....
웅성거리를 무리 사이에 송 부장이 나타났다. 그는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헛소리 집어 치워! 리사가 배때기 이만큼 불러서 꼼짝도 못 하고 있는 걸 내가 보고 왔는데 무슨 헛소리야! 너 마리지?"
달빛을 등지고 있는 그 실루엣은 과장된 동작으로 송 부장의 말을 웃어 넘겼다.
"호호호호. 아저씨. 절 그렇게 모르시겠어요? 당연히 아저씨 끌어들이려고 연극한 거죠."
옥상에 선 이는 무언가 휙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건 쿠션이었다.
"제 배에 넣고 있던 건데... 필요하면 가져가세요."
그걸 본 송 부장은 이를 갈았다.
"아쉽게도 제 연기력이 모자라서 아저씨는 못 잡았습니다만 지금도 그렇게 믿고 계신 걸로 봐서 여우주연상은 못 되어도 조연상 정도는 받을 수 있겠네요. 저, 앞으로 연기라도 할까봐요."
깔깔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내 등 뒤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병구 저 새끼. 리사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리라고 생각하느라 주저하고 있어. 저렇게 생각이 많은 게 저놈 단점이야. 그래서 내가 저 녀석을 크게 쓰지 못했어."
과연.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때 확성기에서 벼락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타임아웃! 전원 공격! 반항 하지 않는 분은 따로 잘 모시겠어요! 반항 하는 분은 거칠게 모시겠어요!"
선제공격이 시작되었다. 반대편 건물 그늘 쪽에서 수십 명의 인원이 튀어 나와 이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천지를 뒤흔드는 고함이 울려 퍼졌다.
송 부장 쪽의 숫자가 우리 편보다 두 배는 많았지만, 조금 전 가해진 정신 공격에 다들 정신 못 차리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송 부장이 뒤늦게 일갈하며 지시를 내려 보지만, 타이밍은 이미 뺏긴 후였다.
일찌감치 손을 들고 투항해 버리는 녀석이 속출하고 빠따를 손에 들고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가 단숨에 제압되는 게 태반이었다. 그나마 소수 인원이 송 부장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대난투가 내가 있는 창고 바로 앞에서 벌어졌다.
고함 소리와 욕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모르긴 몰라도 이 싸움은 길어지지 않을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창문에서 물러나 아버지가 있는 곳까지 기어갔다. 온몸의 근육이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끝내 아버지에게 도달했다. 뒤로 묶여 있는 걸 풀어내려 했지만, 어찌나 단단히 잘 묶어놨는지 손으로는 잘 풀리지 않았다. 손에 힘이 안 들어가는 탓도 있었다. 간신히 입을 갖다 대고 물어뜯어 가며 겨우겨우 풀어내었다.
아버지를 부축하여 일어나려는데 창고의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군가 나타났다. 옷이 너덜너덜해진 송 부장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칼에는 이미 피가 묻어있었다. 아버지가 날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계속 고문당했을 그였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는데도 날 감싸며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 넓은 등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콱 막힐 것 같았다.
아버지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병구야, 다 끝났다. 우리 일 어렵게 만들지 말자."
"형님. 난 안 끝났어요. 이게.... 이게 어떻게 이렇게 끝낼 수 있겠어!"
그가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버지는 잽싸게 몸을 숙이더니 조금 전까지 그가 앉아있던 철제의자를 집어 들고 아래에서 위로 후려쳤다. 저런 몸을 하고 저걸 한 손으로 집어 들어 휘두르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송 부장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보이지도 않는 각도로 몸을 비틀어 의자를 피해내고는 다리를 휘둘러 바닥을 쓸어왔다. 아버지는 뒤로 피하려 했지만, 이 못난 아들이 멍하니 서 있다가 그와 부딪히고 말았다. 난 비명을 지르며 꼴사납게 뒤로 나뒹구르고 말았다.
옆으로 쓰러진 아버지가 외쳤다.
"한석아!"
송 부장이 달려왔다. 그가 노린 사람은 아버지도 아니고, 바로 나였다. 그는 아버지를 밀쳐내더니 몸을 돌려 내 쪽을 향해 쇄도했다. 그의 손에 들린 날붙이의 빛이 공포스러웠다.
이제 그가 몇 발자국만 더 다가오면 내가 그대로 칼꽂이가 될 판국이었다. 칼에 찔리기까지 1초? 2초? 내 삶이 얼마나 남았을까,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피해야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번뜩이는 빛이 나를 마비시켰다. 그 순간, 아버지의 외침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병구! 멈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