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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다음 날, 마리가 부산으로 내려와 별장에 찾아왔다. 리사와 예린, 마리와 나, 이렇게 넷은 여러 곳을 구경하며 놀러 다녔다. 동백섬도 거닐고 태종대에서 조개구이도 먹었다. 해운대에서 해수욕도 즐기고 배를 타고 거제도로 넘어가 이곳저곳을 구경하기도 했다.
밤은 또 다른 즐거움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리사나 마리를 하나만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한 명이 흥분하면, 다른 한 명이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결국은 두 사람 모두 품어주게 되었다. 거칠고 격렬한 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이 곤히 잠들고 나면, 방을 나왔다. 그러면 거실에는 예린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긴 했지만, 대답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났다. 저녁 식사로 자갈치 시장에서 횟감을 사다가 근처 초장 집에서 회를 먹었다. 거의 다 먹어갈 때쯤, 리사가 옷을 사러 가자고 했다.
"무슨 옷?"
"그래도 명색이 첫 인사드리러 가는데 캐주얼은 좀 그렇잖아요?"
"첫 인사....?"
그제야 리사가 날 데리고 어디로 갈 건지 깨달았다.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막상 현실로 다가오고 나니 꽤나 떨리고 부담스러웠다.
식사를 마치고 국제시장 쪽으로 올라가 양복점 하나에 들어갔다. 주인이 예린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단골집인 모양이었다. 리사의 코디와 마리의 참견, 예린의 방치 플레이에 따라 내 복장은 꽤나 불편하고 갑갑한 정장으로 정해졌다.
리사는 내가 정장을 갖춘 모습을 전체적으로 쭉 훑어보더니, 자신의 취향에 맞지는 않지만, 되도록 보수적인 패션 시각에서 구성했다고 평했다.
"흐음. 이것 참...."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낯설었다. 어울리지 않게 정장에 넥타이까지 차려입고 나니 몹시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답답하다고 넥타이를 벗어 던지거나 단추를 풀 수는 없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그대로 예린이 운전하는 차를 올라탔다.
"알았죠? 절대로 밀리지 말고 당당하게 말하세요. 오빠는 잘하고 있으니까요."
옆자리에 앉은 리사가 거듭 당부한다. 여태껏 부산에서 놀기만 한 건 아니었다. 밤마다 그녀에게서 아버님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부적인 사항까지 집중적으로 전수받기는 했지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마리가 날 돌아보며 재잘거렸다.
"아빠가 오빠야 보기만 해도 딱 합격! 마, 이럴 낍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만 아무래도...."
옆자리에 앉은 리사가 내 손을 잡아주어 떨림이 좀 줄어들었다. 우리가 탄 차는 예린이 운전하는 대로 천천히 향해가고 있었다. 그녀들의 본가로 말이다.
부산 시내에서 한참 벗어나 거의 기장에 가까워지자 국도를 벗어나 좁은 도로를 달렸다. 한적한 마을이 나타났다. 바닷가에 자리한 그곳은 야트막한 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었지만, 어디 하나 헙수룩한 집이 없는 고급주택가였다. 예린이 차를 세우기에 내렸다.
내 앞에는 담장 좌우 길이만 해도 족히 30~40미터는 되어 보이는 대저택이 나타났다. 커다란 대문 양옆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주르륵 서 있었다. 예린의 패션이나 태호의 옷차림이나... 참 한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세에 압도되어 멍하니 서 있는데, 차에서 함께 내린 리사와 마리가 내 옆에 섰다.
"들어가요."
"응? 으응..."
리사가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하자 대문 앞에 서 있는 장정들이 좌우로 비켜섰다. 마리와 리사에게는 꾸벅 고개를 숙이는데, 날 보곤 의심의 눈초리를 날리고 있었다. 리사가 신신당부한 대로 절대로 쫄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따라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잔디와 포석이 깔린 넓은 마당이 있었다. 잘 가꾸어진 정원이었다. 넓은 정원 곳곳에 사람들이 모여 서 있었다. 개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섞여 있었다. 우람한 덩치를 가진 태호가 이쪽을 보며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태호가 지르는 우렁찬 목소리가 하나의 신호였다. 마당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이쪽을 향해 구십 도로 절을 했다.
으아아... 이런 게 진짜 있었구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폼 잡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모습이었는데, 저만한 덩치를 가진 남자들이 일제히 인사를 하는 건, 꽤나 위협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아니, 모든 이가 인사를 한 건 아니었다. 한쪽 구석에 있는 이들은 다른 젊은 사람들과는 달리 연배가 좀 있는 사람들이었다. 예전에 마리가 이사할 때 왔던 분들도 보였다. 그중에서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중년 남자가 있었다. 특이하게 한쪽 머리만 희끗희끗했다. 그는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오, 이게 누구야. 마리랑 리사구나. 서울 물이 좋긴 좋은가 본데? 얼굴 좋아졌네."
"아, 아저씨. 안녕하세여?"
까불거리며 밝게 인사하는 마리와는 달리 리사는 온건한 미소를 띠우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송 부장님."
송 부장이라 불린 남자는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뭘 그렇게 딱딱하게 불러. 그냥 아저씨라고 하지."
"아뇨. 사석에서라면 모를까, 애들도 있고 해서요."
"허허, 거참. 리사는 빈틈이 없어. 빈틈이. 허허허."
뭔가 평범한 대화 같으면서도 묘하게 가시가 돋쳐있었다. 예전의 나라면 결코 알아차리지 못했을 테지만 리사와 함께 보낸 시간이 적지 않은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리사는 지금 이 남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분명히 웃고 있지만, 마냥 웃는 얼굴이 아니란 걸 느꼈다. 남자는 리사와 몇 마디 나누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카로운 눈매가 내 몸 전체를 위아래로 훑는 건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쪽은 누구신가? 못 보던 얼굴인데?"
"아직 아버지께도 인사를 못 시킨 분이라서요. 나중에 말씀 드릴게요."
리사는 그에게 날 소개하지 않았다. 인사를 하려던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약간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든가. 허허. 암튼 형님 좋아하시겠네. 오랜만에 딸내미들 봐서."
송 부장과 리사는 그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날씨 이야기 같은 평범한 이야기였지만, 난 아까 받았던 느낌 때문에 결코 그 대화가 편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와 헤어지고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낮은 담장이 하나 더 있고 거기에 붙은 대문 같은 게 또 있었다. 문에 이르자 리사가 한 발짝 앞서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 집에 어서 오세요."
"응? 으응... 실례하겠습니다."
리사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에 지어진 건물은 정갈한 한옥이었지만, 무게와 위엄이 있어 보이는 집이었다. 마루를 가로지르고 좁은 복도를 지나고 나니 끝에 있는 방에 이를 수 있었다. 창호로 된 미닫이문 앞에 선 리사가 안쪽을 향해 말했다.
"저희 왔어요. 아버지."
무게감 있고 차분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들어온나."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리와 리사가 미닫이문을 양쪽으로 서더니 두 사람이 문을 열었다. 예린은 문 옆에 보초처럼 섰다. 나 혼자 들어가라는 사인인가 보다.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생각보다 그리 큰 방은 아니었다. 예닐곱 평 정도 되었을까. 한쪽 벽에는 뭔지 알아볼 수 없는 해서체 글씨가 가득 적힌 병풍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앞에 쉰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술상을 앞에 두고 앉아있었다.
방에 들어서며 꾸벅 인사했다. 눈을 마주쳤다. 부리부리한 눈매가 보통은 넘을 기세를 뿜고 있는 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어쩐지 낯이 익었다. 생각해보니, 그는 리사와 마리의 아버지이다. 익숙하다고 느낄 법도 했다.
그가 말했다.
"자네 이름이 최한석이라고?"
"예."
큰절을 올리려고 하는데 그가 손짓으로 마다했다.
"그냥 앉게. 번거로운 건 싫다네."
내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그는 잔을 건넸다.
"사실로 말하면,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네. 마리랑 리사에게서 하도 들어서 말일세. 심지어... 예린이도 자네 얘기를 할 정도더군."
그의 말에 담긴 뼈가 느껴졌다.
"그러셨습니까."
"일단 한 잔 받게."
"예."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작고 깊은 잔에 맑은 술이 가득 채워졌다. 고개를 돌려 잔을 비워냈다. 맛으로 보아 전통주 같았는데, 도수가 제법 있었다. 빈 잔을 상 위에 올려놓자 그는 자신도 잔을 비워냈다. 병을 들고 그의 술잔을 채우자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다가 물었다.
"난 빙빙 돌려 이야기하는 걸 딱 질색이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겠네. 우리 딸들과는 대체 어떤 사이지?"
올 것이 왔다. 그러나 리사의 조언도 있고 해서 나는 돌려 말하지 않기로 했다.
"깊은 사이입니다."
주저 없는 내 말을 들은 그는 이마가 갈매기 모양이 되었다. 잔뜩 주름진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그는 재차 물었다.
"그 말은... 육체적인 관계를 말한 건가?"
".........예."
아무리 돌려 말하지 않기로서니 이 정도로 다이렉트로 말해야 되나. 그러나 난 이미 뒤로 물러날 수 없었다.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리사와 마리.... 그리고 예린까지 전부와 말인가?"
"........예."
리사의 조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공산이 크다고 했다. 괜히 어설프게 감추려 들었다간 도리어 화를 입을 것이라고 했다. 리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정면으로 맞서는 거 이외에 어떤 방법도 남아있지 않았다. 세 여자와 한데 엉켜 보낸 쾌락의 시간들은 이만한 리스크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헛."
그는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처구니없어 하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꽤 큰 용기가 필요했다. 언뜻 본 그의 손은 솥뚜껑 같은 느낌이었다. 저걸로 사람을 후려쳤다가는 뼈도 안 남을 것 같다.
술잔을 두 번 비울 때까지도 그는 말이 없었다. 화를 삭이는 중일까. 알 수 없었다. 한참 만에 그는 입을 열었다.
"원래 딸 가진 아버지들은 말야... 자기 딸을 취한 남자를 적대하기 마련이지. 단 하나의 딸이라고 해도 말야. 세상천지 어떤 아버지든 간에 그 사람 앞에서 내가 니 딸이랑 잤다라고 말하는 놈이 있다면 단숨에 때려눕힐 테지. 그러나 자네는 지금 딸을 셋 가진 아버지 앞에서... 그 딸 모두와 관계를 맺었다고 말하고 있어. 응? 그렇다면.... 지금 내 기분은 어떠할 것 같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 없으면 안 되지. 뭐든 좋아. 아무 말이나 해보게."
"모든 비난은 제가 달게 받겠습니다. 부디 그녀들을 탓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헛."
그는 직접 병을 가져가 자신의 빈 잔을 채웠다. 그리고 곧바로 비워버리더니 다시 내게 물었다.
"자네, 돈이 많은가?"
"아니요."
"미래가 있는가?"
"....아직입니다."
"아직이라.... 허. 거참."
그는 연신 헛웃음을 토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자네에게서 뭘 보고 대체 우리 아이들이 홀딱 빠져들은 거지? 자네 무슨 요술이라도 부리는 건가?"
"그럴 리가요."
"차라리 요술이라고 한다면 그러려니 하겠네만.... 이거 원 황당해서...."
"......."
그가 병을 들고 자신의 잔과 내 잔을 채웠다. 그리고 마당 쪽을 내다보며 말했다.
"업보....이런 게 업보라고 하는 건가."
뜬금없는 단어가 나와서 좀 놀랐다. 업보? 불교에서 말하는 그 용어 말인가?
"네?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왜 자네를 탓하지 않는 줄 아나? 아니, 탓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하는 걸세. 왜냐하면 자네랑 똑같은 짓을 예전에 나도 저질렀으니까."
자신이 했던 잘못을 남이 했다고 탓하지 못하는 거라니.. 그렇다면 이 사람도? 여러 여자를 동시에 사귀기라도 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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