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83화 (383/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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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그래, 그 설마가 지금 진짜야."

입을 떡 벌리고 있는 태호는 그러면서도 믿지 않았다. 밖에서 들리는 소음은 한참 만에 정리되었다. 창고 문이 열리고 예린이 내 품에 뛰어 들어올 때까지도 태호는 반신반의한 표정이었다.

예린은 내가 입은 부상을 보고는 몹시 차분한 표정이 되어, 지극히 침착하게, 그러면서도 결코 온건하지 않은 말투로 지금 잡아 놓은 칠성 놈들 한 놈씩 묻어버리겠다고 했다. 깜짝 놀란 태호가 예린에게 매달렸다.

"에헤이! 누님! 끝났어요! 끝났다고요!"

예린은 그 덩치 커다란 태호를 매달고도 뚜벅뚜벅 걸어 창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내가 예린을 부르자, 그녀는 겨우 걸음을 돌렸다. 그제야 태호는 나와 예린 사이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코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일단 나를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예린에게 감사를 전했다.

"와줘서 고마워."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이 정도면 충분해."

아까 그 고생을 해가며 연락을 한 건 다름 아닌 예린이었다. 그녀 말고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제대로 된 정보를 제대로 전할 까 반신반의했지만, 그래도 예린은 확실히 알아들었고, 이렇게 와주었다.

그녀는 정말 착실하게 칠성을 박살내었다. 요란한 소리를 듣고 꽤 많이 몰려왔나 싶었는데, 예린을 포함해서 도합 네 명이 왔을 뿐이라고 했다. 몇 배는 됨직한 이들을 완전히 제압한 걸로 보아 예린을 포함한 그들의 전투력은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닌 모양이었다.

게다가 여긴 칠성의 본거지가 아니었다. 여러 곳에 나뉘어 있는 일종의 중간 기착지 중 하나였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 서울에 있던 거 아니었어?"

예린은 내가 없어지자마자 경남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도착하자마자 칠성 쪽에 혐의를 두고 그들의 주된 영역인 양산 쪽을 뒤지고 있었다고 했다. 물론 내 연락을 받고 장소를 특정 시키는 것이 결정적이긴 했다. 설명을 듣던 태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무는요? 거기는 완전 반대쪽인데..."

알코올이 묻은 솜으로 내 얼굴을 닦고 있던 예린이 대답했다.

"그쪽은 리사 아가씨 전화를 받고 당황했다. 근데 칠성은 딱 잡아뗐다고 하더군."

"과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태호와는 달리 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겠다. 아니,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조직간 이라는데도 전화를 한단 말이야? 게다가 잡아뗀 쪽을 의심하다니. 당황한 쪽이 거짓말하는 걸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이런 점을 묻자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가씨의 감이죠. 저희는 그걸 믿고 따를 뿐입니다."

"고작... 그게 이유야?"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리사의 감.'

전에도 들은 적 있었다. 무어라 딱히 설명할 수 없는 리사의 직관적인 판단. 나를 납치했을 거라 의심되는 두 조직 중에서 한 쪽을 완전히 배제하고, 칠성만 수색한 이유는 리사의 선택이었다는 뜻이다. 거기에는 어떤 증거나 입증 자료도 없었다.

허어... 이 조직 문제 많네. 고작 스무 살짜리 아가씨의 감에 사람들이 움직인단 말인가? 리사가 얼마나 대단한 아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상식으론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이미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직접 보았던 데다가 그걸 믿고 직접 움직이는 사람들을 눈앞에 두고 보고 있었다. 의문은 속으로 삼켰다.

일단 우리는 예린의 차에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처음에 태호는 차에 타지 않으려고 했으나 예린이 딱 한 마디 했다.

"타. 아가씨가 기다린다."

태호는 신속하게 차에 올라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양산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있는 어떤 산 중턱에 자리한 별장이었다. 통나무로 지어진 아담한 이층집이었다. 달빛에 드러난 주변 풍광과 아주 잘 어울렸다. 한밤중이고 가로등조차 없는 좁은 길을 지나는 건데도 예린의 운전은 거침이 없었다. 아마도 자주 왔던 곳인 모양이었다.

산장 앞에 차를 세운 예린이 나를 안내하며 말했다.

"리사 아가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기에 리사가?"

서울에 있을 거라 생각한 리사가 여기에 있다니! 안으로 들어가니 거실 한편에 그녀가 서 있었다. 겨우 하루 만에 만나는 건데도 굉장히 반가웠다. 오늘 하루가 아주 버라이어티 했기 때문이다. 벅찬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지만, 태호가 한 발자국 먼저 나아가 허리를 깍듯하게 굽혀 인사하는 바람에 멈칫하고 말았다.

태호가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리사는 내게 눈짓으로 간단하게 인사를 보내고 나서 태호의 인사를 먼저 받았다.

"오랜만이지만, 반갑기만 하지는 않네요."

전에도 몇 번 느꼈지만.... 리사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다. 주변 분위기를 한 번에 바꾸는 힘 말이다. 밝고 경쾌한 그녀의 목소리는 좌중을 웃게 하고 즐겁게 만들기도 했지만, 싸늘한 그녀의 목소리는 겨울여왕처럼 모든 걸 얼어붙게 만들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태호의 뒤에 있기에 녀석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등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완전히 굳어 있었다. 리사의 질책은 이어졌다.

"제가 그렇게 알아듣게 이야기했을 텐데 굳이 서울까지 올라온 이유가 뭐죠? 제가 만만한가요?"

"그...야, 아버님이...."

간신히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로 태호가 대답을 하자 리사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아버님! 그렇군요. 아버님이....."

리사는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묻잖아요. 제가 만만하냐고."

나한테 뭐라 그러는 게 아닌데도 굉장히 무섭다. 그러니 그 이야기를 직접 듣고 있는 당사자인 태호는 어떻겠는가. 부들부들 떨며 대답을 못 하고 있던 그는 거의 넘어지다시피 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이 녀석,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제 하나 알았다. 평소에 절에 다니는구나. 오체투지가 아주 제대로다.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태호는 딱 한 마디만 했다.

"죽여주십시오. 아가씨."

다음 순간, 리사가 품속에서 칼이라도 꺼내 드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고 그녀는 펜 하나를 꺼냈을 뿐이었다. 리사는 아까보다 한층 나아진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확실히, 태호 씨가 절 오랜만에 보긴 보는 모양이네요. 제가 싫어하는 말을 다하고...."

"죄....죄송합니다!"

태호는 아버님의 지시를 받아 서울에 올라오게 된 것과 나를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온 일을 이야기했다. 이 자식. 데려왔다니! 암튼 그러던 와중에 부산에 거의 다 와서 칠성의 습격을 받았고 여태 억류되어 있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거기에는 내가 한 일이 일부 담겨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리사는 차분하게 말했다.

"부산 상황, 제가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안 내려간 것도 아니고... 여기도 사정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을 텐데, 그걸 중간에서 제대로 전달 못하고 우왕좌왕 했던 건 불문에 붙이겠어요. 일정대로 움직이지 않은 제 탓도 있으니까요. 어차피 방학 되면 여기 내려오려고 했었는데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태호 씨가 일단 여기까지 오빠 모시고 온 거잖아요? 이 이야기는 한석 오빠 봐서 그냥 넘어가겠어요."

대체 무슨 이야기인 줄 잘 모르겠지만, 태호는 크게 만족한 모양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외쳤다.

"감사합니다."

노끈으로 팔다리를 묶고 테이프로 입에 재갈을 물려서 납치를 한 게 모시고 온 거라니. 이 점에 대해서 지적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태호의 앞날이 어찌 될지 몰라 나도 불문에 붙이기로 했다. 분위기가 좋아졌나 싶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리사는 말했다.

"근데 칠성이랑 하지 않아도 될 뻘짓 하신 거나 우리 오빠를 피투성이로 만들게 된 일은 차후에 차차 이야기해보는 게 좋겠군요. 지금 이야기해 봤자 제 입만 아플 테니까요."

"아...아가씨."

"일단 아버지에게 가세요. 전 여기서 마리 기다렸다가 휴가 즐기면서 천천히 갈 테니까요. 오늘 내일 하는 분도 아니고 정정한 분이 딸 며칠 못 봤다고 너무 안달내지 마시라고 전하세요."

리사는 메모지에 뭔가를 적어 태호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태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밖으로 나갔다. 예린이 그 뒤를 따라 나가고 이제 리사와 나만 남게 되었다.

"괜찮으세요?"

그제야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리사가 얼굴 가득히 걱정을 담고 내게 다가왔다. 얼굴에 붙은 핏자국이나 상처는 대충 닦아둔 상태였지만, 너덜너덜한 옷이나 폭탄 맞은 머리 꼴은 어찌할 시간이 없었다. 그지 꼴에 가까웠다. 내 몸을 어루만지며 속상해 하는 리사를 달래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겉보기보단 멀쩡해. 내가 체력은 좋잖아."

"정말 죄송해요.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아니, 뭐...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했었달까...."

사실은 납치와 감금, 폭행보다도 더 무서운 건 따로 있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려나. 그러나 나는 애써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공포의 대왕, 아, 아니, 날 돌보는 성녀 엘리사벳이 내 옷을 벗기는 것을 가만히 도왔다. 리사는 물을 받아놓았다며 내게 목욕을 권했다.

목욕, 좋지. 리사를 돌아보며 살짝 물어보았다.

"같이 하는 거지?"

리사는 대답 대신 살짝 웃었다. 그 얼굴만으로 이미 난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근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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