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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그래도 외출 준비는 해야 했다.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하다가 예전에 유진이네서 받아온 정장을 입어봤다. 그나마 이게 제일 낫다. 캐주얼한 느낌의 단색 남방을 안에 입고 타이를 매지 않으니 그렇게 딱딱한 느낌도 아니었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예린이 모는 검정색 승용차가 빌라 앞에 있었다. 차에 관심이 없어 잘 모르지만, 상당히 고급차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이 빌라보다도 비싼 차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예린은 트렁크를 열어 먼지떨이를 꺼내더니 차를 닦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꽤 흘렀다. 빌라 쪽을 한번 돌아보고 예린에게 물었다.
"리사 씨랑 마리는 아직 인가 보죠?"
"........여성들의 준비시간은 원래 깁니다."
예린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린 씨는요? 예린 씨도 여자잖아요."
".......저는 일상복이랑 외출복이 차이가 없으니까요."
"아아..."
그녀는 대답이 항상 늦었다. 뜸을 들인다라고나 할까, 아니면 자신이 할 말을 천천히 골라서 펼쳐 보인다고나 할까. 그래도 대답은 충실히 해준다는 게 퍽 고마웠다.
"예린 씨는 평상시에도 그렇게 선글라스랑 정장 차림이에요? 항상?"
".......가능하면요."
"안 불편하세요?"
"......십 년 이상 이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익숙합니다."
십 년이라.... 그럼 대체 몇 살 때부터 이렇게 살아왔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예린이는 대체 몇 살이지? 스무 살인 마리나 리사가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는 걸 봐서 그들보다는 위인 건 알겠는데 나랑 비슷한 연배려나? 궁금한 건 못 참는 터라 대놓고 물어보았다.
"실례지만 예린 씨 나이가....?"
"......한석 씨보다 많지는 않습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스물한 살에서 스물두 살 정도라는 말이네.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으니 나이를 통 짐작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야 대충 알겠다. 왠지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럼 제가 오빠네요?"
"......"
"하하하....?"
"......"
급격히 뻘쭘해졌다. 아니, 상대가 말을 하면 무슨 대답이라도 하란 말이야. 반응을 보이라고. 이 인간아! 그렇게 장승처럼 멀뚱멀뚱 서서 쳐다보고 있지 말고. 내가 딱히 오빠 소리를 듣고 싶어서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지만, 말을 하다 보니 그런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 아무 대답 없는 예린의 반응까지 겹쳐지고 나니 내가 방금 한 소리는 희대의 헛소리가 됐다.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돌렸다. 예린은 멈추었던 청소를 다시 시작했고 나는 괜스레 빌라 쪽을 보면서 얘들이 왜 이렇게 안 나오나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 외에는 딱히 할 일도 없던 터라 아까처럼 다시 또 예린을 보았다.
빌라 입구에 기대어 서서 예린의 동작을 보고 있노라니 참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들이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한다거나 그렇다고 느릿느릿하게 하는 것도 아닌 절제된 동작에 절제된 각도로만 움직였다. 저쯤에서 차를 닦는 걸 멈추겠다 싶은 시점에서 딱 멈추더니 유리세정제와 걸레를 꺼내 들었다. 차문을 모두 닫고 유리를 닦아 나가기 시작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꽤나 절도 있었다. 뒤로 한데 모아 묶은 머리카락마저 절도가 있을 정도다.
"한석 씨."
"........네?"
그녀의 움직임을 넋 놓고 보고 있느라 대답 타이밍이 좀 늦었다. 예린이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얼굴이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는 거지 그렇다고 그녀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지 어떤지는 저 새까만 안경 덕분에 전혀 알 수 없다.
"그렇게 빤히 보고 계시니 좀 그렇습니다만..."
"아, 예. 죄송해요. 움직임이 좋아서요."
".......그렇습니까?"
내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웠나? 딱히 음흉한 생각이나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보고 있던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움직임이 보기 좋아서 그랬던 것뿐인데.... 예린은 청소도구를 트렁크에 갈무리했다. 차 옆에 기대어 서 있기에 전에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로 했다.
"지난번에 예린 씨가 주신 명함 보니까 부장님이시던데요? 젊은 나이에 대단하시네요."
"......저희는 실력으로 서열을 매기니까요."
"실력이요?"
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사무처리 능력이나 영업 능력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역시 예전에 리사와 마리 이사하는 걸 보았을 때 들었던 생각이 맞는 걸까. 예린에게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저기... 이런 거 물어도 되려나 모르겠습니다만.... 마리네 집은 어떤 일을 하시는지 혹시 여쭈어봐도...."
예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말을 해놓고 나니 괜히 물었나 싶다. 그러다 잠시 후 예린은 고개를 살짝 기웃거리더니 내게 다가왔다. 안 그래도 나보다 조금 작은 정도로 키가 큰 그녀가 내 곁에 서니 더 위압적이다. 그녀는 한 손을 내 귓가에 대고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요량으로 조용조용히 말했다.
".......각종 사소한 분쟁을 해결해드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소한 분쟁이라.... 그 사소하다는 기준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쉽게 말해 해결사라는 소리잖아. 그런 걸 세간에서는 뭐라고 부르더라...
그나저나 말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귓속말이라니. 이렇게 자극적인 짓을 아침부터 해주시다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부탁드리..... 암튼 내 귓가에서 가만히 얼굴을 떼어내는 예린을 쳐다봤다. 얼굴 간의 거리가 불과 수십여 센티도 되지 않았다. 괜히 긴장됐다. 어쩐지 좋은 냄새가 훅 하고 풍겨왔다.
원래 남녀 사이에 이렇게 얼굴을 바짝 마주하고 있으면 묘한 기류가 형성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어쩐지 예린과 내 사이에는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흘렀다. 설렘보다는 긴장감에 더 가까웠다.
"그....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예린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처음이다. 피부가 무척이나 하얗다. 까무잡잡한 마리와 대조적으로 리사도 하얀 편이긴 하지만 리사는 맑다고나 할까. 투명한 피부 톤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그런 쪽인데 예린의 피부는 다소 창백하다고 할 정도다. 혈액순환이 안 좋은 걸까?
"문 앞에서 뭐 하세요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리사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비켜섰다. 예린은 어느 샌가 물러나 입구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돌아보니 짙은 회색의 플레어스커트에 옅은 자주 빛의 블라우스를 걸친 리사가 방긋 웃으며 서 있었다.
"아, 예린 씨랑 잠깐 얘기 좀...."
내가 조금 당황한 듯 이야기하자 리사는 놀라는 표정을 과도하게 지으며 말했다. 저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 확실히 알아버렸다.
"어머나. 이젠 예린 언니까지? 정말 한석 씨는 대단하세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나를 골려 먹는 거에 취미를 붙이신 겁니까. 리사 씨. 그녀에게 무어라 반박을 더 하려는데 마리가 집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녀석은 꽤나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기 뭐꼬. 쓸데없이 치렁치렁 해가가...."
마리를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은 몸에 착 붙는 라이더 슈트 차림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거의 예외 없이 트레이닝복 아니면 청바지에 면티셔츠 차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마치 리사처럼 차려입고 있었다. 마리가 리사처럼, 이라는 말은 상당히 여성스럽게 차려 입었다는 말과 이음동의어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잘 어울리게도 검은색 블라우스에 평소라면 결코 입지 않을 나풀거리는 스커트까지 말이다. 순간적으로 마리가 아니라 리사인 줄 알았다,
물론 차려 입은 것과는 별개로 전혀 조신하지 않게 궁시렁거리며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오고 있고 입으로는 걸걸한 사투리를 쏟아놓고 있었지만, 겉모습만 놓고 보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아름다운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그런 마리를 가만히 보고 있던 리사가 나를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너도 이젠 선머스마가 아니라 여자가 된 거라고. 안 그래요, 한석 씨?"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저한테 말하는 거냐구요. 리사는 그렇게 말해놓고 딱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나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 차에 올라탔다. 마리가 내 곁으로 오더니 내게 물었다.
"언니야가 대체 머라카는교?"
뒤통수를 빌라 유리문에 콩콩 들이받으면서 내가 신음을 흘렸다.
"내가 묻고 싶다. 인마."
일련의 소동을 마치고 예린과 나, 리사와 마리가 올라탄 차는 남산을 향해 출발했다. 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서울 구경이라고 하면 꼭 남산타워를 찾았다. 나도 서울에 처음 왔을 때, 그랬던 기억이 났다.
남산에서 이런저런 구경과 식사를 마치고 내려와 대학로에 들려 연극 한 편을 관람했다. 수녀님들이 나와 춤과 노래, 개그를 펼치는 공연이었는데 리사와 마리는 아주 박장대소를 하며 즐거워했다. 나 역시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예린을 돌아보았는데.... 그녀는 늘 그렇듯이 무표정하게 앉아있었다. 배우들에게 왠지 내가 다 미안하다. 게다가 이 어두운 곳에서도 선글라스라니... 그녀는 대체 언제 선글라스를 벗는 걸까. 자거나 씻을 때도 안 벗는 게 아닐까 모르겠다.
관람을 마치고 나와 마로니에 공원을 거닐면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눴다. 주로 리사와 마리가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하는 편이었고 뒤에서는 나와 예린이 따라가고 있었다. 예린에게 가끔씩 뭔가 물어보거나 말을 걸어보았지만, 짤막한 답변만 돌아올 따름이었다. 이것도 대화라면 대화인데... 뭔가 이상했다.
앞서 가던 리사가 공원 한쪽에 있는 아이스크림 판매차량을 발견했다.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까요?"
그녀의 제안에 따라 다 같이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먹게 되었다. 공원 한쪽에 있는 농구코트에서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애들이 꽤나 시끄럽게 농구를 하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갈 때쯤 농구공이 우리 쪽으로 굴러왔다. 데구르르 구른 공은 예린의 발 앞에 와 닿는다.
학생들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공 좀 던져주세요!"
짜슥들이. 그렇게 멀지도 않건만 와서 가져가야지. 내가 속으로 불평을 하고 있는 사이에 예린은 허리를 굽혀 공을 집어 들었다. 공을 들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대로 슈팅 자세를 취하더니.... 어라라? 그대로 던졌다? 들어갔다?
예린이 던진 공은 정말 깨끗하고 말끔하게 링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물에 걸리는 착 소리마저 일품이었다. 고등학생 녀석들이 환호를 지르며 예린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와아아아!"
이런 엄청난 슛을 성공시키고도 예린은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경기장에서 5미터 가량 더 떨어진 곳인데도 말이다. 은근히 승부사 기질이 발동했다. 슬램덩크를 보면서 농구를 시작한 이래 이토록 격렬한 승부욕을 느껴본 적이 없다. 굳이 표현하자면 마지막 승부에서 손지창이 장동건에게 느꼈던 감정이랑 비슷하다고나 할까. 예린에게 다가가 물어보았다.
"어때요, 예린 씨. 한 게임 뛰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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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조아라가 이상해서 365편이 제대로 안 올라갔기에 다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