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63화 (363/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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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3

써야 할 레포트가 있었지만, 손에 잡히질 않았다. 침대에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며 시간을 죽였다. 이제 과외를 그만두었으니 알바를 다시 구해야 하나 아님 용돈을 더 보내 달라고 해야 할까도 고민했다. 혼자 사느라 늘 고생인 엄마에게 손 벌리고 싶지 않았다. 좀 있으면 방학이 시작하는데, 노가다라도 나갈까 싶었다. 대학생으로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여름방학이라, 어디 여행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팔자가 좋진 않다.

한참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요~ 선배님예. 안에 있어예?"

마리였다. 문을 열어보니 머쓱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아까 앞집에는 아무도 없던 것 같던데 이제 들어온 건가?

"무슨 일이야?"

"열쇠를 두고가가... 언니야에게 전화했드니 들어올라면 한참이라네예. 선배 집에 쪼매만 있으면 안 되예?"

하아. 이 녀석은 어쩜 이리도 타이밍이 최고일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돼."

"엣? 에에...."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당연히 허락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마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꽤나 볼만했다. 이 녀석은 확실히 놀리는 맛이 있다. 같은 얼굴인데도 리사는 놀릴 엄두조차 나지 않는데 말이다. 쌍둥이는 참 신기하다.

"나 지금 나가서 술 한 잔 하려고 했거든."

"술? 혼자서여?"

"응. 혼자 마실까 했었는데... 너도 같이 나갈래?"

그러자 마리가 히죽 웃으면서 답했다.

"좋져!"

"모르긴 몰라도 내가 사주는 마지막 술이 될지도...."

"와예? 이제 술 끊으실 랍니까?"

"그런 건 아닌데.... 돈 버는 게 없어지니까 이제 근검절약 해야지."

처음에는 술집을 갈까 생각도 해보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비싸다. 단골 치킨 집에 가서 집으로 배달 하나를 시켜놓고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가서 소주와 맥주를 샀다. 마리가 쭐래쭐래 따라와 과자 몇 개를 계산대에 스윽 올려놓았다. 집으로 돌아와 상을 펴고 일단 술을 따랐다.

30대 70의 소맥 정량 비율이 황금 비율. 제어공학 전공자의 명예를 걸고 엄격하게 비율을 조정했다. 눈대중으로 잔에 차오르는 술을 보며 맞추었다는 소리다. 마리는 왜 술을 마시냐고 물었고, 난 이제 과외를 그만두었다고 대답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몬 바람이 불어가 혼자 술 드시나 했는디... 과외 짤렸심까?"

"잘리다니... 내가 그만 둔거야."

사실 잘린 게 맞긴 하지만.

"와예? 유진이가 말 안 듣나보네예?"

새우깡 봉지를 뜯던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았다. 새우깡 하나를 집어 들어 우적우적 씹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말을 너무 잘 들어서 탈이랄까...."

과유불급. 차라리 유진이가 남자애였거나 날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냥 무난하게 계속 과외를 했을 텐데 말이다. 못 가르쳐서 잘리거나 가르치는 녀석의 성적이 영 안 나와서 짤리는 거면 차라리 받아들이기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날 너무 좋아해서, 나한테 너무 빠질까봐 과외를 그만두었다고 대답하는 건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말로 꺼낼 수 없었다. 나란 놈은, 자의식 과잉일까. 설마 그 아이가 날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가 새삼 의심이 들었지만, 이제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듣고 있던 마리는 이해가 안 간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자 봉지를 넓게 뜯어 상위에 펼쳐놓고 자기도 하나 집어먹으며 말했다.

"아가 억수로 귀엽게 생긋는데.... 선배님 쪼까 아깝겠심니더."

"아깝다니. 뭔 소리냐."

"거 왜, 있잖심니까. 어린 아 잘 키워가 나중에 델꼬 가는 거."

"푸핫. 애를 상대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마셔, 인마."

마리는 역시 남이 하는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 일단 녀석과 잔을 부딪쳤다. 첫 잔은 원 샷. 저녁도 안 먹고 마시는 술이건만 잘만 넘어갔다. 잔을 비우고 캬- 하는 소리를 내뱉은 다음 아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참.... 아까 학관에 가봤는데 없더라? 조원될 사람들 만난다며?"

"아, 맞나긴 했는데예. 학관이 원체 시끄러버가 공대에 빈 강의실로 옮겨가가 했심니더. 조 이름이랑 주제 같은 거 대충 마 잡았는데..."

"그랬구나. 뭐, 알아서 하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뭐. 내가 맡을 부분만 확실히 알려줘."

"그럴까예? 근데 갸들이 기숙사생인데예...."

분명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을 텐데 뭔 그리 이야기를 많이 주고받았는지, 마리가 하나씩 꺼내놓는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었다. 걔네들이랑 저녁까지 먹고 돌아오느라 지금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아직 만나지도 않은 남은 조원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 외모와 말투, 안경테 색깔까지 말이다.

수다왕 마리가 늘어놓는 이야기가 한창 이어지는 와중에 치킨이 도착했다. 저녁 대신 그걸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마리도 다리 하나를 집어서 열심히 뜯다가 뭔가 생각난 모양이다. 간신히 치킨으로 막아놓았던 입이 다시 열렸다.

"아참, 지 나올 때예. 그 선배도 만났는데예."

"그 선배? 누구?"

"거 왜. 있잖심니꺼. 접때 학관에서 선배랑 밥 먹다가 만나가... 선배가 자리 차뿌리고 일어났던 날...."

학관에서? 마리랑 학관에서 본 선배?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인물에 대해 떠오르자 손에 들고 있는 치킨 맛이 뚝 떨어질 정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마렉...아, 아니. 재윤 선배 말이야?"

"야."

"어디서?"

"저희가 밥을 후문에 있는 분식집에서 먹고 나왔는데예 애들이랑 후문에서 빠빠이 하는데 거서 봤심니더."

"후우.... 안 그래도 오늘 그 선배랑 나랑 한바탕 했었는데...."

궁금해 하는 마리에게 오늘 수업에서 있었던 일을 짧게 요약해서 들려줬다. 마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선배님은.... 어쩐지 뭔가 좀 분위기가 안 좋던데예."

"선배도 아냐! 그런 자식은..... 휴우."

전에 없이 격한 반응을 보이는 날 보며 마리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분이랑 한석 선배야랑은 왜케 사이가 안 좋심니꺼?"

어쩔까 싶다가 기분도 꿀꿀하겠다, 뇌에 알코올 코팅 좀 했겠다.... 내친김에 3년 전에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마리에게 들려줬다. 나와 같은 학번인 녀석들이 마레기를 증오하게 된 계기를 듣고 있던 마리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다가 마지막 대자보 이야기까지 나오고 나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리는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세상에나..... 금마 엄청 쥑일 놈이네예! 아니, 어떻게 그런 놈이 학교에 계속 나옵니꺼!"

"내 말이....."

"학교에서 안 짤려요?"

"짤리기는 개뿔. 경고 하나 받은 거 없는데..."

비어있는 마리의 잔을 채워주자 녀석은 단번에 들이켰다. 목이 바싹바싹 타는 모양이다. 하긴 나도 그런데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녀석은 또 어쩌겠는가.

"점마, 그러고도 안 잽혀갑니꺼?"

"친고죄라서 당사자가 신고 안 하면 안 된대. 학교 입장에서는 신고도 뭐도 없으니까 징계 못 한다고 손 떼고."

친고죄가 뭔지 못 알아듣는 마리에게 몹시 아름답고 훌륭한 우리나라의 미풍양속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친고죄는 말이야.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으면 피해자만 가해자를 고소할 수 있다는 이야기야."

"세상에. 그 나쁜넘이 한 짓은 다 알고 있는 데도요?"

"그러니까 좆같다는 거지."

"....선배도 그런 나쁜 말 쓰시네예."

"안 쓰는 줄 알았어?"

마리는 채은이가 그런 식으로 대자보만 붙이고 가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마레기를 고소했었어야 한다는 거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그때의 동기들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주장을 하는 녀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강요할 수만은 없어. 못 들었봤니? 우리나라에서는 여자가 그렇게 되면 신세 망친다고 하잖아."

"신세를 망쳐여? 와예?"

"그래. 신세. 그런 이야기가 길어지고 공론화 되면 가장 상처받는 사람은 누구일 꺼 같아?"

"그야 당연히 재윤 선배 아닙니꺼? 잘못한 사람이잖아예."

고개를 저었다. 역시 마리는 철이 없다.

"틀렸어. 가장 고통 받는 사람은 당사자인 채은이야. 예전에 S대에서 있었던 우 조교 사건 몰라? 그게 신문까지 나오고 뉴스에 나오니까 사람들이 누굴 욕 했는지 알아?"

"모르는데예. 지는 부산에 있었는데 서울 일을 우째 압니까?"

".....인마. 넌 신문도 안 보고 사냐."

답답하지만, 사실 마리가 한 말이 맞는 말이다. 잘못을 저지른 놈이 가장 고통 받아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반대로 돌아간다. 틀린 건 이 세상이다.

마리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스치지도 않았건만 마리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아프다며 엄살을 피웠다. 그러더니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움마야. 하아....  그럼 아까 지헌티 한 소리도 결코 좋은 소리가 아니였갑네예."

"너한테? 뭐라 그랬는데?"

눈을 부릅뜨고 마리를 노려봤다. 내 기세에 놀란 마리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내보고 한석이 깔이라고 한석이한테만 주지 말고 지한티도 한 번 주라고..... 저는 첨에 뭔 소린가 싶어가 뭐 선물이나 밥 사주는 이야긴갑다 하고 알긋다고 했는디....."

"뭐야?!"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가 갑작스럽게 핑 도는 머리 때문에 다시 주저앉았다. 술에 강하기는 하지만 급히 먹는 술에는 이렇게 핑 돌 때가 있다. 속에서 열불이 났다. 마리는 자기가 죄를 지은 것처럼 미안해했다.

"참말 그런 소리인지 몰랐는데예.... 분위기가 좀 이상타 하긴 하지만 제 깐에는 선배라고 그냥 인사하고 지나 온긴데 그런 소릴 해가가..."

나는 침대를 등에 기대고 앉아 고개를 젖혀 천장을 향하고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아아, 마리야. 내가 말했잖아. 그 선배랑은 될 수 있으면 엮이지 말라고."

"야."

"앞으로는 조심해. 인사도 하지 말고, 무슨 말을 걸어도 그냥 무시해."

"네....."

마레기의 행태에 분노한 내가 화를 내고 마리는 그런 내 눈치를 보느라 둘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분위기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화만 내기 좀 그래서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너한테 화내는 게 아니야. 그냥.... 휴우. 아까도 들었지만, 그런 선배가 근처에 있다는 게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야."

"그런 짓을 하고도 제대로 처벌 받지 않은 놈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 내가 이런 짓을 또 해도 되겠구나. 그래도 되는 구나, 그렇게 생각한다고."

"...."

마리는 주눅 들은 표정이 되었다. 손을 들어 녀석의 머리를 한 번 흩트려놓았다. 마리가 후엥- 하면서 자기 머리를 감싸고 날 올려다보았다. 왠지 강아지 혼내는 기분이다.

"너한테 뭐라 그러는 거 아니라니까. 자, 한 잔 더해."

괜히 이야기했다고 생각했다. 결코 여자애한테 들려줄 이야기가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경고를 해놔야 마리도 마레기를 경계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마레기가 마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앞으로 마리를 될 수 있으면 혼자 다니게 하지 말아야겠다.

술이 거의 떨어져 갈 때쯤, 졸음이 밀려왔다. 술에 취할 정도로 마신 건 아닌데 어제도 꽤나 마신 데다가 무엇보다 정신이 피곤했다. 침대에 기댄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노라니 마리가 올라가서 자라고 권했다. 마리에게 상은 내가 나중에 치울 테니 냅두고 돌아가라고 말했다. 침대로 비척비척 기어 올라갔다. 마리가 불을 끄고 밖으로 나갔다. 안녕히 주무시라고 하기에 너도, 라고 답해주고 꿈나라로 향했다.

몸에 열이 오르는 통에 옷을 벗어 던졌다.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잠결에 문소리가 나고 뭔 소리가 더 나는 것 같았는데 확인하기 귀찮았다.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유진이가 알몸인 채로 울고 있었다. 다가가 안아주려고 하였으나 왠지 몸이 무거워 녀석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녀석의 슬픔이 내게 전달되는 것 같다. 꿈속에서, 난 좀 울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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